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8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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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일본 영화 <라쇼몽>은 살인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의 각기 다른 시선을 보여주는 방식을 통해 사건의 진실을 드러내고자 한다. <고백>도 이와 비슷한 구조를 보여준다. 단, <고백>은 살인사건으로부터 시간이 꽤 흘러가면서 새로운 사건이 일어나는 과정이 첨가된다. 사건의 진실이라는 측면보다는 심리묘사에 더 중점을 두고 있는 것도 다르다. 그리고 이것은 뜻밖의 사건들과 새로운 사실들을 보여줌으로써 재미와 충격을 준다. 

<고백>은 한 중학교 여교사의 종강 연설로 시작된다. 이 연설은 수영장에서 숨진 자신의 딸 이야기를 시작으로 이것이 단순사고가 아니라 살인이었음을 밝힌다. 게다가 그 살인범이 자신의 반 학생이었음을 고백하면서 파장을 일으킨다. 그러나 여교사는 이 살인범을 경찰에 신고하지 않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복수한다. 물론 그들의 생명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고통 속에 빠지도록 만든다. 성직자라는 챕터로 구분된 이 이야기는 이것으로도 완결된 한편의 단편소설이 된다. 반전의 반전을 거듭하는 이 챕터만으로도 소설은 충분해 보였다. 오히려 이 이야기에 다른 이야기를 더한다면 그야말로 사족처럼 느껴질 것 같았다. 하지만 이야기는 살인범의 시선으로 바뀌면서 더욱 흥미진진해진다. 

소설은 소년범에 대해선 이야기한다. (열세살과 열네살의 정신 연령 차이가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의도적인 살인을 저질러도 감옥에 가거나 법적 제재를 받지않는 것이 얼마나 부조리한 상황인지를 말한다. 살인을 계획했던 아이의 독백을 들어보자.  

살인이 범죄라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악이라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인간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물체들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어떤 이익을 얻기 위해 어떤 물체가 소멸해야 한다면,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 아닐까?.. 하고싶은 말이 뭐냐고? 문장으로 나타내는 도덕관념은 학교에 들어와 익히는 단순한 학습 효과일 뿐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잔인한 범죄자는 당연히 사형시켜야 한다는 사고방식이 가능한 것이다. 거기에 모순이 있는데도. 207쪽 

사회적으로 흥미진진한 소설들은 그 등장인물들의 궤변에 심사숙고해보거나 하마터면 고개를 끄덕이도록 만드는 힘이 있다. 살인은 범죄이기는 하지만 악은 아니라는 생각, 우리가 갖고 있는 도덕관념은 그저 학습효과일 뿐이라는 주장은 다소 오싹하다. 그래서 작가는 항상 부작용을 염려해 다른 인물을 통해 반박을 가한다. 여기에선 여교사가 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그래서 소설의 중심적인 시각도 왠지 그녀에게로 집중되어지는 느낌도 있다.  

소설은 한편으론 범죄자와 피해자 이외의 일반 사람들에게도 시선을 돌린다. 여교사가 범죄를 저지른 학생들에게 복수를 꾀한 방식도 주변인들의 반응을 통해서였다. 그러나 이것은 의외의 피해자를 양산한다. 
   

역시 아무리 잔인한 범죄자라도 제재는 필요하지 않을까요? 그것은 결코 범죄자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제재는 평범한 세상 사람들의 착각과 폭주를 막기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77쪽 

법적 제재는 범죄자에 대한 처벌과 함께 일반인들의 폭주를 막아주는 방편이라는 것이다. 소위 중세시대의 마녀사냥과 같은 일을 방지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소년범과 함께 소설이 주목하고 있는 것은 니트족과 같은 사회 부적응자에도 있다. 

