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kimji > 달콤한 당신들의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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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나의 도시
정이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7월
평점 :
달콤한
달다,의 반대 의미는 무얼까. 쓰다? 짜다? 달지 않다? 아무 맛도 없다? 달콤한,이 수식하는 건 '나의', '도시'다. 달콤한 나. 혹은 달콤한 도시. 그러나 독자는 이미 알고 있다. 달콤하다,가 반어적인 의미라는 것 쯤은 말이다.
인물들의 현실은 다분히 달지 않다. 해놓거나 이룬 거 없는 서른둘이라는 나이, 녹록하지 않은 가족사, 멋질 것도 근사할 것도 없는 일, 너무 늦었거나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닌 희망이나 꿈도 달지 않다. 그 뿐인가. 언제나 지끈지끈 머리 아픈 연애는 어떤가. 일곱살 연하남과의 연애,도 연애지만 결혼을 떠올리며 만나는 반듯반듯한 30대 중반의 남자와의 연애도 그리 수월치 않다. 이혼남이 된 첫사랑과의 재회, 오래된 우정의 선을 넘길듯 말듯한 이성친구와의 관계도 묘연하다. 연애 뿐만이 아니다. 결혼은 어떻고, 이혼은 또 어떤가.
사람 사는 일이 다 그러하다,고 쉽게 말할 수 있다. 누구나 그렇게 복닥복닥 살아가는 거라고,도 할 수도 있다. 햇빛 쨍 한 날이 있으면 비가 오는 날도 있는 거라고, 말은 쉽게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일이 내 일이 되었을 때의 막막함이라든지, 절박함, 혹은 절망감, 때로는 자포자기도 할 수 있는 (기이한) 용기를 생각해보자.(아, 괴롭다). 하루하루는 고만고만한데, 나이는 점점 더 늘어가는데 왜 점점 더 우울해지고 점점 더 부족한 것들 투성일까(부족한 건 점점 더 늘어나기까지 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한치의 발전도 없으며 왜 한 가닥의 희망도 한 뼘의 기쁨도 늘지 않을까. 그건, 바로, 현실이기 때문이다. 현실,이라는 것 자체가 원래 그렇게 생겨먹은 것이다. 돈이 있나 없나, 어리나 늙었거나, 애인이 있거나 없거나, 여자거나 남자거나, 당신이거나 나이거나. 현실이 그렇게 단 것이 못 된다니, 그럴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런데 이 소설에는 다른 원인이 하나 더 있다. 학교를 졸업하면 취직을 하고, 이십대후반이 되면 결혼을 하는 것. 이성관계의 양다리는 안 되고, 직장에서는 유능해야 하며, 정의로워야 하고, 인간이라면 모름지기 이만큼은 해야 된다는 사고방식. 바로 통념이다. 물론 통념도 현실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으나, 소설 속에서 보여지는 통념은 조금 다르게 보인다. 예를 들면 상품의 브랜드네임으로 인물, 소설적 상황, 배경의 이미지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나이키 운동화, 이효리의 새 앨범, 정우성의 외모, 애니콜, 생고구마칩, 리바이스타입원 청바지, 스타벅스, 지펠 등이 이 시대를 형상화 할 수 있는 대표 이미지로 등장한다. 그러니까, 이 시대의 30대 미혼(혹은 비혼) 여성의 취향,이 마치 꼭 저런 것들이 일상 속에 스며들어 있다는 전제 말이다. 통념이라 하기보다는 정형성,이라는 의미가 조금 더 가까운 것들. 그래서 위험하다. 그 정형성은 인물들의 캐릭터를 확고하게 만드는데 수월하다. 그러나 그것은 반대로 독자를 소외시키기에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가는 용감하게 실명을 사용한다. 현실감과 현장감을 생생하게 전달하고 싶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음' 혹은 '그것만이라고는 할 수 없음'에 대해서 어떻게 반박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형성에서 한치의 다름을 허용하지 않음, 그것이 종종 가독을 저해하지만 이중적이게도 가독을 위한 친절한 안내가 되기도 한다는 건 분명하다.
인물들은 그런 통념에 갇히는 것을 원하지 않으면서도 끊임없이 그 통념에 자신을 넣으려고 애쓴다. 그것을 제도권 안으로의 안전한 귀착으로 여기면서, 그러나 그것이 속물로 치부될까봐 섣불리 인정하지도 않으면서. 결국 달콤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 달콤함을 꿈꾸고, 그러나 달콤하지 않은 끝을 만나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달콤하기 위해서 산다,라고 말한다. 어쩌면 이 소설의 갈등은 바로 개인과 통념사이의 싸움이 아니었을까. 인물들끼리의 갈등보다 인물이 통념과 싸우는 형색이 더 짙었다. 그러나 독자는 안다. 결국, 현실의 인물이 통념을 이겨 버릴 수는 없다는 것. 그래서 따지고보면 소설은 처음부터 끝이 예상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달콤하다,라고 말했으니까. 달콤하다고 말하는 건 달콤하지 않다는 것이니까 말이다. 극명하게 정확한 메시지 전달이었다는 것이다.
