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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 지음, 이창신 옮김 / 김영사 / 201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으로 숨진 박지연 씨의 어머니는 삼성에서 합의금을 받는 조건으로 산재 소송 포기 압력을 받았다고 한다. 치료비로 큰 빚을 진 그는 소송을 포기하지만 뒤늦게 후회했다고 한다. 아이의 죽음을 땅에 묻고 진실을 숨기려는 그들에게 이용당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한겨레21 819호 참조> 

인간은 자유를 누릴 자격이 있으니, 물건 취급 받아서는 안 되며, 존엄성을 가진 존재로 존중받아야 한다.
-p.139  

인간의 존엄에 관한 응시가 특별한 것처럼 보이는 시대에 살고 있다. 물질적 풍요와 사회적 성취가 개인의 미덕을 실증하는 것 같은 환각에 너도나도 취해 살고 있다. 어쩌면 우리가 중시하는 가치를 분배하는 기준에 대하여 묻는 것은 지극히 도발적이고 원론적인 문제로 회귀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존재하는 방식이 곧 그래야만 하는 방식으로 오도되는 사회 속에서 우리는 숨이 막힐 때마다 나의 노력이 부족하지 않았나를 돌아보아야 함을 강요받고 있다.  

하버드 대학의 극장식 강의실에서 천여 명의 학생들 앞에서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찌른 채 정의란 무엇인가를 묻는 그도 사실은 이 사회에서는 혜택받은 소수에 해당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례적으로 이 책을 집어들게 된 것은 사실 정의가 무엇인가가 진심으로 궁금해서라기보다는 하버드 대학의 뜨르르한 강의를 나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는 하나의 허영 때문일런지도 모른다. 솔직히 나도 그랬다. 그리고 내용이 명성보다 빈약할 거라 지레 짐작했다. 정의란 무엇인가로 가는 길은 칸트식으로 말하면 전혀 주체적이지 않은 욕망에 반응하는 행위였다.

아리스토텔레스, 벤담, 존 스튜어트 밀, 칸트, 존 롤스에 이르기까지 이름만 들어도 버석거리고 하품부터 나오는 인물들의 사상에서 정의에 관련된 핵심만을 추출하여 착착 들러붙게 설명해 주는 그의 입담은 명불허전이다. 고등학생 때 이런 책을 접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을 정도다. 깊이 그 자체를 놓고 본다면 이론이 있을 테지만 이 책이 강의에 기반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상당히 만족스럽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요체는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그 자체라기보다는 그 질문을 던질 때 짚고 넘어가는 대목들에 대한 이정표다. 특히 개인의 절대적 자유와 정부의 윤리적 가치적 중립을 지지하는 현대 사회에서 공동체 안에서의 개인의 정체성과 잘 산다는 것에 대한 열린 토론에 대한 주목은 당연한 것 같으면서도 흘려보낸 것들을 뒤늦게 챙겨 보려는 시도처럼 느껴진다. 요컨대 그는 정의에 대하여 고민하는 것을 좋은 삶에 대한 논의를 간과하고는 거의 불가능하고 바람직하지 않다고 역설한다. 이 책은 좋은 삶에 대한 논의에서 출발하여 그것에서 끝마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리주의 그것의 허점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지향하는 공리주의의 약점은 알려진 바와 같다. 개인의 권리를 존중하지 않고 행복을 계량화했다는 점이다.  이 공리주의를 주창한 벤담의 죽음과 관련한 에피소드가 흥미롭다. 교수가 강의 시간에 우스갯 소리를 해서 조는 학생들을 깨워주려는 시도처럼 마이클 센델의 얘기는 독자들을 유머로 오히려 바짝 조인다. 벤담은 자신의 시신을 방부 처리하여 보존 전시하라고 유언했다. 그래서 현재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에 가면 그의 사색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한다. 1980년 국제벤담학회 창설 모임에서는 이 방부 시신이 참석했다. 엽기적인 대목은 그의 두 발 사이에 놓여 있었던 진짜 머리를 학생들이 훔쳐 가 자신들의 요구 관철을 위해 이용했다는 점이다.  

 

인간 간에 사고 팔 수 있는 것들에 대하여 

다음으로 등장하는 자유지상주의는 사실 오늘날까지도 진행중이다. 이는 최소국가론을 지지하고 자유시장을 떠받든다. 공리주의와 자유지상주의는 둘다 자유시장의 홍위병들로 이용된다. 여기에서는 주목해야 할 사례가 제시된다. 미국의 군대가 경제적 교육적 혜택을 받기 위한 하류층 젊은이들로 채워진다는 대목이다. 시장을 이용하여 군 복무를 할당하게 되면 정책 입안자들의 자녀가 연결될 확률은 극히 미미해지고 점점 전쟁을 더 쉽게 일으키고 인명살상을 더 하찮은 것으로 간주하게 된다는 것이다. 다수의 시민과 그들 이름으로 싸우게 되는 군인 사이의 연결 고리가 끊어지는 지점에서는 평화 대신 호전적 기운이 스멀스멀 기어나오게 되는 경향이 있다. 예리한 지적이다. 자유로운 계약 관계에 의하여 돈이 오고 가는 관계가 그 자체로 정의로울 수는 없다는 방증 같다. 초입에 거론했던 삼성의 행태도 이와 연관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돈이 오고 가고 박씨의 죽음이 산업재해가 아닌 것으로 묻힌다는 가정은 그녀를 위시한 투병중인 나머지 직원들의 인간적 존엄성에 대한 거대기업의 대우가 정의롭지 못하고 부당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게 한다.    

