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프 - 죽음 이후의 새로운 삶
메리 로취 지음, 권 루시안 옮김 / 파라북스 / 200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지적 충만감이 끔찍하게 차오른다.

아침마다 지하철에서 이 책을 읽는데, 심하게 곤혹스러웠다. 제목대로 사후 경직된 시체가 주인공인지라 겉 표지에 있는 시신의 하얀 발부터 속을 울렁거리게 한다. 시신이 가지는 문화적 상징을 떠나 세밀한 묘사와 ‘적절한’ 비유가 가득하여 원치 않는 상상의 날개를 절로 달게 된다(다행인지 불행인지 사진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 질병, 사고, 불행, 혐오의 상징인 시체를 담은 이 책을 굳이 읽은 이유는 지적 충만감이 주는 황홀함을 피해 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후 세계가 종교적인 관심사였다면, 사후 처리되어야 할 육신은 사회적 관심사이다. 수없이 많은 탄생 뒤에 찾아오는 죽음은 사회적인 문제로 부각될 만큼의 시사성을 가진다. 뉴스기사로도 가끔 등장하는 묘지가 매년 여의도 면적의 몇 배 만큼 증가 한다는 둥, 화장터, 납골당 유치 문제로 지역주민과 마찰이 있다는 둥. 인간은 죽어서도 문제를 일으킨다. 한국의 상황과는 연관성이 없는 듯 하면서도 어느 정도 관련성이 있게 이 책은 시신의 유용성과 다양한 사후 처리를 말한다. 해부 실습용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일반적인 장례절차를 거치지 않는 망자들의 다양한 행로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책에 소개된 예를 언급하자면, 충돌 실험용, 해부 실습용, 탄도 실험용, 종교성을 띤 십자가 실험, 기요틴으로 참수 된 시체를 이용한 머리 이식, 의료용 식인행위, 퇴비 등의 예는 죽음 뒤의 세상을 실험실로 연상케 한다. 자르고, 베어내고, 찢고, 드러내고, 안구에 강한 충격을 주고, 총을 쏘고, 장기를 적출하고, 피를 뽑고, 펌프로 대동맥에 방부액을 밀어 넣고, 심지어 간다. 이쯤 되면 좀비, 슬래시, 스플래터, 하드고어 영화가 떠오른다. 비슷하긴 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 책에 나오는 시체는 얌전하고 사전에 동의를 했다는 점(유족 또는 본인)이다.

기증이라는 절차를 거쳤으므로 잔인하다는 표현은 어울리지는 않겠지만, 끔찍함은 가시지 않는다. 그래서 저자는 자연적인 분해과정(범죄 수사를 위한 사체 연구소의 실험), 방부 처리하여 장례를 치르는 과정 또한 HDTV급의 선명한 묘사를 하며, 미적차이는 별로 없다고 너스레를 떤다. 생각해 보면 맞는 말이다. 레닌처럼 깔끔한 박제(미적으로 뛰어난)가 되려면 어느 공장의 생산라인과 비슷한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될 수 없는 일 아닌가.

일단 책을 제대로 읽으려면 다르게 생각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얇게 저민 살(삼겹살이라 명명된), 벗겨낸 피부(돼지 껍질), 머리와 발(머리고기와 닭발, 족발), 살아있는 채로 살을 발라내고(회), 배를 가르고, 뼈를 몇 시간동안 삶는다. 고추장도 모자라 온갖 자극성 있는 물질로 잘 버무려지는 대상들 또한 살아있었던 생명체인 것을 생각해 본다면 인식, 감성적 반응을 무뎌지게 하는 작업이 꼭 그렇게 힘든 일은 아니란 생각이 든다. 물론 인간에 대한 위대한 휴머니즘, 존중을 유지한 채로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이 책의 또 다른 주인공들(의사, 연구원, 장례업자 등)은 이러한 과정을 거쳤음은 물론이다. 결코 즐겁지 않은 일들을 계속 하고 있다는 것을 보면 익숙함과 식상함이란 신이 준 선물 중 하나가 아닐까. 저자가 직접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섬세하게 적은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그녀의 눈과 귀는 인식의 전환을 이끄는 엔진이 된다. 이 책에서는 그러한 기능의 중추를 인터뷰가 담당하고 있는데, 꺼림직한 일을 하면서 느끼는 솔직한 이야기들은 다큐멘터리만큼의 사실성과 현장감을 전해준다.
‘의학도들은 해부학만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맞대면 하기도 한다. 또한 존중과 동정이 아닌 스스로를 무뎌지게 만드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무의식적 동일성 상실은 인간이 자연과의 격리에서 오는 고립에 근거한다. 유일하게 그 끈을 이어주는 것이 자연으로 돌아가기 위한 저승행 열차를 타는 순간인데, 인간이 가장 당황스러워 하는 부분이기도 하지만, ‘인간다움’을 가장 훼손당하기 쉬운 부분이기도 하다. 불경에 ‘염처경’을 보면 시체를 곁에 두고 가르침을 받는 부분이 나온다. 시체는 썩어가고 승려는 어느 순간 한줄기의 미소를 짓는다는데, 육체의 덧없음을 깨닫는 수행이라고 한다.

