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일런트 페이션트
알렉스 마이클리디스 지음, 남명성 옮김 / 해냄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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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무더운 여름을 이겨내는 방법 중의 하나는 화장실 가는 시간마저 아깝게 느껴지는 스릴러 소설을 읽는 것이다. 이번에 선택한 책은 알렉스 마이클리디스의 <사일런트 페이션트>이다. 시나리오를 전공한 저자답게 소설을 읽는 내내 영화를 보는듯 영상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전체적인 분위기나 영화화에 알맞은 극적 구성은 마치 길리언 플린의 <나를 찾아줘>를 연상케했다. 다만 전체적인 사건의 흐름이나 반전의 묘미는 <나를 찾아줘>보다는 아주 조금 떨어지게 느껴졌다.  

사건은 이렇다. 남편을 살해한 여자주인공은 몇개월이 지나도록 아무말도 하지 않는다. 심리상담가인 남자주인공은 여자가 치료를 받고 있는 병원으로 지원해, 사건의 실마리를 풀고 여주인공의 갇혀진 심리를 해방시켜보고자 한다. 소설은 남자주인공의 시선으로 전개되는 이야기와 여자주인공의 시선으로 전개되는 일기장을 통해 긴장감을 높여나간다. 그리고 이 소설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는 에우리피데스의 그리스 신화 <알케스티스>는 사건의 해결점이자 인간 감정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던진다.

 

아무튼 이 책 <사일런트 페이션트>도 그렇고, 길리언 플린의 <나를 찾아줘>도 그렇지만, 현재의 나란 과거의 내가 이루어낸 것임을 말하고 있다. 즉 현재 내가 판단하고 느끼는 것들은 과거의 내가 자라면서 경험한 것들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내가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내가 뜻한대로 마음먹은 대로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지에 대한 해답은 지금, 여기에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나를 통해서 찾아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거를 판단없이 바라보는 것, 그리고 그때의 사건과 감정들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나는 비로서 진정한 나의 주인이 될 수 있다. 

 

아무튼 두 소설 모두 내가 나의 주인이 되지 못한 이들의 비극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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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기원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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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이코패스라는 말을 처음 들은 것은 십 수년 전 공중파 방송의 한 다큐멘터리였었다. 생소한 단어이기도 했지만 그 존재를 인정해야 하는가 망설여져 잊어버릴 수 없었다. 지금은 그 존재가 거의 기정사실화 된 듯하다. 하지만 사이코패스를 인정한다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닐터이다. 과연 이들이 저지른 범죄를 처벌할 수 있겠는냐는 문제와 맞닥뜨리기 때문이다.

아무리 해도 바꿀 수 없는 운명처럼 갖고 태어난 성정 때문에 벌어진 일을 단죄할 수 있단 말인가. 혹 단죄할 수 없다면 이들을 격리시켜 범죄를 예방해야 하는 걸까. 타인에게 공감할 수 없는 사람도 사람인가. 그렇다면 이들에게도 인권이라는 말을 쓸 수 있는 건가.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2. 극악무도하고 천인공로할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은 알고보면 사이코패스였다는 뉴스를 가끔 접한다. 그런데, 잠깐. 공감능력의 부족이 꼭 범죄자들에게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나를 돌아보아도, 어떨 때는 극도로 타인의 감정에 이입하다가도, 어떤 때는 아주 냉정하게 바라보기도 한다. 감정을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적 판단에만 집중하는 경우도 많다. 실제 사람들과의 만남 속에서도 타인이 나의 감정을 읽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경험도 숱하다. 그렇다면 누구나 다 잠재적 사이코패스일 수 있다는 걸까. 사이코패스라는 진단 자체에 의문을 갖는다.

 

3. 이 책의 주인공은 사이코패스에서도 가장 공격적인 포식자 프레데터다. 주인공의 관점에서 사건이 진행되다보니 그 감정의 변화를 자연스레 따라가게 된다. 즉 사이코패스를 이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현실 속에서 접하는 도대체 왜? 어떻게 그런? 이라는 의문을 낳게 하는 범죄자의 마음을 이해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이 책이 갖는 재미의 가장 큰 부분이다.

 

4. 자, 그럼 어떤 부분이 사이코패스를 이해하도록 도왔을까. 자유다. 자신의 인생을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자유. 그 자유가 침해되면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다. 언제 폭발할 지 모르는 폭탄을 가슴에 품고 사는 것이다. 그 억압의 정도가 인내심의 한계를 넘어설 때 어떤 일이 벌어질 지 알 수가 없다. 사이코패스의 탄생은 유전적, 태생적이라기 보다 오히려 타인과의 관계나 사회망 속에서 벌어지는 일일지도 모른다. 이는 모든 사이코패스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모두 범죄를 저지르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증명하고 있다.