 

칸트가 말하는 진정한 자유란

자, 이제 우리는 주민들이 그가 산책나오는 모습을 보고 시계를 맞췄다는 그 유명한 에피소드를 가진 칸트로 돌아가 볼 차례다. 그의 인간 존엄에 대한 통찰은 가슴벅차다. 칸트가 인간이 그 자체로 숭고하고 존중받을 귀중한 존재임을 역설한 대목도 보편적 인권 개념의 태동을 알리는 장중한 서막이지만 그보다 자유롭게 행동한다는 것을 재정의한 부분은 꼭 유념해서 들어 둘 필요가 있다. 그가 얘기한 자유로운 인간은 천성이나 사회적 관습에 따라서가 아니라 내가 나에게 부여한 법칙에 따라 행동하는 인간이다. 욕구에 반응하여 행동하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 전혀 자유롭지 않다. 내가 오늘부터 믹스커피를 끊기로 했다면 그것을 안마시는 것이 진정한 자유를 만끽하는 것이지 욕구에 반응하여 벌써 두 잔째를 들이키고 있다면 지극히 타율적인 인간이란 얘기다.(내얘기다) 동정심에서 나온 선행도 그의 눈으로 보면 불순하다. 어떤 목적을 지향하는 수단으로서의 행동과 다른 인간에 대한 특별한 애착, 공감에서 나오는 행동들도 칸트의 눈살을 찌푸리게 할 것이다. 그는 특정하다,는 어휘를 경멸한다. 엄격한 도덕주의자가 지향하는 절대 보편의 세계는 불가능하고 이상적일 것 같으면서도 지극히 매혹적이다.   

 

노력하면 다 된다고?

 이제 존 롤스가 나온다. 평등한 출발선 그 자체마저도 불신하는 그는 재능있는 사람도 기실은 그것이 도덕적 우연에 불과하다고 역설한다. 노력을 한다고? 그 노력할 수 있는 것도 능력이다. 최선을 다했으니 그것을 받아도 온당하는 말은 그에게 넌센스다. 저자는 한 몫 더 거든다. 성공을 우리 노력의 결실로 여길수록 뒤처진 사람들에 대한 책임감은 줄어든다,는 그의 지적. 우리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다. 현사회에서 능력위주 시스템이 가지는 맹점에 대하여 직시하게 만드는 그의 지적은 결국 인간의 존엄 그 자체에 대한 응시로 귀환한다. 그러니 칸트와 롤스는 만난다.   

 

자유로운 개인을 붙잡는 지점 

이제 결국 마이클이 강의실에서 천 명을 불러모은 위력을 실감해야 하는 대단원이 오른다. 다 좋다. 개인의 자유를 지지하고 인간의 존엄을 응시하고 그런데 이게 과연 공동체의 선과 어떻게 연결된단 말인가? 상충하는 대목 아닌가? 공동체 속에서 인간의 자유를 어떻게 누리게 해 줄 생각인가 우리는 궁금해진다. 답변은 몽환적이기도 하고 낭만적이기도 하고 물렁거리기도 한다. 

그는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의 입을 빌려 이야기하는 존재로서의 우리가 서사의 탐색으로서 살아가는 삶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그 전에 나는 어떤 이야기의 일부인가에 먼저 답변해야 가능하다고 한다. 도덕적 고민은 내 의지를 드러내는 것이라기 보다는 내 삶의 이야기를 해석하는 것에 가깝다는 통찰은 역사 속 공통체의 일원으로서의 현재의 후손들이 과거의 잘못을 배상하고 사죄해야 하는 근거가 되어 준다. 연결된 지점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개인의 절대적 자유만을 주창하다 보면 우리는 왜 일본이 과거사에 대하여 우리에게 사과하고 배상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거를 찾아 낼 수가 없다. 그것은 그들이 그들이기 위하여 우리가 우리가 되기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통과의례다.   

 

좋은 삶 그 막연하고 아리송한...그러나 의미있는...

