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에 본  마샬 버먼의 <맑스주의의 향연>중 밑줄 쳐진 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거리의 신호들을 읽지 못하는 한 그 잘난 <자본>을 읽어 봤자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이 문장을 옮기다 보니 이 말이 자신의 정치적 정당성을 지지해 주는 흐뭇한 의미로 받아들이는,아전인수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현재 정치적 어젠더는 선거에 집중되어 있다. 2012년이 선거의 계절이다. 지난 글로벌 호구 정권의 파행이 불러온 퇴행에 신물이 난 사람들이 선거를 통한 변화열망이 무엇보다 높다는 것도 사실이다. 최소한 제도적 정치를 부정하지 않는다면, 투표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는 변화의 폭과 깊이를 깊고 넓게 만드는 것은 중요한 진보적 과제 중에 하나이다. 그래서 '거리의 신호'를 읽는데 진보는 좀 더 예민해야 하고 능동적이어야 한다.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보수 세력이 만든 프레임에 갖혀서도 결코 안되지만 개혁적 진보라고 프레임도 거리를 두고 비판적으로 되새겨야 한다. '거리의 신호' 역시 거리를 두고 볼 줄 알아야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나꼼수'현상을 긍정한다. 또한 그들이 칭송받는 것 만큼 탄압에도 노출되어 있다는 것에 깊은 우려를 표한다. 하지만 비판은 현재적이어야 현재적 실천성을 갖는다. '그 땐 그런 면도 있었지'는 안타깝게도 회고적 성찰일 뿐 현재에 기민하게 대응하지 못한다. 삶의 충만성을 이루려면 무리에 이끌가면서도, 따라가면서도, 이 생각을 놓치 않아야 한다.  

   

 

나는 아주 오랜 시간 비판적 독서가이길 원했다. 따로 제대로된 학문을 못한 탓이다. '오빠' 이외에 모든 종류의 '-빠'에도 거리를 두었다. 지금도 그렇다.  '열공하는 좌파'도 못되고,'나는 좌파다'라고 당당하게 선언하지도 못하며, 그저 '좌안파'가 되어 왼쪽 강둑에서 기웃거리고 있을 뿐이다. 과거 같으면 이런 태도를 '부르주아적 자유주의'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한 '분파주의'라고 비판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요즘은 이런 말이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다. 애석하게도 이런 비판보다는 오히려 '그게 당연한거 아니야?' 그게 좋은거야' 라고 품어주는 사람들이 더 많다. 매우 고마운 일이고 힘이 되는 일이다. 하지만 솔직히 뭔가 석연치 않다. 빗방울 같은 다원주의는 개인주의화,또는 개인의 원자화라는 경로를 통해 결국 단절을 강화한다. 마치 많은 것을 나누는 듯 하고 인정하는 듯 하지만 결코 자기를 파괴하거나 자기를 넘어서려 하지 않는다. 또한 자기를 핍진 시키지도 않는다. 방대한 열림이 사실은 방대한 세계와의 단절이며 혁혁한 자기보호의 굴레라는 역설적 상황을 만드는 것이다. 얄팍한 지식으로 말해본다면 이 공간은 여러 측면에서 '진화적 안정' 상태이다. 그리하여, 서로 칭찬하고 격려하는 위로의 감성 공간으로 자리잡았다. 정치적 이유로 사리진 사람도 있고, 흔한 말로 재미없어서 사라져 버린 사람도 있다. 인식을 뒤틀어 버리는 다크 커피같은 질문은 제공되지 않으며, 에스프레소의 거품 위로 진보라는 한 두 스푼의 설탕이 입맛을 돋게 한다. 

 

그러나 이것이 현실이다. 과거 소규모 마을 같은 알라딘은 이제 사라졌다. 별로 아쉽진 않다. 세상이 그렇게 가는 것이다.   

 

한 해도 지났는데 몇 몇 분께 안부를 건내려 했다. 다들 여기 저기 가버려서 찾기도 쉽지 않다. 바람구두나 파란여우님도 사이트 들어가서 다시 경향 사이트로 찾아 들어가야 한다. 내가 매우 좋아했던 메아쿨파님은 아예 사라졌다. 그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사라져 버려서 인사조차 남기기가 쉽지 않다.  