덧없는 육체, 인류의 발전에 기여하자는 식의 뉘앙스가 썩 마음에 들지 않지만, 죽은 사람이 사람을 살린다면 이야기는 틀려진다. 시체의 유일한 재능은 고통을 받아넘기는 재주 아니던가. 그러한 재주 때문에 당신의 안전(안전 벨트, 에어백의 안전성은 그들이 검증했다), 당신의 생명(장기 이식 또한 그들이 주는 새 생명)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알리는 것이 이 책의 주목적이다. 이것을 안다면 감동은 아니더라도 이해는 하게 된다.

의학, 범죄, 과학, 역사 등을 아우르는 입체적인 통찰을 보여주면서도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위험스럽고, 혼란스럽다. 뇌사자가 죽음에 가까운가, 생에 가까운가를 따지는 일 만큼이나…
‘삶과 죽음 사이에는 가사상태라는 게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삼과 죽음 사이에 있는 것을 바라지 않죠.’

말없는 시신이 유일하게 말하는 것은 죽음이다. 그것을 연구함으로써 죽음을 밝히는 과정은 부담스럽지만, 생의 조건(유감스럽게도 죽이는 조건도 부수적으로 밝히는)을 밝히는 빛이다. 불교의 덧없음과 살포시 맞닿아 있기에 절묘한 양립이 경이적인 이 책은 겉 표지와는 다르게 경쾌하게 쓰여져 있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죽음에 대한 정의는 물론이고 이성적, 감정적으로 바라본 장기기증에 대한 이율배반적 인식이 조금은 달라질 듯 싶다. 끔찍하게 재미있으니 강력 추천하는 바이다.

다 읽고 나서 가장 놀라는 일은 처음과 다르게 사람을 꿀에 절여서 약재로 쓰는 밀화인(본초강목 기록된)이나 약재로 미이라나 사람을 먹는 행위를 언급하는 부분에서 마냥 신기해 하는 내 자신을 발견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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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대적 공범자들
임지현 지음 / 소나무 / 2005년 1월
평점 :
품절


읽는 이에 따라서 거북한 느낌이 드는 책일 수 있다. 학자다움이 물씬 풍기는 뻣뻣한 한자 어휘들(외국 학술 용어의 어색한 ‘한국화’)과 문장들은 매우 건조하다 못해 지식인들의 고매한 정신까지 풍부하게 담아냈으니 반은 실패했다고 본다. 게다가 이 책은 성격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었다. 개인적인 연구 결과물이 아니라, 대중을 상대로 쓴 글이라면 좀 더 대중적인 글쓰기를 보여줬어야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학술적이지도 않으면서 대중적이지도 않은 어정쩡함이 보이는 주석과 각주의 인색함은 이해를 떨어뜨리고, 집중을 방해한다. 게다가 여기저기에 실렸던 글들의 난잡스러운 짜집기 구성은 지루함을 느끼게 한다. 왜냐하면 본문은 이 책을 위해서 쓰여진 글들이 아니라, 이 책을 내기 위해서 급조된 스크랩이라는 느낌이 들만큼 동의적으로 반복되기 때문이다.