몇 년 전부터 은둔형 외톨이니 니트족이니 하는 단어를 종종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현상에 해당하는 청년들이 해마다 증가해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고 하더군요. 저는 항상 이런 현상에 해당하는 사람들, 학교에도 가지 않고, 일도 하지 않고, 집 안에서 빈둥거리는 청년들에게 이런 명칭을 부여한 게 문제라고 생각해요. 우리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어느 집단에 속하거나 직함을 얻음으로써 안도하고 있지 않을까요... 하지만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은둔형 외톨이니 니트족이니 하는 이름을 붙여버리면 그 시점부터 그것이 그 사람들의 소속이자 직함이 되고 맙니다. 사회속에서 은둔형 외톨이나 니트족이라는 자리를 확보한 사람들은 그것만으로 안심해서 일을 하거나 학교에 가려는 노력을 그만두는 거예요. 127쪽 

어떤가. 이름은 때론 우리를 얽어매는 족쇄가 되기도 하지만 반대로 그 이름 안에서 우리가 안주할 수 있는 포근한 울타리가 되기도 한다니...  <고백>은 이름의 상반된 영향력처럼 하나의 사건이 사람들에게 주는 상반된 영향, 극과 극의 심리적 파장을 통해 재미와 함께 생각해 보아야 할 사회적 문제를 살포시 건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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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을 쫓는 아이 (개정판)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 이미선 옮김 / 열림원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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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을 쫓는 아이는 성장소설이다. 성장의 기간은 아프가니스탄의 파란만장한 역사 속에서 이루어진다. 시대 속에서 성장하는 아이들의 이야기인 셈이다. 아이의 성장이야기는 아니지만 영화 <박하사탕>과 얼개가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다.  

 

소설은 아프간의 평화롭던 시절의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아미르와 하산이라는 두 아이가 우정을 쌓아가는 모습부터다. 그런데 주인공 아미르는 하인인 하산에게 애정을 더 쏟는 아버지 바바 때문에 질투심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아프간의 전통놀이인 연싸움이 있던 날. 아미르는 우승을 한다. 하산은 끈 떨어진 연을 차지하기 위해 뛰어가고 아미르는 시간이 조금 지나 뒤쫓아간다. 하지만 아미르를 위해 헌신하던 하산은 연을 줍다 성폭행을 당한다. 그런데 아미르는 그 모습을 숨어서 지켜보면서 아무런 도움의 손길을 건네지 못한다. 하산은 예전에 목숨을 걸고 자신을 지켜주려 했는데도 말이다. 그리고 아미르는 이 사건 이후 도저히 하산을 지켜볼 용기가 없어 거짓 도난 사건을 만들어 하산과 그의 아버지를 내쫓고야 만다.

 

소설의 중심을 이루는 감정은 바로 이 사건에서 비롯된 비겁함이다. 소설은 주인공이 성장해 가면서 아버지의 용기와 그 뒤에 감추어진 비겁함을 보여주고, 하산의 우정과 용기를 지켜보며, 주인공 아미르가 어떻게 속죄에 이르게 되는지를 묵묵히 전달하고 있다. 이 성장의 과정에선 아주 큰 반전이 숨겨져 있고, 반전 이후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충격적 사건도 이어진다. (소설 읽는 재미를 반감시키지 않기 위해 여기서 밝히진 않겠다.) 또한 아프간의 현실을 배경 속에 펼쳐보인다. 수니파 이슬람교 파쉬툰인과 시아파 이슬람교 하자라인 사이의 차별과 소련 침공. 탈레반 집권 등의 역사적 진행이 아프간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도 알게 해준다. 
  

아무튼 이 소설이 감동을 전하고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 것은 비겁함과 거짓말, 용기와 속죄에 대해 생각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또다른 말로 어른이란 무 엇인가를 깊게 생각하도록 해준다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책장을 덮는 순간 아직도 우리는 성장 중에 있음을 고백하도록 종용한다. 아니다. 오히려 성장을 멈추고 있음을 고백하도록 만들어 준다는 점에서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

  

무슨 말이냐고? 이렇다. 조직에 살아남기 위해 해야만 하는 말을 못하는 경우는 없었던가. 그저 갈등을 피하기 위해(해소나 해결이 아니라) 거짓말을 서슴없이 내뱉은 적은 없었던가. 외부적 압력, 폭력으로 인해 소신을 저버린 적은 없었는가. 꿈을 펼칠 수 있는 기회를 이런 저런 핑계로 넘겨버리고 현실에 안주한 적은 없었는가. 왜냐하면

 

그렇지만 명심하렴. 결국에는 세상이 항상 이기고 만다. 그게 세상 이치. 152쪽  

라면서 말이다.

