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아내는 매실을 담았다. 알이 작고 크기가 들쭉날쭉,그리고 좀 비싸지만 토종 매실을 고른다. 몇 kg을 사는 지 정확히 모르겠다. 양이 꽤 많다.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차이기 때문에 1년 먹을 분량을 만들어 놓는다. 올해는 아래층 사는 이웃 사촌집에서 5kg 청매실을 가져다 주어서 각 각 두 번을 담게 되었다. 유리병 속, 갈색 설탕 가루 사이로 작고 귀여운 매실들이 옹알거린다. 

재원이는 그 매실병을 보면 "매찔...매찔...차...아뜨.." 라고 하며 작은 두 손을 양볼에 갖다대는 시늉을 한다.  

 梅雨.  

일본에서는 매실이 익을 무렵인 6월부터 내리는 장맛비를 '매실비', 일본말로 '바이우'라고 한다.  고등학교 일어 시험에도 나왔던 단어다. 당시 일어 선생님께서 "이름은 예쁜데 비로 인해 생기는 수해같은 것들을 생각하면 아름다워서 섬뜩한 느낌도 받는다." 라는 이야기를 했던 것이 기억난다. 굽은 강을 쭉펴는 삽질을 하는 요즘,  장마가 어떤 영향을 주게 될런지...  

  

 최치원 선생의 <촉규화>란 시도 이 맘 때쯤 어울린다. 촉규화는 시골집 벽을 따라 늘어선 '접시꽃' 의 한자이름이다. 접시꽃이 피는 계절이다. 

寂寞荒田側[적막황전측]적막하고 황량한 밭 귀퉁이
繁花壓柔枝[번화압유지]탐스런 꽃송이에 약한 가지 휘었네
香經梅雨歇[향경매우헐]장마비 그쳐 향기 흩날리고
影帶麥風의[영대맥풍의]훈훈한 바람에 그림자 흔들리네
車馬誰見賞[거마수견상]수레 탄 사람 그 누가 보아줄까
蜂蝶徒相窺[봉접도상규]그저 벌 나비만 와서 엿볼 뿐
自慙生地賤[자참생지천]천한 땅에 태어난 것 스스로 부끄러워
堪恨人棄遺[감한인기유]소외당하는 한을 삼켜 견디네
 


  

출근길 장마의 시작을 알리는 안개비가 내렸다. 운전에 큰 장애를 주는 양은 아니었다. 번잡스럽게 와이퍼질을 하지 않았다. 작은 물방울들이 앞 유리창에 촘촘이 들어와 박혔다. 가벼운 몸들은 쉽게 서로의 체중을 의지하지 않으며 출근길 내내 함께 했다.  

리히터의 헨델 keyboard suite를 들으며 비를 머금고 있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낮게 드리운 회색빛 하늘은 마음을 차분하게 만든다. 

 헨델. 고향인 독일보다 영국에서 국민음악가로 대접을 받았던 인물. 낭만적으로 채색된 고뇌하는 예술가상과는 달리 평생 부와 명예의 언저리에 있었다. 그렇다고 단순히 세속적인 성공에만 집착한 인물만은 아니었다. 이탈리아 오페라를 들여와 유럽에서 음악적 반향을 일으켰으며, 대규모 오라토리오 등을 통해 영국 음악의 개혁을 이루어내기도 했다. 매우 영특한 존재였다. 물론 현대에 와서는 심오한 강에 비유되는 바흐에 비해 저평가 되는 설움도 겪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헨델의 곡 중에서 '키보도 모음곡' (정확히는 하프시코드 모음곡이다.) 은 그다지 많이 알려진 곡은 아니다. 아무래도 바흐의 방대한 키보드 작품군들과의 비교때문이 아닌가 싶다. 바흐의 곡들에 비해 무언가 깊이가 얕아보이고 구조적으로 불안정해보이는 느낌은 지울 수 없다. 하지만 또 한 곡 한 곡 듣다보면 한걸음 뒤로 밀려난 자의 애상 같은 것이 들린다.(물론 이건 청자의 심리적 편견이 만든 것이다.)