우리가 존경하는 것은 자신의 삶을 더 큰 삶의 일부로 이해하고 감당하는 기질이다.<중략> 인격을 갖춘다는 것은 여러 부담을 인식하며 사는 것이다.
-p.330 

결국 마지막은 다시 처음과 맞물린다. 우리는 좋은 삶에 대하여 진지하게 공론화해야 한다. 그 좋은 삶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더 큰 삶의 일부로서이다. 모호하고 두루뭉술한 결론일 수 있다. 그러니 이 책은 다시 물음표를 찍으며 마친다. 수많은 질문들을 촉발하는 불온하고 혼란스러운 책으로서 이 책을 권할 수밖에 없다. 딛고 선 땅이 흔들리고 삶의 좌표가 요동치는 경험은 그 자체로 특별한 것일테니. 질문할 수 있다는 것은 현재의 틀을 부수고 더 넓은 지평으로 나아갈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의 점화일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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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2010-07-21 1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한창 회자되는 책이라서 관심이 있었지만, 근거없는 편견때문에 미뤄두었던 책입니다.
정의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 명확한 답을 기대하는 저로서는, 좋은 삶을 먼저 짚어야 한다는 말이 김빠진 맥주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매우 현실적인 답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면 좋은 삶이 어떤 것이냐?라는 물음으로 돌아오는데, 아마 개인의 문제가 공동체 안에서 고민되고 해결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삶이 아닌가 싶습니다.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의 비판> 서문에 쓰인 "인간은 언제나 해결할 수 있는 과제만을 스스로 부과한다..."라는 말이 그러하듯이, 좋은 삶이라는 질문을 던진다는 것은 뭔가 현안을 해결할 수 있다는 말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blanca 2010-07-21 21:39   좋아요 0 | URL
굿바이님 저도 내용 완전 빈약할 거라 단정짓고 원래 안읽으려고 했는데 하도 난리들이라 궁금해서 읽어 봤답니다.^^ 그런데 의외로 일단 재미있고 정치철학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서 쏙쏙 들어오게 해주더라구요. 그리고 아무래도 사례를 아주 적절하고 재미있게 들어주니 딱 강의실에 앉아 있는 느낌이더라구요. 결론은 질문을 던지다 김빠지는 부분도 없지 않아요. 저는 이 쪽 책을 많이 안읽어서 그런지 부담 안가지고 생각 안해 봤던 문제들을 한번 되돌아 보는 기회가 되어 좋더라구요.

herenow 2010-07-22 0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정말 책을 다시 집어들도록 자극하는 서평인데요.
도입부분 완전 공감했습니다.
평소엔 대충 넘어가는 것들에 대해 의미를 되짚어보게 하는 책이죠.
좋은 글 감사합니다. ^ ^*

blanca 2010-07-22 21:13   좋아요 0 | URL
herenow님, 아, 네임이 너무 좋네요. 사진도. 반갑습니다. 소문 난 잔치 먹을 것 없다,는 속담이 무색해질 정도로 저한테는 참 괜찮게 느껴지더라구요. 아무 생각없이 지나가는 것들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짚고 넘어갈 수 있어 참 좋았습니다. 대학생 때 이런 강의를 들을 수 있었다면 참 좋았을 것 같아요.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만들어진 모성 동녘선서 102
엘리자베트 바댕테르 지음, 심성은 옮김 / 동녘 / 2009년 2월
평점 :
절판


극심한 산고 속에 아이를 세상에 내어놓고 나는 안도했다. 진통이 더이상 내가 감내할 수 없는 수준임에도 그것은
온전히 나의 것이기에 떨쳐 낼 수 없었다. 나는 그 어떤 곳으로 도망갈지라도 그 몸서리쳐지는 고통의 마침표를 함께 챙겨서
가지고 가야 했다. 그리고 엔딩.  안도하고 또 안도했다. 한쪽 눈을 가까스로 뜨고 나처럼 도톰한 입술을
오물거리며 다가오는 그 무력한, 그 속수무책의 생명체에 어떻게 감동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나는 진통의 와중에도 지르지 않았던 비명을 나의 아기와 마주하며 지르고 말았다. 눈물이 흘렀다. 

여기까지. 나의 모성애는 어쩌면 여기까지였나 보다. 딸내미가 돌까지 나 아닌 그 누구에게도 안기지 않고
두 돌까지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밤새 깨고 악을 쓰며 울어대는 저력을 과시했을 때 나는 깨닫게 되었다.
 

모성애가 얼마나 허위적인 개념이고 얼마나 불완전하며 불확실한 것인지. 그리고 비교적 온순하고 안정되어 있다고
착각했던 나의 성격이 얼마나 치사하고 다혈질인지도 새삼 알게 되었다. 주변의 조언을 구하기에는 모두가 너무 힘들고
비슷한 과정을 겪고 있었다. 다 스스로가 모성애가 부족하고 나쁜 사람이라는 새로운 깨달음에 압도되어 상대의 고통을
귀담아 들어줄 여유가 없었다. 육아서적들. 한 권을 끝내는 그 동안 만큼은 참고 또 참고 견딜 수 있었다. 육아서적들은
공통점이 있었다. 초기 삼사 년 간 어머니의 역할이 한 인간의 전생을 지배할 수 있다는 것. 그러니 영유아기의 어머니는
자신의 그 절대적인 영향력을 주지하고 그저 무조건 인내하고 최선을 다할 것. 그러니 나는 또 죄책감을 느끼며 아이의 수면습관을 잡아 보겠다고 일지까지 기록해 가며 참 무던히도 애를 썼다.  

