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씩씩바이러스’에 지구촌이 감염




[한겨레] 한국의 글쟁이들/④ 한비야

“제가 저술가라고는 저~언혀 생각 안해요. 저술가라면 타이틀이 너무너무 엄청나요. 어느 때는 작가라고 해도 민망해요.”

본인이 프로 글쟁이라고 생각 안하는 사람. 자기가 글을 잘 못쓴다고 생각하는 사람. 자기 책이 왜 잘 팔리는지 정확히 모르겠다는 사람. 그게 한비야(48)씨의 힘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는 분명 저술가다. 그것도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 팔리는.

한씨는 꼭 10년전 <바람의 딸 한비야 걸어서 지구를 세바퀴 반>이란 책으로 처음 대중들에게 다가왔다. 혈혈단신으로 6년 넘게 전세계를 걸어서 돌아다닌 여자. 다음에는 우리나라를 걸어서 종단한 이야기(<바람의 딸, 우리 땅에서 서다>를 들려줬다. 역시 바람의 딸 답다. 그러다 어느날 중국어를 배우러 떠나 <한비야의 중국견문록>을 쓰더니, 이번에는 세계 곳곳 긴급구호현장을 누비고 <지도밖으로 행군하라>를 썼다. 이건 매번 진화해댄다. 그리고 진화의 결과를 몇년 만에 한 번씩 들려준다.

4종, 7권. 지금까지 한씨가 쓴 책은 그게 전부다. 그러나 한씨의 책이 이끌어낸 호응은 실로 ‘경이적’이다. 실패한 책 하나 없고, 낸 책이 모두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문학, 비문학을 통틀어 한씨만큼 확실하게 독자를 거느린 글쟁이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첫책 <~세바퀴 반> 4권이 100만부 이상, <~우리 땅에 서다>가 20만부, <~중국견문록> 48만부,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가 41만부. 책을 낼수록 판매부수가 늘고 생명력도 길어지고 있다.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는 출간 1년이 지난 지금도 비소설 분야 베스트셀러 2~3위권을 지키고 있다.

판매부수가 50만부에 이른다는 것은 상업적으로 볼 때 작가의 차원이 일반 저자들과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남과 여 양쪽 모두에게 인기가 있어야 가능하고, 좌와 우를 막론해야 가능하다. 청년층과 장년층 어느 한쪽에게만 인기가 좋아서도 불가능하다. 한마디로 모든 연령, 모든 성별, 모든 성향을 뛰어넘는 호응을 얻어야 가능한 수치다. 곧 한씨가 남녀노소 모든 독자들에게 보편적인 즐거움을 준다는 뜻이다.

자기책 외울정도…편집자는 죽을맛

독자들이 꼽는 한씨의 최대 매력은 바로 ‘건강함’이다. 한씨의 책을 읽으면 ‘씩씩바이러스’나 ‘행복바이러스’ 그리고 ‘봉사바이러스’에 옮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런 매력은 한씨의 모든 책이 공통적이다. 하지만 저술가로서 한씨는 세번째 책 <중국견문록> 이후 한단계 변신했다고 볼 수 있다. 초기 두 책에서 한씨는 ‘여행가’를 벗어나지 않았다. 대신 다른 사람들의 여행기와는 다른 생생한 표현, 그리고 한씨만의 독특한 유머가 묻어났다. 그런데 <중국견문록>부터는 ‘사회적 역할모델’로 거듭났다. ’정력적이고 호기심 많은 드센 여성 여행가’가 긴급구호활동가가 되면서 ‘닮고 싶은 사람’이 된 것이다. 그래서 팬층은 더 넓어졌다.

실제 한씨의 사인회에는 30~40대 직장 남성들이 딸을 데리고 오는 경우가 많다. 한씨의 책을 편집했던 지평님 황소자리 대표는 “아버지들이 동년배로서 자기가 못해본 것을 해내는 이 여성을 자기 역할모델로 여기는 동시에 딸에게도 역할모델로 보여주고 싶어하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행복하자, 부자가 되자 그런 구호들이 넘쳐나는데 한비야를 만나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나오잖아요. 10만원만 내면 각 대륙별로 한 사람씩을 구할 수 있다는 거죠. 내 삶이 제대로 가고 있나 불안할때, 모호하고 불안한 삶을 되돌아보면서 이건 아니다 싶을 때 한비야의 목소리가 있다는 거에요.”

이런 당위적 메시지로 독자들을 감동시키는 것은 역시 저술가로서 한씨의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한씨 글의 특징은 옆에서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술술 읽히는 점이다. 미사여구로 글을 꾸미는 법도 없다. 대신 생생한 비유를 곁들인다. 그래서 한비야 최고의 장점을 그래서 ‘전달력’으로 꼽는 전문가들이 많다.

