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마죠비
피터 젤렌카 감독, 마르틴 미식카 외 출연 / 열린문화원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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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아무런 설명도 없이 공연장으로 가는 일군의 배우들의 이동 장면 부터 시작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손자와 메르세데스 벤츠'라는 일화가 배우의 이야기를 통해 등장한다. 이야기는 영화가 끝나고 다시 한번 자막의 형태로 언급된다. 감독의 친절한 배려와 수미상관의 강박때문은 아닌듯 싶다. 피터 젤린카 감독은 배우의 입을 통해 도스토예프스키라는 장으로 유비되는 '서구와 동구의 인식' 차이를 이야기한다. 도스토예프스키라는 고전이 사유되는 방식에 대해 빗금을 긋는 행위이다. 또한 연극 카라마조비를 영화화 하는 젤린카 감독의 해석에 대한 우회적 변이기도 하다.

 

고전이 사유되는 방식에 대해 짧게 이야기하자. 하나의 예술작품이 '위대한 고전'이 되는 시간이 있다. 어떤 작품은 고전의 예감을 간직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시간의 연마 또는 모호한 합의의 시간이 필요하다. 고전과 아닌 것의 경계 역시 매우 모호하다. 작품을 분석하고 해석 해야하는 사명을 띤 일군의 직군들을 제외하면 '위대한 고전' 이라는 칭호를 다는 순간 하나의 성좌가 된다. 그리고-이게 중요한 점인데- 위대함에 걸맞게 '상투적' 으로 소비된다. 베토벤의 피아노 소품 A단조 작품 173은 한동안 청소차의 후진 경보음이었다.(그 곡은 '엘리제를 위하여'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명화들은 상품 광고에 키치적으로 쓰인다. 모 에어컨 회사의 제품에는 르느와르의 그림이거나 바르비종파의 작품들이 붙어있다.  대중 소비 사회에서 '고전'이라는 브랜드는  레디 메이드 명품의 세련미에는 못미치지만 합의된(?) 고상함이라는 생명장치로 연장되는 브랜드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나마 목록을 통해 아이들을 강요하는 학교와 학부모의 등살 아래서, 또는 일군의 인문학자들의 틈새에서나 역설적인 각광을 받는다.  이런 상투성의 반대 급부에는 무게에 질려 압사직전의 고전이라는 역설적 운명이 함께 공존한다. 친숙해진 초라함이라는 역설 속에 위대한 고전들은 위대한 비평의 역사와 더불어 이미 목이 졸려진체 파르해진 얼굴로 독자와 만나게 된다. 상투성과 무거움의 이중적 구속인 셈이다.  대중사회가 고전을 소비하는 위대한 무관심 또는 위대한 비평의 압력은 문화연구의 재미있는 과제가 될 만하다. 고전에 대한 우리의 접근은 그 사이에 위치해야만 한다. 더 자유로와질 필요가 있다. 무거움과 가벼움을 동시에 털어내야 하는 기묘한 작업이다. 그런 의미에서 특히 고전은 반시대성을 특징으로 한다. 그것은 분명 어떤 역사적 맥락 속에서 만들어졌다. 하지만 그것이 그 맥락을 뚫고 나올 수 있는 것은 그 안에 초월적 역능이 있기 때문이다. 들뢰즈가 말하는 '소수문학'의 내재적 역능은 우리가 흔히 '고전'이라고 하는 것들 속에서 찾게 된다. 우리는 무수한 해석의 신전 기둥들 속에서 기둥의 부조들을 만져보며 통로를 찾아가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는 점을 긍정해야 한다. 우리가 고전을 읽고,독해하고, 재해석하는데 훨씬 더 리버럴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 전제 되어야만 한다.    

 

 

 본격적으로 영화의 이야기로 들어가자. 감독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위대한 원작 옆에 조각난 거울처럼 폴란드, 또는 동구의 현재성을 개입시킨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폴란드 극단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공연물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잘 만든 프로덕션을 그대로 영상화한 것이 아니다. 즉 오페라 공연물 DVD처럼 실황 공연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감독은 이것이 영화임을 잊지 않다록 앞서 말한 현실의 장치들을 극의 주변에 배치한다. 관객은 카라마조프의 이야기와 함께 그가 배치시킨 것을 동시에 읽는 즐거움을 경험할 수 있다.

 

먼저 감독은 내러티브에 두가지 축을 설정함으로서 영화가 연극상연물이 되지 않도록한다. 

 

내러티브의 첫번째 축은 극단의 연극공연이다. 무대라는 제약을 벗어나 일상의 장소에서 대안적 상연을 하는 셈이다. 영화<카라마조비>에서 극단이 공연할 곳은 폴란드 자유노조가 융성했던 제철 공장이다. 개인적으로 두 가지 장면이 오버랩되었다.  제철 공장이라는 장소는 베로나 오페라 축제의 <일 트로바토레>공연물을 떠올리게 했다. 연극 제작과정 이라는 설정은- 영화 역사에는 이런 영화들이 매우 많다- 특히 카우프만의 <시네도키 뉴욕>을 연상하게 만들었다. (오페라야 싫어하는 분들도 많으니 그렇다쳐도, <시네도키 뉴욕>은 강력 추천이다.<위대한 영화>의 저자인 평론가 로저 에버트가 2010년인던가 '지난 10년 최고의 영화'로 뽑은 작품이다.지난해 리뷰를 쓰려고 사진캡쳐만 해놓고 말았다.)

 

영화는 줄거리를 카라마조프의 재판을 중심으로 압축한다. 아버지의 고약한 질문들 속에 이반과 알료사의 입을 통해 신과 세속, 종교와 구원의 문제가 언급되긴 한다. 하지만 원작품에서의 비중에 비할 수 없다. 매우 유명한 <대심문관>편도 직접적으로 다루어지지 않으며, 얄료사의 정신적 지주인 조시마 장로도 극중 배역에 없다. 원본과 비교 운운하는 것은 굳이 이 작품을 떠나서도 별 의미가 없다. 감독이나 연출가는 텍스트를 기본적으로 해석하여 '그의' 작품을 만드는 것이기때문에. 

 

영화<카라마조비>의 주요 등장인물이다. 왼쪽 부터, 스메르자코프, 이반, 누워있는 이가 아버지 표도르 파블로비치 카라마조프, 드미트리, 알료사이다. (아시다시피,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 이들의 이름은  약칭과 정식명칭과 ...하여간 여러 가지로 불린다. 러시아에서 원래 그런다니 할 수 없다.)

 

 

영화의 두번째 내러티브다. 배우들이 극장을 찾았을 때 약간은 병약해보이며, 슬픈 눈을 가진 금발의 노동자 한명이 그들을 주시한다. 공연 리허설이 이루어지고 있을 때 역시 그는 멀리서 그 공연에 집중한다. 두번째 이야기가 그에게 있다. 배우들이 공장에 왔을때 공연기획자는 이 공장에서 얼마전 아아기 떨어지는 사고가 있었다고 말한다. 그 노동자는 그 아이의 아버지이다. 영화에서는 넌지시 그것이 보상금을 노린 살해가 아니었는지 비유하는 대목이 등장한다. 소설 <카라마조프 형제들>은 '존속살해' 라는 인류의 오랜죄악에 대한 질문으로 부터 시작되었다. 영화<카라마조비>에 등장하는 노동자의 슬픈 눈은 그런 선상에 있으며 그의 눈은 카라마조프의 형제들과는 다른 측면을 바라보고 있다. 그의 눈은 죄책감에 미묘하게 떨리고 있다.  불안감과 죄책감이 영화적으로는 카라마조프들의 연기에 그가 몰입할 수 있는 당위성이다.

 

극중 연극의 내러티브는 드미트리의 재판을 중심으로 순차적으로 진행되어 간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연극적 시간과 영화적 시간이 대단히 자연스럽게 넘나든다는 것이다. 영화의 시퀀스는 엄밀하게 보자면 연극 리허설 또는 공연의 한막이나 한장을 단위로 나뉜다. 공연의 에피소드 이후에 무대 뒤의 배우들의 일상이나 관객들의 이야기가 등장하는 식이다.드미트리를 맡은 배우는 다른 스케쥴때문에 감독과 갈등한다. 배우들 사이에서도 실강이가 발생한다. 평면적으로 보자면 이렇게 '무대 위/무대 바깥'은 분절적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감독은 이런 이질감을 현명하게 극복해낸다. 편집이라는 도구가 의식의 연속성을 만들기도 또한 단절을 만들기도 한다면 감독은 씬과 씬의 자연스러운 공간적 연결을 통해 이음새를 없앤다. 즉 첫번째 내러티브와 두번째 내러티브를 같은 공간에서 구현되며 두 개의 사건이 매끄럽게 이어져 나간다.

 

예를 들어 이반역의 배우와 관객인 노동자가 있다. 그들이 나와서 공장 주변을 산책하며 이야기를 나눈다. 한쪽에서 기다리고 있던 스메르자코프가 관객인 노동자에게 잠시 인사를 하는 순간, 그 노동자는 영화 속의 행인처럼 취급되고 앞서 노동자와 이야기하던 배우는 다시 이반이 된다

 

 

 

노동자는 배우들 중 왜 이반에게 말을 걸었을까? 왜 하필이면 이반이었을까? '모든 것이 허용되기 때문'에. 그는 연극 대화 중 일부를 가지고 이야기하며 '갈고리'와 '지옥'을 보여준다. 그것은 '죄와 벌'에 대한 이야기이고 자신의 죄책감에 대한 유비적 반응이었다. ' 만약 보상금을 노리고 정말 아이를 높은 곳에서 떠밀었다면, 그 갈고리와 지옥이 자기에게 합당한 처벌일까?' 하는 투다. 그는 그 공연이 벌어지고 있는 그 무대가, 그리고 그들이 투쟁해왔던 그 공장이 이미 오래전에 갈고리와 지옥이었음을 말한다. 아이를 밀어버릴 수 밖에 없었던 그 곳, 조건들이 충만하고 그것이 실천될 수 있는 곳. 지옥이 아니고 무엇인가? 지옥은 천국의 반대편, 염라대왕이나 하데스가 다스리는 곳이 아니라, 도스토예프스키의 도시, 카라마조프의 마을, 폴란드의 공장. 이미 우리 주변에 임재해 있었던 공간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의 질문은 또 다시 사회의 도덕이나 윤리적인 구원의 주변을 맴돌 수 밖에 없을 지도 모른다.