 

기억을 더듬어보라. 얼굴이 화끈거리고 고개를 숙이고 싶은 경험들이 있었을 것이다. 혼자 해결하지 못해 끙끙댄 경험도 있을 것이다.

   

너는 어쩌란 말이냐고 물었니? 지난 세월 내내 너한테 가르쳐주려고 했던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 질문을 절대 해서는 안된다는 법 말이다. 238쪽 

 

그래도 우리는 아직 성장할 여지가 있다.  

 

양심이나 선이 없는 사람은 고통스러워하지도 않는다. 449쪽 
 

아미르가 자신의 목숨까지 걸고서 비겁하고 부끄러웠던 과거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던 것은 그것을 짊어지고 살아야만 하는 고통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부끄러움을 아는 양심과, 비겁함과 옮은 것을 아는 선을 놓쳐서는 안된다. 즉 "비겁하다 욕하지 말라"고 외치기 보단 비겁함에 부끄러워 할 줄 알았을 때 비로소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아직도 성장을 멈추고 있는 우리에게 이 소설은 뜨거운 눈물과 함께 따끔한 회초리도 숨기고 있음을 밝힌다. 그리고

 

용서란 요란한 깨달음의 팡파르와 함께 싹트는 것이 아니라, 고통이 소지품들을 모아서 짐울 꾸린 다음 한밤중에 예고 없이 조용히 빠져나갈 때 함께 싹트는 것이 아닐까 538쪽  

 

어른이 되어야만 하는 우리는 용기를 통해 용서를 받음으로써 한 뼘 자랄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우린 얼마나 부끄러운 일을 하지 않을 수 있을련지, 비겁한 행동을 변명하지 않을련지....... 사뭇 숙연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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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 바위 - 영험한 오하쓰의 사건기록부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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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이 되어버린 실화에는 감추어진 것들이 많다. 필사의 과정에서도 수많은 오탈자로 뜻의 변화가 발생하는데 구전의 과정에선 오죽하겠는가. 특히 시대의 영웅이 되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는 영웅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새로 덧붙여지는 것과 제외되는 것들로 인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기도 한다.  

일본 에도 시대 아코 무사 47명의 충혼에 대한 이야기는 <가나데혼 주신구라>라는 이름으로 일본인들에게 널리 알려져 사랑받는 작품이다. 자신들이 모시던 주군의 원한을 갚기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의 충성심은 회자되기에 충분한 것이다. 하지만 그 이야기의 발단이 된 사건에 대해선 정확하게 전해진 것이 없다. 오직 연극과 같은 작품들을 통해 추측될 뿐이다. 그러나 그런 추측들은 충성심을 돋보이게 만들기 위한 재료로 쓰일 수밖에 없다.  

소설 <흔들리는 바위>는 아코 무사들이 죽은 후 100년이 지난 시대를 배경으로 갑작스레 유아살해라는 사건이 연달아 터지면서 발생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유아살해와 아코 무사와의 관계가 도대체 이어질 것 같지 않지만 사건의 실마리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뜻밖의 연관성을 지니게 된다.  

유아살해라는 사건을 풀어나가는 인물은 오하쓰라는 처녀와 우쿄노스케라는 젊은이다. 오하쓰는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의 마음이 남아있는 곳에서 과거를 볼 수 있고, 사령 즉 유령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신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우쿄노스케는 지금으로 말하면 수학에 재능을 가진 심약한 젊은이로 논리적 사고를 지니고 있다. 이 둘은 유령이 씌운 사람이 유아살해를 저지르고 있음을 알게되고 그 유령의 억울함이 아코 무사와 관련되어 있음을 밝힌다.  

책은 판타지와 추리, 활극이 잘 버무려져 읽는 재미를 줄 뿐만 아니라 진중한 질문 하나를 던진다.  

예외없는 절대명령으로 인한 희생, 집단에 따라야만 하는 개인의 희생이 얼마나 억울한 일인가를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 미야베 미유키는 아코 무사의 이야기의 발단이 한 무사의 정신착란으로 인해 벌어졌을 때를 상상하며 이야기를 끌고 간다.  