나의
1975년생이면 주인공 오은수는 나와 동갑니다. 교과서가 바뀌었고, 수능0세대였으며, 방위가 사라진 세대다. 졸업해보니 IMF여서 유학을 가거나 대학원에 들어갔다. 또 다시 졸업을 하고 다시 현실로 와보니 2차 IMF가 눈앞에 떡 펼쳐져 있었다. 75년생들은 토끼띠다. 두 귀를 축 늘어트리고 코를 찡긋거리면서 불안한 시선으로 두리번거리는 희멀건한 토끼 한마리,를 떠올리면 75년생들을 대변하는 이미지가 될까? 여하튼, 주인공과 친구들은 75년들이다. 곧 서른둘이 되고, 일도 연애도 잘 풀리지 않으면서 결혼에 대한 강박관념, 꿈에 대한 강박관념, 연애에 대한 강박관념 속에서 허부적거린다.
삼십대는 쉽게 자신의 세계관을 수정하지 않는다. 고집이 아니라, 이제 굳혀진 자신의것,이 되버린 것이다. 제 몸인양 자신의 사고는 자신의 생각대로 고정되었을 뿐이다. 유연할 것 같지만 결단코 유연하지 못하는 것이 삼십대의 마인드일지도 모른다. 모두가 철없다고 손가락질하던 이십대를 갓 지나왔고, 이제 어디서든지 내 몫의 일도 할만하다. 그러나 중년은 아니니 젊은 것 같지만 푸릇한 20대를 보면 기가 죽는 걸 어쩔 수 없다. 그것이 소설 속 인물들이 가진 공통점이고, 그래서 그들은 갈등하며 싸우고 다시 화해한다. 내 사고를 바꿀 수 없으므로 싸울 수밖에 없고, 그들은 동년배이기 때문에 화해한다. 그들의 결속을 단단히해야 20대에게 치여도, 중년에게 눌려도 버틸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소설 속 오은수와 재인과 유희, 유준은 명확한 캐릭터를 가지고 있는 개인으로 등장하지만 그들은 모두 75년생을 대표하는 대명사와 같다. 75년생이라고 한정할 필요도 없다. 이 시대의 삼십대들의 자화상이기도 하니까. 단 오은수가 주인공이기 때문에 극단에 선 인물들 사이에 절충안같은 성격으로 만들어놨을 뿐,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두 같은 목소리이다. 그 목소리는 바로 소설의 메시지와 맞닿아 있다.
달콤한 '나의' 도시,라는 것. 우리의 도시가 아니라 너의 도시가 아니라 나의 도시라는 것에 주의를 둘 필요가 있다. 소설에서도 등장하지만 사회를 이루는 최소단위는 가정이라고 배웠지만 실제로는 이 개인 개인들의 집합체라는 진술이 그 의미를 대변한다. 세상은, 어차피 혼자다. 부모형제간도 타인인데 하물며 친구나 애인은.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서로 만나고 사랑을 하고 싸우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는 것을 되풀이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안타까운 점 하나는, 그 개인, 즉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그 '나'는 모두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상에 대해서, 사랑에 대해서, 일과 꿈에 대해서. 어떻게 사는 것이 더 잘 사는 것인지, 어떤 선택이 더 현명한 것인지, 어떤 삶을 지향해야 하는지 말이다. 미혼이나 비혼이나, 가족을 꾸리고 있는 자도 마찬가지라는 점이다. 그러나 소설에서는 미혼여성으로 축소화되고 있는 인상이어서 안타깝다. 조금 더 포괄적으로 접근했어도 좋지 않았을까 하는 것 말이다. 은수, 재인, 유희 이 세 여성의 연애와 결혼관을 통해 보여지는 그들의 삶과 진중한 고민, 그리고 해결방안이 대의적 의미를 못 가지는 점이 안타까웠다는 것.
그러나 충분히 그들의 고민에 동의할 수 있다는 것,은 나도 그 범주에 포함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겪었던 이십대 후반, 내가 겪고 있는 서른 초입이라고 해서 왜 그저 평탄하기만 하겠는가. 뭐랄까, 멋져보이는 그녀들에게도 이런 고민과 서글픈 현실이 있었다는 것 만으로도 위안이 되는 못된 심리. 허울 속에서 썩고 있던 그녀들의 마음을 슬쩍 엿보고 난 후에 가지게 되는 이 알량한 안도감. 그것이 책을 다 읽고나서 선뜩하게 느껴진다. 어쩌면 작가가 바란 의도였을까. 이런 알량한 마음, 그 마음을 확인하며 치졸한 '나'를 실감하게 하는 작용, 말이다.
