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사물과 상호작용하기 위해 사물에 대한 '마음의 모델(mental model)'을 먼저 구축합니다.

사용자는 이전에 학습하고 훈련했던 경험을 통해 사물이 어떻게 경험되어야 하는지에 관한 마음의

모델을 갖고 있는 것이죠. 예컨대 자동차의 핸들을 오른쪽으로 돌리면 차가 오른쪽으로 회전할 것

이라는 마음의 모델을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물에 대한 이해는 가시적인 형태와 구조에 대한

마음의 모델이 지각하고 탐색한 최종 이미지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지심리학에서 이같은

마음의 모델이 '스키마(schema)'라는 인지 구조에 의해 구성된다고 설명합니다. '스키마(schema)'

란 지각자로 하여금 어떤 유형의 정보를 선택적으로 수용하고 보게 하는 일종의 행위를 통제하는

기제(메커니즘)를 뜻합니다. 쉽게 말해 "~~눈에는 ~~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우리말도 있 듯이,

사람들은 스키마에 새겨진 자신이 알고 있는 것만을 볼 뿐이죠. 따라서 스키마는 무엇이 지각되

어야할지를 결정하고 통제하여 환경에 대한 개인의 경험을 구축하는 기능을 합니다. 삶의 경험에

대한 각 개인의 지각 패턴은 독특하기 때문에 스키마는 개인에 대한 사적인 구조라고 할 수 있습

니다. 하지만 스키마는 특정 문화와 사회화 과정들이 공유된 환경을 제공하는 범위까지 일반적인

모습을 공유하기 때문에 우리는 사물과 사건에 대해 다른 사람과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것입

니다. 스키마는 또한 언제나 불변적으로 고정된 견고한 구조가 아니라 경험에 의해 계속적으로

수정되기 때문에 유사한 사건들도 시간이 지난 뒤 같은 사람에 의해 또는 다른 사람에 의해 다르게

경험됩니다. 예컨대 70년대 중반 유행했던 포니 승용차를 타고 영화 <바보들의 행진>을 상영하는

극장 앞에서 멋진 포즈를 취하고 있는 사진을 지금 다시 보게 된다면 자동차, 헤어스타일, 나팔

바지, 얼굴 표정 등에 대해 "촌스럽다"는 느낌을 갖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마음의 모델은

스키마에 의해 지각 사이클 내에서 계속적으로 변경되면서 새로운 경험을 창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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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두가지로 크게 분류해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첫번째는 그림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고려하지 않고 순수 조형적 요소만을 감상의 대상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로테스크한 작품의 경우 의미가 가지는 일반적 가치를 전복하고, 선과 면 색채 등의 순수 미술의 요소로 사람의 감정에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뭉크나, 프란시스 베이컨 등의 그림을 보면 무엇을 표현한 것인지 정확하지 않은 작품을 보게 됩니다. 그럴 경우 그림이 뜻하는 바를 파악하기 보다는 선들의 배치와 그 조화감, 색채의 아름다움에 몸을 맡기고 자연스럽게 감상하면 됩니다. 뜻하지 않게도 사람의 얼굴 속에서 물이나 새와 같은 어떤 이미지를 떠올릴 수도 있게 됩니다. <우선은 색채와 선, 조화와 구성이 주는 아름다움을 즐기십시오>

이 단계를 넘어가게 되면, 작품이 갖고 있는 의미를 전복하여 생각하게 됩니다.
즉, 피투성이의 죽어가는 시체를 그린 흉측한 그림에서 우리의 시대와 가치를 발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잔혹미학의 대표성은 패러디 및 현실반영에 있다고 생각할 수 있고, 현실이 추악하면 추악할수록 그 엽기성과 잔혹성은 짙어진다고 합니다. 마릴린 맨슨이나 나인 인치 네일 등의 퍼포먼스 그룹이 인기를 갖는 이유나, 데이빗 린치 감독의 <이레이져 헤드> 를 감상할 때 느끼는 불편하면서도 매력적인 감정은 우리의 현실이 그만큼 부조리하고(논리적으로 이해하기 어렵고), 추잡한 면이 많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한 <깨달음의 매력>이 그로테스크한 작품을 감상할 때 일종의 각성처럼 마음에 맺히는 과정이 바로 아름다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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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의 기술

