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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시일反 - 10인의 만화가가 꿈꾸는 차별 없는 세상 창비 인권만화 시리즈
박재동 외 지음 / 창비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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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봄에 내가 만드는 잡지의 특집 주제는 ['대한민국'의 상처와 희망]에 대한 것이었다. 우리 땅에 살고 있는 50인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그들이 이 땅에 살면서 그것이 역사적 현실이든, 정치적 현실이든 간에 받은 고통과 희망에 대해 이야기하도록 하자는 기획 취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 가운데는 대한민국의 국가 형성기로부터 시작된 역사적 상처들 - 히로시마 원폭 피해자, 제주4.3, 한국전쟁전후 민간인 학살 피해자 등 - 과 현재 노동하는 대한민국의 슬픈 자화상들 - 외국인 이주노동자, 노동자, 농민, 비정규직 노동자, 비정규직 여성노동자 등 - 인권과 복지에 결부된 사람들 - 에이즈 감염자, 성전환자, 동성애자, 도시 빈민,  장애인, 납북자 가족, 탈북자 등 - 이외에도 청년 백수 등등 많은 이들의 생생한 육성을 담았다.

이 이야기를 구태여 하는 까닭은 국가인권위원회의 기획으로 십인의 만화가들이 모여 우리 사회의 차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기에 그 뜻이 비슷하다 여겨져서이다. 나는 이 책을 "평화박물관"에 갔다가 그야말로 십시일반으로 이 단체를 후원한다는 생각에서 구입했던 몇 권의 책 가운데 하나다. "평화박물관"은 서울 조계사 맞은 편 골목에 숨어 있으니 혹시 이 거리를 걷게 되시거든 한 번쯤 들러보는 일도 좋겠다. 이 책의 부제는 "10인의 만화가가 꿈꾸는 차별 없는 세상"이고, 이 책에 참여하고 있는 만화가들은 우리에게도 익숙한 박재동, 손문상, 유승하, 이우일, 이희재, 조남준, 홍승우 등을 비롯해 장경섭, 최호철, 홍윤표 등 아는 이들에겐 유명하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에겐 아직은 낯선 이름들도 있다.

먼저 한겨레 그림판으로 한동안 우리들의 만성 변비 문제를 말끔하게 해결해주는 통쾌함을 선사했던 박재동의 낯익은 카툰 형태의 그림들은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만든다. 그 가운데서도 우리 사회의 피라미드 구조를 잘 보여주는 "삶의 무게"는 현실의 먹이사슬 구조를 보여준다. 이 작품에서 그는 중산층 화이트 칼라 남성을 떠 받치고 있는 중산층 여성을 다시 받쳐들고 있는 가난한 여성, 그리고 다시 이 여성을 떠받들고 있는 여성이자 가난하고, 외국인 노동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종종 우리들은 일제의 조선 침탈을 만행이라 손쉽게 규정지으면서도 미국의 이라크 침략이나 우리의 이라크 파병에 대해선 손쉽게 눈감는다. 멀리 파키스탄과 인도의 아동 노동에 대해, 아프리카 소년 용병에 대해서는 아무런 편견없이 분노하면서도 스타벅스 커피 한 잔은 개인의 취향 문제로 가볍게 넘어갈 수 있다. 물론, 이런 발상 자체가 옹졸한 짓인지도 모르겠다. 빈곤의 피라미드가 저와 같을 진대 그 피라미드로부터 뉘라서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그러나 욕망이 발가벗고 달릴 때, 여기에 슬쩍 브레이크를 걸어주는 양심의 가책이라는 제동 장치마저 없이 자유로울 때 우리의 폭주는 무한을 질주하게 된다.

난 개인적으로 홍승우의 애독자 가운데 하나다. 그가 좋은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그가 적당히(?) 건강하다는 것, 이것은 대한민국 사회에서 여성문제에 대해 그나마 양심적인 반성을 하고 있는 남성이자 동성애에 대해서도 비교적 관대한 시선을 갖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앞서 말한 것처럼 적당히(?)라는 수식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음을 지적하고자 하는 의도가 숨겨져 있으며 여기에는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나 역시 그가 진출한 지점 이상 인식하고 있지 못함을 인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책의 42-45쪽에 담긴 작품 "Power of Love"는 서로 사랑을 느끼는 두 남녀가 있다. 다음 컷에서 남성은 제주도 신혼 여행지에서  자주 만날 수 있는 기념사진 같은 포즈로 어딘가를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그러나 여성은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한다. 발목에 죄수처럼 커다란 족쇄가 채워져 있는 것이다. 그러자 남성은 톱과, 절단기, 화공약품 등 온갖 것을 이용해서 여성의 발목에 채워진 족쇄를 떼어내려 한다.

