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 - 90대 80대 70대 60대 4인의 메시지
피천득 외 지음 / 샘터사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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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도 꿈이 있지요. 얼마가 될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남은 삶을 보다 단순하고 간소하게 살고 싶군요. 그리고 추하지 않게 그 삶을 마감하고 싶습니다.                                                                                                                      -p.118 

2003년 4월, 13대 국회의장을 지낸 김재순과의 대담에서 법정스님이 남긴 말이다. 결말을 알고 있는 소설을 읽어 나가는 일은 시시하다기보다는 등장인물들이 무심코 던지는 말 하나하나와 자잘한 동선 마다마다에 스미는 의미를 해독해 나가는 여정이기도 하다. 피천득 선생과 법정 스님이 가신 자리, 그 안을 밀고들어온 그들의 말 음절 하나 하나가 만들어 나가는 유언장은 삶의 이정표마다 세워둔 거울 같다.

월간 <샘터>의 400호 기념으로 2003년 4월 이루어졌던 피천득과 김재순, 최인호와 법정 스님의 대담을 채록한 이 책이 내 손에 오기까지 우여곡절도 많았다. 사실 법정 스님에 초점을 맞췄다기보다는 90대(피천득)와 80대(김재순), 70대(법정)와 60대(최인호)의 시선으로  걸러진 삶의 화두들이 궁금했기에 기다림이 초조했다. 이 전아하고 정갈한 책은 그 속에 담긴 사람들의 향내가 풍겨내는 아취에 빚진 바가 클 것이다. 표지의 하얀 바탕에 어우러진 매화 꽃잎 띄어진 차에서 은은하게 피어날 것만 같은 그 향내에 취하고 그 속의 말들에 취해 금아 선생의 서재에서, 길상사에서 그 분들을 모시고 고언들을 듣는 듯한 착각도 행복했다. 

특히 환생에 대한 진중한 얘기들은 울림이 컸다. 피천득 선생은 다시 태어나도  지금의 이 생활을 반복하고 싶다고 했다. 그가 금생에서 받은 행복의 다사로움이 이 한마디로 축약된다. 죽음이 가까워 올 무렵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처칠은 90회 생일에 기자들에게 자신을 낳아준 부모가 다시 그를 낳아준다면 이 생을 꼭 그대로 가감없이 살고 싶다고 했단다. 다시 살고 싶은 시간들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 시간들이 지금의 삶 전체를 덮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우리네들이야 다시 내생에서 그 나날들을 재현해 내어야 한다는 가정만으로도 가슴이 옥죄어 온다. 그렇지 않은 삶이란 드물고도 특별하게 축복받은 삶일 것이다. 법정 스님은 이 다음 생에도 다시 수도승으로 그 어떤 틀에도 매이거나 갇히지 않는 자유인이 되고 싶다고 한다. 금생에서 누려보지 못한 것들에 대한 회한이 아니라 수도를 계속 해나가겠다는 그의 말은 그 자체로 수도하는 자, 구도의 삶의 전범이 된다. 세속적 욕망을 죽이고 엄격한 절제와 억제로 포박하여 심신을 단련하는 고행의 틀 안 성직자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자유라는 말이 가지는 무게는 측량할 수 없을 만큼 심오하다. 우리가 느끼는 자유와 그들이 누리는 자유는 엄연히 다를 것이다. 우리는 자유를 추구하지만 그 과정의 부수적인 것들과 미망에 사로잡히고 법정 스님 같은 이들은 자신을 심오하게 응시하고 자잘한 욕망들을 떨어내는 과정에서 받는 선물 같은 자유의 지평에서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고 느끼는 상을 받는다.  

어쩌면 소설가 최인호의 얘기가 우리 같은 범속한 이들에게는 더 와닿을 지도 모른다. 

도를 이루거나 성인이 되면 윤회가 끝나니 다시 태어나지 않아도 되잖아요. 그러니 가장 좋은 일은 다시 태어나지 않는 것이겠죠. 전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만약 다시 태어난다면 지금처럼 글을 쓰며 살고 싶고, 지금의 아내와 결혼하고 싶어요. 저로서는 글을 쓰는 일이 정말 행복하고, 한 사람을 진정으로 아는 데 한 평생만으로는 부족하거든요.-p.116 

한 사람을 진정으로 아는 데 한 평생만으로 부족하다,는 말. 사랑한다면 노력해야 한다는 소설가 김연수의 말. 정념에 이끌린 열정이 아니라 평생을 걸쳐 두고 발효시켜가야 하는 한 사람에 대한 배려와 이해와 신뢰의 나이테. 사랑의 역사를 쓰는 일은 그래서 달콤하지 않고 그러니까 싫증나지 않고 지치지 않는다. 삶을 마감하는 순간까지도 미완으로 남는 그 사랑의 이야기들은 죽음이 단순한 종결이 아님을 예언해 주는 것 같아 가슴뿌듯하다.  