 

소설을 읽는 법


소설은 단숨에 읽는 것이다. 바쁜 사람이 장편 소설을 읽을 때에도, 이 점을 염두에 두고 될 수 있는 대로 짧은 시간에 읽도록 노력한다.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 가운데는 될 수 있는 대로 천천히 생각하면서 맛보듯이 읽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것은 ‘읽는다’ 라기보다는 책의 사건이나 인물에서 무의식의 만족을 얻고 있는 것이다. 그 점에 대해서는 나중에 언급하겠다.


빨리 읽을 것. 그리고 작품에 몰입하여 읽는 데 열중할 것. 몰입한다는 것은 문학에다 몸과 마음을 맡기고 작품이 작용하는 대로 맡기는 것을 말한다. 자기가 완전히 작중 인물이 되어, 어떤 사건이든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어떤 인물의 행동을 긍정할 수 없더라도, 자기의 세계를 떠나 그 사람의 세계에서 살려고 노력하면 마침내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판단을 내리는 것은 자기가 완전히 그 세계의 인물이 되었을 때 해도 좋다.


빨리 읽지 않으면 이야기의 통일성을 놓치기 쉽다. 집중해서 읽지 않으면 세부(細部)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인물이나 사건은 이야기의 ‘명사(名辭)’에 해당하는 것이므로, 독자는 그러한 것을 잘 알아서 각각을 식별할 수 있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도고 싶은 것이 있다. 예를 들면, 《전쟁과 평화》를 읽기 시작하면, 귀에 익지 않은 이름의 등장인물이 자꾸 나타나서 마음 약한 독자는 도중에 단념하고 말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마치 우리가 새로운 거리에 이사 가거나 파티에서 많은 사람을 만났을 때와 같은 것으로서ㅡ 어떤 인물이나 모두 기억하려고 할 필요는 없다. 소설의 인물의 대다수는 다만 배경에 있으면서 주요 인물의 움직임을 돕고 있는 것이다. 《전쟁과 평화》를 다 읽을 무렵에는 누가 중요한 인물인지를 알며 잊지 않게 된다. 피에르, 안드레이 나타샤, 마리 니콜라이 등의 이름은 다 읽고 난 훨씬 뒤까지도 언제나 기억에 떠오를 것이다.


또, 사건이 아무리 뒤얽혀 있더라도 중요한 것은 마침내 알게 된다. 여기에서 자자의 조력도 크다. 저자는 플롯의 전개에 빠져서는 안 될 사건을 독자가 놓치는 일이 없도록 여러 가지로 궁리를 짜놓는다. 중요한 것은, 가령 이야기의 발단에서 모든 것이 분명하지 않더라도 독자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처음부터 분명해서는 안 된다. 소설은 인생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실제의 인생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모두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다. 다만, 과거로서 되돌아보았을 때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독자도 소설을 다 읽고 나서 되돌아보았을 때 비로소 사건의 관련과 행동의 질서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소설이 인생과 비슷하다는 것은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 까지다. 등장인물은 책의 밖에서까지는 살 수 없다. 《전쟁과 평화》가 끝난 뒤에 피에르와 나타샤가 어찌되었느냐고 물어보았자 소용이 없다. 그들은 한정된 시간 안에 갇혀 있는 까닭에 독자를 만족시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가장 많이 읽히고 있는 것은 이야기다. 글자를 못 읽더라도 이야기는 귀로 들을 수 있다. 또, 자기 자신이 창작하는 사람도 있다. 확실히 픽션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 불가경한 것인 모양이다. 어째서일까? 하나는, 픽션이 현실의 욕구뿐만 아니라 무의식의 욕구까지도 만족시켜주기 때문이다. 번거로운 논의를 피하고 간단히 말해두겠다.