그리고 아이가 세 살이 된 지금 나는 깨달았다. 요즘 시중에 나오는 그 수많은 육아서들의 맹점이 기실은 엄마들의 죄책감을
더 자극하고 있다는 것
을. 유아기 때의 중요성이 부각될수록 주양육자의 희생의 강도와 완전함에 대한 강박은 더 증대된다.
아이를 전업으로 돌보든,  조부모에게나 기관에 맡기든 나름대로의 안타까운 아킬레스건은 다 있기 마련이다. 조기교육이
각광받고 유아기 때의 정서적 지적 자극에 대한 과도한 스포트라이트가 가지고 있는 음지는 어쩌면 결정론적인 사고를 조장하여 초중등 자녀를 둔 부모의 열패감을 불러일으키거나 유아를 돌보고 있는 엄마들에게 무조건적인 모성애를 강요하게 되는
것이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이 책의 저자인 엘리자베트 바댕테르는 파리 이공과대학 철학교수로 재직했고 프랑스 전법무장관의 아내로 세 아이를 둔 어머니다. 그녀는 극렬한 페미니스트라기보다는 남성과 여성의 상보적인 역할을 강조하였고 이 책을 통하여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이어져 내려온 여성에 대한 모성애의 강요가 어떤 허점과 허구를 가지고 있는지를 프랑스의 역사 사회적 배경 등을 통해
조망한다. 중상류증의 다른집 아이들에게 젖을 물리기 위해 자신의 아이에게 젖을 물리지 못했던 하층민 출신 유모들에 대한 얘기는 사교계의 장식품 역할이 주는 환각에 취해 정작 자신의 아이들은 그 유모들에게 맡기고 돌아보지 않은 상류층 부인들의 얘기와 맞물려 비감어리다. 특히나 에밀의 <루소>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어떻게 여성성의 올가미를 만들고 집 안에 여성들을 유폐시키기 위해 활용되었는 지에 대한 설명은 흥미롭다. 어제는 <만들어진 우울증>에서 박수받고 오늘은 <만들어진 모성>에서 비난받는 프로이트에게 심심한 위로를. 

발자크의 문학작품들, 각종 사회통계 자료들을 적시에 인용하여 시대순으로 모성애에 대한 관념 및 풍조를 고찰하며 흥미롭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작가의 예리한 통찰력이 놀랍다. 다만 팔십년 대에 초판이 나온 만큼 현 상황에 꼭 들어맞지 않는 부분이 있고, 프랑스를 배경으로 한정하였기 때문에 느끼는 위화감, 부성애를 촉구하는 이상주의적이고 뒷심이 부족한 듯한 결론에 약간의 아쉬움을 가져본다.  

내가 없으면 안되는 무력하고 연약한 생명체에 전적으로 희생하기를 강요당하는 것이 전적으로 불합리한 일은 아니다. 다만 모성애도 불완전하고 불안한 감정일 수 있고 그것에 전적으로 의지하여 모든 양육의 책무와 결과론적 책임을 어머니에게 떠맡기지는 말아달라는 것. 또 나쁜 엄마, 혹은 무책임한 엄마라고 스스로를 재단하며 자신의 욕망을 체념하는 데에 익숙해지지 말 것. 이런 전언들은 결국 나에게 가서 꽂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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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체오페르 2010-02-20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하며 리뷰 잘 봤습니다. 다시한번 어머니의 위대함과 당신에 대한 미안함,고마움을 느낍니다.

