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은 중요하다. 흔히 생명과 삶의 가치와 같은 저울에 올려 그 가치를 논하기도 하지만 삶을 영위하는 데에 가지는 그 ‘돈’의 중요한 동력을 감안한다면 이런 비교와 대조는 필연적 자기 모순에 빠진다. 인간의 욕망은 때로 삶의 동력이고 그것의 외연적 교환가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흔히 ‘돈’으로 치환된다. 누구나 생과 삶은 차마 돈과 저울질당해서는 안되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것이 현대 사회의 돈의 위력이나 가치 자체를 무력화하는 것은 아니다. 돈 자체는 선악의 가치 판단의 준거가 아니다. 어쩌면 우리는 지나친 악덕의 드라마를 ‘돈’ 그 자체와 혼동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에밀 졸라가 그려낸 19세기 후반의 파리 사회가 백 년도 훌쩍 지난 현대의 배금주의와 거의 오차없이 겹친다는 사실은 인간이 만들어 낸 외형적 교환 가치가 제어 없는 욕망과 만날 때 빚어내는 필연적 귀결이 얼마나 끈질기게 부활하는지 보여주는 예다. 증권거래소, 실질적 자금의 불입이 없는 무차별적 증자와 회사 실적 부풀리기, 작전세력, 개미 투자자들의 패망. 이것은 20세기 이후의 신조어가 아니었다.

초로의 몰락한 은행가 사카르가 증권거래소를 중심으로 각계각층의 투기 세력을 규합해 거대한 신디케이트를 만들어 주가시장을 지배하는 모습에는 이성적 판단이나 논리가 거세되어 있다. 다만 인간의 탐욕에 덧씌운 자기 기만, 환상, 이전투구가 실제보다 더 현실 같은 날조된 가치에 자신의 삶 전체를 거는 인간 군상의 민낯이 드러날 뿐이다. 파멸의 전조가 곳곳에 드러나도 레밍이 한꺼번에 물에 뛰어들듯 단체로 치닫는 절멸의 모습은 소름이 끼치도록 근래 전세계를 휩쓸었던 각종 금융 위기, 사건들과 겹친다.

에밀 졸라는 이러한 사태에 교조적으로 접근하는 대신 삶에 대하여 가지는 이러한 ‘돈’의 필연적 영향력을 중립적 입장에서 관찰하고 해부할 뿐이다. 어쩌면 그는 모든 비열한 왜곡된 욕망의 부산물을 돈에 몰아넣는 인간의 무책임함과 경솔함을 지적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파멸한 사카르와 대척점에 서 있어 보이는 여주인공 카롤린이 사카르의 은행에 투자한 돈을 잃고 마지막에 빈털털이가 되었음에도 역설적으로 생의 의지와 환희를 느끼는 대목은 생이 돈을 배제할 수는 없어도 뛰어넘는 초연한 경지까지 약동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돈’과 ‘삶’을 분리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어디에 동력의 주도권을 주냐,는 인간 개개인의 선택의지가 개입할 수 있다. 불편한 진실을 직시하는 용기 또한 그렇다. 그 미약한 가능성이 이 비극적 얘기를 마치 해피엔딩처럼 보이게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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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이소오 2018-01-01 17: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장 우아한 글을 쓰시는 블랑카님. 작년 한해도 고생하셨고 새해에도 우아하고 감성적인 글 기대할께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blanca 2018-01-02 03:29   좋아요 0 | URL
헉, 시이소오님 칭찬에 없던 우아함도 생길 기세입니다. ^^ 새해에는 시이소오님이 더욱 마음 편히 책을 읽으실 수 있는 내외적 여유가 생기기를 기원합니다. 성실한 독서와 기록 언제나 응원해요.