사람은 이렇다 할 이유도 없이 어떤 인간을 좋아하기도 하고 싫어하기도 한다. 소설 속의 인물이 벌을 받거나 보복을 당하거나 했을 때도 필요 이상으로 공감하거나 반발하거나 한다.


예를 들면, 어떤 인물이 유산을 받는 등의 행운을 입게 되는 것을 기뻐하거나 하는 것은, 독자가 그 인물에 공감을 가지고 자기와 동일시(同一視)하는 경우이다. 그러한 때, 자기도 유산을 받고 싶다는 것은 접어두고 다만 그 책이 마음에 들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사랑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좀더 열렬한 연애를 해보고 싶다고 생각하고 연애 소설을 애독하며, 강한 자유로운 사랑으로 살아간 사람들에게 자기 동일성을 느끼고 만족한다. 그러나, 자기 스스로는 그것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자기의 사랑의 불완전함을 뼈저리게 느끼기 때문이다.


또, 두 부분의 사람은 선천적으로 가학성(加虐性)이나 자학성(自虐性)을 무의식중에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작중 인물의 승자(勝者)나 패자(敗者)의 어는 쪽에 자기동일(自己同一)을 느낌으로써 충족된다.


인생은 반드시 정의(正義)가 행세하는 것이 아니라고 우리는 생각하고 있다. 어째서 선인(善人)이 괴로워하고 악인(惡人)이 영화를 누리는가? 그 까닭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은 사람들을 커다란 불안에 빠뜨린다. 소설이나 희곡 속에서 정의가 존재하고 인생의 혼돈(混沌)이나 불쾌한 상황이 바로잡히는 데에 우리는 만족한다.


작가는 신(神)처럼 작중 인물을 지배하여 제각기의 인물에 적합한 보수(報酬)나 벌을 준다. 좋은 소설은 이 점에서 조리가 있으며, 위대한 작가는 정의(시적 정의라고나 할까)를 틀림없이 수행함으로써 독자를 납득시키고 또 만족시킨다.


비극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다. 선량한 주인공이 가혹한 운명에 떠돌아다니면서도 마침내 자기의 운명을 깨달아간다. 셔우드 앤더슨의 소설도 《어째서인지 나는 알고 싶다》는 제목으로 된 것이 있는데, 이것은 다른 많은 문학 작품의 제목으로서도 통용된다. 비극의 주인공은 자기의 인생이 붕괴되고 나서 그 어째서를 깨닫는 것이 보통인데, 독자는 그러한 고통을 맛보는 일 없이 그가 얻은 깨달음을 서로 나누어가질 수가 있는 것이다.


픽션을 비평함에 있어서는 어떤 개인에게만 특유한 내면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책과 거의 대부분의 사람의 갚은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책을 분명하게 구분하도록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후자와 같은 책이야말로 각 시대, 각 세대를 통하여 계속 살아가는 훌륭한 문학이다. 인간성이 변하지 않는 한, 이러한 문학은 정의가 존재한다는 신념을 사람들에게 가지게 하며 깨달음을 얻게 하고 불안을 진정시키며 만인의 욕구에 응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현실의 세계는 과연 완전한지 어떤지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훌륭한 문학의 세계는 완전하다. 될 수 있는 대로 자주, 또 언제까지나 이 세계에서 즐기고 싶어 하는 것은 인정(人情)일 것이다.


여기서, 적극적 독서의 그 네 가지 질문을 생각해내고 문학에 적용한 경우를 생각해보자.

첫째 물음, 이 책은 전체로서 무엇에 관한 것인가. 그 대답은 이야기의 플롯의 통일성 속에서 찾아낼 수 있다.

둘째 물음, 무엇이 어떻게 서술되어 있는가?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작중의 인물이나 사건을 독자가 자기의언어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셋째 물음, 이 책은 전체로서 혹은 부분적으로 진실인가? 이 물음에 대해서는, 작품의 시적 진실(詩的眞實)에 대하여 독자가 내리는 판단이 대답이 된다. 즉, 그 작품이 독자의 지성도 감정도 만족시키고 있는가? 독자는 작품의 미(美)를 음미했는가, 또 그 이유, 이것이 대답이다.