blanca 2010-02-20 22:03   좋아요 0 | URL
이 댓글이 저를 더 감동시킵니다. 미안함과 고마움이라니 완전 위로됩니다.^^
 
나쁜 사마리아인들 - 장하준의 경제학 파노라마
장하준 지음, 이순희 옮김 / 부키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국방부 불온서적 리스트에 들어감으로써 오히려 마케팅 효과를 누린 책이다.
장병정신교육에 안좋다고 판단되어 군내 반입이 금지되고 회수까지 될 수 있단다.
다 읽고 나서는 조금 허무했다. 신자유주의의 폐단을 지적했다고 해서
그것이 과연 자본주의의 발전에 위해를 가할 수 있는 위험성으로 확대 경고되어야 하는 것인지 의문스러웠고,
그 경고가 나온 호들갑스러운 두려움이 연약한 열등감과 강대국들에 대한 과잉 충성의  발로가 아닌가 해서
씁쓸했다. 사실 우리나라는 이 책에서 언급되는 개발도상국도, 이미 부른 배를 두드리며 신자유주의의 교주로 군림하는
나쁜 사마리아인도 아니지만, 일단 신자유주의의 교리에 동감하고 있으면서 나쁜 사마리아인들이 개발 도상국 부리듯
시키는 일들도 비교적 고분고분하게 하고 있으니 어쩌면 가장 찔리고 아픈 독자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케임브리지대학 경제학과 교수인 장하준 교수가 영어로 쓴 책의 번역본이다.  
사실 사마리아인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르게 부정적인 늬앙스를 가지고 있다. 곤경에 처한 사람을 이용하는 성향이
있는 부정적인 민족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성경에서 얘기되다 강도당한 행인을 도운 에피소드가 부각된 경우이다.
그러니 착한 사마리아인은 역설적으로 사마리아인들이 착하지 않다는 얘기도 되겠지만, 여하튼 여기에서는 그것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차용되었고, 미국,영국 등의 강대국들이 개발도상국들에게 규제철폐와 민영화, 그리고 국제 무역과 투자에 대한
개방이라는 신자유주의의 핵심적인 아젠다를 강요하며 불공정 게임에 끌어들이는 행태를 비난하고 있다.
정작 그들은 자국의 부가가치가 높은 제조업을 육성하는 기간 동안 철저하게 보호무역을 해오다 시장확대의 한계에 부딪히자
개발도상국들에게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문을 다 열어젖히라고 강요하는 격인 것이다. 그는 어리고 연약한 아이들에게
비용을 들여 교육을 시키면서 투자하고 보호하며 생계의 전장에 나갈 것을 유예하는 것은 당장 비용이 발생하더라도
결국 그 아이가 적당한 능력을 갖추는 성인으로 성장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비유로 든다.  
개발도상국들이 자국내 유치산업을 일정기간 보호하는 것은 충분히 타당한 것이며 생산성의 증대에도 결론적으로 도움이 된다.  

날로 강화되고 있는 지적 재산권에 대하여그가 들려주고 있는 이야기들이 주목할 만하다.
인터넷에서 사진 하나를 퍼와도 음악 하나를 올려도 갑자기 경찰서에 출두할 수 있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의 발달된 무개념 복제문화의 타락에 대한 방증이 아니라 선진국들이 자신들의 아이디어를 독점하고 거기에 접근하고자
하는 개발도상국들의 시도를 어느 정도 차단하기 위한 음모가 숨어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지적소유권 제도가
새로운 아이디어의 창출을 격려하되 사회에는 최대한 낮은 비용을 부과한다는 본래의 목적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그 자체보다는 그것을 통해 권력의 헤게모니를 틀어쥐려고 하는 강대국들의 빤한 행태를 비난하고 있고,
거기에 무비판적으로 부화뇌동하는 우를 범하지 않을 것을 조언하고 있다. 이 조언은 알아듣기 쉽고 친절하다.
다만 번역투의 문장이 조금 거슬리고(자꾸 한국인 저자임을 떠올리는 한계때문일 수도), 똑같은 얘기를 반복하여
지루한 감이 있는 것이 한계라면 한계이다. 좌편향이냐 우편향이냐를 가름할 건덕지도 없는 책인 것은 분명하고
기본적인 경제지식을 쌓기 위해서라도 읽어 둘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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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고통 이후 오퍼스 10
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 이후 / 2004년 1월
평점 :
품절



<<타인의 고통>>은 사진 이미지를 다룬 책이라기보다는 전쟁을 다룬 책입니다. 제게 있어서 이 책은 스펙터클이 아닌 실제의 세계를 지켜나가야 한다는 논증입니다. <중략; 한국의 독자들에게>

시뮬라크라(유사현실)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 우리들이 알고 있는 세상에서의 사실은 이미지의 파고 속에서 미디어가 전하는 왜곡된 현실이거나 이미 가공자의 해석과 관점이 주입된 가상 현실로 그것을 현실로 인식하고 살아가는 것이 대중의 숙명이라면. 지금 이 책을 당장 읽고 그 부패된 껍질을 부리고 쪼아 밖으로 나가야만 한다.  

여기서는 물론 미디어의 영상물보다는 피사체를 조준하여 순간을 가두는 사진에 관하여 집중 논의한다. 특히나 유명한 사진기자들의 전쟁참사나 제 3세계의 기아, 혹은 끔찍한 살인,사망 장면을 찍은 고통을 충격적으로 재현하는 자극적인 것들을 생산해 내고 소비해 내는 대중들의 심리를 관음증, 혹은 책임 방기, 무관심, 덤덤함 등의 딱딱한 반응들에 대하여 자세히 관조한다.  