카스피 2018-01-01 2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88만원도 아니 78만원 세대에게는 누가 뭐래도 돈이 중요하지 않을까 싶네요ㅜ.ㅜ 블랑카님 무술년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blanca 2018-01-02 03:31   좋아요 0 | URL
그렇죠. 돈이 가지는 위력에 압도당해서도 안 되지만 기본적으로 사는 데에 필요한 그 마지노선도 부정할 수 없지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카스피님.
 
풀잎은 노래한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7
도리스 레싱 지음, 이태동 옮김 / 민음사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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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부터 좋아하는 영어권 작가들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white'라는 용어를 사용하면 왠지 모를 반감이 들기 시작했다. 미국드라마에서 보던 다인종이 한데 어우러져 서로 교감하는 장면은 사실 지나치게 이상적인 장면이기에 반드시 도식처럼 삽입된 것이라는 감정적인 해석도 함께 왔다. 아직도 우리는 인간이기에 다 같이 서로를 존중해 주기에는 너무나 욕심이 많다. 사는 일에 욕심이 게재되지 않고 생존이 영위되는 일이 가능할까? 다 같이 고결하고 다 같이 서로의 눈을 맞추며 함께 걸어가는 현실에서 삶이라는 이야기가 진행될 수는 없는 것일까? 미국의 대통령은 단지 태어날 때의 피부 색깔 하나로 자신들의 특권을 인정해 달라는 어처구니 없는 소리에 짐승 같은 소리라고 일갈하는 대신 비난의 초점을 교묘하게 이동시킴으로써 자신의 내면에 있는 또 다른 욕망과 편견을 드러냈다.


사회적 약자의 프레임에는 수많은 판단 기준이 혼재한다. 경제,성별, 인종, 가치관, 연령. 그러니 결국 그 누구라도 완벽한 승자가 되기란 절대적 패배자가 되기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항상 언제나 처절하게 지는 사람들이 한켠에 있다. 그럼에도 언제나 역겹게 끈질기게 이겨대는 그들이 있다. 욕심쟁이를 욕하는 이야기는 쉽다. 하지만 항상 지는 자들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나 조심스럽고 어렵기 그지없다. 도리스 레싱의 <풀잎은 노래한다>는 그러한 지는 자들에 대한 성찰이다. 지고 마는 자들에 대한 연민이다. 그리고 연가다. 아름답고 처절하기 그지없는 절창에 한동안 아연해졌다.


남아프리카의 가난한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난 백인 여성인 메리는 자신이 속한 사회적 계층, 인종에 대하여 큰 자각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적어도 운이 지독히도 나쁜 농장주 리처드를 만나 늦게 결혼하기 전까지 그녀는 불행하고 힘든 유년이었지만 비교적 순탄한 처녀 시절을 누린다.  그러나 흑인노예들의 노동력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농장주의 아내가 되며 그녀는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른 채 상황의 안온하고 안전한 상황에서 누렸던 자신의 삶의 연약한 기반을 완전히 상실하며 처음으로 진지하게 자신의 인종을 의식하고 자신이 부리는 흑인 노예들에 감정적 거부감을 느끼게 된다. 그녀는 외부와 단절된 시골에 갇혀 흑인 노예들에게 자신의 무력감을 해소하며 말 그래도 인간으로서도 여성으로서도 점점 나빠져 간다. 메리에게 아니 그 나라의 그 사회의 그 시간에서의 백인들에게 이미 자신들이 오기 전에 그 땅에서 살고 있었던 흑인인 그들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인간이 아니었다. 그들과는 도저히 '관계'를 맺을 수 없었다. 메리는 전형적인 백인 여성이었다. 그래서 그녀가 노예를 무시하고 괴롭히고 수족처럼 부리려 드는 모습은 지금 여기에서 그 모습을 상상하는 우리를 심히 역겹게 하지만 그녀를 전적으로 미워할 수는 없는 그 무엇이 있다. 도리스 레싱은 메리를 적나라하게 그리지만 메리 안의 '그 무엇'의 이물감이 독자를 밀어내지 않도록 주도면밀하게 그녀의 모습을 조종한다. 그녀의 살갗에는 우리의 못난 모습이 새겨져 있어 그러한 것일까? 과연 그러한 사회적 압력과 제도하에서 그것에 반역할 용기와 신념이 시대와 사회의 프레임 안에 개인을 가두었을 때 쉬운 일일까?