이 부분만 감내할 수 있다면 나머지 반의 성공은 인식의 재발견, 전환이라는 커다란 파괴력을 가진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가 주장하는 내용들이 공론화 되어(어느 정도 되어있긴 하지만, 받아들이기 힘든) 일반 대중들에게도 성찰의 기회로 작용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컨텍스트가 양적으로도 풍부하고 질적으로 양질이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사실 거북한 느낌이 드는 진짜 이유이면서 이 책의 중요한 화두는 일반 대중에게 침투되어 있는(식민주의와 민족주의의에 오염된) 권력 담론의 헤게모니에 대한 대중의 불감성과 종교적인 맹신에 대한 질타에 있다. 제 기능을 못하는 심장에 전기충격이 필요하듯이 의식의 흐름이 정체된 것에도 뼈아픈 질타와 자각이 필요하다. 이 책은 그러한 역할을 한다. 죽어가는 육신을 깨우는 전기충격이며, 죽어가는 사회에 울리는 경종이다. 따라서 그의 국사 해체론과 반민족주의 외침에서 ‘한민족 반만년 역사’만을 가르치는 국정 교육에 대한 반란이며, 그러한 교육을 받고 그렇게 믿어온 대다수 국민에 대한 배신이라는 느낌을 받았다면 ‘내 안의 민족주의’에 대해 회의하고 성찰 할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도대체 내 안에 있는 그것이 무슨 짓을 하길래 이 책은 같은 주제를 반복적으로 빼곡하게 적어놓았는가?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국제 사회의 관계, 국가와 국가 사이의 관계, 한 국가 내에서의 다층적 구성원의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권력 담론의 본질을 파악하여 서구적 근대화에 종속되고, 억압 받는 주체들의 자각과 해방을 촉구하고 그 당위성을 역설한다.

예를 들면, 제국주의의 반발로 일어난 저항 민족주의는 서구식 근대화 논리 안에 존재하여 서구 중심에 결국에는 인정 받고 편입되려는 욕망을 분출한다. 그러면서도 상대 진영의 존재를 부정함으로써 자신의 존재에 대한 정당성을 가지려고 한다. 따라서 서로의 '존재'는 '서로의 존재'를 보장하고, '적대감'은 각자의 논리와 힘에 '정당성 증대'를 의미 하게 된다. 같은 논리 위에 같은 목표를 가진 이원적 관계이기에 시오니즘과 나치즘, 미국의 패권주의와 이슬람의 테러리즘, 박정희식 민주주의와 김일성식 사회주의, 일본과 한국, 중국에서 보이는 민족주의 등의 모든 것들의 공통분모를 ‘적대적 공범자들’이라는 용어로 함축할 수 있다.

사실 이것들의 근본은 무척이나 단순하다. 집단에 대한 의지와 목표의 획일화를 통한 권력의 획득. 그것을 통한 인간 욕망의 충족에 있다. 그렇게 탄생한 인간 사회는 구성원들의 욕망의 총체적 결정체란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커다란 힘은 더 커다란 공동체의 응집력에 달려있다. 기본적으로 권력은 성장을 지향하고(거대성이 주는 거대한 영향력), 인간들은 그것에 지지를 보낸다. 권력에 종속되기를 원하지 않으면서도 권력이 주는 달콤함을 추구하는 욕망의 충돌은 우리 사회와 인류 문제가 가지고 있는 문제의 복잡도를 증가시킨다. 복잡도와 인지 능력의 반비례성을 고려한다면, 이 책은 가장 근본적이고, 단순한 비판이지만, 가장 어려운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서 있는 논리 자체를 부정하여 새로운 대안을 세우려는 노력은 우리의 상식의 벽을 넘을 수 있는가, 없는가라는 커다란 짐을 안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특수성을 고려한다면, 이 문제는 더욱 커진다. ‘냉전 이데올로기의 사생아’인 민족 분쟁의 끝은 보이질 않고, 일본의 식민지로 영원히 남고 싶어하는 ‘세습적 희생자 의식’에 노예가 되어버린 ‘민족성’에, 위대한 반만년 역사는 그 속에 민중을 파묻어 버리고, 서구적 극단적 근대화인 ‘세계화’에 맹렬하게 돌진하는 한반도의 오늘은 말 그대로 ‘적대적 공범자들의 종합세트’이다.

특히 약소국의 위치(군사력이나 경제력으로 보면 꼭 그렇지 않은)를 끊임없이 재확인함으로써 민중의 집단 의식(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을 고착화 시켜버렸다. 집단 의식은 권력의 좋은 먹잇감 아니던가. 이질성에 대한 거부감은 순수함을 추구하고, 혈통에 대한 집착은 순수하지 못한 것(이질적인 것)들에 대한 억압의 당위성을 이미 내포한 상태를 지닌다. 그래서 권력을 휘두르는 자들은 민족주의와 국가주의, 냉전이라는 무기를 사용하여 외부의 적을 내세워서 내부의 결속을 다져오지 않았던가. 그러한 결속에 의해 잘려나가고 무시되어 온 담론들이 많을수록 권력은 무소불위의 힘을 과시한다. 나치즘, 시오니즘은 이를 증명했고, 그 결과는 참담한 역사를 낳았다. 정말로 중요한 문제는 이러한 일들은 기회만 주어진다면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게 준비가 되어 있다는 점에 있다.