넷째 물음, 거기에 어떤 의의가 잇는가? 이 물음을 소설이나 시에 적용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잘못된 생각이다. ‘교양서’의 경우, 대답은 독자의 ‘행위’에 있었다. 실천적인 책의 경우는 실제로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지만, 이론적인 책의 경우는 정신상의 행위가 요구되었다. 즉, 만일 그 책의 결론이 독자의 견해의 수정을 요구한다면 자기의 견해를 수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소설이나 시를 아무리 잘 읽어도 행위를 요구당하는 일은 없다.


확실히 문학이 독자에게 가지가지 행동을 일으키게 하는 일도 있다. 정치든 경제든 도덕이든, 전무서보다 소설을 읽는 편이 문제의 핵심을 건드릴 수 있는 일도 흔히 있다. 오웰의 《1984년》은 전체주의에 대한 통렬한 공격이며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新世界)》는 기계 문명에 대한 풍자며 솔제니친의 《수용소군도(收容所群島)》는 소련의 관료제에 숨어 있는 잔인한 비인간성(非人間性)에 대하여 수많은 조사·보고보다도 많은 것을 이야기해준다. 인류의 역사 가운데서 이러한 책은 언제나 발금(發禁)이나 검열(檢閱)을 당하였다. ‘전제 구주는 웅변으로 자유를 설파하는 학자보다도 농담을 냅다 하여 인심을 지배하는 술주정꾼 시인을 두려워한다.’(E. B. 화이트)


하지만, 이러한 실제적 효과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가능성으로 행동을 이끄는 일은 있어도 필요한 조건은 아니다. 문학은 예술 작품이다. 예술의 목적은 그 자신 이외에는 없다.


만일 어떤 작품을 읽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무슨 행동을 일으키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거기에는 그러한 감정을 낳는 논술이 잠재해 있었던 것은 아닌지 자문(自問)해보는 것이 좋다. 시나 소설에는 알 수 없도록 슬며시 논술이 숨겨져 있는 일이 있다. 그러한 것에 주의를 기울여 감동하거나 반응하거나 하는 것이 좋지만, 그 때 자기는 작품 이외의 것에 관심이 향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문학을 정말로 잘 읽기 위해서는 오직 그 세계를 경험하는 수밖에 없다.

 

2006. 02. 15

푸 른 바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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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엘 코엔


 에단 코엔

형은 조엘 코엔(Joel Coen:1954.11.29∼ ), 동생은 에단 코엔(Ethan Coen:1957.9.21∼ ). 평범한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조엘은 매사추세츠의 사립학교를 졸업하고 사이몬 록 칼리지와 뉴욕대학 영화과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 《이블 데드》 같은 B급 호러 영화들을 편집하였는데, 프린스턴대학 철학과를 졸업한 에단이 이에 동참하였다. 그 후 미스터리 살인 영화의 시나리오를 공동집필하기 시작하였고, 1984년 《블러드 심플》을 저예산으로 찍어 데뷔하였다.

다음으로 발표한 《애리조나 유괴사건》(1987), 《밀러스 크로싱》(1990) 등으로 1980년대에 유행한 네오 누아르를 선도하는 독립영화의 기수로 알려졌다. 이 작품들은 공통적으로 형식과 내용이 기발하고 흔한 소재를 독창적으로 재해석하고 있다. 그 후 영화 속의 공간과 현실을 애매모호하게 뒤섞어 놓은 독특한 영화 《바톤 핑크》로 칸영화제에서 극찬을 받으면서 전세계의 영화광들에게 우상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메이저 영화사들이 자본을 대서 만든 《허드서커 대리인》(1994)이 비평가들에게 혹평을 받으면서 고향인 미니애폴리스로 돌아갔다. 이곳을 영화의 배경으로 한 《파고》는 코엔형제의 최고의 걸작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리얼리즘과 작가적인 성찰이 돋보이는 영화이다. 또한 이전의 작품들이 대중성과 거리가 멀었던 반면 한층 대중성이 강화되었다. 최근에는 《위대한 레보스키》(1998)라는 냉소적인 유머가 돋보이는 작품을 발표하였다.