한씨의 글이 이렇게 쉽기 때문에 책을 쓰는 것도 술술 쓸 듯하지만, 실은 그 정반대다. 한씨는 원고를 자기 마음에 꼭 들 때까지 수십번씩 퇴고한다. 그래서 교정지가 ‘딸기밭이 되는’ 정도가 아니라 ‘불바다가 되어’버린 듯 새빨개진다. 한씨는 또 자기 책의 목차는 물론, 목차의 순서, 각 항목별 쪽수와 분량을 모두 스스로 정한다. 그러다보니 자기 책 본문을 거의 외우다시피한다. “저는 제가 글을 잘 쓴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정말로 글을 잘 썼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이렇게 좋은 소재로 왜 이정도 밖에 못쓰냐며 자학하는 스타일이다. 글을 쓴 다음에는 반드시 소리 내어 읽어본다. “긴급구호 현장에서 수만명이 죽어가는 현장이건,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는 연시이건, 글이란 것은 운율이고 리듬이라고 생각해요. 호흡이 짧아지거나 거칠다 싶으면 다 고쳐요. 입으로 읽어서 거칠면 눈으로 읽어서도 거칠다고 생각해요.” 한밤중에 글을 쓰고는 친구며 편집자에게 전화해서 무조건 읽어주면서 점검해댄다. 좋은 아이디어나 표현이 떠올라도 전화를 한다. 당연히 편집자들은 ‘죽을 노릇’이라고 입을 모은다. 문장의 호흡은 물론 한권 전체의 강약중강약 호흡도 따진다. 그러다보니 거의 자기책을 외우게 된다는 것이다.

“내가 말하는 투를 써야 독자들이 나를 느껴요. 독자들은 결국 글쓴이의 오감을 빌어 내 호흡을 같이하고 싶어하는 거잖아요. 저는 제가 현장을 전하는 리포터에 가깝다고 봐요. 긴급구호 현장을 본 사람이 없으니 어떻게든 전해야 하잖아요.”

이 모든 것의 기본은 한씨 자신의 ‘일기’다. 초등학교 선생님들이 그토록 일기를 많이 써야 문장력도 늘고 생각도 깊어진다고 했던 이야기의 모델이 있다면 바로 한비야다. 한씨의 일기장은 취재수첩 같이 생긴 작은 스프링노트. ‘그날 하루 느끼고 떠올린 모든 것들’을 적는다. 기자와 인터뷰하면서도 수시로 메모를 해서 누가 취재를 하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취재 중에도 수시로 메모

한씨는 요즘 피 흐름이 좋지 않아 잠시 휴식중이다. 북한산 줄기를 바라보는 한씨 아파트 내부는 글과 관련된 것 말고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소파에도 책상에도 화장실에도 안경과 책들이 있었다. 몸은 안좋다면서도 이 에너지덩어리 같은 글쟁이는 온갖 아이디어와 꿈을 받아적기 힘들 정도로 쏟아냈다. 자연히 다음 책이 궁금해졌다. “정한 것은 없지만, 어떤 방향이 될지는 알지요. 말하고 싶은 게 목구멍까지 차서 도저히 토해내지 않으면 못견딜 때까지 기다렸다가 써야해요.” 아, 이번 책도 4년만에 나왔지. 한씨 팬들은 이미 기다리는 데 익숙할 듯했다.

글 구본준 기자 bonbon@hani.co.kr, 사진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한비야가 말하는 내 책은…

<바람의 딸 한비야 걸어서 지구 세바퀴 반(전 4권)>

도서출판금토 펴냄(1996)

“베스트셀러 1위를 오래 했어요. 책을 처음 내봐서 신기한 책이면 그냥 1위로 뽑아주는줄 알았어요. 10년 된 책이라 여행정보로서의 기능은 거의 없는데 여전히 팔린다니 마치 내가 낳은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 사춘기가 되어서 사람들하고 친하게 지내는 것 같아 흐뭇해요.”

<바람의 딸 우리 땅에 서다>

푸른숲 펴냄(1999)

“진짜 등잔 밑이 어두운 거예요. 저도 세계일주 먼저 하고 우리 땅을 가본 거잖아요. 한국 여행기로 이렇게 팔린 책도 없었다고 들었어요. 일단 국토종단기가 이 책 이전에는 단 하나도 없었어요. 사람들한테 국토종단이 만만하다는 것을 알려준 것 같아서 즐거워요. 실제 이후에 한비야 루트란게 생겼어요.”

