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전화
일디코 폰 퀴르티 지음, 박의춘 옮김 / 북하우스 / 2002년 3월
평점 :
절판


 

사람들마다 책장정리를 하는 방식은 다르겠지만, 내 경우에는 작가가 속한 국가별로 정리를 한다. 그래서 정리된 책들 중 가장 책장이 넘쳐나는 것은 프랑스, 가장 빈약한 쪽은 남아메리카 및 이탈리아권이다. 그리고 부끄럽게도, 독일어권 작가들의 책이 내겐 그리 넘쳐나지는 않는다. 한국에는 재미있는 독일 작가의 책이 곧잘 출판되지 않으며 출판된다 하여도 시류가 조금은 늦다.

 

즉, 독일에서 대성을 한 작가가 아니고는 한국 출판계로 입성을 서두르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다. 최근 자유의 감옥, 꿈꾸는 책들의 도시 정도가 쥐스킨트의 다양한 작품들의 시류를 한국에서는 잇고있다고 본다. 그리고, 소품과도 같은 단편모음, 중장편이 번역되어 출간되는데 그 중 몇가지가 도리스 되리의 소설과 퀴르티의 소설 정도이다.

 

 

도리스 되리의 소설은 was machen wir jetzt? (우리 이제 어쩌지?)가 독일에서는 거의 대중을 강타하여 삼사년 전 날개돋힌 듯 팔려나갔지만 한국에는 번역조차 되지 않았고, 앞으로도 될지가 의문이다. 또한 벤야민 야플렉의 크레이지 같은 경우도 독일에서는 영상집 영화 디브이디 등으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지만 한국에서는 시들한 경우. 역시 한국과 독일의 코드가 다른 것인지, 마케팅의 차이인지 모르겠지만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독일어과 출신인 나는 내가 고른 대다수의 독일 소설들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코라 휩시가 등장하는 `여자, 전화’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에바 헬러 시리즈는 참으로 적응하기 힘들었다. 그렇다. 그 책 사서 읽다가 포기하고 지하철 문고에 기증했다.)

 

 

사설이 길었다. `여자, 전화’는 연애 이야기다. 많은 이들이 이 책이 브리짓 존스의 일기와 비슷하다 하지만, 결코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확실히 비슷한 점이 있기는 하다. 시간단위의 기록 형식과 한 남자에 열중하여 시시각각 고민하는 모습이 비슷하다. 그런데 세상에 어느 여자가, 그리고 어느 남자가 그렇지 않는단 말인가? 무게의 차이일 뿐이다.

 

 

어느 남자나(내가 여자인 관계로) 내게 저녁을 함께 하자고 청해오면, 나는 생각할 것이다. 저 사람의 꿍꿍이가 무엇인가. 친하지 않을 경우에는 그러하다. 그런데 그 어느 남자가 내게 자신의 집에서 하룻밤을 자고 가라고 한다면, 나는 그럴 경우에는 차후의 일을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그와 섹스를 하여야할까? 안한다면 어떻게 할까? 하거나 하지 않은 후의 나는 그와의 관계에서 어떻게 하여야 할까?

 

 

결국, 사람은 모두가 다 똑같다는 것에서 문제는 출발한다. 상황의 무거움과 가벼움이 있을 뿐, 본질은 똑같다. 그, 혹은 그녀는 내게 호감이 있을까? 있다면 어느정도일까? 이런 문제는 프랑스 소녀들의 꽃잎점과도 같다. 사랑한다, 아니다, 이 두가지를 오가는 꽃잎점과 달리 프랑스 소녀들은 `그는 나를 미친듯이 사랑한다. 사랑한다. 조금 좋아한다. 관심도 없다’ 사이를 오간다 한다. 선택의 폭이 더 넓고 그 사이의 온도가 극단적이다. 즐거이 기뻐할 수 있는 선택과 뼈저리게 좌절할 만한 선택이 공존한다.

 

 

사랑에 빠진 사람의 마음에 대해서라면 황진이의 시조부터 아니 에르노의 중장편까지 다양한 작품들이 즐비하다. 어느 것은 가볍고 어느 것은 무겁다. 굳이 따지자면 에르노는 무겁고 브리짓 존스는 가볍다. 그러나 어느 것이 더 중요하다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

 

 

꼭 심오한 뜻을 담고있어야 책값이 아깝지 않은 것은 아니다. 내가 기대하는 것은, 그 시간동안 내가 온전히 즐거울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두고두고 읽을 생각도 나는 굳이 하지 않는다. 단지, 내가 기대하는 종류의 재미가 있다면 그것으로 나는 만족한다. 때때로 책장을 덮고도 줄기차게 우연찮게 어느 대목이 생각나는 영화나 문학은 그런 의미에서 소중하다.

