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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교수(서울대)는 이번 지방선거를 계기로 진보개혁진영이 추구한 ‘반MB 연대’는 “향후 한국 정치에서 진보·개혁진영 사이의 연합정치는 필수품이 될 것”이며 “연합정부를 전망하는 선거연합전략으로서 한국 정치사상 획기적인 시도”라고 평가했으나, 이 같은 ‘전략이 작동·관철되는 방식과 절차’에 대해서는 ‘유감’이라는 내용의 글을 발표해 관심을 모으고 있다.

진보개혁 연합정치는 필수지만

조 교수는 한겨레가 20일 문을 연 오피니언 사이트 ‘훅’(hook, High-Quality Online Opinion in Korea)에 올린 “‘친노냐, 친MB냐’, 그게 다가 아니다”라는 제목의 글에서 이 같이 밝히고 △민주당과 연대를 우선시한 민주노동당의 태도 △공개토론과 검증이 빠진 민주당의 후보 결정 절차 △한명숙, 유시민 등 범야권 후보와 노회찬, 심상정 등 진보신당 후보 사이의 공개토론과 정치협상 실종 등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조 교수는 우선 “노무현 정부 시절 신자유주의 정책, 이라크 파병, 한미 FTA 등으로 정부와 각을 세웠던 민주노동당은 이번 선거에서는 ‘반MB연대’를 당면한 최고의 목표로 설정하면서, 같은 진보정당인 진보신당 보다는 민주당과의 연대를 우선시했다”는 점을 제기했다.

그는 “민주노동당은 당세 확장을 위하여 진보대연합 대신 기초단체장이나 기초의원에서 얻을 지분이라는 실익을 냉정하게 선택”함으로써, “‘김대중·노무현과 이회창 사이의 차이가 한강 샛강이라면, 그들과 나 사이에는 한강 본류가 흐른다’라는 권영길 의원의 공언은 무색해졌다.”고 꼬집었다.

그는 이어 “‘반MB연대’를 위한 제1야당 민주당과의 연대는 필요하다는 점, 정당이 당적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비난할 수는 없다는 점을 인정하지만, 그 이전에 뿌리가 같은 진보정당과의 연대가 있어야 했던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가시질 않는다”며 아쉬움을 표했다.

그는 “이번 민주노동당의 결정은 두 진보정당 사이의 이미 존재하는 감정적 앙금을 더욱 짙게 할 것이며, 향후 진보정당의 정체성과 진로에 대한 논쟁을 일으킬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진보정당 사이 앙금 더 짙어질 것"

조 교수는 민주당 경선과 관련해 “한나라당 서울시장 후보 경선과는 달리, 민주당 서울시장 후보 경선이 애초부터 김빠진 맥주 격이었다.”며 “TV 토론과 국민 참여 경선을 요구한 이계안 후보의 요청은 철저하게 외면당했다.”고 지적하고 이는 사실상 ‘전략 공천’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한명숙 후보가 민주당과 국민참여당을 묶을 수 있는 최적의 후보이긴 하나, 전략 공천에 따라 이계안 후보의 탁월한 많은 공약들이 대중들에게 알려질 기회가 상실됐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러한 단일화는 민심의 역동성을 무시하고 여론조사로 정치를 대체해버리는 위험을 낳는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와 함께 “한명숙, 유시민 등 범야권의 주류 단일 후보와 노회찬, 심상정 등 진보신당의 후보 간의 ‘반MB 연대’를 위한 공개토론과 정치협상의 실종”을 지적하고, “‘반MB후보단일화’ 프레임이 야권 내의 모든 논쟁과 토론을 묻어버리면서 진보신당은 고립무원의 상태가 되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이어 “인터넷 서점 알라딘의 종합 HOT 신간 1위를 기록하고 있는 노 후보의 정책 공약집 『노회찬의 약속-2010년 6월』의 내용이나, 경제정의실천연합의 경기도지사 후보 공약평가에서 1위를 차지한 심 후보의 공약은 선거판에서 사라졌다.”며 한명숙, 유시민 후보 측에서 노회찬, 심상정 두 후보에 대해 “음양으로 중도 사퇴하라는 압력을 넣고 있는 듯하다.”고 주장했다.