진지한 얘기들로만 채워져 있는 것은 아니다. 금아 피천득 선생의 책상에 언제나 놓여 있는 잉그리드 버그만의 사진 얘기와 강원도 오두막 벽에 붙여져 있는 법정 스님의 봉순이 그림은 작고 귀여운 여백 같다. 특히나 법정 스님이 외로움이 옆구리로 스쳐가는 마른 바람 같은 것이라고 한 대목과 봉순이 그림을 앞에 두고 "봉순아!"하고 부르며 이야기를 나누는 정경이 맞물리며 애잔한 느낌이 든다. 구도와 수도의 길목마다 서리 틀고 앉아 있는 외로움을 그림 한 장으로 달래는 풍경. 그 바람을 맞으며 장삼 자락을 떨치고 가버리신 그 분의 단아한 웃음이 그립다. 


 

우리는 저마다 이 세상에 단 한 사람으로 초대받은 것이라는 스님의 고언이 무색해지는 요즘이다. 저마다 진귀하고 한없이 소중한 생명들이 낙화처럼 지고 있는 갈피짬 사이로 스며든 이야기들에 목이 메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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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9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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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언덕을 넘으면서 더이상 나의 시선은 앞으로만 전진하지 않았다. 대신 나의 삶들을 복기해 보고 이렇게 할걸, 저렇게 하지 말걸, 하면서 수정도 하고 가감도 해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나의 나이는 이런 시간들을 쌓아가는 징검다리였다. 내일에 대한 전망이나 아슴한 기대대신 걸아온 삶의 궤적을 더듬어 보는 일들이 나의 시간들을 채우며 살아나간다는 것은 더없는 아이러니다. 이게 사는 건가, 정말 생을 호흡하는 건가 싶기도 하다.  과거의 반추가 덮어버린 시간들이 생의 통찰을 가져온다면 더없이 좋겠다.

밀란 쿤데라의 <농담>은 하나의 소설이지만 저자의 철학적 사유의 현시로 받아들이는 것이 더 타당할 듯 싶다. 극적 재미나 묘사의 섬세한 매력은 떨어지지만 줄치며 읽는 소설이라는 얘기처럼 이야기 속 화자들에게서 미끄러져 나오는 얘기들이 하나의 경구 같다. 또 인물 하나하나에 부여한 특질들이 개개의 상징처럼 느껴져 결국 쿤데라의 생에 대한 깨달음을 구체화한 것이 아닌가 싶어진다. 여기에는 기억의 왜곡에 대한 가슴아픈 체념이 가닿는 망각의 힘에 대한 겸손한 수긍과 시간이 무화시켜버리는 그 모든 것들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필요성이 떠오른다. 모든 것은 고쳐지지 않은 채 잊혀지고 기억된다 하더라도 나름의 왜곡으로 변형된다. 시간이 스치고 지나간 그 자리에 남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온전하게 원형이 보존될 수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 가지 헛된 믿음에 빠져 있다. 기억(사람, 사물, 행위, 민족 등에 대한 기억)의 영속성에 대한 믿음과 (행위,실수, 죄, 잘못 등을) 고쳐 볼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 그것이다. 이것은 둘 다 마찬가지로 잘못된 믿음이다. 진실은 오히려 정반대이다. 모든 것은 잊혀지고, 고쳐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복수에 의해서 그리고 용서에 의해서) 고친다는 일은 망각이 담당할 것이다. 그 누구도 이미 저질러진 잘못을 고치지 못하겠지만 모든 잘못이 잊혀질 것이다.-p.399  

그렇게, 여러 해가 지난 후에, 나는 고향에 와 있었다,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여러 명의 화자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주인공 루드빅의 귀향이 더듬어나가는 과거의 시간들의 길목에서 등장하는 주변 인물들은 또 그 나름의 시선으로 똑같은 사건을 다른 각도에서 회고하고 이해하고 고백한다. 공감과 이해라는 것이 얼마나 헛된 기대이자 허구의 개념인지를 여실히 드러내 주는 이 장치는 그 구성 자체로 작가의 의도를 웅변한다. 주인공 루드빅은 여자친구에게 농담을 적어보낸 엽서가 문제가 되어 공산당에서 축출되어 무기를 맡지 않고 사회주의 재교육을 받아야 하는 병사로 징집된다. 이 시기에 만나게 되는 우수어린 느림 그 자체인 루치아를 사랑하게 된 그는 끝내 그녀에게 거부당하고 실패한 사랑에 헛된 환상을 덧칠하게 된다. 대학재학시절 그를 축출하는 판정을 내린 학내 조직 차기 위원장 제마넥에게 복수하고자 수년이 흐르고 난 후 제마넥의 아내를 유혹하지만 루드빅은 이미 예전에 자신을 당에서 축출했던 제마넥이 지금의 제마넥과는 동떨어져 있으며 더군다나 그의 아내는 그에게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하므로 복수의 매개도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또한 순수한 사랑이었다고 생각했던 루치아와의 관계도 그녀에게는 하나의 폭력의 연장이었음을 전해듣고는 절망하게 된다. 