<한비야의 중국견문록>

푸른숲 펴냄(2001)

“한번은 중국을 소개하는 책 10권을 뽑아달라는 부탁을 받았는데 글쎄 5번도 가기 전에 막히는 거에요. 그 많은 사람들이 중국 가서 공부하고 장사하고 연구했다는데 중국 가기 전에 읽어볼만한 책이 이렇게 없나 생각했어요. 제가 1년 동안 중국에서 공부한 경험이 아무 것도 아니지만 함께 나눠야겠다 생각했어요.”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푸른숲 펴냄(2005)

“저는 이 책이 우리 사회가 얼마나 건강한지 진단하는 리트머스 시험지같아요. 정말 기뻤던게, 이 책이 살빼는 얘기도 아니고, 연예인 얘기도 아니고, 실은 외면하고 싶은 이야기들 이잖아요. 누가 굶어죽었다더라, 어디서 홍수가 났다더라, 전쟁 났다더라 이런 외면하고픈 이야기들인데, 지금 우리 아이들 몰라도 되는 이야기를 돈주고 사서 읽고 후원회원으로 가입하잖아요. 우리 젊은이들 마음에 숯불이 하나씩 있었구나, 조금만 바람을 불어넣어줘도 이렇게 활활 타오르는구나 느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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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6-10-31 16: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담아가요^^
 

책 모으는 즐거움이요? 이제 나누는 기쁨이죠


[한겨레]
한국의 책쟁이들/④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

“책을 기증한다고 하니 집사람이 먼저 책짐을 싸더군요.”

은평구 구산동 예일여고 뒤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의 집. 그의 집은 예상과는 달리 넓어 보였다. 길쭘한 거실. 두 벽이 책꽂이지만 책들은 책꽂이에서 한발짝도 내밀지 않았다. 가운데에는 소파와 깔개가 널찍하게 자리잡았다. 첫째 아이의 방. 책상을 등진 벽에는 이중 책꽂이에 어른 책이 버티고 있다. 어쩌면 박 실장 자신의 서재로 쓰다가 크는 아이한테 쫓겨 책을 둔채 나왔는지도 모를 일. 안방에는 부부 공용 외에 둘째 아이의 책상과 아이의 책뿐, 그의 책은 전혀 없다. 말끔한 정도로 보아 안방에까지 쌓였던 그의 책들이 어느 순간 마나님의 반란으로 추방되지 않았을까.

“가족이 함께 사는 공간인데 내 책이 독점하다시피하는 게 불합리하다는 생각이 들었던거죠.” 며칠 걸려 정리한 것이 지금의 모양새다. 추방된 책 가운데 수백 권은 베란다에서 수형생활이다. 다행히 북향이라서 햇볕이 들지는 않지만 책이 바래는 것을 어쩔 수 없다. 대부분 오래된 사회과학 서적이나 복사본이어서 가슴앓이가 덜하지 않을까.

책과의 싸움은 식구들과의 싸움이자 자신과의 싸움. 책을 버리는 것은 스스로 용납되지 않고, 선택한 방법이 기증하기. 그는 기증을 누군가와 책을 나누는 즐거움이라고 표현했다. 스스로 그렇게 믿을지는 모르지만, 더이상 책을 수용할 공간이 없는 터에 불가피하게 선택한 마지막 수단이 아니겠는가.

“민주화기념사업회에 일곱 상자를 보냈어요. 연구자로서 미련이 남지만 욕심을 버렸어요. 책뿐 아니라 각종 팜플렛도 포함돼 있어요.” 고려대 한국사 연구실에도 1천여 권을 떨궜다. 자주 기증을 하다보니 자료의 공유라는 대의명분을 띠기 시작했고 그것은 연변까지 확장됐다.

중국출장을 가서 조선족학교인 연변대의 실정을 보고 깜짝 놀랐다. 구내 만화대여점에는 허접한 한국만화가 꽂혀있었다. 우연히 참석한 신입생 환영회. 퀴즈대회에서 고구려를 세운 왕이 누구냐는 물음에 답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귀국한 뒤 그가 한 일은 기증용 책모으기. 우선 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질을 문화당에서 싸게 구입하고 헌책방 ‘책나라’에서 쓸만한 단행본을 한권에 500원씩 샀다. 공감하는 동네사람들한테서는 만화나 잡지를 모았다. 그렇게 모은 것이 15상자 분량. 중국으로 가는 컨테이너 틈에 끼워넣어 보냈다. 동북공정이다 뭐다 하는데 그 책들이 천덕꾸러기가 되지 않았는지 궁금하다.

책 수백 권 베란다 ‘수형살이’

그의 책은 그가 연구실장으로 있는 민족문제연구소에도 가 있다. 두 차례에 걸쳐 연구서 2천여권을 보냈다. 자료실이 안정되면 더 보낼 생각이다. 연구소가 궁극적으로 자료센터가 돼야 한다고 본다. 다양한 자료를 모아 체계적으로 정리해 놓으면 근현대사 연구자들의 시간과 돈을 절약해 주지 않을까. “책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자료가 만인들에게 이용되는 것이 꿈입니다.” 그는 박원순 변호사가 장서 전량을 역사문제연구소에 기증하면서 “마누라 빼고 다 가져가라”고 했다는 일화를 소개했다.

“자료실의 근간이 된 임종국 선생의 책에 비하면 나의 책은 물방울에 불과합니다.”