 

알랭 드 보통의 연애에 대한 사색은 더할 나위 없이 발랄하면서도 할 말은 꼭 하는 스타일을 고수한다. `사랑한다’라는 그 한가지의 뜻을 모든 지식을 총동원하여 공굴리기를 한다 하면 좋을 것이다. 그에 비하면 퀴르티는 `사랑한다’라는 말을 한마디 하기 위해 눈물겹게 다이어트하고 피가 마르게 기다린다. 사람이 모두 똑같다는 것은 이런 의미인 것이다. 보통과 퀴르티, 과연 둘 중 어느 하나가 가볍고 무거운 것은 사실이지만, 무거움만큼이나 가벼움도 중요하다. 읽고나서 그저 재미있는 로맨틱 코미디 영화를 한 편 본 듯한 기분이며 다시 읽지 않아도 좋을 책이기도 하지만, 딱 떨어지는 재미를 맛보기도 힘든 때에 퀴르티 같은 작가의 작품은 그저 참, 귀여운 소품과도 같다.

 

 

참고로 나는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읽은 다음 이 책을 읽었다. 무거움과 가벼움을 현란하게 오갔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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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마늘빵 > 글쓰기가 두려운 자, 글쓰기를 좋아하는 자, 이 책을 읽어라!
교양인이 되기 위한 즐거운 글쓰기
루츠 폰 베르더. 바바라 슐테-슈타이니케 지음, 김동희 옮김 / 들녘미디어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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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교양인이 되기 위한 즐거운 글쓰기>는 사실 책의 내용은 모른채 책 제목에 끌렸고, 알라딘 서점에서 인문학 베스트 6위를 기록하고 있기에, 괜찮은 책이겠다 싶어 구입한 것이다.

 평소 글쓰기를 즐기고, 글쓰기를 좋아하고, 글쓰기에 관심이 많기 때문에 글과 관련된 책에 항상 관심을 가져왔다. 그래서 전에 얼마전 세상을 떠난 세계적인 철학자 자크 데리다의 저서 중 하나인 <글쓰기와 차이>를 제목만 보고 구입했다 아직까지 읽지 못하고 책장에만 꽂아둔 경우도 있다. 자크 데리다가 '글쓰기'에 대해서 쓴 책임은 맞지만, 철학서이기에 내가 그냥 생각하는 '글쓰기'와는 차원이 다른 내용을 담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난 철학을 하는 학생이기 때문에 자크 데리다에게도 관심은 있다. 학부에 그의 철학을 다루는 과목이 개설되지 않아 그의 학문의 손톱의 때만큼도 알지 못하지만 말이다. 그저 관심은 언제나 꾸준히 가져왔다. 언젠가는 책장 속에 묻힌 데리다의 저 책을 읽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면서...

 서론이 길었다. 우선 <교양인이 되기 위한 즐거운 글쓰기>(이하 즐거운 글쓰기로 축약하겠음)를 읽으며 생각보다는 글쓰기에 대한 초보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고 느꼈고 부담없이 책장을 훨훨 넘길 수 있었다. 그야말로 '교양인이 되기 위한' 글쓰기였다. 다소 조금은 전문적이고 심각한 내용을 담고 있길 바랬던 나의 기대는 무너졌지만, 이 책을 다 읽고 난 뒤에 난 지금껏 내가 해왔던 글쓰기가 이 책에서 말하는 글쓰기 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내 나름대로 글쓰기를 꾸준하게 해왔는데 이 책은 나의 글쓰기 방식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는 듯 했다. 나만의 고유한 방식인줄 알았는데 그렇지는 않았나보다.

 <즐거운 글쓰기>는 크게 6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 창조적인 글쓰기를 위하여, 2장 창의력을 키워주는 글쓰기, 3장 나를 치유하는 글쓰기, 4장 나를 찾기 위한 글쓰기, 5장 글을 쓸 때 나타나는 기회와 위기, 6장 글쓰기 모임 만들기에 이르기까지. 각각의 챕터들은 순차적으로 글쓰기의 대한 요령과 방식을 익히게 해준다.