조 교수는 “당내 경쟁자도 아니고 노선과 정책, 이번 선거에서의 목표가 다른 정당의 후보인데, 그들이 후보와 정책에 대한 상호 검증을 요구하고 완주 의사를 밝히면 바로 ‘분열주의자’ 취급을 받을 수 있는 기묘한 상황”이라며 “야권 후보단일화 프레임의 최대 수혜자인 한 후보 측이나 유 후보 측이 소수의 진보신당 지지표가 필요하다면, 진보신당이 납득할 수 있는 단일화의 방식과 절차를 제시하고 설득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지속가능한 연합정치를 위하여

그는 “연합정치가 성공하려면 소수 정파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존중하고 배려해야 한다."며 "그렇지 않다면 진보신당은 이번 선거에서의 나쁜 성적을 감수하고 2012년과 그 이후를 바라보며 독자의 길을 선택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지방선거에서 이루어진 여러 경험을 토대로 하여 연합정치의 기준과 절차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지 않는다면, 지속가능한 연합정치는 어려워질 것이고 진보·개혁진영은 내부로부터 위기를 맞이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조 교수는 “토론과 경쟁이 빠진 진보·개혁진영의 무조건 단결과 여론조사에만 의존한 후보 선정은 소수파 후보에게만 ‘독배’―이계안 후보의 말을 빌자면―를 강요하는 문제를 낳는 것이 아니라, 장기적으로는 진보·개혁진영 전체가 ‘독배’를 마시는 것과 같은 후유증을 일으킬 수 있다.”고 우려했다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184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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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누군가 필자에게 이번 지방선거의 가장 큰 특징을 말하라면, 진보가 배제 혹은 소외된 정치경쟁의 구도가 실현된 점을 꼽고 싶다. 흥미로운 것은 그것이 보수에 의해서가 아니라 넓은 의미의 진보 내지 진보 개혁 세력 내부에서 만들어졌고, 이를 가능케 했던 것은 속칭 ‘반MB’라고 불리는 강력한 반정부 투쟁론이었다는 사실이다.

그 결과 향후 한국정치는 미국이나 일본과 유사한 ‘진보정당 없는 민주주의’로 귀착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번 선거에서 진보 후보들의 표가 어떻게 나타날까 하는 문제보다 이 점을 훨씬 중요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필자는 본다.

2.

권위주의 시절의 민주주의는 반체제를 특징으로 하는 것이었다. 그 시절 민주화는 곧 전복적인 열정을 나타내는 말이었다. 민주화가 된 이후 상황은 달라진다. 정치체제에 참여하는 문제가 더 중요해지고 결국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는 정치체제의 운영권을 둘러싼 다툼 내지 경쟁의 내용을 더 많이 갖게 되는 것으로 귀결된다.

그러면서 상대를 절멸하고자 하는 태도를 갖는 세력은 정치의 장에서 힘을 갖기 어렵게 되며, 공존을 전제로 한 경쟁에서 유능함을 발휘하는 자가 승자가 된다. 초기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민주주의를 거부했던 많은 사례들에서 볼 수 있듯이, 민주주의만큼 혁명에 대한 가장 확실한 안티테제는 없다.

결국 민주주의가 지속될수록 점진주의적 진보파만이 살아남고 ‘관용’, ‘타인에 대한 정중함’, ‘상호성’ 등의 가치는 움직일 수 없는 규범으로 자리 잡게 된다. 필자가 아는 한 민주주의의 역사가 비교적 오래된 나라들의 사례를 놓고 볼 때, 이를 벗어나는 경향을 발전시킨 나라는 없다.