 

 

   

이 곡은 부분 녹음이 많다. 또한 원곡은 하프시코드곡이겠지만, 하프시코드나 클라브생등의 쟁정거림 보다는 피아노의 울림이 내게는 좋게 들린다. 그래서인지 바로크 시대 건반연주는 대개 피아노곡으로 가지고 있다. 설령 그것이 작곡가가 의도했던 곡의 원형과 다를 지라도 말이다.  

오늘 아침에 들었던 CD .1980년 7월 리히처의 녹음이다.

   

유투브에 있는 음원은 1979년 Tour festival-리히터의 EMI 녹음 음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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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투르 그뤼미오(1921-1986) 

 

20세기를 대표하는 바이올린 연주자다. 흔히들 '프랑코-벨기에 악파'의 적통이라고 말한다. 20세기 바이올린 연주자들을 계보로 나누는 방식은 여러가지가 있다. 사람마다 차이가 있고 실제적으로 나눈다는 일 자체에 약간의 무리수도 있다. 먼저 하이페츠,오이스트라흐 등으로 대표되는 강철 바이올린족들 인 '러시아악파', 굴렌캄프,슈나이더한 등으로 대표되는 '독일-오스트리아악파', 줄리어드 갈마리언의 제자들인 이착펄만,정경화 등과 카네기의 대부 아이작스턴의 '줄리어드-유태인파' 그리고 자크 티보 계열의 '프랑코-벨기에악파' 등이다. 그 외에도 이탈리아악파니 동유럽 악파니 분류하는 방식은 더 많다.  20세기 전반부처럼 지리적 한계등으로 연주가 국지화되어 있는 경우는 이런 지리적/학파적 구분 방식이 제법 영향력을 발휘했을 것이다. 그러나 산업의 발달로 인해 물리적,정서적 공간의 축소가 이루어진 20세기 중후반 이후는 이런 영토적 구분은 사실 좀 의미가 없다. 또한 같은 스승 밑에서 배웠어도 이착 펄만과 정경화의 음악에 대한 접근 방식은 상이한 경우가 많다. 사람의 목소리가 제각각 다른 소리를 만들 듯 제각각의 소리를 가진 바이올린도 각기 개성있는 연주자들을 만나 천만가지의 소리를 만든다. 

내가 처음 클래식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기 시작했을 무렵( 대개 그렇듯이 음반 뒷면의 연주자들의 이름을 눈여겨 보고 외우려고 할 때다.) 그는 이름이 입에 잘 달라 붙지 않는 대표적인 연주자 중에 하나였다. "아루트르...아...뭐였더라...방금 전에 봤는데도" 물론 그 외에도 수많은 러시아 이름들은 한번에 잘 외워지지 않았다. 스비아토슬라브 리히터, 므스티슬라브 로스트로포비치 등등 . 수 십번을 입으로 발음해보고 또 몇 번을 잊어버리고 나서야 입에 붙었다. (비결은 억지로 생각하지 말고, 그냥 다음에 또 보고, 그 다음에 기회될 때 또 보고 하는것이다. 자연스럽게 익숙해진다.)  

 

 

 

 

 

 

(가장 유명한 아르투르 그뤼미오의 음반들이다.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모차르트 <바이올린 협주곡 전집>, 클라라 하스킬과 함께 한  모차르트 <바이올린 소나타>

아르투르 그뤼미오라는 이름을 알게 되고 나서 과거 가지고 있던 성음 LP음반에서- 파가니니의 협주곡이었다. 그러니까 이 음반은 클래식을 본격적으로 듣기 이전 음반 가게가서 누구의 연주인지도 모르고 그냥 둘러보다 사온 것이다- 그뤼미오의 이름을 발견했다.  "아...내가 예전에 들었던게 아르투르 그뤼미오의 연주였군."  그러니까 그뤼미오와 나의 인연은 내가 그의 이름을 알기 이전 부터 시작되었던 셈이다. 

아르투르 그뤼미오의 연주는 매우 유연하고 다정하며 우아하다. 하이페츠나 코간의 바이올린은 불과 얼음이 서로 쟁투하지만 그뤼미오의 바이올린에는 훈기를 머금은 서풍이 분다. 통기타라도 만져본 사람들은 이런 예를 들면 쉽게 이해할 것이다. 기타를 튜닝할 때 줄의 좀 푼다. 장력을 떨어뜨리는 것인데, 이렇게 하면 날카롭고 팽팽하던 소리가 좀 둥글둥글해지고 부드러워지는 느낌이든다. 그뤼미오의 바이올린 소리를 듣다보면 가끔 쇠로 만든 현을 건드리고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 정도로 유려하고 우아한 소리를 낸다는 것이다.  