코엔형제의 특징은 공식적으로 감독은 조엘이, 프로듀서는 에단이 맡고 있지만, 시나리오를 함께 쓸 뿐 아니라 그 밖의 모든 작업을 공동으로 하기 때문에 서로를 따로따로 떼어놓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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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는 아직도 진정한 작가로 불리오는 건축가가 많이들 계신다고 늘 생각한다.단지 외국의 디자인을 모방하는것이 아닌 창작의 고통의 추구하기위해 늘 고민하고 생각하는 그런 분들이 계신다고 믿고있다. 그런분들중 시인으로 불리워지는 건축가..곽재환.

그의 흰 머리와 검은 수염은 늘 그를 예술가로 연상시키는 트레이드마크가 되기도한다. 분명한것은  그의 건축에는 다양한 공간과 여유가 느껴진다는 점이다. 자연이 느껴지고 공간이 느껴지고 인간미가 느껴진다.

영남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하고 맥건축사사무소 대표로 있다. 건축 전문 인터넷 방송 아키TV 방송위원, 주간신문 위클리솔 위원 등을 역임했으며 4.3그룹 이시대우리의건축전, DMZ,
예술문화운동 작업전 등에 참여했다. 비전힐스클럽하우스로 한국건축문화대상(입선)을, 제일영광교회로 서울시 은평구건축상(금상)을, 은평구립도서관으로 2001 한국건축문화대상(본상)을
수상했다.

 

건축가 곽재환씨는 '시인 건축가'로 불린다. 시에도 화자가 있듯이 건축에도 화자가 있다고 여긴다.
 건축물은 건축가가 등장시킨 화자이고, 이용자는 독자라는 것이다. 그래서 곽씨는 건축을 '투명 인간의 붕대'라고 비유한다. 건축이 보이지 않는 존재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곽소장님은 "현대 문명이 아무리 변한다 해도 인간은 자신의 존재 기반이자 근원인 자연에 대한 원천적 지향을 갖고 있다. 이것이 보편성이다"라고 말한다. 그의 대표작인 은평구립도서관에서 석교와 반영정, 그리고 응석대가 바로 도시 안에서 자연(보편성)을 경험하게 하는 장치들이다.

쉬어가라’고 유혹하는 듯한 공간을 만나는 일은 그리 쉽지 않다. 더구나 그 공간이 딱딱한 도서관이라면 어울리지 않아도 한참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서울 은평구 불광동 산기슭에 지어진 은평구립도서관에 가면 저절로 이구석 저구석에서 쉬고 싶어진다

공공 도서관의 현실은 열악하기만 하다. 수적으로 부족할 뿐만 아니라,수험생들의 공부방 정도로 인식되고 있다. 도서관은 공공성도 없고, 도서관 본래 기능에도 충실하지 못하다.
공공 도서관은 아직 지역 사회의 인프라가 아니다. 곽재환소장은 은평구립도서관에서 두 단계를 뛰어넘었다.  어린이도서관의 열풍이전부터 그의 건축에는 자연이 있었고 사람이 있었다.
지식과 정보 슈퍼마켓으로서의 도서관에서 한 걸음 나아가 지역 주민들이 모이는
너른 마당인 동시에 스스로를 돌아보는 사색의 공간을 제공하고자 했다. '광장과 밀실'이 공존하는 지역 문화 센터를 설계한 것이다.

그는 도서관의 주인을 청소년이나 책으로 한정하지 않았다.
어린이에서 노인, 가정주부, 연인들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찾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
굳이 책을 읽지 않아도 좋다. 동네 어린이들이 숨바꼭질을 할 수 있고, 잔디를 깔아놓은 옥상에
누워 구름이나 별을 보아도 무방하다. 다섯 기둥이 서 있는 중앙 계단에서는 혼인식을 올릴 수도 있다. (사랑공식발췌및 편집)

지하철 3호선 연신내 역에서 내려 불광동 경사지에 조밀하게 들어선 단독주택과 다세대주택
사이로 난 좁은 골목을 따라 한참 올라가면 산 정상 가까이에 단정한 형태의 은평구립도서관이 슬그머니 나타난다.