민주주의와 혁명

이 점에서 반MB는 민주주의의 규범과는 거리가 있는 접근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마치 과거 보수파들의 잘못된 열정으로 표출된 ‘반DJ’나 ‘반노’와 크게 다를 바 없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인격적 모독과 인간적 무례함 속에서 우리가 발견했던 것은 우리 사회 보수파가 갖는 권력 상실에 대한 극도의 두려움 내지 적대감이었는데, 형태는 다르지만 내용적으로 별다르지 않은 반MB 담론이 진보와 개혁 세력 사이에서 자유롭게 유통되었다는 사실은 부끄러운 일이라 생각한다.

현직 대통령이나 보수를 존재해서는 안 될 ‘악의 축’으로 보는 태도는 권력을 상실한 개혁파나 누구보다 강한 반정부성을 자랑하고 싶은 진보진영 내부자들에게는 자연스러울지 몰라도 보통의 상식을 갖는 시민들에게는 매우 부정적인 효과를 미쳤다고 생각한다.

집권 2년 반을 지나고 있는데도 역대 정부와는 달리 현직 대통령이 급격한 지지율 하락과 같은 사태를 맞지 않고 있는 데에는, 지금 정부와 대통령이 잘해서라기보다 반대세력의 잘못과 과도함이 훨씬 크게 작용하고 있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3.

민주주의는 '다수 지배'의 형식으로 실현된다. 그런데 그때의 다수는 수많은 소수파들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내용적으로 보면 다수 지배는 ‘소수파들의 지배’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다수를 형성하고 정치경쟁에서 승리하는 문제는, 잠재적 다수를 구성하는 내부의 이견과 차이를 조정하고 통합하고 변화시키는 과정을 어떻게 잘 하느냐에 달려 있게 된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러한 이견과 차이가 민주정치가 치러야 할 어쩔 수 없는 비용이나 장애가 아니라 거대한 에너지원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데 있다. 논리적 순서를 제대로 해서 말하자면, 그러한 이견과 차이를 다루면서 광범한 대중의 에너지와 힘을 조직하는 것이 민주주의가 갖는 역동성의 비밀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정치에서 이견을 다루는 방법에는 크게 두 방법이 있다. 하나는 이견을 부정하고 억압하는 방법이다. 총화단결을 강조하고 연합이라는 대의를 위해 이견과 차이가 희생되는 게 필요하다는 태도 등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이견의 시민권을 인정하고 상호 조정하는 방법이다. 여기에도 두 방법이 있다 하나는 각각의 견해를 일정한 영향력으로 환산해서 거래하고 타협하는 방법이다. 다른 하나는 현재의 협의와 토론을 통해 현재의 이견을 변화시켜 새로운 견해를 형성하는 방법이다. 전자의 경우 조정 이후에도 기존의 이견은 그대로 존재하는 반면 후자의 경우에는 이견의 구조나 분포 자체가 달라진다는 차이가 있다.

시민 원로 사제적 권력의 반민주성

반MB 연합 논의는 기본적으로 이견을 억압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악의 축에 대항하는 공동전선이 도덕주의적으로 강요되었고 따라서 협력과 연대는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가치가 됨으로써 그 자체 매우 강한 이데올로기적 권력효과를 낳았다.

이 과정에서 시민운동 원로를 자임하는 사람들의 역할은 컸다. 그들이 발휘했다고 알려진 영향력의 기초는 물론 역사적 요청을 대행하는 윤리적 명령이었다. 선출된 대표에게 권력을 위임하는 민주적 규범과는 거리가 있는 일종의 ‘사제적’ 권력 행사의 유형이라 할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반MB 연합이 후보단일화의 문제로 집약되었을 때, 누가 왜 후보가 되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윤리적 기준은 사라지고 후보가 누가되든 결과만 좋으면 된다는 무규범적 공리주의 내지 맹목적 성과주의로 전면화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다보니 후보 조정의 최종 단계는 어느 후보가 더 협박 능력이 강한가를 시험하는 차원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의 부정적 결과는 반MB 연합 내부적으로는 경선이라는 민주적 후보선출 과정을 무의미하게 만들고 다른 한편 외부적으로는 진보정당들을 포함한 약한 정치세력들을 희생시키는 것으로 이어졌다.

