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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고통 이후 오퍼스 10
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 이후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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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고통>>은 사진 이미지를 다룬 책이라기보다는 전쟁을 다룬 책입니다. 제게 있어서 이 책은 스펙터클이 아닌 실제의 세계를 지켜나가야 한다는 논증입니다. <중략; 한국의 독자들에게>

시뮬라크라(유사현실)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 우리들이 알고 있는 세상에서의 사실은 이미지의 파고 속에서 미디어가 전하는 왜곡된 현실이거나 이미 가공자의 해석과 관점이 주입된 가상 현실로 그것을 현실로 인식하고 살아가는 것이 대중의 숙명이라면. 지금 이 책을 당장 읽고 그 부패된 껍질을 부리고 쪼아 밖으로 나가야만 한다.  

여기서는 물론 미디어의 영상물보다는 피사체를 조준하여 순간을 가두는 사진에 관하여 집중 논의한다. 특히나 유명한 사진기자들의 전쟁참사나 제 3세계의 기아, 혹은 끔찍한 살인,사망 장면을 찍은 고통을 충격적으로 재현하는 자극적인 것들을 생산해 내고 소비해 내는 대중들의 심리를 관음증, 혹은 책임 방기, 무관심, 덤덤함 등의 딱딱한 반응들에 대하여 자세히 관조한다.  

그녀는 사진은 무언가를 배제하며 구도를 잡는다는 작업으로서 골라낸 이미지로 이미 출발부터가 전혀 객관절일 수도 중립적일 수도 없다고 판단한다. 즉 타인의 고통을 자극적으로 이미지화해 충격을 소비하는 데에 익숙한 소비자에게 척 내미는 행위 자체 그것이 피사체에 대한 조준, 사진 촬영에 다름아닌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참조점을 규정해 놓으며, 특히나 집단적 기억의 기록물로서의 사진은 이것은 중요한 일이며 이것이야말로 어떤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알려주는 이야기이다, 라고 우리의 정신 속에 꼭꼭 챙겨두는 약정이라는 그녀의 해석은 충격적이면서도 설득력이 있다. 기억이란 모두 개인적이며 재현될 수 없다는 그녀의 명제에 철저히 반하는 것이니 만큼 집단적 기억이라는 것 자체에 대하여 그녀는 이데올로기의 구체화에 대한 구역질 나는 거부감을 보이는 것이다. <<은유로서의 질병>>과 상통하는 부분으로서 국가,사회가 어떤 대상이나 현상을 조잡하게 가공하여 수동적인 반응기제를 학습한 대중들에게 그들의 통치 논리를 구체화하는 도구를 교묘하게 활용하는 것을 그녀는 극렬히 성토한다.  

한편 고통받고 있는 사람의 이미지에 대한 개인적 반응에 대한 그녀의 예들과 해석이 충격적이면서도 와닿는다. 잔인한 처형 장면이나 고통에 허덕이는 이들의 사진이 몇 편 실려있긴 했지만, 가장 충격적이어서 그 잔영이 밤잠까지 어수룩하게 만들었던 것은 <백조각으로 찢겨 죽는 형벌,1905>이었다. 몽고왕자를 암살한 혐의로 능지처참당한 중국청년이 사지가 다 절단되고 피를 흘리며 고개를 위로 젖혀 눈을 치뜬 채 살아 있는 모습은 바타유가 그 사진을 서랍 속에 평생 간직하고 '황홀하기 그지없으면서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이 이미지, 고통의 광경을 담은 이 이미지는 평생 나를 사로잡았다.'는 표현에 이르러서는 대체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인간이 타인의 고통에 대하여 보이는 이 반응들은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나, 예술이라는 미명아래 이런 고통을 은근히 통렬히 즐기는 모습들이 다 용인되고 용서될 수 있는 건가? 라는 연쇄적인 답없는 질문들에 숨이 막혀 버린다. 더 나아가 '능지처참'이라는 처벌. 인간이 인간을 심판하고 처벌할 권한이 어디까지 용인되고 이해되어야 하나?라는 질문까지 확장된다.  

