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한국현대사 - 1959-2014, 55년의 기록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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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때였던가. 백과사전을 사고 덤으로 기자들의 특종 사진집을 받았다. 격랑의 현대사는 정지된 흑백의 사진으로 파노라마처럼 압축되어 있었다. 한창 뉴키즈며 듀스에 열광했던 여학생이 처음부터 진지하게 접근했던 것은 아니고 한번씩 호기심으로 사진 정도를 들춰보는 식이었다. 잘 모르는 나에게도 시위현장에서 택시들이 모두 헤드라이트를 켜고 동참하는 모습은 큰 울림이 있어 깊이 각인되어 있다. 대학교 근처의 초등학교에서 최루탄의 위력을 실감했던 기억 때문에 택시기사들까지 자신들의 생계수단을 가지고 나와 시위에 동참하는 모습은 낯설기도 했고 그럴 수밖에 없었던, 감히 그럴 수 있었던 상황과 그들의 용기가 흑백사진 전면을 뚫고 나와 짙은 호소를 하고 있었다. 그 현장은 광주항쟁이었다.

 

그곳에 전태일의 영정 사진을 껴안고 우는 그의 어머니 사진도 있었다. 아름답고 부유해 보였던 사회 선생님은 어느 날 전태일 열사 이야기로 눈빛을 빛냈다. 다 알아듣고 가슴으로 공명하기 어려운 부분을 모두 상쇄할 만큼 전태일의 이야기는 감동적이었다. 대의를 위해 자신의 몸을 불태울 수 있는 용기와 고결함은 낯설고 저릿했다.

 

나는 현대사에 무지하다. 고등학교 때 국사 교과서 말미에 첨언처럼 있었던 그 간략하고 죽어 있었던 연대기는 단지 헷갈리고 무용한 것처럼 혼란스러웠다. 갖가지 해석이 난무하고 각자의 정치적 호불호가 마구 재단해 내는 그 '사실'들이 부담스러웠다. 광주항쟁과 전태일과 박정희로부터 나의 삶은 얼마나 멀게 느껴졌던가. 나의 사적인 삶이 결국 공적인 것의 큰 범주 안에서 무기력하게 흔들릴 수 있다는 각성은 죄없이 죽은 아이들과 홀로코스트에서 돌아와 기억하기도 싫었을 사실들을 책임감 있게 증언한 프리모 레비 덕분이었다. 무지하고 무관심할 수 있지만 어느 순간 당신과 나의 삶은 역사의 격랑 속에서 좌초 당하고 결박 당할 수 있는 것이다. 그때의 자각은 이미 너무 늦어버렸을 수도 있다. 그러니 이 독서는 어떤 의무감과 부책감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은 스스로를 프티부르주아 출신의 지식인 엘리트로서 정치에서 실패하고 문필업으로 돌아온 자유주의자라고 규정하는 유시민이 자신이 태어난 1959년부터 2014년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55년 동안 우리 대한민국의 산업화와 민주화에 대한 번민하는 당사자로서의 복기와 해석, 이해에 관한 것이다. 일단 그의 출발은 오늘날의 대한민국에 대한 긍정이다. 55년 동안 민주주의가 후퇴한 적도, 경제 위기에 봉착한 때도 있었지만 분명 우리가 비교적 경제적 풍요와 정치적 민주주의에 있어 진보를 이루었고 그것을 향유하고 있다고 판단한 데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1959년 역사교사의 막내아들로 태어난 그가 이야기하는 현대사는 그의 개인적 삶, 다층적 이해, 다양한 분야의 독서와 어우러져 지루하거나 난삽하지 않게 다가온다. 현대사에 거부감이나 약간의 두려움을 가진 사람들도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그의 설명과 참고문헌에 대한 소개는 친절하다. 대한민국 현대사를 만든 유인이 '욕망'이었다고 판단하는 그의 시선은 위정자들의 권력욕과 시민들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의 지층을 가감없이 해부한다. 해방후 거대한 난민촌이었던 우리나라가 중앙집권적 경제개발을 통한 산업화의 '병영'을 통과하여 민주화 시대의 '광장'으로 진화하는 과정은 유시민이 다시 읽고 주석을 달아 펼쳐내는 하나의 역동적인 대한민국의 성장사다.

 

흥미로운 대목은 그의 '인물'에 대한 나름의 평가이다. 특히 산업화와 민주화의 전장 한가운데 있었던 박정희에 대한 그의 시선은 그의 생애를 통해 각인됐던 하나의 인물에 대한 애증과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고자 하는 그의 노력과 맞닿아 있다. 그 어떤 주의도 그를 사로잡지 못했고 오로지 권력욕에 사로잡혔다고 이야기하는 박정희가 커다란 선과 지독한 악을 함께 이루었다는 그의 평가는 주목할 만하다. 박정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의 인격과 행위 자체가 아니라 그 시대를 통과했던 시민 자신들의 열정, 성취, 인생을 좋아하는 것이라는 해석도 마찬가지다. 또한 이인제가 고용보험을 정착시킨 일, 노태우 대통령이 남북관계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짠 일 등에 대한 언급은 한 인간에 대한 단편적이고 단정적인 판단을 지양하고 복합적이고 다원적으로 정치인이나 행정가를 보는 새로운 좌표를 던져준다.