그녀는 사진은 무언가를 배제하며 구도를 잡는다는 작업으로서 골라낸 이미지로 이미 출발부터가 전혀 객관절일 수도 중립적일 수도 없다고 판단한다. 즉 타인의 고통을 자극적으로 이미지화해 충격을 소비하는 데에 익숙한 소비자에게 척 내미는 행위 자체 그것이 피사체에 대한 조준, 사진 촬영에 다름아닌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참조점을 규정해 놓으며, 특히나 집단적 기억의 기록물로서의 사진은 이것은 중요한 일이며 이것이야말로 어떤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알려주는 이야기이다, 라고 우리의 정신 속에 꼭꼭 챙겨두는 약정이라는 그녀의 해석은 충격적이면서도 설득력이 있다. 기억이란 모두 개인적이며 재현될 수 없다는 그녀의 명제에 철저히 반하는 것이니 만큼 집단적 기억이라는 것 자체에 대하여 그녀는 이데올로기의 구체화에 대한 구역질 나는 거부감을 보이는 것이다. <<은유로서의 질병>>과 상통하는 부분으로서 국가,사회가 어떤 대상이나 현상을 조잡하게 가공하여 수동적인 반응기제를 학습한 대중들에게 그들의 통치 논리를 구체화하는 도구를 교묘하게 활용하는 것을 그녀는 극렬히 성토한다.  

한편 고통받고 있는 사람의 이미지에 대한 개인적 반응에 대한 그녀의 예들과 해석이 충격적이면서도 와닿는다. 잔인한 처형 장면이나 고통에 허덕이는 이들의 사진이 몇 편 실려있긴 했지만, 가장 충격적이어서 그 잔영이 밤잠까지 어수룩하게 만들었던 것은 <백조각으로 찢겨 죽는 형벌,1905>이었다. 몽고왕자를 암살한 혐의로 능지처참당한 중국청년이 사지가 다 절단되고 피를 흘리며 고개를 위로 젖혀 눈을 치뜬 채 살아 있는 모습은 바타유가 그 사진을 서랍 속에 평생 간직하고 '황홀하기 그지없으면서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이 이미지, 고통의 광경을 담은 이 이미지는 평생 나를 사로잡았다.'는 표현에 이르러서는 대체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인간이 타인의 고통에 대하여 보이는 이 반응들은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나, 예술이라는 미명아래 이런 고통을 은근히 통렬히 즐기는 모습들이 다 용인되고 용서될 수 있는 건가? 라는 연쇄적인 답없는 질문들에 숨이 막혀 버린다. 더 나아가 '능지처참'이라는 처벌. 인간이 인간을 심판하고 처벌할 권한이 어디까지 용인되고 이해되어야 하나?라는 질문까지 확장된다.  

한편 그녀는 이런 고통의 이미지에 무감각한 인간들에 대하여도 고까운 시선을 보낸다. 냉담한 것으로, 혹은 도덕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무각각한 것으로 묘사된 상황은 따지고 보면 분노의 감정, 좌절의 감정으로 가득 차 있기 마련이라는 그녀의 해석은 도발적이기도 하고 타당하기도 하다. 그럼 연민은 어떠한가? '동행', '긴급탈출 SOS'를 보는 사람들에게서 올라오는 연민이라는 감정은? 그것은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는 않다고 느끼는 것으로서,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과 무고함을 보여주는 뻔뻔한 반응일지도 모른다는 것이 그녀의 해석이다. 사실 요즘들어 나는 금전적으로, 혹은 건강상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을 대할 때 나의 반응이 혹시 이런 것이 아닌지 자꾸 되돌아 보게 되고 도울 수 있는 부분은 도우려고 드문드문 시도중이다. 그 현실에 어느 정도 적극 뛰어들어야 나의 죄책감이 좀 덜어지지 않을까 하는 지극히 이기적인 의도이긴 하지만. 적어도 그들의 고통을 담보로 나의 안위를 자족하고 연민이라는 감정을 느끼는 것으로 나는 참 괜찮은 사람이라고 착각하지 않으려 노력은 하고 있지만.  

   
  우리가 타인과 공유하는 이 세상에 인간의 사악함이 빚어낸 고통이 얼마나 많은지를 인정하고, 그런 자각을 넓혀 나가는 것도 아직까지는 그 자체로 훌륭한 일인 듯하다.  
   

이미지로 뒤덮인 세상은 우리의 감각을 무디게 만들고 특권적인 이미지가 실종하게 된다고 한다. 더 나아가 사람들은 이런 세상 속에서 스스로 이미지가 되기를 갈망한다. 현실은 위신을 잃어버렸고, 따라서 재현만이 남게 된다는 것. 

이 책의 말미에는 그녀가 2003년 12월 독일출판협회 평화상을 받고  그녀가 행한 수상 연설 등을 포함한 몇 편의 에세이가 더 실려 있는데 그것에서 가져오고 싶은 수많은 문장들이 있다. 특히나 그녀의 수상 연설은 자국인 미국을 통렬히 비판한 아주 용기있는 지성인의 역할을 모범적으로 보여주어 심금을 울린다. 남을 욕하는 것은 쉽지만, 자기를 밖에 내놓고 비판하는 것은 평범한 사람에게는 참으로 어려운 부분이다.  특히 낡은 것과 새 것에 대한 그녀의 얘기는 그 하나로 아름다운 시구 같아 인용해 둔다. 

