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무슨 말들을 하는지 집중하고 보려고 해도 넉줄 이상 읽기가 힘들다. 원래 없던 관심을 갑자기 키울 수도 없는 법. 하던데로  눈팅과 무관심의 역학 법칙을 지속하기로 한다. 복학생 형님 같은 전지적 위로 따위는 오글거려서 어차피 체질에 맞지도 않으니 더 말할 것도 없고.

 

2.문득 책장의 책을 뒤적이다 눈에 들어온 문장.

 

사유,/즉 자신의 강압 메커니즘 속에 자연을 반영하고 되풀이하는 사유는/ 자신의 철두철미함 덕분으로 /스스로가 또한 강압적 메커니즘으로서의 /'잊혀진 자연'임을/ 드러낸다.  <계몽의 변증법> 중에서...

 

/ 표기가 되어있다. 문장이 잘 안들어올 때 밑줄 긋고 다시 문장을 나누어 읽으며 하는 짓이다. 문장이 안들어오는 이유는 이해부족도 있겠고, 그 문장을 읽던 당시 딴 생각을 해서 일 수도 있다. 음악에 잠시 귀를 기울인다거나, 뭔가 성적인 생각을 한다거나, 업무와 관련된 일을 미리 시뮬레이션한다거나...하여간 딴짓이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은  클래식이다. 니체나 벤야민,아도르노 같은 이들의 글을 보고 있으면 좌절감이 생긴다. 이런 사유에 이런 문체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은 도대체 어떤 인간들인가 하고 말이다. 

 

3. 오늘 낮, 회사 자료실에 들렀다가 <한겨레21>을 잠시 열어봤다. 지난주 것 같았다.<건축학 개론>이 특집이다. 결국 '세대론'의 반복인 셈이다. 90년대의 소비세대의 문을 연 신세대가 자라나서 이젠 복고적 소비중심축으로 등장한 셈이다. 문화시장의 트렌드가 7080세대에서 이제 90세대로 넘어온다는 뜻이다. 징후는 <나는 가수다>의 폭발적 인기부터 예감된 것이다. <건축학 개론>은 이를 명백히 가시화시켰다. 

 

<건축학개론>의 첫사랑 이야기 속에 윤대녕의 <상춘곡>의 한 문장이 인용되었다. <상춘곡>이라는 단편은 분명히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그저 윤대녕의 희미한 그림자일뿐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를 처음 알게된 작품<천지간>은 TV문학관에 나온 심은하와 김상중 때문에 유독 기억이 생생하다만. 하여간  기자가 인용한 글은 이거다.

 

"이제 우리는 그것을 멀리서 얘기하되 가까이서 알아들을 수 있는 나이들이 된 것입니다. 그러고 난 다음에야 서로의 생에 다만 구경꾼으로 남은들 무슨 원한이 있겠습니까. 마음 흐린 날 서로의 마당가를 기웃거리며 겨우 침향내를 맡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된 것이지요......당신은 여인이니 부디 어여쁘시기 바랍니다."

 

......

뭐라고 해야할까?  기쁜 마음이 들었다. 드디어 20대 아니 이후 30대 어느시절, (워낙 철이 늦게드는 사람이라) 나이 들어 만나고 싶던 그 지점에 도착했다. 비로소. 오는 길이 쉽지 만은 않았지만 그래도 건강하게 이렇게 왔다는.  늦었나 싶어 부끄럽기도 하고 머쓱거리며 대견스럽기도 하다는.