회색의 노출콘크리트라는 딱딱한 재료와 엄격한 좌우대칭의 직사각형과 정사각형이 되풀이된 건물의 외형을 처음 접하면 이 공간이 쉬어가라고 발길을 잡을 것이란 생각을 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계단을 올라 구석구석 살피다 보면 그 중 한 곳에서 책을 들고 앉아 석양을 바라보며 바람에 머리를 흩날리고 싶어진다. 서쪽을 향해 불광동을 내려다보며 자리잡아 마치 해지는 모습을 감상하기 위해 일부러 터를 잡은 듯한 분위기다.

설계를 담당한 곽재환(맥건축) 소장도 “해질 무렵 노을을 바라보며 사색에 잠기는 모습을 건축동기로 삼았다”고 밝혔다.
일반적으로 서향은 도서관의 자리로 적합하지 않다. 독서와 도서의 보존 측면에서 불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곳의 서향은 도시의 풍경이 한 눈에 들어오기 때문에 오히려 설계을 위한 촉매로 작용했다고 한다.
곽소장님은 “석양의 황홀하면서도 신비한 빛과 그 우수가 주는 메세지는 도서관의 어떤 텍스트 못지않은 효과를 낸다”며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자연의 경이로움에 눈뜨게 하고, 삶과 죽음의 의미를 일깨워 준다”고 설명했다.

설계자가 의도한 대로 늦여름 해질녁 은평구립도서관은 저녁산책을 나온 주민들로 가득해, 공부하기 위한 도서관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공원같은 분위기다. 특히 건물 형태가 외부 여러 곳으로부터 접근할 수 있도록 열려 있을 뿐 아니라 산꼭대기에 있는 불광근린공원으로 올라가는 계단같은 역할을 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건물 전체가 공원처럼 느껴진다.

개발로 훼손되고 새 건물에 매몰돼버리기 쉬운 자연공간을 건물이 선 뒤에도 분위기가 살아나도록 배려한 장치다.

산기슭에 예사로 고층건물들이 들어서는 서울에서, 산기슭에 지었으면서도 전혀 산을 거스르지 않게 한 점이 특히 돋보인다.

도서관의 성격을 형성하는 것은 네가지 공간요소다. 그 중 가장 핵심적인 것은 뒷산에서
 도서관 옥상으로 연결되는 석교(夕橋). 이 석교는 산 정상의 불광 근린공원으로 직접 이어지면서
 건축과 자연을 하나로 묶어주는 역할을 한다.

건물 자체도 계단 모양으로, 1층의 지붕이 2층의 옥외공간으로, 2층 지붕은 3층의 옥외공간으로 사용된다. 각 층의 옥외 공간에는 석양을 바라볼 수 있는 응석대(凝夕臺)가 각각 8개씩 24개가 배치돼 있다. 멀리서 도서관을 바라보았을 때 도서관의 형태를 결정짓는 것도 이 응석대다.

피라미드 형태의 유리로 만들어진 도서관 현관을 들어서면 건물 맞은편 유리벽 너머로 연못(반영정·反影井)이 보인다.반영정은 수면에 주위를 둘러싼 건물이 비치도록 하는 동시에 하늘을 수면에 끌어 담는다. 검은 대리석 바닥의 연못에 담긴 물에 하늘을 넣기 위한 장치인 셈이다. 반영정은 또 지하 1층부터 3층에 이르는건물 전체에 자연채광을 끌어들이는 역할을 한다. 연못을 둘러싼 노출 콘크리트 벽면은 현대적인 조형물처럼 느껴진다.

1층에 위치한 어린이 열람실은 도서관 주변 주민들에게 특히 사랑받는 공간이다. 어린이들의 분위기에 맞춘 실내모습 뿐 아니라 엄마와 함께 하는 코너 등이 인기다.

지하의 자료실 겸 열람실은 천장의 일부분이 1층으로 트여 수직적인 확장감을 통해 실제보다 훨씬 넓고 시원해 보인다.

