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류의 영화의 결말은 흔해졌다.
죽은 척, 약한 척하여 시선에서 빗겨난 후에 일을 꾸민다.
이래야 관객을 속일 수 있을 거라 하지만, 그러한 패턴에는 너무 익숙해져서 식상한 면이 없지않아 있다.

패턴은 정해져 있기 때문에 감독들이 주력을 하는 부분은 아마도
독특하게 꾸며보자 인것 같다. 얼마나 짜임새가 있느냐, 얼마나 설득력이 있느냐.

그런면에서는 이 영화는 꽉꽉 조여주는 맛이 아주 좋다.
늘어지거나, 어설픈 설정은 없어 보인다.
꽤 긴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속도감있게 진행된다. 연기는 말할 것도 없고,
캐릭터의 개성들은 줄줄 흐른다.

가장 일품인 것은 대사... 일상적이지 않은 비유와 풍자가 언어의 향연에 가깝다.

점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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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제국주의 
에드워드 W. 사이드 지음, 박홍규 옮김 / 문예출판사 / 2005년 5월
32,000원 → 28,800원(10%할인) / 마일리지 2,880원(10% 적립)
사람아 아, 사람아! 
다이 호우잉 지음, 신영복 옮김 / 다섯수레 / 2005년 1월
12,000원 → 10,800원(10%할인) / 마일리지 1,080원(10% 적립)
소외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권미선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5월
8,500원 → 7,650원(10%할인) / 마일리지 770원(10% 적립)
역사속에서 걸어나온 사람들 - 李陵/山月記 
나카지마 아츠시 지음, 신영복.명진숙 옮김 / 다섯수레 / 1993년 7월
8,000원 → 6,800원(15%할인) / 마일리지 210원(3%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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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되세요!


오랜 외국생활 뒤 귀국하자마자 ‘부자 되세요!’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그 속에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물신주의를 힐난하는 반어법의 어조가 담긴 것으로 이해했다. 그것이 나의 순전한 오해였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줍니다”라는 광고 문구를 들을 때였다. 실제로 나는 그 말을 듣고 속이 뒤집어질 듯한 충격을 받았다. 아무리 천박한 사회라 할지라도 ‘배부른 돼지’를 지향하는 사회가 아니라면 넘어선 안 되는 선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한국사회는 이미 그 선을 넘어 ‘소유’(당신이 사는 곳)가 ‘존재’(당신이 누구인지)를 규정하는 것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사회가 되어 있었다.

이런 사회에서 진정한 ‘사회개혁’은 무엇보다 새로운 가치관 형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따라서 개혁세력이 진정한 개혁세력이기 위해서는 이 사회를 지배하는 물신주의와 긴장하면서 공공성과 연대의식에 기초한 새로운 가치관이 사회에 뿌리내리도록 모색하고 제도화해야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당신의 능력을 보여 주세요!”에서 말하는 능력이, 기존 사회귀족의 그것과 개혁세력의 그것은 질적으로 다른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른바 실용주의 노선은 효율과 경쟁을 강조하는 신자유주의 아래 사회 구성원들에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유재산 축적 노력에 공공성조차 개입하지 않게 하면서 기존 사회귀족의 물신주의 헤게모니에 더욱 귀의하도록 작용하고 있다.

고유 업무와 무관하므로 불법·탈법의 땅투기도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한다. 청와대에서 나온 발언이다. 이것은 한 인사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개혁’ 세력의 가치관에서 사회귀족의 가치관에 대한 긴장이 사라지고 없다는 점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들에게서 새로운 가치관과 문화적 감수성이 사라졌을 때, 개혁의 건강한 긴장은 유지될 수 없다. 가령 국가보안법 폐지에는 국민 과반수가 반대한다는 이유라도 있다면, 국민의 80% 이상이 찬성하는 사립학교법 개정이 계속 표류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학재단의 집요한 로비활동과 물량공세 가능성에 저항할 만한 개혁 담지자로서의 가치관이 없는 탓 아닌가?