 

물론 나는 앞으로도 더 떨릴테고, 그 떨림을 자책과 자부심으로 안고 운명처럼 살겠지만, 저 문장을 읽고 난 뒤 내게 밀려온 감정은 그거였다. 이제 거기까지 왔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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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YLA 2012-04-19 2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80년대 중반생인데 90년대가 2000년대보다 더 친숙해요. 90년대엔 초중딩으로서 맘껏 텔레비전도 보고 언니 오빠들 쫓아다니며 놀았는데 고등학교 들어가고 나니 공부하느라 누가 가요프로 1위 하는지도 모르겠더라구요. 3월 초에 유희열의 스케치북이 90년대 특집하는데 입을 헤 벌리고 봤죠. 드팀전님의 그곳에 다다른 그 마음이 이해간다고 하면 혼날려나요? ㅋㅋㅋ

드팀전 2012-04-20 09:40   좋아요 0 | URL
제가 좀 느려서 그런 거니까 전혀 문제될 꺼 없습니다. 모든게 육체적 나이와 정비례관계로 가는 것은 절대 아니니까요. ㅎㅎㅎ
 

 

"네가 싸우는 상대는 알기 쉽지. 하지만 네가 왜 싸우는지는 알기 어렵다."

 

켄 로치의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에 나오는 말이다.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저 대사가 쓰인 장면이 주인공의 사형 집행 전날이라는 것을 기억할 것이다. 영화의 내러티브 자체가 혁명의 역사,또는 정치의 역사에서 이루어지는 요소들을 압축해 놓았기 때문에 더욱 의미심장하다.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앞으로의 이야기를 맥락적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요즘 여기저기 들여다보면, 이 둘 다 너무 잘 아는 사람이 너무 많다. 그리고 그것이 미력한 내겐 오히려 불편하다. 특히 두 번째 질문에 반사적으로 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결코 신뢰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진실을 말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쉬운 일이된다. 그것을 어렵게 하는 것은 외부적 억압때문이지 진실 자체 때문은 아니다. 억압이 어렵게 만드는 것이지 진실이 어렵게 만드는 것은 아니란 말이다. 이 시대에 누군가 진실에 대해 말한다면 그에게 씌여질  처방전은 '히스테리'이거나 '분열증'일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누구나 진실을 말하는 데 그는 진실에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그 중 최악은 넘기는 책장에 따라 주체를 주채하지 못하는 일부 독자들이다. 혁명가의 책을 읽는 순간 검은 깃발 아래 설 듯 말한다. 그리고 다음에는 붉은 깃발이 그의 머리 위에 있다. 다른 종이뭉치를 끝내고 나면 그는 녹색 휘장을 두르고 휘파람을 불고 서있다.  말을 바꾸어 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로지 문자적 감응을 즉각 즉각 배설하고 있을 뿐이다. 이 과정이 시간의 발효 속에 제대로된 장이 될 수도 있겠지만, 습관적 위장 장애로 인한 설사에 지나지 않을 경우도 많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럼에도 거기에 열광한다. 장인지 똥인지 아직 알 수 없지만 그곳에 오로지 포토샵을 하지 않아도 날것으로 어여쁜 단어들이 있기 때문이다. 오로지 아름다운 말들로,또는 가정된 진실로 그 말들이 '진실로'-여기서 '진실로'라는 말은 본인도 결코 의식하지 못하는 순수한,또는 순진한이라는 차원이다.- 도배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유, 민주, 평등, 우정, 사랑, 정의, 관용, 조화..... 이 모든 말들은 입에 달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어찌 이 자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런 가치가 마뜩치 않다고 고개를 저을 수 있는 사람은 과연 누구인가?

 

나는 아직은 잘 모르겠다만,

영화<대부>에 돈 꼴레오네의 말은 참고 삼을 수 있을 듯 하다.

 

"모임을 주선하겠다고 내게 오는 놈, 그 놈이 배신자다." (로저 에버트 <위대한 영화>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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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가게재습격 2012-04-05 0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해자가 피해자의 얼굴로, '순진한 피해자'의 얼굴로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자기정당화와 변명이 화려한 수사와 혁명의 언어로 전치하는 것 같고요. 건강하시죠? 안부글 남기러 들렀다가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되는 글 읽고 갑니다.

드팀전 2012-04-05 09:02   좋아요 0 | URL
^^ 반가와요. 부산에는 벚꽃이 피기 시작했습니다.
 