 

감독은 영화적 연출에 있어 기존의 두 장르(소설/연극) 사이에소격효과를 발생시켜야할 필요성을 느꼇을 것이다.   '이것은 소설도 연극도 아닌 영화다'라고 말이다. 이는 시선의 개입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를 통해 도스토예프스키가 가진 현재성과 감독이 제기하고픈 메시지 사이에 평화적?) 양립 또는 충돌적인 조우가 가능해진다. 브레히트가 말한 소격효과, 그리고 이를 이어 받은 장 뤽 고다르 등이 점프 컷등으로 변형 시켰던 개입 방식이다. 감독은 충돌하는 격한 방식보다는 전경 샷과 관객 샷의 개입을 통해 이를 이루어낸다. 대표적으로 이런 샷들이 시선의 개입을 전형화하는 방식이다.

 

 

이반과 카체리나가 대화를 나누는 샷이다. 서로의 마음(카라마조프들이니..) 이 폭발하는 대목이다. 오른쪽에  붉은 셔츠를 입은 연극 연출가가 끼어든다. 감독이 마치 이 장면을 연극에 송두리째 빼앗기지 않겠다는 투다. 붉은 옷의 연출가가 이 장면에서 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보고 있음'을 드러낸다는 이유 한가지 밖에 말이다. 이 시선의 무게감은 대단하다. 마치 깨끗한 화선지에 커다른 붓으로 대각선 먹선을 하나  훅 긋는 정도의 강력한 시선이다.시선 하나로 영화의 샷은 다른 시간과 공간성을 갖게 되며, 영화와 연극, 또는 현실의 모든 면들이 다시 만들어진다. 영화에서는 이렇게 연극적 몰입을 방해하며, 또한 영화적 맥락과의 접속조차 혼동케 하는 샷들이 여러번 등장한다. 앞서 말했듯이 연극은 여러가지 이유로 수시로 중단되기도 한다. 이런 차단과 혼동은 지속적으로 다른 단위의 시간을 발생시킨다. 이것이 만들어 내는 효과는 무엇인가?

 

 

이제 영화의 마지막 부분이다. 앞서 말한 죄의식과 죄책감에 괴로와하는 노동자다. 연극은  걸려온 전화한 통에 중단된다. 배우들 역시 연극을 중단하고 전화 받는 그의 모습을 관찰하다. 그 전화가 어떤 내용이었는지 누구도 들은바는 없지만, 모두가 그 내용을 알고 있다. 영화는 이제 그 끝으로 향한다. 영화는 몇 장의 아름다웠던 시절 속 사진과 압도적인 갈고리를 관객의 머릿 속에 남기며 끝이 난다. (물론 사진은 그 이전에 배치된 것이지만 말이다.) 배우들은 검은 그림자를 남기며 공장을 빠져나가고 그들은 낡고 닳아서 이제는 쓸쓸해진 제철 공장 위로 흩어진다. 아름다운 시간과 비극적 사건들 사이의 시간. 그 사이에 무엇이 존재했을지, 또 무엇이 사라졌을지...시간을 공간속에 박제화해 놓은 사진들을 볼 때마다 드는 암연과도 같은 질문이다. 아득하다는 말 밖에 달리 덧댈 말이 없다. 깊은 어둠의 소실점으로 향해 나아가고 있는 야누스의 얼굴처럼 우리에게 많은 질문과 대답을 강요하면서 말이다.

 

영화<카라마조비>는 매우 현명하게 만들어진 영화다. 엄청난 배우나 제작비를 쓰지도 않았다. 그저 고전의 명성과 도스토예프스키의 질문을 살짝 흔들었을 뿐이다. 과거를 반복한다는 것은 새로움에 대한 반복이며 현재와의 조우이다.  들뢰즈식으로 말하자면, 결국 이것은 도스토예프스키의 텍스트가 가진 생산적 힘을 반복하는 것, 차이를 반복하는 것이지 단순히 과거를 반복하는 것은 아니다. '유일한 반복은 차이의 반복'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우리에게는 도래할 더 많은 카라마조프들이 있다는 점은 도스토예프스키를 만날 때마다 생기는 기대감이다.

 

P.S) 소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읽지 않고 영화를 이해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던지고 싶어지고, 또 던져질 것이라고 생각된다. 영화는 영화로서 충분히 설명이 가능하다. 이것은 소설<카라마조프>가 아니라 영화<카라마조비>이기 때문이다. 단지 영화의 첫번째 내러티브가 뼈대에 가까운 카라마조프 존속살해사건을 보여주고 있기때문에 소설<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읽었다면 좀 더 흥미롭게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본다.  ('고전 '아닌가? 클래식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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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의 생각 - 정의에서 민주주의까지
애덤 스위프트 지음, 김비환 옮김 / 개마고원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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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는 어느 책에서가 "이 땅에 살고 세계에 거주한다." 라는 말을 했다. '정치'의 존재조건이자 인간의 조건에 대한 이야기인 셈이다. 고전적 의미에서 인간의 모둠살이는 정치를 만들며 정치가 모둠살이를 반영한다. 또 정치의 주체는 정치의 외연을 생산한다. 넓은 의미에서는 세계 속의 타자와 관계 맺는 일 자체가 정치다. 하지만 우리는 '정치'를 대단히 협소하게 이해한다. 지그문트 바우먼은 <자유>라는 책에서 이 책의 주요 주제인 '자유'에 대해 '소비자로서의 자유'만이 존재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시민적 공화주의 구성을 요청하는 벤저만 바버 역시 그의 책 <강한 시민사회 강한 민주주의>에서 정치적 자유주의라는 것이 그저 '투표자'로서의 자유로 축소되었다고 반성을 요청한다. 결국 이런 수동적 정치인식은 스스로를 정치로 부터 소외시킨다.  새로운 해방의 사유형식은 언감생심이다. 냉소주의와 허무주의가 그 자리를 차지게하게 된다. 에이프릴 카터가 <직접행동>에서 시민적 참여를 민주주의의 중요한 요소라고 강조한점, 특히 비폭력 투쟁에 힘을 실어 말한 것은 이같은 정치냉소주의에 공간을 확보하기 위함이다. 이 책 <정치의 생각>에도 나오지만 기술발전과 더불어 소통방식의 변화가 일어난 것은 사실이다. 즉 인터넷이나 SNS등의 소통 수단의 발전은 그나마 정치적 사안에 대안 담론 공간을 넓혀 놓았다. 하지만 정치적 사안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측도 '선거'라는 정치 행위 범주 주변에서 배회한다.  "어떤 가치가 자신의 주장을-또는 타인의 것을- 정당화하는가?" 대해 깊이 있게 돌아보지 않는다. 진지한 고민과 합리적 사유보다는 수사학에 더 민감하다. 이성의 사용보다는 '파토스에 대한 무한한 애정'이 정당화의 근거가 되는 경우가 빈번하다. 

 

 예를 들어 '사회 정의, 자유, 민주주의 '등등. 어느 누가 이런 가치들을 거부할 것인가? 어느 누가 이런 가치들은  용도폐기 대상이라고 말하겠는가? 그렇다보니 이런 가치들은 대개 자신을 방어하고 타자를 공격하는 기표 이상의 기능을 하지 못하는것이 실정이다. 해마다 TV 에 깜짝 등장해서 의아하게 만드는 00 공작원들이나 어르신 연대같은 단체들의 수사는 어떤가? 그들 모두는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고, 공동체를 수호하자."라고 말하지 않던가. 그들을 수구 반동 세력이라고 하면서 비판하는 진보 진영에서도 토씨 하나 다르지 않은 슬로건으로 그들을 공격한다. 이 둘이 만나서 행동을 멈출 때는 '애국가'가 흘러나올 때 뿐일지도 모른다. 수사 위에 같은 이름의 또 다른 수사가 쌓여 바벨의 탑이 만들어진다. 패거리 지어 싸우는 것이 정치이지만,현실정치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그들이 말하고는 있는 슬로건의 다층적,심층적 의미에 대해 고민해 봐야 한다. 자신이 쓰고 있는 자기를 규정하고 또 보호해주는 그 정치적 정당성에 대해서 말이다. 

 

이제 우리는 <정치의 생각>이 제기하는 길을 따라 '정치철학'이 거주하는 곳으로 이동할 준비가 된 것이다.   