지금까지 ‘해먹던 놈이 또 해먹는’ 역사의 반복에 그래도 좌절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아직은 역부족’이라는 현실 이해 때문이었다. 그러나 개혁을 표방한 세력이 사회 상층으로 자리잡기 시작한 오늘 새로운 가치관 형성에 실패하고 실용주의를 내걸 때, ‘그놈이 그놈’인 현실은 그대로인 채, 4·30 재보선 결과가 보여주듯이 독재자의 현판은 물신주의와 함께 다시 제자리를 찾을 것이다.

출발이 남과 달라서 수백억원대의 재산가인 홍석현씨가 탈세 전력에도 불구하고 ‘개혁’ 세력에게서 능력을 인정받고, 삼성의 ‘무노조’ 신화와 그 관철을 위한 각종 노동 탄압이 ‘개혁’세력에게 아무런 윤리적 부담도 주지 않는 현실이다. 그런 삼성 회장에게 명예 철학박사 학위를 주는 행위의 부당함을 지적한 학생들에게 ‘젊은이들의 열정’을 말할 수 있는 여유는, 인문정신을 파는 행위까지 마다지 않은 대학 당국의 비굴함에 대한 반응으로만 이해해선 안 된다. ‘개혁’ 세력이 사회귀족의 가치관, 그리고 골프, 원정출산, 조기유학, 고액과외, 부동산, 주식투자를 통한 재산 증식의 문화와 다른 새로운 가치관과 문화를 보여주기는커녕 스스로 물신주의 가치관에 포섭되고 있기 때문이다.

‘개혁’ 세력에게서 ‘민중’이 사라졌을 때, 새로운 가치관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그들보다 인문학을 돈 주고 판 대학 당국에 항의한 고대생들에게서 희망의 싹을 본다. 대신 대학당국의 인사들과 오히려 학생들을 꾸짖는 ‘점잖은’ 인사들에게 던져주고 싶은 말이 있다. 부자 되기 전에 “사람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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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로 다른 데로 퍼나르지 마십시요. <씨네21> 원고인데, 상황이 황당하게 돌아가서 여기에 먼저 올립니다. 잡지에 실린 글이 나오려면 이미 상황이 종료됐을 것 같아서.... 명예박사 소동. 우스운 코미디가 졸지에 공포물이 되고 있군요. 정치권력의 횡포가 사라진 곳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거대한 시장의 리바이어던인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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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령님, 수령님, 우리들의 수령님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고려대학교에서 명예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학위 논문의 제목은 “고려대 100주년 기념관 건립과 현대철학의 상관관계.” 무슨 명분을 갖다 부쳐도, 본질이 변하지는 않는다. 그는 고려대학교 100주년 기념관 건립을 위해 4백억을 냈고, 고려대학교는 그 돈의 가공할 덩치를 기리기 위해 “명예”롭게 영수증을 떼어주었다. 이것은 “철학”적 사건이다. 한국 철학계에 일찍이 이보다 더 큰 사건이 있었던가?

학생들은 학위에 전공표기가 잘못된 것을 문제 삼았다. 이건희 회장이 ‘명예’로나마 ‘박사’의 실력을 인정받는 분야는 ‘철학’이 아니라 노동탄압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런 학생들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전공자의 입장에서 봐도 이건희 회장은 철학적 소양이 많이 부족하다. 하지만 노조 만들려는 노동자들을 핸드폰 위치추적을 통해 감시하는 실력만은 ‘박사’의 학위가 무색할 정도로 탁월하다.

고대의 보직교수들이 일괄 사퇴서를 냈다. 웃지 못 할 코믹물은 여기서 괴기스런 호러물로 전환한다. 전직 대통령의 진입이 물리적으로 저지당했을 때도 나오지 않았던 사표. 그 귀중한 사표가 일개 기업 회장의 행사장 진입이 저지됐다고 총장 책상 위에 일괄적으로 올라온 것이다. 왜 그랬을까? 독신(瀆神)과 불경(不敬)이야말로 종교인의 가장 큰 죄. 보직 교수들의 일괄 사퇴는 모욕당하고 거역당한 신의 노여움을 달래는 거룩한 희생양 제의가 아니겠는가?