한편 그녀는 이런 고통의 이미지에 무감각한 인간들에 대하여도 고까운 시선을 보낸다. 냉담한 것으로, 혹은 도덕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무각각한 것으로 묘사된 상황은 따지고 보면 분노의 감정, 좌절의 감정으로 가득 차 있기 마련이라는 그녀의 해석은 도발적이기도 하고 타당하기도 하다. 그럼 연민은 어떠한가? '동행', '긴급탈출 SOS'를 보는 사람들에게서 올라오는 연민이라는 감정은? 그것은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는 않다고 느끼는 것으로서,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과 무고함을 보여주는 뻔뻔한 반응일지도 모른다는 것이 그녀의 해석이다. 사실 요즘들어 나는 금전적으로, 혹은 건강상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을 대할 때 나의 반응이 혹시 이런 것이 아닌지 자꾸 되돌아 보게 되고 도울 수 있는 부분은 도우려고 드문드문 시도중이다. 그 현실에 어느 정도 적극 뛰어들어야 나의 죄책감이 좀 덜어지지 않을까 하는 지극히 이기적인 의도이긴 하지만. 적어도 그들의 고통을 담보로 나의 안위를 자족하고 연민이라는 감정을 느끼는 것으로 나는 참 괜찮은 사람이라고 착각하지 않으려 노력은 하고 있지만.  

   
  우리가 타인과 공유하는 이 세상에 인간의 사악함이 빚어낸 고통이 얼마나 많은지를 인정하고, 그런 자각을 넓혀 나가는 것도 아직까지는 그 자체로 훌륭한 일인 듯하다.  
   

이미지로 뒤덮인 세상은 우리의 감각을 무디게 만들고 특권적인 이미지가 실종하게 된다고 한다. 더 나아가 사람들은 이런 세상 속에서 스스로 이미지가 되기를 갈망한다. 현실은 위신을 잃어버렸고, 따라서 재현만이 남게 된다는 것. 

이 책의 말미에는 그녀가 2003년 12월 독일출판협회 평화상을 받고  그녀가 행한 수상 연설 등을 포함한 몇 편의 에세이가 더 실려 있는데 그것에서 가져오고 싶은 수많은 문장들이 있다. 특히나 그녀의 수상 연설은 자국인 미국을 통렬히 비판한 아주 용기있는 지성인의 역할을 모범적으로 보여주어 심금을 울린다. 남을 욕하는 것은 쉽지만, 자기를 밖에 내놓고 비판하는 것은 평범한 사람에게는 참으로 어려운 부분이다.  특히 낡은 것과 새 것에 대한 그녀의 얘기는 그 하나로 아름다운 시구 같아 인용해 둔다. 

   
  <중략> 낡은 것 안에는 우리의 과거, 우리의 지혜, 우리의 기억, 우리의 슬픔, 우리의 현실 감각이 모두 다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중략> 새 것 안에는 우리의 활기, 우리의 낙관 능력, 앞뒤 가리지 않는 우리의 생물학적 열망, 화해를 가능케 하는 치유 능력으로서의 망각 능력이 모두 다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문학의 임무는 널리 만연된 경건함을 반박하는 것이며 또한 문학은 자유의 공간으로 들어갈 수 있는 여권이라는 주장은 문학의 지평이 얼마나 치열하게 그러나 아름답게 확장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살아 있는 말들이다.  

마지막으로 그녀의 목울대를 더듬으며 흩어져 나온, 결국은 그녀의 호흡같은 그녀의 말들. 그것으로 맺고자 한다. 

현대의 희망, 현대의 윤리적 감수성에 중심이 되는 것은 비록 막아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전쟁은 탈선이며, 비록 얻기 어렵긴 하지만 평화는 규범이라는 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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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로서의 질병 이후 오퍼스 9
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 이후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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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내 주위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수많은 현상들에 때로는 내가 관찰자로서 때로는 내가 당사자로서 반응하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나 같은 단순한 사람들은 나에게 그 현상이 무관할 때는 철저한 무관심으로, 당사자가 되었거나 흥미를 일으키는 요소가 있을 때에는 그저 그 현상이 나의 개인에게 미치는 소소향 영향에 질식하여 질질 끌려다니다 생을 마감하기 일쑤이다. 

