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바람구두 > 엄마는 길들여지지 않았다.
-
-
십시일反 - 10인의 만화가가 꿈꾸는 차별 없는 세상 ㅣ 창비 인권만화 시리즈
박재동 외 지음 / 창비 / 2003년 8월
평점 :
이번 봄에 내가 만드는 잡지의 특집 주제는 ['대한민국'의 상처와 희망]에 대한 것이었다. 우리 땅에 살고 있는 50인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그들이 이 땅에 살면서 그것이 역사적 현실이든, 정치적 현실이든 간에 받은 고통과 희망에 대해 이야기하도록 하자는 기획 취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 가운데는 대한민국의 국가 형성기로부터 시작된 역사적 상처들 - 히로시마 원폭 피해자, 제주4.3, 한국전쟁전후 민간인 학살 피해자 등 - 과 현재 노동하는 대한민국의 슬픈 자화상들 - 외국인 이주노동자, 노동자, 농민, 비정규직 노동자, 비정규직 여성노동자 등 - 인권과 복지에 결부된 사람들 - 에이즈 감염자, 성전환자, 동성애자, 도시 빈민, 장애인, 납북자 가족, 탈북자 등 - 이외에도 청년 백수 등등 많은 이들의 생생한 육성을 담았다.
이 이야기를 구태여 하는 까닭은 국가인권위원회의 기획으로 십인의 만화가들이 모여 우리 사회의 차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기에 그 뜻이 비슷하다 여겨져서이다. 나는 이 책을 "평화박물관"에 갔다가 그야말로 십시일반으로 이 단체를 후원한다는 생각에서 구입했던 몇 권의 책 가운데 하나다. "평화박물관"은 서울 조계사 맞은 편 골목에 숨어 있으니 혹시 이 거리를 걷게 되시거든 한 번쯤 들러보는 일도 좋겠다. 이 책의 부제는 "10인의 만화가가 꿈꾸는 차별 없는 세상"이고, 이 책에 참여하고 있는 만화가들은 우리에게도 익숙한 박재동, 손문상, 유승하, 이우일, 이희재, 조남준, 홍승우 등을 비롯해 장경섭, 최호철, 홍윤표 등 아는 이들에겐 유명하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에겐 아직은 낯선 이름들도 있다.
먼저 한겨레 그림판으로 한동안 우리들의 만성 변비 문제를 말끔하게 해결해주는 통쾌함을 선사했던 박재동의 낯익은 카툰 형태의 그림들은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만든다. 그 가운데서도 우리 사회의 피라미드 구조를 잘 보여주는 "삶의 무게"는 현실의 먹이사슬 구조를 보여준다. 이 작품에서 그는 중산층 화이트 칼라 남성을 떠 받치고 있는 중산층 여성을 다시 받쳐들고 있는 가난한 여성, 그리고 다시 이 여성을 떠받들고 있는 여성이자 가난하고, 외국인 노동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종종 우리들은 일제의 조선 침탈을 만행이라 손쉽게 규정지으면서도 미국의 이라크 침략이나 우리의 이라크 파병에 대해선 손쉽게 눈감는다. 멀리 파키스탄과 인도의 아동 노동에 대해, 아프리카 소년 용병에 대해서는 아무런 편견없이 분노하면서도 스타벅스 커피 한 잔은 개인의 취향 문제로 가볍게 넘어갈 수 있다. 물론, 이런 발상 자체가 옹졸한 짓인지도 모르겠다. 빈곤의 피라미드가 저와 같을 진대 그 피라미드로부터 뉘라서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그러나 욕망이 발가벗고 달릴 때, 여기에 슬쩍 브레이크를 걸어주는 양심의 가책이라는 제동 장치마저 없이 자유로울 때 우리의 폭주는 무한을 질주하게 된다.
난 개인적으로 홍승우의 애독자 가운데 하나다. 그가 좋은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그가 적당히(?) 건강하다는 것, 이것은 대한민국 사회에서 여성문제에 대해 그나마 양심적인 반성을 하고 있는 남성이자 동성애에 대해서도 비교적 관대한 시선을 갖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앞서 말한 것처럼 적당히(?)라는 수식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음을 지적하고자 하는 의도가 숨겨져 있으며 여기에는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나 역시 그가 진출한 지점 이상 인식하고 있지 못함을 인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책의 42-45쪽에 담긴 작품 "Power of Love"는 서로 사랑을 느끼는 두 남녀가 있다. 다음 컷에서 남성은 제주도 신혼 여행지에서 자주 만날 수 있는 기념사진 같은 포즈로 어딘가를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그러나 여성은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한다. 발목에 죄수처럼 커다란 족쇄가 채워져 있는 것이다. 그러자 남성은 톱과, 절단기, 화공약품 등 온갖 것을 이용해서 여성의 발목에 채워진 족쇄를 떼어내려 한다.
결국 성공하지 못하자 이번엔 남성이 여성의 무거운 족쇄를 부둥켜 안고 다시 한 손으로 아까의 그 손가락 포즈를 취한다. 방향을 지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의 남성 화자는 계몽자의 위치를 갖는다. 그런데 이 포즈는 과연 바른 것일까? 아마도 여성주의적 시각에 대한 이해가 조금 더 깊었다면 이런 포즈, 이런 성역할 분담은 쉽게 나오지 않을 것이다. 물론 결론부에 가면 지쳐버린 남성을 헐크처럼 인상을 쓴 여성이 자신의 족쇄와 남성까지 들쳐메고 뚜벅뚜벅 걸어가는 것으로 마무리 짓고 있다. 물론 작가 홍승우가 여성주의의 눈치를 봐야 한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어쩐지 남성과 족쇄까지 엎고 걸어가는 여성의 걸어가는 방향이 마음에 걸린다. 여성주의 혹은 여성에 대한 이해와 공감을 표명하는 것은 남성, 혹은 남성 작가의 입장에서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한 번도 진지하게 여성(역할)이 되어 본 적이 없으며, 그들과 시선을 일치시켜 보려는 경험이 부족한 탓이리라.(혹, 어떤 이는 그러면 어떻게 하잔 말이냐고 되물을지도 모르겠다. 글쎄, 어쩌면 좋을까... 나라면 그녀가 어디로 가고 싶은지부터 먼저 물었을 것 같다. 쫌 그런가? ^^;;; 하긴 이런 이야기는 홍승우의 작품이니까 할 수 있는 투덜거림인지도 모르겠다.)