 

이 책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명명된다. 박정희 정권하에 산업화에 일익을 담당했던 경제관료들, 자신의 몸을 태워 오늘날의 민주화를 선물한 민주화투사들의 이름을 하나 하나 읽어가다 보면 역사가 정작 기억해야 할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깨달음이 절로 다가온다. '레드 콤플렉스'를 정신적 병리현상이지만 자신의 생존과 안전을 지키려는 생존의 방편으로 이해한 대목도 설득력이 있다. 저마다 자신의 프리즘으로 간단하게 절단한 단면만을 부각시켰던 불구의 현대사가 그의 앞에서는 균형감과 설득력을 얻어 또렷이 떠오르는 느낌이다. 참신하고 역동적이고 생생하다. 그의 마지막 이야기는 문학적이다. 건조할 줄 알았던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고 사랑하고 이야기하는 공간을 짓기 위해 생명과 삶을 바친 이들에 대한 경의로 촉촉하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것이 아니다. 미래는 우리들 각자의 머리와 가슴에 이미 들어와 있다. 지금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이 미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 시각 우리 안에 존재하고 있는 것들이 시간의 물결을 타고 나와 대한민국의 미래가 된다. 역사는 역사 밖에 존재하는 어떤 법칙이나 힘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역사를 만드는 것은 사람의 욕망과 의지다. 더 좋은 미래를 원한다면 매 순간 우리들 각자의 내면에 좋은 것을 쌓아야 한다.

-p.417

 

현실이 아무리 비극적일지라도 그것을 뚫고 나오는 인간의 욕망은 더 나은 곳을 꿈꾼다. 그것에 대한 신뢰가 관통하는 지점에 우리나라의 현대사에 대한 그의 이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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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14-07-17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름다운 리뷰입니다 땡스투 하고 구입하겠습니다

blanca 2014-07-18 10:47   좋아요 0 | URL
고마울 따름이지요. 무엇보다 재미있고 쉽고 똑똑한 책이어서 추천드리고 싶어요.

순오기 2014-07-18 04: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시민은 정치인보다 글쟁이가 더 어울린다 생각해요.
거꾸로 보는 세계사처럼 오래도록 사랑받는 책이 되었으면.... ^^

blanca 2014-07-18 10:48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저는 아직 위의 책을 읽어보지 못했어요. 차차 하나씩 읽어봐야겠어요. 유시민 스스로도 정치에서 실패했다고 돌아온 글쟁이로 자신을 이야기하더라고요.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 - 미국 인디언 멸망사
디 브라운 지음, 최준석 옮김 / 한겨레출판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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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는다'는 것은 익명으로 귀환하는 것이다. 누구나 살아 생전에는 더없는 개별성과 특수성에 끄달리지만 '우리'는 결국 이름을, 지금의 이 절절한 순간들을, 잃을 것임을 가끔은 떠올릴 수 있다. '나'는 '우리'가 되고 결국 '그들' 속에 묻히고 만다.  

역사가 결국 승자의 기록이고 문학은 그 기록의 뒤안길에 매몰된 무수한 익명의 '그들'을 복원해야 하는 과제를 부여받음을 때로 상기한다. 하지만 결국 픽션은 삶의 진실성과 진정성을 담보한다고 해도 팩트 그 자체가 될 수는 없다. 당연히 그랬을 테고 그랬음직한 일들이지만 그랬던 것은 아니다. 정말 그랬었지만 감히 말하여질 수 없었던 것들, 언젠가는 꼭 말해져야 할 것들이 눈 앞에 펼쳐질 때 삶은 참 남루하고 구차하고도 면면히 이어지는구나 싶다. 결국 또 묵묵히 살아나가겠지만 그래도 순간 또 정지하게 된다. 인간은 아름다운, 가치있는 존재일까? 생은 긍정될 수 있는 것인가? 

   
 

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중략> 내 피부는 붉지만 심장은 백인과 똑같다. ...

인생이란 다만 잠시 동안만 자기 것일 뿐이다. 당신네 백인들은 나를 정복하지 못했다. 나를 꺾은 것은 내 부족민이다. -캡틴 잭(모도크족) 

 
   

 

1860년 이후 30년 간 미국 서부 개척 시대의 역사는 굉장히 호기롭고 도전적이면서도 다이나믹한 것으로 그려진다. 웨스턴 무비들의 단골 배경으로도 자주 등장하는 그 시간들이 사실은 백인들이 정작 그 땅의 주인들이었던 인디언들을 마구잡이로 몰아내고 학살하고 문명과 문화를 짓밟았던 잔혹 행위들로 점철되었었다는 얘기는 공식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이 책이 썩 기분 좋은 책이 아니라는 저자 디 브라운의 고백은 끊임없이 조약과 약속을 남발하며 인디언들의 땅과 삶을 수탈했던 미국인들 자신들에게 던지는 하나의 참회일지도 모른다. 디 브라운은 인디언들의 구전 역사의 자료를 가지고 최대한 가감없이 있는 그대로의 인디언들의 처연하고도 가슴 저미는 투쟁사와 멸족사를 일구어 냈다. 좋은 인디언은 죽은 인디언이라며 결국 모든 인디언들이 자멸하고 그들의 기름진 광활한 땅을 차지하기를 바랐던 그 탐욕스럽고 비열한 욕망 앞에서도 끊임없이 속아주고 믿어주고 화해하기를 바랐던 인디언들의 그 어리석어 보이기까지 하는 경이로운 신뢰들은 가슴을 저릿하게 한다. 이 둘을 모두 가슴에 품고 사는 것이 인간들의 삶일 수도 있겠다. 인디언 멸망사는 우리 내면에 묻어버린 아름답고 투명한 것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뢰와 지지의 추억들을 복원해 내는 것이기도 하다.  