그래서 더 현명한 사람들과 직접적으로 조우할 수는 없다지만 그것을 책으로라도 해야 그나마 생의 마감 시점에 적어도 인생에 속았다는 열패자로서의 늦은 자각이 오는 것을 피할 수 있지 않을까? 

그녀를 만난 것은 늦었지만 행운이었다. 좀 한다 하는 사람들이 마치 액세서리를 하듯, 수전 손택을 자신의 글들에 때로는 어설프고 조악하게 덧붙이는 것은 그녀가 그녀 자체로서 브랜드화된 고급 문화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기에 그저 그녀의 이름을 언급해 주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격이 조금은 높아진 듯한 착각에 빠지기 때문이다,라고 한다면 비약일까? 그녀가 그렇게나 거부했던 이미지화와 왜곡된 은유의 중심에 때로는 그녀가 놓인다는 것은 아이러니이다.  

<<은유로서의 질병>>은 그녀 자신이 실제 암을 두번이나 극복하면서 암에 비대하게 덧붙여진 사회의 잔인한 은유에 저항하고자 한 데에서 시작되었으며, 한국에 출판된 것은 후에 새로운 판본을 준비하면서 후기 형식으로 덧붙이려고 하다 거의 동등한 수준의 저작이 되어 버린 <에이즈와 그 은유>와의 합본이다. 사실 그녀는 이 둘이 겹치지 않게 하려고 노력했다고 하나 상당부분 겹치는 내용과 관류하는 공통의 흐름이 있는 것 또한 한계라면 한계이겠다. 또한 그녀는 이 둘이 문학적 성과물로 평가 받기를 바랬다고 하나 이 저작이 과학적 분석물로 평가 받은 부분에 대하여 무척이나 기분나빠했다고 한다.

일단 이 책이 그녀 자신의 암극복기에 대한 얘기가 될 거라 기대했다면 전혀 등장하지 않는 그 부분에 묘한 상실감을 느낄 수도 있다. 누구나 적당히 관음증이 있어 그녀가 암을 극복하면서 어떤 고통을 겪었는 지에 대한 내밀한 스토리가 조금은 노출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나도 그랬으니까. 하지만 그녀 자신 이런 자신의 스토리 개진을 지양한다고까지 고백하고 있고 지극히 객관적으로 수많은 사례들과 문학 작품들을 인용하면서 이것이 개인의 감정의 배설로 귀결되지 않으려 노력한 점 등은 이 책을 더욱더 돋보이게 한다. 그러니까 꼭 사서 줄 그으며 읽고, 더불어 수많은 도서 목록까지 옆에 두고 메모해 두어야 할 만큼 진지하지만, 문체의 세련됨과 지적 편력의 고귀함이 책 전체에 흩뿌리는 고상함은 아름답고 흥미롭기까지 하다. 그러니까 재미도 있다는 얘기. 그녀가 아름다운 까만 눈을 깜빡이며 조목조목 이야기를 풀어내는 듯한 이미지가 환영처럼 주위를 에워싼다. 

요는 질병은 은유가 아니라는 점과 그런 사고방식에 저항해야 한다는 것이 기본적인 주장이다. 또한 이런 속박의 대상질병으로 19세기까지 결핵이, 그 이후로는 이, 더 이후로는 에이즈가 지목되었다. 결핵은 시간과 관련된 질병으로 삶이 빠른 속도로 진행하게 하여 그것을 돋보이게 하고 정화시키는 낭만성을 가지고 있다고 은유화되었다면, 암은 공간의 질병으로 지형학적으로 은유화되었으며, 육체의 질병이다. 암은 별다른 이해력이 없는 세포들이 증식됨에 따라 우리는 우리가 아닌 존재로 대체된다는 해석은 상당히 흥미롭다. 면역학자들까지도 신체의 암세포를 비자아로 표현한다고 한다. 과대망상이라도 걸린 듯한 이 세계를 단순화해서 인식하는 데에 암의 은유는 기여하고 있는 셈이라는 얘기. 결핵은 20세기에 이르러 그것을 따라다녔던 한다발의 은유가 산산이 쪼개진 채 광기와 암의 두 가지 은유로 들러붙었다고 한다.  