결국 성공하지 못하자 이번엔 남성이 여성의 무거운 족쇄를 부둥켜 안고 다시 한 손으로 아까의 그 손가락 포즈를 취한다. 방향을 지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의 남성 화자는 계몽자의 위치를 갖는다. 그런데 이 포즈는 과연 바른 것일까? 아마도 여성주의적 시각에 대한 이해가 조금 더 깊었다면 이런 포즈, 이런 성역할 분담은 쉽게 나오지 않을 것이다. 물론 결론부에 가면 지쳐버린 남성을 헐크처럼 인상을 쓴 여성이 자신의 족쇄와 남성까지 들쳐메고 뚜벅뚜벅 걸어가는 것으로 마무리 짓고 있다. 물론 작가 홍승우가 여성주의의 눈치를 봐야 한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어쩐지 남성과 족쇄까지 엎고 걸어가는 여성의 걸어가는 방향이 마음에 걸린다. 여성주의 혹은 여성에 대한 이해와 공감을 표명하는 것은 남성, 혹은 남성 작가의 입장에서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한 번도 진지하게 여성(역할)이 되어 본 적이 없으며, 그들과 시선을 일치시켜 보려는 경험이 부족한 탓이리라.(혹, 어떤 이는 그러면 어떻게 하잔 말이냐고 되물을지도 모르겠다. 글쎄, 어쩌면 좋을까... 나라면 그녀가 어디로 가고 싶은지부터 먼저 물었을 것 같다. 쫌 그런가? ^^;;; 하긴 이런 이야기는 홍승우의 작품이니까 할 수 있는 투덜거림인지도 모르겠다.)

전에도 몇 번 이야기한 바있지만 내가 요근래 가장 좋아하는 작가는 조남준이다. 이번 작품집 "십시일반"의 뛰어난 작품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 역시 조남준의 것이었다. 그는 촌철살인의 위트와 날카로운 현실감각 그리고 문학적 내러티브 구조를 잘 버무려내는 능력이 특히 뛰어난 작가다. 이번 작품집에는 모두 두 편의 작품이 실려 있는데 하나는 "1단지 60평 이상, 2단지 40평 이상, 3단지 20평 이상"이란 식으로 계층서열화된 아파트 단지에서 겪게 되는 차별과 배제의 문제를 잡종견인 누렁이에 빗대어 유머러스하나 날카로운 현실풍자를 담은 작품이고, 두 번째 작품인 "누렁이2"는 가부장적 폭력 앞에 무차별로 노출된 어머니와 딸의 당당한 가출을 그리고 있다.

첫 장면에서 우리는 한 시골 '소년'이 울먹이며 누렁이를 애타게 부르는 장면을 보게 된다. 그리고 개울가 저 멀리서 개의 신음소리를 듣게 된다. 달려간 나는 아버지가 몇몇 남자들과 더불어 개 한 마리를 그야말로 복날 개패듯이 늘씬하게 패주는 장면을 발견한다. 누렁이는 나('소년')의 개였다. 정둘 곳 없던 내가 주워 밥을 주고, 운동시켜 보살핀 누렁이를 아버지가 친구들과 보신탕을 끓여 먹기 위해 그렇게 매 타작을 가하고 있었던 거다. 아버지의 친구가 묻는다. "성희가 알면 어쩔려구 그래?" "무슨 상관이야?" "그건 그렇구 개 패는 솜씨는 따로 있구만." "평소에 북어대가리하고 마누라 패던 솜씨지. 여자와 북어는 삼일에 한번씩 패야 길들일 수 있다구!"

나는 누렁이를 도와줄 수 없었다. 홀로 죄책감에 사로 잡혀 울고 있는데 누렁이가 줄을 끊고 도망가고 있었다. 다리 하나가 부러진 듯 세 다리로만 기어서 도망치고 있었다. 아버지 친구가 누렁이를 잡으러 가려 하자, 아버지가 막아선다. "봐라, 개새끼가 달리 개새끼여? 개새끼들은 주인이 오라면 다시 오게 돼 있어" 아버지는 몽둥이를 뒤에 숨긴 채 누렁이를 부른다. 작가 조남준은 컷 분할을 통해 점점 누렁이의 눈을 클로즈업해 보여준다. 눈물이 질질 흘러내려 공포에 질린 누렁이의 눈. 그러나 누렁이는 주인의 부름을 거절하지 못하고 주인을 향해 되돌아간다. 그리고 결국 누렁이는 아버지에게 잡혀 죽고 만다. 그 날밤 아버지는 술에 만취해 돌아왔고, 언제나처럼 엄마에게 매질을 가했다. 다음 장면에서 잠이 든 아버지를 버려두고 엄마는 짐을 챙긴다. 엄마는 나(성희)에게 같이 가겠느냐고 물어본다. 성희는 당연히 어머니를 따른다. 아버지가 달려나와 엄마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말한다. "여보, 내가 잘못했어. 다신 안 그럴께. 응, 죽을 죄를 졌어." 그러나 어머니는 아버지를 뿌리치고 길을 나선다. 등 뒤로 아버지의 고함 소리가 들린다. "그래, 잘 되나 두고 보자! 사내 아이 하나 제대로 낳지도 못하는 거 가버려라!"