영화같은데서 보곤하는 낭만적인 프랑스 귀족의 저택 속에 울리고 있을 것 같은 소리. 그뤼미오의 별명을 '궁정악사'라고 하는 것도 틀린 비유는 아닐 성 싶다. 그러나 결코 아름답게만 울리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결을 섬세하게 다듬는 능력은 어찌 보면 화장술로도 충분히 가능한 것이다. 반면 그뤼미오의 바이올린에는 드러내지 않는 귀족적인 관능의 격조가 숨겨져 있다. 좀 통속적으로 말하자면, '태생적인 양반 격조' 다. 그뤼미오의 연주를 듣고 있으면 '부르주아의 미덕' 이라는 말이 자꾸 떠오른다. (여기서 '부르주아'는 정치 경제적인 의미가 아니다.) 그래서 그의 연주에서는 어떤 '결기'같은 것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 그 결과인지-사실 무림에는 다른 뛰어난 고수들이 즐비하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러시아나 독일음악에서 그뤼미오의 손을 들어주기는 쉽지 않다. 그의 대표적인 명반인 바흐의 <무반주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의 경우도 헨릭 쉐링이나 나탄 밀스타인등의 연주와 비교해 들어 보면 곡의 원래 양식인 '춤곡'(?)에 매우 충실하다. (이 곡이 춤곡의 형식을 차용하고 있지만 춤곡으로 작곡된 것은 아니라고 보는게 정설인 듯 하다. ) 비슷한 예로 바흐의 <무반주 첼로모음곡 >연주에서 첼리스트 요요마의 연주가 이와 비슷한 양식을 따른다.  

대신 모차르트나 포레, 생상스 같이 좀 더 나긋하게 접근할 수 있는 연주에서는 엄청난 매력을 발휘한다. 커피에 비유하자면, '원조 프렌치 카푸치노는 이거다.' 라고 말하는 듯 하다. 달콤 쌉싸름하면서, 오래도록 깊은 향을 남긴다.  

필립스 레이블이 건재하던 시절, 그뤼미오의 연주는 거의 라이센스화 되었다. 덕분에 라이센스로 가지고 있는 음반들이 꽤 있다. 또는 라이센스로 언제든 구할 수 있다는 생각에 놓쳐버린 음반들도 꽤 있다. 필립스가 병합되고 더이상 자주빛 레이블을 찾아보기 힘든 시절인지라  잊혀진 그뤼미오의 음반들도 점점 늘어가고 있는 추세다. 그런데 최근에 호주 엘로퀸스 시리즈가 수입되었고 덕분에 그뤼미오를 다시 뒤적인다.   

 엘로퀸스 수입 1차분에 포함된 <생상스3번,비외탕 4,5번 바이올린협주곡>, <베토벤,비오티 바이올린협주곡>

 

   

 

 

 

 

<바로크바이올린곡집>, <텔레마, 무반주바이올린환상곡집><베토벤,바이올린 소나타><프랑스벨기에 바이올린소나타(포레,프렝크 외).. 

아래 4장은 1차 수입분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곧 수입되지 않을까 싶다. 특히 2번째 음반은 텔레만의 곡을 2장의 CD로 엮은 것인데 1번 CD는 그뤼미오가 연주하는 텔레만의 12개의 무반주바이올린 환상곡이,2번 CD에는 아이오나 브라운이 연주하는 협주곡이 들어있다. 그 중 무반주 환상곡은 <아르튀르 그뤼미오의 예술>이라는 이름의 2장짜리 국내 라이센스 음반에 포함된 적 있다. 당시 23년 만에 음반으로 발매되는 곡이라고 해서 세간의 화제를 모았다. 연주는 매우 뛰어나다. 한동안 잊고 있었는데 엘로퀸스 발매덕에 생각이 났다. 현재 국내 라이센스 음반의 수급 상태가 어떤지는 모르겠다. 만약 어려웠다면 반가운 소식일게 분명하다. 3번째 있는 클라우디오 아라우와의 베토벤 연주는  아라우의 박스반 외에는 구하기 힘든 아이템이다. 4번째 있는 프랑스,벨기에 소나타음반도 개인적으로는 포레,프랭크의 소나타 3곡이 들어 있는 필립스 음반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 2장 짜리 소나타 음반에는 그외에 다른 곡들도 여러 곡 들어 있어 살짝 구미가 당긴다. 

