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임마꿀레
임마꿀레 일리바기자 외 지음, 김태훈 옮김 / 섬돌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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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나는 르완다내전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이 책을 읽고 나서야, 수많은 사람이 투치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렇게 많이 죽어나갔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이 책은, 대학살에서 살아남은 임마꿀레의 눈으로 본 르완다내전에 관한 생생한 기록이다. 그녀가 가족을 잃고 그녀 자신도 죽음의 문턱에서 겨우 살아나와 담담한 목소리로 그때의 기억을 되살려 우리에게 전해 주는 이유는, 오직 하나, 그것이 그녀가 살아남은 이유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르완다 내전이 일어났던 1994년은, 내가 한참 대학생활을 하고 있을 때이고, 나름대로는 국제정치나 사회에 대해 알려고 노력하던 시기였음에도 내 기억에는 르완다 내전은 없었다. 책의 서두 부분을 읽다말고 인터넷으로 르완다내전에 대해 검색해보았다. 의외로 최근에 올라온 르완다내전에 대한 정보들이 있었다. 알고 보니 작년에 개봉되었던 [호텔 르완다]라는 영화 때문이었다. 시간과 여건이 허락한다면 그 영화도 한번 보리라 생각해본다.


수세기 동안 투치족 국왕의 통치 아래 있었던 르완다가 계급갈등을 겪게 된 건, 바로 벨기에의 개입이었다. 벨기에게 르완다를 식민지화하면서 실시한 정책이 바로 투치족을 지배계급화하고 그들에게만 고등교육의 기회만 준 것이었다. 이것은, 식민통치를 원활하게 하고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벨기에의 정책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벨기에에게 얼마나 큰 도움을 주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르완다에는 투치족과 후투족 간의 싸움이 계속되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르완다의 내전이 자생적으로 발생한 종족간의 반목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만들어진 내전이라는 데에 이제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인위적이라는 것은 언제 어디서나 문제를 일으킨다. 르완다는 투치족 국왕이 수세기 동안 다스려온 국가지만 그것은 자생적으로 만들어진 권력구조였다. 그러나 벨기에에 의해 지배계급이 된 투치족에 대한 반감은 후투족의 폭발을 예견하고도 남게 만든다. 투치족을 지배계급으로 만들어 놓은 당사자인 벨기에는 이후 독립을 요구하는 투치족을 압박하기 위해 후투족의 폭동을 돕게 되는데, 이는 서방세계(특히 미국)가 자주 하는 행동 중의 하나다. 오사마 빈라덴을 키운 미국이 이라크에 어떻게 했는지를 보라. 결국 후투족 정권이 들어선 후 종족균형정책이 실시되는데, 이 책에서는, 투치족 아이들을 분리하기 위한 대규모 차별정책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는 물론 대학살에서 살아남은 투치족 임마꿀레의 시각이기도 하고, 대다수의 투치족들이 생각하는 바일 것이다. 그러나 후투족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것은 고등교육의 기회를 박탈당한 후투족이 투치족이 점하고 있는 사회 각 분야로 파고들기 위한 나름대로의 수단이며 무리수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애초에 벨기에가 계급 차별 정책을 쓰지 않았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우리나라의 여성고용정책이라든가, 장애인고용정책 등에 대해 회의적이다. 고용인원의 몇%를 의무적으로 채용하라는 것은, 한편으로 보면 혜택을 골고루 나누고 일시적으로는 효과적일 수는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또 다른 불평등을 재생산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많은 여성이나 장애우들이 교육을 예전보다 많이 받고 있고 성취결과도 높은 편이므로 채용 시에 성별과 장애유무를 떠나, 개인의 능력만으로 고용하는 기업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우선이 아닐까? 어쨌든 옆으로 새었지만, 후투족의 종족균형정책도 그런 이유에서 시작했을 거라 생각한다. 물론 그것이 나중에는 투치족을 골라내는 장치로 작용하게 되었다하더라도 말이다.