자기 밖에 놓인 수수께끼에 관심을 가지기에는 스스로에게 자신이 너무도 커다란 수수께끼인 그런 나이, 또한 다른 사람들은(아무리 친한 사람이라 해도) 자기 자신의 감정, 자신의 혼란, 자신의 가치 등을 놀랍게 비추어 주는 움직이는 거울에 불과한 그런 바보 같은 열정적 나이에 대한 분노였다.-p.344 

나의 스무살을 루드빅도 통과했다. 젊음이란 찬란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 참담한 것이었다. 그 미숙함과 그 미진함이 그 어리숙함이 과장된 허위 밖으로 미친듯이 튀어 나오려 함에도 끊임없이 억눌러 가며 나는 찬란하며 성숙하다고 거짓말하며 다니던 그 시간들의 반추는 부끄러울 정도다. 그 때 만난 사람들. 사랑들. 쌓인 분노들. 그것들을 추리고 수정하고 음미하는 이 행위들의 덧없음에 대한 자각은 루드빅의 다른 사람들의 관점에서 그 시간들을 되돌아 살아봄으로써 가능해진다. 기억의 왜곡이 스치고 지나간 그 자리, 자의식이 난도질해서 구겨놓은 그 밑그림들은 또다른 개인들에 의하여 개별화된다. 예전의 사람은 지금의 그와 전혀 다른 존재일 수 있고 내가 그 과거를 우격다짐으로 구겨넣어 나의 감정과 의지로 세탁하여 내어 놓아봤댔자 그것이 가지는 의미나 가치는 초라할 수밖에 없다. 다 농담 같은. 인생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불쾌한 농담 같이 느껴지는 순간은 누구나 공유하게 된다. 농담은 가볍지만 상큼한 뒷맛대신 눅눅한 미진함을 남긴다. 인생이란 어쩌면 그런 것임을 인정하고 들어가는 순간부터 다시 제대로 걸어갈 수 있는 길일런지도 모른다.
 

증오의 대상인 제마넥을 쓰러뜨리는 것을 목표로 했던 루드빅의 귀향이 사랑하면서도 피했던 옛친구 야로슬라브를 두 팔에 안는 것으로 귀결되었다는 사실은 모호하지만 진중한 진실의 화두를 던져준다. 인간 간의 관계는 의지와 이성으로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연민의 연대로 가능한 것임을. 좀더 가벼워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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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0-04-01 1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사람의 심리를 토막질하여 분석하는 서양 사상을 배우면서, 결국 동양 사상으로 돌아오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 흐르는 대로, 기억하고 잊어버리고 살아가고 만나고 헤어지는 그런거. 뱅뱅 돌아서 오게 되더라도 모래 위에 성을 쌓는 것보다 견고한 무엇을 가질 수 있을까요?
찬란하지만 잔인한 20대를 보내는게 밋밋한 20대를 보내는 것보다 확실히 나은것인지... 이젠 잘 모르겠습니다.

blanca 2010-04-01 22:35   좋아요 0 | URL
혼불을 읽으며 많은 생각이 들더라구요. 마녀고양이님 얘기처럼 동양의 그 윤회와 업에 관한 생각들이 참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더라구요. 저는 나름대로 처절한 스무 살의 기억이 있는데 중반까지는 그 기억과 화해를 못하다가 서른이 넘으니 다시 그 시간이 온다고 해도 또 그렇게 살 거라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 이후부터는 대체로 나를 죽이면서 살아왔으니 그 짧은 시간이 그래도 의미가 있다고 합리화하고 있답니다.^^;;

기억의집 2010-04-01 1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른언덕을 넘으면서~~ 이 앞 대목 참 좋네요. 전 사실 그렇게 행복한 어린시절이나 20대 시절을 못 보내서 그런지 과거를 반추하는 것이 너무나 힘들 때가 있어요.
블랑카님 리뷰 읽으니 이 책이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저는 한때 쿤데라의 열성팬이었는데,,,,
전 몰랐는데 불멸이 절판이라고 하더라구요. 브론테님 방에 가서 글 읽다가 놀랬어요.
아, 그 책이 절판이었구나 싶은게... 전 그 책 쿤데라의 책 중에서 가장 좋아했거든요. 프라하도 좋았지만
나중에 나온 불멸이 더 좋았고 저의 천주교 세례명이 아네스인데(지금은 무신론이지만) 불멸에 나온 여주인공 이름을 따서 아네스라고 할 정도로 말이에요. 전 10월 생이라서 아네스는 안 된다는 것을 억지로 우겼거든요.
하핫, 별 걸 다 고백하죠!

blanca 2010-04-01 22:38   좋아요 0 | URL
아...그렇군요. 아네스. 너무 아름다워요. 저는 냉담중입니다. 개종까지 해서 냉담이라니 할 말 없죠. 쿤데라를 좋아하셨군요. 저는 처음이라 조금 낯설고 조금 더 알아가야 할까 생각중입니다. 안그래도 불멸이 다시 나왔더라구요. 읽어봐야겠습니다. 저는 별 걸 다 고백하는 것을 참 좋아라 한답니다.^^;;

아 그리고 천주교에서 무신론으로 나아간 기억의집님 사연이 살짝 궁금해집니다.