지하층 시청각실에서는 토요일과 일요일에 영화가 무료로 상영된다.

엄무성 은평구립도서관장은 “주민들이 좋아하는 공간을 유지·관리하는데 큰 보람을 느낀다”며
 “주중에도 하루 이용객이 2천5백명을 넘고, 주말에는 하루 4천명 가까이 이용한다”고 말했다.
다만 응석대나 불광공원으로 이어지는 외부 계단의 시설물을 공원을 이용하는 일부 사람들이 훼손하는 일이 잦아 관리업무가 쉽지만은 않다고 털어놓았다. 열린 공공 공간으로 설계한 의도를 제대로 살리려면 이용객들의 매너가 따라줘야 한다는 말이다.

도서관을 자주 이용한다는 김상준군(S대 전기공학과 4년)은 “공부가 잘 안될 때 탁 트인 전망을 내다보면  답답하던 마음이 시원해진다”고 말했다.

건축학도를 위한 감상포인트

◈건물외관=노출콘크리트와 엄격한 직사각 형태의 사용 등 전형적인 모더니즘의 조형언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솟대나 응석대 등에서 언뜻 포스트 모더니즘의 분위기도 느껴진다. 멀리 골목에서 접근하면서 나타나는 전경에서 전체적인 조형미를 살펴본다.

◈솟대=건물 초입에 다섯개의 원기둥이 우뚝 서 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느낌을 주기 위한 일종의 입구 역할을 하는 동시에 이곳이 도서관임을 알리는 표석이다. 도서관의 현관을 들어서기 전에 건물 외부에서 한차례의 진입과정을 거치는 셈이다. 다섯개의 솟대는 살고(生), 알고(知), 놀고(戱), 풀고(業), 비는(祈) 행위를 상징한다는 설명이다.

◈응석대=각 층 옥외공간에 8개씩 24개가 있으며, 그 앞에 각각 잔디밭이 자리잡고 있다. 응석대에 들어 앉으면 마치 찻집에 간 것 같은 아늑함을 맛볼 수 있다. 실제로 응석대마다 사람들이 자리잡고 일어나지 않아 앉을 기회를 차지하기가 쉽지 않다.

◈석교=도서관 옥상에 설치된 다리. 석교를 건너면 바로 산정상 불광공원으로 이어진다. 석교를 건너 산으로 건너가자면 자신이 드라마틱한 연극의 주인공이 된 듯한 느낌이 든다. 다만 현재는 철문을 해 달아 막아 두었다. 엄무성 도서관장은 “공원 이용객들이 석교를 통해 도서관 옥상에 올라와 술판을 벌이는 등 문제가 많아 철문을 설치할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곽재환 소장은 “빠른 시일내에 철문을 없애고 석교를 통해 오갈 수 있어야 건물의 건축적 의미가 살아날 것”이라고 안타까와 했다.

◈반영정=피라미드형의 유리 천장이 있는 도서관 현관을 지나 곧바로 만나게 되는 반영정은 도서관을 이용하기 전에 꼭 감상해야 할 장소다. 아무런 기능도 갖추지 않은 빈 공간을 계획한 설계자의 의도에 대한 궁금증이 수수께끼를 풀 때처럼 피어오른다.
한국적인 공간이 가진 가운데 마당이란 의미도 읽히면서, 동시에 하늘을 물에 담는 행위와 책을 읽는다는 정적인 활동을 은유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각 층에서 내려다 보이는 반영정의 표정이 제각각인 점도 흥미롭다.

뒷산 경사면을 그대로 살린 도서관으로 들어서면 동선과 시선이 사방으로훤히 트인다.
불광근린공원 산책로를 건물까지 끌어들여 석교(夕橋)로 연결시켰고, 응석대(應夕臺)와 반영정(反影井)은 노을과 하늘을 담아내고 있다. 도서관 안이 지식과 정보 습득의 공간이라면 건물 밖은 자연과 교감하는 공간인 셈이다.

2001년 한국건축문화대상 본상을, 2002 서울시 건축상은상을 각각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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