 

"먼저 우리 자신이 지지하는 정치적 이상들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이런 정치적 이상들에 대한 상이한 해석들을 잘 알아둘 필요가 있다........우리에게는 정치철학이 필요하다."   <정치의 생각> (P.15)

 

<정치의 생각>의 구조는 일목요연하다. 정치는 가치의 정당성과 윤리의 문제를 포괄한다는 전제하에 시작된다. 정치철학은 도덕적 문제와 민감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저작의 생각이다. 먼저 애덤스위프트의 서론과 역사 김비환의 후기를 통해 이 책을 통해 정치문제를 바로보는 3가지 커다란 틀을 정리해 볼 수 있다. 저자는 정치를 '현실적, 단기적, 실행적, 대중현상' 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정치철학은 '개념적,장기적, 진리의추구' 로 구분할 수 있다. 여기까지는 애덤 스위프트의 구분이다. 그리고 역자 김비환은 '정치철학'을 다시 한번 두가지로 나눈다. '전통적 정치철학'과 '분석적 정치철학이다' 우선 전자(전통적 정치철학)은 '거대정치담론,계급,민족, 국가, 제도, 혁명' 등을 다룬다. 마르크스주의에 영향을 받은 좌파가 다루는 정치철학도 이런 범주에 포함될 것이다. (좌파의 정치철학이 이런 거시담론의 분야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지만) 후자인 (분석적 정치철학)은 시민의 관점, 합리적 토론, 개념 또는 주장의 분석'을 과제로 한다. 그리고 그 목적은 현실적 정치문제에서의 토론과정에 실용적 장치를 제공하고 사고의 기본틀을 제시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책 <정치의 생각>은 '정치철학책이며, 분석적 정치철학을 다룬다' 라고 하면 책에 대한 가장 압축적 설명이 될 수 있다.

 

애덤 스위프트는 <정치의 생각>에서 5가지 주제를 다룬다. '사회정의, 자유, 평등, 공동체, 민주주의' 가 그것이다. 저자는 비교적 공정하게 해당 견해와 이견들을 설명하는 입장에 서있다. 그렇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시민사회중심의 자유주의적 입장을 강조함을 느낄 수 있다. 물론 그가 공동체 장을 설명하면서 자유주의자들에 대한 오해를 재반론하는 형태를 취했기때문에 생긴 오해일 수도 있다. 판단은 각자의 몫이겠으나, 전체적인 분위기가 그렇다는 것이다. 하지만 애덤 스위프트가 최소한 대중들을 위한 정치 입문서로서 이 책의 서술에 상당히 균형잡힌 시각을 유지하려고 노력한다는 점은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먼저 '사회정의'의 장에서는 '공정으로서의 정의'를 말한 존 롤스와 노직의 '자유지상주의'를 대비시키고 있다. 롤스의 3가지원칙을 정리하면 1)평등한 기회원칙 2)공정기회의 원칙 3)차등의 원칙(최소극대화의 원리)라가 할 수 있다. 노직은 소유권 절대화 개념으로 맞선다. 노직의 재분배에 대한 흥미로운 주장은 '패턴에 따른 재분배에 대한 반대'개념이다. 절대적 소유권을 주장하는 이에게 이는 정당한 소유권 행사에 대한 자유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던져야 하는 문제는 "과연 절대적 소유권의 경계가 어디인가?" 라는 질문이다. 또한 분배적 정의를 둘러싼 흥미로운 개념이 하나 등장하는 데 그것은 '응분의 몫'이라는 개념이다. 롤스와 노직이 각기 다른 이유로 응분의 몫에 대해 반대했는데 직관적 사고와의 차이점을 살펴 볼 수 있는 좋은 과제거리가 된다.

 

'자유'의 개념은 크게 이사야 벌린의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자유'개념의 이원성을 비판하면서 논의가 진행된다. 애덤 스위프트는 제럴드 맥킬럼의 " X는 Z를 하는데 Y로부터 자유롭다" 라는 유기적 차원의 자유를 그 대안으로 제시한다. 즉 벌린이 나눈 두가지 자유개념은 애초부터 분리가 불가능한 개념을 허구적으로 분리시켜 자유의 개념을 혼동시키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스위프트는 이 중 이사야 벌린이 전체주의적 도구화의 우려때문에 저어했던 '적극적 자유'를 포용하면서 다른 틀로 '적극적 자유'의 개념을 다원화시킨다. 애덤 스위프트의 개념틀은 '형식적 자유/ 실질적 자유,자율성/ 원하는 것을 할 자유','참여의 자유/ 사적개인의 자유' 이다. .    

 

<정치의 생각>에서 가장 눈여겨 보게되는 부분은 평등이다. 모두가 좋아하는(?) 평등 말이다. 먼저 스위프트는 정치적으로 '평등주의적 전제'를 정상적인 사회에서는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정치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시민들 사이의 평등이다. 이 문제는 실제적 의미에 있어서 논쟁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특히 좌파 쪽에서는 이런 식의 동일성에 근거한 시민사회적 정당화에 의심의 눈길을 오래도록 보내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매우 타당하다. 하지만 이것은 건너뛰도록 하자. 평등을 좀 더 주의깊에 읽어야 하는 이유는 현재 정치적 상황과도 관련이 있다.몇 번의 복지논쟁과 이를 둘러싼 정치적 사태 이후 급선회한 의심쩍은(?) 한국의 복지담론 상황 때문이기도 하다. 최소한 '복지=평등'이라는 고정된 개념 구도하에 질문을 던지는 방식으로 '평등' 에 대한 접근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예를 들어 애덤 스위프트는 평등처럼 보이지만 '평등' 개념과는 관련이 없는 몇 가지 생각들을 정리한다. 대표적인 것이 밴덤류의 공리주의, 라즈의 '체감의 원칙' 그리고 충분함에 대한 사유이다. 직관주의와 결과론적 사고의 경직성에 대해 비판적 참고가 될 수 있는 입장들이다. 개념어가 낯설 수 있는 라즈의 '체감의 원칙'을 보자. 이런 말이다. '재화의 요구가 덜 긴급한 사람들로부터 긴급한 사람들에게 재분배한다.'는 것. 쉽게 말하자면, 하루 굶은 사람보다 사흘 굶은 사람에게 먼저 밥을 준다는 것이다. 직관적으로 매우 옳바르다. 하지만 "이것이 '평등'이라는 개념과 무슨 관련이 있는가?" 라고 질문할 수 있다. 

 

"우리가 상대적으로 불우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더 우선적인 관심을 갖는 이유는 그들의 배고픔이 더 크고 그들의 필요가 더 절박하며 그들의 고통이 더 괴롭기에,배고픈 자들과 가난한 자들 그리고 질병으로 고통받는 자들에게 우리의 관심이 쏠리기 때문이지 평등에 대한 관심 때문이 아니다." <정치의 생각>(p.178)

 

이것은 굳이 평등의 이름이 아니어도 정당화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자선이란 개념은 어떤가? 또는 휴머니즘? 또는 자유의 확장? 애덤 스위프트는  재화의 편중이 비교를 위한 수단이지 그것이 평등을 실현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은 아니라고 설명한다. 스위프트는 지위재의 예를 들면서 상대적 격차를 인정해야 한다고 조심스럽게 말한다. 그가 우려하는 바는 일종의 전체주의적 평등이다. 그것은 하향평준화를 초래할 수 있으며, 생산력의 진보에 위배될 수도 있다고 본다. 하지만 그는 사회적으로 발생하는 상대적 격차의 문제 유발하는 자존감 결여, 건강 불평등, 우애등의 연대의식의 문제들을 지적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공동체'편은 자유주의를 오해하는 공동체주의자들에 대한 재반론 형태로 구성된다. 물론 몇가지 공동체주의에 대한 전제들이 있다. 공동체주의가 하나의 일관된 흐름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정치적 공동체주의(이 책에서 주로 논의하는)와 정치적 공동체주의가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한국적 상황에 맞추보면 정치적 공동체주의는 코뮌식의 좌파 급진주의부터 유교적 공동체복원까지 실로 다양한 정치적 스펙트럼을 갖는다. 원래 이야기로 돌아가서 앞서 말한 자유주의에 대한 오해들 중  몇 가지 문장을 모아 보면 이렇다. "자유주의자들은 사람들이 이기적이거나 자기중심적이라고 가정한다." "자유주의자들은 개인이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방식을 무시한다." "자유주의자들은 국가가 중립적일 수 있고 또 중립적이어야 한다는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다."  이런 것들이 공동체주의가 자유주의에 덧씌운 오해 또는 몰이해라는 것이 스위프트의 생각이다. 저자는 이를 자유주의차원에서 반박함으로써 공동체주의/자유주의가 가진 미묘한 차이, 또는 일종의 비중 차이를 전한다. 특히 첫번째 언급한 '자유주의=자기중심주의,이기주의' 라는 만연한 오해에 대해서는 자유주의의 목적이라는 차원에서 부연을 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 신자유주의가 만들어낸 자유주의의 극단적 왜곡 형태를 자유주의와 착각하는 경향이 있는 듯 해서 말이다.

 

"자유주의의 목적은 이기주의를 제한하는 규칙과 법률체계를 지지함으로써, 모든 사람들이 자율적인 개인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할 동등한 관심과 존중을 보장받도록 하는 것이다." <정치의 생각>(p206)

"자유주의자들이 공동선을 무시한다고 비난하는 공동체주의자들은 자유주의적 정의 자체가 하나의 공동선일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p224)

 

즉 자유주의의 긴 역사를 두고 봐도 '타인의 자유와의 양립'문제가 가장 큰 논쟁의 전장이었다. 아니 자유주의의 전부가 그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주의를 '자기만의 자유'라고 이해하는 것, 또는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소아병적이다.

