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추의 마음

 

                                                  나희덕

  

배추에게도 마음이 있나보다
씨앗 뿌리고 농약 없이 키우려니
하도 자라지 않아
가을이 되어도 헛일일 것 같더니
여름내 밭둑 지나며 잊지 않았던 말
- 나는 너희로 하여 기쁠 것 같아
- 잘 자라 기쁠 것 같아


늦가을 배추포기 묶어주며 보니
그래도 튼실하게 자라 속이 꽤 찼다
- 혹시 배추벌레 한 마리
이 속에 갇혀 나오지 못하면 어떡하지?
꼭 동여매지도 못하는 사람 마음이나
배추벌레에게 반 넘어 먹히고도
속은 점점 순결한 잎으로 차오르는
배추의 마음이 뭐가 다를까
배추 풀물이 사람 소매에도 들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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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스런 추억

                                                                   윤 동 주

봄이 오던 아침.

서울 어느 쪼그만 정거장에서 희망가 사랑처럼 기차를 기다려.

 

나는 플랫폼에 간신한 그림자를 떨어뜨리고,

담배를 피웠다.

 

내 그림자는 담배연기 그림자를 날리고,

비둘기 한 떼가 부끄러울 것도 없이

나래 속을 속, 속, 햇빛에 비춰 날았다.

 

기차는 아무 새로운 소식도 없이

나를 멀리 실어다 주어,

 

봄은 다 가고-

동경 교외 어느 조용한 하숙방에서,

옛거리에 남은 나를 희망과 사랑처럼 그리워한다.

 

오늘도 기차는 몇 번이나 무의미하게 지나가고,

 

오늘도 나는 누구를 기다려

정거장 가차운 언덕에서 서성거릴 게다.

 

-아아 젊음은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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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복잡해질때 윤동주의 시비를 찾는다는 아직 소녀같은 내 친구를 만나고 돌아오는 어느 날이 기억난다. 우연히 본 이 시... 아무 느낌이 없다가 마지막에

아아 젊음은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는 말에 한참 서성이는 내 자신을 본다.

그래, 젊음아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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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6-06-18 0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시 담아가요.. 감사~
 

다시 봄이 왔다

                                      이성복

 

 



비탈진 공터 언덕 위 푸른 풀이 덮이고 그 아래 웅덩이 옆 미루나무 세 그루 갈라진

밑동에도 푸른 싹이 돋았다

때로 늙은 나무도 젊고 싶은 가보다 기다리던 것이 오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누가 누구를 사랑하고 누가 누구의 목을 껴안 듯이 비틀었는가

나도 안다 동네의 더디고 나른한 세월 때로 우리는 묻는다

우리의 굽은 등에 푸른 싹이 돋을까 묻고 또 묻지만 비계처럼 씹히는 달착지근한 혀,

항시 우리들 삶은 낡은 유리창에 흔들리는 먼지 낀 풍경 같은 것이었다

흔들리며 보채며 얼핏 잠들기도 하고 그 잠에서 깨일 땐 솟아오르고 싶었다

세차장 고무 호스의 길길이 날뛰는 물줄기처럼 갈기갈기 찢어지며 아우성치며

울고불고 머리칼 쥐어뜯고 몸부림치면서……

그런 일은 없었다 동네의 더디고 나른한 세월, 풀잎 아래 엎드려 숨죽이면 가슴엔 윤기나는

석회층이 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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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씌어진 시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天命)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沈澱)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곰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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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밀

 - 한용운

 

 

비밀입니까, 비밀이라니요, 나에게 무슨 비밀이 있겠습니까.

나는 당신에게 대하여 비밀을 지키려고 하였습니다마는,

비밀은 야속히도 지켜지지 아니하였습니다.

 

나의 비밀은 눈물을 거쳐서 당신의 시각으로 들어갔습니다.

나의 비밀은 한숨을 거쳐서 당신의 청각으로 들어갔습니다.

나의 비밀은 떨리는 가슴을 거쳐서 당신의 촉각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밖의 비밀은 한 조각 붉은 마음이 되어서 당신의 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비밀은 하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비밀은 소리 없는 메아리와 같아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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