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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우연 - 제13회 문학동네청소년문학상 대상 수상작 ㅣ 문학동네 청소년 63
김수빈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2월
평점 :
초록초록한 표지가 싱그럽다. (그것과는 별개로 요즘 책 표지 디자인은 뭔가 새로운 느낌이 별로 없다. 한동안 초록색 표지가 넘쳐나더니...좀 아쉬운 마음이 든다).
5월 들어 확실히 짙은 초록이 많아졌다. 5월은 푸르구나... 아이들도 청소년도 딱 그 시기의 풋풋함과 푸르름을 안고 있는 듯하다. 난 꽤 열려있는 어른이라 자부하고 있었는데 이 또한 나의 오만이었음을 요즘 자주 느낀다. 시대의 흐름에 뒤처지지 않고(오히려 앞서가려고) 열심히 쫓아다녔지만 확실히 낄 수 없는 세대의 차이는 있었다. 청소년 소설을 읽다 보면 요즘 아이들의 생각을 읽거나 아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것들을 살짝 엿볼 수 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어린이용 도서를 제법 많이 읽었지만, 아이가 청소년이 되면서는 많이 읽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나는 고등학생이 된 딸아이에게 책을 권하기 전에 먼저 읽어보는 편이다. 그래야 아이의 생각을 물어볼 수도 있고 같이 주제를 논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문학동네 청소년문학상 대상을 받은 작품이다.
어쩌면 내 마음은 동경에 가까운 건지도 모른다. 고백 같은 건 생각해 본 적도 없고 정후가 나를 좋아해 주길 바라지도 않는다. 만약 내가 공주님이 되길 꿈꾸는 일곱 살짜리 어린애였다면 일말의 기대 정도는 가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열일곱의 나는 그렇지 않다. 정후는 내가 손만 뻗으면 닿는 거리에 있지만, 우리는 서로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 정후는 '모두의 한정후'이고 나는 그냥 1학년 9반 25번이니까. 이건 괜한 자기비하도 아니고 자존감 부족도 아니다. 나는 내가 조금 시시하고 재미없긴 하지만, 그렇게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이제 더는 공주님이 되길 꿈꾸지 않는, 아주 보통의 고등학생일 뿐이다. p.20
보통의 고등학생. "조금 시시하고 재미없긴 하지만, 그렇게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하는 이수현이라는 아이가 주인공이다. 수현이는 자기가 생각하는 만큼 그렇게 이도 저도 아닌 아이는 아니었다. 자기 스스로는 앞서서 행동하지 못하고 용기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친구의 아픔을 모른체 하지 않는 따뜻한 아이였다.
혼자있고 싶으면 적당히 거리를 두면될텐데, 굳이 반감을 사는 행동까지 하는 것이 신기했다. 어떻게 보면 그건 고요 같은 아이들이 가진 특권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니까 외국 드라마에 나오는 시니컬한 여자 주인공처럼 점심시간에 혼자 밥을 먹어도 초라함이나 쓸쓸함이 느껴지지 않는 아이들, 외로워 보이기는커녕 오히려 혼자인 모습이 더 특별하고 멋지게 보이는 아이들. p.22
고요가 여자아이들 사이에서 따돌림 아닌 따돌림을 받고 있다. 아이들은 어쩌면 미워서가 아니라 나와 다르다는 느낌, 뭔가 특별한 것 같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컸을 수도 있다. 거부당한 자존심과 마음의 상처가 암묵적인 동의를 이끌어낸다. 정후나 우연이, 그리고 수현이가 고요의 책상을 미리 치우거나 신경을 쓰기는 하지만 아이들이 그러한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공론화하지는 않는다. 그저 고요가 혼자 있거나 더 큰 싸움으로 번지지 않도록 배려할 뿐이다.