그녀가 결혼 제도 안에서 자본주의의 열패 안에서 추락해 가며 또다른 의미에서의 약자를 하대하고 괴롭히는 모습은 분명 낯선 것이 아니다. 인간의 복합성과 모순은 생의 의지 안에 잠복되어 있어 언제 그 추한 외형을 드러낼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어제는 거액을 기부하고 오늘은 식당이나 가게의 직원에게 심한 욕설을 퍼붓는 모순은 바로 한 인간 안에 내재되어 있다.


메리가 흑인 노예 모세에게 느끼는 설명하기 힘든 이끌림과 거부감은 도리스 레싱의 모호하지만 아름다운 언어로 상당 부분 해석을 독자에게 맡겨버리고 만다. 도저히 알 수가 없다. 메리가 모세를 증오했는지 사랑했는지 아니면 그 둘다였는지를. 비참한 최후 앞에서 자신을 결박해버린 그 처참한 배경마처 아름답게 관조해버리는 그녀의 시선은 그 자체로 모순의 결정체다. 이도 저도 아니지만 그 자체로 그게 삶이 되어버리는...삶은 언제나 언어 저 너머까지 날아가 버려 도저히 말로써 담아낼 수 없다. 언제나 저기까지 언어로 밀고 나가려하지만 그 언어의 마침표는 삶 안으로 밀려들어오고 만다.


노예 모세가 자신을 인간으로 취급해 달라는 그 당연한 요구로 그녀를 굴복시켜버렸듯 메리 또한 남편과 사회에 그 자신을 결혼 제도 안의 양순한 아내가 아닌 욕망과 꿈을 가진 인간으로 취급해달라는 그 기본적이고 쉬워보이지만 한없이 어려운 요구를 끝내 부치지 못한 편지처럼 떨구어 놓고 가버리고 만다.


그냥 머물러 있는 것. 그러다 그냥 쓸려가는 것. 메리의 슬픈 삶이 모세의 비참한 최후와 오버랩되어 잔상이 오래도록 남는 이야기에 오래도록 서성거리게 된다. 뒷맛이 씁쓸하면서도 장대한 이야기에 압도당하게 된다. 과연 오늘날은 메리의 시대에서 얼마만큼 진보되었는 지 확신하지 못하겠다. 교양과 사회적 가면으로 위장하고 우리는 또 얼마나 많은 억압을 자행하고 자행당하며 오늘을 소비하고 있는 것인지를 성찰하지 않고는 반드시 어제,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기약하지 못하지 않을까. 나도 자신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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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17-08-21 06: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선 너무 반가와요~~~~부비부비! 저 나비, 비비아롬나비모리입니다. 제가 모처럼 온 건데 어째 블랑카 님이 그렇게 된 듯한??ㅎㅎㅎ

암튼 이 책은 못 읽겠네요. 너무 화나고 슬프고 그럴까봐. 요즘 언급하신대로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인종주의에 더 불을 지피고 있는 현실이라~~~ㅠㅠ 뭐 세상이 이렇게 거꾸로도 돌아가는 구나,,, 이런 생각을 하고 있어요. 어휴

blanca 2017-08-22 02:43   좋아요 0 | URL
안 그래도 나비님 생각했었는데 왜 이리 뜸하셨어요! 막내도 많이 컸지요? 저도 요즘은 좀 뜸하게 됩니다. 시간이 참 빠르죠? 알라딘에 온 게 어언 십 년 전이라 생각하니...참 기분이 묘해요. 이 책은 강력 추천합니다. 작가 자신의 자전적인 첫작품이라네요. 원서로 읽으면 더 절창일 것 같아요.
 