‘국가, 민족, 인종의 신성화, 집단에 대한 헌신과 적에 대한 무자비한 증오, 대중의 열광적 지배자 숭배’

이 낯설지 않은 단어들의 나열. 박정희의 망령들은 아직도 우리 주위를 맴돌면서 경제 성장이라는 선동을 이끌고, 대중은 자발적으로 그들의 놀이판을 장식한다. 인종, 민족, 젠더의 소수자들을 냉철하게 타자화하고 배제시키는 권력의 메커니즘은 우리 사회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쯤에서 권력 담론의 본질적인 성찰과 물음이 왜 필요한가를 깨닫게 된다.

국가와 국민, 억압과 저항이라는 이분법적인 구도로 분류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났다. 바이러스만큼이나 강력한 변종을 생산해내어 곳곳에 파고드는 권력의 식민화를 쉽게 떨쳐낼 수는 없다. 도리어 대중의 자발적 참여를 유도함으로써 정당성을 확보하게 된다. 참여 정부라는 슬로건을 내건 정부의 과거사 청산이 가진 문제점이 바로 이 부분에 있다. 권력의 영향력은 대중의 암묵적 또는 적극적인 지지 없이는 발휘될 수 없다는 점을 은폐하고 있다.
광주 민주화 운동에서 희생된 사람들에 대한 책임을 오직 국가 권력에만 물을 수 없는 이유는 그러한 정부에 암묵적인 지지를 보내어, 경제 개발이나 국가 안보를 위한 소수의 희생을 일반 대중과 합의를 기반으로 하여 이루었다는 점이다. 집단적 유죄를 묵과하고 소수에게 그 역사의 짐을 맡기는 것은 권력 본질에 면죄부를 주어 좀 더 세련되고, 은밀한 대중의 억압기제의 출연발판을 마련하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근본에 도사리고 있는 권력 논리의 틀을 공유하고 있으면서, 동원된 대중을 전면에 내세워 자신들의 권력을 자연스럽게 합리화하고 키우고 있는 참여정부를 향한 대중의 비판적 시선은 반드시 필요하다.

집단의 정체성을 강조하고 획일화의 강요를 통한 권력 담론의 폭력성은 내 안에서부터 국제 사회에까지 광범위하게 펼쳐져 있다. 외부에 드러난 것은 강력한 저항으로 소멸하기 쉬우나, 전산학에서 말하는 ‘은닉화’, ‘추상화’와 같은 가공을 거치면 그것은 영속성을 띠게 된다. 이 책은 해체논리를 펼치고 있지는 않다. 또한 실효성을 논하지도 않는다. 다만 ‘타자화 된 시선’의 폭력성을 알리고, 각자의 삶 속에 스며든 권력의 헤게모니들 속에서 무엇을 성찰해야만 하는가를 깨닫게 할 뿐이다. 같은 논리 위에 존립하는 이상 우리는 모두 공범자이다. 그러한 틀을 깨기 위해서는 감춰진 것을 드러내어 해방을 위한 다각적인 대안을 모색하여 다층적 사회의 수평적 관계를 만들어 가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임지현 교수의 학문적 성과와 노력은 격찬을 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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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2-22 23: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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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선기자 정문태 전쟁취재 16년의 기록
정문태 지음 / 한겨레출판 / 2004년 10월
평점 :
절판


수잔 손택의 ‘타인의 고통’과 이 책을 같이 읽으면 의미 있는 독서가 될 것 같았다. 그러한 생각은 옳았고, 지울 수 없는 감격을 안겨주었다. 이 두 권의 책은 전쟁을 다루는 저널리즘과 그것에 노출되어 있는 대중과의 관계, 대중의 역할을 숙고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유사성을 지니지만, 말하는 주체와 말하려는 목적의 차이로 인해 다각적이고 입체적인 사고를 하도록 도와준다.

