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도 소달구지 언덕을 넘듯 설렁설렁 넘어간다. 개미만큼 분주한 시간이다. 이번주가 끝나면 좀 나아지려나. 주말에 아들과 둘이서 기차여행을 간다. 유치원에서 마련해 주는 자리지만 아이보나 내가 더 설렌다. 그 덕에 아틀라스의 어깨에 올려져 있는 무게만큼의 이번주 할당 작업량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다. 

지난 주말에는 통영에서 1시간 20분 들어가는 욕지도란 섬에 들어가서 일 좀 보고 왔다. 간만에 출장이었다. 새벽 4시까지 술 마시고 6시반에 일어나서 7시반 배를 타고 나왔다. 회사에 들어오는 동안 모두 시체놀이. 집에와서도 또 반시체. 헤롱거리다가 플레이오프 1차전을 보다가 오랜만에 보는 명승부에 기대잔뜩, 어처구니 없는 롯데의 패배에 헛웃음.(비록 롯데팬은 아니지만 주변에 온통 롯데팬들이라 가끔은 약간 감염됨)    

하여간 가을도 술술 국밥처럼 넘어가는데 음악도 제대로 못듣는 나날들이다. 그래서 닥치고 음악이나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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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미 상이 워낙 시상목록이 많다. 그래미 후보에 올랐다고 대단한 것이 아니다. 그 이전 부터 <악당 이반>은 존재만으로 대단하며,어여쁜 음반사다. 국악을 듣는 사람들은 <악당 이반>을 안다. 클래식 듣는 사람들 중에도 음반관련 잡지를 펼치다 보면 <악당 이반>의 광고를 본 적이 있을 게다. 음반을 만드는 철학뿐만이 아니라 과거 국악음반과 달리 만듬새도 정성스럽다. (물론 외장 연결부가 약간 문제의 소지가 있긴 하다. 쥬얼케이스가 아닌 경우 대부분 그렇긴 하지만 종이재질의 뒤틀림 문제가 발생한다. 그래서 함부로 가방에 다른 물건들과 섞어 넣으면 안된다.) 1년에 8개 팔렸다는 가곡은 내가 아직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분야다. 하지만 1년에 10개쯤 팔린다는 <악당 이반>의 판소리 음반 구매자 중에 나도 들어가는 셈이다. 국악FM과 공동제작으로 제작비 보전이 좀 되겠거니 생각했는데...그래도 CD의 소멸 시대에 아무도 듣지 않는 국악CD를 생산하고 있으니 어려운 건 명약관화하다. 국악 쪽이 워낙 층이 얇다보니 이렇게 몇 명이 고생을 많이 한다. 국악박물관을 운영하며 잊혀져 버린 자료를 수집하는 노재명씨나 국내 나온 거의 모든 국악음반 아카이브를 만든 정창관씨. 그리고 지역 곳곳에서 활동하는 학예사 선생들...언젠가 그들의 노력이 제대로 평가 받는 날이 오길 바란다. 

 

"8장 팔린 국악 음반, 그래미 상 후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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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컷뉴스 | 입력 2011.09.10 10:21


[CBS 라디오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
■ 방 송 : FM 98.1 (18:00~20:00)■ 방송일 : 2011년 9월 9일 (금) 오후 7시 30분■ 진 행 : 정관용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교수)■ 출 연 : 국악전문음반사 '악당이반' 김영일 대표


▶정관용 > 시사자키 3부 시작합니다. 오늘 3부, 아주 특별한 분 한 분을 모셨습니다. 유명한 사진가이십니다. 한 장에 한 천 만원도 넘는 그런 인물 초상사진을 찍는 그런 분인데요. 그렇게 해서 모은 돈 한 40억원 가량을 탈탈 털어서 국악 전문 음반사를 꾸려가고 계신 분입니다. 우리 국악을 세계에 알리는 그런 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사실 이 분의 꿈은 우리 국악을 세계가 아니라 국내에 알리는 거라고 합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이 그만큼 국악에 대해서 관심이 없고 모른다. 이런 건데요. 게다가 이번에 낸 음반이 내년에 열리는 제54회 그래미상 후보에, 우리 대중음악도 그래미상 후보에 오른 게 하나도 없었는데요, 그래미상 후보에 올랐다고 그럽니다. 국악 전문 음반사, 악당이반의 김영일 대표 나오셨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김영일 > 예, 안녕하십니까?

▶정관용 > 우선 악당이반이 뭐예요? 나쁜 사람 이반입니까?

▷김영일 > (웃음) 악당은 그야말로, 저희 회사 전화를 누군가 걸었을 때 직원들이 악당입니다, 그러면 뚝 끊는 분들이 계시고요. 무척 몹쓸 데다, 이렇게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 그때 악은 음악 할 때 '악'자이고요, '당'은 무리.