조남준은 자유롭게 달려나가는 어린 나(성희)를 그려놓고, 옆에 이런 지문을 삽입한다.

이제 사내아이처럼
행동 안해도 된다는 생각에
아주 즐거웠다.

그동안 엄마와 내가
구박에서 벗어나는 길은
내가 사내아이처럼
행동하는 것인 줄 알았다.

엄마는 길들여지지 않았다.

국가인권위원회에서 기획한 이 작품집에는 이외에도 외국인 이주노동, 학력, 빈부, 성 차별 등 다양한 차별의 문제들이 감동적인 이야기들과 함께 담겨 있다. "십시일반"이란 본래 열 숟가락으로 한 그릇의 밥을 만든다는 말이다. 그런데 나는 이 말이 어쩐지 "行百里者半於九十"이나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란 실천 논리처럼 들렸다. 앞의 말이 백리를 가고자 하는 이는 구십리를 갔을 때 반을 왔다고 한다는 자세를 말하는 것이라면 뒤엣말은 말 그대로 천리를 가는 걸음도 그 시작은 한 걸음부터란 말이라 굳이 뜻을 따지자면 서로 매우 먼 말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것이 이유야 어찌됐건 간에 '실천'이 중요하단 말로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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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아픔과 슬픔을 극복하는 냉혹?!
쥐 I
아트 슈피겔만 지음, 권희종 외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199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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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1958년 무렵 뉴욕 레고 파크. 여름이었다고 기억된다. 내가 열 살인가 열 한 살이었을 때…. 난 하우이, 스티브와 어울려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있었는데 그만 스케이트 끈이 끊어지고 말았다.
“야! 얘들아! 기다려.”
“꼴찌다! 꼴찌! 하하하”
“같이 가! 얘들아.”
아버진 마당에서 뭔가를 고치는 중이셨다.
“마침 들어오는구나. 이리 와서 이것 좀 잠깐 잡아주렴.”
“훌쩍, 네?”
“아티, 그런데 너 왜 우는 거니? 나무를 잘 붙들려무나.”
“제가 넘어졌는데요. 친구들이 절두고 가버리잖아요.”
아버진 톱질을 멈추셨다.
“친구? 네 친구들?”
“그 얘들을 방 안에다 먹을 것도 없이 일주일만 가둬놓으면….”
“…그 땐 친구란 게 뭔지 알게 될 거다.…”
<1권 본문 5-6쪽>

아트 슈피겔만의 『쥐(Muas)』는 모두 2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1권은 아버지 블라덱 슈피겔만의 청년기인 1930년대 중반부터 1944년 폴란드의 유대인 게토에 머물던 시기를 다루고, 2권은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작가는 ‘마우슈비츠’란 익살을 부리기도 하지만) 수용소에서 극적인 생존에 이르는 시기를 다룬다. 그러나 아트 슈피겔만의 『쥐(Muas)』는 과거사를 연대기적으로 구성하는 단순한 회상투로만 구성되진 않는다. 우리는 『쥐(Muas)』를 통해서 작가인 아들 아트 슈피겔만이 아버지 블라덱 사이에 놓인 경험의 차이, 감정의 차이를 느낄 수 있다. 그 이유는 작가가 『쥐(Muas)』를 통해 일정하게 의도하는 바가 성공적이었음을 뜻한다.

무엇보다 아트 슈피겔만의 『쥐(Muas)』가 홀로코스트를 다룬 수많은 작품들과 다른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은 이 작품이 과거와 현대를 번갈아 가며 대비시키고 있는 구조를 취하는데서 발생한다. 즉,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나(작가)와 과거 아우슈비츠에서 생환한 아버지 블라덱 사이의 현재적 갈등 구조는 끝내 해결되지 않지만, 작가는 『쥐(Muas)』의 작업을 위해 사이가 결코 좋을 수 없는 아버지를 정기적으로 방문해야만 한다. 두 사람의 사이가 좋을 수 없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궁극적인 원인은 앞서 인용하고 있는 『쥐(Muas)』의 첫 도입부에서 이미 극명하게 드러난다.