 

마지막 장이 문제많은 '민주주의'편이다. 애덤 스위프트는 다른 용어들과 마찬가지로 '민주주의'가 수사적으로는 '자기가 좋다고 생각하는 정치체계의 모든 측면'을 나타내는 용어라고 말한다. 헌정질서를 유린한 독재자 역시 '민주' 와 '정의'를 말한다. 애덤 스위프트는 '자율' 또는 self-rule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민주주의를 고찰한다. 링컨의 유명한 문구를 빌자면 '민주주의는 인민에 의한 지배'이다. 그리고 이제 구체적인 문제로 참여방식이 가진 다양한 문제점들과 정당화 노력들을 설명한다. 결국 자기통치라는 개념은 법률로 이루어지는데, 법률의 생산에 관여할 수 있는 형식들과 관련된 이야기가 되는 셈이다. 이 문제에 가장 큰 걸림돌은 '대의제'였다. 대의제의 문제는 여러번 지적되었기 때문에 다시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직접 민주주의의 실현이라고 제기된 전자민주주의 역시 애덤 스위프트는 비판한다. 직접 민주주의가 가져올 비전문성,비합리성 등을 문제삼는다. 이것은 대중현상의 부정적 측면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또한 올바른 결정과 정당한 결정의 차이를 물을수 도 있다.

 

좀 오래된 이야기이다. 알라딘에서 과거에 다수결 투표로 정치적 저항의 가부를 결정하자는 이야기가 있었던 적이 있다. 물론 투표 구성권의 문제(주권의 영역문제) 부터 피할 수 없는 함정이 있는 내용이었다. 백의 하나를 양보해서 '여론투표'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이런 문장들은 편의주의적으로 다수결에 의지하려는 사고가 왜 반민주주의적인지 경종을 울리는 말이다. 설정된 의제 중 어떤 것들은 다수결로 논의될 수 없는 것들이 있다는 점만 명확히 하자.

 

"민주주의적 권위는 스스로 민주주의를 부정하는데까지는 미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인민은 민주적 절차를 통해서도 애초에 민주주의를 구성하는 권리들을 박탈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정치의 생각>(p274)

"(드워킨은) 시민들을 평등하게 대우해야 한다는 민주적 가치가 또한 다수결적 의사결정의 범위를 제한하는 원칙들도 정당화시켜준다고 말한다."

(p275)

 

대략적으로 <정치의 생각>에서 등장하는 내용들을 살펴보았다. 신문이나 방송을 보면 '정치의 계절'이라고 말이 자주들리는 때다. 이 말은 묘한 역설적 함의를 담고 있다. 마치 정치라는 것이 선거에 한정지어지며 반복적으로 돌아오는 어떤 것이라는 의미로 읽힌다. 당연히 권리의 주체들이 수동적 대상이 된다. 오히려 주권자들은 대략 정치란 걸 잊고 지내다가 돌아오는 계절에야 비로서 양도된 권리를 찾으러 간다는 의미같다. 정치의 수금사원화다. 둘 다 모두 틀렸다. 비록 생활의 에너지의 대부분을 생계유지를 위해 사용하게 만드는 구조적 요인이 있다고 할지로도 정치는 4년마다 돌아오는 고지서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계절이라는 기후적 에피스테메에 사로잡힌 순환적 정치의 시간의 개념은 폐기되어야 마땅하다. 주권자의 권리는 늘 우리에게 존재한다. 수금사원들을 뽑는 것만이 정치가 아니다.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 놓은 것들에 숟가락 하나 더 얹는 것도 정치가 아니다. 정치는 .... 그래.... 듣기 좋은 말로....생성하는 것이다. 무엇을 만들까? 누가 만들까? 이제는 너무 흔한 혜안이 되어 버린 말.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우리이다." 라는 말을 중얼거리게된다. 애덤 스위프트의 <정치의 생각>은 우리에게 그런 준비를 위해 무엇을 더 살펴봐야 할지, 우리가 알고 있는 개념 속에 무엇이 더 들어 있고, 그 개념에 우리는 무엇을 더 넣을 수 있는지 고민해 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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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신 - 신은 과연 인간을 창조했는가?
리처드 도킨스 지음, 이한음 옮김 / 김영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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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에서 예를든 확률스펙트럼에 의하면 나는 6번과7번 사이이다. 사실상 무신론자와 강한 무신론자 사이다. 즉 무신론자다. 나는 유물론적이며, 또한 과학적 세계관을 존중한다. 인문학적인 관용으로 보자면 '매력적 무신론'이라는 범신론과 무신론 사이다. 물론 '나는 유물론자다.'라고 하면 가끔 '나는 공산주의자다'라고 할 때와 비슷하게 목덜미가 서늘해진다. 도킨스가 미국에서 '나는 무신론자다'라고 할 때 받을 수있는 싸늘한 불편함 같은 것을 한국에서는 '나는 유물론자다'라고 할 때 받는다. 주로 유물론이 뭔지 관념론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서 말이다.  도킨스가 <만들어진 신>에서 전투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아브라함의 신' 즉 개신교,천주교, 이슬람교의 신이다. 서양을 지배하는 신이기 때문에 서양인으로서 도킨스는 그 신만 상대한다. 반면 한국에서 '유물론자'라고 하면 종교적인 관점과 함께 이데올로기적 눈총도 받아야 한다.한국서 '무신론자'라고 하면 비기독교인 정도로 받아들여진다.  유교는 예절 잘지키고 그냥 문안드리는 차원에서 조상 귀신께 제배나 잘하면 되니까, 불교는 '네 안에 신있다' 라고 서로의 신을 보라고 하니까. 물론 불상 앞에서 열심히 절하는 분들도 많다만. 하지만 '유물론자'라고 하면 상황이 다르다. 아마 유교 쪽에서는 하늘에서 뚝 떨어졌나 조상 귀신의 은덕도 모르고 라고 나올테고, 불교측에서는 영성도 없는 것들 이라고 나올거다. (아..산은 산이고 물은 물인데 왜그러세요.박영규 버전이다.)  거기에 일단의 관념론적 사회 분위기는 이런 '편협한 놈들' '메마른 놈들' 이라고 공격을 해올 것이다. 유물론을 무슨 책상 신이나 벽돌신을 믿는 사람 정도로 생각하는 지도 모르겠다. 오랜동안 '유물론자'는 '빨갱이' 와 동의어였다. 정치적 상황이 예전에 비해 달라졌다지만 지금도 그런 사회적 정서는 끈적한 테이프 흔적같다. 무신론자가 받는 오해는 유물론자가 받는 오해와  닮아 있다. 이 둘은 사실 쌍둥이이다. 영혼도, 정서도, 감정도 없거나 - 좀 더 세속적으로 가면- 물질만능주의,황금만능주의자 정도라고 생각한다. 기본적으로 한국에서 유물론의 전통이 마르크스주의적인 유물론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그리고 마르크스는 스스로의 사회철학을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규정했다. 즉 마르크스는 과학적 필연성으로 자신의 이론을 특화시키길 원했다. 그 역시 과학적 세계관에기댄바가 크다. 하지만 우리에게 가장 큰 오해의 시작은 '국민윤리' 과목에 있었다. '유물론=마르크스주의=좌경용공' 이란 자연스러운 흐름을 탄다. 내가 아는 어떤 유물론자도 눈에 보이지 않는 많은 인간적 가치들과 내면성의 여러가지 양식들을 모두 가치 없거나 존재하지 않는 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농담처럼 말하자면, 가슴이 따듯한 사람은 정말 가슴이 따뜻한게 아니라, 뇌가 따뜻한(?) 것이다. 영혼은 가슴에 있지 않고 뇌에 있다. 그런데 문학적으로 '왼쪽 가슴 아래께 있다'고 하는게 관습적인 미감에 더 어울린다. 우리는 어떤 최소의 기원 또는 범주를 이야기하기 위해 세상의 모든 일들을 극소로 환원할 필요는 없다. 인간을 인간 유기체로 대하지 분자들의 조합으로 대하는 사람은 없다. (그래도 굳이 말하자면 감정을 느끼는 것은 안타깝게도 심장이 아니라 뇌다. 고답적으로 해버리면 대중가요는 매우 우습게 되긴 한다. 핫브레이커가 아니라 브레인브레이커.ㅎㅎ 가슴아파서 목이 메어서...가 아니라 뇌가 아파서...왠 두통약 CM송이람.. 인간은 바다에서 왔던지, 뭐에서 왔던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하등적인 존재에서 여기까지 왔다. 앞으로도 좀 더 갈 것 같다.)   

 

  신의 문제는 사실 오래된 철학의 문제였다. 하지만 이제 철학자들은 캐캐묵은 신에 대해서 별로 이야기 하지않는다. 서양의 관념론은 신을  떨쳐내는데 매우 오랜 시간을 썼다. 근대 이성을 정초했다는 데카르트 역시 그랬다.이원론적 형식을 통해 인식의 주체를 내부에서 구했던 칸트 역시 <실천력비판>에서 신의 문제에서 '신의 요청'이라는 교묘한 방식으로 이를 슬쩍 넘어간다. 물론 19세기- 다윈과 헉슬리 이후- 진화론적 세계관은 중요한 포인트였다. 생물학자들이 다윈을 뉴튼의 반열에 올려 놓는 것은 그래서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이후 과학은  세계의 비밀을 하나 둘 풀어낸다. 하지만'신'은 여전히 건재하다. 신이 인간의 모습으로 현대에 내려와서 생기는 일을 그린 철학적 만화 <신신>에는 " 만약 신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신을 창조해냈을 겁니다." 라는 말이 나온다. 아마 존재하고 있지 않았을때도 그랬을 것이다. 도킨스가 인용한 '화물숭배의식'처럼 말이다.  