연구소 자료들은 자체적으로 구입하거나 기증을 받고 있다. “연구소 근처 70~80평 지하실을 빌렸어요. 제습기만 설치하고 분류정리하는 수준입니다.” 언젠가 전모를 펼쳐 공개할 기회가 있을 거라고 믿는다. 그동안 한해 한차례 정도 주제를 특정해 전시회를 열었다. 올해는 조정래의 <아리랑>을 주제로 펼쳐보일 생각이다.

“그동안 우리는 자랑스런 유산만을 내세워왔습니다. 하지만 역사는 빛과 어둠이 공존하죠. 항일이 빛이라면 친일은 어둠에 해당합니다. 빛은 어둠과 대비시킬 때 더욱 돋보입니다.”

이번 전시를 위해 8월13일부터 한국일보 갤러리를 빌려놨다. 원래는 서울시립박물관을 임대하려 했으나 강렬한 주제를 부담스러워하는 박물관쪽 윗분에 의해 거절됐다는 후문이다.

민족문제연구소는 1989년 친일문제연구가 임종국 선생의 빈소에서 싹이 텄다. 이날 모인 사람들은 임 선생이 추진했던 친일파 총정리 사업의 뜻을 잇기로 결의했다. 91년 초 정식으로 연구소가 설립됐고 △한일 과거사 청산을 통한 역사 바로세우기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목표로 지금껏 활동해왔다. 진성회원 5000명, 상근자 35명. 회원들의 회비로 운영되는 몇 안되는 엔지오 가운데 하나로 연구와 사회운동적 성격을 겸한다. 그동안 김창룡 묘 이전, 서춘에 대한 서훈 취소, 문래동 박정희 흉상 철거 등 ‘평지풍파’를 일으켜왔다.

“잘못된 것을 상식적으로 바로잡는 겁니다. 친일파가 독립운동가인 척하고, 독립기념사업에 참여해 훈장을 받아 왔어요.” 그는 친일 미술가가 이순신, 백범, 안중근, 동상을 도맡아 제작하고 노년에 3·1문화상 받아 그의 친일문제가 감춰졌다고 말했다. “냄비식 반일과는 달라요. 일본을 비판하려면 우리의 잔재부터 청산해야 한다는 거죠. 우리가 ‘마사오 다가키’ 박정희를 기념한다면서 어떻게 일본한테 당당할 수 있겠습니까?”

기증한다니 아내가 언른 책짐 싸

근현대 한국사를 전공한 박 실장과 민족문제연구소의 방향은 거의 겹친다. 설립 초기에 연구소에 합류한 그가 개인의 일을 접어두고 연구소 일에 전적으로 매달리는 것은 그 탓이다. 아니, 그게 아니라 연구소의 일이 곧 자신의 일일 터다. 그의 몫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자료의 수집. 평소 개인적인 수집벽을 연구소로 연장하면 바로 공적인 일이다. 개인 자료와 연구소 자료가 뒤섞여도 표가 나지 않고 그것을 어쩌지 못한다.

연구소에서는 <일제 식민통치기구 및 협력단체 편람>(국내편), <일제하 해외 친일단체 편람>, <일제하 지방 친일단체 편람>을 공식·비공식으로 간행하고 <재일조선인단체편람>을 정리중이다. 2007년에는 최종목표인 <친일인명사전>을 펴낼 계획이다.

바탕이 되는 것은 일제 때 그들이 펴낸 자료들. 매일신보, 대한매일, 조선일보, 동아일보, 만선일보 등 신문은 물론 친일잡지들, 인사록, 신사대동보, 공로자명감, 연감류, 서훈록, 국방헌금납부자명단, 만주국한국인관리 명단, 전국지방의원 명감, 병합기념장 수여자 명단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들 자료를 구하기 위해 국사편찬위, 기록원, 각종 도서관을 뒤지고 일본과 중국에도 여러 차례 출장을 갔다. 중국의 문서관에는 만주친일파, 간도특설대에 관한 자료가 보관돼 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대부분 비공개라서 애로가 많다.

문서자료 외에 간접자료도 아주 유용하다.

예컨대 한일합방 기념 오사카 <매일신문> 부록인 아동용 블루마블게임. 신공왕후. 귀무덤, 신라인 조공 등 조선역사 왜곡를 왜곡하고 식민통치를 정당화한 내용이다. 당시 국어교과서에 실린 ‘간도에서 온 편지’. 비적이 평정돼 살기 좋다며 개척이민을 장려하는 내용. 수신교과서에 실린 충효사상. 이는 유교문화의 유산이 아니라 천황에의 충성을 말한다. 박정희 정권 때의 충효사상 강조와 흡사하다.

수집은 전단, 포스터, 우표, 군복, 지도, 앨범등 생활자료로까지 확대됐다. 역사는 텍스트로 알기보다 오감으로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판단에서다.