 

그래도 나는 멀리서 인사를 건넨다. 오래 전 친구들이나 또 나를 지켜봐준 분들께 말이다. (별 상관 없겠지만, 글로 세계와 인간을 배운 듣보잡은 제외다. 올해는 꼭 마당 쓸어라.거기가 로두스다.)

 

 "모두들 건강하시구요. 지금까지 그러셨던 것 처럼, 담담하게, 의연하게,뚜벅 뚜벅 임진년 한 해를 보내세요. 소리없이 오래 가야 하는 것이 배터리만은 아닙니다."

 

 

  민들레 뿌리 (도종환)

날이 가물수록 민들레는 뿌리를 깊이 내린다
때가 되면 햇살 가득 넘치고 빗물 넉넉해
꽃 피고 열매 맺는 일 순탄하기만 한 삶도 많지만
사는 일 누구에게나 그리 만만치 않아
어느해엔 늦도록 추위가 물러가지 않거나
가뭄이 깊어 튼실한 꽃은 커녕
몸을 지키기 어려운 때도 있다
눈치빠른 이들은 들판을 떠나고
남아 있는 것들도 삶의 반경 절반으로 줄이며
떨어져나가는 제 살과 이파리들
어쩌지 못하고 바라보아야 할 때도 있다
겉보기엔 많이 빈약해지고 초췌하여 지쳐 있는 듯하지만
그럴수록 민들레는 뿌리를 깊이 내린다
남들은 제 꽃이 어떤 모양 어떤 빛깔로 비칠까 걱정할 때
곁뿌리 다 데리고 원뿌리를 곧게 곧게 아래로 내린다
꽃 피기 어려운 때일수록 두 배 세 배 깊어져간다
더욱 말없이 더욱 진지하게 낮은 곳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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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찬이와 재원이가 산타 할아버지 맞이 조신 모드에 들어갔다. 예찬이는 파워레인저 정글포스, 재원이는 판다 인형이 며칠전 산타 할아버지 목록에 기재되었다. 

예찬이는 집에서, 그리고 유치원에서도, '파워레인저'를 한번도  본 적이 없다. 유명한 '앵그리 버드'도 말이다. 먼저 '앵그리버드'에 대해 말하자면, 난 스마트폰 유저가 아니고, 아내는 게임이라면 '사다리 타기' 도 싫어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예찬이는 '앵그리버드'를 안다. 빨간새 말고 검은 새도 있다는 것을 나는 예찬이 때문에 알았다. (검은 새의 용도는 예찬이도 모르는 듯.)

'파워레인저'도 마찬가지다. 도대체 이 지구를 지키는 '파워레인저' 를 어디서 보았단 말인가?  아내는 유치원 친구들로 추정한다. 친구들의 T셔츠나 가방, 신발 등에 새겨져 있는 캐릭터, 그리고 아이들의 역할 놀이 대사들 "나는 파워 레인저 정글포스다."  내 어린시절 친구들과 '로봇 태권V'와 '마징가Z', '그레이트 마징가'가 되어 날아 다니며 싸웠던 생각을 해보면 아내의 추정이 100%맞을 것 같아.  

지난 주말 아이와 마트에 들렀다가 도대체 '정글포스'가 어떤 구성인지 알아보려고 장난감 코너를 들렀다. 지적 호기심 차원에서. 예찬이가 뭐라 뭐라 설명해주는데 예찬이도 잘 모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친구들따라 '이게 정글 포스 갑돌이니 갑순이니' 하는 것만 해봤지 실제로 자기가 TV에 몰입해서 경험한 적이 없으니 당연한 일이다. 