영토 안에서 칼부림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명령이 정신착란 무사로 인해 어겨졌다. 무사는 할복을 명령받고, 칼부림의 대상이 됐던 무사 또한 피해를 입는다. 칼부림을 했던 무사가 정신착란이었음을 번주가 인정만 했더라도 상관 없지만, 그것을 묻어둠으로 인해 무사의 부하들은 할복한 주인을 위해 상대를 베어야만 한다. 그 시대는 그랬다. 이 부조리를 모른 사람이야 충절의 칼날을 휘두를 수 있겠지만 전후사정을 알고 난 무사들은 어찌해야 할 것인가.  

영지 내에서 생명을 죽이는 일을 절대 금한 곳이 있었다. 명령 자체는 훌륭해 보인다. 그런데 들개에게 목숨을 위협받는 촌민을 구하기 위해 칼을 쓴 무사는 규칙을 어겼다는 이유로 신분과 직장을 잃고 밑바닥으로 떨어진다. 그게 정당한 대우일까. 생계를 이어가기 위한 무사의 노력은 결국 억울함으로 인해 그릇된 방향으로 나가게 된다.  

그런데 이런 일들은 절대권력을 지니고 있던 중세 시대에만 벌어지고 있는 일일까. 혹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도 법이나 명령으로 인해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있지는 않을까. 공중파 방송에서 보여주는 시청자 칼럼이나 여러가지 고발 시사 프로그램들 속에서 우린 중세 못지않은 억울함을 마주치게 된다.  

그 영혼들을 어찌 위로할 수 있을까. 절대라는 단어의 척박함과 견고함이 망령이 되어 우리 주위를 떠돌고 있는 것은 아닌지 가끔은 섬뜩해지는 세상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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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인간
심포 유이치 지음, 김난주 옮김 / 들녘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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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서로가 그립고 반가워야 친구라고 할 수 있다. 철없고, 상처 입기 쉽고, 자기 감정을 어떻게 처리해야 좋을지 몰라 괴로워했던 과거의 모습을 서로 확인할 수 있어야 지금과 이어진다. 필요한 것은 시간을 공유하고 있다는 감각인지도 모르겠다. 지금에만 사는 인간은 없다. 갓 태어난 아기는 우는 것밖에 모른다. 경험을 쌓아가면서 사람이 된다. 내게는 과거가 없다. 아직 어린애나 다름없다. 함께 과거를 그리워할 친구가 없다.  325쪽 
 

소설의 주인공 나쓰미는 교통사고를 당했다. 목숨마저 위태로울 정도로 큰 사고였다.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서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식물인간이 되느냐 마느냐의 기로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머리속에선 과거의 그가 없다. 기억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나쓰미는 나쓰미라는 이름을 가진 예전의 그일까.(이런 소재는 소설이나 SF영화의 단골로 등장한다) 과거의 기억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면 그 또한 예전의 그가 아닐 수도 있다. 나를 전혀 알지 못하는 이국의 땅에 건너갔을 때 새로운 사람으로 바뀌는 게 쉬울 수 있는 것도 바로 그와 같은 이유때문이지 않을까.    

소설은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어린아이와 같음을 나쓰미의 치료과정을 통해 보여준다. 나쓰미는 마치 아이가 말을 배우고 인생을 알아가듯 천천히 자신의 정체성을 쌓아간다. 하지만 서른을 갓 넘긴 그가 열살짜리 아이일 수는 없다. 8년 만에 세상 밖으로 나온 나쓰미는 현재에 안주하지 못하고 과거의 자신을 찾아 길을 떠난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마주치는 사건의 전말은 그에게 충격으로 다가온다.   

자신의 애인이었던 여자가 왜 자신을 피하려 하는지, 과거의 친구들이 머뭇거리며 왜 자신의 애인에 대해 질문하지 않은지, 그리고 조금은 몰상식해 보이는 친구들을 왜 사귀었는지 의심가는 과거의 자신... 그리고 어머니와 의사는 왜 그토록 자신이 과거를 잊고 현재로부터 새로 출발하도록 하려 애썼는지 등이 소설이 결말을 향해 가면서 숨가쁘게 드러난다.  