천인침(처녀 1000명이 수를 놓아 총알을 막아준다는 배띠), 무운장구의 기원을 적은 일장기, 한일합방 축하 가두행진 사진, 이완용의 친일시화, 최린 임전대책협의회 회장의 엽서, ‘돌격’ 담배,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세로 표어, 창씨개명 관련 자료, 일본군 앨범과 군표, 조선지원병 첫사망자인 이인석 상병 선전책자, 일본군가, 친일영화 전단 포스터, 황국신민서사 전단, 러일전쟁·중일전쟁 주사위 게임 등등. 이런 자료는 중간수집상, 인터넷 경매 등을 통해 구입한다.

친일청산 뜻있는 분 기증 바랍니다

“이렇게 체계적으로 모은 것이 처음입니다. 일찍 시작했더라면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이 남아요. 장삿속으로 모으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값이 많이 올랐거든요. 돈 없어 못 산 것 많아요.” 그는 뜻있는 사람들의 기증을 바랐다. 흩어져 값으로 존재하기보다 합쳐져 의미로 남는 것이 더 소중하다는 믿음에서다.

한해 앞으로 다가온 2007년. 대망의 친일인명사전이 마무리되면 10년 너머 미뤄온 박사학위 논문을 매듭지을 참이다. 주제는 박정희가 통치이데올로기로 내세워 성공을 거둔 민족, 국가 담론 분석과 국민교육헌장, 반상회, 학도호국단 등 언술을 관철시켰던 시스템 연구.

“해 저문 저녁 갈길은 먼데, 비가 오죠, 소는 뛰고요, 풀짐은 무거워오고요.”

임종업 기자 blitz@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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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책쟁이들/④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

“책을 기증한다고 하니 집사람이 먼저 책짐을 싸더군요.”

은평구 구산동 예일여고 뒤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의 집. 그의 집은 예상과는 달리 넓어 보였다. 길쭘한 거실. 두 벽이 책꽂이지만 책들은 책꽂이에서 한발짝도 내밀지 않았다. 가운데에는 소파와 깔개가 널찍하게 자리잡았다. 첫째 아이의 방. 책상을 등진 벽에는 이중 책꽂이에 어른 책이 버티고 있다. 어쩌면 박 실장 자신의 서재로 쓰다가 크는 아이한테 쫓겨 책을 둔채 나왔는지도 모를 일. 안방에는 부부 공용 외에 둘째 아이의 책상과 아이의 책뿐, 그의 책은 전혀 없다. 말끔한 정도로 보아 안방에까지 쌓였던 그의 책들이 어느 순간 마나님의 반란으로 추방되지 않았을까.

“가족이 함께 사는 공간인데 내 책이 독점하다시피하는 게 불합리하다는 생각이 들었던거죠.” 며칠 걸려 정리한 것이 지금의 모양새다. 추방된 책 가운데 수백 권은 베란다에서 수형생활이다. 다행히 북향이라서 햇볕이 들지는 않지만 책이 바래는 것을 어쩔 수 없다. 대부분 오래된 사회과학 서적이나 복사본이어서 가슴앓이가 덜하지 않을까.

책과의 싸움은 식구들과의 싸움이자 자신과의 싸움. 책을 버리는 것은 스스로 용납되지 않고, 선택한 방법이 기증하기. 그는 기증을 누군가와 책을 나누는 즐거움이라고 표현했다. 스스로 그렇게 믿을지는 모르지만, 더이상 책을 수용할 공간이 없는 터에 불가피하게 선택한 마지막 수단이 아니겠는가.

“민주화기념사업회에 일곱 상자를 보냈어요. 연구자로서 미련이 남지만 욕심을 버렸어요. 책뿐 아니라 각종 팜플렛도 포함돼 있어요.” 고려대 한국사 연구실에도 1천여 권을 떨궜다. 자주 기증을 하다보니 자료의 공유라는 대의명분을 띠기 시작했고 그것은 연변까지 확장됐다.

중국출장을 가서 조선족학교인 연변대의 실정을 보고 깜짝 놀랐다. 구내 만화대여점에는 허접한 한국만화가 꽂혀있었다. 우연히 참석한 신입생 환영회. 퀴즈대회에서 고구려를 세운 왕이 누구냐는 물음에 답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귀국한 뒤 그가 한 일은 기증용 책모으기. 우선 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질을 문화당에서 싸게 구입하고 헌책방 ‘책나라’에서 쓸만한 단행본을 한권에 500원씩 샀다. 공감하는 동네사람들한테서는 만화나 잡지를 모았다. 그렇게 모은 것이 15상자 분량. 중국으로 가는 컨테이너 틈에 끼워넣어 보냈다. 동북공정이다 뭐다 하는데 그 책들이 천덕꾸러기가 되지 않았는지 궁금하다.

책 수백 권 베란다 ‘수형살이’

그의 책은 그가 연구실장으로 있는 민족문제연구소에도 가 있다. 두 차례에 걸쳐 연구서 2천여권을 보냈다. 자료실이 안정되면 더 보낼 생각이다. 연구소가 궁극적으로 자료센터가 돼야 한다고 본다. 다양한 자료를 모아 체계적으로 정리해 놓으면 근현대사 연구자들의 시간과 돈을 절약해 주지 않을까. “책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자료가 만인들에게 이용되는 것이 꿈입니다.” 그는 박원순 변호사가 장서 전량을 역사문제연구소에 기증하면서 “마누라 빼고 다 가져가라”고 했다는 일화를 소개했다.