기억의집 2010-04-02 11:30   좋아요 0 | URL
천주교 다닐 때부터 종교인들이 이익집단으로 보였고, 더 큰 영향은 도킨스의 이기적인 유전자와 만들어진 신이었어요. 그 이후 계속해서 자연과학책들만 읽으면서 더 확고해지는 거 같아요.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
실비아 플라스 지음, 김선형 옮김 / 문예출판사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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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비극이라 상정하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삶을 시작한다. 
                                                                      -W.B. 예이츠 

영국의 계관시인이었던 테드 휴즈의 전처이자 그 자신 유망한 여류시인이었던 실비아 플라스는 테드 휴즈의 외도와 잇따른 별거 후 하필 백년 만에 찾아온 영국의 혹한 속에서 옆방에서 노는 두 살, 한 살의 아이들이 먹을 것을 준비해 두고 가스오븐에 머리를 박고 자살을 한다.
 

그녀의 이러한 최후로 인해 실비아는  창조의 뮤즈가 되기 위한 그 금제의 벽을 뚫고 스스로가 증여물이 되는 신화 속으로 걸어 들어간 시인처럼 여겨졌다. 비극과 장렬한 최후와 치사한 치정극까지 버무려 윤색된 그녀와 그녀의 삶에 대중들은 열광한다. 아름답고 젊은 시인 부부. 한 명의 배신. 그리고 남겨진 자의 자살. 아이를 옆방에 두고 홀로 가스를 마시며 존재를 흩어버림으로써 어쩌면 남은 자들을 가장 극적으로 단죄해버린 그 간접적이고 슬픈 복수. 

결국 나를 파멸로 이끌고 말 것을 나는 욕망한다...... p.69  

이 일기는 그녀의 사후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의 직접적인 계기를 제공했던 남편인 시인 테드 휴즈의 자의적인 검열을 거쳐 발간된다. 또한 죽기 직전의 일기는 그의 말을 빌리자면 아이들이 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소각된다. 그러니 우리는 조금 역겹게도 그녀의 휴즈에 대한 열렬한 경탄스러운 애정의 표현만을 내키지 않지만 꿀꺽 삼켜야 한다. 한편 세상에 나온 이 일기는 일순간 그녀를 비도덕적이고 이기적인 남성 문화의 폭압하에 순교한 여성해방운동의 아이콘으로 등극시킨다. 또한 생전에는 주목받지 못했던 단어하나하마다 그녀의 피가 밴 시들이 제대로 평가받게 된다. 그러니 그녀의 죽음은 남겨진 아이들의 아픔만을 제외한다면 어쩌면 그녀가 그렇게도 소망하고 기다렸던 세상의 상찬을 받는 역설적 계기가 되고 만다.
 

칠백여 페이지의 때로는 내면의 의식의 흐름에 침잠하여 읽는 이를 염두해 두지 않고 써내려간 일기를 읽어 내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잡을 듯 해도 순간 나의 둔탁한 감수성의 그물코로 빠져 나가고 마는 그녀만의 독특한 어휘들과 그것들의 배열, 창작에 대한 강렬한 욕망들과 상치하는 일상과 주변 사람들에 대한 지속적인 경멸, 때로는 분노들을 단지 읽어내려가는 것만으로 그녀의 십분지 일도 이해할 수 없음을 통감했다. 그럼에도 한 여류시인의 전 생애(그래봐도 삼십 년 남짓이지만)를 관조하는 일은 그것도 적법하게 훔쳐보는 일은 나의 삶들과도 맞물려 깊은 통찰과 어쩔 수 없는 애수를 자아내게 했다. 야금야금 그녀의 고백들을 갉아 먹다 보면 어느새 인간의 삶의 유한성과 그 불가항력적 비극의 무게에 짓눌려 치사한 질투와 자잘한 오만과 욕심들을 슬그머니 내려놓게 된다.  모든 이들이 삶의 그 강퍆함과 빈곤하지만 무자비한 서사 앞에서 연민과 용서와 이해의 대상으로 재편되는 순간 그녀의 일기를 읽는 일은 작지만 의미있는 깨달음의 새순이 움트는 경이로운 체험으로 승화된다.

스미스여대의 9월 새학기가 시작되기 직전부터 테드 휴즈와 결혼하여 둘때 니콜라스를 낳고 데번에서 사는 얘기까지의 일기들이 그녀의 자살행에 대한 유효하고 직접적인 설명을 제공해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일기의 문구하나하나에서 흘러넘치는 자기 완성와 시창작에 대한 높은 지향과 괴리되어 있는 현실들의 간극 속에서 유영하며 치열하게 고뇌하는 그녀의 모습과 남편 테드를 자신이 설정한 완벽한 남성성의 현현으로 숭모하는 대목들은 결국 그런 남편의 배신과 두 아이를 홀로 떠맡아야 했던 그녀가 느꼈을 그 처절한 고통의 무게를 헤아릴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글쓰기 작업을 종교적인 아우라로 휘감고 그것을 위하여 기꺼이 자신의 삶을 희생할 용의가 있었던 이 여인의 사춘기 시절의 빛나던 영감들과 통통 튀는 재기들이 점차로 흐느적 거리는 자기 비하와 생계를 위하여 읽고 쓰는 시간을 때로는 포기해야 하는 현실 앞에서 절망하는 모습들로 변질될 때 우리는 그 속에서 우리를 보게 된다. 때로는 사랑이 어떤 목표가 세계 전부를 덮어버리고 우리를 중심으로 지구가 돌던 그 시간들. 순간순간이 너무나 명료하고 너무나 지루해서 우리는 당연히 영원을 끌고 가는 아주 긴요한 중심축이 될 줄 알았던 그 시간들. 하지만 우리는 이제 안다. 더이상 영원한 것은 없고 기쁜 일의 당사자가 되기 보다는 슬프고 짜증나는 일들의 예외가 되는 것이 더 힘들다는 것을. 그럼에도 살아 나가야 한다는 것을.   