그리고 마지막에 벌어지는 대형사고는 과거를 알게 된 그가 과거의 자신에게로 돌아갈 것인지, 현재의 나라는 새로운 인간으로 재탄생할 것인지를 시험하게 만든다. 자아라는 정체성이 갖는 끈적끈적한 한계. 즉 자아를 규정하는 순간 생겨버리는 경계선은 그것을 넘어서는 순간 자아를 잃어버린다는 두려움을 일으킨다. 따라서 사람들은 그 경계선 안에 머물고 싶어한다. 그러나 때론 불굴의 의지로 경계선을 넘어서는 순간도 발생한다. 바로 그 순간이 기적의 인간을 만드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 경계선을 넘어서는 순간이 바로 인간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안도의 순간일 수도 있다.  

즉 '나라는 인간' 이라고 규정해버린 '나'의 틀을 깰 수 있는 그 순간이 바로 기적의 순간이 되며, 그것이 새로움을 향한 변화의 기폭제가 되는 것이다. 소설에서 말하는 기적의 인간은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난 생명의 기적이라기 보다는 나라는 틀을 깨는 바로 그 순간의 기적을 말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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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나 오사카 같은 대도시의 러시아워는 훨씬 더 복잡할 것이다. 옆 사람과 몸을 꼭 붙이고 말없이 서 있는 사람들의 행렬이 온 일본을 혈관처럼 달리고 있다. 마침내 오염돼 쓸모가 없어진 혈액은 신장에서 걸러 몸 밖으로 버린다고 들었다. 사람도 그렇게 되는 걸까. 러시아워에 시달리고 있자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102쪽 

아는 사람이 병원에 입원했다고 하면 누구든 한번 찾아가야지, 하고 생각한다. 그러다 그 사람이 주위에 없다는 사실에 길들어져 병원으로 가는 횟수가 줄어든다. 환자도 아무도 찾아주지 앟는 것에 끝내는 길든다. 길들 뿐이다. 쓸쓸한 마음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다. 그 쓸쓸함에도 결국은 길든다. 병과 상처에 고통받는 일에도 길든다. 길들어, 그에 맞설 기력을 잃어간다. 110쪽 

사람에게는 각기 삶의 방식이라는 게 있지. 어떻게 죽느냐가 아니라, 그건 하나의 삶의 방식이야. 아픔을 참고 무리를 하는 삶은, 남들에게는 몸을 소중히 다루지 않는 어리석은 삶처럼 보이는 경우가 많지. 하지만 말이야, 그때의 생활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라면, 그럴수록 사람은 그 생활을 소중히 여기고 무리를 거듭하게 되는 법이야. 176쪽 

자기가 저지른 잘못이 무엇인지, 죄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입원해 있어봐야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 사람에게 죄를 묻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인심을 베풀어 자유의 몸으로 풀어줄 수도 없다. 그러니까 어쩔 수 없으니 입원이라도 시켜두자. 주위 사람들이 자기 만족을 위해 취한 조치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 사람에게 죄를 인식하도록 하지 않는다면 자유를 강탈한 의미가 없지 않은가.  39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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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살이 2009-02-16 0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발자국 남겨주세요. 가끔은 흔적이 그립답니다. *^^*
 
천사의 속삭임 - 합본개정판
기시 유스케 지음, 권남희 옮김 / 창해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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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에서 원숭이 연구를 하던 사람들이 일본으로 돌아와 갑자기 자살을 한다. 그런데 그 방식이 평소 그토록 무서워하던 것들을 스스로 죽음의 방식으로 선택하고 있어 기묘하다. 게다가 일반인들 중에도 비슷한 방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이 나타나면서 사건은 더욱 커진다.  

<천사의 속삭임>은 무엇인가에 의해 개인적 두려움이 쾌락으로 변해가면서 발생하는 사건을 다루고 있다. 두려움과 쾌락이라는 것의 작동원리는 뇌과학으로 풀어지며, 그 심리적 기제는 그리스 신화 속의 복수의 여신과 천사를 통해 드러낸다. 리처드 도킨슨의 <이기적 유전자>를 토대로 한 유전학과 생물학 등 곳곳에서 마주치는 과학적 지식 등은 소설의 재미를 더할 뿐만 아니라 사건을 풀어가는 열쇠로도 작용한다. 신화에서 뇌과학까지 아우르는 다양한 이론과 지식들이 사건 속에 잘 버무려져 있다.   

