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의 기술
소설을 읽는 법
소설은 단숨에 읽는 것이다. 바쁜 사람이 장편 소설을 읽을 때에도, 이 점을 염두에 두고 될 수 있는 대로 짧은 시간에 읽도록 노력한다.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 가운데는 될 수 있는 대로 천천히 생각하면서 맛보듯이 읽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것은 ‘읽는다’ 라기보다는 책의 사건이나 인물에서 무의식의 만족을 얻고 있는 것이다. 그 점에 대해서는 나중에 언급하겠다.
빨리 읽을 것. 그리고 작품에 몰입하여 읽는 데 열중할 것. 몰입한다는 것은 문학에다 몸과 마음을 맡기고 작품이 작용하는 대로 맡기는 것을 말한다. 자기가 완전히 작중 인물이 되어, 어떤 사건이든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어떤 인물의 행동을 긍정할 수 없더라도, 자기의 세계를 떠나 그 사람의 세계에서 살려고 노력하면 마침내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판단을 내리는 것은 자기가 완전히 그 세계의 인물이 되었을 때 해도 좋다.
빨리 읽지 않으면 이야기의 통일성을 놓치기 쉽다. 집중해서 읽지 않으면 세부(細部)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인물이나 사건은 이야기의 ‘명사(名辭)’에 해당하는 것이므로, 독자는 그러한 것을 잘 알아서 각각을 식별할 수 있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도고 싶은 것이 있다. 예를 들면, 《전쟁과 평화》를 읽기 시작하면, 귀에 익지 않은 이름의 등장인물이 자꾸 나타나서 마음 약한 독자는 도중에 단념하고 말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마치 우리가 새로운 거리에 이사 가거나 파티에서 많은 사람을 만났을 때와 같은 것으로서ㅡ 어떤 인물이나 모두 기억하려고 할 필요는 없다. 소설의 인물의 대다수는 다만 배경에 있으면서 주요 인물의 움직임을 돕고 있는 것이다. 《전쟁과 평화》를 다 읽을 무렵에는 누가 중요한 인물인지를 알며 잊지 않게 된다. 피에르, 안드레이 나타샤, 마리 니콜라이 등의 이름은 다 읽고 난 훨씬 뒤까지도 언제나 기억에 떠오를 것이다.
또, 사건이 아무리 뒤얽혀 있더라도 중요한 것은 마침내 알게 된다. 여기에서 자자의 조력도 크다. 저자는 플롯의 전개에 빠져서는 안 될 사건을 독자가 놓치는 일이 없도록 여러 가지로 궁리를 짜놓는다. 중요한 것은, 가령 이야기의 발단에서 모든 것이 분명하지 않더라도 독자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처음부터 분명해서는 안 된다. 소설은 인생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실제의 인생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모두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다. 다만, 과거로서 되돌아보았을 때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독자도 소설을 다 읽고 나서 되돌아보았을 때 비로소 사건의 관련과 행동의 질서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소설이 인생과 비슷하다는 것은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 까지다. 등장인물은 책의 밖에서까지는 살 수 없다. 《전쟁과 평화》가 끝난 뒤에 피에르와 나타샤가 어찌되었느냐고 물어보았자 소용이 없다. 그들은 한정된 시간 안에 갇혀 있는 까닭에 독자를 만족시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가장 많이 읽히고 있는 것은 이야기다. 글자를 못 읽더라도 이야기는 귀로 들을 수 있다. 또, 자기 자신이 창작하는 사람도 있다. 확실히 픽션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 불가경한 것인 모양이다. 어째서일까? 하나는, 픽션이 현실의 욕구뿐만 아니라 무의식의 욕구까지도 만족시켜주기 때문이다. 번거로운 논의를 피하고 간단히 말해두겠다.
사람은 이렇다 할 이유도 없이 어떤 인간을 좋아하기도 하고 싫어하기도 한다. 소설 속의 인물이 벌을 받거나 보복을 당하거나 했을 때도 필요 이상으로 공감하거나 반발하거나 한다.
예를 들면, 어떤 인물이 유산을 받는 등의 행운을 입게 되는 것을 기뻐하거나 하는 것은, 독자가 그 인물에 공감을 가지고 자기와 동일시(同一視)하는 경우이다. 그러한 때, 자기도 유산을 받고 싶다는 것은 접어두고 다만 그 책이 마음에 들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사랑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좀더 열렬한 연애를 해보고 싶다고 생각하고 연애 소설을 애독하며, 강한 자유로운 사랑으로 살아간 사람들에게 자기 동일성을 느끼고 만족한다. 그러나, 자기 스스로는 그것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자기의 사랑의 불완전함을 뼈저리게 느끼기 때문이다.
또, 두 부분의 사람은 선천적으로 가학성(加虐性)이나 자학성(自虐性)을 무의식중에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작중 인물의 승자(勝者)나 패자(敗者)의 어는 쪽에 자기동일(自己同一)을 느낌으로써 충족된다.