대지와 공동의 척도를 지녔던 인디언들은 그저 자신들의 땅에서 자유롭게 뛰어다니고 일하고 살기를 바랐을 따름이다. 그 자연스러운 본능과 소망을 억압하고 기만했던 백인 이주자들 앞에서 그들도 점차 낙망하고 불신하고 응전을 다짐하게 된다. 인디언령이라는 허울좋은 명분아래 인디언들을 지배하고 통제하고 가두려했던 저의는 점차 인디언을 동등한 인격체와 생명이 아닌 하나의 부속물이자 성가신 이방인 정도로 여기고 생사여탈권까지 틀어쥐었다고 생각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미군들은 그들이 정해 준 주거지역에서 이탈하는 경우 여자, 아이, 노인들을 가리지 않고 살상을 일삼았다. 나바호족, 샤이엔족, 아라파오족, 수우족, 크로우족, 유트족 등은 죽어 모두 좋은 인디언이 되었다. 멸족의 위기에 선 인디언들이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망령의 춤'을 추며 죽은 인디언들이 모두 돌아와 그 옛날의 좋은 시절이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는 주문은 눈물겹다.  

   
 

그 당시 나는 얼마나 많은 것이 끝장났는지 모르고 있었다. 이제 나이들어 높은 언덕에 올라 돌아보니 학살당한 여인네들과 아이들의 시체가 굽이도는 계곡을 따라 겹겹이 쌓이고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게 보인다. 나는 또 한 가지, 그 피 묻은 눈보라 속에 죽어 묻혀 있는 걸 본다. 한 민족의 꿈이 거기 죽어 있다. 그건 아름다운 꿈이었다. <중략>
- 검은사슴 

 
   

모든 강하고 단단한 것들이 작고 여린 것들을 누를 수 있다고 믿었던 시대는 결국 끝나고야 말 것이다. 내 안의 나마저도 그렇다. 아름다운 꿈은 결국 돌아오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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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04-18 2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전부터 한번쯤 꼭 정독하고 싶은, 제 마음 속의 리스트에 올라가 있는 책 중 하나예요. 사두고 분명히 안 읽은 채로 둘 것같아 미미적거리다가 보니 어느새 개정판이 나왔네요. 잘 읽었어요, blanca님.

blanca 2011-04-19 21:27   좋아요 0 | URL
브론테님 저도 분량 때문에 차일피일 미루다 결국 집어들었어요. 천천히 조금씩 읽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참 처연한 책이랍니다.

비로그인 2011-04-18 2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땅을 사고 파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던 인디언.
백인이 어느날 들어와 마음대로 선을 긋고 그들의 그어 놓은 선 밖의 음지로, 음지로 흘러야 했던 그들의 역사가 생각납니다.

그러면서 또 생각나는 것은 땅에게 빌려 쓰고 다시 땅으로 되돌려 주는 그런 것들에서 왜 점점 멀어지는 것일까 하는 것인데요. 이제는 산도, 강도, 땅도 삶에서 점점 멀어져만 가네요.

blanca 2011-04-19 21:28   좋아요 0 | URL
바람결님, 저는 그 순정함과 순진함이 참 슬프게 느껴지더라구요. 속고 또 속고 믿고 또 믿고. 인간이 자연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벌어질 비극이 이미 현재진행형이잖아요. 반성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됩니다. 저부터도요.

sslmo 2011-04-19 0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옛날에 한번 읽었었어요.
나이가 들면서 같은 팩트를 바라보고도 다르게 해석하게 되는거 같아요.
무뎌지는 걸 테지만, 부드러워진다고 생각하고 싶어요~^^

blanca 2011-04-19 21:30   좋아요 0 | URL
양철댁님 이미 읽으셨군요. 저는 개정판이 나오면서 처음 알게 되었어요. 그럼요. 어느 드라마에서 사람이 있는 게 아니라 상황이 있는 거라는 얘기가 정말 요새는 동감 가더라구요. 무뎌지는 것도 성숙의 일환인 것 같아요.

레와 2011-04-19 1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약탈자들이 붙여준 '인디언'이라는 이름말고, 그들은 자신들을 뭐라고 불렀을지 궁금해요.

더 늦기전에 읽어볼게요. :)

blanca 2011-04-19 21:31   좋아요 0 | URL
아, 레와님! 제가 그 얘기는 적지 않았는데 정말 이름들이 눈부시더라구요. 예전에 '늑대와 함께 춤을'처럼 정말 아름다운 자신들 만의 작명법으로 서로를 부르는 대목들이 참 인상적이랍니다.

북극곰 2011-04-19 15: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성각님 책에서 보고 읽으려고 적어뒀던 책리스트에 있던 책이에요. 절판이었던걸로 알고 있었는데 ^^ 잘읽고 갑니다.

blanca 2011-04-19 21:31   좋아요 0 | URL
북극곰님 아기가 참 사랑스러워요. 예, 안그래도 개정판이 나와 더 많은 사람들이 읽을 수 있게 되어 다행입니다. 절판이었군요.
 