유대인 강제수용소의 체험을 나에게 최초로 각인시켜준 인물은 우리에게도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으로 잘 알려진 빅토르 프랑클(Viktor E. Frankl) 박사였다. 그는 이 책에서 죽음의 유대인 강제수용소(실제로는 가스처형실을 갖춘 유대인 최종해결시설)에 갇힌 수인들에 대해 외부인들은 선입견을 가지기 쉽다고 말한다. 그들은 “죄수들 사이에 불붙는, 생존을 위한 격렬한 투쟁”에 관해 거의 모르고 있으며, 매일 끼니와 자기 자신을 위한, 친구를 위한 무자비한 투쟁에 대해 알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수용소에 갇힌 모든 사람들이 한 사람이 구원받으면 다른 한 명의 희생자가 채워져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자기의 이름이나 자기의 친구를 희생자 명단에서 지우려고 아우성을 쳤다는 사실 말이다. 빅토르 프랑클은  결국 이 수용소에서 저 수용소로 수년간 끌려 다닌 끝에 삶을 위한 투쟁에서 도의심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수인들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고, 이들은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잔혹한 폭력, 도둑질, 심지어는 친구까지도 팔아 넘겼다.

아버지 블라덱이 바로 그런 경험들을 통해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생존자였다. 전후 세대인 아들 아트와 아우슈비츠를 경험한 아버지 블라덱 사이에는 이렇게 경험하지 않으면 결코 넘어설 수 없는 커다란 간극이 있었고, 이 두 사람의 간격을 회복하기 어렵게 만든 것은 아트 슈피겔만이 스무 살 때 겪은 어머니 안나(아냐)의 자살이었다. 물론 어머니의 자살이 블라덱의 책임은 아니었지만 두 사람을 묶어주던 하나의 울타리가 무너진 것이다. 우리는 이 작품 『쥐(Muas)』가 단순히 히틀러의 만행을 그림으로써 우리들로 하여금 홀로코스트에 대해 반성을 촉구하는, 좋은 의도를 지니고 있으나 그만큼 그저 그런 교훈적인 유형의 만화가 아니란 사실을 알고 있다. 이 작품은 그런 의도(그런 의도도 있겠지만)로 그려진 것이기 보다는 아트 슈피겔만이 아버지 세대와의 일정한 단절과 소통, 이해를 위해, 다시 말해 스스로의 정리를 위해 그린 작품이란 느낌이 더욱 강렬하다.

그는 자신과 다른 체험을 가지고 있는 부모 세대와 대화함으로써 끝끝내 넘어설 수 없을 것 같았던 아버지 블라덱을 이해하게 되고, 단절을 경험한다. 추측컨대 아마도 그는 이 작업을 통해 성장했을 것이다. 사실 나는 아버지 블라덱의 삶에 대한 태도를 이해할 수 있다. 살아온 과정이 너무나 각박했던 이들 가운데 블라덱이 거쳐 온 극단적인 체험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이와 흡사한 태도를 지닌 이들을 종종 볼 수 있다. 당장 우리의 조부모 세대, 부모 세대 혹은 앞으로 우리들도 우리의 아이들에게 이와 흡사한 이야기를 할지 모른다.

나 역시 생활보다는 생존을 우선해야 했던 체험이 있었고, 이 무렵 내가 즐겨 입에 담던 경구 “강한 자이기 때문에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았기 때문에 강한 것이다.”란 경구는 최고의 가치를 지닌 말이었다. 일단 살아남는다는 것, 그것은 어떤 비굴이나 치욕, 폭력도 감내할 만한 가치 있는 일로 여겼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와 같은 태도만이 현실적이고, 어른스러운 자세라고 여겼던 것이다. 아픔과 슬픔을 극복하는 냉혹함만이 삶의 진정한 자세라고 여기는 동안, 나는 주변에서 순수나 소박한 낭만을 이야기하는 이들을 얕잡아 보았고 경멸했다. 그들은 삶의, 현실의 냉혹함을 모르는 철부지 어린애 같은 존재들이라 여겼고, 결국엔 삶의 과정에서 도태될 것이라 믿었다. 아버지 블라덱이 어린 아들 아트에게 했던 말 “친구? 네 친구들? 그 얘들을 방 안에다 먹을 것도 없이 일주일만 가둬놓으면…. 그 땐 친구란 게 뭔지 알게 될 거다.…”와 같이 말이다.