그녀는 치명적인 질병일수록 무수한 의미들에 시달리고 그것은 공포의 대상들과 동일시되가 마침내 이 공포들이 다른 것들에 부과되어 형용사적 어구가 된다고 설명한다. 특히나 암을 묘사하는 지배적인 은유는 전쟁의 언어로서 그녀가 가장 끔찍해 하는 부분이라고 한다. 실지로 그녀는 반전운동을 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상당 부분의 헤게모니가 사실은 군수 산업과 전쟁을 통한 민중의 압박 및 공포 정치에서 나왔다는 것은 소름끼치지만 묵과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리고 이것은 소수만 인지하고 다수의 대중은 그것에 철저히 이용당하고 유린당해도 스스로는 주체적으로들 삶을 이어나가고 있다고 착각한다. 

<에이즈와 그 은유>의 서두에서 그녀가 내리는 은유의 정의가 날카롭다. 그것이-아닌-다른 것으로, 또는 그것이-아닌 다른 것처럼 보이는 것으로 어떤 사물을 부르느 것은 철학이나 시만큼 오래된 정신작용이며<중략> 

   
 

내 책의 목적 또한 이런 상상력을 부추기기보다 가라앉히는  것이었다. 전통적으로 문학이 자신의 목적으로 삼아 이루려 노력했던 일종의 의미 부여가 아니라 뭔가에서 의미를 빼앗는 것, 극히 논쟁적인 전략을 활용해 돈키호테 마냥 지금의 이 세계, 이 신체에 가해진 "해석에 반대하는 것'이 내 책의 목적이었던 셈이다.  

 
   

이 대목은 그녀의 질병으서의 은유에 대한 가장 핵심적인 생각을 보여준다. 그녀는 의미를 빼고 해석에 저항하기 위하여 그 은유를 과감하게 공격한다.  

에이즈는 알려지지 않을 수도 있었던 그 누군가의 정체성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는 동성애자, 혹은 난잡한 성교자로서의 낙인이다. 에이즈에 걸렸다는 것만으로 때로는 아주 우연한 기회에 운나쁘게 감염되었을지라도 그는 아주 불쾌한 징조가 되고 만다.  

그녀는 또한 국가와 언론이 종말론적 사고와 그것의 전파에 탐닉하는 현상을 두고 최악의 각본을 애호한다는 사실은 통제할 수 없다고 여겨지는 공포를 지배하려는 욕구를 반영해 준다고 지적했다. 이는 작금의 신종플루 유행에 대처하는 한국 언론들의 자세와도 무관하지 않다. 공포를 조장하는 것은 그 공포에 대한 허구의 통제력에 대한 희구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이는 더 나아가 질병들로 인한 세계의 종말론까지 확장된다. 백지 상태의 출발, 이것은 강대국 (그녀는 자신의 조국을 지칭하는 과감성을 보이지만)의 대중을 압도하는 장악력에 대한 탐욕의 음모와 다름 아니다. 즉 사실 질병으로서의 은유 그 자체가 과학적 설명의 부재에 대한 공포에서 출발하지만, 대중을 효과적으로 억압하고 고도의 정치적 전략을 효과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장치로 이용되었다는 얘기이다.

번역자 이재원의 번역도 유려하고 그가 말미에 덧붙인 도서 목록도 아주 유용하다. 그녀를 시작하기에 가장 그녀다운 문체와 통찰력이 돋보이는 책이 아닌가 한다. 적어도 입구에서 질식하여 그녀를 탐험하는 것을 저어하게 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 다음은 대중의 치졸한 관음증을 조망한 책 <타인의 고통>을 보고자 한다. 유한한 인생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일들에 수동적으로 치여 주체적이지 못한 삶을 살아가는 데에 그녀는 아픈 일침을 가할 수 있는 좋은 질료가 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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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러피언 드림 - 아메리칸 드림의 몰락과 세계의 미래
제레미 리프킨 지음, 이원기 옮김 / 민음사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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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러미 리프킨은 예전 상사가  '노동의 종말'을 언급했던 때 듣기만 해도 지루하다는 생각(ㅋㅋ)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말 신기한 것이 그런 작가의 이름을 꽤 오래 기억의 창고 속에 넣어두고 있었다는 것...돌아서면 만난 사람의 이름도 잊어버리는 나에게는 참으로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고노무현 대통령이 꼭 이런 책을 써보고 싶다고 극찬했다는 대목에 '그래 한 번 해보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재미없는 책은 정말 싫어라 하는데 받아보고 책의 두께와 딱딱한 문체에 처음부터 겁에 질린 것이 사실...'아..이렇게 또 읽다 말겠구나...' 