2차 수입분을 기다리기 힘든 사람들은 호주 엘로퀸스 사이트로 가면 그리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다. buywell.com 이다. 들어가면 한국의 원화로 환전하여 비용을 표시해준다. 대략 호주 내수용 가격은 1CD 기준으로 1만 1천원대 미만이다. 국내 수입가격은 1만 3천원대. 그런데 호주에서 배송 비용을 포함하면 가격은 대략 비슷해진다.  데카나 필립스, DG의 오래된 음원들 중 반가운 것들을 만날 수 있다는 면에서 매우 매력적이다. 데카에서 나온 앙세르메와 스위스 로망드 오케스트라는 거의 모든 레퍼토리가 있는 듯 보였다.  

나처럼 요즘 신예들의 연주보다 옛날 사람들 연주를 더 좋아하는 경우에 건질 음반들이 꽤 있다.  

 간혹 미풍도 불어오는 6월에 듣기 좋은 연주가 아닌가 싶다. 텔레만의 무반주바이올린 환상곡1번 

 

 

  국내 라이센스음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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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음악 듣는 사람들 중 진중하게 말하는 사람들은 왠만해서는 "이것이 최고다." 라는 식으로 잘라 말하지 않는다. 이유는 첫째, 오늘의 선택이 내일 바뀔 수도 있음을 알고 있기때문이다. 매번 갱신되는 자신의 차이를 알기 때문이다. 두번째는 말많은 이들의 비난의 화살을 일부러 받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인터넷 가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이게 최고다." 라고 말하는 순간 지푸라기에 굴비 묶이 듯 "그래요. 전 이게 최고인데" 라는 비교적 온건한 댓글부터 "빙신 듣는 귀하고는...이거 안들어봤지 이게 최고라고" 까지 줄줄줄.... 물론 말하는 사람의 의견을 표명한 것일뿐인데 과하게 반응하는 이들까지 고민할 필요는 없으나 세태가 세태인지라 분란 일으킬 필요는 없다. 그러니 굳이 말해 무엇하랴 하는 식으로 있으면 된다.  

정만섭이란 사람이 있는데 <명연주 명음반>이란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아마 요즘 클래식 fm듣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가장 신뢰지수가 높은 사람일게다. 말수도 적고, 굳이 사족을 붙여 비난을 사지도 않는다.  

이 양반인 언제인가 바흐의 두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 음반을 하나 틀고나서...난데 없이 제가 생각하는 이 연주의 최고봉은 나탄 밀스타인과 모니카 에리니의 연주였습니다...라고 했다. 사실 그렇게 딱잘라 말하는 스타일이 아닌 사람이라 의아하기도 하면서 재미있었다. 

이 음반이다. 

   

 

 

 

   

유투브를 통해서 들었다. 음...정만섭이 칭찬할만하다.훌륭하다. 아니...매우 훌륭하다. 두 대의 바이올린의 상호 배려와  절제. 

 서로의 언어를 충분히 이해하는  오래된 친구나 사랑하는 연인들의 조근조근한 이야기처럼 두 대의 바이올린이 서로의 결을 따라간다. 명불허전이다. 

지금 당장은 LP로 밖에 구할 수 없다니 아쉽군... 