대중-포토저널리즘-전쟁의 구도를 가진 전자는 저널리즘의 무차별 폭격에 무감각해지는 대중의 각성을 전쟁터 밖에서 이야기하고 있고, 대중-전선기자-전쟁터 구도인 후자는 저널리즘의 최전선이자 전쟁의 현장에서 16년간을 기록한 눈과 귀를 대중에게 빌려준다. 물론 이러한 간접경험의 한계는 분명히 존재하고, 위험은 늘 따른다. 누군가에게 전달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왜곡과 은폐가 진실을 가리고, 전쟁의 선전도구로 악용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우려에도 불구하고 이 두 권의 책은 이성과 감각의 마비로부터의 해방을 외친다. 현실을 직시하게 하고, 진실에 조금 더 가까이 하게 하려는 노력이 진실되기에 아름답고 감동적이다.

사실 전선기자에 대한 오해를 가지고 있었다. 죽어가는 사람에게 사진기를 들이대는 기자를 보면 기계적이고 상업적인 악취가 났다. 군대가 총으로 그 사람을 쏘았고(Shot), 기자는 사진기로 찍는(Shot) 것은 확인 사살에 가까웠다.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죽음 주위를 맴도는 그들은 분쟁이 일어나는 어느 곳에서건 게걸스럽게 찍어댔다. 어떻게 보면 군대와 전선 기자는 공생관계가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도 들었다. 퓰리처상이 탐이 나서? 아니면 기자로써의 명예욕 때문인가? 그래서인지 저자는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고자 서두 부문에 황색 저널리즘에 대한 반성, 전선 기자의 역사와 오점, 전시언론통제에 휘둘린 현실을 고발한다. 서두에서 얻은 결론은 전선 기자는 인류의 인류에 대한 학살과 반인륜적인 범죄를 만인에 고발하는 고발자이고, 군대의 공공연한 적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그렇게 많은 기자들을 저격하였고 지금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의 장점 중의 하나는 제 3세계의 분쟁, 언론 관심 밖의 전쟁에 대한 간결하고 정확한 정보를 전해주고 있다는 점이다. CNN이 넘겨주는 영상만을 충실하게 전달했던 국내 언론사, 방송국에 의지했다면 의아해 할 만한 부분들이다. 그만큼 우리 사회가 필요로 하는 내용들이었다는 반증의 의미를 가진다.

또 다른 장점은 누군가의 처절한 경험은 좋은 이야기꺼리가 된다는 점이다. 대한민국 군대를 갔다 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평생을 이야기 해도 마르지 않는 샘을 가지고 있는 셈인데, 당신의 목숨을 보장 못하는 경험일 경우라면? 그것도 16년간이나. 이 책이 매혹적인 이유는 바로 이야기꺼리의 풍성함에 있다. 처절한 역사의 현장을 16년간 차곡차곡 쌓아놓았으니 얼마나 할 말이 많을까. 기자 개인의 역사이면서 세계 분쟁의 역사인 두 역사의 버무림은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16년치 이상의 전율과 분노를 던져준다.

더러운 전쟁이 아닌 것은 없다지만, 저자가 경험한 참상은 말할 수 없는 분노를 일으킨다.
400만 인구의 라오스에 700만개의 폭탄을 쏟아 부었고, 지금도 불발탄이 계속 터져 살아있는 모든 것을 적으로 삼았던 미국의 비밀 전쟁.
‘캄보디아 폭격 임무를 안고 갔지만, 어디에도 군사 목표물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인 결혼식장을 목표로 삼았다’ 미군 폭격기 조종사의 증언만큼이나 무차별적인 폭격으로 수십만의 민간인을 살해한 캄보디아 킬링 필드.
제주도의 역사와 비슷한 인도네시아의 발리 학살, 폭격으로 군인보다 민간인이 더 많이 죽은 코소보 내전 등은 믿을 수 없는 일들이었다.

무엇보다 참을 수 없는 것은 이 모든 것들이 왜곡되거나 은폐되었다는 사실이다. 라오스에 떨어진 700만개의 폭탄은 주인이 없으며, 영화 킬링필드에 의해 미국에 의한 학살은 없어졌고, 잔혹한 역사의 단면들이 종교적, 인종적, 정치적인 해석으로 사라져 버렸다. 이 범죄를 누가 심판할 것이며, 누가 책임질 것인가. 비참하게도 미국에 의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가 화염에 휩싸이는 것을 막지 못했고, 앞으로도 이와 같은 일을 막지 못할 세계 시민 사회는 이기적이고, 무능하다. 이 비루한 인생들이여. 죽음보다도 더 차가운 암흑이 드리워진 세상을 살아내기란 고역이 되어 버렸다.

