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란 손님이 머무는 집,

  

           날마다 손님은 바뀐다네.

 

           기쁨이 다녀가면 우울과 비참함이, 때로는 짧은 깨달음이 찾아온다네.

 

           모두 예기치 않은 손님들이니

 

           그들이 편히 쉬다 가도록 환영하라!

 

           때로 슬픔에 잠긴 자들이 몰려와

 

           네 집의 물건들을 모두 끌어내 부순다고 해도

 

           손님들을 극진하게 대하라.

 

           새로운 기쁨을 위해 빈자리를 마련하는 것일 수도 있으니.

 

           어두운 생각, 부끄러운 마음, 사악한 뜻이 찾아오면

 

           문간까지 웃으며 달려가 집안으로 맞아들여라.

 

           거기 누가 서 있든 감사하라.

 

           그 모두는 저 너머의 땅으로 우리를 안내할 손님들이니.

 

 

               - 김연수의 <청춘의 문장들+> 에 인용된 시를 다시 옮겨본다. 

 

p.9

네 마음속으로 어떤 손님들이 찾아온다고 해도 너는 언제나 너일 뿐, 그 손님들 때문에 다른 사람이 되지는 않는다. 그러니 네 마음속으로 찾아오는 손님들을 기꺼이 맞이하기를. 그가 어떤 사람이든 화를 내거나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거나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이지 말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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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

 

                                             김 기 택

 

 

소의 커다란 눈은 무언가 말하고 있는 듯한데

나에겐 알아들을 수 있는 귀가 없다.

소가 가진 말은 다 눈에 들어 있는 것 같다.

 

말은 눈물처럼 떨어질 듯 그렁그렁 달려 있는데

몸 밖으로 나오는 길은 어디에도 없다.

마음이 한 움큼씩 뽑혀 나오도록 울어보지만

말은 눈 속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다.

 

수천만 년 말을 가두어 두고

그저 끔벅거리고만 있는

, 저렇게도 순하고 동그란 감옥이여.

 

어찌해볼 도리가 없어서

소는 여러 번 씹었던 풀줄기를 배에서 꺼내어

다시 씹어 짓이기도 삼켰다간 또 꺼내어 짓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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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된 서적(書籍)

 

                                                           기 형 도

 

 

내가 살아온 것은 거의

기적적이었다

오랫동안 나는 곰팡이 피어

나는 어둡고 축축한 세계에서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질서

 

속에서, 텅 빈 희망 속에서

어찌 스스로의 일생을 예언 할 수 있겠는가

다른 사람들은 분주히

몇몇 안되는 내용을 가지고 서로의 기능을

넘겨보며 서표를 꽂기도 한다

또 어떤 이는 너무 쉽게 살았다고

말한다, 좀 더 두꺼운 추억이 필요하다는

 

사실, 완전을 위해서라면 두께가

문제겠는가? 나는 여러 번 장소를 옮기며 살았지만

죽음은 생각도 못했다, 나의 경력은

출생뿐이었으므로, 왜냐하면

두려움이 나의 속성이며

미래가 나의 과거이므로

나는 존재하는 것, 그러므로

용기란 얼마나 무책임한 것인가, 보라

 

나를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모두

나를 떠나갔다.

 

나의 영혼은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누가 나를

펼쳐볼 것인가,

하지만 그 경우

그들은 거짓을 논할 자격이 없다

 

거짓과 참됨은 모두 하나의 목적을

꿈꾸어야 한다, 단 한 줄일 수도 있다.

 

나는 기적을 믿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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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無等)을 보며 

 

                                             서  정  주


가난이야 한낱 남루(襤褸)에 지나지 않는다.
저 눈부신 햇빛 속에 갈매빛의 등성이를 드러내고 서 있는
여름 산 같은
우리들의 타고난 살결 타고난 마음씨까지야 다 가릴 수 있으랴.

청산(靑山)이 그 무릎 아래 지란(芝蘭)을 기르듯
우리는 우리 새끼들을 기를 수밖에 없다.
목숨이 가다 가다 농울쳐 휘어드는
오후의 때가 오거든
내외(內外)들이여 그대들도
더러는 앉고
더러는 차라리 그 곁에 누워라.

지어미는 지애비를 물끄러미 우러러보고
지애비는 지어미의 이마라도 짚어라.

어느 가시덤불 쑥구렁에 놓일지라도
우리는 늘 옥돌같이 호젓이 묻혔다고 생각할 일이요
청태(靑苔)라도 자욱히 끼일 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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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일들

 

                                                    심 보 선

 

 

   오늘 내가 한 일 중 좋은 일 하나는

   매미 한 마리가 땅바닥에 배를 뒤집은 채

   느리게 죽어가는 것을 지켜봐준 일

   죽은 매미를 손에 쥐고 나무에 기대 맴맴 울며

   잠깐 그것의 후생이 되어준 일

   눈물을 흘리고 싶었지만 눈물이 흐르진 않았다

   그것 또한 좋은 일 중의 하나

   태양으로부터 드리워진 부드러운 빛의 붓질이

   내 눈동자를 어루만질 때

   외곽에 펼쳐진 해안의 윤곽이 또렸해진다

   그때 나는 좋았던 일들만을 짐짓 기억하며

   두터운 밤공기와 단단한 대지의 틈새로

   해진 구두코를 슬쩍 들이미는 것이다

   오늘의 좋은 일들을 비추어볼 때

   어쩌면 나는 생각보다 조금 위대한 사람

   나의 심장이 구석구석의 실정맥 속으로

   갸륵한 용기들을 알알이 흘려보내는 것 같은 착란

   그러나 이 지상에 명료한 그림자는 없으니

   나는 이제 나를 고백하는 일에 보다 절제하련다

   발아래서 퀼트처럼 알록달록 조각조각

   교차하며 이어지는 상념의 나날들

   언제나 인생은 설명할 수 없는 일들투성이

   언젠가 운명이 흰수염고래처럼 흘러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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