밤으로의 긴 여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9
유진 오닐 지음, 민승남 옮김 / 민음사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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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다반사와 사는 이야기를 나누는 게시판에서 우연히 유진 오닐의 <밤으로의 긴 여로>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너무 슬프고 절망적이라는 이야기에 끌려  유진 오닐이 아내 칼로타에게 쓴 눈물 어린 헌사를 시작으로 티론 가족 네 사람이 각자의 절망이 소통하지 못하고 한없이 반목하고 빗겨가는 그 자리로 천천히 걸어들어갔다. 열두 번째 결혼 기념일에 유진 오닐은 차마 그 누구에게도 제대로 표현해 내기 어려울 만큼 슬프고 비참했던 가족사를 자신이 가장 잘 형상화할 수 있었던 희곡의 형태로 사랑하는 아내에게 선물로 바친다. 실제 유명한 연극배우였고 극단을 따라 호텔을 전전하며 아이들을 낳고 키웠던 유진 오닐 아버지의 이야기가 극중 티론에게 그대로 투영되어 티론의 여름별장의 거실에 모인 부부와 두 아들의 4막으로 이어진 대화로 슬픈 가족사와 서로 간의 갈등, 상처를 짐작할 수 있다.

 

 

1912년 8월, 제임스 티론의 여름 별장의 거실에 나타난 어머니 메리는 진통제 처방이 우연히 마약 중독으로 이어진 상태로 마약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가족에게 다시 돌아온 그녀의 모습에는 여전히 마약에 오염되어 있는 모습이다. 선병질적인 모습과 연극적인 자기 고백, 과거로의 끊임없는 귀환은 그녀가 방탕한 큰 아들과 병으로 죽음을 앞두고 있는 둘째 아들, 가족들에게 인색하고 탐욕스러운 남편이 만들어 내는 건조하고 차가운 현실과 유리되어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어머니는, 아내는 현실을 부정하고 아버지는 절망과 삶에 대한 탐욕스러운 애착을 묘하게 섞어 아들들을 괴롭힌다.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가정을 이루고 그 사람과 아이를 낳았을 때에 이러한 미래를 감안하거나 꿈꾸는 것은 아닐 테다. 하지만 언제나 우리보다 앞질러 정거장에 당도해 있는 미래는 얼마쯤 우리가 삶에 기대했던 그 자비와 관용, 환상을 여지없이 박살내어 버린다. 유진 오닐은 먼저 이 정거장에 도착해 자신의 원가족을 담담하게 지켜보고 이야기한다. 아버지와 반목하는 아들들. 어쩌면 내일이면 완전히 헤어져 버릴지도 모르는 이 위태위태한 가족의 모습에는 인간이 삶이라는 그물에 걸리는 한 어쩌지 못하는 그 필멸의 명제가 살아 있다.

 

 

인간이 되는 바람에 항상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하고, 진정으로 누구를 원하지도, 누가 진정으로 원하는 대상이 되지도 못하고, 어디 속하지도 못하고, 늘 조금은 죽음을 사랑할 수밖에 없게 된 거죠!

 

유진은 자신의 사후 25년 동안 이 작품이 발표되지 않기를 바랐지만, 결혼기념일에 이 희곡을 이미 자신의 것으로 받은 아내 칼로타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아이러니하게 그에게 네 번째 퓰리처 상을 받게 한다. "빛으로의, 사랑으로의 여로"라 칭했던 그녀와의 결혼 생활도 결국은 '밤으로의 긴 여로'가 되고 말았다. 그것은 모든 삶의 보편적인 은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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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레사 2016-07-07 1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이 인용하신 구절을 제가 다시 인용했습니다...그래도 되었을까요? 문득....이 책을 저도 오래전에 읽었습니다. 당시 유진 오닐의 희곡을 여럿 읽었지요. 일부러 찾아 읽진 않았고 어쩌다보니, 그리 되었지요. ..그런데..이 구절은.....아무튼....

blanca 2016-07-08 16:15   좋아요 0 | URL
테레사님, 어차피 저의 문장이 아닌걸요. 혹시 유진 오닐의 다른 희곡 중 좋았던 것 추천해 주세요.