1.  바흐의 <무반주 첼로모음곡 1번 BWV 1007>을 듣는다. 첼리스트 요요마가 이곡의 영상화 작업을 통해 봄 그려내려고 했던 이유가 어슴프레 기억난다. 도시 구석 구석에 작은 햇살조각이 뿌려질 것 같다. 바흐의 악보들 사이로, 현이 울려내는 공명들 사이로 나풀거리는 나비를 상상한다.'뻘밭 구석 이나 썩은 물웅덩이 같은데를 기웃거리다' 온 것 같다. 그럼에도 특유의 미소와 온화함을 잃지 않는....

 

에밀 시오랑은 '바흐가 없었다면 신은 권위를 잃었을 것이다' 라고 썻다. 이 말을 다시 쓰고 싶어진다. '바흐가 없었다면 인간은 자존을 잃었을 것이다.' 라고 말이다. 

 

2. 리뷰가 안써진다. 아니 쓰기 싫어진다. 리뷰나 글을 쓰는 행위도 물리법칙에 적당히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유비적인 사실같다. 한동안 리뷰나 글을 쓰지 않다보니 이젠 그런 욕구마저 현저히 감소되었다는 것을 느낀다. 가장 결정적인 것은 이성의 간계이다. 리뷰 자체가 주는 효과와 기회비용를 비교한다는 것이다. 실제 대단치 않은 리뷰 한 편을 쓰는데도 1-2시간은 소요된다. 예전에는 그것 나름의 효용에 만족을 느꼈다. 그런데 분명 효용은 체감의 법칙을 따른다. 리뷰를 쓰는 시간에 다른 일을 하고 싶은 것이 많다. 영화 한 편을 볼 수 있고, 책도 꽤나 진도를 내어 읽을 수 있다. 그것도 아니면 지난 책들을 뒤적이며 정리를 해 볼 수도 있다.(이 작업은 올해 습관적으로 꼭 해보고 싶다. 최근에 쓴 몇 편의 리뷰도 그 와중에 쓰게 된 셈이다.)

 

그런데 정작 리뷰를 쓰지 않으며 확보된 시간에 그에 대체될 만한 유용한 일을 하는 것만도 아니다. 인터넷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다가 그 시간을 허비할 때도 있고 영화 인터넷 사이트에 들어가서 도색적인 스샷을 기웃거리다 끝날 때도 있다. 

 

그럼에도 그 시간을 책을 읽고, 또 어떤 문장은 매우 공들여서 고민해보고 하는 시간을 갖지 못한것에 대한 아쉬움은 남지만 리뷰에 대한 아쉬움은 별로 없다. 그래서 자꾸 리뷰와 멀어져 간다.

 

그나마 리뷰라도 써야 글 쓰는 것을 잊어버리지 않을텐데...

 

 

3. 최근에 알튀세르의 <재생산에 대하여>를 읽었다. 알튀세르는 대학교 때 여기저기서 공부한 경험이 있다. 온통 문화나 담론의 영역에서 놀 때마다 이런 것들은 나를 끌어내려 주는 중력이다. 니체적인 의미와는 반대로 긍정적인 의미다. 나는 이걸 주기적으로 반복한다.  시지프스같은 방식이다. 물론 내가 애정을 가진 철학자나 분야들도 있다. 그들의 사고와 사고 방식들. '유용한' 이란 단어는 미흡하다. 그들의 사고와 문장들 그리고 사유의 방식들은 크고 작건간 '혁명적'이다. 그들의 고지에서 미흡하나마 문제의식을 나눈다. 그리고 다시 또 내려오고, 또 다시 그들에게 올라간다.

 

알튀세르의 <재생산에 대하여>는 무지막지하게 어려운 책은 아니다. 대학교 다닐때 교수는 칠판에 자주 '건물'을 그려서 이걸 설명했다. (우리는 축구장이라고 불렀다.) 간략하게 도식화해서 그려낼 수 있을 정도로 체계적으로 서술된다.  

 

생산양식= 생산력 + 생산관계 

 

상부구조/하부구조

 

상부구조의 자율성

최종심급의 경제적 토대

 

억압적 국가장치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이데올로기 일반

알튀세르 이데올로기론

1)이데올로기의 물질성

2)이데올로기의 호명.