 나는 6장 중에서 4장 나를 찾기 위한 글쓰기가 참 인상적이었다. 평소 내가 해오던 글쓰기의 대부분이 여기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내가 철학을 하는 이유는 나를 찾기 위함이고, 나를 알기 위함이다. 그런데 나는 철학을 하는 도구로서 '글쓰기'를 시작했고, 글을 쓰면서 책에서 말하는 대로 나를 알아가게 된 것이 사실이다. 자아성찰이라고나 할까. 나는 글을 씀으로서 나를 인식하고 나를 찾아간다.

 이 책에서 말하는 글쓰기를 하는 것이 이 책을 쓰는 것보다 더 쉽지 않았을까 할 정도로, <즐거운 글쓰기>는 문학적, 치료적, 철학적 글쓰기에 대해서, 그리고 글을 쓸 때의 자세와 느낌, 기회와 위기 등에 대해서 너무나도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 아쉬운 점은, 이 책에서 지시하는대로 곧이곧대로 할 독자가 과연 있을까 하는 점이다. 물론 책의 내용은 훌륭하지만 독자는 이 책을 읽음과 동시에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을 듯 하다. 그냥 읽고 아 그렇구나, 하고 흘려버리는 정도가 아닐까? 책에서 지시하는 글쓰기의 방법을 배우기 위해서는 옆에서 글쓰기 도우미가 필요할 듯 하다. 물론 이 책이 그러한 도우미의 역할을 해주지만, 실질적으로 간섭해줄 도우미말이다. 책이 그런 것까지 책임져줄수는 없다. 그래서 나는 이 책에 책임을 돌리는 것은 아니다. 단지 책이 말한 것을 행동으로 옮기기까지에는 '독서'와 더불어 '실질적인 도우미'가 필요하다는 것을 지적하고픈 것이다.