도시
도시의 삶이란 그런 것이다. 개인과 개인들이, 통념에 어긋나지 않게 사는 것. 그것이 가장 안전하며 가장 바람직하다. 그렇지 않을 경우, 예를 들어, 함부로 꿈을 좆는다거나, 함부로 통념이 가진 위선에 맞선다거나, 함부로 자신을 사랑하는 걸 포기하게 될 경우, 도시의 삶은 영위할 수 없다.
소설 속 인물들이 움직이는 동선은 사건이 벌어지는 공간에서 이뤄진다. 단순히 도시, 즉 서울이라는 물리적 지리공간 뿐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외로움을 느끼지만 절대 외롭다 발설하지 않으며, 외롭기 때문에 사랑을 하고, 사랑을 해도 그 외로움이 극복되지 않아 다시 이별하게 된다. 그러나 도시의 불문율이 있다. 그건, 바로, 행복해서는 안 된다는 것. 도시적 삶의 행태는 다분히 행복하다와 거리가 있어야 한다. 외롭고, 쓸쓸하며 고독한. 거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지만 그것이 오히려 더 우울한 자태가 되버리는. 그리하여 도시의 삶이란 그저 그렇게, 오늘도 고층빌딩의 잿빛을 닮은 하루를 보내는 것이다. 판에 박힌듯, 누구나 그러하듯 말이다.
소설 속에서의 도시, 즉 서울은 소비의 공간이다. 물질의 소비,뿐만이 아니다. 사랑을 하고, 의심을 하고, 믿음을 가지며, 슬프고, 기쁘고, 외롭고 우울하고 등, 모든 감정들을 소비하기에 적절한 공간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개인이 많기 때문이다. 개개인이 많아질수록 외로움은 깊어간다. 관계가 복잡해질수록 고독은 짙어간다. 그러므로 과잉된 감정을 처치해야 한다. 사랑으로 우정으로, 혹은 그 어떤 양태의 관계를 통해서라도. 소설 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조절능력이 미약하다. 태오는 너무 많이 사랑하며, 은수는 너무 많이 생각하며, 재인은 너무 많이 계산하고, 유희는 너무 많이 희망적이다. 유준은 너무 많이 낙관적이며 김영수는 너무 많이 어둡다. '너무 많이'라는 과잉들의 충돌이 관계의 틈을 비집고 나가 갈등을 만든다. 그리고 그 갈등은 결국 파국으로, 혹은 화해로 맺어진다. 도시의 삶이란 그런 것이다. 언제나 부족한 시간에 내 과잉된 감정을 최소화 시키는 일상을 보내는 것. 그러니 갈등은 필연적이며, 관계의 얼그러짐 또한 내재되어 있는 삶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달콤한 당신들의 도시
소설은 아주 명확하다. 등장인물들의 캐릭터는 모두 분명하고(너무 분명해 빤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갈등은 현장감있게 처리되었으며, 문체는 재기발랄하여 가독성이 높고, 메시지도 똑부러진다. 더할나위 없이 재미있는 소설,이다. 그런데 어쩐지 조금 씁쓸하다.
나와 동갑내기인 인물들의 일상을 훔쳐보면서 나는 그들에게서 나를 발견하곤 했다. 너무나 닮아서 속이 쓰리기도 했다. 그러나 가만히 들여다보니 나와 전혀 닮지 않은 부분도 많다. 보편적이지 못한 건 나일까, 소설 속 인물일까. 나는 내가 평범하게, 보통의 일상을, 그저 평이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내 사고체계도 그저 평균치를 맴돈다도 믿으며 살았는데, 가만히 보니 나는 좀 얼뜨기였다는 느낌이 든다. 얼뜨기가 아니라면 촌스러운 사람이거나, 촌스러운 사람이 아니라면 세상 물정에 어둔 사람. 그도 아니면, 뭐랄까 조금 뒤떨어진 사람으로 살아왔다는 생각 말이다. 그건 아마도 작가의 진술이 확정적이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누구나 그럴지도 몰라, 라는 여지를 남겨두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모두 이렇다고! 라고 큰 소리로 말하니, 거기에 포함되지 못한 나는 지레 주눅이 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정말, 나만, 그렇게 읽은 것일까?
소설을 다 읽고서 나는 섣불리 인물들의 내일을 상상하지 않기로 했다. 그들은 행복하거나 혹은 외로울 것이다. 쓸쓸하거나 혹은 열정에 불타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안정되거나 혹은 여전히 불안할지도 모른다. 여하튼, 인생이란 흐르는 것이 아닌가. 나의 시계바늘이 움직이는 만큼 당신의 시계도 똑같이 움직일 것이다. 도시의 시간이 그러하듯, 도시를 메꾸고 사는 개개인들의 시계가 그러하듯 말이다. 그러니,
잘 살아라, 지금껏 살았던대로 살아라, 너희들. 함부로 아프고, 함부로 똑똑한 척 하고, 함부로 우울해하고, 함부로 예쁜 척 하고, 함부로 사랑하면서 살아라. 그것이 가장 도시인 다운 삶일테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