▶정관용 > 무리 '당자'?

▷김영일 > 예, 그래서 음악 하는 무리가 모였다, 라고 해서 악당이라고 졌습니다. 그런데 그걸 법인으로 만들기 위해서 상업 등기소에 가서 이제 이름을 등재를 해야 되는데요, 그렇게 해서 갔더니 그 악당이라는 말이 좋지 않은 말이라고 그래가지고 뭐 욕이라든지 아니면 공공기관 뭐 청와대 이런 말을 자기네 회사 이름으로 막 정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그게 유보로 이렇게 분류가 되어 있습니다.

▶정관용 > 아, 회사 이름으로 쓰지 못하게 되어 있는 단어들이로군요?

▷김영일 > 예, 그 중 하나가 악당이었던 것 같고요. 그래서 접두어든 접미어든 붙여 달라 해서 그 뒤에 이제 이반이라고 졌는데, 사실 개인적으로는 제가 사진사이기 때문에 사진을 하는 저의 인생이 1학년 1반이고요, 그 다음에 음악을 만들어서 세상에 알리려는 제 인생은 2학년 2반 같기도 하고. 굳이 한자로 말을 드리자면, 이로울 이자에 나눌 반을 쓰는데요, 그러니까 이롭게 모여서 즐겁게 나누자. 그런데 무얼 가지고 그러냐면, 우리 음악을 가지고.

▶정관용 > 국악을 가지고 하자?

▷김영일 > 예, 그래서 그냥 악당이반, 이렇게 지었습니다.

▶정관용 > 그 회사 이름 설명하시는 게 뭐 수백 번도 하셨겠어요? 워낙 독특해서 말이지요, 이름이.

▷김영일 > (웃음) 예, 악당 그러면 잊지는 않으시더라고요.

▶정관용 > 그런데 제가 처음 소개드렸습니다만, 사진가시잖아요?

▷김영일 > 예, 사진가입니다.

▶정관용 > 전공도 사진을 하셨고?

▷김영일 > 예, 그렇습니다. 대학에서 사진 전공하고, 그렇게 해서 유학도 또 사진으로 다녀오고, 그렇게 사진을. 지금도 사진을 열심히 박아야 그 돈을 조금 더 벌어서 음반을 하나라도 더 만들 수 있지요?

▶정관용 > 사진을 박는다고 하시네요?

▷김영일 > 예, 예전에 어른들이 다 이렇게 이 해 박는다, 사진 박는다, 뭘 이렇게 가져다 고착시키는 것은 박는다, 이렇게 하시더라고요. 그리고 좀 불가에 가서 연반하신 중들을 뵈면, 그분들도 박는다, 라고 그러시고. 재미있어서 그 뒤로는 그냥 저는 사진 박는 사진사라고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정관용 > 그런데 국악 전문 음반사, 언제 만드셨어요?

▷김영일 > 법인은 2005년도에 출범했고요, 그 전에 개인회사로 한 4~5년간 했습니다. 그래서 개인 회사일 때는 그렇게 음반을 만드는 것까지는 생각을 못하고, 음원을 만들러 이제 전국 각지로 녹음기를 메고 참 여러 번 돌아다니고 여러 해 여러 군데를 다녔지요. 그러면서 녹음을 넣고 그러다보니까, 그 전에는 서울에 있는 스튜디오들, 그리고 주로 우리나라 문화라든지 어떤 좀 중요하다는 것들은 도시 중심.

▶정관용 > 그렇지요.

▷김영일 > 그 중에서도 서울 중심. 완전 편중이지 않습니까? 우리 음악은 도시를 떠나서도, 특히 남도 이런 쪽을 빼놓고는 뭐 도저히 말을 꺼낼 수 없는 그런 위치들이 있는데, 왜 진도 아리랑은 진도에서 녹음이 안 될까? 정선 아라리는 왜 꼭 서울에 있는 스튜디오에 와서 할머니들이 아, 나 여기서 목 갈려서 못 하겠네, 이런 말을 들으면서 음반을 만들어야 할까, 그런 생각을 했는데, 우리나라 각지에 한옥들이 있지 않습니까?

▶정관용 > 그렇지요.

▷김영일 > 그 한옥이 저는 너무 아름다운 스튜디오라고 생각합니다. 가야금만 하더라도 그게 가야 지역에서 실제로 출토된 그런 시간들을 살펴보면 한 2천년 전에도 그 모습이 있었는데, 어떤 악기이든 그것이 소멸되지 않고 오늘날까지 이렇게 존재한다는 것은 그 집과 그 크기와 그 사용처가 분명히 잘 맞아떨어졌기 때문에 존재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서양식 흡음 위주의 스튜디오보다는.