 

<만들어진 신>에서 도킨스는 신 문제에 매우 단호한 태도를 취한다. 그의 전투성은 두가지 측면으로 보인다. 하나는 과학자로서의 소신, 다음으로는 네오콘을 중심으로 한 부시정부의 신정 정치의 복원이라는 출간 당시의 상황 때문이다. 그가 사나운 늑대처럼 달려드는 것은 지적설계론의 반격같은 반동적 움직임에 대한 대응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도킨스가 우려하는 정세적인 측면은 사실 한국에서 그대로 이해하긴 쉽지 않다. 한국의 기독교가 강력한 헤게모니 그룹이긴 하다. 특히 이 정권에 들어서면서 그 모습이 더 노골적으로 들어났다. 하지만 한국의 풍부한 종교적 전통은 묘한 정서적 균형을 이루는 힘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처럼 '지적설계론'을 교과서에서 가르쳐야 한다고 압박할 수 없다. 굳이 비종교인들이 나서지 않아도 말이다. 머리 깍은 분들과 갓 쓴 분들이 좌시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신정분리의 세속 정치를 지지하는 이는 '이이제이'를 통해서도 그런 시끄러운 사태를 막을 수 있다.  

 

내 개인적으로는 신의 존재 문제를 증명 또는 반증명 하는 것보다는 신의 효과 문제에 관심이 많은 편이다. 내게 종교는 문화적 문제에 가깝다. 다이엘 대닛의 용어를 빌자면, 진화의 지향적 자세들 중에 하나이다. 나는 신의 존재를 믿지 않지만, 종교나 신을 믿는 사람들 또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그것을 자기의 선택의 자유 범위 안에 가두어 둔다면 달리 말하고싶지 않다. 실제 종교가 환상이라 할지라도 누구나 다른 브랜드의 환상을 가지고 있다. 도킨스는 종교환상이 악성이라는 것에 문제를 제기한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종교인 개인이 사회적 합리성을 유지하려 애쓰고, 비사회적 행동을 혐오하고, 자신이 믿는 종교를 자기에게 한정한다면 나는 그가 어떤 종교를 갖더라고 인정한다. (물론 여기에도 문제가 있긴 하지만 그 정도가 타협의 근본선이다.) 물론 이는 내가 과학적 민감성이 리처드 도킨스 만큼 부족하고 종교 문제에 어느 정도는 포기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킨스는 이런 인식의 나이브한 태도를 비판한다. 굴드의 '겹치지 않는 교도권'(NOMA)에 대해서 타협적인 태도로가 비판한다. 굴드 자신이 진화론자이고 무신론자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겸손이라는 미덕 속에서 불가지론으로 치환시킨다는 것이다. 사실 대개의 무신론자라고 하는 사람들도 이 정도 지점에서 종교와 선을 긋고 있을 성 싶다. 결국 영원히 풀리지 않을 가치관이기 때문에 실용적인 입장에서 '너와 나'의 경계를 긋고 독립적인 위치를 점유하는 것말이다. 물론 이 세속의 경계를 종교 측에서 넘나들면 반격도 기대하는 것이 합당하다. 도킨스는 과학자들의 이런 모호한 태도 때문에 종교와 신의 문제가 더욱 풀리기 어려운 미궁으로 들어간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는 여러번 무신론자들을 위로하고 발굴해야 한다고 말한다. 즉 더 많은 무신론자들이 나와야 세상이 종교가 만드는 환상과 해악으로 부터 빠져 나올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나는 이 지점에서는 좀 다르다. 그것은 종교가 있어도 또는 없어도 반복될 것이다. 기존의 종교가 모두 없어진다고 할지라도  다른 종류의 이름의 종교, 예를 들자면 광신적 애국주의같은 형태로라도 반복될 것이다.) 도킨스가 진화론과 과학적 방법론 외에 대해에 대해 강경한 태도를 취하는 것은 타협적 인식이 일종의 '침묵의 나선'효과를 만든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나는 무신론자다.'라고 당당히 선언하는 입장이 환상으로서의 종교에서 탈출 할 수 있는 시초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이 이야기하고 있는 바에는 매우 동의한다. 공정을 기하기 위해 신가설과 과학가설이라고 동치에 놓고 봐다. 과학가설의 열린 가능성이 타당하게 보인다. 즉 과학은 새로운 증거가 나오면 수정할 수 있지만 종교는 그렇지 않다. 유리한 증거가 나오면 신이 있다는 결정적 과학 증거라고 하고 또 불리한 과학증거가 나오면 믿음으로 돌아가버린다. 특히 도킨스의 강력한 주장 중에 특히 어린이에 대한 종교 강요 문제는 무슨 법제화라도 시켜서 막고 싶은 심정이다. 일부 종교인들은 모태종교를 무슨 대단한 자랑으로 생각한다. "진골귀족인 양 ,모태종교에요" 라고 발랄하게 이야기한다. 본인들은 '저는 점지 받을때 부터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 임했답니다. 그리고 여전하지요." 라는 식이다. 우습긴 한데, 하나님이 아이들을 준다쳐도, 그대를 더욱 축복하고 사랑했을 것이라는 나르시즘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아담때문에 연좌제로 시달리는 것도 괴로운데,또 가족의 크나큰 믿음이 세습적 축복까지 내리니 참으로 귀족형 자본주의 모델이 아닌가 싶다. 모태종교에 대한 축복은 아마 성경 어느 구절을 뚝잘라서  주변 목사님과 장로님과 권사님들이 하신 말씀에 힘입은 바가 클 것이다. 종교 리더의 말이 하나님의 말이 되는 순간이다. 웃기는 일이다. 리처드 도킨스라면 '모태종교' 라는 말은 이렇게 해석할것이다. '저 태어날 때 부터 폭력...." 그만하자.

 

내가 설령 도킨스의생각에 동의하더라도 그처럼 전투적일 수는 없을 것같다. 수많은 조용한 종교인들과-또는 가끔 환자 소리도 듣지만, 비교적 조용히 자기신앙생활을 하고있는 종교인들과 공존해야 하는 생활인의 입장에서 그런 도발적 태도를 취할 수 있는 위치는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종교와 세속 정치를 섞는 부류들, 그리고 그것에 흔쾌히 동조하는 세력들에 대해서는 욕을 해야만 한다. 종교의 이름을 벌어지는 몽매주의 역시 마찬가지기며 종교근본주의 역시 그렇다. 흔히 말하는 술자리에서 하지 말아야 할 이야기 두 가지가 '정치' 이야기와 '종교'이야기다. 왜 그럴까? 그건 답이 안나온다는 것 때문이다. 이야기 하지 않는 것이 서로 어색함을 더는 길이다. 그런데, 바로 이렇게 소통으로 해결될 수 없는 가치, 이 차이가 바로 가장 중요한 정체성의 중핵이 아닌가?  '정치'와 '종교' 이야기를 뺀다는 것은 그 사람의 가치관과 접촉하지 않겠다는 이야기인 셈이다. 가치관의 소통은 어찌되었거나 술자리에서 부담스럽다. 그리고 나머지 자리에서도 만찬가지다. 이 시대의 소통이란 물론 그정도의 것이다. (여담인데, MB정권이 준 특이한 묘한 역설은 술자리에서 이 두가지를 동시에 거론해도 될 수 있게 된 상황이다.) 하여간 문제적인 작가 리처드 도킨스의 노력에는 경의를 표한다. 일부 그룹에서는 원초적으로 거부당하는 작가로 취급받겠지만 말이다. 참고로 나는 예수를 좋아한다.석가모니도 좋아한다. 공자도 그렇고 맹자도 그렇다. 그 분들을 인류의 위대한 현자라고 생각해서 좋아하는 것 뿐이다. 주제 사라마구의 <예수의 제2복음>(예수복음)의 마지막 부분은 이렇다. 도킨스는 물론이고 종교 근본주의자들 또는 무오류주의자들을 바라보는 우리들이 걱정하는 바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셈이다. 

 

 "자기 옆구리에서 흘러나가 지구를 온통 뒤덮을 피와 고통의 강을 기억하면서, 예수는 미소를 띠고 있는 하느님이 조이는 활짝 열린 하늘을 향해, 인류여, 하느님은 자기가 무슨 일을 했는지 알지 못하고 있으므로 그분을 용서라라라고 크게 외쳤다."

 