그러나 그러나 이 책 정말 멋지다...물론 사회과학책의 특성상 정말 재미있어 책장이 마구 넘어간다는 거짓말은 못하겠다..하지만 정말 읽을만 하다.. 후반부로 갈수록 작가의 긍정적이고 아름다운 세계관에 '그래..우리는 진보하고 있는 거야..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는 거야..'라고 마구 끄덕거리며 신이 나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만나게 해 주신  두 분에게 정말 '고맙다'고 하고 싶다. 두 분 다 이제 뵙기는 요원해졌지만... 

세계적인 연결과 동시에 지역적으로 소속감을 갈망하는세대는 포괄성,다양성,삶의 질,지속 가능성,심오한 놀이,보편적 인권,자연의 권리,평화에 중점을 두는 유러피한 드림에 점점 더 매력을 느끼고 있다.물론 유러피안 드림이 아메리칸 드림과 대척점에 설정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대결 구도로 유러피안 드림을 파악하는 것보다는 지금 이 혼돈의 절망의 시대에서 나아가야 할 새로운 길을 설명하고 지칭하는 데에 EU의 지향점을 시작으로 풀어나간 것 같다. 이 둘의 기본적인 차이는 자유와 안전에 대한 시각차에서 비롯되며 미국인들은 자유를 자율과 연관지어 재산소유로 배타적인 안전이 비롯된다고 보았고, 유럽인들은 상호관계에서 포괄성이 생겨나고 그로 인해 안전이 보장된다고 보았다. 이 책의 훌륭한 점은 이 한권으로 대략적이나마 유럽과 미국의 역사를 개관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민족국가의 등장과 자본주의가 결국은 근대에 개인이 재산을 사유할 수 있게 되었고, 그 재산을 효과적으로 보호하기 위한 통로였다는 사실과 이주로 이루어진 미합중국이 그 개념을 가장 열정적으로 받아들여 아메리칸 드림의 근간으로 활용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미국인들은 현대에도 자유시장 경제와 정부가 아메리칸 드림의 보증 역할을 한다고 맹신하고 있으며 이는 더 많은 미국인들이 정치에 소외되는 결과를 낳았고 종국에는  대기업이 미국을 다스리고 있다는 평까지 나오고 있다. 어쩌면 우리나라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자본이 모든 가치체계를 흔들다 보면 기본적 인권 개념은 자연히 약화될 수밖에 없다. 하나 이러한 적대적인 시장모델에서 새로운 네트워크 시트템이 태동하고 있으며 이 안에서는 자유는 재산소유보다는 네트워크에 소속됨으로써 확보된다. 무엇보다 네트워크안에서는 모든 인간의 선한 동기를 가져야 윈윈할 수 있다고 한다. 또한 네트워크 통치는 다중심 통치 스타일로서 강압적인 아닌 포용성이 강조되야 하며, 지시를 내리는 군사령관보다는 중재자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보았다. 의미심장한 대목이다.

특히 사형에 관한 대목이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EU가 세계의 다른 모든 나라들과 공유하고자 하는 최상의 원칙이 사형의 폐지라는 대목에는 사실 약간 충격도 받았다. 너무나 미묘한 문제라 대놓고 나의 가치관을 피력한 적도 그렇다고 깊이 숙고해 본 적도 없는 논제였으나 마음 깊은 곳에서는 폐지에 미온적이었나 보다. 이 책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기본적인 흐름도 인간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보편적 인권에 대한 깊은 신뢰이고 이것은 자동적으로 인간이 인간을 심판하고 그 생명까지 처단할 수 있는 사형의 권한에 대한 기본적인 거부감이 있는 것 같다.