 글쓰기에 두려움을 가진 사람들이 읽으면 도움이 될 책이다. 더불어 나와같이 글쓰기에 어느정도 경험이 있고, 글쓰기를 좋아하는 자가 읽어도 무방하다. 나름대로 전자와는 다른 면에서 도움을 얻을 수 있을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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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kimji > 달콤한 당신들의 도시
달콤한 나의 도시
정이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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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콤한
  달다,의 반대 의미는 무얼까. 쓰다? 짜다? 달지 않다? 아무 맛도 없다?  달콤한,이 수식하는 건 '나의', '도시'다. 달콤한 나. 혹은 달콤한 도시. 그러나 독자는 이미 알고 있다. 달콤하다,가 반어적인 의미라는 것 쯤은 말이다.  
  인물들의 현실은 다분히 달지 않다. 해놓거나 이룬 거 없는 서른둘이라는 나이, 녹록하지 않은 가족사, 멋질 것도 근사할 것도 없는 일, 너무 늦었거나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닌 희망이나 꿈도 달지 않다. 그 뿐인가. 언제나 지끈지끈 머리 아픈 연애는 어떤가. 일곱살 연하남과의 연애,도 연애지만 결혼을 떠올리며 만나는 반듯반듯한 30대 중반의 남자와의 연애도 그리 수월치 않다. 이혼남이 된 첫사랑과의 재회, 오래된 우정의 선을 넘길듯 말듯한 이성친구와의 관계도 묘연하다. 연애 뿐만이 아니다. 결혼은 어떻고, 이혼은 또 어떤가. 
  사람 사는 일이 다 그러하다,고 쉽게 말할 수 있다. 누구나 그렇게 복닥복닥 살아가는 거라고,도 할 수도 있다. 햇빛 쨍 한 날이 있으면 비가 오는 날도 있는 거라고, 말은 쉽게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일이 내 일이 되었을 때의 막막함이라든지, 절박함, 혹은 절망감, 때로는 자포자기도 할 수 있는 (기이한) 용기를 생각해보자.(아, 괴롭다). 하루하루는 고만고만한데, 나이는 점점 더 늘어가는데 왜 점점 더 우울해지고 점점 더 부족한 것들 투성일까(부족한 건 점점 더 늘어나기까지 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한치의 발전도 없으며 왜 한 가닥의 희망도 한 뼘의 기쁨도 늘지 않을까. 그건, 바로, 현실이기 때문이다. 현실,이라는 것 자체가 원래 그렇게 생겨먹은 것이다. 돈이 있나 없나, 어리나 늙었거나, 애인이 있거나 없거나, 여자거나 남자거나, 당신이거나 나이거나. 현실이 그렇게 단 것이 못 된다니, 그럴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런데 이 소설에는 다른 원인이 하나 더 있다. 학교를 졸업하면 취직을 하고, 이십대후반이 되면 결혼을 하는 것. 이성관계의 양다리는 안 되고, 직장에서는 유능해야 하며, 정의로워야 하고, 인간이라면 모름지기 이만큼은 해야 된다는 사고방식. 바로 통념이다. 물론 통념도 현실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으나, 소설 속에서 보여지는 통념은 조금 다르게 보인다. 예를 들면 상품의 브랜드네임으로 인물, 소설적 상황, 배경의 이미지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나이키 운동화, 이효리의 새 앨범, 정우성의 외모, 애니콜, 생고구마칩, 리바이스타입원 청바지, 스타벅스, 지펠 등이 이 시대를 형상화 할 수 있는 대표 이미지로 등장한다. 그러니까, 이 시대의 30대 미혼(혹은 비혼) 여성의 취향,이 마치 꼭 저런 것들이 일상 속에 스며들어 있다는 전제 말이다. 통념이라 하기보다는 정형성,이라는 의미가 조금 더 가까운 것들. 그래서 위험하다. 그 정형성은 인물들의 캐릭터를 확고하게 만드는데 수월하다. 그러나 그것은 반대로 독자를 소외시키기에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가는 용감하게 실명을 사용한다. 현실감과 현장감을 생생하게 전달하고 싶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음' 혹은 '그것만이라고는 할 수 없음'에 대해서 어떻게 반박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형성에서 한치의 다름을 허용하지 않음, 그것이 종종 가독을 저해하지만 이중적이게도 가독을 위한 친절한 안내가 되기도 한다는 건 분명하다.  
  인물들은 그런 통념에 갇히는 것을 원하지 않으면서도 끊임없이 그 통념에 자신을 넣으려고 애쓴다. 그것을 제도권 안으로의 안전한 귀착으로 여기면서, 그러나 그것이 속물로 치부될까봐 섣불리 인정하지도 않으면서. 결국 달콤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 달콤함을 꿈꾸고, 그러나 달콤하지 않은 끝을 만나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달콤하기 위해서 산다,라고 말한다. 어쩌면 이 소설의 갈등은 바로 개인과 통념사이의 싸움이 아니었을까. 인물들끼리의 갈등보다 인물이 통념과 싸우는 형색이 더 짙었다. 그러나 독자는 안다. 결국, 현실의 인물이 통념을 이겨 버릴 수는 없다는 것. 그래서 따지고보면 소설은 처음부터 끝이 예상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달콤하다,라고 말했으니까. 달콤하다고 말하는 건 달콤하지 않다는 것이니까 말이다. 극명하게 정확한 메시지 전달이었다는 것이다.