3)주체화의 문제

 

보론) 1)생산력에 대한 생산관계의 우위

        2)계급투쟁의 우위

 

<재생산에 대하여>은 책의 구조 자체도 매우 효과적이다. 자크 비데의 서문/ 알튀세르의 본문/보론(비판에 대한 반비판 성격) / 70년에 나온 유명한 에세이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이다. 마지막 에세이는 전체 <재생산에 대하여>에 대한 알튀세르 자신의 요약본이기도 하다. 많은 시간을 쓰고 싶지 않다는 사람은 마지막 에세이와 비판에 대한 반비판 성격의 보론 부분만 읽어도 된다. 

 

번역을 논할 정도의 수준은 아니라서 그저 인상비평정도지만. 오탈자가 눈에 띈다. 그리고 문장 자체가 어법에 껄끄러운 것이 꽤 있다. 좋은 번역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과연 이것이 좋은 번역인가라고 묻는다면 망설이게 될 것 같다. 그렇다고 일반독자가 비문때문에 알튀세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라고 할 정도는 아니다. 

 

4. 바흐의 무반주 첼로 조곡 6번의 가보트...연주자는 오필리아 가이야르.

 창 밖은 이미 봄인데

 도대체 뭐 하는 거지

 청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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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de 2012-04-01 0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ola!

드팀전 2012-04-02 17:59   좋아요 0 | URL
^^
 

기대를 안고 페이퍼를 썻다가 약간의 성질과 함께 지웠던 적이 있다.(요즘은 뭐 끄적였다가 많이 지우는 편이다. 삭제된 페이퍼에는 제각각의 이유가 있다.ㅋㅋㅋ) 벨라 타르의 <토리노의 말>에 대한 것이었다. 개봉 소식을 듣고 "그래!" 하면서 기대의 페이퍼를 썼다. 그런데 곧 실망의 페이퍼가 되고 말았다. 지방에서는 볼 수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내가 맞다면 국내 오직 단 한 곳에서만 개봉했다. '아트 하우스 모모'

 

'약간의 성질'의 원인은  '개봉'이라는 기대감과 '단 한 곳의 개봉관'이라는-더 있을 수도 있겠으나 내가 아는 바로는- 추정된 '사실' 사이의 낙차 때문이다.

 

어떤 분의 페이퍼를 보다가 그 때 생각이 나서....하여간 그렇다는거다. 

 

 라스 폰 트리에감독의 <멜랑콜리아>의 오프닝도 매우 유명했다. 친구들만을 위해 열어놓은 페이스북에서는 꽤 오래전에 언급한 적이 있었는데.ㅎㅎ 두 영화를 보면 비동시성의 동시성 같은 것을 느낀다. 고전 영화를 연상시키는 흑백의 롱테이크와 패션잡지의 화보와도 같은 감각적 느린 영상. 벨라 타르의 음악은 스코어였고 폰 트리에의 음악은 바그너다.

 

벨라 타르 감독의 <토리노의 말> 오프닝의 독백이 니체 이야기이다.

 

 

http://youtu.be/v32n4lCG0OA

 

라스폰트리에 감독의 <멜랑콜리아> 오프닝, 음악은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서곡이다.

 

 

http://youtu.be/2kP-vuOy8c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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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개인주의 신화
이언 와트 지음, 이시연.강유나 옮김 / 문학동네 / 2004년 9월
평점 :
품절


'4대천왕' 이라는 말이 있다. 그 시작은 8-90년대 홍콩,대만 영화의 젊은 배우들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여명,장학우,유덕화,곽부성'이 그들이다. 이 말은 불교에서 동서남북을 관장한다는 사천왕상에서 그 모델명을 따온 것이다. 지금은 이 단어는 '한류4대천왕'이니 '얼짱 4대천왕'이니 해서 반복된다. 팬들 사이의 갈등은 대개 네번째 인물의 선택여부를 두고 발생한다. 즉 대개가 3번째까지는 비슷한 공감들이 형성한다. 문제는 늘 마지막 탑승자다. 궁금하다 싶으면, 걸그룹 4대천왕을 주위 사람들과 한번 논의해보시라.  