그러나 아트 슈피겔만의 『쥐(Muas)』는 공개할 필요 없을, 어찌 보면 아우슈비츠를 드러내는데 도리어 군더더기 같은 대목들에서 도리어 진실을 보여주는 미덕을 지니고 있다. 아버지와 자식의 갈등, 아버지가 청년기에 했던 연애 이야기, 어머니의 자살, 그리고 아버지 블라덱 자신이 유대인이란 이유로 가스실에 보내질 뻔 했던 경험에도 불구하고 흑인종에 대해 지닌 편견들, 마트에 가서 이미 개봉한 음식물을 바꿔오는 인색함 등등의 이야기를 접하면서 우리는 블라덱과 아들의 이야기를 남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들 자신의 이야기로, 그들의 이야기가 지난 한 시대의 과거사가 아닌 오늘에도 이어지는 이야기일 수 있음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더 깨우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잔혹한 시대를 살더라도 “인간의 구원은 사랑으로, 그리고 사랑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빅토르 프랑클이 유대인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까닭,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육신을 초월해서 존립하는 것이다. 나의 아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러한 사실을 알았다는 것에 조금도 구애되지 않고 그녀의 모습을 관조함에 여전히 내 자신을 송두리째 바쳤을 것이며, 그녀와 나의 정신적 대화는 전과 다름없이 생생했을 것이며 만족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를 그대의 가슴에 새겨주소서. 그러면 사랑은 죽음과 같이 강해지리다.” 그는 F. 니체의 말을 인용해 (비록 강제수용소에서의 삶과 죽음의 과정이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긴 했으나)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고 증언한다. 그 말은 “살아갈 이유를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어떠한 상황에서도 견뎌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삶이 우리에게 거는 기대다. 그렇기에 우리가 삶의 도상(途上)에서 받게 되는 가장 중요한 질문들은 대개 “어떻게”가 아닌 “왜”이다.

아버지 블라덱의 냉정하고, 각박한 심성과 삶의 자세를 우리는 『쥐(Muas)』의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으며, 그를 둘러싸고 있었던 여러 조건들 속에서 그의 기대를 배신했거나 믿음을 버림받았던 무수한 경험들이 그를 그렇게 만들 수밖에 없었음을 알게 된다. 아우슈비츠의 유대인들이 숱한 배신과 희망의 박탈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것을 어찌 과거의 일이라고만 말할 수 있을까. 오늘날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이 사회, 임금 노예로 자신의 삶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한 채 살아가길 강요당하는 현실에서도 역시 배신과 희생은 반복된다. 그러나 블라덱이 끝끝내 살아남을 수 있었고, 살아남기 위해 그토록 노력했던 까닭은 바로 그의 사랑하는 아내 ‘아냐’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물론 블라덱의 이런 태도를 지긋지긋한 가족주의의 발현이라고 간단히 치부해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는 오로지 인간만이 자신이 아닌 타인(가족을 포함해서)과 공동체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타인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자만이 타인의 종이 되기를 거부할 수도 있는 법이다. 지금은 비록 아우슈비츠가 인류에게 별다른 교훈을 주지 못한 것처럼 보이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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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파란여우 > 그래, 알은 깼어?
데미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4
헤르만 헤세 지음, 전영애 옮김 / 민음사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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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는 알을 까고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

이 글을 쓰면서 불현듯 스친 생각이지만, 이 소설을 한번이라도 읽어본 사람은 데미안이 싱클레어에게 적어 보낸 이 구절을 거의 예외 없이 기억하고 있다. 데미안의 전문을 읽지 않은 사람도 귀동냥을 통하여 알을 까고 나오는 새의 이야기가 데미안의 이야기임을 익히 알고 있다. 데미안의 이 한마디는 고뇌에 찬 햄릿의 독백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정도까지 심각하게 이르지 않더라도, 맥베스가 제 아내의 죽음을 전해 듣고 내뱉는 유명한 대사 “내일 또 내일 또 내일, 하루하루는 기록된 시간 마지막 음절까지 조금씩 기어든다” 보다는 더 뚜렷하게 독자들의 머리에 새겨있다. 맥베스의 허망한 이 한마디를 들으며 마침내 죽음으로 향하는 삶의 공허함에 치를 떨며 가슴을 쓸어내렸건만 데미안의 알 깨는 이야기가 더 또렷함은 왜 일까.