대학살 당시 후투족은, 투치족을 뿔 달린 괴물에, 바퀴벌레라고까지 지칭한다. 어릴 적, 북한사람들은 뿔 달린 괴물이고, 늑대라고 배웠던 우리와 다를 게 뭐가 있을까? 북한사람은 잡아 죽여야 할 존재이고, 우리를 못살게 구는 원흉이었다. 6월이면 반공포스터며 반공표어를 통해 전의를 불살랐던 우리 역시 후투족과 다를 바 없다. 지금 생각하면 터무니없는 말이지만, 그때는 그게 사실처럼 느껴졌으니 집단최면상태라고 해야할까? 과연 누구를 위해 그런 최면에 걸렸었는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임마꿀레는 영웅이 아니다. 그렇지만, 그녀는 투치족에, 여자지만, 대학 교육까지 받을 만큼 혜택을 받은 인물이다. 그녀의 부모는 교육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임마꿀레는 교육의 혜택을 충분히 받을 수 있는 환경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임마꿀레 자신은 상황판단을 제대로 할 수 영특한 소녀였다. 부모님은 상황에 대한 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했지만, 임마꿀레는 몸도 움직일 수 없는 욕실 안에서 영어공부를 하고, 프랑스군이 머무르는 장소로 이동을 하고, UN에서 일하기 위해 계속해서 구직신청을 하고 결국은 이렇게 르완다 내전의 실상을 전해주는 일까지 하게 된 게 아닌가. 임마꿀레가 담담하게 그때의 일을 책으로 풀어놓을 수 있었던 이유는 가톨릭신자로서의 믿음과, 용서에 있다. 내 가족을 죽인 자들을 용서함으로써 임마꿀레는 고통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었고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언젠가 읽었던 사카가미 가오리의 [희망여행](푸른숲)이 떠올랐다.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함으로써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다는 이야기.


끝으로 르완다 내전의 참상을 생생하게 전해주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조금 더 밝게 해준 이 책에 별3개를 주는 이유는, 가톨릭 신자로서의 임마꿀레가 지나치게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종교를 탓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임마꿀레가 어떤 결정을 할 때마다, 하느님이 미리 준비하신 일이라고 고백하거나 성경구절을 떠올리는 장면은 솔직히 읽는 내내 찜찜했다. 비록 그 신앙의 힘이 임마꿀레를 지탱시켜 준 큰 힘이기는 했지만, 신앙이 없는 내게는 군더더기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리더스 가이드 이벤트 서평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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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로 간 빨간 모자 산하작은아이들 16
조엘 포므라 지음, 백선희 옮김, 마르졸렌 르레이 그림 / 산하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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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로 간 빨간모자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로 그 빨간모자 이야기입니다. 처음에 작가의 말을 읽어보면, 늘 함께 놀아주지 못하는 엄마로 딸애에게 미안함을 느끼며 쓴 글이라고 해요. 빨간모자의 입장에서 쓰려고 했다는군요. 그래서일까요? 빨간모자는 늑대보다 엄마를 더 무서워하는 것 같아요.

이 책에는 여섯명의 등장인물이 있답니다. 빨간 옷을 입은 빨간모자와, 이야기를 하는 남자와, 엄마와, 엄마의 엄마와, 늑대와, 빨간모자의 그림자지요.

빨간모자의 엄마는, 빨간모자와 잘 놀아주지 않아요. 늘 시간이 모자란 엄마에게 빨간모자가 시간을 선물해도, 그 의미를 잘 모르는, 빨간모자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엄마랍니다.

엄마의 엄마 집에 도착하자, 목소리가 이상한 할머니가 누워있어요. 빨간 모자는 겁에 질려 이야기하지요. 그렇지만, 늑대는 빨간모자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지 않아요. 어서 잡아먹을 생각만 하지요.