   
  <중략> 낡은 것 안에는 우리의 과거, 우리의 지혜, 우리의 기억, 우리의 슬픔, 우리의 현실 감각이 모두 다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중략> 새 것 안에는 우리의 활기, 우리의 낙관 능력, 앞뒤 가리지 않는 우리의 생물학적 열망, 화해를 가능케 하는 치유 능력으로서의 망각 능력이 모두 다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문학의 임무는 널리 만연된 경건함을 반박하는 것이며 또한 문학은 자유의 공간으로 들어갈 수 있는 여권이라는 주장은 문학의 지평이 얼마나 치열하게 그러나 아름답게 확장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살아 있는 말들이다.  

마지막으로 그녀의 목울대를 더듬으며 흩어져 나온, 결국은 그녀의 호흡같은 그녀의 말들. 그것으로 맺고자 한다. 

현대의 희망, 현대의 윤리적 감수성에 중심이 되는 것은 비록 막아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전쟁은 탈선이며, 비록 얻기 어렵긴 하지만 평화는 규범이라는 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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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로서의 질병 이후 오퍼스 9
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 이후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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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인생은 내 주위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수많은 현상들에 때로는 내가 관찰자로서 때로는 내가 당사자로서 반응하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나 같은 단순한 사람들은 나에게 그 현상이 무관할 때는 철저한 무관심으로, 당사자가 되었거나 흥미를 일으키는 요소가 있을 때에는 그저 그 현상이 나의 개인에게 미치는 소소향 영향에 질식하여 질질 끌려다니다 생을 마감하기 일쑤이다. 

그래서 더 현명한 사람들과 직접적으로 조우할 수는 없다지만 그것을 책으로라도 해야 그나마 생의 마감 시점에 적어도 인생에 속았다는 열패자로서의 늦은 자각이 오는 것을 피할 수 있지 않을까? 

그녀를 만난 것은 늦었지만 행운이었다. 좀 한다 하는 사람들이 마치 액세서리를 하듯, 수전 손택을 자신의 글들에 때로는 어설프고 조악하게 덧붙이는 것은 그녀가 그녀 자체로서 브랜드화된 고급 문화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기에 그저 그녀의 이름을 언급해 주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격이 조금은 높아진 듯한 착각에 빠지기 때문이다,라고 한다면 비약일까? 그녀가 그렇게나 거부했던 이미지화와 왜곡된 은유의 중심에 때로는 그녀가 놓인다는 것은 아이러니이다.  

<<은유로서의 질병>>은 그녀 자신이 실제 암을 두번이나 극복하면서 암에 비대하게 덧붙여진 사회의 잔인한 은유에 저항하고자 한 데에서 시작되었으며, 한국에 출판된 것은 후에 새로운 판본을 준비하면서 후기 형식으로 덧붙이려고 하다 거의 동등한 수준의 저작이 되어 버린 <에이즈와 그 은유>와의 합본이다. 사실 그녀는 이 둘이 겹치지 않게 하려고 노력했다고 하나 상당부분 겹치는 내용과 관류하는 공통의 흐름이 있는 것 또한 한계라면 한계이겠다. 또한 그녀는 이 둘이 문학적 성과물로 평가 받기를 바랬다고 하나 이 저작이 과학적 분석물로 평가 받은 부분에 대하여 무척이나 기분나빠했다고 한다.

일단 이 책이 그녀 자신의 암극복기에 대한 얘기가 될 거라 기대했다면 전혀 등장하지 않는 그 부분에 묘한 상실감을 느낄 수도 있다. 누구나 적당히 관음증이 있어 그녀가 암을 극복하면서 어떤 고통을 겪었는 지에 대한 내밀한 스토리가 조금은 노출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나도 그랬으니까. 하지만 그녀 자신 이런 자신의 스토리 개진을 지양한다고까지 고백하고 있고 지극히 객관적으로 수많은 사례들과 문학 작품들을 인용하면서 이것이 개인의 감정의 배설로 귀결되지 않으려 노력한 점 등은 이 책을 더욱더 돋보이게 한다. 그러니까 꼭 사서 줄 그으며 읽고, 더불어 수많은 도서 목록까지 옆에 두고 메모해 두어야 할 만큼 진지하지만, 문체의 세련됨과 지적 편력의 고귀함이 책 전체에 흩뿌리는 고상함은 아름답고 흥미롭기까지 하다. 그러니까 재미도 있다는 얘기. 그녀가 아름다운 까만 눈을 깜빡이며 조목조목 이야기를 풀어내는 듯한 이미지가 환영처럼 주위를 에워싼다. 