10대 초반에서 20대에 이르는 동안 에밀 싱클레어가 겪는 체험 가운데 적지 않은 부분은 독자들 저마다가 섣불리 남들에게 알리지 못한 채 속으로만 끙끙 앓아왔을 법한 제2성장기의 아픔과 흡사해 보인다. 그래서 대개 스무 살이 되기 전에 데미안을 만나는 필수 코스를 선택하는 것인가. 데미안을 스무 살이 되기 전에 만난 나로서는 이 말에 십분공감한다. 성장의 진통은 생각보다 아픔이 컸다. 당시 나는 상당히 심각한 가출을 결심하고 있었고 또 실제로 삶의 지루함과 모멸감에 싫증을 느껴 학교 수업에 충실한 학생이 아니었다. 내 머릿속에는 가방을 하나 꾸려 가지고 집으로부터 가능한 한 먼 곳으로 떠나 작은 수공업 공장 같은 곳에 취직을 해서 낮에는 돈을 벌고 밤에는 오토바이를 타고 근처의 으슥한 곳을 어슬렁거리는 것이었다. 한 마리 짐승의 몸으로 으슥한 밤공기를 가르며 이 재미없는 시들한 세상, 실컷 떠돌며 살아야겠다는. 그것이 알에서 깨어나는 길이라 다졌다. 그 후 어찌되었냐 물으신다면 그 발칙한 프로젝트는 한여름 밤의 꿈처럼 사라지고 지금, 자판기 앞에서 깨지 못한 알 속의 평안을 찬양하고 있잖은가.


이 소설이 독자를 끌어들이는 것은 단순히 그 소재가 특정한 나이 또래의 관심에 맞아 떨어지기 때문만은 아니다. 예를 들면, 어린 시절 싱클레어가 모험담을 호기롭게 늘어놓는 제 또래 아이들에게 뒤지지 않을 속셈으로 실제 있지도 않은 도둑질 이야기를 지어낸 다음 그것이 약점이 되어 프란츠 클로머의 협박에 끌려 다니게 되고, 또 그로 인해 가족으로부터 스스로 소외된 채 자신만의 비밀스런 세계를 구축해나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가족의 보호와 사랑으로도 막아낼 수 없고, 오직 개개인이 어떤 식으로건 감당해야만 하는 영역이 분명하게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아가는 ‘뭣 좀 알기 시작하는’ 과정이 막막한 아픔 속에서 그려진다. 그래서인지 싱클레어가 성장과 변모의 과정에서 겪는 우여곡절은 많은 경우 상당히 설득력 있는 심리묘사와 강한 흡입력을 지닌 문체로 그려진다. 해서, <데미안>은 대다수 독자들이 사춘기를 전후한 시기에 품었을 만한 죄의식이나 은밀한 욕망을 공공연하게 형상화함으로써 그 죄의식과 욕망이 ‘보편적’인 것임을 확인시켜주는 위안을 던져준다. 이러한 위안의 ‘보편성’은 삶의 광대무변함을 아직 알지 못하는 ‘어른도 아니고 애도 아닌’, 그러나 사는 게 뭐 다른 게 있겠나 하는 시니컬한 ‘그들’의 혼란스러움과 상처를 어루만져주는 값진 것임은 틀림없다. <데미안>의 미덕이 여기에 있다. 이성에 눈떠가는 싱클레어가 육체적 욕구와 정신의 명령 사이에서 고뇌하고 방황하는 모습은 바로 ‘나’이므로. 그러므로 이것은 ‘내 얘기’가 된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내가 의문을 품은 부분은 어린 싱클레어가 도둑질 이야기를 지어냄으로써 곤경에 빠지게 되고, 이것은 종교적 경건함으로 무장한 가정과 경건함이 통하지 않는 외부 세계사이의 갈등이라는 사회적 성격을 건드리게 된다. 그런데 데미안이 등장해서 프란츠의 협박을 차단한 후 싱클레어의 경험이 품고 있는 사회적 차원의 갈등 문제는 점차 슬그머니 사라지고 추상화된 내면세계의 관념 대립이라는 형태로 변모한다는 점. 이것은 이성에 대한 갈망이나 종교적 고뇌를 겪는 과정도 마찬가지다. 사회적 성격을 띤 외부와의 문제와 잠시 만나는 듯하다가 추상적 관념으로 돌아버린 구도. 이러한 문제는 데미안이나 그의 어머니인 에바부인이라는 추상적 인물설정으로 어느 새 연결된다. 데미안은 처음에는 마음을 읽는 독심술을 부리는 소년으로, 나중에는 텔레파시나 초감각적인 인물로 확대되고 그의 어머니인 에바부인도 ‘초능력자’로 묘사되기에 이른다. 성별과 시간의 흐름, 선과 악을 초월하는. 신비하다 못해 추상적이고 입체파 화가의 그림 한 점을 대하는 듯하다. 무수히 연결된 꼭짓점으로 통하는 선들을 통과하며 비로소 하나의 형체를 형성하는 면이 탄생되는. 누가 그랬던가. 입체파는 허세라고. 얼마 전 작고한 비디오 아트의 거장 백남준은 “모든 예술은 다 사기성을 띤다.”라고 인정한다. 이런 맥락으로 보면 신비적이고 초월적인 결말로 나아간 <데미안>은 소설적 허세다.