 

이안 와트의 <근대 개인주의 신화>에도 4대 천왕이 나온다. 그의 분석에 설득력을 부여할 문학사의 살아있는 유명 캐릭터들이다. 그 역시 네번째 인물의 선정 과정에 고민한 흔적이 보인다. 통상적으로 많이 뽑히지만 이안 와트에게서 보딩패스를 받지 못한 인물은 고뇌하는 인간 '햄릿'이다. 그가 페르소나 논 그라타(외교상 기피인물)이 된 이유는 햄릿이 지식인층에 유독 사랑을 받는 매니아적 인물이라는 것때문이다.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이 책과는 관련이 없는 내용이므로 이 정도에서 지나가는 것이 좋을 성 싶다. 

 

 이제 저자가 선정한 4대 천왕들을 살펴보자. 면면은 이렇다. 악마와 거래하는 파우스트, 늙은 기사 돈키호테, 바람둥이 돈 후안, 무인도 표류자 로빈슨 크루소. (아무래도 '돈 후안'은 도덕적 이유때문에 도서 선정위원들의 기피인물이 아닐까 싶다. 그 덕분에 우리는 돈 후안에 대해 잘 모른다. 개인적으로도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조반니>와 조니뎁과 말론브랜도가 나온 영화<돈 주앙>밖에 보지 않았다.)저자는 이들이야 말로 '근대문학을 통과하며 개인주의를 반영하고 신화가 된 네 명의 남자들'이라고 단언한다. 로빈슨 크루소의 꽤재재함이나 돈키호테의 앙상함이 이미지적으로는 아이돌 4대천황의 위용만은 못하다. 그러나 이 옹색해보이는 늙은 인물들이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의 아이돌들보다 훨씬 오래 살아남고 빛을 발할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근대 개인주의 신화>는 총 3장(르네상스와 반종교개혁기/낭만주의/20세기)으로 구성된다. 각 장의 마지막에 구체적 작품 분석을 넘어서 시대적 흐름과 몇 가지 개념형들에 대한 이해, 전체적 윤곽을 파악하는데 긴요한 평론이 실려있다. 이언 와트는 서문에서 이 책이 통사적인 연구임을 밝힌다. 4명의 인물은 최소한 그 시대의 어떤 흐름들을 반영하고 또 동시에 변형되어 왔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반영론이 늘 환영받는 것은 아니고 정당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예술이라는 것은 시대적 속성을 갖고 있긴 하지만 또 그것을 초월하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반영론이든 초월론이든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는 것만큼 비평의 진폭을 크게 가져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안 와트는 이 4명의 인물의 성격과 위치들이 16세기와 17세기를 거치면서 어떻게 변모되어 가는지를 따라가고 있다. 그것을 통해 애초 이 인물의 탄생의 기원과는 매우 다른 현재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이 인물들에게 변화를 가한 사회적 영향력들을 고려하게끔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인물들은 -시기적으로는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반종교개혁기라 불리는 반동적 시기에 태어났다.

 

파우스트,돈키호테,돈 후안은 모두 르네상스의 적극적이고 개인주의적 욕구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뜻대로 나아가고자한다. 그래서 그들은 이념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반종교개혁 세력과 갈등하게 된다. <근대 개인주의 신화>(P.15)

 

이 인물들이 사회와 '갈등'한다는 점이 촛점이다. 이안 와트는-왠지 이름부터 영국 탐정 샬록 홈즈의 향기를 뿌리지 않는가?- '갈등'의 양상 속에서 네 인물들이 반동적 종교개혁기를 뚫고 낭만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어떻게 문학 속의 신화가 되어가는지를  그 흔적을 추적해 나간다. 대표적으로 괴테의 <파우스트>로 정착된 '파우스트박사'이야기를 보자. 파우스트 이야기는 16세기 전반부 흑마술사 게오르크 파우스트라는 인물로 부터 시작된다. 마술에 적대적이었던 당대의 인문학자들의 글을 통해 그의 존재가 확인된다. 그는 스스로 '파우스트의 후계자' '제2의 마구스'라고 칭하고 다녔다. 실제 마술사로서 작은 성공을 거두기도 했지만, 남색가라는 둥 유아 성애자라는 둥 사기꾼이라는 둥 세간의 혹평도 안고 있었다. 이안 와트는 당대 인문학자들이 점성술사나 영지주의적 마술사의 후계자라고 지칭하는 자를 언급하고 공격한 것에 실마리를 얻는다. 