이 소설을 끌어가는 핵심단어로는 불안과 공포를 꼽을 수 있다.

불안과 공포는 정글 속에서는 필요한 기능이었습니다만, 문명 사회에서는 반대로 큰 부담이 됩니다. 현대인은 가혹한 경쟁으로 인한 스트레스와 불안, 패닉 장애 등에 짓눌려 살고 있지요. 여기에 강한 스트레스가 더해지면 인간의 신경세포는 물리적인 손상을 입습니다. 우리들의 시냅스는 거의 닳아 없어지기 직전이라고 해도 좋을 겁니다. 우아카리 선충은 우리를 과도한 스트레스로부터 지켜주는 수호천사이며, 천사의 속삭임은 우리가 애타게 기다리던 복음입니다. 485쪽 
 

인간에게 있어서 두려움은 반드시 없어져야만 할 감정인 것만은 아니다. 불에 덴 경험을 한 이후 불을 두려워하는 것은 생존을 위해 필요한 감정일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두려움이 없다면 자신의 몸이 탈 위험을 예방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당신에게 그 두려움을 극복하고 오히려 쾌락으로 느낄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면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과연 그것은 당신의 삶을 풍부하게 만들어 주는 것일까, 아니면 죽음으로 내모는 것일까.  

니나가와 교수의 문명사관은 간단히 말하면 생존과 행복이라는 두 가지 욕구의 상극에 의해 인류문명애 발달해왔다는 것입니다. 뇌는 항상 지나칠 정도로 쾌감과 만족과 행복을 추구하고 싶어하는데, 너무 그쪽으로 치우쳐버리면 생존을 위해서는 부적합한 행동을 취하게 될지도 모르고, 또 도태되어 버리기도 합니다. 인류는 이 두 가지 목표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고 양쪽 다 같은 노력을 기울여왔습니다. 한편으로는 생존을 추구하기 위해 외적과 재해, 기아, 전염병 등에 대비하고, 또 한편으로는 마음의 평온을 얻기 위해 문화를 만들어내면서 말이지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렴풋이 느끼고 있듯이 가장 손쉬운 전략은 먼저 생존을 위해 필요 충분한 자원을 확보해두고, 행복 쪽은 가능한 한 돈과 에너지를 들이지 않고 처리하는 것일 겁니다. 하지만 뇌는 그 정도로는 좀처럼 만족하질 않습니다. 세계 대부분의 문명은 이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 요가나 명상 같은 손쉬운 방법으로 내적 세계의 탐구를 추구했습니다. 또한 그 일조로서 약품을 사용하는, 이른바 드러그 컬처라는 것도 수없이 존재했습니다. 29쪽 

두려움에서 벗어나 쾌락만이 가득한 곳은 과연 천국일까. 쾌락의 향연은 생존을 위협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인간은 살아남기 위해 고통마저 감수하기도 한다.  

모든 것은 뭔가에 의존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인간의 근원적인 나약함에서 기인한 것이다. 598쪽
   

이점이 바로 소설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원동력이 되며 사건이 퍼져가는 힘이 된다. 두려움으로 인해 무엇인가에 기대게 만들고, 그 기댐은 대부분 인간을 더욱 나약하게 만들곤 한다. 단 사람과 사람사이의 기댐만은 제외다.  

오늘도 불안과 공포가 스트레스로 다가오는 도시인의 삶 속에서 망각의 힘을 가져다주는 쾌락이 과연 우리의 미래를 어디로 이끌고 갈 것인지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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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인간의 네트워크라는 것은 말이야, 정보망 같은 게 아니라 트램펄린(금속 사각형 틀에 그물처럼 짜인 스프링으로 캔버스 천을 연결하여 만든 기구) 네트야. 무슨 일이 있어도 혼자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안 돼. 무너질 테니까. 그럴 때는 주위 사람들에게 조금씩 충격을 분담시켜서 네트 전체가 흡수하게 만들면 되는 거야. 59쪽 