이것이 인간인가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기록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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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인간이 아니다. 그들의 인간성은 땅에 묻혔다. 혹은 그들 스스로, 모욕을 당하거나 괴롭힘을 줌으로써 그것을 땅에 묻어버렸다. 사악하고 어리석은 SS 대원들, 카포들, 정치범들, 범죄자들, 크고 작은 일을 맡은 특권층들, 서로 구별되지 않으며 노예와도 같은 해프틀링까지, 독일인들이 만든 광적인 위계질서의 모든 단계들은 역설적이게도 균등한 내적 황폐감에 의해 연결되어 있었다. 

하지만 로렌초는 인간이었다. 그의 인간성은 순수하고 오염되지 않았다. 그는 이 무화의 세상 밖에 있었다. 로렌초 덕에 나는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을 수 있었다.   

                                                                                                                                         -p.187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는 아우슈비츠가 존재했었다는 것만으로 우리 시대에 그 누구도 신의 섭리에 대해 말할 수 없으리라고 했다. 그러나 대신 그는 인간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지 않을 작은 등롱을 발견한다. 같은 이탈리아 민간 노동자였던 로렌초는 아무 이해관계없는 그에게 여섯 달 동안 매일 빵 한 쪽과 먹다남은 배급을 제공해 준다. 로렌초는 인간이었다,고 회고하는 대목은 짜릿하기까지 했다. 이것이 인간인가라,는 회의적인 반문이 수용소의 경험 전체를 관통한다면 그가 인간이었다,는 깨달음은 미약하지만 그 기저에서 깜빡이는 하나의 전언 같다. 그럼에도 희망은 유효할 수 있는가.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그의 답은 그렇다,인가? 다 읽고 나서도 또 그의 삶 전체에 대한 간략한 얘기를 접하고서도 확신할 수가 없다.

데렌스 데 프레의 <생존자>들을 통하여 유대인 강제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온 자들의 증언에 대한 심리학적, 인문학적, 철학적 고찰은 단편적으로 흩어져 있는 그들의 증언을 한 사람의 목소리로 들어보고 싶게 했다. 이 책은 이탈리아 피에몬테 지방의 유대인으로 태어나 화학자이기도 했던 프레모 레비가 반파시즘 빨치산 부대에 가담했다 밀고를 당해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어 살아 나오기까지의 이야기의 장대한 증언록이다. 그의 얘기들은 후에 그 자신이 회고했듯 의도적으로 희생자의 한탄 섞인 어조도 아니고, 복수심으로 날선 언어도 아닌, 침착하고 절제된 증언의 언어로 엮여 있다. 그는 단지 유대인 정치범이라는 이유로 머리칼도 이름도 다 잃어버린 채 왼쪽 팔뚝에 수인번호를 새기고 강제노역수용소에서 부나(일종의 고무)를 만드는 공장에서 일한다. 거기에서 목격하는  악에 타협하며 때로는 그것을 생존방식에 끼워 넣으며 살아나가는 수많은 사례들, 벌레처럼 죽어나가는 자들의 모습은 그에게 인간의 존재, 더 나아가 신의 존재에 대한 회의로 귀결된다. 그럼에도 그가 살아나갈 수 있었던 것은 로렌초 같은 어떤 가능성의 체현 같은 인간형의 목도와 이 참상을 증언하고자 하는 욕구 덕분이었다.  

화학자인 저자의 문체가 대단히 심미적이고 유려하여 놀랍다. 이 세상을 지옥으로 가는 대합실로 상상한 단테의 <신곡>이 군데군데 스며 들어오는 대목과 이 수용소가 단순히 우발적이고 예외적인 사례가 아니라 맹목적인 도그마의 귀결이자 나름 이방인에 대한 논리적인 존재방식의 구현이라는 그의 해석과 맞물려 우리가 과거의 비극적인 역사적 사례들을 어떤 식으로 재해석하고 활용하여 미래를 설계해야 할 지에 대한 엄중한 성찰을 권한다. 세계 어느 곳에서든지 인간의 기본적인 자유와 평등을 부정하는 것을 용납하기 시작하면 결국 수용소체제로 가게 될 것이라는 예언은 섬뜩하기조차 하다.  

한편 죽음으로 가는 여행을 떠나기 전에도 어머니들은 여행 중 먹을 음식을 밤을 새워 준비하고 아이들을 씻겼다는 대목. 그 아이들의 속옷이 철조망을 온통 뒤덮은 모습에 대한 회고. 그가 배급당번으로 지정되어 장이라는 젊은 청년과 유월의 맑은 하늘을 만끽하며 그 짧은 시간동안 그에게 이탈리아어를 가르쳐 주려고 단테의 신곡의 구절들을 기억해 내기 위하여 고군분투하는 장면은 이 비애서린 증언록에 작고 아릿한 삽화를 그려준다.

이렇게 살아나온 그가 말년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 대목은 참으로 안타깝고 아이러니하지만 그럼에도 그의 생존이 평가절하되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다. 그는 훗날 그의 수용소에서의 고통의 기억들이 격렬하거나 고통스러운 감정 대신, 자신을 더 풍요롭고 긍정적으로 만들어 주었다고 얘기한다. 인간이 어디까지 내려갈 수 있는지 그 극단의 마지노선이 뚫리는 것을 체험하고 나왔음에도 그는 미래에 대한 희망과 꿈을 얘기했다. 물론 엄중한 자기 성찰을 바탕으로. 그의 다음 얘기들은 현재의 우리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감동적인 전언이다.  

나는 이성과 토론이 진보를 위한 최선의 도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정의를 증오 앞에 놓는다. 