“자료실의 근간이 된 임종국 선생의 책에 비하면 나의 책은 물방울에 불과합니다.”

연구소 자료들은 자체적으로 구입하거나 기증을 받고 있다. “연구소 근처 70~80평 지하실을 빌렸어요. 제습기만 설치하고 분류정리하는 수준입니다.” 언젠가 전모를 펼쳐 공개할 기회가 있을 거라고 믿는다. 그동안 한해 한차례 정도 주제를 특정해 전시회를 열었다. 올해는 조정래의 <아리랑>을 주제로 펼쳐보일 생각이다.

“그동안 우리는 자랑스런 유산만을 내세워왔습니다. 하지만 역사는 빛과 어둠이 공존하죠. 항일이 빛이라면 친일은 어둠에 해당합니다. 빛은 어둠과 대비시킬 때 더욱 돋보입니다.”

이번 전시를 위해 8월13일부터 한국일보 갤러리를 빌려놨다. 원래는 서울시립박물관을 임대하려 했으나 강렬한 주제를 부담스러워하는 박물관쪽 윗분에 의해 거절됐다는 후문이다.

민족문제연구소는 1989년 친일문제연구가 임종국 선생의 빈소에서 싹이 텄다. 이날 모인 사람들은 임 선생이 추진했던 친일파 총정리 사업의 뜻을 잇기로 결의했다. 91년 초 정식으로 연구소가 설립됐고 △한일 과거사 청산을 통한 역사 바로세우기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목표로 지금껏 활동해왔다. 진성회원 5000명, 상근자 35명. 회원들의 회비로 운영되는 몇 안되는 엔지오 가운데 하나로 연구와 사회운동적 성격을 겸한다. 그동안 김창룡 묘 이전, 서춘에 대한 서훈 취소, 문래동 박정희 흉상 철거 등 ‘평지풍파’를 일으켜왔다.

“잘못된 것을 상식적으로 바로잡는 겁니다. 친일파가 독립운동가인 척하고, 독립기념사업에 참여해 훈장을 받아 왔어요.” 그는 친일 미술가가 이순신, 백범, 안중근, 동상을 도맡아 제작하고 노년에 3·1문화상 받아 그의 친일문제가 감춰졌다고 말했다. “냄비식 반일과는 달라요. 일본을 비판하려면 우리의 잔재부터 청산해야 한다는 거죠. 우리가 ‘마사오 다가키’ 박정희를 기념한다면서 어떻게 일본한테 당당할 수 있겠습니까?”

기증한다니 아내가 언른 책짐 싸

근현대 한국사를 전공한 박 실장과 민족문제연구소의 방향은 거의 겹친다. 설립 초기에 연구소에 합류한 그가 개인의 일을 접어두고 연구소 일에 전적으로 매달리는 것은 그 탓이다. 아니, 그게 아니라 연구소의 일이 곧 자신의 일일 터다. 그의 몫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자료의 수집. 평소 개인적인 수집벽을 연구소로 연장하면 바로 공적인 일이다. 개인 자료와 연구소 자료가 뒤섞여도 표가 나지 않고 그것을 어쩌지 못한다.

연구소에서는 <일제 식민통치기구 및 협력단체 편람>(국내편), <일제하 해외 친일단체 편람>, <일제하 지방 친일단체 편람>을 공식·비공식으로 간행하고 <재일조선인단체편람>을 정리중이다. 2007년에는 최종목표인 <친일인명사전>을 펴낼 계획이다.

바탕이 되는 것은 일제 때 그들이 펴낸 자료들. 매일신보, 대한매일, 조선일보, 동아일보, 만선일보 등 신문은 물론 친일잡지들, 인사록, 신사대동보, 공로자명감, 연감류, 서훈록, 국방헌금납부자명단, 만주국한국인관리 명단, 전국지방의원 명감, 병합기념장 수여자 명단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들 자료를 구하기 위해 국사편찬위, 기록원, 각종 도서관을 뒤지고 일본과 중국에도 여러 차례 출장을 갔다. 중국의 문서관에는 만주친일파, 간도특설대에 관한 자료가 보관돼 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대부분 비공개라서 애로가 많다.

문서자료 외에 간접자료도 아주 유용하다.

예컨대 한일합방 기념 오사카 <매일신문> 부록인 아동용 블루마블게임. 신공왕후. 귀무덤, 신라인 조공 등 조선역사 왜곡를 왜곡하고 식민통치를 정당화한 내용이다. 당시 국어교과서에 실린 ‘간도에서 온 편지’. 비적이 평정돼 살기 좋다며 개척이민을 장려하는 내용. 수신교과서에 실린 충효사상. 이는 유교문화의 유산이 아니라 천황에의 충성을 말한다. 박정희 정권 때의 충효사상 강조와 흡사하다.