대략 보니 분리/합체 로봇이었다. '독수리 오형제'라는 선험적 경험에 비추어보면 1. 인간으로 비닐 옷 쓰고 각기 재능을 발휘한다. 2. 더 강한 적이 나오면 합체 로봇으로 변신한다. 예찬이는 요즘 독수리를 비롯한 맹금류에 대해 관심이 많다. (예찬이는 검독수리 1호다. 재원이는 뭐 좋아하냐고 했더니. '양' 이란다. ) 그래서 그 많은 정글포스 파트들 중에 이카루스, 팔콘 뭐 이런 것들에 눈을 떼지 못했다.   

하여간 대충 '아, 정글포스가 저런 거구나' 하고 장을 보고 나왔다. 

회사에 와서 파워레인저 검색. "아...잘 모르겠다." 그러다가 아주 친절한 완구 사이트에서 파워레인저 정글 포스의 전모를 파악하고 말았다. (뚜둥) 

 대단히 복잡한 구성이다. 문득 예전에 여자 선배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파워레인저 그거 하나에서 끝나는게 아니라구. 거기에 뭐가 또 있고 또 있고..그거 다 사주려면 끝장난다."  

일단 5명이 합체를 한다는 추론은 맞다. 그런데 정글 포스는 20여가지의 동물들의 캐릭터 능력과 다중 합체를 한다. 예를 들어 정글포스 이카루스는 매 같은 몇가지 동물들이 합쳐져서 완성된다. 또 정글포스 타이탄은 고릴라 같은 힘센 동물들이 합쳐져서 완성.  정글킹,정글 카이저, 정글 타이탄, 정글헌터, 정글 이카루스...등등이다. 

 최근에는 파워레인저 정글포스는 시리즈가 끝나고 파워레인저 미라클 시리즈가  나오고 있단다. 다른 캐릭터의 로봇 조합. 새로운 시장인 셈이다. 오늘 아침 파워레인저 공부 많이 한다. 자본주의의 작동 방식을 아주 우화적으로 보여준다.    

 파워레인저 캐릭터의 본질은 무엇인가?  '부모 지갑에서 돈 빼먹는 것' 이라는데 요즘 소와 말도 다 따라 해대서 지겨워 죽겠는 '500원'을 건다.  

그. 러. 나. 

파워 레인저에 대해 내가 고민할 필요가 뭐가 있담. 산타 할아버지가 알아서 하셔야할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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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 2012-01-15 0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제는 부모가 산타할아버지라고 아이들이 생각한다는 것이지요..ㅎㅎ 드팀전님, 오랜만에 들렀습니다. 새해 멋진 음악 많이 들으시고 예찬이에게 사사 많이 받으시길 빕니다. 형이상학적 사유의 본원성에 관한 위의 글 인상적이었습니다. 저도 요새 우리 아들-순보의 형이상학적 질문에 답하느라 ...

드팀전 2012-01-16 09:00   좋아요 0 | URL
아직은 부모와 산타는 다른 존재라서... 건강한 한 해 되시길.
 

음반 매장에 간다. 가서 실제로 사오는 음반은 많지 않다. 서울에는 음반 매장도 전문화 되어서 장르별로 좀 더 섬세하게 구매할 수 있다. 클래식이면 클래식, 재즈면 재즈. 레퍼토리가 다양하기 때문에 매장 둘러보다가 혹하는 음반들도 부지기수다. 하지만 지방에는 그런 매장들이 없다. 부산에 예전에 서울 풍월당을 벤치마킹했던 클래식 매장이 하나 있었다. 법원 공무원 하시던 분이 퇴직 후 올인했었으나 결국 1년 남짓 버텼다.  

어제 음반 매장을 둘러 보다가 하인츠 홀리거의 바흐 오보에 음반 하나 사들고 나왔다. 뭔가 아쉬어 미적 거리고 있는데 '매크릿 하데로' 라는 싱어의 음반이 보였다. 음반 홍보 문구에 '포크+재즈+아프리카' 이렇게 써있었다. 빌리 홀리데이, 트레이시 채프먼, 조니 미첼. 