▶정관용 > 한옥에서 직접 녹음을 하세요?

▷김영일 > 예, 한옥에서 녹음하는 것이 가장 옳겠다, 라고 생각이 들어서, 이제 그 뒤로, 회사를 만들면서 이제 바로 한옥 녹음이라는 그런 필드 레코딩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정관용 > 현장 녹음?

▷김영일 > 예, 그렇습니다.

▶정관용 > 음질이나 이런 데에 있어서 뭐 나쁘지 않아요?

▷김영일 > 아, 너무 아름답고요.

▶정관용 > 잡음 같은 게 들어가거나 그런 것 없어요?

▷김영일 > 그건 좀 그러니까 두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제가 새로 들어온 엔지니어하고 같이 녹음을 하러 다니면 소리를 넣으러 간 엔지니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게 소리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딱 필요로 하는, 그 음악이라고 하는 소리 이외에 나머지 존재하는 것들을 모두 다 잡음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정관용 > 그렇겠지요.

▷김영일 > 그런데 자연 입장에서 보면 사람이 잡음이고, 사람이 노이즈이지, 사람이 만든 기계들, 경운기라든지 자동차, 비행기, 이런 것들이고요, 그것이 잠잠해지는 시간대가 되면 도로 편안해지는 자연 속의 시간들로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럴 때 연주 하나, 산조든 소리 하나를 얹히든 이렇게 아름다운 시간으로 변하는 장면들을 관찰할 수 없고요.

▶정관용 > 그러면 뭐 풀벌레 소리 이런 것 그냥 놓아둬요?

▷김영일 > 예, 물론입니다. 제가 빌려 쓰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일례를 들어서 좀 우스운 말씀을 드리면, 담양에 있는 소쇄원이라고 하는.

▶정관용 > 유명한 대나무 숲이지요?

▷김영일 > 예, 한국의 정원이라고도 불리고 하는, 그곳에서 그 위에 제월당이라고 하는 곳에서 가야금 산조를 넣는데요, 낮에 저희가 이제 기계장치를 세팅하고 연주자하고 식사를 하러 가면서 엔지니어는 이제 기계를 지켜야 하니까 도시락을 사오기로 하고 다녀왔습니다. 거길 다녀왔더니 그 엔지니어 얼굴이 하얗게 변해있어요.

▶정관용 > 왜요?

▷김영일 > 그래 왜 그런가 했더니, 사장님, 큰일 났습니다. 이 주변 전체가 다 벌레가 울어가지고 이게 어떻게, 에프킬라를 사러갔다 오던지 해야지, 큰일 났습니다.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아, 이 사람아, 우리가 여기를 빌려 쓰러 온, 잠깐 빌려 쓰러 온 사람들이고, 그들이 여기를 지켜온, 아주 면면히 지켜온 경험이니까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마이크를 그쪽으로 가져다놓아라, 오늘 제가 이제 그래미에 이렇게.

▶정관용 > 그래미상 후보에 오르게 한?

▷김영일 > 예, 후보에 오르게 한 음반도 경주 양동마을의 관가정이라는 곳에서 녹음을 넣었는데요, 관가정 귀뚜라미는 더 경쾌하게 웁니다. 그래서.

▶정관용 > 그런 소리들을 다 담아서?

▷김영일 > 예, 바람 소리, 뭐 문풍지 떨리는 소리, 멀리 개 짖는 소리.

▶정관용 > 알겠습니다. 얘기가 갑자기 막 급진전을 해버렸는데.

▷김영일 > 아, 예, 죄송합니다.

▶정관용 > 아니요. 제가 이제 음반사 언제 만드셨습니까, 했더니 법인이 2005년이고 한 2000년부터 전국을 다니면서 음원을 채록하고 하셨다, 설명을 들었는데, 사진하시다가 갑자기 국악이 그렇게 좋아진 건 왜예요?

▷김영일 > 저는 사진하는 동안에 오로지 제가 듣는 음악은 거의 클래식밖에는 없었습니다. 94년도쯤에 제가 어떤 모 월간지에서 사진을 박아달라는 의뢰를 받았는데요. 그게 이제 젊은 음악가들입니다. 그 사람들 클래식도 있고, 재즈도 있고, 대중가요도 있고, 국악도 있었는데, 그 중의 한 사람, 국악인으로서 저를 찾아온 사람이 최수정이라는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음악 하는 사람이니까 노래를 부르시고, 나는 사진을 박을 테니까. 그래서 그 사람이 옆으로 돌아서더라고요. 그래서 저희 스튜디오 벽면을 쳐다보고 "아서라, 세상사 쓸 것 없다, 군불견 동원 도리 편시춘...", 그게 이제 지금에 와서야 단가라는 것, 본 판소리를 하기 전에 목을 푸는 단가라고 불리는 짧은 곡인 줄 알았고요, 제목은 '편시춘'이라는 노래인데, 그 노래를 부르는 동안 제가 셔터 버튼을 누르지를 못했습니다.