수집은 전단, 포스터, 우표, 군복, 지도, 앨범등 생활자료로까지 확대됐다. 역사는 텍스트로 알기보다 오감으로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판단에서다.

천인침(처녀 1000명이 수를 놓아 총알을 막아준다는 배띠), 무운장구의 기원을 적은 일장기, 한일합방 축하 가두행진 사진, 이완용의 친일시화, 최린 임전대책협의회 회장의 엽서, ‘돌격’ 담배,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세로 표어, 창씨개명 관련 자료, 일본군 앨범과 군표, 조선지원병 첫사망자인 이인석 상병 선전책자, 일본군가, 친일영화 전단 포스터, 황국신민서사 전단, 러일전쟁·중일전쟁 주사위 게임 등등. 이런 자료는 중간수집상, 인터넷 경매 등을 통해 구입한다.

친일청산 뜻있는 분 기증 바랍니다

“이렇게 체계적으로 모은 것이 처음입니다. 일찍 시작했더라면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이 남아요. 장삿속으로 모으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값이 많이 올랐거든요. 돈 없어 못 산 것 많아요.” 그는 뜻있는 사람들의 기증을 바랐다. 흩어져 값으로 존재하기보다 합쳐져 의미로 남는 것이 더 소중하다는 믿음에서다.

한해 앞으로 다가온 2007년. 대망의 친일인명사전이 마무리되면 10년 너머 미뤄온 박사학위 논문을 매듭지을 참이다. 주제는 박정희가 통치이데올로기로 내세워 성공을 거둔 민족, 국가 담론 분석과 국민교육헌장, 반상회, 학도호국단 등 언술을 관철시켰던 시스템 연구.

“해 저문 저녁 갈길은 먼데, 비가 오죠, 소는 뛰고요, 풀짐은 무거워오고요.”

임종업 기자 blitz@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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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 쫓는 ‘60대 소년’… “꿈 버리면 폭삭 늙어요”



[한겨레]
한국의 책쟁이들/③ 이석범 장서가협회장

책꽂이 앞에 서서 사진기자를 향해 수줍게 웃는 40대 초반의 부부. “서가가 먼지 한점없이 가지런하다”고 설명돼 있다. 82년 10월 <주간여성>에는 대한출판문화협회의 모범장서가상을 받은 이석범(당시 42세, 동구여상 국어교사)씨 집 탐방기사가 실렸다. ‘독서의 계절, 가을… 책모으기 15년에 장서 2천5백권’라는 제목. 기사를 보면, 그는 주머니에 몇백원만 생기면 책방으로 달려갔다. 새책방에서 목록을 확인하고 책은 주로 헌책방에서 구입했다. 아내 보기 미안해 사들인 책들은 직장에 두기도 하고 다른 방에 살짝 감추기도 하고 맡겨두었다가 낱권으로 나르기도 했다. 어려운 살림에 신혼여행도 가지 못했다가 결혼 19년만인 전년 여름 동해로 해수욕을 다녀왔다. 책 욕심에 아내에게 치마 한감, 털 스웨터 한벌 선물하지 못했다.

그로부터 25년이 흐른 2006년 6월. 2천5백여권의 책은 1만2천여권으로 불어나 단독주택 옛집에서 300미터쯤 떨어진 새 아파트로 옮겨졌다. 책의 주인 이석범씨는 예순여섯, 지난해 동구여상에서 교감으로 정년 퇴임했지만, 그가 서있는 배경은 여전히 먼지 한점 없는 서가였다. 4년 전만해도 그는 냉천동에서, 그 이태 전까지는 천연동 구옥에서 27년을 살았다. 남들은 집을 넓힌다, 아파트를 장만한다고 하는데, 그는 그럴 만큼 경제적 여유가 없었을 뿐더러 짐 때문에 이사할 엄두를 못냈다. 원인은 그·놈·의· 책이다. “월급을 봉투째 집에 가져오는 경우는 없었어요. 따로 나오던 수당이나 과외비는 당연히 책값으로 들어갔죠. 생존 이외의 것은 서화를 사는데 들어갔다고 하면 맞아요.” 불어나는 책과 함께 아내의 불만도 조금씩 불어났을 터.

“물어보지 마세요. 안 좋아하지는 않지만…,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나중에 소장품을 팔아 호강시켜 줄라나 모르지만…. 남편 마음이 딴데 가 있는데 무슨 호강을 해요?” 마침 외출했다가 점심을 차려주러 잠간 들른 부인 이종순(65)씨의 말에는 뼈가 들었다. “그대신 술을 안 하니까 술값이라고 생각하고 잘 살았어요.” 눅잦히는 덧말에 굳어졌던 남편의 표정이 비로소 풀렸다. 그놈의 책은 부부간 감정의 골에 완고하게 존재하는 셈. 안방에 시집 3천여권, 작은 방에 국문학 책 3천여권, 거실에 각종 미술 책이 수백권. 쉬엄쉬엄 옮겨온 게 그것이고 나머지는 옛집 옥탑과 지하실에 보관돼 있다.

