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천 양 희 

 

       외로워서 밥을 많이 먹는다던 너에게 

       권태로워 잠을 많이 잔다던 너에게 

       슬퍼서 많이 운다던 너에게 

       나는 쓴다.  

       궁지에 몰린 마음을 밥처럼 씹어라.  

       어차피 삶은 너가 소화해야 할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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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석 이브 

                                                  신현림 

 

    이 가을에 마악 내리는

    눈으로 빚는 송편

    천사의 손톱같고 샤갈의 빠렡같은

 

    삶에 지친 사람들에게 건넬

    선물 속에

    보리빵보다 따스한 송편이 익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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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의 기도 

 

                                                      남진우      

 

                              

 1

일찍이 한 철학자는

한 바구니의 책을 앞에 두고 다음과 같이 기도했다

 - 오늘도 우리에게 일용할 굶주림을 주시옵고

일용할 굶주림?

굶주림이라면 그것은 내게 너무도 충분하다

아무리 먹어치워도 질리지 않는 탐욕의 눈빛과

어둡게 입 벌리고 있는 머릿속의 허방

허겁지겁 굶주린 눈으로 먹어치우면

글자들은 텅 빈 머릿속으로 꾸역꾸역 밀려들어

잠시 북새통을 이루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2

책들이 달려든다

화려한 표지를 치켜세우고

현란한 광고 문구와 장엄한 저자 약력을 앞세우고

날 선 종이들이 사방에서 달려와

일제히 내 몸을 베고 찌른다

나를 읽어야 해 나를 읽어달라니까

책들이 아우성치며 내 몸을 타고 오른다

빽빽히 종이로 들어찬 몸이

책상 위에 머리를 처박고

다시 꾸역꾸역 종이를 삼킨다

 -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오늘 우리에게 책을 멀리할 수 있는 자만심을 주시옵고

 

 3

매일 한 바구니의 빵 대신

한 가마의 책이 하늘 어디선가 떨어진다

떨어져

오늘

내 앞에 버티고 서 있는 저 거대한 책더미

이를 갈며 아무리 먹어치워도 결코 줄어들지 않는

저 글자들의 산

죽은 나무의 무덤

길이 또 다른 길로 이어지듯

책은 또 다른 책으로 이어지고

그 끝없는 말의 거미줄을 헤치고 나아가다 보면

나는 어느덧 살진 거미 앞에 서 있다

 

 4

지금 막 도착한

바구니를 들여다본다

아,

책 대신 누군가 띄워보낸 갓난애가

빙그레 웃고 있다

반가워 들어올리면

우수수 떨어져내리는 종이 뭉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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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 나를 깨운다

 

                                                      황인숙

 


 

슬픔은 분명 과로하고 있다
소리없이 나를 흔들고 깨어나는 나를 지켜보는 슬픔은
공손히 읍하고 온종일 나를 떠나지 않는다
슬픔은 잠시 나를 그대로 누워 있게 하고
어제와 그제 그끄제 그 전날의 일들을 노래해준다
슬픔은 책을 펼쳐주고 전화를 받아주고 세숫물을 데워준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식사를 하시지 않겠냐고 권한다
나는 슬픔이 해주는 밥을 먹고 싶지 않다
내가 외출을 할 때도 따라나서는 슬픔이
어느 결엔가 눈에 띄지 않기도 하지만
내 방을 향하여 한 발 한 발 돌아갈 때
나는 그곳에서 슬픔이
방 안 가득히 웅크리고 곱다랗게 기다리고 있음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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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지 않은 길


                                고은

 

이제 다 왔다고 말하지 말자
천리 만리였건만
그동안 걸어온 길보다
더 멀리
가야 할 길이 있다


행여 날 저물어
하룻밤 잠든 짐승으로 새우고 나면
더 멀리 가야 할 길이 있다


그동안의 친구였던 외로움일지라도
어찌 그것이 외로움 뿐이였으랴
그것이야말로 세상이었고
아직 가지 않은 길
그것이야말로
어느 누구도 모르는 세상이리라
바람이 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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