여담삼아 내 종교 경험은 이렇다.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이 조금 더 일찍 나왔다면- 예를 들어 내가 고등학교 때쯤- 자율학습 시간의 종교난상토론에서 훨씬 유리한 위치를 취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초등5-중2까지 교회를 다녔다. 아버지는 종교선택의 자유를 인정해주는 기독교인이었다. 나는 초등학교 4학년 때 헌법의 종교자유 구문을 우연히 알게 되었고 그 부분을 강조하며, 아침 TV 애니메이션 대신 교회가자고 꼬득이는 부모님을 혼자 보냈다. (흐흐흐 스스로 대견하다. 시민의 권리를 헌법에 기대서 주장하다니.)  헌법에 의한 권리 보장이 깨진 것은 아버지가 주일학교 교장인가를 맡으면서였다. 결국  교회 내에서의 묘한 포지셔닝 문제로 내가 교회에 나가게 된것이다. "자기 아들 하나 전도하지 못하면서 무슨" 이런 비난 어린 시선들을 우려했을 것이다. 결국 길바닥에서 1시간 넘는 싸움 끝에 교회에 가게 되었다. 오래된 싸움에 항복하고 나니 진짜 마음은 편하더라.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서 엄석대에 항복한 주인공의 마음이 그러했으리라. 사람들은 '신'을 영접해서 그렇다고 했는데, 나는 그때 굴복의 달콤함이 저항의 고달픔보다 심하다는 것을 알았다. 교회 선생들이 기쁜 마음으로 두 손 잡고 기도할 때, 내 마음은 그런 투항자의 안이함과 함께 묘한 비굴함을 느꼇다. 그리고 교회의 끝은 중2때, 교회 안에서 깝죽 거려대는 녀석에게 주먹 한 방 날리고 '나 진짜 교회랑 끝이다' 하고 나온게 정말 끝이다. 따지고 보면 그 깝죽이와 신은 별개의 문제였지만 말이다. 그런데 중 3때 친한 친구 3인방 중 한 녀석이 순복음교회 광신도였다. 교회가서 한 나절이상 사는. 이 친구를 공박하느라 또 많은 시간을 썼다. 그러다 고등학교를 미션스쿨을 다니게 되었다. 교가만큼이나 '실로암'이라는 복음성가를 자주 부르는 곳이었다.(아직도 그 노래를 기억한다. 어두운 밤에 캄캄한 밤에 새벽을...) 매주 한 번 씩 예배를 봐야했다. 교회 안다니는 아이들은 단어장 가지고 가거나 아님 졸았다. 당시 목사의 축원 아래 고개 숙이고 있는 사람들을 실눈으로 보며, 만약 이것이 무지나 환상의 대상에 대한 응대라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가와 그들이 '하나'의 무엇에 한 마음으로 고개를 숙인 것에 대한 모종의 공포감 같은 것을 느꼈다. 자율학습 시간에는 반에 절반 쯤 되던 기독교인들과 리처드 도킨스가 <만들어진 신>에서 꺼냈던 그런 이야기들을 가지고 타율학습의 긴 시간을 때우기도 했다. 도킨스를 고등학교 때 쯤 만날 수도 있는 요즘 고등학생들이 부러울 뿐이다.얼마나 싸우기 용의한가. 30년 교회를 다니던 아버지도 수 년전에 교회와 연을 끊으셨다. 이유는 아버지가 감사로 있을 때다. 교회와 사학 재단 설립자의 후계자이자 그 교회의 장로인 자의 재산 해외 은닉 비리를 폭로했기 때문이다. 지역 신문에 조그맣게 보도되기도 했던 사건이었다. 아버지를 정작 화나게 한 건 젊은 장로의 비리가 아니었다. 장로의 비리에 대해 누군가 옹호하며 그 분이 그럴 분이 아니다. 오해가 있다며 그 분을 위해 기도하자고 할 때 대부분 그에 호응하며 머리 숙여 기도했다는 점이다. 아버지 표현을 그대로 전하자면 "그딴 새끼들의 기도나 들어주는 하나님이라면" 이라고 일갈하고 접었다. 당시나는 오래도록 믿던 신을 인간의 어리석은 행위들 때문에 저버리는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고 말해드렸다.( 오히려 비종교인이 종교를 버리는 걸 신중하게 생각하라는 조언을 하다니. 역설적이다.) 교회가 싫은 거지,믿던 신이 싫은 것이 아니라면 다른 교회를 다니시거나, 함석헌 목사처럼 무교회주의같은 건 어떠냐고 말이다. 70 넘으신 분이 갑자기 가치를 바꾸는게 쉽지 않을거라는 생각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신의 존재 문제도 오래도록 믿음과 의심사이를 오고갔다고 했다. 아버지는 30년 동안 생물 선생님이셨다.ㅎㅎㅎ 리처드 도킨스라면 아마 70 이면 어때, 그때라도 환상의 터널에서 빠져나온 것이 좋은 것이고 지금 부터 또 즐거운 세상을 살면되지라고 할 것이 분명하다. 지금은 나도 그렇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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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을 표현하는 가장 우호적이고 적절한 말은 '전투적 자유주의자'이다. 최근에 트위터 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보면 여전히 그는 그답다. 진중권의 싸가지 없음이라는 에티켓과 멘털리티를 가지고 그를 싫어 할 수 있다. 내 개인적으로도 그와 친하게 지내고 싶은 마음도 별로 없고 만날 기회도 없다. 친하게 지내려면 김제동 같은 이들이 훨씬 재미있고 즐겁지 않겠는가? 

 

일체의 싸가지 없음은 배제하자. 그리고 그가 던지는 문제의식을 따라가다보면 나는 내가 놓치고 싶어하지 않는 부분과 닿는 점이 있다. '합리성'과 '독립성'이다. 내가 그와 다른 점은 그보다 '덜 전투적' 이며 '덜 자유주의적' 이라는 사실뿐이다. 내가 생각하는 정치는 때로 그것이 사실이나 진실과 관련이 떨어지더라고,의지와 힘의 문제로 돌파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여기에는 윤리적 딜레마가 늘 상존한다. 목적의 정당성과 수단의 정당성 사이의 긴장 같은 것이다. 나는 때로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폭력적 요소가 늘 그림자처럼 따라간다. 이런 폭력적 요소를 지양하도록 방향을 설정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다. 결코 순수한 형태의 합일은 도래하지 않는다. 현상적으로 목적과 수단이 동시에 정당화 될 수 있는 최소 접점을 찾고자 하는는 가치 지향만이 가능하다.  합리적 개인들의 다양한 의견 수렴이 힘을 최소한 위험을 감소시킬 수 있다는 답이 나온다. 다원적 책임을 통한 위험의 분배와도 같은 것이다. 그런데 여기는 전제에 대한 메타적 질문이 반드시 따라온다. '누가 합리적 개인인가?' 라는 원초적 문제말이다. 숙의민주주의나 의사소통민주주의에 반드시 달라 붙는 기본적 질문이다. 이 딜레마는 이런 논리에서 결코 풀리지 않는다. 내가 하버마스류의 의사소통론에 대해 크게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부분은 그것때문이다.

 

진중권이 나꼼수를 비판의 주종은 팬덤 현상과 나꼼수의 음모론이다. 나는 나꼼수가 조중동과 대적해 성공적인 대안미디어로 자리잡을 수 있었던것은 조중동이 쓰던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카운터를 날리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조중동이라는 '깡패' 에 대해 '건달'의 방식으로 MB만 노린 것때문 말이다. 만약 MB만 노리지 않고, 더 광범위하게 체제 자체를 건드린다면 대중은 어렵고,두려워서, 모이지 않는다. 언젠가 말했듯이 나꼼수 강점은 나꼼수의 약점이 된다고 말한 적도 있다. 그걸 진중권은 음모론이라고 비판하는 것이다. 나꼼수가 제기한 문제들이 사실이 아님이 밝혀지면 나꼼수는 '아니면 말고'' 내가 첨부터 그랬잖아, 소설이라고' 라는 식으로 말하고 빠져나올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런 방식은 아주 오랫동안 공공연하게 조중동과 보수언론이 써왔던 방식이다.  일단 팩트의 정확성에 대해서, 즉 나꼼수가 말하는 것이 단순히 음모인지 아닌지는 정보력과 정보량 자체가 떨어지기 때문에 지금 당장 뭐라할 수는 없다. 하지만 개연성이 있는 음모는 작은 팩트상에서 문제를 만들 수는 있지만 실제 전체적으로 사실관계의 그림을 그릴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는 가능성을 열어놓은 자세를 취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 스탠스다. 

 

진중권이 트윗에서 연일 이슈를 만드는 것은 단지 음모론때문만은 아닌것 같다. 더 큰 이유는 '팬덤현상'이다. 진중권은 이 '팬덤'을 견디지 못한다. 그가 독설을 퍼부어 세간의 관심을 끈 사건들을 보면 '팬덤'과 관련있다. 심형래의 디 워 사건, 황우석 사건 등등... 문제를 다수의 대중들이 진영논리로 가지고 판단해 버리는 것. 이것을 합리성을 추구한다는 자유주의자 진중권은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그가 '전투적 자유주의자'이다. 정치적으로 그는 '사민주의자'에 가깝다. 어떤 이는 자기가 스타가 못되서 그렇다고 하는데, 그럴 수도 있지만, 그렇게만 이야기해버리면 더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히틀러가 악마여서 파시즘이 발생했다는 것과 똑같은 논리니까. 나는 이 지점에 대해 진중권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 내가 언젠가 '오빠' 이외에 '-빠'가 되어 본 적이 없다고 했는데, 그게 그거다. 어떤 이는 진중권이 미국 소고기 수입때 앞서 나가서 선동한 걸 가지고 뭐라고 한다. 그 때 자기가 영웅되니까 가만있고, 지금은 자기가 뒷방 늙은이니까 비판한다고. ㅎㅎ  소고기 때 도대체 어떤 '-빠'가 있었을까? 진중권이 칭찬은 받긴했지만 그 시위에서는 어느 누구도 '빠'인적도,'빠'가 된 사람도 없었다. 자발적인 시민 참여였고 자유주의자 진중권 역시 개인적으로,또 소속된 당의 당원으로 참가를 한 거 아닌가? 팬덤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나꼼수의 음모론과 비키니 사건때문에 나꼼수 열풍이 이제 조금 차분해졌는가 모르겠다. 진중권은 그의 트윗에서, 나꼼수 주요 성공 원인에 '반MB-노무현-민주당' 을 들었다. 나꼼수에 몰광(내가 만든 말이다. 몰빵으로 열광하는 )하는 내 친구들도 살펴보면 대개 그 라인이다. 그것이 대중의 정치적 염원이고 현상태의 지표라면 그런 현상은 그 자체로 인정한다. 문제는 그런 현상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과 그것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합리적 정당성을 얻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나는 나꼼수 현상을 지지하고- 비록 2-3번 밖에 듣지 않았지만- 20대 청년들이 자기계발서보다 김어준의 책을 열심히 펼쳐보는 것에 박수를 보냈다. 하지만 이런 저런 차원에서 나는 나꼼수의 한계와 비판의 주머니도 차고 있던 사람이다. 그 현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았지만 열광하지는 않았다는 것이 정확하다. 이참에 나꼼수의 문제와 진영논리들을  조금 더 차분하게 바라볼 때도 되지 않았나 싶다.