이 상태가 지속된다면, 이번 선거 이후 한국의 정당체제는 이명박 정부를 중심에 두고 김대중 정부(민주당)와 노무현 정부(국민참여당), 나아가 박정희 정부(박근혜당)라는 과거 세력들이 경합하는 구조로 퇴락해 버릴 가능성이 높다.

4.

반MB가 이견을 억압하는 형태로 이루어짐에 따라, 한편으로 집권세력 대 반MB 세력 사이의 정치적 적대는 격렬하게 나타나는 반면 다른 한편 일반 대중들의 참여는 오히려 위축되는 이상한 결과를 낳았다. 정치학에서는 경쟁이 참여를 자극하는 기제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경쟁을 민주주의의 엔진으로 간주한다.

그런데 한국정치에서 지금의 경쟁 구도는 대중 참여를 오히려 약화시키고 언론의 영향력에 대한 의존을 높이며 나아가서는 자신들의 독점적 지지 시장을 갖고 있는 정당들 사이의 퇴행적 다툼으로 이끌어내고 있다.

이런 선거가 사람들에게 적극적인 열정을 갖게 만들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당장 지난 주 마감된 후보등록 상황만 봐도, 지난 지방선거에 비해 자유선진당, 국민참여당, 진보신당 등 새로운 정당이 더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출마자 비율은 크게 낮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출마자 비율이 낮아진 이유

유권자는 어떨까. 중앙선관위가 방송을 통해 내보내고 있는 투표 참여 독려 광고를 보면, 4명씩 두 번 나눠서 기표하는 선거 방식이 쉽고 편하니 이제는 ‘투표로 말하라’고 하는데, 필자가 보기에 이는 그야말로 현실을 호도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필자가 사는 선거구를 기준으로 말한다면 8명을 선택해야 하는 이번 선거에서 필자가 놓고 고민해야 할 후보의 숫자는 23명에 이른다. 그런데 그 가운데 이름이라도 들어본 사람은 3명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무슨 세탁기 세제 고르듯 선택해야 할 판이다.

물론 선관위는 각각의 후보들이 만든 홍보물과 공약자료를 우편으로 보낸단다. 선거법의 규정대로 모두가 다 보낸다면 아마 그 분량은 500쪽 가까이 될 것이다. 과거 선관위가 보낸 후보 관련 우편물을 받아본 사람이면 알겠지만, 그런 자료를 보고 투표 결정을 하긴 어렵다. 이번 선거에서 대부분의 유권자는 누군지로 모르는 후보들 이름을 놓고 장막으로 가려진 ‘기표소 안에서의 고독한 독백’을 해야 할 가능성이 높다.

이런 선거를 민주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누가 이런 선거에 책임을 져야할까. 많은 원인이 있겠지만, 굳이 반MB 연합을 두고 말하자면 그것은 한국정치의 희망이기보다는 절망에 좀 더 가까운 결과를 낳았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18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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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MB론 비판] '비지론', 정치적 질병…자유주의자 '형'들에 의탁

한국을 연구하는 사람이면 보통 꼭 관심을 집중하는 일군의 '코드'들이 있습니다. 사회 분야에서의 '교육열'이라든가, 정치 분야의 지역주의라든가, 그리고 경제에 있어서의 원-하청 이중 구조와 재벌체제 등등입니다.