 

5. 그럼에도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그 감정, 즉 잠재된 폭력성만은 부정할 수 없으리라. 사회적 동물이라는 관점에서 사이코패스가 유전적으로 계속 이어질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공감할 수 없다면 사회적 유대를 맺기 힘들어 생존과정에서 도태되어야  맞는 것이 아닐까. 이들이 존재하는 이유, 폭력적 성향이 인류에게 꽈리를 틀고 앉아있는 이유, 그것은 무엇일까. 소설을 다 읽고 무거운 생각에 빠졌다.  

"어쩌면 사랑이라는 감정 자체가 신의 의도가 아닌지도 몰랐다. 만약 그것이 신의 뜻이었다면 세상을 창조할 때 만물이 만물을 사랑하는 관계로 설계했어야 한다. 서로 잡아먹으면서 살아남는 사슬로 엮는게 아니라."

인간이 늘 정답을 선택하지 않는 건 그것이 불편하기 떄문이라고 생각한다.

비슷한 일을 반복적으로 변주하며 살아가는게 인간의 삶이라는 걸

어쩌면 사랑이라는 감정 자체가 신의 의도가 아닌지도 몰랐다. 만약 그것이 신의 뜻이었다면 세상을 창조할 때 만물이 만물을 사랑하는 관계로 설계했어야 한다. 서로 잡아먹으면서 살아남는 사슬로 엮는게 아니라

옳은게 모두 최선은 아니었다. 옳다와 당연하다가 같은 의미도 아니었다. 지금 상황에서 당연한 건, 내 인생을 내게 맡겨두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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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벌
기시 유스케 지음, 이선희 옮김 / 창해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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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시 유스케의 작품 <검은 집>은 그야말로 충격적이었다. 하드보일드한 묘사와 이른바 사회파 추리소설이라 부를 수 있는 주제의식은 단연 백미였다. 자연스럽게 복지정책과 무임승차와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이야기 솜씨에 탄복했다. 그래서 기시 유스케의 작품이라고 하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찾아 읽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개인적으론 <검은 집>을 뛰어넘는 작품은 없는듯하다.

<말벌>은 잘만든 오락영화처럼 흥미진진하다. 한정된 공간 안에서 사람과 동물간의 사투를 그리고 있다. 최근의 영화 <언더워터>-여자 서퍼와 상어간의 사투를 그린 영화-가 연상된다. 벌독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이 벌들로 가득찬 집에서 살아남기 위해 애를 쓰고, 자신을 이런 궁지에 몰아넣은 사람이 누구인지를 추리해가는 과정이 흥미진진하다. 소설 속에서 계속 허술하다고 느끼던 부분-왜 그는 집에서 도망치지 않는가-은 소설 말미를 보면 반전을 위한 하나의 장치였음을 알게된다. 바로 이 부분이 소설의 가장 재미있는 부분이다. 그리고 소설을 이끌어가는 관점이 주는 흥미로움도 무시할 수 없다. 다만 아쉬운 점은 <검은 집>처럼 소설을 다 앍고나서도 그 주제의식에 파묻혀 고민할 거리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소설을 읽는 동안에 그 긴장감을 늦출 수 없을만큼 재미있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지금이 인생의 가장 중요한 순간이다. 겁을 먹으면 패배할 수밖에 없다. 1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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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 정유정 장편소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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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감염을 무척이나 두려워하는 듯하다. 오죽하면 항균 99.9%, 살균이라는 단어가 마케팅의 키워드가 됐겠는가. 인간의 감염에 대한 공포는 구제역 사태를 보면 더욱 실감할 수 있다. 감염에 대한 조그마한 가능성에도 무차별 살처분을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실행하지 않는가. 이 소설은 작가가 비명을 지르며 땅속에 파묻혀 간 소, 돼지들을 모티브로 써내려간 것이다. 만약 감염의 대상이 소, 돼지가 아니라 인간이라면 어떨까? 라는 상상이 소설을 이끌어간다. 

감염에 대한 이야기는 영화를 통해서 특히 좀비라는 형식을 통해 워낙 많이 접했기 때문에 이 소설이 식상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하지만 소설은 전혀 식상하지 않다. 점차 감염이 확대되고 사건이 결말로 치달아갈수록 손에 땀을 쥐게 만든다. 아니, 손에 땀을 쥐게 만든다고 하면 이 표현이 식상하다. 할리우드식 줄거리에 익숙한 사람일 수록 이 소설의 전개는 그야말로 충격에 가깝다. 한마디로 리얼하기 때문에 충격적인 것이다. 전혀 리얼하지 않은, 소설이라는 만들어낸 이야기임에도, 리얼하다는 말로 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애써 감정이입이 된 주인공들이 가차없이 비극적 결말을 맞는다. 그것을 슬퍼할 겨를도 없다. 비극은 비극으로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너무나 어두운 소설이다. 물론 질서의 파괴가 몰고 온 인간성 파괴라는 극단의 상황에서도 꺼지지 않는 희망의 불꽃은 있다. 곳간에서야 그 누구나 인심 쓸 수 있지만 빈 헛간에서야 쉬운 일일까. 사람의 됨됨이는 곳간이 아니라 빈 헛간에서 알아볼 수 있다. 그래서 99%의 절망 속에서도 단 1%의 희망이 있다면 우리는 그 희망에 목을 맨다. 하지만, 정녕 나는 또는 당신은 그 1%가 될 수 있겠는가 자문해본다. 또한 이 소설을 덮으면 떠오르는 것이 우리가 생명을 사물로 식품으로 대한 것은 아니었는가 반성해보게 만든다. 한편 더 나아간다면 도대체 생명산업이라는 조어가 가당키나 한 말일까 곰곰해 생각해본다.  