▶정관용 > 왜요?

▷김영일 > 저는 제 인생에 처음입니다. 그러니까 그 이전도, 그 이후도, 어떤 피사체를 보고, 저한테 얼마나 높으신 분들이 제 앞에 와서 사진을 박아도 단 한 번도 셔터를 못 누르거나 그런 적이 없거든요.

▶정관용 > 왜요, 그러니까?

▷김영일 > 그러니까 그 음악은, 그러니까, 저의 심장 뛰는 소리하고도 같고요, 이상하게 제가 살아왔던 모든 제 몸을 구조하고 있는 것들과 전혀 떨어지지 않는 그런 형태의 음악이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꼼짝을 못하고 거기에 얼어가지고 사진을 못 박고 이제.

▶정관용 > 완전히 사로잡히셨군요?

▷김영일 > 예, 그 친구랑 저의 사무실로 다시 와서 차를 한잔 하면서 도대체 국악이라는 게 뭐냐. 당신 지금 뭘 부른 거냐. 그건 어떻게 이해하는 건가?

▶정관용 > 그러니까 그 전에는 국악을 전혀 모르셨군요?

▷김영일 > 예, 일단 클래식 방송을 계속 트니까, 93.1이라는 곳에서 저녁 5시? 4시쯤에 국악이 한 시간쯤 나와요.

▶정관용 > 맞아요.

▷김영일 > 최종민 교수라는 분이 사회를 봤던 걸로 아는데요, 그 어른이 그걸 트시고 그러면, 저는 그 자리에서 딱 끄던지 다른 데로 돌리면서 아, 왜 이 시간 쯤, 출장을 가는 시간쯤에 졸리게 이런 걸 틀까, 사고 나라고. 그런 마음을 가지고 국악을 대했던 것이 바로 저입니다.

▶정관용 > 그런데 한 순간에 그냥?

▷김영일 > 예, 이후로 수정 씨가 저를 그런 공연장으로 데리고 다닌 게 아니고요,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소리꾼들, 뭐 지리산에 들어가서 북 들고 7년이나 안 나온 배일동이라는 아주 미친 인물도 있는데요. 그런 인물들을 만나게 해주면서 그 밤들을 지내고. 북은 소리를 넘으려고 들고, 소리는 북을 매달고 가려고, 그런 칼만 안 들었지, 아주 첨예한 밤들을 보면서 아, 여기다가 마이크만 대면, 사진은 내가 박을 수가 있으니까. 그리고 그 형들한테 물었습니다. 그 음반 하나씩 내가 살 테니까 일러주라, 그랬더니 아니, 형님, 우리 같은 사람 음반을 누가 만들어요? 그게 저는 굉장히 충격이었거든요.

▶정관용 > 아예 음반이 없지요, 예.

▷김영일 > 예. 그래서, 아니, 그럼 이걸 내가 안 만들면 누가 만들어?

▶정관용 > 알겠습니다. 아주 유명하신 명창들, 이런 분들하고 작업하시는 게 아니군요?

▷김영일 >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젊고요, 그 다음에 그러나 지켜보았을 때. 저는 지켜보기를 굉장히 열심히 하는 편입니다만, 조금만 건드려주고, 조금만 올려주면.

▶정관용 > 알겠습니다. 그래서 국악 음반 지금 전부 몇 장 정도 만드셨습니까?

▷김영일 > 쉰 두 개 타이틀입니다.

▶정관용 > 그런데 그걸 만드시는데 40억이란 돈이 들어가요?

▷김영일 > (웃음) 일반 CD를 만들어보니까요, 저희가 직접 제작을 하고, 사진도 스스로 박고 이렇게 하면 CD 한 장을 만드는데 대략 한 천 이삼백만원에서 천오백만원 정도 드는데, CD는 1982년도에 상용화된, 이제 지나간 기술입니다. 요즘 누가 CD를 사지도 않고요. 그래서 그 뒤로 우리가 보고 있는 것들도 뭐 HD, Full HD, 3D, PDP, LED, LCD 이런 식으로 계속 발전하듯이 듣는 것도 SRCD, HQCD, 그 다음에 뭐 블루레이, DVD 오디오, 그리고 이제 최상위 개념의 SACD, 그러니까 슈퍼오디오 컴팩 디스크인데요. 그렇게 계속 발전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나라에서는 SACD 쪽은 개발이 되지 않았고, 지금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연주자나 그 다음에 SACD가 무려 7천여 종 나와 있거든요. 우리 음반은 하나도 안 나와 있고요.