테레사 2016-07-13 1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좀 오래전 그러니까, 1900년대에 읽었어요..ㅜㅜ ㅋㅋ 1990년대 후반에요..생각해 보니,,많진 않았네요..느릅나무 밑의 욕망이 기억나네요...그건 잘 알려진 것이라..블랑카님도 ..아실터...
 
운명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40
임레 케르테스 지음, 유진일 옮김 / 민음사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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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모 레비를 위시하여 많은 사람들이 나치하의 강제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와 그곳의 참상을 다양한 형식으로 증언했다. 인간이 강제한 시스템 아래에서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으며 견디어 낸 시간은 삶의 자기회복력의 세례를 받아도 결코 치유될 수 없는 개별적인 트라우마를 남겼다. 견디어내고 살아남았다고 섣불리 마침표를 찍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인간이 인간을 무참히 짓밟을 수 있다,는 것을 보고 듣고 체험한 기억은 그 인간들을 마주보고 살아내야 하는 삶 자체의 의미를 뿌리부터 흔든다.

 

그러나 <운명>은 여타 다른 홀로코스트의 생존자들의 증언의 어조와 달랐다. 무엇보다 주인공은 열네 살 소년이다. 회상의 형식이 아닌 현재 진행형이다. 한창 가족의 따뜻한 보호 아래 공부하고 친구들과 뛰어 놀아야 할 소년은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강제 노역을 다니다 그 출근 버스에서마저 끌려 내려와 가족에게 알리지도 못한 채 아우슈비츠로 끌려간다.

 

"우리는 학교를 위해 공부하지 않고 삶을 위해 공부한다."였다. 그렇다면 교장 선생님의 말씀에 따르면 우리는 아우슈비츠에 대해 반드시 공부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p.124

 

열네 살 소년은 울지 않았다. 건조하고 담담하게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인다. 때로 화가 나기도 하고 무기력해지기도 했지만 그는 아이처럼 징징대지도 포기하지도 않은 채 그저 성실히 하루 하루 수용소 생활을 해나갈 따름이었다. 그의 시선은 수용소에서 일어나는 일들, 그 주변 풍광, 그를 둘러싸고 수용소의 질서를 제대로 작동하게 하는 어른들, 같은 수용소 안의 또래 소년들, 때로 항상 배고픈 그에게 대가 없이 빵을 주고 자포자기하지 말라 격려하는 멘토 같은 사람들을 따라 움직인다. 그의 시선을 통과한 수용소의 풍경은 마치 우리가 가진 삶의 일상처럼 흘러간다. 소년도 때로 그 점에 놀란다. 너무 고통스러워서 다 던져버리고 싶다,는 극단적인 반응이 아니라 그저 주어진 하루 하루를 힘들지만 엮어 나가며 살아나간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는 지쳐 있는 수용소의 의사에게 "당신의 고통은 별거 아니니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얘기해 줄까도 생각했다.

 

그는 일년 여의 수용소 생활을 종전으로 마치고 다시 고향으로 귀가하다 대신 전차 요금을 내어 준 어른에게 고국의 부다페스트를 보니 어떤 느낌이 드냐는 질문에 "증오심요."라고 이야기한다. 그는 억압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직 어른도 아닌 아이를 부모에게서 강제로 떼어놓아 수용소에서 노역을 시키고 인간이하의 대우를 일삼는 것을 방조한 자신의 고국에 대하여 아이는 증오를 느낀다. 끔찍한 기억을 다 잊으라는 동네 어른들의 조언에는 반발한다. '내 기억에 대고 명령을 할 수는 없다.'고.