 

진중권이 비키니와 관련된 최근 트윗에는 만약 '그 말을 MB가 했다면 어떻게 했을래?' 라고 반문했다. 아마 MB가 했으면, 탄핵 가자고 햇을 것 같다. 나꼼수가 사과해야 하는게 맞다. 첫번째, 사과할 만한 내용이다. 두번째, 이 문제로 발목 잡히면 곤란하다는 기술적 차원에서도 그렇지 않을까.

 

내가 고등학교 때인가 매우 궁금했던 질문이 그거 였다. "만약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대로 선량한 민족이고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라면 만약 한국이 일본을 식민지배했으면 어땟을까?"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답게, 일본인을 평등하게 살기 좋게 해주었을까?"  답은 한국과 일본이라는 문제 넘어서 있었다. 국가 폭력이나  제국주의와 식민담론이런 문제를 이해하지 못하면 ,즉 '한국 대 일본'으로 이 문제를 접근하면 오로지 '우리는 남과 달랐을거야'라는 옹색한 답변 밖에 얻지 못한다.

 

이거 매우 폭력적인 (?) 상식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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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06 14: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2-06 15: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2-02-06 14: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중권씨는 자신만의 중도좌파 잣대를 중도우~좌파 에게 일률적으로 일반화시켜 적용시키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추구하는 합리성을 이성적이라고 믿는 것 같습니다.

진중권의 냉소적인 모습을 보면 마음을 가라앉히고 논쟁을 하는게 아니라 마음에 칼을 간 상태서 논쟁을 하는 것으로만 보입니다. 제가 유추해보기로는 공부한 내용의 영향이 가장 큰 것 같습니다. 니체같은 냉소적 스타일의 철학 및 미학자들, 아류맑스식의 논쟁습관(가령,인터내셔널 내 논쟁서 심하게 몰아부쳐 낙인찍는 점),그리고 서양철학 특성에서 비롯된 한계(마음에 대한 이해부족) 비롯된 것 같습니다. 풍자가 아닌 냉소적 쾌 추구 성향, 사람의 주인이랄수 있는 마음보다 합리적 이성을 우위에 두는 사고방식, 싸우면 끝장보는 아류맑스 특유의 논쟁문화 이런게 습관화된 사람같습니다. 나이먹으며 성숙해져 논쟁 덜하면서도 상대를 설득하는 힘을 가져야하고 그게 아니면 마음의 적이라도 만들지 않아야하는데 말입니다.

진중권씨 말은 이성적으로 맞는 부분이 있을진 모르겠지만, 자기식 스타일이 아닌 사람들 마음에 벽을 만들거나 심하면 적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진보논객 중에서 진보측에게 득과 실을 동시에 가장 많이 가져다주는 인물이 진중권씨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다른 측면서 보면 10% 이하의 진보측 지지율 현상유지하는데 가장 기여하는 논객이기도 합니다.

마음을 살피지 못하는 융통성없는 합리성, 중용의 균형감이 없는 논쟁스타일은 진보측을 늘 현상그대로 유지시킬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스타일이 아닌 다른 스타일의/다른 입장을 지닌 사람들의 방법에서 배울게 많고 다른 입장의 방법으로 생각해보아야 자기스타일을 객관화시키고 균형감각을 터득해서 성장하는데, 그게 15년 동안 전혀 안됐던 대표적인 진보논객이 진중권씨라고 생각합니다. 합리성에 대한 일관적 추구성향이 매우 쎈 고수이니 그 장점을 바탕으로 마음에 대한 친화력도 보완하면 금상첨화일텐데 이 둘을 상반되는 걸로 잘못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비유하자면, 소림권 고수인 상태서 태극권 연마를 못한다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처럼 말입니다.

드팀전 2012-02-06 16:03   좋아요 0 | URL
진중권이 적을 만드는 방식에 대한 적절한 설명인듯 합니다. '논쟁도 다 사람의 일이다'라고 하는 인본적인 접근이 그에게 부족한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일단 그것은 그의 한계인지라 다른 이들이 그와 같은 방식을 취할 필요는 없겠지요. 그가 '이성적으로 맞는 부분'이 있다면, 거기서 취할 부분이 무엇인가를 구분해서 바라봐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R 슈트라우스 : 살로메 (한글자막) - 박종호와 함께하는 유럽오페라하우스 3차 명연시리즈 박종호와 함께하는 유럽오페라하우스 명연시리즈 14
나디아 미카엘 (Nadja Michael) 외 / OPUS ARTE(오퍼스 아르떼) / 2011년 6월
평점 :
품절


"마침 헤롯의 생일을 당하여 헤로디아의 딸이 연석 가운데서 춤을 추어 헤롯을 기쁘게 하니
헤롯이 맹세로 그에게 무엇이든지 달라는 대로 주겠다 허락하거늘
그가 제 어미의 시킴을 듣고 가로되 세레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담아 여기서 내게 주소서 하니" <마태복음 4:6-8>

 

오스카 와일드의 <살로메>는 세례 요한의 죽음에서 모티브를 따왔다. 성경에는 '헤로디아의 딸'로만 기록되어 있을 뿐 '살로메'라는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 성경에 등장하는 '살로메'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힐 때 그를 따라갔던 세 명의 여인 중 하나이다. 여기서 말하는 주인공과는 동명 이인인 셈이다. 사람들은 신실한 기독교인 살로메가 아니라 후자의 광기 어린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를 기억한다.

 

성경과 이 내용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도 있을 줄로 생각하고, 짧게 오래된 막장드라마의 줄거리를 적어 보자.

 

헤롯2세(헤로데)는 로마 제국에서 유대 땅에 임명된 왕이다.(그의 아버지 헤롯1세가 예수 탄생 당시 어린 아기들의 몰살령을 내린 사람이다.) 봉분왕이다. 그리고 그는 동생의 아내인 헤로디아와 결혼한다. 세례 요한(요하난)은 이를 비난한다.  헤롯이 결혼한 헤로디아에게는 살로메라는 매력적인 딸이 있다. 헤롯에게는 딸이자, 조카가 되는 셈이다. 햄릿의 삼촌 클라우디우스 왕의 원형 아닌가? "친척보단 조금 더 친하고,자식보단 조금 덜 친한" 세익스피어<햄릿>중에서.  헤롯은 살로메에게 들이댄다. 주위의 눈총에도 불구하고. 살로메는 막장 가족들과 노인네들과의 회삭이 즐겁지 않다. 우연히 세례 요한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에게 반한 것이다. (대개 가족사에 불만이 많은 회장님집 딸들이 신념과 야성을 겸비한 사람들에게 넘어간다.) 살로메는 요한에게 키스를 해달라고 요구하지만, 도덕의 현자 요한이 이를 받아들일리 없다. 공주님은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받는다. 그리고 사랑과 소유욕, 질투와 선망, 분노와 애욕이 마구 섞여 버린 미증유의 심리상태에 빠져든다. 그것도 모르는 헤롯은 여전히 껄떡거리다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해주고 만다.

이런 식이다.

 

"살로메...춤 한 번 만 춰줘. 섹쉬한 걸로다가. 나를 흥분 시켜준다면 이 나라의 반이든 뭐든...니가 원하는 거 다 줄 해줄께"

기회를 이용할 줄 아는 영악한 살로메 "좋아요. 한번 해드리지."

 

이제 오페라에서 가장 유명하며, 늘상 논란이 되기도 하는- 아리아가 아닌- 관현악곡이 등장한다.'일곱 베일의 춤' 실제로 오페라는 보러 오는 사람들이나 영상물로 이 작품을 보는 사람들도 모두 이 장면을 보기 위해 숨죽이며 막장 드라마를 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삼국지>의 '적벽대전'장면이며, <일리아드>의 아킬레우스와 헥토르 장면이다. <스타워즈>의 다스 베이더와 루크의 대결. 이탈리아 오페라로 말하자면'한방의 하이C'와도 같은 장면이다. (빈체로 빈체로..빈체...로...오....꽈꽝.) 수많은 연출가들이 오페라 관객들이 하나같이 목을 빼고 기다리고 있는- 요거 어떻게 하나 보자는 식으로 노려보고 있을- 이 장면을 과거 선배 동료들 다르게 어떻게 요리할까를 두고 전전긍긍하고 있는 셈이다.  

 

헤롯의 약속은 지켜진다. 매우 긴 살로메의 아리아."당신은 나에게 키스해 주지 않았지" 가 이어진다. 살로메의 광기에 놀라 버린 헤롯은 살로메의 죽음을 명한다. 

 

<살로메>(비어즐리 작)

 

사람에 따라 다르긴 하겠지만, 오페라를 처음 접하는 사람이 바그너의 악극<반지>나 리하르트슈트라우스의 <살로메>, 바르톡의 <푸른 수염의 영주>같은 작품들을 택할 확률은 매우 낮다. 설사 있다 하다면, 매우 우연한 기회에, 특정한 음악적 환경 속에서만 이루어질 것이다. 자발적으로 오페라에 관심을 가진 대부분은 모차르트, 푸치니, 베르디를 먼저 만난 확률이 높다. 그렇기 때문에 오페라가 뭔가 하고 궁금해 하는 사람에게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를 권하는 짓은 순서가 아니다. 인연이 닿으면 만나겠지 하는 정도에서 남겨 두어야 한다.