이번 사건은 종교적 경지에 달한 북조선 수령 문화의 자본주의적 버전이다. 회장님이 어떤 분이신가? 스키를 즐겨도 인간의 반열에 낄 수 없기에 레인을 통째로 임대하는 분이다. 외유라도 하실 참이면 교황의 행차를 무색할 정도의 예우가 조직된다. 색깔별로 차려 입은 유니폼 점퍼들의 무리 속에 회장님이 거룩하게 출현하시는 장면은 사이비 종교단체의 집회, 혹은 전체주의 사회에서 벌어지는 카드섹션을 연상케 한다.

북조선에서는 수령님이 인민을 먹여 살린다. 남조선에서는 삼성이 국민을 먹여 살린다. 인재 한 사람이 10만을 먹여 살린다고 하지 않는가. 삼성에 인재 3000이 없겠는가? 곱하기 10하면 남조선 인민 전체를 여섯 번 먹여 살리고도 남음이 있다. 환웅은 3000의 무리를 거느리고 신단수로 내려와 나라를 세우지 않았던가. 회장님은 현대의 재림 환웅이시다. 박정희 덕에 먹고 살던 불쌍한 인민들은 이제 이건희 덕에 먹고 살고 있다.

대기업 없는 나라는 없으나, 그 나라에서 이렇게 서럽게 빌어먹고 사는 비루한 인민들도 없다. 대한민국은 삼성이 먹여 살린다. 하지만 그 삼성은, 실은 우리가 먹여 살리고 있다. 주머니 속의 핸드폰, 거실의 텔레비전, 부엌의 전자 렌지가 그것을 증명한다. 이를 인정할 수 없다면, 삼성이여, 다음에 핸드폰 광고할 때에는 과감하게 이렇게 해 보라. “소비자 여러분, 너희들은 우리 덕에 먹고 삽니다.”

“400억을 받고도 모자라서.” 중앙일보 기사의 제목이다. 누가 삼성 계열 아니랄까봐. 언제 학생들이 돈 적게 줬다고 시위를 했던가? 바로 여기서 명예로 박사 학위 받은 이들의 철학이 드러난다. 삼성 철학의 상상력 밖에서는, 자주는 아니더라도 아주 가끔은, 돈 주고 살 수 없는 것도 있다. 돈 주고 살 수 없는 그 가치는 인문정신을 담당하는 교수들이 앞장서서 지켰어야 한다. 그들이 방기한 그 일을, 학생들이 했다. 그리고 그 빌어먹을 교수들은 그 장한 학생들을 ‘징계’하겠다고 벼르고 자빠진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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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5-12 02: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라주미힌 2005-05-12 0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진보누리에 올라온 글입니다. 예전에 올라왔는데, 퍼나르지 말라고 해서 좀 뜸을 들였다가 퍼왔어요. 이미 많이 퍼졌나보죠. ㅋ.. 영수증이란 말이 너무 웃겨서...
 

혈의 누


  

'혈의 누'란 '피눈물'이라는 뜻으로, 누구나 알듯이 이인직이 쓴 신소설이다. 하지만 이번에 개봉된 영화는 제목만 같을 뿐 완전히 다른 내용이다. 몇 군데 서툰 부분이 눈에 띄긴 하지만, 전반적으로는 완성도가 높은 영화라 할 수 있다. 영화의 형식적 특성 분석은 내 한계 밖의 일이고, 영화의 서사 구조 혹은 주제 의식에 대해서만 몇 마디 하자.

이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떠올릴 게다. 장미의 이름에서 수도승들이 묵시록에 나타난 방식에 따라 7일에 걸쳐 의문의 죽음을 당하듯이, 영화에서는 수도원처럼 고립된 섬에서 사람들이 5일에 걸쳐 강객주 일가가 처형당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차례로 죽어간다. 이 연쇄 살인의 범인을 추적하는 수사관 원규는 장미의 이름에 나오는 윌리엄 수사라 할 수 있다.