감정의 동화를 오버랩하면서 스무 살 이전의 애도 아니고 어른도 아닌 불투명하고 불안정한 독자에게 ‘이건 우울하고 은유적인 방황에서 헤매는 내 얘기다!’로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데미안>. 인간적 성장의 지향점에서 사회적 성격으로 연결되다가 신비화 전략으로 추상적으로 매듭을 지은 미완의 이야기. 여전히 알은 깨지 못한다. 원래부터 알은 깨지 못할 정도로 무지막지하게 단단하거나, 알을 깰 만큼 강건하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제3의 돌발발언을 찾자면 인간은 원래 알 속에 있지 않다. 공중에 먼지처럼 떠다니다가 씨앗을 맺고 바람처럼 흘러 다니다가 분해 되어 사라지는 존재. 그러니 깨어야 할 알이 어디 있냐고. 그러나 이런 식의 관점으로 이 소설을 읽는 일은 독일 문학의 거장인 헤르만 헤세를 욕보이는 일이며 억지다. ‘알 속에 갇혀있다’로 이 소설은 출발한다. 복지부동의 명제. 그 후 어떻게 되었는가. 알은 그래 깼어? ‘안간힘’만 쓰고 있을 뿐.


교양 있는 사람들은 스무 살 이전에 <데미안>을 읽었다고들 한다. 왜냐하면 ‘명작고전’이라고들 하니까. 나도 당신도 우리는. 그런데 이십년도 더 지난 지금 와서 읽어보니 이것이 명작인 이유는 첫째는 헤르만 헤세라는 작가의 명성 둘째, 그 당시 시대적 상황인 1차 세계대전의 탄생(20세기의 인류사의 지각대변동)을 위한 구습의 파괴였다는 해설 셋째가 선과 악을 비롯한 통념적인 도덕관을 초월하고 있다는 신비적 매력. 이십여 년이지나 다시 만난 <데미안>의 결론은 ‘난 변했어요! 그러니 알 속에서 어울렁 저울렁 산답니다’. 시대도 변하고 나도 변하고 인생이란 변하는 것. 책이라고 별 수 있겠나. 그런데 그 '알' 누가 깬 사람 있다면 연락 좀 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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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stella.K > '아~피곤한데' 피로를 부르는 버릇 5가지

 

'아~피곤한데' 피로를 부르는 버릇 5가지


춘곤증때문에 피곤한 게 아니다. 당신을 피곤하게 만드는 건 당신의 버릇이다. ‘아이빌리지닷컴’이 지적하는 고쳐야 할 나쁜 생활 습관 5가지.

1. “책상에 뼈를 묻을테야”

한 자리에 몇 시간씩 같은 자세로 앉아 있으면 몸은 ‘수면 모드’로 들어간다. 특히 TV나 모니터를 볼 때는 평소보다 눈을 덜 깜빡거리게 돼서 눈이 뻑뻑해진다.

→ 30분에 한번은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쭉 펴고 기지개를 펴자. 산책은 피곤할 때 카페인 같은 각성 효과가 있다. 창가에서 잠시 일광욕만 해도 효과가 있다.

2. “난 숨도 공주처럼 쉬지”

평소 우리가 하는 가벼운 호흡으로는 충분량의 산소를 마실 수 없다. 혈중 산소량은 줄고 이산화탄소량은 늘어나면 피로를 느낀다.

→ 하루에 단 몇 번이라도 복식호흡을 해 보자.

3. “물 마실 시간이 어딨어?”

갈증을 느낄 때쯤이면 이미 체내 수분이 2~3% 줄어든 것. 수분이 부족하면 뇌에 혈액공급이 줄고 심장에 부담은 커진다.

→ 하루에 최소 9컵, 활동량이 많다면 12컵을 마셔라. 레몬즙을 타거나 허브 티를 마셔도 된다.