▶정관용 > 아, 그래요?

▷김영일 > 그래서 제가 칸느에서 하는 미뎀(MIDEM)이라는 음반 박람회를 가는데요. 그거를 한 5년 동안 들고 가서 성냥팔이 소년을 하고 그랬는데, 아무도 안 쳐다봅니다. 저 변방에서 뭘 들고 와서 저러고 있는가. 그런데 작년 올해 사이에 SACD를 10장 들고 가서 거기 펼쳤는데요. 너무 질문이 많고, 인터뷰하자고 달려오고. 그래서 이런 기술의 힘이고. 그렇다면 우리 것은, 이런 최고 사양의 그런 음반을 만들어서.

▶정관용 > 최고 수준의 음반을 만들다보니까 제작 단가가 한 장당?

▷김영일 > 그게 이제 지금은 한 3,500만원 정도로 뛰어올랐습니다. 그러니까 10 타이틀을 만들면 한 3억5천만원, 직원들 봉급, 렌탈비, 그 다음에 뭐 그 밖에 들어가는 비용 하면 일년에 꽤 많은 액수를 까먹는 것 같습니다.

▶정관용 > 그렇게 만든 음반은 몇 개씩이나 팔립니까?

▷김영일 > 판소리는 1년에 한 10여장 팔리는 것 같고요. (웃음) 부끄럽습니다. 산조는 한 20장 정도 나가는 것 같습니다.

▶정관용 > 그러면 몇 장씩 찍으세요?

▷김영일 > 보통 1천장에서 1,500장 찍습니다.

▶정관용 > 계속 그냥 쟁여져 있는 거로군요?

▷김영일 > 예, 저희 회사에 이렇게 음반이 입고되어서 처음에 있을 때 굉장히 기뻤는데요, 지금은 그게 한 5만장, 6만장 되다보니까.

▶정관용 > 조금씩만 찍으시지.

▷김영일 > (웃음) 아, 그런데... 예, 나눠주는 음반의 수량이 그것 한 10배 이상 됩니다.

▶정관용 > 아, 무료로 배포하시는 것?

▷김영일 > 예, 방송국에도 보내고.

▶정관용 > 알겠어요. 그런데 이번에 54회 그래미상 후보에 올랐어요?

▷김영일 > 예, 그렇습니다.

▶정관용 > 이거 어떻게 그렇게 된 겁니까? 국내 대중음악도 한 번도 못 올라간 건데. 우선 그래미상이 어떤 건지, 잠깐만 소개해주시고요.

▷김영일 > 그래미는 보통 일반적으로는 뭐 영화로 보면 아카데미상에 비견된다는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요. 일단 54회니까 그 역사가 뭐 깊은 것은 사실이고. 한때 그래미상의 상의 영역이 굉장히 넓어서 200여 가지의 상이 존재하다가, 영역이 존재하다가 작년에 140개로 줄었는데요, 올해 그거를 권위를 더 높이기 위해서 그래미 측에서 70여 개로 줄였습니다.

▶정관용 > 줄였어요?

▷김영일 > 예, 그런데 줄여만 가는 것이 아니고 신설되는 항목도 있는데요, 그게 게임 음악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도 지금은 제가 국악을 들고 나갔지만, 어서 클래식도, 어서 대중가요도, 어서 게임 음악도... 우리나라에서 게임한다고 하면.

▶정관용 > 알겠습니다. 이번에 올라간 건 어느 부문에 올라간 거예요?

▷김영일 > 예, 두 가지 부문입니다. 한 가지는 기술 부문인 서라운드, 그것은 이제 5.1채널 이상의 기술을 그 회사가 가지고 있느냐, 그걸 보는 거고요. 또 하나는 이제 월드 뮤직이라고 해서, 그 안에 이제 저희 회사도, 아니, 우리나라도 월드 뮤직에 포함되어서 그 부분에.

▶정관용 > 알겠습니다. 그 그래미상 후보에 오른 음반이 '정가악회 풍류 Ⅲ-가곡', 이렇게 되어 있는데, 그 중에 태평가, 잠깐 좀 듣고 또 계속 이야기를 나눠보지요.

(음악)

▶정관용 > 예, 시작하면서 말씀하신 것처럼 귀뚜라미 소리부터 싹 귀에 들어오는데요?

▷김영일 > 예.