장미의 이름을 고쳐 쓰려는 시도는 이전에도 있었다. 가령 소설가 이인화의 '영원한 제국'. 영남 남인이 정조 대왕을 보필해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었다는 이 소설의 모티브에는 박정희와 그를 밀어준 영남 지역의 관계가 슬쩍 겹쳐진다. 한 마디로 에코의 포스트모던 소설의 모티브를 들여다가 졸지에 전근대적인 박정희와 영남 지역주의 찬양으로 둔갑시켜 버린 것이다.

영화 혈의 누의 에코 고쳐 쓰기는 그것과 차원이 좀 다르다. 거기에는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 견줄 만한 예술적 성취가 있다. 영화에서는 강객주를 천주쟁이로 밀고한 다섯 명만이 아니라, 섬 주민 모두가 그의 살해에 가담한 범인으로 나타난다. 그뿐인가? 영화가 막판에 이를수록 관객들은 점점 불편해진다. 그의 살해에 섬 주민만이 아니라 자신들도 가담했다는 죄의식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에코는 어디선가 '독자가 범인이 되는 추리소설'에 대해 얘기한 바 있다. 사실 강객주에게 진 빚을 탕감 받을 수 있을까 하여 그의 부당한 죽음에 침묵하는 섬 주민들은 우리들 자신의 비루한 모습이다. 게다가 강객주 자신은 어떤가? "신분이 아니라 능력으로 대접받는 시대가 올 것"이라던 그도 제 딸과 머슴의 교제만은 허용할 수 없었다. "나도 딸 가진 아버지야." 이 또한 우리의 이중성 아닌가.

주민들은 자신의 죄를 씻기 위해 다섯 번째 범인을 참혹하게 살해하려 한다. 그로써 행여 강객주의 원혼이 내린 저주를 씻을 수 있다는 듯이. "강객주여, 이 자의 피를 받으소서." 르네 지라르가 말한 '희생양 제의'. 하지만 이 잔혹한 제의에도 불구하고, 원혼은 주민들의 머리 위에 핏빛 비를 내린다. 아마도 그의 혈의 누, 처참하게 죽어가면서 흘린 피눈물이리라.

이 영화를 보면서 얼마 전 고려대에서 있었던 사건을 생각했다. 몇 년 전 김영삼 전 대통령의 고려대 진입을 막았을 때, 대부분의 학생은 이를 통쾌하게 생각했다. 그러던 학생들이 왜 이번엔 저토록 분노하는 것일까? 알량한 이권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호화 호텔을 방불케 하는 최신식 건물. 삼성이라는 대기업의 후원과 졸업 후 진로의 상관관계. 게다가 대기업 입사율은 그 자체로 학교의 서열을 평가하는 주요한 기준 아닌가.

덕분에 삼성이라는 기업의 횡포에 흘려야 했던 노동자들의 피눈물.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오직 히틀러만이 실현할 수 있었던 '무노조 경영'에 명예철학박사 학위가 수여되는 것을 지켜보는 인문학 교수들의 참담한 자괴감. 전직 대통령이라는 정치권력보다 더 막강한 것으로 드러난 거대자본의 위협 앞에서 느끼는 서민들의 공포감. 안암동의 섬 주민들은 이를 너그럽게 잊어버리기로 했다. 그들이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은 우발적으로 일어난 학생들의 몸싸움.

"나는 왜 사소한 것에만 분노하는가?" 어느 작가는 이렇게 물었다. 몰라서 묻는가? 거대한 것은 우리에게 분노할 자유를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뭔가에 가로막힌 물이 제 갈 길을 찾아 우회하듯이, 분노의 흐름도 도전을 허용하지 않는 거대한 것을 피해 사소한 곳으로 흐를 수밖에. 학생들을 탓해서 무엇하는가? 수많은 사람들의 피눈물을 맞고 처연히 서 있는 그들의 비루한 모습이 또한 우리의 모습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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