  나의
  1975년생이면 주인공 오은수는 나와 동갑니다. 교과서가 바뀌었고, 수능0세대였으며, 방위가 사라진 세대다. 졸업해보니 IMF여서 유학을 가거나 대학원에 들어갔다. 또 다시 졸업을 하고 다시 현실로 와보니 2차 IMF가 눈앞에 떡 펼쳐져 있었다. 75년생들은 토끼띠다. 두 귀를 축 늘어트리고 코를 찡긋거리면서 불안한 시선으로 두리번거리는 희멀건한 토끼 한마리,를 떠올리면 75년생들을 대변하는 이미지가 될까? 여하튼, 주인공과 친구들은 75년들이다. 곧 서른둘이 되고, 일도 연애도 잘 풀리지 않으면서 결혼에 대한 강박관념, 꿈에 대한 강박관념, 연애에 대한 강박관념 속에서 허부적거린다.
  삼십대는 쉽게 자신의 세계관을 수정하지 않는다. 고집이 아니라, 이제 굳혀진 자신의것,이 되버린 것이다. 제 몸인양 자신의 사고는 자신의 생각대로 고정되었을 뿐이다. 유연할 것 같지만 결단코 유연하지 못하는 것이 삼십대의 마인드일지도 모른다. 모두가 철없다고 손가락질하던 이십대를 갓 지나왔고, 이제 어디서든지 내 몫의 일도 할만하다. 그러나 중년은 아니니 젊은 것 같지만 푸릇한 20대를 보면 기가 죽는 걸 어쩔 수 없다. 그것이 소설 속 인물들이 가진 공통점이고, 그래서 그들은 갈등하며 싸우고 다시 화해한다. 내 사고를 바꿀 수 없으므로 싸울 수밖에 없고, 그들은 동년배이기 때문에 화해한다. 그들의 결속을 단단히해야 20대에게 치여도, 중년에게 눌려도 버틸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소설 속 오은수와 재인과 유희, 유준은 명확한 캐릭터를 가지고 있는 개인으로 등장하지만 그들은 모두 75년생을 대표하는 대명사와 같다. 75년생이라고 한정할 필요도 없다. 이 시대의 삼십대들의 자화상이기도 하니까. 단 오은수가 주인공이기 때문에 극단에 선 인물들 사이에 절충안같은 성격으로 만들어놨을 뿐,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두 같은 목소리이다. 그 목소리는 바로 소설의 메시지와 맞닿아 있다. 
  달콤한 '나의' 도시,라는 것. 우리의 도시가 아니라 너의 도시가 아니라 나의 도시라는 것에 주의를 둘 필요가 있다. 소설에서도 등장하지만 사회를 이루는 최소단위는 가정이라고 배웠지만 실제로는 이 개인 개인들의 집합체라는 진술이 그 의미를 대변한다. 세상은, 어차피 혼자다. 부모형제간도 타인인데 하물며 친구나 애인은.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서로 만나고 사랑을 하고 싸우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는 것을 되풀이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안타까운 점 하나는, 그 개인, 즉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그 '나'는 모두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상에 대해서, 사랑에 대해서, 일과 꿈에 대해서. 어떻게 사는 것이 더 잘 사는 것인지, 어떤 선택이 더 현명한 것인지, 어떤 삶을 지향해야 하는지 말이다. 미혼이나 비혼이나, 가족을 꾸리고 있는 자도 마찬가지라는 점이다. 그러나 소설에서는 미혼여성으로 축소화되고 있는 인상이어서 안타깝다. 조금 더 포괄적으로 접근했어도 좋지 않았을까 하는 것 말이다. 은수, 재인, 유희 이 세 여성의 연애와 결혼관을 통해 보여지는 그들의 삶과 진중한 고민, 그리고 해결방안이 대의적 의미를 못 가지는 점이 안타까웠다는 것.
  그러나 충분히 그들의 고민에 동의할 수 있다는 것,은 나도 그 범주에 포함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겪었던 이십대 후반, 내가 겪고 있는 서른 초입이라고 해서 왜 그저 평탄하기만 하겠는가. 뭐랄까, 멋져보이는 그녀들에게도 이런 고민과 서글픈 현실이 있었다는 것 만으로도 위안이 되는 못된 심리. 허울 속에서 썩고 있던 그녀들의 마음을 슬쩍 엿보고 난 후에 가지게 되는 이 알량한 안도감. 그것이 책을 다 읽고나서 선뜩하게 느껴진다. 어쩌면 작가가 바란 의도였을까. 이런 알량한 마음, 그 마음을 확인하며 치졸한 '나'를 실감하게 하는 작용, 말이다.