누군가의 평화를 지켜준다는 것은 나의 평화 또한 누군가가 지켜준다는 의미일 것이다. 또한 관심어린 시선으로 늘 지켜보고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는 일일 것이다. 이웃의 평화 없이는 나만의 평화가 없다는 진리가 언제쯤 인류를 깨울 수 있을까. 답답함이 밀려온다. 저자도 참을 수 없었던 것일까. 책의 뒷부분은 격정적인 감정을 감추지 않는다. 기자의 신분에서 벗어나면서 그 동안 꾹꾹 눌러두었던 것이 넘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던 것이다. 버마학생민주전선에서 학생군들과 성장하고 아프가니스탄의 판쉴의 사자 마수드처럼 기자로서의 삶을 마친 저자는 역사의 산 증인이자 고발자이고 가장 인간다운 모습을 지키고 있었다.

‘동티모르에 내가 남긴 것은 마지막 눈물이었다. 다시는 전선기자로써 눈물을 흘리지 않겠다는 맹세였다’ 361p

그 눈물에 담긴 정서를 이해할 수 있다면 희망은 가까운 곳에 있을 것이기에…

‘나는 그 소녀들이 죽지 않고 살아 남아, 평화로운 세상에서 방아쇠를 쥐었던 그 손가락에 고운 꽃물을 들이는 풍경을 보고 싶음 따름이다. 나는 그 소녀들이 시집도 가고 아들딸도 낳고, 그렇게 잘 살 수 있게 되는 날을 기도하면서 이 글을 썼다.’ 347p

잘 살 수 있게 되는 날을 기원하는 많은 이들의 뜻이 헛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이 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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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고통 이후 오퍼스 10
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 이후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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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가 넘쳐 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것은 너무나 현실적이고, 자극적이어서 현실을 대체하는 시물라크르는 영혼마저도 잠식하는 듯 하다. 체험은 끊임없이 복제되어, 일시적이고 반복적인 이미지가 되어 감각마저도 무디게 만든다. 그렇게 무뎌진 감각을 추스르기 위하여 욕망은 끊임 없이 그것을 받아들이려고 하지만, 점점 퇴폐적으로 변질 되거나, 불가항력적인 무력감만을 채워준다.

‘피가 흐르면 앞에 실어라(헤드라인 뉴스의 케케묵은 지침 39p)’
너의 것은 너의 것이고, 나는 그것을 구경하는 구경꾼이다. 대중의 속성을 잘 아는 대중 매체는 구경꾼의 욕망을 숨김없이 착취한다. 끔찍하면 끔찍할수록 구경거리가 되는 세상에는 오직 보여지는 자와 구경하는 자로 나뉘어진다.

이러한 인간 본성의 병적인 측면과 잃어버린 현실 감각에 대한 저항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해본다. 이것에는 질문의 본질적 물음이 유의미한가 무의미한가라는 회의도 포함한다. 그래서인가? 가장 현실적인 이미지를 보여준다는 사진에서 그 해답을 찾으려는 아이러니를 정면 돌파하는 수잔 손택의 시도에서 숭고의 미가 더욱 값지게 느껴진다.

이 책은 사진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실은 전쟁을 말하고 있다. 누군가의 고통을 이야기 하고 있지만, 그 고통을 지켜봐야만 하는 보는 이의 고통을 말하고도 있다. 그러한 고통의 종식을 바라면서도, 종식 될 수 없는 현실이 주는 무력감에 대한 저항이 얼마나 절실한가를 사진에 관한 풍부한 자료와 지식을 펼쳐 보임으로써 증명하려 한다.
호소를 감추어 냉철함을 드러내고, 끔찍한 사진들(시체, 집단 린치, 훼손된 신체, 잔인한 형벌)을 곳곳에 배치하여 공격적이고 선정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기에, 이러한 방법은 대중 매체의 그것과 같게 된다. 하지만 결코 같지는 않다.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가 아닌, 무엇을 봐야만 하는가를 분명히 적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실의 참담함 그 자체가 아닌 그 참담함 속에서 인간이 해야 할 행동의 필요성을 역설하기에 그녀의 목소리에는 진정성의 그윽한 향이 가득하다.