이 정도 정보면 대략 음악에 대한 감이 온다. 각각의 음악적 스타일이 동시에 머릿 속에서 화학 반응을 하면서 말이다. 청취대에서 몇 곡을 들어 봤는데... 오옷....꽤 괜찮았다. 포크적 감성에 살아있으면서 재즈적 뉘앙스 역시. 국내에서 인기가 있었던 코니 베일레 보다는 훨씬 순박하며 원초적인 느낌을 준다. 올 가을 최고의 발견이다. 꽤 괜찮다. 조만간 여기 저기 라디오 등에서 나올 것 같은데...만약 내 심미안이 틀리지 않다면.  '매크릿 하데로' 라고 읽는단다. 맥릿 하데로 일거 같음. '맥도날드' 아니라 '맥더널'이잖아.ㅎㅎㅎ

 

 

 

 

 

 

   

그럼. 들어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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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멸과 허무에 빠져 분노와 소외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제대로 산 사람이 아니다. 내게는 아무것도 해보지 않았다는 말 처럼 들린다.  최소한 내 밑둥이 흔들리는 짓은 애시당초 거리를 두었다는 말처럼 들린다. 그냥 반창고 하나, 머큐롬 한방울이면 나을 정도의 위험만 감수하는 삶. 그것이 육체적이든, 정서적이든, 감정적이든,또는 철학적이든. 그리하여 그들은 늘 강 건너 편으로 공성전과 비방전은 한다. 하지만 기동전과 진지전은 하지 않는다. 이건 비 맞고, 옷 젓고, 기다리고, 지치고, 피 흘리고, 뛰쳐나가고, 때로는 숨어서 머리통을 감싸쥐고 있어야 하는 것이니까.  

후자의 전쟁을 하는 사람들은 늘 환멸과 허무에 빠진다. 특히 분노를 일으키는 것은 기만적인 일들이다. 아리따운 말로 기만하는 사람들. 여기에서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으련다. 어제 예를 한가지만 들자. 기권? 중도적인가? 그가 한 일이라고는 정족수를 채워 투표를 성립시켜 준  일이다. 이런게 다 기만인데 그런 기만이야 읽히든 말든 내 알바 아니다. 그것보다 더한 것도 기만하는 세상에 뭐 그런 것까지 읽으라고 요구하랴.   

어쨋거나 두더쥐는  땅을 판다. 땅을 파는 게 두더쥐니까.암 그래야지.ㅎㅎ 

기만과 적대하느라, 또는 환멸과 허무가 너무 쌓여서  나를 상하게 할 때 나는 이 시를 찾아 읽는다.  

식사법 -김경미

콩나물처럼 끝까지 익힌 마음일 것

쌀알빛 고요 한 톨도 흘리지 말 것

인내 속 아무 설탕의 경지 없어도 묵묵히 다 먹을 것

고통, 식빵처럼 가장자리 떼어버리지 말 것

성실의 딱 한가지 반찬만일 것

 

새삼 괜한 짓을 하는 건 아닌지

제명에나 못 죽는 건 아닌지

두려움과 후회의 돌들이 우두둑 깨물리곤 해도

그깟껏 마저 다 낭비해버리고픈 멸치똥 같은 날들이어도

야채처럼 유순한 눈빛을 보다 많이 섭취할 것

생의 규칙적인 좌절에도 생선처럼 미끈하게 빠져나와

한 벌의 수저처럼 몸과 마음을 가지런히 할 것

 

한 모금 식후 물처럼 또 한 번의 삶, 을

잘 넘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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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장 착해질 때
서정홍 지음 / 나라말 / 2008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인연이란 늘 순간이다. 오늘 아침 강변을 걸으며 본  보라빛 작은 제비꽃...  경남 합천에 사는  농부 시인 서정홍을 먼 발치서 보았다. 아이의 유치원에서 마련한 아버지 교실에서였다. 문장의 첫 단어를 한 두번 더듬는 그의 어투와 58년 개띠의 서리 맞은 은빛 머리칼이 생생하다.  리뷰는 결국 그 소소한 인연이 만든 것이다.     