  도시
  도시의 삶이란 그런 것이다. 개인과 개인들이, 통념에 어긋나지 않게 사는 것. 그것이 가장 안전하며 가장 바람직하다. 그렇지 않을 경우, 예를 들어, 함부로 꿈을 좆는다거나, 함부로 통념이 가진 위선에 맞선다거나, 함부로 자신을 사랑하는 걸 포기하게 될 경우, 도시의 삶은 영위할 수 없다.
  소설 속 인물들이 움직이는 동선은 사건이 벌어지는 공간에서 이뤄진다. 단순히 도시, 즉 서울이라는 물리적 지리공간 뿐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외로움을 느끼지만 절대 외롭다 발설하지 않으며, 외롭기 때문에 사랑을 하고, 사랑을 해도 그 외로움이 극복되지 않아 다시 이별하게 된다. 그러나 도시의 불문율이 있다. 그건, 바로, 행복해서는 안 된다는 것. 도시적 삶의 행태는 다분히 행복하다와 거리가 있어야 한다. 외롭고, 쓸쓸하며 고독한. 거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지만 그것이 오히려 더 우울한 자태가 되버리는. 그리하여 도시의 삶이란 그저 그렇게, 오늘도 고층빌딩의 잿빛을 닮은 하루를 보내는 것이다. 판에 박힌듯, 누구나 그러하듯 말이다.
  소설 속에서의 도시, 즉 서울은 소비의 공간이다. 물질의 소비,뿐만이 아니다. 사랑을 하고, 의심을 하고, 믿음을 가지며, 슬프고, 기쁘고, 외롭고 우울하고 등, 모든 감정들을 소비하기에 적절한 공간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개인이 많기 때문이다. 개개인이 많아질수록 외로움은 깊어간다. 관계가 복잡해질수록 고독은 짙어간다. 그러므로 과잉된 감정을 처치해야 한다. 사랑으로 우정으로, 혹은 그 어떤 양태의 관계를 통해서라도. 소설 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조절능력이 미약하다. 태오는 너무 많이 사랑하며, 은수는 너무 많이 생각하며, 재인은 너무 많이 계산하고, 유희는 너무 많이 희망적이다. 유준은 너무 많이 낙관적이며 김영수는 너무 많이 어둡다. '너무 많이'라는 과잉들의 충돌이 관계의 틈을 비집고 나가 갈등을 만든다. 그리고 그 갈등은 결국 파국으로, 혹은 화해로 맺어진다. 도시의 삶이란 그런 것이다. 언제나 부족한 시간에 내 과잉된 감정을 최소화 시키는 일상을 보내는 것. 그러니 갈등은 필연적이며, 관계의 얼그러짐 또한 내재되어 있는 삶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달콤한 당신들의 도시
  소설은 아주 명확하다. 등장인물들의 캐릭터는 모두 분명하고(너무 분명해 빤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갈등은 현장감있게 처리되었으며, 문체는 재기발랄하여 가독성이 높고, 메시지도 똑부러진다. 더할나위 없이 재미있는 소설,이다. 그런데 어쩐지 조금 씁쓸하다.
  나와 동갑내기인 인물들의 일상을 훔쳐보면서 나는 그들에게서 나를 발견하곤 했다. 너무나 닮아서 속이 쓰리기도 했다. 그러나 가만히 들여다보니 나와 전혀 닮지 않은 부분도 많다. 보편적이지 못한 건 나일까, 소설 속 인물일까. 나는 내가 평범하게, 보통의 일상을, 그저 평이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내 사고체계도 그저 평균치를 맴돈다도 믿으며 살았는데, 가만히 보니 나는 좀 얼뜨기였다는 느낌이 든다. 얼뜨기가 아니라면 촌스러운 사람이거나, 촌스러운 사람이 아니라면 세상 물정에 어둔 사람. 그도 아니면, 뭐랄까 조금 뒤떨어진 사람으로 살아왔다는 생각 말이다. 그건 아마도 작가의 진술이 확정적이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누구나 그럴지도 몰라, 라는 여지를 남겨두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모두 이렇다고! 라고 큰 소리로 말하니, 거기에 포함되지 못한 나는 지레 주눅이 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정말, 나만, 그렇게 읽은 것일까?

  소설을 다 읽고서 나는 섣불리 인물들의 내일을 상상하지 않기로 했다. 그들은 행복하거나 혹은 외로울 것이다. 쓸쓸하거나 혹은 열정에 불타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안정되거나 혹은 여전히 불안할지도 모른다. 여하튼, 인생이란 흐르는 것이 아닌가. 나의 시계바늘이 움직이는 만큼 당신의 시계도 똑같이 움직일 것이다. 도시의 시간이 그러하듯, 도시를 메꾸고 사는 개개인들의 시계가 그러하듯 말이다. 그러니,
  잘 살아라, 지금껏 살았던대로 살아라, 너희들. 함부로 아프고, 함부로 똑똑한 척 하고, 함부로 우울해하고, 함부로 예쁜 척 하고, 함부로 사랑하면서 살아라. 그것이 가장 도시인 다운 삶일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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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마늘빵 > '미학 오디세이'의 힘! - 진중권 인터뷰








1994년에 1권과 2권이 나왔어요. 3권이 2004년에 나와 10년 만에 완간 비슷하게 된거구요.


단문이고 구어체를 많이 썼거든요. 글을 써놓고 입으로 읽어서 잘 안 읽히면 끊어 썼어요. 입에다 맞췄죠. 책에 도판도 많이 들어갔고. 그때는 그게 튀는 거였어요. 경박하다, 젊잖치 못하다는 평을 들었죠. 그 후로 인터넷 시대가 되니까 구어체가 익숙해지고, 영상의 시대가 시작됐잖아요. 그래서 지금은 그게 표준이 된 거죠.