 

삶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본성이었다. ... 그것이 삶이 가진 폭력성이자 슬픔이었다. 자신을, 타인을, 다른 생명체를 사랑하고 연민하는 건 그 서글픈 본성 때문일지도 몰랐다. 서로 보듬으면 덜 쓸쓸할 것 같아서. 보듬고 있는 동안만큼은 너를 버리지도 해치지도 않으리란 자기기만이 가능하니까. 3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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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불꽃
기시 유스케 지음, 이선희 옮김 / 창해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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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시 유스케의 다른 작품들, 특히 '검은집'과 '천사의 속삭임'을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푸른 불꽃'에까지 손을 뻗게 만들었다. 개인들의 사건 뒤에 감추어져 잘 보이지 않던 사회적 맥락까지 파고 들었던 두 작품들에 비해 푸른 불꽃은 개인적 느낌이 더 강해 다소 아쉬움이 남았다.  

그러나 푸른 불꽃이 흥미로운 것은 범죄자의 입장에서 그 심리를 쫓아간다는 것이다. 17살 고등학생이 2건의 살인사건을 완전범죄로 꾸미고자 계획하고 실행에 옮기는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힘없는 정의는 무력하다. 정의 없는 힘은 폭력이다. 정의를 가진 힘만이 가장 효과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거야. 애당초, 힘 이외에 효과가 있는 해결방법이 어디 있다는 거지? 132쪽 

슈이치는 의붓 아버지의 횡포로 동생인 하루카와 어머니를 잃을까 조마조마해 한다. 변호사의 도움을 빌려 보고자 했으나, 그것도 뜻대로 되지 않는다. 주위에서 도와 줄 사람도, 사회 시스템에 기댈 구멍도 없다고 느낀 슈이치는 결국 아버지를 죽일 결심까지 하게 된다. 그런데 살인 사건의 결정적인 증거를 친구였던 다쿠야에게 들키고 만다. 다쿠야는 그것을 빌미로 돈을 달라는 협박까지 해온다. 한번 살인을 저질렀던 슈이치는 다시 완전범죄를 꾸민다. 오직 어머니와 동생을 지키겠다는 자기 합리화를 통해 살인을 정당화 시키고자 한다. 그러나

살인자의 마음을 철저하게 괴롭히는 것은 신에 대한 외경도, 또한 양심의 가책도 아니다. 더구나 세상에 대한 체면이나 소문 따위는 쓰레기통에나 들어갈 시시껄렁한 일에 불과하다. 그러나 저주의 톱니바퀴처럼 마음을 옭아매는 것은 단지 사실일 뿐이다. 자신과 똑같은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 아무리 도망치려고 해도 그 사실에서는 평생 도망칠 수 없다. 는 걸로 괴로워 한다.  

슈이치의 친구인 다이몬과 노리코는 그를 이해하고 그의 거짓된 알리바이를 지켜주려 애쓴다. 범죄를 계획하던 슈이치에게 다이몬은  
 

분노는 3독 가운데 하나야. 한번 불을 붙이면 분노의 불꽃은 끊임없이 타오르다가 결국은 자기 자신까지 모두 태워버리고 말지. 361쪽 

라고 충고하기도 한다. 하지만 슈이치는 끝내 그 불꽃에 자신까지 타버린다.  

소설을 다 읽고나면서 이런 의문이 들었다. 개인적인 것은 물론이거니와 사회적 분노에 대해서도 우린 분노의 불꽃에 휩싸이지 않기 위해 분노를 삭여야만 하는 것일까. 정당한 분노란 없는 것일까. 때론 분노할 줄 모르기 때문에 당하고만 있지 않았을까. 분노를 어떻게 표현하느냐, 그리고 어디까지 표현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닐까. 슈이치가 동경한 정의를 가진 힘은 그저 망상에 지나지 않은 것일까. 분노를 정당하게 표현할 수 있는, 또는 승화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과연 슈이치는 좋은 사람이었을까, 나쁜 사람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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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마스테~♡ 2010-01-14 1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아침 조인스 닷컴에서 보고 주문할려고 알라딘에 왔더니....알라딘 회원이시네요. 반갑습니다.

하루살이 2010-01-14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우연이. 정말 반갑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