4. “자기 전, 책을 꼭 봐요”

밤에도 밝은 조명 아래서 생활하면 수면유도 호르몬인 멜라토닌 분비가 감소해 수면의 질이 나빠진다.

→ 잠 자기 몇 시간 전부터는 밝은 등 대신 갓 씌운 스탠드를 이용해 간접조명.

5. “왜 땅만 보고 걷냐고요?”

안 좋은 자세는 피로를 부추긴다. 관절이 하나 비틀어져 있으면 등과 골반까지 온통 긴장된다.

→ 앉았을 때 고개를 너무 숙이진 않는지? 섰을 때는 허리를 펴고 배를 넣어 슬쩍 내려다 봤을 때 두 발 끝이 보여야 한다.

이자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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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키노 > 패럴리 형제의 방향전환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 - 할인행사
바비 패럴리 외 감독, 기네스 팰트로 외 출연 / 20세기폭스 / 2008년 4월
평점 :
품절


 패럴리 형제는 소위 말하는 ‘화장실 유머’를 통하여 주류의 코메디 영화가 슬랩스틱이나 재치넘치는 말을 통하여 영화를 보는 이들로 하여금 즐거움을 주었다면 그들은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부분들을 언급하여서 사람들의 본능적인 부분을 자극하여 웃음을 주엇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화장실 유머’는 ‘덤 앤 더머’나 ‘메리에게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라는 영화를 통하여 아주 강하게 표현되어 지는데 여태까지의 코메디영화에서는 볼 수 없엇던 장면들을 보여줌으로써 영화를 보는 이들로 하여금 파격적인 신선함마저 불러 일으키면서 이 후에 등장하는 코메디 영화에 이러한 영향을 미치게 되면서 한동안 ‘화장실 유머’로 무장한 코메디들이 판을 치게 됩니다.


패럴리 형제들은 이 전의 영화들에 비해서 이 영화에서는 ‘화장실 유머’의 수위가 많이 누그러진 반면 드라마적인 요소에 많이 치중하고 있습니다.영화는 갑작스런 사고로 사망한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잭 블랙이 미모의 여성들에게 구애를 하지만 자신의 별 볼일 없는 외모로 인하여 계속 실패하다가 우연히 심리 상담사를 만나서 최면 요법을 통하여 사람의 내면을 보게되는 능력을 가지게 되면서 기네스 팰트로를 만나서 사랑하게 된다는 내용을 가진 영화입니다.


이러한 드라마적인 요소에 치중하다보니 상투적인 해피 엔딩을 위한 배려로 인하여 영화의 후반부로 갈수록 그 힘이 처지는 듯한 느낌을 많이 받습니다만 패럴리 형제는 그들의 ‘화장실 유머’를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었습니다.영화의 중간 중간 그들의 번뜩이는 재치를 보여주면서 관객들에게 웃음을 선사합니다.


패럴리 형제의 영화를 보면서 웃다가 즐기다보면 시간이 정신없이 흘러가는데 그들은 그러한 웃음에만 이야기를 할애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미국의 중산층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영화의 여기저기에 배치하여 두고 있습니다


그들은 미국 중산층이  싫어하는 장애인이나 뚱뚱하고 못생기 여자들을 영화에 등장시키곤 하는데 이 영화에서도 흑인,장애인,동성애자들을 등장시켜서 그들에 대한 조롱과 냉소어린 시선을 희화화하면서 미국 중산층의 정직하지 못한 위선적인 태도에 일침을 가하면서 외적인 아름다움이 아닌 내적인 아름다움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패럴리 형제의 장기인 ‘화징실 유머’가 많이 줄어든 반면 영화의 내용적인 면에 치중함으로써 약간은 느슨하게 전개되는 측면도 없지 않은 영화이긴 하지만 패럴리 형제의 새로운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신선한 영화가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한창 주가를 달리는 잭 블랙의 능청스런 유머와 기네스 팰트로의 의외의 뚱보연기는 실소를 머금게 하며 영화에 대한 잔재미를 더해 주고 있습니다. 영어 제목인 Shallow Hal에 비해서 우리나라의 제목인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라는 제목이 영화의 내용에 더 어울리는 제목이며 기발한 문구가 아닐까 합니다.

 

원래 이 디비디는 폭스사가 렌탈용으로 제작한 것을 판매용으로 둔갑시킨 것이라고 하더군요.그래서인지 코드1과 달리 서플은 모조리 삭제된 채 출시가 되었습니다.기네스 팰트로나 잭 블랙의 연기 장면이나 코멘터리와 기네스 팰트로의 분장장면이 부가영상으로 들어갔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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