 몸살 기운이 채 가시지  않았지만 약속은 지켜야했다. 첫째 아이 예찬이는 유치원 교실에서 놀았다. 아내랑 둘째 재원이랑 맨 뒷자리 앉은뱅이 의자에 앉았다. 농부 시인 서정홍은 아버지들이 이렇게 많이 모인 자리는 머리털 나고 처음이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의 강의는 예상했던 '바람직한 아버지의 상' 과는 다른, 주로 생태주의적 가치에 대한 것이었다. 때로는 과격한 말로 때로는 웃음 섞인 말로, 땅과 자연, 이웃과 가치로운 삶의 문제를 자신의 귀농 경험과 섞어서  이야기했다. 감동적이지는 않았다. 대단한 각성도 없었다.<녹색평론> 한권만 펼쳐봐도 다 알 수 있는 이야기, 머리로는 수 십번도 더 이해했던 이야기. 인간과 자연이 더불어 사는 삶....

 말문이 트여 잠시도 쉬지 않는 둘째 재원이의 이야기를 듣다가 멀리서 온 농부의 이야기를 듣다가 하면서 두어시간이 지나갔다.

 농부는 합천 가는 마지막 버스를 타야 한다며 일어섰다. 양복 입은 아버지들도 하나 둘 자리를 떳다. 유치원 교무실에는 나름 유명한 출판사에서 낸 산문집과 처음 들어보는 출판사에서 낸 그의 시집이 조신하게 놓여 있었다. 7000원,5000원의 꼬리표를 달고서. 책 좋아하는 사람의 기본적 습성은 종이 냄새를 맡으면 표지라도 한번 보거나 최소한 한번 쯤 열어보는 시늉이라도 한다는 것이다. 책이라는 것에 대한  예의 같은 것. 개인적 습성에 더하여, 마지막 버스 놓칠까 시계를 훔쳐보던 가난한 농부에 대한 예의까지 겹쳣다.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시집 <내가 가장 착해질 때>를 주머니에 넣고 돌아왔다.  

 아이들을 재웠다. 새로 들여온 시집을 아무데나 펼쳤다. 

'아...' 글자 읽는다는 짐승의 오만함이여... '선생님, 그 정도는 이미 다 아는 내용이라구요' 라는 식의 그 잘난 벽이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한 편 두 편 세 편. 시 하나 하나가 가슴에 남는 스냅사진처럼, 또는 펑펑 울리지는 않지만 돌아와서 앉으면 눈물 고이게 하는 영화의 작은 장면들 같았다.  벤야민식의 '충격'인 셈이다. 충격이 반드시 몰고오는 내면의 붕괴 역시도. 미학적으로 거창한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개인적으로 미력한 나머지 책과 글 속에 깊이 허우적 거리고 있던 즈음이어서 강한 '환기'와도 같은 것이었다. 좋은 인연이란 이런 것이리라. 

시집의 제목이기도 한 <내가 가장 착해질 때>라는 시다.  

이랑을 만들고/ 흙을 만지며/ 씨를 뿌릴 때/ 나는 저절로 착해진다.  

나는 내가 착해지지 않는 이유를 알게 된다. 언제 흙을 만지며 씨를 뿌려본 적이 있었지? 지난해 마지못해 나가서 흐지부지하다가만 한살림 공동 텃밭? 집에 기르던 작은 물고기의 주검들만해도 그렇다. 처음에는 고운 티슈에 싸서 아들과 함께 아파트 화단에 묻어주었다.'좋은데로 가세요'라고 기도하면서. 그런데 십 여 마리 보내고 나서는 이제 휴지에 싸서 예찬이 모르게 종량제 봉투에 넣는다. 하지만 아이들도 눈치 채고 있을 것이다. 물고기의 죽음에는 관심을 보이지만 그 주검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 더 이상 묻지 않는다. 그런 내가 도대체 '생명'에 대해 뭘 읽고, 뭘 느끼고, 뭘 알고 있다는거지?  