날마다 색색깔의 구슬이 꿰어진 한 줄 목걸이처럼 살고 싶어. 미래에 타지마할 같은 대건축물을 짓겠다고 악다구니같이 노력하며 그 설계도에 맞추려고 현재를 잔인하게 조각조각 찢어버리고 싶지는 않다.-.p.202 

그래, 실비아. 마치 나에게 하는 전언 같은 이 말들을 꼬옥꼬옥 눌러 담아 항상 기억하며 살아야 겠어. 당신도 이제는 편안한 휴식을 제발. 테드의 그 여인도 결국 당신과 같은 전철을 밟고 말아. 그러니 당신이 떠나고 간 그 자리 해피엔딩은 없어. 그 예쁜 당신의 두 눈이 또 당신의 손 끝에서 그렇게나 힘겹게 태어났던 그 수많은 시구들이 당신의 딸 프리다에게 연결되고 있어.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어. 그리고 테드는 말년에 당신과의 그 수많은 오해들과 슬픈 어긋남 대신 처음 공명했을 때의 그 눈부시도록 고귀하고 아름다운 순간들에 헌사를 바치게 되. 용서할 수는 없어도 이해할 수 있게 되기를.

 


기네스 펠트로 주연의 영화 <실비아> 

 

p.s. 영화를 보지는 못했지만, 또 그녀의 딸이 그 아픈 기억을 상기시키는 이 영화에 공식적으로 악언을 퍼부어댔지만 이 장면만큼은 눈물없이 볼 수가 없다. 그녀는 남편에게 버림받고 아이 둘을 데리고 나와 하루 종일 육아와 가사에 시달리다 새벽 네 시에 일어나 그녀의 존재의 이유였던 시를 썼다고 한다. 그녀의 아이들은 그럼에도 아름답게 자라났지만 둘째 아들 니콜라스도 결국은 스스로 자신의 존재에 마침표를 찍었다. 자신들을 위하여 마지막으로 우유와 빵을 준비해 놓고 가스가 샐까봐 문틈을 꼭꼭 여며놓았던 어머니처럼. 어머니의 기대를 저버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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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0-03-16 0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자녀를 두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은 용서되지 않아요.ㅜㅜ
책은 보기 어렵고 영화를 구해 보면 좋겠네요. 기네스 펠트로가 맡았다니 더욱 더.

blanca 2010-03-16 20:39   좋아요 0 | URL
맞아요. 그러니 딸은 아직도 그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아들도 자살하고.... 책은 솔직히 인내를 요하는 독서였습니다.--;;

프레이야 2010-03-16 07: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마지막 문단, 콧등이 시큰하네요.
우리의 순정과 사랑도 어쩜 그리 변색될까요.
테드와 실비아의 고드름처럼 명징했던 감정이 영화를 보며 뒤로 갈수록 안타깝고 가슴 아팠어요.
집요하게 집착하며 흔들리던 실비아의 영혼도 그렇구요.
결국 테드 위주로 삭제되었던 부분이 많았던 것도..

blanca 2010-03-16 20:42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영화 보셨군요. 저도 너무 보고 싶어요. 테드는 얼마나 일기장을 교묘하게 삭제해 놓았는지 자신에 대한 헌사로 그득찬 부분만 남아 있는 것 같아요. 아니면 그 정도로 실비아가 그를 사랑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요.

마녀고양이 2010-03-16 0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 저는 읽다가 포기한 책인데, 다 읽으셨네요. 조금 읽다보니 같이 늪 구덩이에 빨려드는 느낌이라 덮어버렸던 기억이 있네요. 너무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이었던거 같아요. 얻는게 많으면 잃는 것도 많다.. 저는 천재들을 보면 그런 문구가 생각나요. 세상을 찬란한 색채로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얻은 대신, 인생을 잃는게 아닐까 하는..

blanca 2010-03-16 20:41   좋아요 0 | URL
그죠.. 저도 중간 이후부터는 솔직히 참 힘들더라구요. 읽어온 장이 아까워서 꾹 참고 읽었답니다.^^;; 인생에서 두 가지를 다 가질 수 어는 없는 것 같아요. 언제나.

stella.K 2010-03-22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일이 연속이로군요.
저도 이책 읽다 포기하게 될까 봐 못 읽겠던데 그래도 다 읽으셨네요. 축하합니다.^^

blanca 2010-03-22 14:58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한동안 너무 책을 사서 지금은 있는 책 소진중이랍니다. 적립금을 조금 아껴 보려구요^^;;
 
검은 꽃 - 개정판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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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 버린 사람들의 얘기. 그런 얘기는 언제나 모래 바람이 남기고 간 입안의 서걱거림처럼 애잔한 여운을 남긴다.
역사 소설은 배경과 굵직한 사건들의 리얼리티의 기둥 사이로 잊혀진 우리들의 삶의 서사를 통과시켜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된다. 얘기되어야 하는 것들과 얘기해야 하는 것들, 얘기하고 싶은 것들이 켜켜이 쌓이다 보면
그것들의 얽힘과 때로는 저것들의 폐기의 지점이 실패 그 자체가 되기도 한다. 쉽지 않은 일이다. 