오늘 일을 장난이라고 해도 되는 걸까. 이건 명백한 괴롭힘이었다. 아이들은 고요가 먼저 미움받을 행동을 했다고 말한다. 미움받을 행동을 하면 괴롭혀도 괜찮을 걸까. 그럴만한 이유가 있으면 괴롭힐 권리가 주어지는 걸까. p.59
MARE TRANQUILLITATIS : 고요의 바다를 뜻하는 라틴어
수현이는 우연이가 보던 인터넷 아이디를 떠올리며 영어 단어를 쳐보다가 자동완성단어에서 고요의 바다를 찾는다. 고요의 바다는 달의 수많은 바다들 가운데 하나로 1969년 7월 20일, 달에 도착한 닐 암스트롱이 인류의 첫발을 내디딘 곳었다. 고요의 바다는 누구의 계정일까? 미술 시간에 달의 뒷면을 그렸던 이우연이 고요의 바다일까? 달이 그려진 이어폰 케이스를 선물한 고요가 고요의 바다일까?
나는 고요의 바다에 팔로우 요청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이수현이라는 게 드러나지 않는 공간에서라면 두려울 것도 겁이 날 것도 없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마음껏 손을 뻗을 수 있다. 설령 거절을 당할 지라도 전혀 상처 받지 않는다. p.70
마치 달의 뒷면과도 같은 인터넷 공간. 보장된 익명성은 그 누군가로부터 거절당할 위험도 마음의 상처를 입을 일도 없을 것 같다. 아이들은 현실에서의 자신과는 다른 모습으로 인터넷 공간에서 새로운 자신을 창조한다.
그렇게 수현이는 the_eagle_has_landed. 달 착륙선 이글이 무사히 착륙했을 때 닐 암스트롱이 인류에게 전했던 말, 저 문장을 계정 아이디로 만들고 고요의 기지에 무사히 안착한다.
그곳에서 발견한 또 하나의 계정 moon_of_michael_collins, 아폴로라는 이름의 검은 고양이 사진이 있는 계정이다. 아폴로 뒤로 보이는 익숙한 공원 풍경은 수현이의 집에서 5분 거리에 있는 달빛공원. 수현이는 마이클 콜린스가 아폴로 11호의 조종사였다는 것을 알아낸다.
아폴로 11호의 탑승자는 닐 암스트롱, 버즈 올드린, 그리고 마이클 콜린스까지 모두 세 사람이었다. 그러나 앞의 두 사람과는 달리 마이클 콜린스는 달에 착륙하지 못했다. 사령선의 조종사였던 마이클 콜린스는 암스트롱과 올드린이 달에 발자국을 남기는 동안 우주선에 홀로 남아 달의 궤도를 비행했다. 그는 48분 동안 지구와도 교신이 끊긴 채, 오롯이 혼자서 달의 뒷면을 바라보았다고 한다. 달을 눈앞에 두고도 발을 내디딜 수 없었던 마이클 콜린스. p.78
어쩌면 이 소설 속 아이들은 모두 달에 도착하지 못한 채 달의 뒷면만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 모두 달을 향해 날아가고 있지만, 대부분은 달에 발자국을 남길 수 없다. 아이들은 현실 속의 자신을 숨긴 채 익명의 공간에서 우정을 쌓는다. 현실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대면대면하게 바라보는 관계지만, 익명의 공간에서는 그들 사이에 벽이란 없다. 진짜 나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나의 속마음을 드러내보여도 상처입지 않을거라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가 아무리 친해지고 좋은 친구라 생각해도 만나지는 말자고 한다.
우연이가 사라진 날 우연이의 흔적을 근거로 해서 수현이가 해운대 바닷가로 찾아간다. 아이들은 학교라는 공간에서 점점 진짜 자신을 드러내놓지 않고 혼자만의 세계로 침잠해들어가는 것 같다. 몸으로 부딪히며 서로를 알아가던 때와 다르다. 아이들은 드러내보이고 싶지 않은 것도 많고 더이상 자신의 삶에 끼어들지 않기를 바라며 밀어낸다. 하지만 그들도 어느 순간 "나는 네가 궁금해졌어"라고 마음을 전하게 된다.
수현이는 친구의 마음을 살피기도 하고, 부당한 것에 용기내어 나서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도 안타까워한다. 수현이 친구 지아는 수현이와 찰떡이다. 둘 사이의 우정은 마치 어렸을 때 내 친구들을 보는 느낌이다. 수현이와 지아 사이의 우정처럼 고요와 우연이 그리고 반 친구들 모두 그런 관계가 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하며 책을 덮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