한편 아메리칸 드림에 대한 고찰중에 저자가 진보적인 민주당 대통령이 선출된다 하더라도 미국이 패권주의 외교 정책에서 크게 벗어날 가능성은 없다는 대목은 자칫 섬뜩하기까지 했다. 현 오바마 정권의 외교정책이 전임정권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마치 예견한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이는 정권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기본적인 미국인들의 가치관에 관련된 문제인 것 같다. 아메리칸 드림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으므로...

후반부에는 아시아에 대한 얘기가 언급되어 있어 흥미롭다. 저자는 아시아인들과 아시아 국가들이 네트워크통치체제, 초국가적 공간, 글로벌 의식을 형성하는 데 유럽인들보다 더 적합할 수도 있다고 보고 있다. 유교,불교,도교의 전통으로 전체에 촛점을 맞추는 시스템적 접근법이 그것이란다. 그러나 과도한 집단주의의 한계또한 지적하고 있다. 제2의 EU를 기대해 볼만한 것인가. 

마지막으로 유러피안 드림의 보편화를 논하면서 저자는 바필드가 프로이트의 인간의식의 발전과 역사의 발전을 비유한 대목을 차용한다. 아기때 엄마와의 일체감을 잃으며 느끼는 죽음의 두려움이 문명의 역사를 이끌어 왔으며, 이는 '죽음 본능'을 외부에 투사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현재 인간은 인간의 자유의지로서 자연과 재결합하는 세번째 단계에 접어들고 있다고 한다. 이는 깊은 공감에서 '다른 존재'에 개인적으로 접촉하는 것을 가리킨다. 또한 인류의 미완성 임무는 지구를 구성하는 더 큰 생명 공동체에 대한 '개인적 책임 의식'의 확립이다. 이 부분에서 환경운동 및 거기에 대한 동참이 단순한 기호의 문제가 아니라는 깨달음이 따른다. 봉사활동과 기부,환경보호 등이 사실은 더 큰 생명 공통체에 대한 자그마한 책임행동이리라. 

이 책을 흐르는 기본적인 담론은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신뢰이며 미래에 대한 낙관인 듯 하다. 그래도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향해 인간들이 개인의 안위 그 자체보다는 더 큰 공통체에 소속되어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고 타인의 욕구를 이해하고 존중하고 또 그러고 있다는 것...비폭력 대화의 공감과 칼 로저스의 상담이론에서의 공감과 트라이앵글이라도 이루는 듯한 모습...'공감' 너무 큰 메시지이다. 

오늘도 뉴스에서는 북극 얼음이 녹고 있고, 시국 선언은 이어지고, 북핵위기는 사면초가라고 한다. 이제는 진정 리프킨의 말처럼 자본의 사유를 통한 안전감의 확보가 아닌, 더 큰 생명 공동체에 대한 소속감과 책임 의식으로 존재감과 안전감을 얻어야 할 시점인 것 같다. 유러피안 드림은 선택이 아닌 생존을 위한 최후의 보루인 것 같이 느껴져 왠지 서글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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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9-06-23 1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고 갑니다. 역시 제레미 러프킨이네요. 근데... 요즘 유재현의 '아시아를 걷다'를 읽고 있는데... 아시안 드림은... 젬병인듯... ㅠㅜ

blanca 2009-06-23 22:11   좋아요 0 | URL
잘 읽으셨다니 기분이 좋네요^^ 아시안 드림...저도 사실 회의적이긴 한데 희망을 가지지 않으면 오늘이 너무 슬퍼지니까요

이용빈 2021-11-24 11: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독후감 잘 읽고 갑니다. 개인의 욕망에서 세계의 발전 동기를 파악하고 개신교적 이윤동기를 추구해온 아메리칸드림은 양극화된 사회의 표상에 머물러버린 실패한 꿈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20세기로 시대전환 의 시기에 우리가 꽃피우지 못한 동학의 꿈은 한반도 공동체가 21세기 새로운 시대전환의 꿈으로 던지고 승부를 걸어볼 가치가 전지구적 규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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