 

학자들은 실존 인물로서의 게오르크 파우스트가 말로와 괴테의 작품에 나오는 주인공의 모델로  

얼마나 부적절한지 밝히는데 집중해왔기 때문에,실존 인물 파우스트가 어떻게 해서-나름 졸렬한 방식으로 나마-신화를 생겨나게 한 주요 세력들에게 매혹적인 상징이 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그다지 주목하지 못했다. <근대 개인주의 신화>(P.32)

 

이후 파우스트를 악마와 연관하여 부활시키는데는 루터파가 큰 역할을 한다. 루터는 기본적으로 신의 세계 속에 부정의 대상으로 악마성의 존재를 인정했다. 인문학자들이 이성의 힘에 의해 마술적 권능을 부정한데 비해 루터파와 기독교는 그런 '힘'이 있으며 그것이 이원론적 세계 속에서 악은  악마와의 거래를 통해 이루어진 것으로 구상화해낸다. 이안 와트가 떠돌이 실존인물인 게오르크 파우스크가 신화 속의 전설족 존재로 만든 가공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때문이다.

이후 1587년에 괴테의 <파우스트>의 원전이라 불려도 손색없을 <파우스트 서>가 독일에서 출간된다. 몇 가지 원형들이 이 때 만들어지다.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스의 성격부여, 욕망의 부정,기독교적 징벌메커니즘, 계약과 이행에 대한 강조 등이 그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16세기 기독교의 확산과 개인주의의 도래하에 '교훈주의'가 강조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후 영국의 크리스토퍼 말로의 <파우스트박사의 생과사의 비극적 역사>가 등장한다. 이안 와트에 따르면, 크리스토퍼 말로가 당대 대단히 파격적인, 파우스트적 인간이었다고 한다. 그가 파악하는 말로의 파우스트 신화 요체는 세가지로 요약된다. '개인의 직업선택, 대학 지성의 소외, 영혼의 영원한 파멸'이 그것이다. 흔히 파우스트를 '지식인 신화'의 대표적인 양상으로 꼽는 것이 말로의 공헌인 셈이다. 흥미로운 것이 '영혼의 영원한 파멸'이다. 이것을 이안와트는 종교적 분위기 하에서 개인주의가 반응한 위악적 선택의 결과로 바라본다. 즉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의 열망을 이어받았으나 실현될 수 없는 세계에 대한 복수와도 같은 것이다.

 

'아, 피타고라스의 윤회설이 진실이라면 내 영혼은 나를 떠나고 나는 야만의 짐승으로 바뀌련만. 모든 짐승들은 행복하도다. 죽으면 그 영혼은 곧 스러지나니' <파우스트박사의 생과사의 비극적 역사 5막 2장>

 

이안 와트는 반종교개혁기의 통제된 개인주의의 욕망이 신이 주었다고 하는 불멸의 영혼에 사망선고를 내리는 형식으로 일종의 복수를 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는 클리언스 브룩의 결론을 재인용하며, 파우스트가 자신의 개인성을 유지한 것이 '그의 영광이자 파멸' 이라고 말한다.