지금은 입문서들이 가벼워지고, 영상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죠. 그때만해도 그런 책은 많지 않았거든요. 미디어 환경의 변화때문에 살아남은 책이 아닌가 생각해요.




삼성 대위법이라고...멜로디가 동시에 3, 4개가 동시에 진행되며 화음을 이루는 다성음악처럼, 이 책에서도 그렇게 3개의 다른 축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어요. 크게 미학사에 대한 이야기가 한 축 이구요. 또 한 축은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의 대화를 통해서 미학에 필요한 기본적인 개념을 짚어주고 있어요. 간단한 철학사를 설명하는 거죠.

미학은 철학의 일부기 때문에 철학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 없이는 이해하기 어려워요. 마지막 한 축은 1권에서의 에셔, 2권 마그리뜨, 3권 피라네시의 작품 세계를 소개하고 있죠. 이 세 가지 축이 각자 흐름을 가지고 서로 도움을 주면서 진행이 되다가 어느 순간이 되면 다 만나게 되요.



세 사람은 각자 다르죠. 에셔는 네덜란드, 마그리뜨는 벨기에, 피라네시는 200년 전의 이탈리아 사람 이예요. 이 사람들의 그림의 특징은 세계를 그린 게 아니라 자기들의 머리 속을 그렸다는 것이죠. 세계의 이미지가 아니라 관념의 이미지를 그린 거예요.

에셔는 수학과 논리학을 그림으로 그렸죠. 마그리뜨는 철학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어요. 실제론과 관념론이죠. 지금 내가 보는 게 정말 존재하느냐 내 의식이 만들어 낸 거냐. 실제로 이건 철학에서 가장 오래된 주제예요. 피라네시 같은 경우는 그림 속의 건물들을 보면 말이 안 되요. 존재하지 않는 건물이죠. 머리 속에서 상상해서 그린 거예요.

이런 것들을 기술적 형상이라고 하는데, 요즘 굉장히 중요해 지고 있죠. 점점 우리 세계가 그림으로 이루어지고 있잖아요. 내가 직접 본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그린 그림이죠. 그 그림 속에서 사람들은 그걸 보고 세계의 그림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중요한 건 그 사진이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이고, 그 사람의 머리 속을 읽는 게 중요하죠. 그 사람들의 그림을 택했다는 건 그런 의미예요. 미학이라는 철학적 관념을 설명하는데 편했다는 거죠.



그런 얘기 많이 들었어요. 내 책 읽고서, 미학 공부 시작했다가 너무 어려워서 깜짝 놀랬다는. 어떤 분들은 책이 쉽다고 하면, 쉽게 쓴 줄 알아요.


재미 있으려면 놀아야 되는 거죠. <왕의 남자> 보면 광대들이 줄 위에서 놀잖아요. 줄 위에서 퉁퉁 튀면서 자유롭게. 하지만 그렇게 놀 수 있게 되기까지는 많은 훈련이 필요하겠죠. 사람들은 그건 모르고, 줄 위에서 재미있게 노는 것만 보잖아요. 사실 굉장히 힘들지만 힘이 드는 티를 내지 않는 거예요.

글을 대중적으로 쓴다는 건 그런 거 같아요.쓰는 사람이 글을 쉽게 쓰면 남는 게 없잖아요. 그렇지 않으려면, 많은 독서들과 계획들을 바탕에 깔아야 되거든요. 그에 대한 주체적인 해석들도 깔고 그 위에서 놀아야 되는데 그게 힘들다는 느낌을 주면 안 되는 거예요.




원래는 고등학교 이상을 염두에 두고 썼어요. 고등학생부터 대학교수님들 까지…그런데, 요즘은 중학생들도 잘 읽었다고 편지가 와요.

전 이 책에 이중코드를 넣었어요. 예를 들어, 에코의 <장미의 이름>은 모르고 봐도 재미있어요.
그 자체로 의미 있는 독서구요. 그런데, 인문학을 좀 알고 계신 분들이 보면, 이 책에 담긴 여러 가지 복잡한 코드들을 읽을 수 있거든요. 대중성과 전문성을 다 갖춘 것이 바로 이런 이중코드죠.


저는 이 책을 여러 번 읽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한번 읽으면 안돼요. 제가 거기에 집적해 놓은 정보량이 굉장히 많거든요. 농축하고 압축해야 책이 오래가요.