  

<검은 꽃>은 참 읽고 싶었던 작품이다. 경영학 석사까지 마친 작가의 이력이 막상 소설 창작의 길로 내닫고 주요 문학상을 싹쓸이하고 10여개 국에 번역되어 나가는 성공까지 거두는 모습을 보는 것은 상당히 이채로운 일이다. 서글서글한 인상에 가끔 읽게 된 인터뷰 내용이나 에세이들까지 나는 그저 김영하에게 호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정작 그의 소설은 화장실에서 신문에서 연재되던 <퀴즈쇼>를 드문드문 읽은 게 전부였으면서도 나는 그의 보헤미안적 삶의 기행에 무조건 열광했고 무언가를 하고 싶으면 할 수 있고 쓰고 싶으면 쓸 수 있는 그의 자유가 부러웠다.  

그를 아는 체하기 위해 <검은 꽃>을 읽겠다고 집에서 몇 정거장이나 떨어진 도서관에 돌도 안된 아기를 들쳐없고 받아 온 그의 책은 산산히 분해되어 있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저돌적으로 이 책에 덤벼들었는지를 보여주기라도 하듯 너덜너덜해진 그 책의 갈라진 배 속에서 탈출을 준비하고 있던 그 수많은 속지들을 순서대로 추리면서 나는 그를 알기를 단념했다. 한마디로 내키지 않았다. 책을 읽은 자는 말이 없었지만 적어도 그 책을 정리했던, 혹은 꺼내주었던, 또 나에게 건네 주었던 그 사람들마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돌보지 않은 그 의식적인 책에 대한 무관심과 무례함이 싫었다.  

그런 <검은 꽃>이 김영하의 컬렉션으로 재발간되어 왔다. 풍선처럼 부풀 대로 부푼 기대 앞에서는 그 어떤 작품도 경이로울 수 없다. 송곳처럼 까칠한 시선 앞에 그의 무미 무취한 캐릭터들과 소설적 비약들이 내내 조금씩 그러나 꾸준히 거슬렸다. 두툼한 분량도 아닌데 진도가 안나갔다. 그러나 조금씩 밀고 나가는 그의 이야기들이 마침내 영원한 마침표를 찍었을 때 나는 비로소 이 작품이 이룬 성취에 박수를 쳐 줄 수 있었다. 지극히 소설적인 그의 목소리가 결국 소설은 현실의 재현이 아님을 현실의 그 수많은 한계와 난관을 뛰어넘는 인간의 꿈꾸는 눈동자에 대한 사려깊은 응시임을 온몸으로 주장하고 있었다. 

1905년 멕시코의 에네켄 농장에 팔려나간 1032명의 그들의 이야기. 애니깽으로 회자되는 그 잊혀진 그들의 이름을 두드려 깨우고 그들의 꿈을 복기한 이야기. 언제나 잊혀진 역사 속 이야기들을 다시 듣는 일은 힘겨운 추체험이다. 역사 속 이름없는 민중들의 사소하지만 그들에게는 전부인 삶의 이야기가 훑고 간 자리. 심지어 남의 나라 혁명의 부속품으로까지 이용되고 버려진 그들을 기억하는 일은 하나의 의무 같다. 그게 남은 자의 최선이자 도리가 아닐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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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0-03-09 1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여, 이런 책이 좋은 책이며 한번 읽어봐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진짜 손이 안 간답니다. 읽으려면 엄청난 용기가 필요해요. 읽은 이후 다가오는 질척한 상념이랄까 우울이랄까 현실 직시랄까 이런 것들을 이겨낼 용기가. 좋은 소설들은 더 마음을 울려놓잖아요.. ㅡㅡ;;

그래서 맨날 읽는 책이 일반 교양(과학, 심리, 역사)와 경제와 자기 경영 여행, 그리고 현실 도피적인 추리 소설과 환타지를 왔다 갔다 한답니다. 블랑카님 대단해여!

blanca 2010-03-09 14:22   좋아요 0 | URL
그런데 이런 책들의 한계는 그냥 결말을 열어놓아서 허무하다는 거예요. 지금 한창 소설에 조금 질려서 저도 마녀고양이님처럼 일반 교양 분야로 넘어가려 합니다. 소설은 약간 집중이 안되는 경향도 있고 어릴 때의 그 몰입되는 순간도 이제는 없더라구요. 슬퍼요, 흑흑.