정체성 포기, 기회주의적 투표

논문을 쓰거나 강의를 할 때에 보통 이 부분에 대해 꼭 언급을 하고 넘어가곤 합니다. 특히 비전문가들을 독자로 상정했을 때에는, 이 '코드'들을 설명하지 않고서는 계속 논리 전개할 수는 없지요. 그러나 - 요즘 지방 선거 유세전의 현상을 보면서 드는 생각입니다만 - 이 '코드' 뭉치에다가 하나를 꼭 더 집어넣어야 합니다. 바로 '비지론'(비판적 지지론), 즉 스스로 '진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사표 심리 등등으로 인한 자기 자신의 본래적 정치 정체성 포기와 기회주의적 투표 현상입니다.

물론 '비지론'을 순수한 국산으로만 생각할 수는 없지요. 대개는 어느 정도 주류 정치에 진입할 만큼 힘이 있는 진보(사회주의)정당이 없는 보수주의적 민주주의 국가마다 '진보 지식인'들이 좀 '비지론'이라는 정치적 질병을 앓게 돼 있습니다.

대표적으로는 우리 상국을 예를 들 수 있는데, 거기 같으면 촘스키와 같은 '사림의 사표'마저도 '차악'이라고 하여 종종 대선을 앞두고 민주당 후보 지지 발언을 하곤 하죠. 물론 아방의 '비지론자'들보다 이 촘스키라는 분은 한 수 위라고 봐야죠.

민주당을 차악이라고 부르면서도 "공화당과 마찬가지로 대기업의 정당일 뿐"이라고 꼭 못을 박곤 합니다. 그러니까 좋아서 지지하는 게 절대 아니라는 걸 일단 명확히 한다는 것이죠. 한국의 '온건한 진보' 지식인들이 "위대한 민주주의자 노무현의 유지를 받들어" 창당되었다는 당을 지지한다고 했을 때에는 그렇게 입바른 소리를 대개 잘 하지 못합니다.

실용을 내세우는 무리들이 권병을 잡든, '개혁'을 팔아 성공하겠다는 정객들이 다시 그리운 청와대를 되찾든 간에 경제, 사회 정책의 윤곽을 어차피 삼성경제연구소 등 이 나라의 실질적 권력자들의 브레인들이 그릴 것이라는 말을, 우리의 '얌전한 진보 지식인들'이 잘 못한단 말이죠. 그런 면에서는 같은 '비지론자' 치고도 촘스키는 그나마 멋이있기라도 하지요.

촘스키의 경우

한국에서의 비지론 같으면, 큰 역사적 안목으로 본다면 사회주의자를 학살해버리고 진정한 진보정당들을 파괴시켜버린 독재 권력의 또 하나의 유산이라고 보면 됩니다. 여운형계가 남한에서 제대로 정계에서 남았거나 진보당이 '민족의 태양 이승만 박사'에게 완전히 박살나지 않았다면 김철수와 같은 거물 사회주의자가 신익희 후보 지지 발언을 했었겠어요?

사회주의자가 몸을 둘 수 있는 '진보의 집'이 없기에, 어쩔 수 없이 차악이라고 생각하여 부르주아 자유주의자에게라도 '투탁'을 하는 셈이지요. '민족의 태양'이나 '조국 근대화 지도자'보다 그나마 근대적 합리성이라도 좀 있겠다 싶어서입니다.

사실, 작년에 서거한 김대중 선생도 애당초에 그런 케이스에 속했죠. 원래 건준계, 즉 여운형 등이 지도한 범진보계에 속했다가 결국 진보가 다 박살이 난 시절에 한민당 후계자들에게 간 셈입니다. 또 김대중과 같은 카리스마적인 '약간 좌파적 자유주의자'마저도 주류 자유주의 정치에 몸 담았다는 것은, 1987년의 미완의 혁명은 민주노조의 성립으로 이어져도 민중 정당 창당으로 바로 이어지지 못한 이유 중의 하나가 된 것이지요.