전에도 몇 번 이야기한 바있지만 내가 요근래 가장 좋아하는 작가는 조남준이다. 이번 작품집 "십시일반"의 뛰어난 작품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 역시 조남준의 것이었다. 그는 촌철살인의 위트와 날카로운 현실감각 그리고 문학적 내러티브 구조를 잘 버무려내는 능력이 특히 뛰어난 작가다. 이번 작품집에는 모두 두 편의 작품이 실려 있는데 하나는 "1단지 60평 이상, 2단지 40평 이상, 3단지 20평 이상"이란 식으로 계층서열화된 아파트 단지에서 겪게 되는 차별과 배제의 문제를 잡종견인 누렁이에 빗대어 유머러스하나 날카로운 현실풍자를 담은 작품이고, 두 번째 작품인 "누렁이2"는 가부장적 폭력 앞에 무차별로 노출된 어머니와 딸의 당당한 가출을 그리고 있다.
첫 장면에서 우리는 한 시골 '소년'이 울먹이며 누렁이를 애타게 부르는 장면을 보게 된다. 그리고 개울가 저 멀리서 개의 신음소리를 듣게 된다. 달려간 나는 아버지가 몇몇 남자들과 더불어 개 한 마리를 그야말로 복날 개패듯이 늘씬하게 패주는 장면을 발견한다. 누렁이는 나('소년')의 개였다. 정둘 곳 없던 내가 주워 밥을 주고, 운동시켜 보살핀 누렁이를 아버지가 친구들과 보신탕을 끓여 먹기 위해 그렇게 매 타작을 가하고 있었던 거다. 아버지의 친구가 묻는다. "성희가 알면 어쩔려구 그래?" "무슨 상관이야?" "그건 그렇구 개 패는 솜씨는 따로 있구만." "평소에 북어대가리하고 마누라 패던 솜씨지. 여자와 북어는 삼일에 한번씩 패야 길들일 수 있다구!"
나는 누렁이를 도와줄 수 없었다. 홀로 죄책감에 사로 잡혀 울고 있는데 누렁이가 줄을 끊고 도망가고 있었다. 다리 하나가 부러진 듯 세 다리로만 기어서 도망치고 있었다. 아버지 친구가 누렁이를 잡으러 가려 하자, 아버지가 막아선다. "봐라, 개새끼가 달리 개새끼여? 개새끼들은 주인이 오라면 다시 오게 돼 있어" 아버지는 몽둥이를 뒤에 숨긴 채 누렁이를 부른다. 작가 조남준은 컷 분할을 통해 점점 누렁이의 눈을 클로즈업해 보여준다. 눈물이 질질 흘러내려 공포에 질린 누렁이의 눈. 그러나 누렁이는 주인의 부름을 거절하지 못하고 주인을 향해 되돌아간다. 그리고 결국 누렁이는 아버지에게 잡혀 죽고 만다. 그 날밤 아버지는 술에 만취해 돌아왔고, 언제나처럼 엄마에게 매질을 가했다. 다음 장면에서 잠이 든 아버지를 버려두고 엄마는 짐을 챙긴다. 엄마는 나(성희)에게 같이 가겠느냐고 물어본다. 성희는 당연히 어머니를 따른다. 아버지가 달려나와 엄마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말한다. "여보, 내가 잘못했어. 다신 안 그럴께. 응, 죽을 죄를 졌어." 그러나 어머니는 아버지를 뿌리치고 길을 나선다. 등 뒤로 아버지의 고함 소리가 들린다. "그래, 잘 되나 두고 보자! 사내 아이 하나 제대로 낳지도 못하는 거 가버려라!"
조남준은 자유롭게 달려나가는 어린 나(성희)를 그려놓고, 옆에 이런 지문을 삽입한다.
이제 사내아이처럼
행동 안해도 된다는 생각에
아주 즐거웠다.
그동안 엄마와 내가
구박에서 벗어나는 길은
내가 사내아이처럼
행동하는 것인 줄 알았다.
엄마는 길들여지지 않았다.
국가인권위원회에서 기획한 이 작품집에는 이외에도 외국인 이주노동, 학력, 빈부, 성 차별 등 다양한 차별의 문제들이 감동적인 이야기들과 함께 담겨 있다. "십시일반"이란 본래 열 숟가락으로 한 그릇의 밥을 만든다는 말이다. 그런데 나는 이 말이 어쩐지 "行百里者半於九十"이나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란 실천 논리처럼 들렸다. 앞의 말이 백리를 가고자 하는 이는 구십리를 갔을 때 반을 왔다고 한다는 자세를 말하는 것이라면 뒤엣말은 말 그대로 천리를 가는 걸음도 그 시작은 한 걸음부터란 말이라 굳이 뜻을 따지자면 서로 매우 먼 말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것이 이유야 어찌됐건 간에 '실천'이 중요하단 말로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