요는 질병은 은유가 아니라는 점과 그런 사고방식에 저항해야 한다는 것이 기본적인 주장이다. 또한 이런 속박의 대상질병으로 19세기까지 결핵이, 그 이후로는 이, 더 이후로는 에이즈가 지목되었다. 결핵은 시간과 관련된 질병으로 삶이 빠른 속도로 진행하게 하여 그것을 돋보이게 하고 정화시키는 낭만성을 가지고 있다고 은유화되었다면, 암은 공간의 질병으로 지형학적으로 은유화되었으며, 육체의 질병이다. 암은 별다른 이해력이 없는 세포들이 증식됨에 따라 우리는 우리가 아닌 존재로 대체된다는 해석은 상당히 흥미롭다. 면역학자들까지도 신체의 암세포를 비자아로 표현한다고 한다. 과대망상이라도 걸린 듯한 이 세계를 단순화해서 인식하는 데에 암의 은유는 기여하고 있는 셈이라는 얘기. 결핵은 20세기에 이르러 그것을 따라다녔던 한다발의 은유가 산산이 쪼개진 채 광기와 암의 두 가지 은유로 들러붙었다고 한다.  

그녀는 치명적인 질병일수록 무수한 의미들에 시달리고 그것은 공포의 대상들과 동일시되가 마침내 이 공포들이 다른 것들에 부과되어 형용사적 어구가 된다고 설명한다. 특히나 암을 묘사하는 지배적인 은유는 전쟁의 언어로서 그녀가 가장 끔찍해 하는 부분이라고 한다. 실지로 그녀는 반전운동을 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상당 부분의 헤게모니가 사실은 군수 산업과 전쟁을 통한 민중의 압박 및 공포 정치에서 나왔다는 것은 소름끼치지만 묵과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리고 이것은 소수만 인지하고 다수의 대중은 그것에 철저히 이용당하고 유린당해도 스스로는 주체적으로들 삶을 이어나가고 있다고 착각한다. 

<에이즈와 그 은유>의 서두에서 그녀가 내리는 은유의 정의가 날카롭다. 그것이-아닌-다른 것으로, 또는 그것이-아닌 다른 것처럼 보이는 것으로 어떤 사물을 부르느 것은 철학이나 시만큼 오래된 정신작용이며<중략> 

   
 

내 책의 목적 또한 이런 상상력을 부추기기보다 가라앉히는  것이었다. 전통적으로 문학이 자신의 목적으로 삼아 이루려 노력했던 일종의 의미 부여가 아니라 뭔가에서 의미를 빼앗는 것, 극히 논쟁적인 전략을 활용해 돈키호테 마냥 지금의 이 세계, 이 신체에 가해진 "해석에 반대하는 것'이 내 책의 목적이었던 셈이다.  

 
   

이 대목은 그녀의 질병으서의 은유에 대한 가장 핵심적인 생각을 보여준다. 그녀는 의미를 빼고 해석에 저항하기 위하여 그 은유를 과감하게 공격한다.  

에이즈는 알려지지 않을 수도 있었던 그 누군가의 정체성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는 동성애자, 혹은 난잡한 성교자로서의 낙인이다. 에이즈에 걸렸다는 것만으로 때로는 아주 우연한 기회에 운나쁘게 감염되었을지라도 그는 아주 불쾌한 징조가 되고 만다.  

그녀는 또한 국가와 언론이 종말론적 사고와 그것의 전파에 탐닉하는 현상을 두고 최악의 각본을 애호한다는 사실은 통제할 수 없다고 여겨지는 공포를 지배하려는 욕구를 반영해 준다고 지적했다. 이는 작금의 신종플루 유행에 대처하는 한국 언론들의 자세와도 무관하지 않다. 공포를 조장하는 것은 그 공포에 대한 허구의 통제력에 대한 희구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이는 더 나아가 질병들로 인한 세계의 종말론까지 확장된다. 백지 상태의 출발, 이것은 강대국 (그녀는 자신의 조국을 지칭하는 과감성을 보이지만)의 대중을 압도하는 장악력에 대한 탐욕의 음모와 다름 아니다. 즉 사실 질병으로서의 은유 그 자체가 과학적 설명의 부재에 대한 공포에서 출발하지만, 대중을 효과적으로 억압하고 고도의 정치적 전략을 효과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장치로 이용되었다는 얘기이다.

번역자 이재원의 번역도 유려하고 그가 말미에 덧붙인 도서 목록도 아주 유용하다. 그녀를 시작하기에 가장 그녀다운 문체와 통찰력이 돋보이는 책이 아닌가 한다. 적어도 입구에서 질식하여 그녀를 탐험하는 것을 저어하게 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 다음은 대중의 치졸한 관음증을 조망한 책 <타인의 고통>을 보고자 한다. 유한한 인생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일들에 수동적으로 치여 주체적이지 못한 삶을 살아가는 데에 그녀는 아픈 일침을 가할 수 있는 좋은 질료가 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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