순오기 2010-03-10 0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영하의 책은 하나도 안 읽어서 몰라요.ㅜㅜ

blanca 2010-03-10 13:33   좋아요 0 | URL
저는 사실 읽고도 김영하를 아직 잘 모르겠어요. 재능이 많은 작가임에는 분명한데 저랑 완전히 코드가 맞는 것 같지는 않고 그래요^^;;

저절로 2010-03-10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출혈이 심해 그래,이젠 도서관이야. 괜히 대출이란 게 있겠어? 하며 도서관으로 달려가면,
쩝~ 꼴들이 말이 아닙디다. 성질같아선 그 너절한 책들 확 바닥에 패대기쳐주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지만, 구입 희망도서란에다 '웬만하면 새로들 장만하시죠' 소심하게 적어놓고 도망치듯 나옵니다. 끙.


blanca 2010-03-10 13:35   좋아요 0 | URL
그죠? 진짜 너무 심한 책들이 있어요. 읽다가 절로 불쾌해지는.... 도서관도 멀고 불쾌한 경험도 좀 하고 나니 점점 멀어지네요. 중고샵을 많이 이용해 보려고 해는데 사실 그것도 책을 계속 늘리는 일이니 서재에 대한 로망만 계속 커지고... 그래서 답은 책을 최대한 천천히 보기로 했어요^^;;

꿈꾸는섬 2010-03-10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새 알라딘 김영하 컬렉션 광고는 봤는데 클릭을 안해봤거든요. 검은꽃이 개정판으로 나왔군요. 어떻게 달라졌을까 궁금하네요. 예전에 재미있게 읽었었어요.^^

blanca 2010-03-11 14:34   좋아요 0 | URL
책은 실물이 참 이쁘더라구요. 이렇게라도 뒤늦게 읽어보니 기분이 좋더라구요. 꼭 읽고 싶었었거든요^^
 
아직도 가야 할 길
M.스캇 펙 지음, 신승철 외 옮김 / 열음사 / 2007년 3월
평점 :
절판


오십대의 K는 세속적인 잣대를 들이밀면 퍽 성공한 축에 속한다. 그런 그가, 무신론자에 가까운 그가 정성들여
성경을 필사하는 장면을 우연찮게 보게 된 제자는 당돌하게 물었다.
"교수님, 신이 있다고 믿으시는 겁니까, 믿고 싶으신 건가요?" 그는 후자에 가깝다고 얘기했나 보다.
카톨릭 세례를 받기 위한 예비자 교리 과정의 과제로서 성경필사를 시작한 그의 모습은 낯설었다.
무신론이 갑자기 신의 존재 그 자체에 대한 희구로 변모하기까지야 그 세세한 사정을 헤아릴 수는 없었지만
인간의 세속적인 성공의 마침표가 또다른 문장을 불러오는 그 길목에 선 K의 모습을 지울 수 없었다.

누군가의 삶의 고통에 대한 호소에 이런 댓글이 달렸다.
" 내 인생의 책 스캇 펙의 <아직도 가야 할 길>을 추천합니다."  나는 힘든데 누군가는 주제넘은 충고대신 책을 권한다.

이 책이 오는 길은 멀었지만 어떤 운명 같은 것이 있었다. 누군가가 추천했고 또 누군가가 동조했을 지 모른다.
어디에선가는 꼭 불쑥 이 책의 표지가 튀어나와 뒷덜미를 붙잡았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멘토마냥 이 책을 찬양했다.
그래서 영적인 지도자라 자평하는 어느 사이비 교주의 설교집 정도 되는 줄 알았드랬다. 

저자 스캇 펙은 정신과 의사다. 그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경도되지도 않았고 기독교 교리로 교묘하게 자신의 얘기들을
포장하지도 않는다. 과학과 기적의 그 접점 어디엔가 그는 서 있다. 그러나 그는 영성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다.
독자는 이윽고 그에게 상담을 받는 한 명의 환자가 된다. 마침내 자신의 모든 결함과 상처를 이 세상에는 이제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주치의에게 다 털어놓고 탈진한 상태에서 성장으로 향햔 도약을 내딛게 된다. 그러니 이 책은 반드시 무조건 읽어어 한다.
힘들다고 하면 과장이고 견딜 만 하다고 얘기하면 거짓말인 항상 그런 지점에 발 붙이고 있어야 하는 우리들이라면. 

삶은 고해다. 

이 책의 첫문장이다. 그것은 대전제다. 삶을 미화하지 않는다. 그 고해를 헤쳐나가는 실용적인 기술을 전파하겠다고 장담하지도 않는다. 문제 해결의 괴로움을 건설적으로 취급하는 기술 체계인 훈련을 하라고 한다. 달콤한 마시멜로를 조금 뒤로 미루어 놓듯 즐거움을 나중에 갖도록 자제하고 책임을 지고 진실에 헌신하고 균형을 맞추는 기술을 얘기하는 대목은 그리 새로울 것이 없다. 다만 시인 실비아 플러스의 얘기처럼 진공의 병 안에서처럼 자신의 악취나는 공기를 되풀이하여 호흡하며 점점 더 깊은 자아도취에 빠지지 않도록 세상을 보는 자신만의 지도를 내보이고 과감하게 수정해 나갈 것을 독려하는 부분은 의미심장하다. 
 

우리는 우리의 부모가 세상 전부이고 세상 모든 사람들이 우리 부모처럼 우리를 대우해 줄 것이라 여기던 바로 도수에 맞지 않는 안경으로 지금의 세상도 보고 있다. 이것이 전이다. 정신치료는 이 지도를 수정해 나가는 과정이다. 다시 시력검사를 하고 제대로 된 안경을 맞추어 써야 하는 그 너무나 당연하지만 번거로워 미루어 두었던 그 일을 지금 당장 해야 하는 것이다.  