 

소년이 돌아올 곳은 해체되고 없었다. 아버지는 죽고 새어머니는 재혼했다. 그러나 노을지는 저녁 거리에서 생모를 찾아 가며 그가 느낀 것은 절망이 아니었다. 그가 이 시간대를 수용소에서도 가장 좋아했다,고 회고하는 장면은 섬뜩하면서도 장엄하다. 계속 살아갈 수 있기 위해서 계속 삶을 지속해 가겠다는 각오를 지키기 위하여 소년은 나아간다. 어른들의 잔인한 도발로 소년의 삶은 파괴되지 않는다. 소년은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각오를 다진다.

 

살아 귀환한 자의 생에 대한 강렬한 의지와 성장에 대한 기대가 어쩐지 눈물겨웠다. 작가 임레 케르테스의 자전적 이야기의 회고인 이 이야기가 그가 후에 소년 시절 겪은 수용소의 트라우마로 순탄치 않은 삶을 이어가야 했음을 알고 들을 때 더욱 그러하다. 인간은 어떤 상황에서도 다시 일어나 생을 삶을 이어나갈 수 있음을 그 자신이 삶으로 보여주었지만 그것은 단지 외피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나면 인간이 인간에게 가하는 폭력이 역설적으로 얼마나 타인의 존재와 그에게 주어진 생 전부를 파괴할 수 있는지에 대한 처절한 예시가 된다.

 

이제 우리 과장하지 말자! 내가 지금 이곳에 존재한다는 정말 어려운 문제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p.284

 

언제나 삶에는 짐작하는 것보다 더 크고 깊은 그 무엇이 있다. 그러니 섣불리 과장하지 못하겠다. 느낌도 짐작도 생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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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23 08: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5-23 08: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에이바 2016-05-24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혹시 영화 사울의 아들 보셨어요? 비르케나우 배경으로 한 영환데 영화 기법(잘은 몰라도)과 더불어 아우슈비츠의 삶을 좀 더 생각하게 되는 그런 작품이었어요. 역사를 기록하는 어떤 방식에 대한 고민거리와 더불어... 굴라그 배경의 문학작품들도 떠올리게 되고요. 다르지만... 아직 운명 초반부밖에 읽지 못했는데 얼른 읽어야겠습니다.

blanca 2016-05-24 20:47   좋아요 0 | URL
에이바님 댓글 보고 찾아보니 아주 평이 좋네요. 아쉽게도 아직 못 봤는데 줄거리 보니 도저히 못 볼 것 같아요. 이제 너무 참혹하거나 슬픈 영화는 차마 볼 수가 없어요. 홀로코스트 관련된 이야기들을 공교롭게 여러번 접하게 되는데 결국은 절망으로 귀결되서 자꾸 가라앉게 되는 것 같아요.
 
설국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1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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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 안 오는 밤 뜬금없이 스마트폰에 '김연수'를 검색했다. 그리고 마흔이 안 된 그의 과거 인터뷰 내용 중 수시로 '설국'을 읽는다는 이야기에 '설국'을 꼭 다시 읽어야겠다,고.

 

언제였을까? 나는 '설국'을 읽었다. 어렸을 것이다.내용은 흐릿하고 그 아름답고 서늘한 분위기만 남아 있다.  어떤 아주 매력적인 여자가 나왔고 시리고 차갑고 요요한 분위기였다고, 기억한다.