▶정관용 > 정가악회 풍류 3가곡? 가곡 3개를 녹음했다, 그렇게 되는 건가요?

▷김영일 > 아닙니다, 정가악회의 3번째 앨범이라는 뜻이고요, 3번은요. 그 다음에 가곡이라는 음악을, 장르라는 뜻이고, 이제 여자가 불렀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것은 정확히 여창가곡이겠습니다.

▶정관용 > 가곡이라고 하는 게 하나의 판소리와 같은, 하나의 형식이에요?

▷김영일 > 예, 음악적 장르인데요, 우리나라는 이제 왕으로부터 시작해서 평민에 이르기까지 음악의 구조가 아주 탄탄한 나라입니다. 세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6개나 등재되어 있고, 6개 등재되어 있는 나라는 전 세계 우리나라 하나입니다.

▶정관용 > 아, 그래요?

▷김영일 > 옆나라 중국도, 일본도 전혀 그렇지 않고요. 그러니까 클래식이 그러면 베토벤 이전과 이후에 뭐 이런 악성들을 포함해서 몇 곡이나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을까, 저도 그걸 살펴보다가 깜짝 놀랐는데요. 단 한곡도 등재되어 있지 않습니다.

▶정관용 > 그런데 우리 국악만 6개가?

▷김영일 > 예, 국악은 6개가 등재되어 있습니다.

▶정관용 > 그런데 가곡이라는 건 어떤 겁니까?

▷김영일 > 가곡이라는 것은 이제 제일 상위개념으로 봤을 때 왕을 위한 노래가 있고요, 그 바로 밑에 이제 조선시대 선비층, 문인이라고 불렸던 사람들이.

▶정관용 > 양반들?

▷김영일 > 예, 문인악. 그러니까 그 밑에가 이제 민요, 그리고 그 밑에 조선시대 대중가요라고 할 수 있는 판소리라는 게 있지요. 그럼 이제 양반들이 시를 짓고 그 시에 노래를 붙인 게 가사가 되고요.

▶정관용 > 그게 가곡이다?

▷김영일 > 아니요, 가곡은 거기에서 한 칸 더 예술적으로 더 늘려집니다. 그래서 지금 보시면 피리, 대금, 해금 이런 소리가 들리듯이.

▶정관용 > 그렇지요.

▷김영일 > 소위, 노래방으로 치면 이제 풀 밴드를 다 불러다가 당시에 있던 악기를 다 불러다가 그 악기의 성음 위에 시조를 하나하나 얹혀가는 것인데요.

▶정관용 > 아, 시조창은 우리가 많이 들어봤는데, 그걸 완전히 악단과 함께 하는 시조창?

▷김영일 > 예, 그렇습니다.

▶정관용 > 그렇게 한 게 가곡이다?

▷김영일 > 예.

▶정관용 > 이 음반은 몇 장 팔렸습니까?

▷김영일 > 사실 뭐 제작이 되어서 팔리기 시작한 게 올해 5월이기 때문에 그렇게 오래는 안 되었지만, 8장 팔렸습니다. (웃음) 많이 나갔습니다.

▶정관용 > 해외 수출도 하세요?

▷김영일 > 그렇습니다.

▶정관용 > 그런데 외국에서는 사가요?

▷김영일 > 아, 외국에서 더 많이 팔렸습니다.

▶정관용 > 몇 장이요?

▷김영일 > 외국에서는 6월부터 팔리기 시작했는데, 20장 나갔습니다.

▶정관용 > 20장 나가면 대박이군요?

▷김영일 > 아, 예. 그렇습니다. 1년치 다 나갔습니다.

▶정관용 > 제가 처음에 소개하면서 이분의 꿈은 국악을 우리 국내에 알리는 것이다, 라고 이야기 드렸거든요. 무슨 이야기입니까, 이게?

▷김영일 > 예, 한 장 한 장 만들어서 그러니까 우리 음악을, 연주자 개개인이 전 국민을 만나지 못할 거니까, 미디어의 힘을 빌려서 여러 사람이 같이 듣는 것이 좋겠다, 라고 해서 제가 음반사를 차리게 됐는데요. 그 힘이 의외로 미약하더라는 거지요. 그러니까 그걸 우리 국민 스스로 찾지 않으면 누구도 찾아주지 않을 거니까, 이걸 이렇게 하다가는 열장씩 팔리면 백년 걸려야 천장이 팔리는데, (웃음) 전 뭐 이미 없을 것이고. 그래서 고민을 하다가 이제 우리나라에서 잘 알릴 방법이 없다면, 아주 서양에서 최고로 유명한 데 가서 우리가 유명해지면, 그게 빠르게 역으로 우리에게 재수입되어서 알려질 방법을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해서 그래미를 노크하게 된 것이지요.