훨씬 더 소박하고 덜 흥분되는 진실, 차근차근, 지름길로 가지 않고 공부와 토론과 추론을 통해 얻은 진실,
확인되고 입증될 수 있는 진실에 만족하는 게 훨씬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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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0-05-27 0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요즘 책 정말 많이 읽으시네요? 저는 반성 중...
알라딘 블러그에 책 리뷰는 없고, 순 제 잡기만 올리고 있으니.. 아이고.
저는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읽으려고 사놓고, 아직도 감감 무소식 입니다.

그런데 저자가 말년에 생을 자살로 마무리 했다고 하던가요? 음.... 궁금해지네요.

blanca 2010-05-27 15:18   좋아요 0 | URL
마녀고양이님, 감기는 좀 괜찮으세요? 저는 죽음의 감기 속에 홀로코스트 관련 책을 읽는 실수를 범해서 너무 힘들어하다 오늘 급기야 병원까지 갔어요.--;; 대기실에서 아픈 사람들 보고 더 기분 우울해지고. 기침 심하게 하니 사람들 다 피하고---;; 그런데 집에 오니 갑자기 몸이 급 회복됐어요.

책은 비몽사몽 간에 너무 질러서 쌓여있구요 ㅋㅋㅋ 예, 나이 많이 들어서요. 대체 왜 그랬는지. 그런데 수용소에서 살아 남아온 사람들이 많이들 그랬다고 하네요.
 
덕혜옹주 (양장) - 대한제국 마지막 황녀
혼마 야스코 지음, 이훈 옮김 / 역사공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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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갑자기 인다. 그 해궁의 문 옆 향나무 가지에.
파도가 쳐 올라온다. 내 배가 있는 곳간 밖까지.
바다 위로 흰 구름이 북쪽을 향해 흘러간다.
밀물도 북쪽으로 서둘러 흘러간다.
그리운 아내여, 해궁의 회랑에도 바닷물 치는 소리가 들리는가. 

많은 새들이 무리지어 날개치고 있는가.
당신은 외딴집 붉은 서까래에
내가 준 하얀 진주를 걸어놓고 홀로 한숨짓고 있는가.
 

그리운 아내여, 이젠 오갈 길 마저 끊어져
사랑하는 아이를 나는 그저 안고 내내 서있을 뿐이요. 

- 소 타케유키(덕혜의 전남편)의 시 <한회> 중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소설 <덕혜옹주>가 일본인 혼마 야스코의 이 책에 빚진 바가 크다는 작가의 고백에 관심이 갔다. 덕혜옹주가 대한제국 마지막 황녀이자 일본의 조선왕공족 일본인화의 정책에 의한 정략결혼의 희생양으로 간주되어왔다는 점을 감안하면 일본여성사 연구가가 덕혜옹주를 근대여성사 연구의 일환으로 택한 것은 의외이기도 하지만 그 연구가 과연 편향적이지 않을 수 있느냐의 회의를 숙명적으로 업고 갈 수밖에 없다.  

저자는 그런 회의와 우려를 어느 정도 불식시키는 데 성공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녀는 무엇보다 일본 제국주의하에 그들의 노리개로 전락한 대한제국의 왕족에 인간적인 연민과 죄책감을 간직하고 있었고, 덕헤옹주의 여자로서의 비참하고 유린당한 삶울 지근거리에서 조망하며 진심으로 아파하고 있었다. 다만 덕혜의 남편 소 타케유키가 대마도에서 소년시절을 보낼 당시 유숙했던 히라야마 타메타로 부부가 저자의 외가였다는 사실은 아무래도 타케유키를 일관되게 호의적으로 그려내는 데 영향을 미치지 않았나 싶다. 결국 이 책의 무게 중심은 덕혜와 타케유키의 드러나지 않고 증명되지 않은 애정으로 기울고 있다.(작가 자신도 작가의 말에서 이 점을 강조하고 있다.) 국가 정책에 의한 결혼이었지만 이 부부가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는 점을 시인이기도 했던 타케유키의 여러 작품들을 해석하며 추정하고 있다. 사랑을 추측하고 그것의 논리를 세워나가는 모습이 낯설고 거부감이 드는 점이 없진 않았지만 거기에서 흘러나가는 지류들이 파고드는 작은 진실들은 유현했다. 사실과 추측을 엄밀하게 구분하고 시종일관 우리나라 독자를 인식한 듯 겸손하고 조금은 자신없는 듯 머뭇대는 그녀의 얘기들에 그래서 되레 더 공명하게 된다. 

고종이 환갑을 넘어 얻게 된 막내딸 덕혜옹주에 대한 사랑은 그가 그녀를 위해 궁내에 유치원을 만들 정도였다. 아름답고 다사로웠던 유년기는 그녀의 인생의 팔할을 덮어버린 정신병으로의 고통과 고립으로 더 애잔하게 빛난다. 그녀가 행복했던 너무나 짧고 유일한 시간들이었다. 뒤이어 일본으로 강제로 보내져 대마번주의 후예와 결혼하고 딸아이 마사에를 낳지만 그녀의 정신병 발병으로 일본에서도 대부분을 정신병원에 수감되어 지내다 박정희 정권하에서야 비로소 오매불망 그리던 낙선재에 와서 여생을 보내다 최후를 맞게 된다. 