생각해보면 다카나시에게는 죽음 공포증에 빠질 조건이 너무 충분할 정도로 갖춰져 있었다. 먼저 경제적으로 넉넉하여 날마다 생계를 위해 버둥거릴 필요가 없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죽음 공포증은 옛날부터 왕후귀족들의 마음의 병으로 알려져 왔다. 매일 생활을 위해 수많은 문제와 격투해야만 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불확실하고 먼 장래에 일어날 죽음에의 공포따위를 느깔 여유가 없다. 원하는 것을 모두 손에 넣고 난 인간의 허탈감, 마음의 공허야말로 위험한 것이다. 다음에 생각을 너무 많이 하는 것, 응시하는 것이다. 작가나 철학자 같은 사람들도 역시 죽음 공포증과 관계가 깊다. 그들은 무슨 일에나 응시를 한다는 가장 나쁜 버릇을 가지고 있다. 우주 삼라만상에 의미 따위가 존재할 리도 없고, 바로 정면에서 응시하면 어떤 것이라도 의미를 잃은 것으로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세번째는 과학에 대해 너무 순진할 정도로 신뢰한다는 것이다. 원래 세계를 정확히 기술하는 것과 인간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비전을 제시하는 것은 무관하다.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가 그 차이에 대해 가장 잘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모든 생명이 유전자의 운반체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는 생각은, 비록 그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우리를 혹한의 우주에 발가벗긴 채 내보내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어쩌면 인간이 가진 공포의 양이라는 것은 늘 일정할지도 모른다. 81쪽 

현실세계에서는 아무리 싫어도 타인과 교섭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항상 깊이 상처받지 않도록 방어 자세를 취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렇게 컴퓨터 앞에 앉으면 긴장되어 있던 마음의 방어막이 마치 따뜻한 물 속에 몸을 담근 것처럼 녹녹해지는 것이다. 162쪽 

그리스 신화 에우메니데스. 복수의 여신. 그리스어로 친절한 자라는 뜻의 역설적 표현. 206쪽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퓨리즈라고 할까, 복수의 여신들, 에리뉘에스의 다른 이름이야. 왜 친절한 신이라 불리는 거지. 반 빈정거림, 반 두려움에서 그러는 거야. 퓨리즈(악마)라고 불러 화를 돋우고 싶지 않은 거지. 선량한 그리스 사람도 그렇지만 특히 죄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은 이 여신을 아주 무서워했던 것 같아.  

천사는 완벽하게 착한 심성의 체현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늘 인간의 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구약성서에 따르면 천사는 신의 명령에 따라 몇번이나 인류에 가혹하기 그지없는 징벌을 주었습니다. 이를테면 신의 뜻을 거슬렀다고 해서 아시리아 병사 18만 5천명이 하룻밤에 천사에게 살해당했다는 기술이 있습니다. 또 인간과 가축을 불문하고 이집트 전 지역의 부자들이 천사에 의해 말살되었다는 예 등도... 

메데이아-자신을 배신한 남편에게 복수하기 위해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왕녀- 콤플렉스

정보는 반복되고 과장되고 윤색되고 왜곡되면서, 보도되는 동안 점점 형태를 바꾸어간다. 그 속도는 에이즈 바이러스 이상이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살아남은 것은 바이러스와 똑같이 살아남기 쉬운 형질을 갖춘 것이다. 요컨대 좀더 사람들의 의식에 새겨지기 쉬운, 선정적이고 공포라는 근원적인 감정에 직결하기 쉬운 이야기이다. 319쪽 

그런 성격의 유형은 사나에도 몇 가지 알고 있었다. 긴장을 잘해서 이내 중심을 잃고 앞뒤 판단하지 못하는 상태에 빠져 버린다. 지나친 긴장을 견디지 못하고 그곳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패배를 선택해버린다. 불필요하게 비관적이 되어 나쁜 예상만 머릿속에 떠올리다 마이너스의 자기암시를 걸어버린다. 자신이 완벽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소한 실수를 범하기만 해도 짜증을 낸다. 이런 성격을 특히 일본인에게 많은데, 한편으로는 우울증과 거식증이 되기 쉬운 특징이 있다. 4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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