▶정관용 > 그래서 그래미에 올리게 됐고, 저랑도 인터뷰를 하게 되시고?

▷김영일 > 예, 그렇습니다.

▶정관용 > 사진으로 모으신 돈 꼬박꼬박 다 까먹고, 참 남들 관심 안 갖는 국악, 어떻게 좀 알려보려고 고군분투하고 계신데, 후회되진 않으세요?

▷김영일 > 아니요, 전혀 후회하지 않습니다. 저는 우리한테 이런, 우리 민족에게 이런 음악이 있다는 게 너무.

▶정관용 > 자랑스럽다?

▷김영일 > 예, 자랑스럽고.

▶정관용 > 부끄럽습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국악에 대한 사랑, 우리 함께 다시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악당이반 김영일 대표, 아주 훌륭하신 분 만났습니다. 오늘 고맙습니다.

▷김영일 >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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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먼저간 아드님께 부끄럽지 않은 어머니셨습니다. 넓은 치맛자락으로 수많은 노동자들의 야트막한 산그늘이 되어 주셨고, 늙고 오래된 몸으로 젊지만 게으른 몸을 깨워주셨습니다.  

당신의 먼저 간 아들을 우리가 오래도록 기억하는 것 처럼 당신 역시 그렇게 오래 기억할 것입니다.  

이제 아드님 곁에서 편안하시길....이.소.선 .어.머.니  

 

1천만 노동자의 어머니 끝내 잠들다...이소선 여사 소천

노컷뉴스 | 입력 2011.09.03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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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S 이대희 기자]

"내가 못 다한 일, 어머니가 꼭 이뤄주소. 내가 죽고 없으면 엄마가 댕기면서 '학생들하고 노동자들하고 단결해서 싸워야 한다'고... 그렇게 외쳐 주소"

41년 전, 화상으로 온 몸에 붕대를 감은 22살 아들이 숨이 넘어가기 직전 당부한 유언이다.

아들 전태일의 마지막 말을 지키는 것, 그것만이 고인의 살아가는 삶의 이유였다.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이자 모든 노동자의 어머니였던 이소선 여사가 3일 소천했다. 향년 81세.




고인은 한 노동자의 평범한 어머니였지만 1970년 11월 13일 이후 모든 것이 달라졌다.

이날 전태일 열사가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다"며 분신자살하면서 고인은 민주화 투사로 거듭났다.

몸과 마음은 만신창이였지만 아들과의 약속을 위해 '전태일'이 돼 살아갔다.

전태일 열사에게 자극 받은 수많은 사람들은 노동운동과 민주화 운동을 벌이며 고인을 찾아왔다.

고인은 이렇게 찾아온 이들을 연결시켜 주거나 공권력에 쫓기는 이들을 숨겨줬다.

수배중이던 고 조영래 변호사를 애인으로 위장시켜 경찰의 포위망을 뚫기도 했고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된 장기표씨를 숨겨주기도 했다.

이러다보니 김대중 정부 시절 중반까지 20년 넘게 경찰 정보과 형사들이 따라다니며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당하는 생활을 하며 4번이나 구치소에 다녀왔다.

노동자의 대모였던 고인에게 나이가 더 많았던 문익환 목사나 김대중 대통령도 깍듯하게 '어머니'라 불렀을 정도였다.

1986년에는 민주화운동에서 희생된 이들의 유족들을 모아 전국민주화운동 유가족협의회(유가협)을 창립해 초대 회장을 맡고 죽기 직전까지도 고문을 역임했다.

1989년에는 유가협 회원들과 함께 135일 동안 의문사 진상 규명 농성을 벌였고 1998년에는 의문사 진상 규명 및 명예회복법 제정을 위한 422일 천막농성을 진행하기도 했다.

노동운동의 현장에는 언제나 고인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쓰러져 병상에 눕기 직전까지도 부산 한진중공업 3차 희망의 버스를 타는 일을 상의했을 정도였다.

별세하기 전까지도 아들 전태일이 공장에서 남은 천으로 만들어 앞 뒤 색깔이 다른 겨울 속바지를 입었던 고인.

누구와도 바꿀 수 없었던 아들 전태일을 잃은 천불이 일어 신경안정제를 먹어도 잠들지 못하는 밤이 숱했다.

"나는 올 때까지 다 와서 이 달에 갈지 훗 달에 갈지 몰라. (40년동안) 갈 데 안 갈 데 다 다녔는데 변한 게 없어서, 우리 아들한테 가서 할 말이 없어서 큰 일인기라"

아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삶의 무게를 짊어졌던 고인.