IMF 충격이 오고 김대중이 반민중적 신자유주의 노선으로 돌아서고 그 주류정치인으로서의 '본색'을 드러내자 드디어 거의 40년 만에 민노당의 창당으로 '혁신계'(개혁적 사회민주주의) 노선이 다시 소생된 것입니다.

문제는, '민족의 태양'과 '조국 근대화'의 광기가 어느 정도 가라앉아도 극도로 보수적인 한국 정치의 전체적 '판'이 전혀 업그레이드되지 않았다는 점이죠. 구 민노당의 좌파민족주의자들도 계속 김대중계에 대한 '보조원 노릇'을 해왔지만, 분당 이후의 지금의 (잔류)민노당도 반세기 동안의 비지론을 전혀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민주노동당, 비지론 벗어나지 못해

스스로의 무력함을 고백하고 주류 부르주아 자유주의자 '형'들에게 '몸과 마음'을 맡긴다는 게 이제 어떻게 보면 대한민국 자칭 '진보계'의 전통이 아닌 전통이 다 된 셈이죠. 이를 좋은 말로는 '반MB' 전선이라고들 하는데, 저는 도저히 대북 정책 이외에는 MB가 그 전 자유주의 정권과 뭐가 그리 다른지를, 전혀 모르겠어요.

예컨대 쌍용자동차를 보면, 파업 파괴를 MB때 했지만 쌍용의 비극의 씨앗이 된 해외 매각을 과연 누구 때에 했습니까? MB야 사라질 때가 되면 사라지고 또 새로운 극우 정객에 의해서 교체되겠지만, MB가 있든 없든 간에 이미 무한 경쟁의 정글이 다 된 대한민국의 전체적 상황이 전혀 개선될 것 같지 않다는 게 문제입니다.

공기업 매각부터 국외 파병까지 거의 모든 반민중적 정책을 지지 내지 방관해온 부르주아 자유주의자들을 "비판적으로 지지한다"는 것은, 진보정당으로서는 일종의 '자기 부정'에 가깝습니다. 진보정당의 힘과 슬기란 한국을 신자유주의화시킨 사람들에게 들러리 서줄 정도 밖에 안된다면 그러면 진보정당을 굳이 할 필요는 뭐가 있겠습니까?

그러한 측면에서는 '반MB 연합'에 참여한 자칭 진보 정치인에 대해서는 아주 실망하고 만 것입니다. 그리고 개인으로서의 '비지'는 결국 일종의 정치적인 '자아 포기'가 아닌가 싶어요. 정치란 꼭 권력을 획득하는 장만은 아니지 않습니까?

정치라는 장에서는 사람마다 그 소신, 그 생각을 외면화시켜 타자들과의 소통과 연대를 모색하는 것이죠. 그러한 측면에서는 정치의 장이란 대자적 자아 형성의 장이기도 해요. 그래서 자신의 내면에 전혀 맞지 않은 정치인을 오로지 '사표 심리' 등 정치공학적 고려 때문에 찍는다는 것은 결국 자율적인 자아 형성 및 외면화에 대한 스스로의 포기 정도입니다.

에릭 홉스봄의 경우

자율적 개인으로 살지 않겠단 이야기죠. 영국 사학계 석학 에릭 홉스봄이 영국 공산당의 집권 가능성을 믿어서 평생 공산당원으로 산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집권 가능성은 당연히 제로이었지만, 공산주의에 대한 꿈을 떠나서 홈스봄이라는 개인이 도대체 존재할 수 없었던 것이죠. 결국 그로서는 당비를 내고 공산당에 투표한다는 것은 자아의 외면화의 한 표현이었어요. 그는 그렇게 해서 세상과 소통한 것이죠.

그런데 대한민국의 소위 진보적 지식인 중에서는 그렇게 살만한 용기가 있는 사람은 좀 적은 것 같아요. 압도적 힘에 머리를 숙이는 훈련이 하도 잘 돼서 그런 것인지, 어쨌든 '비지론'의 망령은 이 땅을 쉽게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18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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