늑대 뱃속에 들어간 빨간 모자와 할머니는 사냥꾼에 의해 구출되었답니다. 그래서 뭐가 어떻게 됐다는 거지요? 늘, 빨간 모자를 혼자 두는 엄마보다 빨간모자 자신의 그림자하고 노는 것이 더 재미있을 만큼 외로웠는걸요. 할머니와 빨간모자를 잡아먹은 늑대지만, 그래도 늑대는 빨간모자에게 말을 걸어주었지요. 엄마보다, 늑대가 더 나쁘다고 여겨지지 않는 건 그래서일거예요. [알라딘 서평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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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피크닉
온다 리쿠 지음, 권남희 옮김 / 북폴리오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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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피크닉은, 온다리쿠 식의 미스터리에 별로 감흥을 받지 않는 사람이 읽어도 괜찮을 책이다. 미스터리같은 느낌을 주면서도 미스터리가 아닌 약간은 낭만적인 느낌의 소설. 내가 그동안 읽어온 온다 리쿠의 소설들과는 차이가 있어 보인다. 가족이라는 대전제를 끌고 들어와서 그런가?

다카코와 도오루가 다니는 학교에는 수학여행 대신 보행제를 실시한다. 보행제라 함은, 일종의 걷기대회 같은 건데, 우리나라의 국토순례와 비슷한 느낌을 주는 행사이다. 보행제와 비슷한 행사에 참여해 본 적이 전혀 없는 나지만, 소설을 읽는 동안, 이건 등산과도 비슷한거야..라는 생각을 했다. 자기 자신과의 싸움, 몸은 지쳐가지만 곧 눈앞에 마주한 정상을 향해 걷고 오르고 또 걷는, 대피소 부근에서 한숨 쉬고 또 걸어가는 등산을 떠올렸다. 그리고, 비약적이긴 하지만, 매년 고생을 하면서도 또 다시 보행제를 시작할 때쯤이면 고생한 것은 다 잊어버리고 설레임과 보행제 이후의 감동만 남아있어 기대를 하게 되고 막상 보행제가 시작되면 예전의 악몽을 다시 떠올리는 과정은 출산(出産)과도 맞닿은 느낌을 준다.

다카코와 도오루는, 서로 상대가 자기를 싫어할거라 생각하는 소년소녀다. 물론 다른 친구들의 눈에는 오히려 그것이 두 사람 사이의 모종의 약속, 그러니까 두 사람이 사귀는 게 아닐까라는 묘한 분위기를 만들어내지만 말이다. 왜 그럴까? 라는 의문을 가진 채 이 소설을 읽었다. 대답은 의외로 빨리 나와버렸다. 그러니까 두 사람 사이의 관계라는 건 미스터리가 아니다. 오히려 사카키 안나의 엽서 내용 속의 주문이 무엇인지가 더 궁금증을 유발하기는 하지만 이 소설은 미스터리는 아니라는 생각은 더 강하게 든다. 그래서 그동안 온다리쿠의 똑같은 느낌의 소설들에 약간 질려가고 있던 나에게 이 책은 신선한 느낌을 주었다.

그리고, 두 사람이 두 사람의 관계를 개선시키고 서로가 원했던 방향으로 결론을 내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은 바로 그들의 친구들 (가깝게는, 시오루와 미와코, 멀게는 안나까지)이다. 온다 리쿠의 소설에서, 쓸데없이 지면만 장식하는 주변인물들이 많다고 느꼈던 내게, 이 소설 속 친구들은 각자의 역할을 잘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 인물들이 이렇게 자기 역할을 제대로 해야지.

안나의 동생 준야의 등장은, 그런 보행제나 수학여행 같이 밤을 지새는 행사가 있을때면 의례 이야기꽃을 피우기 마련인 유령이야기로부터 시작한다. 또 학교괴담시리즈인가? 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의 진실도 너무나 쉽게 밝혀진다. 오히려, 이 소설에서는 미스터리적인 요소가 없어서 좋다.