<이른 아침> 

감자밭 일구느라/괭이질을 하는데/땅속에서 개구리 한 마리/툭 튀어나왔습니다// 

날카로운 괭이 날에 한쪽 다리가 끊어진 채 나를 쳐다봅니다.// 

하던 일 멈추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하루 내내/ 밥도 먹히지 않았습니다./물도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농부는 마을에서 청년 회장을 한다고 했다. 그 날도 부산까지 강의하러 가면 마을 어르신들이 걱정이 태산이라고 했다. 십여가구 사는 산골에는 이웃이 119이고 응급대원이기 때문이란다. 지난 번에도 강의하러 멀리 간 사이 이웃의 나이 많은 어르신이 위급한 상황이 되서 아내 혼자 마산으로 창원으로 늦은 시간에 헤메었었다고. 농부는 자기에게 예수님과 부처님은 그 산골 마을에 사는 이웃집 할머니들이라고 했다. 평생을 가난과 시름 속에 살았고 온몸에 안아픈 구석이 없지만 또 해마다 봄이 되면 검정고무를 무릎에 대고 기어다니면서 씨를 뿌리는 사람들. 그의 시에는 그가 예수처럼 부처처럼 여기는 시골마을의 할머니들이 할아버지들이 많이 등장한다. '농사는 힙으로 짓는게 아니여 '라는 덕산 할아버지, 겨울 햇살 아래 낡은 포대를 기우는 인동할매, 큰 병이 스무가지나 된다고 겁주는 의사의 말에 찬조출연해준 서른가지의 병을 가지고도 일한다는 수동할매, '낮에 죽더라도 자식들 퇴근하고 나서 알려주라던' 혼자 앉아서 돌아가신 생비량 할머니, 무 열뿌리 훔쳐간 도둑이 누군지 알아도 모른척 해주는 단성 할머니. 다 예수고 부처인데 농부가 어찌 그들의 단잠을 방해할 수 있겠는가.    

<완행버스 안에서> 

안의 장날, 완행버스 안에서/ 고사리 취나물 들고 이고/ 숨 가쁘게 올라온 샘골 할머니와/나는 같은 자리에 앉았습니다. 

할머니는 앉자마자/ 금세 코를 골았습니다./나물 냄새보다 더 진한/ 땀 냄새와 함께/헝클어진 머리가/내 어깨에 닿았습니다. 

봄나물 뜯느라/ 해보다 먼저 일어나고/ 언덕으로 무덤 사이로/ 이리저리 헤메고 다녔을/ 할머니를 생각하면/ 내 어깨가 너무 작습니다. 

할머니 단잠을 깨울까 봐/ 나는 숨조차 쉴 수 없습니다.


사랑? 연대?  글로 배운 사랑은 '접촉'을 두려워한다. 모든 혐오는 접촉에 대한 혐오라는 말을 내가 이해하는 바는 그렇다. 그럴싸한 변명을 둘러대더라고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나도 역시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한다면 만질 수 있다. 예수가 문둥병자를 치료한게 사랑이 아니라 예수가 그를 만지신게 사랑이다. 하지만 글로 배운 사랑은 만질 줄을 모른다. 흙을 만지지 않아서 그런것이다. 햇빛을 만지지 않아서 그런 것이다. 농부는 내게 계속 질책한다.  

농부의 시집<내가 가장 착해질때>에는 그 외에도 가난 속에 반짝이던 아름다운 순간들, 또 아내와 가족에 대한 감사와 믿음을 일기투의 평범한 문체로 쓴 글들이 여러편 실려있다. 가난한 집에 들어와 애지중지 모았던 상품권을 훔쳐간걸 보다가 모두 도둑의 편이 되어가는 가족들. 외식하기 전에 아이들 밥을 먹이고 나가던 아내, 고열에 생사의 고비를 넘는 순간 통장에 모아놓은 3만 7천원을 양로원에 가져다 주라던 열살 무렵의 아들, 울며 불며 곡을 하다가도 언제그랫냐는 듯 향불과 조문객들 먹을거리를 챙기는 고모, 누가 버린 쌀을 가지고 강정을 만들어온 처제등등.. 