덕혜의 삶은 그녀가 자신의 삶에서 철저히 조연으로 전락한 데에 그 비극의 핵이 있지 않나 싶다. 그녀에게 선택이라는 단어는 하나의 금기어이자 금제였다. 게다가 그녀의 인생을 무자비하게 조종한 것은 조국을 강제로 점령하고 가족을 유린한 일본이었다. 저자가 그 점을 간과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군데군데마다 그녀는 일본의 죄업을 인정하고 진심으로 미안해 하고 통렬히 분노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과도하게 옹호한다는 인상을 떨쳐낼 수 없는 덕혜의 남편 타케유키가 덕혜의 삶 전체가 망가진 근본적인 요인을 결과적으로 희석시키고 있지 않나 싶다. 저자가 일본인이라는 의식을 의식적으로 떨쳐낼 수 없는 독자의 한계도 짚고 넘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같은 작품을 일본인이 읽었다면 또다른 감상을 가질 것이다. 

한편으로 부끄럽기도 했다. 그녀의 입에서 나온 일제 감정기의 역사적 사실들이 때로는 생경하고 언뜻 바로 이해되지 않아 당황스러울 때는 과연 내가 독자로서 제대로 된 자격을 갖추고나 있나 회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일본인에게 한국의 역사를 배워가고 있었다. 3.1운동은 완벽하게 비폭력이었고 질서를 존중하고 공명정대하고자 했던 공약의 완전한 실현이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의친왕 이강이 독립국 조선의 일개 서민이 되더라도 일본 황족의 일원이 되지는 않겠다며 상하이로 가서 독립운동을 하려 했다고는 대목을 읽었을 때, 다음 문장으로 달음질치려는 나의 시선은 그들의 대의를 위한 투신에 붙잡히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의친왕의 아들 이우가 히로시마 원자 폭탄에 희생되었다는 얘기도 악연했다. 우리가 쓰고 우리가 가르치고 우리가 배우고 우리가 내면화한 역사가 한때 가해자의 후손의 프리즘을 통과해서 다시 돌아왔을 때 그 반향은 역설적으로 더 강렬하고 더 의미심장했다. 개별적 역사적 사실들이 외부자의 시선으로 걸러진 진실로 응축되어 스스로 둔중한 울림을 보내고 있었다. 그 울림은 몸 전체로 가득찼다.  

한국의 덕혜님이 오신다는 것을 아버지에게 말했더니, 아버지가 한국에 대해서는 일본이 아주 몹쓸 짓을 했으니까 언젠가는 보상을 해야 한다."라고 한 것이 머리에 남아 있습니다. 내가 덕혜님에게, "내가 당신 입장이라면 독립운동을 하고 있을 텐데, 왜 당신은 하지 않나요?"라고 물어도 가만히 계실 뿐이었습니다. 
                   -소마 유키카의 여자 학습원 생활 회고 중.(*그의 아버지는 일본 헌정의 신이라 불리는 오자키 유키오다.)

일본인이 한 얘기다. 정작 친일파 청산과 일본의 보상과 전범 처벌에 대한 더없는 관용을 베출고 있는 것은 우리다. 지금까지도 잊을만 하면 수면 위로 떠오르는 논란들, 그것이 과연 미래지향적인 관용에서 덮어두고 갈 문제인지를 직시해봐야 하지 않을까. 풀어내지 않은 고들은 살을 눌러 아프게 한다. 무책임과 무관심, 자기기만, 사리사욕으로 아무리 생채기를 감싼들 굳어진 진물 아래 상처들은 저마다의 고통의 노래를 부를 수밖에 없다.

 
인형이 입고 있는 치마.저고리의 색이 바래버린 소매 끝을 가리키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음새 안에 원래의 색이 남아있어요."라고. 자세히 들여다 보니 정말 망가지기 시작한 이음새 안쪽으로 아름다운 선홍색이 또렷이 보였다.
                                                                                                                                                   -프롤로그 중 

덕혜의 삶은 바래버린 소매 끝으로 떠올랐지만 그 망가지기 시작한 이음새 안쪽의 아름다운 선홍색도 분명 그녀의 것이다. 누구의 삶인들 소중하지 않고 나름의 의미를 지니지 않을까. 그녀 전체를 뒤흔든 시대의 질곡에는 분명 비극적 장치가 난무하지만 아버지 고종으로부터 받은 가없는 사랑들과 딸 마사에를 낳아 키우면서 순간순간 느꼈을 경이들, 남편 타케유키와의 교감들에서 눈물어린 진주나마 만들어 냈다고 생각하고 싶어진다. 아름다운 선홍색 순간순간들이 덕혜에게도 있었을 것이라고 믿고 싶다.  그녀를 동정하는 것이 덕혜의 삶 전체를 비하하는 것으로 변질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덕혜를 기억하는 것은 한 비련의 여인의 드라마틱한 인생 역정에 대한 말초적인 호기심의 발로가 아니라, 우리가 눙치려 드는 우리의 상처부위를 또렷이 들여다 보고 깨끗하게 닦아 내는 일이다. 가슴을 에이고 시리는 그 느낌들을 소중하게 모아 하나으 진주로 만들 일이다. 역사에서의 자기 반성은 현재를 담고 미래를 기탄없이 조망하는 거울을 닦는 것과 같다. 덕혜의 슬픈 눈동자가 떠오르는 그 거울을 선물해 준 저자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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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0-04-07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전 블랑카님의 리뷰가 정말 좋아요.^^
덕혜옹주의 눈, 참 깊고 슬프네요.

blanca 2010-04-08 14:02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눈만 봐도 참, 자신의 슬픈 미래를 머금고 있는 것 같아요.