대학수험을 앞둔 고3에게 보행제가 주는 의미는 다양할 것 같다. 친구들과의 고교시절에 대한 추억을 남기는 의미로도 가치가 있지만, 끝날 것 같지 않던 그 코스를 끝내고, 골인지점에 도착하기까지 서로를 도와가며 목표를 이루는 그 행사를 통해 긴 수험생활에 지칠 수 밖에 없는 고3학생의 마음을 드러내보여준다. 극기훈련이라는 말로도 대체할 수 있겠지만, 단 시간에 이루어지는 극기훈련과는 차이가 있다. 그래서, 길을 걷고 또 걷는 동안, 자기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한 다음에 맛보는 감동. 이 보행제를 떠올릴 때마다 고통보다는 그 감동을 떠올리는 것이 바로 보행제를 통해 참의미를 깨닫는 것이 아닐까.

의외로 가족-이라고 하기에는 그 간극이 지나치게 벌어져 있지만-간의 단절된 틈을 보행제라는 행사를 통해 효과적으로 메웠다. 거기에다가 진한 우정의 주문, 미와코와 안나의 배려, 준야의 엉뚱한 행동, 도우루와 시노부의 우정, 고이치로의 엉뚱한 모습까지..모두 아름답게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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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손가락 이야기 산하작은아이들 15
로랑 고데 외 지음, 백선희 옮김, 마르탱 자리 그림 / 산하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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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그림이 참 인상적인 다섯손가락 이야기.

어린이용 희곡으로 다섯 작가가 다섯 손가락의 이야기를 하나씩 하고 있고, 맨 마지막에 맺음말을 겸하여 [손가락들의 왕]이라는 글이 하나 더 있다.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희곡총서 중의 한권이며 2000년 5월에 프랑스에서 공연된 적이 있는 작품이라는 설명이 있다.

희곡에 대해 학교에 다닐 때 배운 내용을 떠올리면 이 책을 읽으면서 희곡이라는 사실을 느끼기 힘들다. 대사와 지문이 있고 막의 구분이 있는 그런 희곡이 아니라는 말이다. 두 명의 배우가 관객 앞에서 이 내용을 읽었다하니 우리가 알고 있는 형태의 희곡과는 조금 다를 것이다.

어쨌든, 이 책에는 다섯 손가락에 관한 이야기가 들어있다. 외로운 엄지, 재주많은 검지, 이름을 얻은 중지, 게으름뱅이(?) 약지, 더러운(??) 소지, 그리고 이들 모두가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는 마지막 한편까지 손가락들의 이야기는 마르탱자리의 그림이 함께 한다. 초등학교 저학년이 읽기에 좋은 책으로 각각의 손가락의 역할과 생김새 등에 대해 재미있게 이해할 수 있다. 책에서는 손가락을 엄지, 검지, 중지, 약지, 소지로 나누고 있고, 마지막 저자들이 직접 쓴 소개에 이르면 엄지손가락, 집게손가락, 가운뎃손가락, 약손가락, 새끼손가락으로 나누어지면서 우리말의 두가지 손가락 이름을 표현하고 있어서 아이들이 두가지 이름을 다 알 수 있게 해 놓았다. 이건, 아마 원작과는 달리 한국적 상황에 맞춘 번역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솔직히 프랑스어로 손가락 이름이 몇개인지 모르므로 나의 추측일 뿐이다.)

 

그러나, 아쉬운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을 쓴 작가들이 프랑스사람이라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이 책이 한국적 시각이 아니라 프랑스적 시각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왜냐면, 여기서는 이름이 없는 손가락이 중지이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이름없는 손가락은 약지이다. (그래서 무명지라고도 한다.) 그리고, 중지는 서양에서는 욕으로 쓰인 손가락이기도 하지만 한국적 사고로는 욕할 때 쓰는 손가락이 아니다. 지금이야 중지를 들면 욕을 한다는 사실을 한국 사람도 다 알고 있지만, 아이들에게 그런 걸 가르쳐줄 필요는 없을 듯하다. 그리고, 약지는 영어로 the ring finger이라고 해서 결혼반지를 끼는 손가락으로 이해될 수 있겠지만, 한국의 약지는 약(藥)과 관련이 있으니 그 다른 점을 알고 있어야 할 것이다.