물론 가난한 날의 아름다운 추억과 살가운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안에는 뼈골빠지게 살아도 힘들기만한 농민들의 모습이, 웃음을 잃지 않으려 하지만 한편으로 씁슬해질 수 밖에 없는 장면들이 들어있다. 더 끌고 올라가면 생태문제나 농정 문제까지도 가지고 갈 수 있는 문제들이다. 하지만 이것은 시다. 농부의 말마따나 쉬운 시이다. 하고싶은 말은 많겠지만 농부는 그저 담담히 자신의 눈에 비친 바를 자기의 언어로 풀어낼 뿐이다. 강의 중에 몇차레에 걸쳐 농부는 자신의 직업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직업이라고 했다.   

<농사일지2> 

"바쁜 논밭일 다 제쳐 놓고,일당 오만 원 짜리 산성 보수 작업하러 간 우리 신랑, 오늘 품삯 받아 오면 얼마나 좋을까"  

 지을 사람 없어서 내버려둔 산밭 개간하여, 고추 모종 함께 심던 희연이 엄마가 뜬금없이 던진 그 말에, 나뭇가지에 앉아 놀던 새들은 그 마음 아는 듯 울어댄다. 

그렇지, 그렇고 말고. 농촌 살림살이에 돈 오만 원이 뉘집 똥개 이름이 아니지, 그 돈이면 글자 배우고 싶다는 큰 딸 희연이 공책도 사 주고, 안의 장날 고등어라도 몇 마리 사서 고된 일에 지친 신랑 돌아오면 저녁 밥상 구워 올릴 텐데...... 

 희연이 엄마 소박한 꿈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고,노랑나비 너울너울 춤을 추고
 

 아득한 이야기들도 있지만  시집 <내가 가장 착해질때>가  아름다운 것은 '존재의 골다공증'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도시의 이름난 여류,남류 시인들, 비평가들과 그 친한 친구들이 남발해대는 뼈 숭숭 뚫린 시어들과는 굵기가 다르다. 마치 장기간 입원하고 나온 환자들 같은 시들이 칭송받는 시대가 아니던가?  존재의 심연을 헤메다 익사 직전 건져낸 시어들.그것들 중에도 분명 소의 정수리를 때린 것들이 있을게다. 하지만 농부의 시는 다르다. 마치 니체의 춤을 추는 현자처럼 태양 아래 춤을 춘다. 고추밭 사이에서 막걸리를 마시고, 정자 나무 아래 이름도 모르고 먹는 팥빙수를 먹는다. 참꽃을 보다가 괭이자루 던지고 하루 퍼질러 앉아 쉬기도 하며 말이다.  

<모심는날> 

환갑 진갑 다 지난 밀양아지매/모심다가 흙 묻은 손 씻지도 않고/ 논두렁 가에서 오줌을 눈다 

오줌 누는 소리/ 어찌나 시원하게 '들리는지/ 함께 모심던 아지매들/한바탕 웃어 대는데/밀양아지매/당당하게 한마디 내뱉는다. 

"이년들아, 너거는 똥구녕도 없나? 웃기는 와 웃어 쌓노. 오줌만큼 좋은 거름이 어디 있다꼬." 

논 개구리 한 마리가/ 밀양 아지매 하얀 엉덩이를/ 가만히 바라보는 한낮 

산골 마을 다랑논에서 부르는/ 정겨운 노랫소리/ 봄바람에 실려 어디론가 흘러가고.... 

나는 최근에 이렇게 아름답게 봄풍경을 묘사한 시를 보지 못했다. 봄바람처럼 시원하다.
  

이렇게 긴 리뷰를 쓰게 된 것도 결국 그 먼발치에서 본 인연때문이다. 그리고 이 정도의 수고로움은 좋은 시를 길러 주신 분에 대한 내 예의이다.  

농부는 그의 시<시를 읽다가>에서 이렇게 말한다. '책방에서 사천 원 주고 산 오래된 시집 속에 배우고 깨칠 게 하도 많아 사만 원 주고 사도 아깝지 않겠구나 싶다. 그럴 때는, 문득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 찾아온다. 그 마음 그대로 시인에게 전화를 걸어 시인이 쓴 짧은 시 한 편 읽어 드리고 싶다' 라고 말이다. (농부는 김남주 시인의 '옛 마을을 지나며'를 인용한다.)

 내가 농부 시인에게 다시 돌려드리고 싶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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