 

 언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장을 역임한 이강숙 선생이 그런 말을 했다. "17,8세기에 귀족사회에서 음악을 소비할 때는- 하이든,모차르트 등등- 조화로운 화음 가지고 표현이 가능한 것이 많았다. 하지만 19세기를 거쳐 20세기에 들어서는 시점에서도 과연 그런가? 대중속의 고독, 전쟁과 인간성의 파괴 뭐 이런 것들 어떻게 조화로운 화음들로 구성해낼 수 있을까? 불협화음,조성의 파괴 등이 표현의 영역을 확장하는 것이다. " 이강숙 선생의 말은 우리 시대는 우리 시대를 표현하는 음악적 노력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궁극적 요지였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1864-1949)의 시대는 그리 멀지 않다. 동시대라고 하긴 뭣하지만 최소한 현재에 영향을 미치는 전 세대라고는 할 만한다. 빈의 황금기였으며, 구 제국의 몰락과 두 번의 세계 대전이 있었던 시대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관현악이 뿜어내는 위용에는 파괴와 절망, 그리고 영광에 대한 노스탈이지와 그의 잔해가 묻어 있다. 그가 오스카 와일드의 <살로메>를 두고 "오스카 와일드의 희곡은 음악을 필요로한다." 라고 했을 때, 그가 매료된 '살로메'의 주제는 에로스와 타노토노스의 항구적 불협화음이었다. 오페라<살로메>는 그렇게 파국적 주제를 음향학적으로도 구축해 낸다. 여기서 한가지 알아야 할 사실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쇤베르크와 신빈악파에 비해 온건한, 즉 음악적으로 보수주의자였다는 사실이다. 그가 만든 <살로메>에서 보여주는 음향학적 파국은 대단히 낭만적이고 퇴폐적이다. 이것은 새로운 설계를 위한 파괴와는 다르다. 구체제의 파국일 뿐이다. 도약과 단절의 진폭은 매우 제한적일 수 밖에 없다. 그의 관현악 전반은 그리하여 음악의 통시적 변동 속에서 반정합을 통합적으로 조율하는 전통적 헤겔식의 바그너와 닮아 있을 뿐이다. 실제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바그너를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이 오페라 <살로메>에서도 보면 바그너식의 '라이트모티브', 일명 '유도동기'가 거의 전편에 사용된다. '유도동기'를 쉽게 말하자면, 극이 진행되면서 인물이나 상황이 등장할 때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멜로디이다. 만약 영화<해리포터>라면, 악당 볼트모어가 등장할 때는, 뭔가 음습한 음악이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것이다. 이 '라이트모티브'는 바그너가 본격적으로 사용한 장치인데, 실제로 바그너의 악극에는 다양한 종류의 모티브가 다양한 조성,화음,속도변화들 통해 쓰이고 있다. 오페라<살로메>에서는 쉽게 들을 수 있는 클라리넷 소리가 '살로메'다. 목관악기의 부유하는 듯한 멜로디는 불안을 조성하고 정서적 동요를 일으키는 데 적격이다. 곡이 시작하면 곧 바로 등장하기 때문에 크게 귀기울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오페라<살로메>의 2008년 런던코벤트가든 공연 실황은 동곡의 영상물로서 최고의 찬사를 받고 있다. 런던 오페라계의 이슈메이커인 데이빗 맥비커의 히트작인 셈이다. 무대의 배경은 1930-40년대 대저택의 지하 음식 창고로 설정했다. 의상사를 잘 알지 못하지만 영화에서 본 기억을 떠올려 본다면, 무대에 등장하는 헤롯의 군사들은 영국 군복을 입고 있다.(이 프로덕션이 영국에 있다는 걸 생각하면 더욱) 무대는 3층 구조이지만, 지하는 세례 요한의 감옥 공간으로 설정만 될 뿐 무대에 가시화되지는 않는다. 2층 역시 실제로 큰 비중을 차지 하지 않는다. 2층에서는 유대 제사장들과 헤롯,헤로디아가 만찬을 열고 있다는 설정 공간으로만 존재한다. 전체적으로 푸른 빛의 일관된 톤은 지하실 창고의 분위기와 적절하다. 영화에서 지하철같은 폐쇄공간에서 쓰이는 조명의 톤을 생각해본다면 쉽게 이해될 것같다. 색채 공간으로 3개의 층위를 구분하자면, 세례 요한의 공간은 죽음과 맞닿아 있는 검은 색의 공간이다.검은 구덩이로만 묘사된다. 그리고 본 무대인 지하층은 갈등이 빚어지는 서늘한 푸른 빛의 공간. 2층은 검고 붉은 계열로 구분된다. 무대는 단막극 형식을 띠고 있기 때문에 전체적 변화나 막에 따른 교체는 없다. 단 한 번 일곱개의 베일춤에서 상징적 이동장면을 연출한다.

 

 : 코벤트 가든 로얄오페라 하우스, 오페라 <살로메>중에서

 

<살로메>는 전통적으로 외설성때문에 가십거리가 되곤 한 오페라다. '일곱개의 베일춤'의 전통적 해석방식은 춤을 추면서 옷을 한 개 씩 벗는 스트리퍼 살로메로 설정된다. 맥비커는 코벤트가든 프로덕션에서 상징적으로 에로틱한 장면만을 연출할 뿐이다. 공연 막이 오르면 지하창고에서 보이던 나체의 여인이나 멋진 뒷태를 가진 형집행자의 나체는 맥거핀에 가깝다. 일곱개의 춤에서 나디아 미카엘은 속옷정도까지만 노출하면 되는 수위에서 공연한다. 전혀 아쉬워 할 것도 없다. 나디아 미카엘은 비교적 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연기력과 놀라운 집중도를 보여준다. 피칠갑을 한 채 요한의 머리통을 들고 마지막 아리아를 부르는 나디아는 작은 동작 하나 하나까지 관객을 집중시킨다. 죽은 요한과의 키스장면은 잠시 숨을 멎게끔 매력적인 연출이다. "이것은 피의 맛인가? 아니 사랑의 맛이다."라며 요한의 잘린 머리통을 부여잡는 나디아의 눈빛과 동작은 네크로필리아의 파국적 에로스를 보여준다. 물론 성량에서 약간의 중량감 부족이 주는 아쉬움은 남는다만 광기와 절망 사이를 오고가는 연기력으로 충분히 상쇄하고도 남는다. 개인적으로 가장 아쉬운 연기는 헤로디아를 맡은 미하엘 슐스터다. 시니컬한 태도의 일관성은 충분히 훌륭하나 공격적인 어택이 부족한면, 연출이 그 지점을 강조하고 싶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만, 개인적으로 그 지점이 아쉽다. 또한 마지막 명령이 집행되는 장면 역시 앞선 비장한 나디아의 클라이막스 이후 급박하게 정리한다. 개인적으로는 조금 더 사실적인 살해가 이루어졌어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앞서 잠시 이야기한 '일곱개의 베일춤'에 대한 연출이다. 곡은 이국적 춤곡에서 왈츠를 넘나든다.  당시 유럽인들이 가진 동양에 대한 오리엔탈리즘은 문화 전반에 걸쳐 반영되었으며 음악도 예외는 아니었다. 맥커비는 탈의라는 전통적인 방식을 거부하고 영상과 막의 이동을 통해 일곱베일을 벗는 장면을 상징적으로 연출한다. 무대 뒤 스크린을 통해 에로스적인 설정들이 전달된다. 전체적으로 보면 맥키비의 연출 장면을 단순히 옷을 벗으며 춤을 춘다는 시각적 쾌락 이상을 상징한다. 전통적 방식이 시각적 쾌락수준에 대한 욕망 정도로 머무는 것이라면 맥커비의 연출에는 복종과 순종이라는 성의 가학성/피학성의 쾌락이 은연중에 묻혀있다. 상징적으로 표현되었을 뿐 수위가 더 높은 것이다. 헤롯은 멍청히 음흉한 눈빛으로 소파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구를 충족 시키기 위해 살로메를 독촉하고,동의를 구하고, 패티시의 대상들을 제공한다. 살로메는 자신의 1차적 욕망를 위해 이에 수동적으로 움직이지만, 이 행위들은 음악적 진행과 섞이며 능동/수동의 구분이 모호한 상태에 이른다. 헤롯이 제공한 옷을 던지며 세면대에서 물을 뿌리는 행위는 그들의 상징적 교접이 성공적이었으며, 또한 마무리 되었음을 말한다. 그들 둘은 그리고 다시 대중들이 있는 공간으로 '흠흠...' 거리면서 나온다. 몇 개의 옷을 벗어 던지는 것보다 더 깊은 관계가 아닌가?

 

세간의 평가처럼 2008년 코벤트가든의 <살로메>는 맥커비의 상징적 연출과 탄탄한 연출 그리고 가수진들의 활약으로 매우 좋은 공연물로 평가받을 만하다. 만약 실제 극장에서 이 공연을 봤다면, 마지막 나디아 미하엘의 아리아가 끝나고 암전이 올 때 브라보를 외치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당분간 최고의 레퍼런스로 자리잡지 않을까 싶다.

 

여담삼아, 극중 등장하는 제사장 중에 동양인이 한 명 보인다. 비중이 큰 역은 아니지만 로얄오페라단의 지원을 받는 촉망받는 한국인 성악가 박지민씨다. 그에 관해 찾아봤는데 재미있는 이력을 갖고 있다. 매우 뒤늦게 성악공부를 했으며, SM기획에서 연습생도 해보았다고 한다. 서울대 성악과 사상 낙제점에 가까운 보기드문 B학점 소유자였다고 한다. 국내의 높은 진입 장벽으로 인해 오히려 국외에서 가능성을 인정받고 이후 국내 주목을 받게된 성악가인 셈이다. 이 공연을 녹화할 당시보다 현재 여기저기서 비중있는 역할을 많이 맡아 세계를 무대로 공연하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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