노이에자이트 2010-04-07 2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권비영의 <덕혜옹주>에도 그 쓰시마 남자에 대해서 비교적 객관적으로 평가하려고 했다는데 그런 점이 낫다고 봐요.사실 거의 진부하다시피 한,일본인은 못된 가해자...류의 도식은 좀 질리니까요.권비영 씨가 이 책을 꽤 좋게 평가하더라구요.

blanca 2010-04-08 14:05   좋아요 0 | URL
타케유키가 온갖 비난 속에서도 침묵을 지켰다는 사실은 그가 분명 막돼먹은 인간은 아니라는 방증 같아요. 이 책이 훌륭한 것은 맞는 것 같습니다.

후애(厚愛) 2010-04-08 1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주를 만들기 위하여> 제목이 마음에 듭니다.
그리고 리뷰가 정말 좋아요.^^ 감사~
리뷰 잘 쓰시는 알라디너 분들이 정말 부러워요~

blanca 2010-04-08 14:05   좋아요 0 | URL
후애님의 맛깔스러운 글솜씨도 부러운걸요.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기억의집 2010-04-08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시오노 나나미를 나의 인생은 영화관에서 시작되었다,라는 책을 읽고 무척이나 실망했는데, 노인네의 편협성과 고집불통 그리고 우익적인 시각때문이었어요. 그 책에 이런 대목이 있어요. 드니로와 메릴 스트립을 깐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해도 구로사와 아끼라의 팔월의 광시곡이라는 작품에 대해 한 기자가 원폭피해자로서의 일본이 아닌 전쟁가해자로서의 일본에 대해 역사적 책임에 대해 질문을 한, 에피소드가 있어요. 그러자 이 나나미 노인네가 아니 그런 역사적인 문제를 왜 개인한테 묻느냐고 개인이 어떻게 역사를 책임질 수 있느냐는 식으로 글을 전개한 적이 있어요.
글쎄, 저는 역사를 책임지는 것이 어떤 국가나 시스템은 아니라고 보거든요. 어차피 역사라는 게 사람이 만들어내는 것이고 시각인데, 유명감독이 역사의 책임없이 그런 영화를 만들지 말라는 법은 없다고 보거든요. 우리가 몰랐던, 저 덕혜옹주의 개인사가 일반적인 대중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틀이나 시각을 바꿀 수 있다면 그건 개인의 힘이라고 생각해요. 꼭 우리가 역사가들이 만들어낸 역사가 아닌 개인의 시각으로 본 역사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그게 역사에 대한 오독이든 아니면 성찰이던지 간에 말이죠. 한국인의 시각이 아닌 일본인의 시각으로 덕혜옹주의 틀이 께졌다면 그건 대단한 일이라고 봐요^^ 리뷰 너무 잘 읽었어요^^

blanca 2010-04-08 14:08   좋아요 0 | URL
기억의 집님의 긴 댓글 너무 감사합니다.^^ 시오노 나나미 책은 솔직히 읽어 본 것이 없는데 저는 왠지 내키지 않더라구요. 무슨 얘기를 들었었는데 기억이 잘 안나는데 아마 기억의 집님과 비슷한 얘기였나 봐요. 무책임한 발언을 했었군요. 그러고 나니 이 저자를 더욱 칭찬해 주고 싶어집니다. 아. 그럼요. 개인을 내세우며 역사의 민감한 부분을 살짝 피해가는 저렴한 센스는 지양되어야겠지요.

마녀고양이 2010-04-08 1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스로 인생을 만들 수 있는 가치관이나 굳센 성격의 사람이 아니라면, 저렇게 의무에 얽어매히는 자리에는 태어나고 싶지 않습니다. '나'로서 살 수 있는 곳이 가장 소중한거 같아요.

blanca 2010-04-08 14:08   좋아요 0 | URL
저도 최근에서야 자유인으로^^;; 태어나는 것의 소중함을 깨달았답니다. 시켜줘도 못할 것 같아요 ㅋㅋㅋ

순오기 2010-04-08 1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 보셨군요, 아직 안 샀는데.... 리뷰를 보니 더 보고 싶어지네요.

blanca 2010-04-08 22:47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리뷰보고 서점가서 바로 질렀어요. 소설을 읽으셨으니 더 깊이있는 독서가 되지 않을까요? 책 표지도 참 이쁘답니다.
 
이회영과 젊은 그들 - 아나키스트가 된 조선 명문가
이덕일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09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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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인간의 존재를 표준으로 내세워서 이 세계를 안과 밖, 이쪽과 저쪽으로 구분하지 않았고, 사물과 풍경에
함부로 구획을 설정하지 않았으며...(중략)...그의 마음은 모든 보이는 것들, 보이지 않는 것들과 친화할 수 있었고,
친화로써 비밀에 닿았고, 그 친화의 힘으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의 통로를 열었고... 
                                                                                                               -김 훈의 <공무도하>

<공무도하>에서 가장 매력적이었던 인물은 여주인공 노목희가 작업했던 역사기행서의 저자 타이웨이 교수였다. 그에 대한
묘사는 이상적인 인간상에 대한 김훈의 천착과 그것을 담은 절제되고도 유현한 그의 문체가 어우러져 빛나고 있었기에 안구
속에 꾸욱 꾸욱 눌러 담고 싶은 것이었다. 