 

청교도 윤리에 질식당한 주인공들은 부르주아 낭만주의 시대를 거치며 개인주의의 도래를 알리는 신화화된 인물로 변모된다. 이안 와트는 이 시기에 원작자들의 의도를 초월하는 의미를 얻는 단계로 이행된다고 말한다. 먼저 <근대 개인주의 신화>에서는 이런 대표적 경향으로 디포의 <로빈슨크루소>를 예로 든다. 경제적 개인주의, 현실적이고 실리적 철학, 노동의 강조, 고립, 자기중심성, 종교적 개인주의(근대적 개인에게 종교는 '일요일의 종교'라는 말로 중세적 의미에서 추락한다.) 등의 특징을 갖는 주인공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저자는 루소의 개인주의적 고립상태 ,마르크스의 노동과 여가,헤르더의 낭만주의 신화 등의 아이디어를 로빈슨 크루소의 특징을 설명하는 개념적 도구로 사용한다. 파우스트는 그럼 어떨까?  드디어 괴테의 손에 의해 인류의 고전으로 탄생하는 계기를 맞게 된다. 먼저 이안 와트는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파우스트의 '완전한 감정능력'에 관심을 갖는다. 그것은 "산다는 것의 의미"를 완전하게 이해하는 것이며 "나 자신의 자아를 무한히 뻗어 모든 인류의 자아를 끌어당기기" 를 원하는 일이다. 저자는 괴테에 있어 파우스트가 1/2부 사이의 구성적 절연 속에서도 '진정한 자기중심적 탐색'이라는 과정을 멈추지 않는다고 분석한다. 이 시기에 특히 부각되는 파우스트의 특징 중 하나는 '낭만적 사랑'이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이율배반적인 부분이 있다. 현실적으로 여성은 비천한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대신 그에 대한 반대 급부의 상상적 효과가 바로 '구원녀'식의 낭만주의적 여성관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저자는 이외에도 괴테의 파우스트가 갖는 근대적 인간형의 증거 수첩에 변증법적 통일성 개념, 지적 엘리트주의, 경험과 행위에 대한 끊임없는 추구 등을 추가로 기록한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20세기의 파우스트, 토마스 만의 <파우스트 박사>의 아드리안 레버퀸을 만나게 된다. 토만스 만의 이 소설은 당대 독일 역사에 대한 비극적 패러디의 운명을 갖고 있다. 이안 와트는 토마스 만에게서 '징벌적 개념'이 다시 부각되는 것을 읽는다. 하지만 이것은 과거의 종교적 의미와는 관련이 없다. 독일의 역사적 죄과에 대한 토마스 만의 신념이다. 괴테의 파우스트가 궁극적으로 구원이라는 통합을 얻어내는 반면 만의 주인공은 그렇게 되지 못한다. 저자는 아드리안 레버퀸이 '가장 부정적이고 불쾌한 형태의 개인주의를 자기중심적으로 구현하는 인물'이라고 설명한다. 특히 그가 '진살과 개인' 모두에 등을 돌리는 형태를 나치즘과 연결시킨다. 즉 개인주의적 극단의 선택이 가장 반-개인적 신념에 봉사하는 아이러니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를 통해 토마스만은 '파우스트와 독일의 동질성'을 연결시키고 있다고 저자는 보고 있다.

 

파우스트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요약했지만, 이 책<근대 개인주의 신화>의 주인공은 앞서 말했다시피, 파우스트,돈키호테,돈후안,로빈슨 크루소 이렇게 4명이다. 저자는 이들의 탄생부터 즉 반종교개혁기-낭만주의-근대를 '개인주의'의 형성을 둘러싼 갈등과 통합의 드라마로 설명한다. 이 주인공들은 탄생의 시기도, 지역도, 변화 양상도, 극중 캐릭터도 모두 차이가 있다. 저자는 이 잘나고 이기적인 인물들 중 라만차의 돈키호테 캐릭터에 사랑을 표현한다. 시대와 갈등하는 이 인물 중 가장 매력적이라는 것이 이유다.(그렇지 않겠는가?)  다양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안 와트는 결론에서 궁극적으로 이들을 묶는 개인주의의 슬로건을 "나란 놈 단지 생겨먹을 대로 살아갈 것이다." 로 요약한다. 현대를 사는 우리들 역시 주위에서 흔히 듣는 말이다. 결국 이 4명의 인물들은 어떻게든 현대를 사는 우리들의 내적 심성 또는 가치관의 일부를 선취하고 구현한 부분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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