 (유투브 첫화면에 바이올린 들고 있는 남자는 나탄 밀스타인이 아니다. 저 사진이 왜 있는지 모르겠군. 다른 앨범 자킷인에데..모리니 옆의 그 남자는 또 한명의 명바이올리니스트 지노 프란체스카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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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연이 있는 노래들이라 흐흐흐 

1. <그대 내 품에> 이번주에 박정현이 불렀는데, 별 매력 못느꼇다.(나는 전반적으로 박정현의 노래와 창법에 그다지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내겐 김현식 버전이 최고다. 이 곡이 담긴 김현식의 이 음반은 대학 1학년때 연극하는 여인네를 하염없이 기다리며 벚꽃 날리는 국철 승강장에서 장장 6시간 동안 들었다. 이 여인네는 요즘도 가끔 통화하는데 지금도 사이 좋다. 난 요즘도 봄이 되면 벚꽃 지던 시절에 무작정 역 승강장에 버티고 있던 20여년전 나를 생각한다. 옅은 청바지에 흰색 농구화를 신고 있던 젊은 친구. 내가 만약 소설가 보르헤스여서 과거로 돌아간 나와 대면할 기회가 생긴다면  승강장에 낭만적으로 쭈구리고 있던 그 친구랑 앉아서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앞으로 겪게 될 인생의 태클도 미리 적어서 좀 알려주고 읽어야 할 책,만나야 할 사람들도 좀 알려주고...청문회 촌놈이 대통령되었다가 뒷동산 바위 위에 오르게 되는 것도 이야기해주고....그리고 마지막에는 살짝 부동산 정보와 로또번호 적힌 쪽지를 주머니에 꼽아주는...ㅋㅋ 보르헤스 할아버지가 들으시면 '떼끼' 하시겠다.  

2.<천일동안>- 이번 주에 문제아가 된 옥주현양이 부른 노래. 옥주현에 대한 친/반은 관심도 의미도 없다. 단지 과하다 싶은게 문제라는 생각은 든다. 싫으면 안보면 되고 안들으면 되지 나원. 중세 수도원에 종기 세 개 붙은 늙은 수도원장 마냥 신과 그의 자식들을 악령으로 부터 지키기 위해서 고군분투할 필요까지야. 차라리 그녀의 가시는 걸음 걸음, 발자국 마저 도려내시던지. 

하여간 이 곡은 또 모 여인에게-내가 최소한 헤테로 섹스선호자인 것 만은 확실하다- 아프게 베이고 절절 맬때- 그로 인한 우울증 초기 증상이 있었음. 의사에게 물어보니 자각증상이 있으면 초기도 아니고 그냥 우울한 거라하던데, 그 의사도 믿을만한 사람이 못되서- 또 무한 반복. 지금도 있을 과천 도서관에서 가방만 놔두고 바깥을 두리번, 안을 두리번, 뭐 하나 제대로 하지도 않으면서 노래만 들었다. 결국 이 여인과 헤어지는데 천일이 넘게 걸렸다. 그러니까 3년동안 쩔쩔 거린거지. 천일동안 사귀는 것 보다 천일동안 헤어지는게 더 질리는 일이다. (질질 거리다 놓아준 여인들은 마왕의 손아귀에서 풀려난 니나처럼 착한 폴을 만나 지금은 학부모되서 교무실을 기웃거리고 계시겠지.)  

3.<편지> bmk 는 두 번 꼴지를 했는데, 꼴찌의 이유는 모두 언밸런스다. 첫번째 경연에서는 편곡은 재즈풍으로 하고 노래는 자기 원래하던 스타일인 소울로 엮는다. 이게 그녀의 첫번째 언밸런스였다.리듬과 가창의 부조화. 두번째 이 노래는 말이지요. 정서와 창법의 부조화.....음 ...   

노자 도덕경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三十輻共一轂, 當其無 有車之用. (삼십복공일곡, 당기무 유차지용) 서른 개의 바퀴살이 하나의 바퀴통에 모이는데, 그 바퀴통이 텅 비어 있어서 수레를 쓸 수 있게 된다....이어 그릇에 대한 비유가 이어진다. 그릇이 쓰이는 곳도 빈공간이라는 것이다. 

가사좀 보자  

 '억지 노력으로 인연을 거슬러...혹시나 기대도 포기하려 하오. 그대 부디 잘지내시오.. 행여 이 맘다칠까 근심은 접어두오....사는 동안 날 잊고 사시오...진정 행복하길 바라겠고. 이 맘만 가져가오'

이 정서 익숙하지 않은가? 한국민에게 매우 익숙한-익숙하다고 학습된- 김소월의 <진달래꽃>의 정서다. 화자는 포기와 체념,그리고 생의 마지막까지 해소되지 못할 애련을 내면으로 수용하는 화자다. 이와 동시에 지난 시절에 대한 감사와 함께 작은 마음 한조각이 기억의 이름으로 영원하길 바라는 화자다.