‘상상력의 실패, 공감의 실패라고 우리는 이런 현실을 마음속에 담아두는 것에 실패했다고..(25p)’
하지만 우리는 실패를 인정해야만 한다. 그리고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시신경이 전해주는 잔상은 우리의 통점을 자극하지 않는다. 단지 고통의 기억을 도와주는 자극일 뿐이다. 그러한 자극은 현실을 해석한다. 경험에 의한 기억의 재생은 왜곡을 필연으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권력은 끊임 없이 왜곡을 부추기고 있다. 보여줘도 되는 것과 보여줘서는 안 되는 것을 구분 짓는 그들은 인류의 고통의 마디마디를 분절시키려는 수작을 가한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바로 이것이다.
또한 아군인가 적군인가를 구분하는 데에만 집중하던 것을 중단해야 한다. 진실과 위선을 가려내고, 자신의 치부를 드러낼 수 있는 용기를 북돋아, 사진으로부터 얻어지는 연민을 떨쳐내야 한다. ‘연민은 변하기 쉬운 감정이다.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이런 감정은 곧 시들해지는 법이다.’(153p). ‘사진은 논쟁이 아니면, 눈에 보이는 사실의 조잡한 진술일 뿐이다’ (48p)

그러한 논쟁이 수면 위로 떠오르는 사회, 우리 사회는 과연 어떠한가? 등장은 화려했다. 민중은 분노했으며, 권력에 대한 비판과 저항이 들끓었었다. 그러나 권위를 증오하면서도 권력을 숭상했고, 평화를 외치면서도 전쟁터로 전진하였다. 이미지(개가죽을 들고 개혁이라 하는)를 앞세운 노 정권은 효순, 미선양의 주검을 대선에 이용해 먹었고, 한총련과 전교조는 미군에 잔인하게 희생된 여성들의 처참한 사진들을 주관적 정치의식으로 사유화 시켜버렸다. 수많은 이미지는 대중을 압도하였고 정의를 질식 시켜 버렸다.

우리 사회에서는 표면화 된 논쟁의 그늘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제대로 인식하는 데에 어려움을 느낀다. 기득권 수호, 대중의 통제를 목적으로 검열이라는 이름 하에 벌어지는 조작과 은폐. 그러나 그 반대 진영에서도 처참한 사진들을 통하여 주입시키려 했던 불순한 의도를 서로가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그것은 미국이 다른 국가의 치부를 기념하기 위한 기념관을 세우는 ‘수고스러움’을, 자신들의 역사에서 반드시 기억해야만 하는 그래서 건립되었어야 하는 노예 기념관에는 쏟질 않는 이유와 동일하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의 목적과 의도에 편입시키려는 노력은 사진에 포획된 슬픔과 고통을 두 번 죽이고 말았다. 잔인하고도 무능한 사람들아. 타인의 고통을 타인에게 묻어두는 사람들아. 약자를 대변하겠다는 자들이 약자 위에서 호령하는 자들아. 사진은 현실과 직시를 요구한다. 당신의 진정한 모습이 찍히길 원한다.

나 또한 타인이기에 나의 글에서 나는 위선의 냄새를 참을 수가 없다.
그렇지만 경계하고 또 경계할 것이다. 타인의 고통은 타인의 시선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내 것이 될 수 없을지언정 침묵의 죄를 지어서는 아니 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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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포토저널리즘에 대한 날카로운 지적 시선 <타인의 고통>
    from 風林火山 : 승부사의 이야기 2007-08-07 03:55 
    타인의 고통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이후(시울)전반적인 리뷰2007년 8월 5일 읽은 책이다. 이 책의 리뷰를 적으면서 처음 안 사실이 지금 현재 내가 갖고 있는 책의 표지와 지금의 표지가 다르다는 것이다. 뭐 이 책의 발간일이 2004년 1월이긴 하지만 개인적인 생각에는 이 책이 다루고 있는 것을 보면 기존의 책 표지 자체도 타인의 고통을 드러내는 그림이었기에 이 책에서 얘기하고 있는 바와 약간은 상충되는 부분도 없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
 
 
 
스웨덴 기자 아손, 100년전 한국을 걷다 - 을사조약 전야 대한제국 여행기
아손 그렙스트 지음, 김상열 옮김 / 책과함께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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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서 왔소이다.


과거의 기억을 향수하는 것은 태곳적 회귀본능의 일환이다. 시간, 공간, 사물에 대한 감각의 그리움과 개인의 역사 속에 숨쉬는 인간적 공감대와 연정을 앨범 속에 고이 간직한다. 그리고 추억을 새기고 현재를 되새김질 하는 일련의 과정을 되풀이 함으로써 성찰과 낭만의 기쁨을 만끽하게 된다. 되돌아 갈 수 없기에 뒤 돌아 볼 수 밖에 없는 이러한 마음의 행동양식은 때때로 짐이 되기도 하지만, 그것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의미와 가치는 가볍게 여길 수 없는 것들이다.

