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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운

정현종

내가 기운 없어 보일 때는
기운이 없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
기운을 내지 않는 거라고
나는 옆에 있는 사람한테 말했다.
(아닌 게 아니라
낼 필요가 있을 때는
무슨 기운이든 기운을 냈다)
듣는 사람은 의아해했으나
정령들은 고개를 끄덕였고
호랑이들도 만족스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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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익은 사과

 

 김혜순


백 마리 여치가 한꺼번에 우는 소리
내 자전거 바퀴가 치르르치르르 도는 소리
보랏빛 가을 찬바람이 정미소에 실려온 나락들처럼
바퀴살 아래에서 자꾸만 빻아지는 소리
처녀 엄마의 눈물만 받아먹구 살다가
유모차에 실려 먼 나라로 입양 가는
아가의 뺨보다 더 차가운 한 송이 구름이
하늘에서 내려와 내 손등을 덮어주고 가네요
그 작은 구름에게선 천 년 동안 아직도
아가인 그 사람의 냄새가 나네요
내 자전거 바퀴는 골목의 모퉁이를 만날 때마다
둥글게 둥글게 길을 깎아내고 있어요
그럴 때마다 나 돌아온 고향 마을만큼
큰 사과가 소리없이 깎이고 있네요
구멍가게 노망든 할머니가 평상에 앉아
그렇게 큰 사과를 숟가락으로 파내서
잇몸으로 오물오물 잘도 잡수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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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밤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달이 떠도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이어
오오 봄이여

한없이 풀어지는 피곤한 마음에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너의 꿈이 달의 행로와 비슷한 회전을 하더라도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기척소리가 과연 슬프다 하더라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서둘지 말라 나의 빛이여
오오 인생이여

재앙과 불행과 격투와 청춘과 천만인의 생활과
그러한 모든 것이 보이는 밤
눈을 뜨지 않는 땅속의 벌레같이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은 서둘지 말라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절제여
나의 귀여운 아들이여
오오 나의 영감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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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번 추위만 끝나면

이 찌무룩한 털스웨터를 벗어던져야지

쾨쾨한 담요도 내다 빨고

털이불도 걷어치워야지.

펄렁펄렁 소리를 내며

머리를 멍하게 하고 눈을 짓무르게 하는 난로야

너도 끝장이다! 창고 속에 던져넣어야지.

(내일 당장 빙하기가 온다 해도)

 

요번 추위만 끝나면

창문을 떼어놓고 살 테다.

햇빛과 함께 말벌이

윙윙거리며 날아들 테지

형광등 위의 먼지를 킁킁거리며

집터를 감정할 테지.

 

나는 발돋움을 해서

신문지를 말아쥐고 휘저을 것이다.

방으로 날아드는 벌은

아는 이의 영혼이라지만.

(정말일까?)

 

아, 이 어이없는, 지긋지긋한

머리를 세게 하는, 숨이 막히는

가슴이 쩍쩍 갈라지게 하는

이 추위만 끝나면

퍼머 골마다 지끈거리는

뒤엉킨 머리칼을 쳐내야지.

나는 무거운 구두를 벗고

꽃나무 아래를 온종일 걸을 테다.

먹다 남긴 사과의 시든 향기를 맡으러

방안에 봄바람이 들거나 말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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