그런데 마치 미국 남부 부흥집회 성가가수 처럼 이 곡을 감정과 기교로 꽉 채워 부르면 어떨까? 

 <진달래꽃>의 화자는 마지막 떨어지는 봄꽃 처럼 미세한 떨림을 내면의 강물위에 떨구는 화자이기 때문에 그의 눈은 결코 바깥을 향하지 않는다.  아쉬움이든 애련이든 비탄이든 고난이든 그 모든 것을 내면에서 해소시키는 것이다.

 bmk가 자기는 울렸으나 많은 이들의 공감을 끌어내지 못한 것은 이 곡이 내면에 가지고 있는 정서를 전달하지 못했기 때문은 아닐까? 

지금 내 옆지기랑 연애할 때 "아...이제 정말 끝이구나." 하면서 이 노래를 들었다. 제발 부디 좋게 보내자고 말이다....그런데 거 참 희안한게 연애고 인생이라구...끝인 줄 알았더니 끝이 아니였다. 그래서 내게 남겨진 연애질 마저 다 하고 7년 만에 결혼해서 두 아이의 아빠가 되었다. 

어제가 둘째 아들 재원이의 2번째 생일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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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여간 ... ...뒷북이지. 

 집에도 뽀로로 물총 인형이 1-2개 있지만, 아이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워낙 TV를 안보여주다보니 뽀로로 공화국의 시민이 되지 않고 있다. 펭귄으로 말하자면 ...지난 크리스마스 즈음 우연히 채널을 돌리다가 본 -사실 내가 궁금해서 본- 폭력지수가 높은 '마다가스카의 펭귄'은 좋아한다. 크리스마스편을 한번 보여주었는데, 그 다음부터 가끔 생각나면 '마다가스카의 펭귄, 안해요" 라고 한다. (그때마다 아내에게 눈총을 받는다.) 그런데 나 역시 고정적으로 보는 것도 아니니 그게 언제하는지 모른다.   

'뽀로로'가 대통령이 되어서 하여간 뭔 잡지에서 기획기사도 실리고, 뭔 학자라는 양반이 민주주의의 모델 어쩌구 저쩌구...했다는데 대충 읽어보다가 '픽..'하고 말았다.  

아이 키우는 엄마들은 다 안다. 아빠들도...  

뽀로로 만이 아니라 아이들 동화 속에 나오는 세상이 얼마나 민주주의적이고 유토피아적이며, 평화롭고 상상력으로 충만한지. 나는 가끔 아이들의 동화책을 읽어주다가 동화 작가나 동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왠지 정말 아름다운 마음으로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동화 속 세상은 그만큼 아름답다.   

 뽀로로에서 민주주의를 본다거나 공동체의 뭔가를 찾는다면 지금 내 아이의 방안에는 온갖 낭만적 유토피아와 코뮌과 상호부조의 세계가 다 들어 있다. 아이 동화책 대략 한 권 집어와서 코뮌과 연결해서 리뷰를 하나 써봐 줄까....한 페이지 이상 쓸 수 있을 껄. 

이야기인 즉.....뽀로로 마을의 민주주의와 한국 문화상품의 우수성에 대해 말하기 전에 우리 아이들에게 미치는 -뽀로로로 대표되는- 취향의 단일화에 대해 좀 걱정하자.  어린 아이들은 모두 뽀로로고 좀 크면 엔진 포스 어쩌구...뽀로로에서 배울 민주주의는 매우 뛰어난 다른 동화책들 속에서 배우거나 함께 어우러져 사는 자연 속에서 배우게 하는게 나을 성싶다. 

 뽀로로가 대통령이 되는 세상은 결코 아름다운 세상이 아니다. TV와 마트의 장난감 코너가 아이들에게 '대통령' 이 된 세상이란 말에 지나지 않는다.

하여간 나는 우리 아이가 뽀로로 공화국의 여권을 받는걸 원치 않는다. 

 TV를 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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