타 이 웨 이 교수를 나는 만났다.
여섯 명의 정승과 두 명의 대제학을 배출한 대명문가의 후예로서 1910년 한일합방후 지금가치로 대략 환산하여 600억 이상의 자산을 일시에 처분하고 가문전체가 중국 망명길에 올랐던 이회영 일가.
환갑이 훌쩍 넘어서도 조국을 위한 무장투쟁을 하겠다고 영국 선적의 제일 밑바닥 4등 선실에 몸을 웅크리고 떠났던 사람.
노블리스 오블리제라는 진부한 수식으로 그를 가두고 싶지 않다. 어떤 지향을 위해 몸을 던지는 것이 쉽진 않더라도 상상할 수 있는 일이라면, 세속의 잣대로 추앙받는 가진 것들을 모두 내던지는 것은 인간의 본질적 욕망을 극복해야 하는 터라 불가능에 가깝다. 그는 그것을 해내고 비참하게 빈민가를 떠돌다 마침내 산화했다.  

국사에서 근대사는 유난히 간략하고 불친절하다. 학창시절 정력적이었던 국사 선생님도 근대사는 암기할 대목만 짚고 가버렸다. 이해와 공감이 빠진 근대사 공부는 청산리 대첩의 김좌진 장군 정도만 가까스로 남기고 도망가 버렸다. 지금에서야 통탄한다. 독립운동사는 사실 민족적 자각과 우리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에 대한 본질적인 성찰의 결정적인 매개의 지점에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근현대사는 객관적이기 힘들다는 명분을 가지고 온 식민사관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인지 유난히 독립운동사에 대한 연구와 교육에 소흘해 왔다. 지금은 이미 독립운동가들이 사망한 경우가 대부분이라 복원하기 힘든 부분이 많다고 한다. 어제를 연구하는 것은 오늘을 이해하고 내일을 예견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나의 피를 따라 흐르는 선조들의 역사의식과 투쟁의 유전자를 확인하고 재생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것은 내가 나를 알고 내가 나를 사랑하기 위한 너무나 기본적인 전초작업이다. 

이 책은 아나키즘(자유연합주의)의 대동사회를 꿈꾸며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죽어간 이회영 일가와 더불어 우리가 알지 못했던 지배계층의 독립운동사를 복원하였다는 점에서 하나의 성취를 이루었다. 양반 사대부 계층은 대체로 전근대적이고 기회주의적이었다고 생각했던 나에게 이런 잃어버린 시간에 대한 복원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비단 이회영 일가뿐 아니라 이상설, 이건승, 홍승헌 등 수많은 이들이 가진 것들과 누릴 수 있는 것들을 포기하고 중국으로 망명하여 극빈 상황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이국만리에서 조국의 해방도 보지 못하고 최후를 맞는다. 그들은 일제강점하의 고국에 자신들의 시신을
반장하지 말라고 유언한다.

당시 독립운동은 민족주의, 공산주의, 아나키즘이라는 세 가지 이념으로 분열되었고 이는 해방후 결국 분단으로 치닫는
하나의 촉매가 된다. 이런 이념의 구획은 극한 상황에서의 처절한 투쟁을 버티게 하는 하나의 구심점 역할을 했던 것 같다.
필요불가결했지만 이 구획의 언저리에서는 동족을 불신하고 배신하고 죽이는 비극의 불꽃이 점화되었다. 슬픈 대목이다.
오늘의 굶주림을 참기 위해 머리 속에 채워넣어 가슴으로 끌고 내려가야 하는 그 허위의 도식에 대한 집착은 인간 본연의
한계가 아닐런지.

또한 아나키즘이 단순히 무정부주의이며 허무주의적 색채가 강하다고 회의했던 나에게  철저한 아나키스였던 그가 주장한 지방자치주의, 무상 교육에 대한 선구자적 자각은 지금의 시점에서 봐도 놀랍다. 민중이 민중전체를 위하여 혁명적 선구가 되어
차별없는 대동사회를 건설하는 그 이상주의적 이념은 인간에 대한 깊은 신뢰와 애정과 연대에 대한 희망이 본령이다. 하나의 이념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염원, 하나의 꿈, 하나의 희망이다.

입을 옷이 없어 산책가자고 하는 지인의 청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 쌀이 없어 시아버지 밥을 못지어 슬퍼하는
며느리 앞에서 퉁소를 불며 시름을 달래는 비장한 낭만을 아는 사람, 숱한 일제의 고문 앞에서도 함구하고 결국 비참하게 간 사람. 그의 삶이 외형적으로 찬란하지 않았고 오히려 동정받을 정도로 전락한 것은 그 자신의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었다.  

비루한 인간사에서
이렇게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고 공의의 지향을 위해 투신한 이의 삶을 듣는 것은 나를 살게 하는 원동력이다.
사람은 아름답다. 삶은 찬란하다. 또다른 한 켠에서 벌어지는 그 그악스럽고 던적스러운 삶이 있음을 알지만
그것만으로 고결한 가치로 열려 있는 삶의 가능성 전체를 부정하고 싶지 않다.

민족주의 태내에서 무정부주의의 성장, 그 사상적 투쟁단계 그리고 전시의 전투체제로 전환 등의 과정을 우리는 우당이란
한 사람의 생에에서 읽을 수 있다. 우당의 최후는 이 과정의 마지막 단계에서의 장렬한 산화였다.
-하기락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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