 

그 기억의 잔상은 다행히 어그러지지 않는다. 이백 페이지도 안 되는 소설을 거의 한 자리에서 다 읽고 다시 되돌아 첫 페이지로 간다. '소설'이란 이런 식으로도 완성될 수 있구나, 싶은 이야기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이 이야기는 영화로 만들어서는 도저히 성공할 수 없을 것 같다.(찾아보니 있긴 하다.) 급진적인 전개나 확실한 플롯이 없다. 보통 그러면 문장에 무게가 실리며 억지로 쥐어짜거나 과장, 미화된 부자연스러운 문장들이 지리멸렬하게 이어질 가능성이 많은데 '설국'은 언어로 담을 수 있는 모든 감각적인 색채들이 눈이 부시다. 문장 하나 하나에서 그 차갑다 못해 몸이 얼어버릴 것 같은 차갑고 서늘한 설경의 냄새가 절로 뿜어져 나온다. 덧붙일 것도 생략할 것도 없는 딱 좋은 그 정도에서 작가의 욕심은 멈춘다. 응축되고 농축되고 농염하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여기에서의 '국경'은  나라와 나라의 경계가 아니다. 지리적으로는 군마 현과 니가타 현의 접경을 말한다고 한다. 그러나 '국경'이라는 단어가 크게 어긋날 것 같지 않다. 경계를 넘어서서 한 인간이 인물과 그 인물의 뒤에 있는 풍경이 만나는 지점에서 삶과 죽음을 넘어선 피안의 느낌을 경험하게 되는 이야기로서 '국경'이란 표현은 무리가 없다. 시마무라는 동경에서 이 눈의 고장으로 넘어오며 고마코라는 당돌한 소녀를 만나게 된다. 그에게는 아내와 아이가 있다. 고마코는 온천장이 있는 마을에서 게이샤 출신의 스승으로부터 샤미센과 춤을 배워 결국 게이샤가 된다. 시마무라는 고마코와 한 남자를 사이에 두고 묘한 삼각관계를 이뤘던 요코를 고마코를 만나러 가는 기차 안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고 그녀에 대하여됴 미묘한 관심을 가지게 된다. 고마코는 두 남자를 두고 동시에 두 개의 삼각 관계에 얽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가 주는 아니다. 시마무라와 고마코의 밀고 당기는 관계는 시마무라가 여행객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때로 몸을 팔기도 하는 고마코가 일기와 독서록을 꼼꼼히 적는 일에 대하여 느끼는 냉소와 만나 허무로 수렴된다. 그것은 그 일의 하찮음이 아니라 자신의 어려운 처지에도 그 비애에도 성실하고 진지하게 모든 보고 읽는 것들을 대하는 소녀에 대한 안타까운 정서이기도 하다. 이 모든 이야기의 기본 정서는 삶이 가지는 그 필연적인 허무와 덧없음에 대한 깊은 의식이다. 짧고 덧없는 생과 그 길에서 벌어지는 만남과 이별이 벌어지는 배경에 오히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언어가 닿아 있다. 끊임없이 내리고 또 내리는 눈 속에 갇히는 마을, 그 동면의 계절 동안 소녀들이 집 안에 갇혀 눈 속에서 실을 만들고 눈 속에서 짜고 눈으로 씻어 눈 위에서 바래는 지지미 옷감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그들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언뜻 큰 관련 없어 보이는 주변 사람들의 슬픈 이야기가 줄곧 연인 아닌 이 연인을 둘러싸고 담담하게 이어진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연보를 보다 힘들게 맹장 수술을 받고 얼마 안 있어 가스로 자살한 대목에서 그 자신이 한 이야기와 묘하게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토록 힘들게 살아가면서도 또 그 모든 과정을 기탄없이 부정할 수 있는 그 묘한 어긋남의 대목이 작가의 것이었나, 싶으니 시마무라가 은하수와 만나는 그 마지막 문장의 무게가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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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바 2016-05-12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설국 다시 읽어야겠어요. 피상적인 제 독서를 반성하게 되는 글입니다...

blanca 2016-05-13 08:11   좋아요 0 | URL
노벨상과 문학적 완성도가 비례한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이 책은 절로 수긍이 가더라고요. 얇고 가독성도 좋아서 여러 가지로 참 즐거운 읽기였습니다. 에이바님도 꼭 다시 한 번 읽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