외국문학을 아이에게 읽어줄 때는, 특히 저학년이나 어린 아이들에게 읽어줄 때는 부모가 개입할 필요가 있는듯하다. 스스로 외국과 한국의 의식의 차이, 문화의 차이를 구분할 수 있는 나이가 되기 전에는 부모가 책을 먼저 읽어보고 아이에게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해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알라딘 서평 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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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번째 사요코
온다 리쿠 지음, 오근영 옮김 / 노블마인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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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번째 사요코를 이제서야 만났다. 온다 리쿠의 작품을 하나하나 읽고 있는 중인데 여섯번째 사요코를 어젯밤에 읽기를 마쳤다. 밤중에 읽기에는 으스스한 면이 있는 소설이다. 특히, 학교축제 때 공연된(?) "여섯번째 사요코"를 12시가 넘은 한밤중에 빨간램프, 노란램프에 맞춰 읽고 있자니 오싹~한 느낌마저 들었다. 이 책의 장점은 그런 오싹함과 무서움에 있는 것 같다. 그것을 빼면, 약간은 흐지부지한 면이 없잖아 보인다. 또한, 사요코와 슈를 제외한 주변인물들의 역할이 지나치게 주변적(?)이어서 존재이유를 모를 정도였기에 아쉬움이 큰 소설이었다.

처음에는, 마사코의 역할을 어느 정도 기대했었다. 마사코의 무녀와도 같은 촉매적 분위기(p.57)라든가, 마사코가 '그 느낌'(p.26)이라고 지칭하는 것들, 그리고 유달리 사요코에게 친밀감을 느끼고 사랑(?)하고 있는 듯한 느낌의 문장들이 그러했지만, 결국 마사코가 한 역할이라곤 별것없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유키오는 그 자신의 직감과 불길한 느낌(p.31)을 갖고 있으면서도 소설 끝까지 가는 동안 마사코와 연인이 되고 싶은 남학생 이상의 어떤 역할도 부여받지 못했다. 오히려 중반 이후에 등장하는 시다라가 슈와 함께 문제를 푸는데 동참하고 있을 뿐이다. 물론 시다라도 특별한 역할을 하지 않는 주변인물일 뿐이다.

책에는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인문들의 존재가 책의 내용 전개상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특히, 특이한 정신세계(?)의 소유자인 슈의 아버지도, 그런 특이한 등장 외에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한다. 슈에게 어떤 실마리도 제공하지 못하는 인물이 왜 그렇게 특이한 모습으로 등장했는지 모를 일이다.

[여섯번째 사요코]의 내용은 누군가 말했듯이 [여고괴담]과 닿아있다. 뿐만 아니라 온다 리쿠의 이후의 작품 전반에 걸쳐 학교를 무대로 하거나, 미소녀 미소년을 주인공으로 하는 형식적인 틀과도 닿아있다. 여섯번째 사요코가 한밤중 내게 느끼게 해 준 그 오싹함과 무서움마저 없었다면, 의미없는 책이 될 뻔 했다.

한 작가의 책을 계속해서 읽는다는 것은 이래서 조금 불편하다. 책의 서두만 보고서도 누구 작품인지 알 수 있다는 것은, 작가의 문체의 독창성이라는 점으로 볼 때는 무한한 칭찬이지만, 비슷한 인물들, 비슷한 사건 전개들, 비슷한 배경들로 알아차리게 될 경우에는 시리즈 물이 아닌 다음에야 결코 칭찬이 될 수 없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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