인생은 반드시 정의(正義)가 행세하는 것이 아니라고 우리는 생각하고 있다. 어째서 선인(善人)이 괴로워하고 악인(惡人)이 영화를 누리는가? 그 까닭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은 사람들을 커다란 불안에 빠뜨린다. 소설이나 희곡 속에서 정의가 존재하고 인생의 혼돈(混沌)이나 불쾌한 상황이 바로잡히는 데에 우리는 만족한다.
작가는 신(神)처럼 작중 인물을 지배하여 제각기의 인물에 적합한 보수(報酬)나 벌을 준다. 좋은 소설은 이 점에서 조리가 있으며, 위대한 작가는 정의(시적 정의라고나 할까)를 틀림없이 수행함으로써 독자를 납득시키고 또 만족시킨다.
비극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다. 선량한 주인공이 가혹한 운명에 떠돌아다니면서도 마침내 자기의 운명을 깨달아간다. 셔우드 앤더슨의 소설도 《어째서인지 나는 알고 싶다》는 제목으로 된 것이 있는데, 이것은 다른 많은 문학 작품의 제목으로서도 통용된다. 비극의 주인공은 자기의 인생이 붕괴되고 나서 그 어째서를 깨닫는 것이 보통인데, 독자는 그러한 고통을 맛보는 일 없이 그가 얻은 깨달음을 서로 나누어가질 수가 있는 것이다.
픽션을 비평함에 있어서는 어떤 개인에게만 특유한 내면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책과 거의 대부분의 사람의 갚은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책을 분명하게 구분하도록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후자와 같은 책이야말로 각 시대, 각 세대를 통하여 계속 살아가는 훌륭한 문학이다. 인간성이 변하지 않는 한, 이러한 문학은 정의가 존재한다는 신념을 사람들에게 가지게 하며 깨달음을 얻게 하고 불안을 진정시키며 만인의 욕구에 응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현실의 세계는 과연 완전한지 어떤지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훌륭한 문학의 세계는 완전하다. 될 수 있는 대로 자주, 또 언제까지나 이 세계에서 즐기고 싶어 하는 것은 인정(人情)일 것이다.
여기서, 적극적 독서의 그 네 가지 질문을 생각해내고 문학에 적용한 경우를 생각해보자.
첫째 물음, 이 책은 전체로서 무엇에 관한 것인가. 그 대답은 이야기의 플롯의 통일성 속에서 찾아낼 수 있다.
둘째 물음, 무엇이 어떻게 서술되어 있는가?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작중의 인물이나 사건을 독자가 자기의언어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셋째 물음, 이 책은 전체로서 혹은 부분적으로 진실인가? 이 물음에 대해서는, 작품의 시적 진실(詩的眞實)에 대하여 독자가 내리는 판단이 대답이 된다. 즉, 그 작품이 독자의 지성도 감정도 만족시키고 있는가? 독자는 작품의 미(美)를 음미했는가, 또 그 이유, 이것이 대답이다.
넷째 물음, 거기에 어떤 의의가 잇는가? 이 물음을 소설이나 시에 적용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잘못된 생각이다. ‘교양서’의 경우, 대답은 독자의 ‘행위’에 있었다. 실천적인 책의 경우는 실제로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지만, 이론적인 책의 경우는 정신상의 행위가 요구되었다. 즉, 만일 그 책의 결론이 독자의 견해의 수정을 요구한다면 자기의 견해를 수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소설이나 시를 아무리 잘 읽어도 행위를 요구당하는 일은 없다.
확실히 문학이 독자에게 가지가지 행동을 일으키게 하는 일도 있다. 정치든 경제든 도덕이든, 전무서보다 소설을 읽는 편이 문제의 핵심을 건드릴 수 있는 일도 흔히 있다. 오웰의 《1984년》은 전체주의에 대한 통렬한 공격이며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新世界)》는 기계 문명에 대한 풍자며 솔제니친의 《수용소군도(收容所群島)》는 소련의 관료제에 숨어 있는 잔인한 비인간성(非人間性)에 대하여 수많은 조사·보고보다도 많은 것을 이야기해준다. 인류의 역사 가운데서 이러한 책은 언제나 발금(發禁)이나 검열(檢閱)을 당하였다. ‘전제 구주는 웅변으로 자유를 설파하는 학자보다도 농담을 냅다 하여 인심을 지배하는 술주정꾼 시인을 두려워한다.’(E. B. 화이트)
하지만, 이러한 실제적 효과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가능성으로 행동을 이끄는 일은 있어도 필요한 조건은 아니다. 문학은 예술 작품이다. 예술의 목적은 그 자신 이외에는 없다.
만일 어떤 작품을 읽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무슨 행동을 일으키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거기에는 그러한 감정을 낳는 논술이 잠재해 있었던 것은 아닌지 자문(自問)해보는 것이 좋다. 시나 소설에는 알 수 없도록 슬며시 논술이 숨겨져 있는 일이 있다. 그러한 것에 주의를 기울여 감동하거나 반응하거나 하는 것이 좋지만, 그 때 자기는 작품 이외의 것에 관심이 향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문학을 정말로 잘 읽기 위해서는 오직 그 세계를 경험하는 수밖에 없다.
2006. 02. 15
푸 른 바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