사랑에 대한 얘기는 끊임없이 사랑에 빠져 상처받는 모든 사람들에게 유효한 전언이다. 사랑은 빠지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이고 자아의 붕괴가 아니라 자아가 확장되는 것이라고. 자신에 대한 사랑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함은 사족 같다. 우리는 왜 사랑에 빠지는 그 순간 나에 대한 사랑을 잃어버리고 마는 걸까. 사랑의 그 파괴적인 경향성은 마조키스트적인 자기희생의 망상과 맞물려 다분히 소모적이다. 그리고 깨닫는다. 사랑이 떠나고 간 그 자리의 흉물스러움에 몸을 떨며 이번 사랑은 가짜였으니 다음에 올 진짜 사랑을 기다리겠다고. 또 지난 번과 비슷한 경로를, 대상을 찾아 헤매며 끊임없이 사랑 그 자체에 빠지는 자신의 모습에 대한 연민어린 집착에 중독된다. 그리고 나의 삶은 불운으로 가득 차 있다고 불평한다.

은총에 대한 얘기는 다분히 영성에 관련된 얘기다. 자기 향상과 영적 성장을 위한 그 노력의 지향은 하느님과 같게 되는 것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얘기하는 하느님이 반드시 기독교적 하느님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스캇 펙은 심지어 칼 융의 집단무의식 개념을 차용해 온다. 그는 정신질환이 개인의 의식적 의지가 무의식의 신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할 때 발생한다고 덧붙인다. 여기에서 신은 일종의 신성으로 이해된다. 인간의 영적 고양의 그 지향점으로서 우리 인간 자체의 그 무한한 잠재 능력에 대한 완전한 신뢰에서도 신은 발현된다. 그러니 그의 신은 인간의 그 완전함으로의 열린 가능성에 대한 전적인 믿음과 다름아니다. 무신론이어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대목이다. 

결국 사랑이다. 나 자신과 타인의 성장을 배려한 그 무한하고 조건없는 사랑과 믿음. 무엇보다 그 근시안적이고 순간적인 그 허약한 욕망들을 향해 뻗어 있는 촉수들을 거두고 영적인 성장을 향해 전진하려는 그 진화선상에 나를 두는 것. 끊임없이 소비적인 본능에 몸을 내맡기려는 그 관성에 역행해 성장하고 단발적인 본능들을 억제할 수 있는 고차원적인 또다른 본능에 귀기울이는 것. 전체의 일부로서의 자아의 그 연결지점을 의식하는 것.  

임상의로서 삶 전체를 영성과 연결짓는 통찰의 시선까지 나아간 그의 얘기를 듣는 시간은 그 자체로 하나의 치유의 과정이었다. 나의 우울로 얼룩져 어룽대던 세상이 갑자기 말끔하게 닦여 그 청명한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여 보여 줬다. 순간의 착시일지라도 이런 착시는 대환영이다.  우리는 걸었고 지금도 걷고 있지만 아직도 가야 할 길을 보여주는 이런 책을 반드시 어떤 길목에서 건네받아야 한다. 그래야 덜 후회할 수 있지 않을까. 누군가는 항상 더 현명하고 더 친절하니 그의 손을 잡고 걸으면 훨씬 덜 힘들게 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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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0-03-01 2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책 꽤 두텁던데,, 다 읽으셨단 말입니까.. ㅠㅠ
전 저 시리즈 3권 사놓은지가 어언 2년.. 아직도 손도 못 대고 있어요. 아우 창피.

그나저나 블랑카 님의 글은 읽을 때마다 생각하는거지만, 정말 흡입력있으시군요. 부럽습니다.

blanca 2010-03-01 23:20   좋아요 0 | URL
시리즈 세 권 다 사놓으셨어요? 우와~ 근데 이거 생각보다 글자가 크고 들여쓰기를 많이 해서 잘 읽히더라구요. 상담에도 관련하여 아주 유용할 것 같아요. 덜 바쁘실 때 한 번 읽어 보세요~ 마녀 고양이님 서재로 놀러갈랍니다.

저절로 2010-03-02 2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웅~ 님께만 오면 질러요.두텁다는 대목에서 망설였지만 지르게 해줘서 고마워요.제대루 지르면 넘 행복하단 거 벌써 알고계시죠?

글구, 제가 서재질 한거 얼마안돼 그러는데요, 어디 서재에 가보니 thanks to 해주시라 하던데, 뭐하는겐지 알아야 도움을 드리든 할거같아서요(이거, 쪽팔림 각오하고 드린 말씀이에요~)

blanca 2010-03-02 13:51   좋아요 0 | URL
저에게만 오면 지르신다니 ^^;;; 저는 중고로 구입했는데 에파타님도 한 번 찾아보세요. 알라딘 중고 서점. 그리고 Thanks To는 책 구입하실 때 그 상품의 아래 리뷰나 관련 페이퍼 하단을 클릭하시면 되요. 하는 사람은 마일리지를, 받는 사람은 적립금을 얼마 주는 걸로 알고 있어요. 저는 여러 해 동안 서재가 있는지도 몰랐답니다.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