이 책은 100년 전 조선에서 바로 뛰쳐나온 듯한 현장감이 긴 호흡을 내 뱉는다. 스웨덴의 기자 아손 그렙스트가 조선을 여행하고 기록하여 서구에 알린(그다지 유명하지 않은) 책이라서 그런지 풍부하고 세세한 내용들을 담고 있다. 그 당시 조선과 주변국과의 국제 정세, 문화, 여성의 지위, 경제, 종교, 교육, 전통, 설화, 민담 등 100년 전 조선을 쫙 펼쳐 놓기 때문에 ‘한국인’이 읽기에도 재미가 있다.

기록되지 않으면 사라질 운명의 것들이 고스란히 녹아 있으니 이 책의 가치는 높다고 평가한다. 악취가 나는 뒷골목 풍경, 전근대적인 감옥과 사형 장면, 거지와 양반, 평민들의 생활상, 황태자비의 장례 행렬, 사진에 찍힌 호기심 어린 조선 백성들의 표정 등등은 신기하리만큼 생생하다. 물론 이 책에는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성향의 내용들이 많다. 저자의 지극히 주관적, 지엽적, 왜곡된 지식들이 꽤 나타나기 때문이다(옮긴이에 의해 곳곳에서 수정됨).

그 이유는 유럽인의 시선으로 동양의 작은 나라의 모습을 담기에는 너무나 무식하고 모자람이 많기 때문이다. 그 당시 조선은 열강에 의해 서서히 잠식당하고, 국운이 기울어 망국의 길로 접어선 시점이 아니던가. 합리주의와 산업주의로 무장한 ‘문명인’들이라 하는 서구인의 시선에 비친 조선은 전근대적이다 못해 미개인으로까지 보여질 정도로 ‘서구 문명 기준’에는 아주 못 미치는 국력과 기술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이 책을 읽기 위해서는 그것조차 이해를 해야 하는 미덕을 보여야 진정한 재미를 얻을 수 있다. 그러한 시선의 끝에는 조선이 가진 ‘한과 ‘슬픔’ 뿐만 아니라 부조리 또한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조선인들은 게으르다. 노동을 경시하고, 유유자적한 삶을 즐긴다.’ 라고 평을 하니 발끈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다. 풍류와 멋, 여유를 삶에 관철시키는 백성들이라고 우기고 싶겠지만, ‘조선의 선비는 노동으로 보일 수 있는 일은 멀리 한다. 제 손으로 하는 것은 없다.’ 노동은 양반 이외 계층의 계급적 전유물이라는 지적에는 수긍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노동 경시는 현대에도 이르고 있지 않던가. 노동자이면서도 노동자를 멸시하는 어처구니가 없는 풍조는 조선의 천박하게 겉 멋만 든 숭문주의의 유산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또 다른 예를 들면, ‘서울에만 태양은 뜨고, 지방은 늘 그늘에 가려져 있다. ~중략~ 서울의 광채가 지방을 압도하고, 모든 코레아 사람이 서울에 살고 싶어하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서울 내에서만 궁과 임금의 눈길을 끄는 것이 용이하고 또 눈길을 끌게 됨으로써 공직의 문이 열리는 것이다.’ 국토의 기형적인 발전에는 다 원인이 있는 것이다. 왜 서울에 주요 기관이 밀집해 있는가? 행정 특별시에 대한 ‘그들’의 우려와 참뜻은 너무나 뻔한 속마음이 드러나 있다. 손에 쥔 것을 펴지 않으려는 그들의 욕심은 조선의 망국과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이 책에 담긴 정서는 망국의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설움을 잘 드러낸다. 일본 군대에 체포되는 조선 군인들, 매질에 익숙해질 만큼 맞으면서도 징징거리는 것 밖에 할 수 없는 무능력함, 왕비가 낭인들에게 살해되어도 왕은 도망쳐 다녀야 하는 국가의 운명을 보는 외국인의 시선에서는 연민이 담겨 있다. 허나 그들의 동정에 반가워 할 필요도 없고, 왜곡된 시선에 화 낼 필요도 없다. 다만 사라질 수도 있었던 기억의 자취를 남겨준 것에 대한 고마움이 책 한 권의 무게가 아닌 역사의 무게로 다가왔음을 인정하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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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친아이 2005-01-25 1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선에서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님의 리뷰 잘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