순간적인 베스트셀러처럼 확 팔리고 안 팔리는 책들은 참신한 생각 하나 가지고 쓰는 거죠. 그게 그 시대의 감각과 맞으면 되는 거고. 하지만 스테디셀러로 가려면, 밑에 기본적인 정보량의 있어야 되요. 그때 그때의 트렌드를 뛰어넘는 오래갈 수 있는 내용들, 근본적인 것을 깔아줘야 하는 거죠.



이 책을 읽고 대부분은 책에 나오는 걸 다 알았다고 생각하는데, 전 사다리만 놓아준 거예요. 독자들이 그 사다리를 타고 지붕으로 올라가서 써먹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독서가 필요해요. 책에 나온 하나하나의 항목에 대해서 알아 가야죠.






네이버 뉴스 많이 보죠. 검색으로 네이버 지식인도 찾아봐요.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 쓸 때 도움이 많이 됐어요.

저는 학생들이 질문하잖아요. 그럼 이렇게 얘기해요. 나한테 물어보지 말고 네이버에 찾아보라고. 가령 단순한 정보 같은 경우, 저는 대충 얘기해 주고 자세한 것은 네이버에 가서 찾아보라고 해요.




예전에는 지식이 사람 머리 속에 들어있었는데, 이제는 외장이 되는 거잖아요. 그러면, 인간의 두뇌기능이 다른 쪽으로 진화해야 되는 거예요. 예전에는 인간 두뇌의 중요한 기능이 계산 능력과 암기 능력이거든요. 그런데, 이제는 암기는 데이터베이스가 대신해주고, 계산은 프로세서가 해줘요.

난 그게 인간이 퇴화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거기서 또 다른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요. 인간의 능력을 다른 방향으로 쓰는 거죠. 그게 바로 조합하는 것 이예요. 원하는 정보를 찾아서 새로운 정보로 조직해 내는 능력. 영화로 치면 몽타주 같은 것이죠. 어디 있을 지 모르는 보물섬을 찾아가듯이 항해를 해서 보물을 찾고, 그 보물을 조합해서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내는 것이 인간의 역할이죠.

사실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은 필요한 자료의 80% 가량은 인터넷에서 찾았어요. 저도 놀랬어요.




점점 미디어 환경은 문자가 사라지고 문자가 소리와 그림이 되고 있어요. 예전에는 활자 권력이었잖아요. 그런데 그것이 몰락하고, 소통의 중요한 수단이 소리가 되어 가고 있어요.

인터넷 글쓰기라는 것은 소리를 글로 쓰는 것 이예요.글을 쓰는 상황 자체가 대화적 이잖아요. 정서적 친교이구요. 사실 그 옛날 원시 때 존재했던 것이 구술 문화예요. 이제 새롭게 일어나는 지금의 현상을 전 제 2차 구술문화라고 부르는데, 거기엔 활자 문화를 뛰어넘을 소통의 가능성이 있어요. 하지만, 제 2차 구술 문화는 텍스트를 바탕에 깔고 일어나요. 이럴 때일 수록 텍스트를 읽고 쓰고 이해하는 능력이 굉장히 중요해질 거예요.

미래는 둘로 가는데 하나는 프로그램을 하는 사람들이고, 또 하나는 프로그래밍 당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요. 프로그래밍 하는 사람들은 텍스트를 깔고 즉, 합리성과 독해, 이해 능력을 가지고 그림을 이해하고 만드는 사람이 세상을 움직일 거예요.

미래의 문맹자는 그림을 못 읽는 사람들 이예요.남들이 만든 그림에 주입 당하는 사람들이죠. 여러분들은 어느 쪽에 속하겠느냐. 그림 속의 텍스트를 이해하고, 자기 속의 텍스트를 그림으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될거냐. 아니면, 남들이 만든 그림을 가지고 , 그걸 세상이라고 착각하고 살겠느냐.

저는 이런 시대에 오히려 결정적인 것이 이성이라고 생각해요. 활자 시대에 가장 중요했던 것, 그걸 얻을 수 있는 곳이 바로 책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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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조선인 > 유홍준 문화재청장의 '문화유산을 보는 눈'

<나의문화유산답사기>로 우리 땅과 문화를 보는 눈을 틔워준 유홍준 문화재청장의 열린 강좌 <우리 문화유산을 보는 눈>을 지상연재합니다. 별다른 의미를 못 느끼고 지나쳤던 유적을 꼼꼼히 답사하면서 보석을 캐내듯 이 땅에 스민 역사의 자취와 조상의 숨결을 발굴해내는 유 청장의 강좌를 생생하게 만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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