우리가 고인을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가 아닌 고인의 이름 석 자 이소선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
2vs2@c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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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악'이 중요한 모니프다. '전선야곡' 을 전선의 낭만이 아니라 갑돌이의 아들, 철수의 아버지로 해석상 전환 시키면서 자연스럽게 '죽음=전쟁'에 반대하는 '보편적 휴머니즘'으로 승화시킨다. '전선야곡'을 부르는 화자에게 '전쟁터'는 '사지'이며, 정한수 떠놓고 기다리는 어머니가 있는 '고향'은 '생'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극단의 간절함이 있다. '어머니와 고향'으로 상징되는 생의 욕구는 '죽음'을 종용하는 권력과 전쟁에 대척점에 놓이게 된다. 이것은 남과 북 그리고 이념을 초월한다. '전선야곡'은 이 영화에서 '반전'의 주제를 매우 자연스럽게 극중에 융화시키며 또 관객에게 전이시킨다.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장치이자 매체인 것이다
 

 영화는 각종 전쟁영화에서 다루어진 클리세들을 적당히 가지고 있다. <공동경비구역 JSA>도 있고 ,<웰컴투 동막골>, <태극기 휘날리며>도 있으며, <지옥의 묵시록>과 <메리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잠시 휴전한 1차 세계대전 이양기)와 <라이언일병구하기>까지...


 이 영화가 이런 저런 유사한 영화의 데자뷰를 불러일으키면서도 구조적 완결성을 놓치치 않은 것은 감독의 주제의식에 대한 끈을 끝까지 놓치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누구를 위한 전쟁인가?" 라는 것 말이다

변성기를 거치지 않은 이다윗이란 배우가 이 곡을 부를 때 이 영화가 다다를 지점이 예견된다. 그리고 이 곡은 일전을 앞두고 거대한 생의 합창으로,반전의 합창으로, 반권력의 합창으로 애록고지를 울린다. 이런 노래를 통해 메시지를 스크린 안과 밖으로 투사하는 방식은 매우 현명하고도 효과적이다 
 
다니엘 J 리버틴의 <호모 무지쿠스>란 책에 보면, 인류는 언어/음악과 공진화한다. 특히 음악은 언어와는 다른 소통 매체로 자리잡는다. 즉 음악은 "정직한 신호를 전달하는 체계, 소통자의 진정한 감정 상태와 동기를 들여다볼 수 있는 창문"이다. 저자는 이어서 감정을 나타내는 신호로 치자면 음악보다 나은게 없다고 말한다. 즉 영화에서 '전선야곡' 이 만드는 남과 북의 병사들의 감정체계는 생의 정직한 신호로 스크린 바깥까지 전이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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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솔아,할아버지께서 부르셔.네 하고 달려가면" 나이가 40대 이상이면 이 노래를 불렀던 이자람양을 기억할 것이다. 현재 그녀는 33살이고(아직 결혼여부는 모르겠으나 미혼일게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광대'다.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부럽다 했는데, 하여간 이 친구의 행보를 보면 그 말이 맞다싶기도 하다. 이벤트 '예솔아'로 끝날 수 도 있었지만, 그녀의 부모와 그녀는 한 걸음 한 걸음 자기 길을 갔다. 그리고 자기 세계를 만들더니 이제는 진짜 '광대'가 되었다.  

언젠가 '아마도 이자람 밴드'의 노래를 올린 적이 있었는데, 

지난 6월에 두번째 창착 판소리<억척가>를 무대에 올렸다고 한다. (물론 서울에서)첫번째 판소리는 <사천가>였다. 유명한 브레히트의 '사천의 착한 여인'을 옮긴 것이다. 요즘은 그럴 일이 없겠으나, 내 대학 시절엔 브레히티의 작품은 끊이지않고 공연되었다. 아마추어 연극패든 프로 극단이든 연중 어느 곳에서든 브레히트가 있었을 것이다. 

판소리 리뷰를 하나 올리고 나서 두리번 거리다가 이자람의 두번째 <억척가>의 철지난 예고를 보게되었다. 수지타산을 맞춰야 하는 지방 공연기획사가 미디어의 호들갑스런 관심을 끌지도 못한 이 공연물을 상연할리는 없다. 그리하여 부산에서 보기 쉽진 않을게다. "확 내가 기획사를 차려버려."했다가는 주로 망한다.ㅠㅠ 

어쨋거나 볼 수 있는 사람들은 이런 공연들을 좀 보러가야한다.  

하여간 이자람이 앞으로 얼마나 멋진 광대가 될지 같은 시대를 사는 사람으로 흥미롭다.  

난 팬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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