술값이라 치고 살았다는 아내

“고교때 친구가 읽던 딱지본 삼국지가 부러웠어요. 얼마나 읽었는지 내용을 달달 외더군요. 빌려달랬더니 아버지 핑계를 대며 선뜻 빌려주지 않더라고요.” 여러 번 졸라 허겁지겁 읽었지만 그 허기는 훗날 월탄 삼국지를 읽고서야 끌 수 있었다. 서울맹학교 보통사범과 재학 때, 일정액을 헌책방에 맡기고 빌려읽은 책 정가의 10~20%를 빼나가는 식으로 책을 섭렵했다. 한 여학생한테서 민중서관 한국문학전집 38권을 한권씩 차례로 빌려 모두 독파한 기억이 있다. 운산초등학교 교사를 거쳐 66년 맹학교 교사로 발령받은 그는 점자로 만들어지지 않은 책들을 5년동안 학생들에게 읽어주며 동시에 자신의 독서량도 채웠다.

그가 책을 모으기 시작한 것은 동구여상 교사 시절 국제대와 성균관대 대학원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하면서부터. 전공은 물론 자신이 맡은 국어수업과 관련된 책이 시작이다. 국어 교과서에 나오는 시집, 소설집 등 실물을 구해 수업 교재로 활용해 일석이조 효과를 거뒀다. 모으는 재미와 속도가 붙으면서 그는 헌책방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얼굴이 알려졌다. 홍제동 대양서점 주인 정종성씨는 “교사 재직 때는 토, 일요일이면 꼭 들르곤 했다”면서 “책 외에 그림과 글씨에도 관심이 많았다”고 말했다.

옆집 세탁소 불로 타거나 그을고, 장맛비로 옥탑이 새면서 젖어서 할 수 없이 버린 100여권 외에 그의 집으로 옮겨온 책들은 애지중지 호강이었다. 떨어진 것은 붙여지고, 이빠진 것은 짝이 맞춰졌다.

현재 그는 최성장, 김관호, 박기연, 진병노, 신영길씨에 이은 장서가협회 6대 회장이다. 이 협회는 출판문화협회가 주는 모범장서가 표창을 받은 사람을 회원으로 1972년에 조직되었다. “상서기풍을 진작하여 서적수집과 독서연구의 상호협동을 목적으로 하는” 친목단체다. 모범장서가는 64년부터 74년을 제외하고 매년 수상자를 내고 75년부터는 <상서>라는 이름의 회지를 내어왔다.

“순수하게 읽기 위해 스스로 발품을 팔아 한권두권 책을 모은 사람을 대상으로 했어요. 나라 안에서 발행한 단행본 2000권이 넘으면 자격이 주어졌지만 대학교수, 목사, 신부 등 책 속에 살아야 하는 사람, 운좋게 조상한테 물려받은 사람, 상업적인 목적으로 사들인 사람은 제외됐죠.”

책읽는 풍토를 만들자는 취지에서 시작한 이 제도는 차츰 권위가 붙어 해마다 수상자들은 매스컴의 조명을 받았고 공직자는 가점 혜택을 받았다. 하지만 무슨 까닭인지 출판문화협회가 지원을 중단하면서 94년부터 수상자를 내지 못했다. 회원은 87명에서 뚝 멈추었고 그나마 타계, 주소불명 등으로 연락이 닿은 사람은 55명뿐이다. 회비와 후원금으로 발행하던 회지도 97년 14집을 끝으로 더이상 잇지 못하고 있다.

“출협을 찾아가 포상제도를 부활해줄 것을 몇차례 얘기했는데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더군요.”

그는 “요즘 사람들이 인터넷이다 뭐다 해서 한해 책 5권도 채 읽지 않는다”면서 “그런 만큼 책의 중요성을 널리 알리는 게 더욱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고흥식 출협 사무국장은 “대상자가 엇비슷하고 표창 효과가 기대에 못 미쳐 중단되었다”면서 “필요하다는 요구가 있으면 재개를 논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씨는 신영길 전임회장의 장서를 거론하며 책이 홀대받는 현실을 개탄했다.

신씨가 평생 모은 책은 5만여권. 전경련, 여수대학, 이화여대 등에서 모두 거절당한채 이리저리 떠돌았다. 박영식 총장의 후의로 광운대 도서관에서 안식을 얻기까지 그 책들은 한달 보관료 60만원을 물며 컨테이너 박스 신세를 져야 했다. 이씨는 문화일보 건물 지하에서 한때 펼쳐진 신씨의 장서를 구경한 적이 있다면서 한마디로 장관이었다고 술회했다. “젊은 사서들은 오래된 책의 중요성을 인정하지 않아요. 열람회수가 적거나 세로로 쓰인 책은 낮춰보는 것 같고요. 귀한 책이 폐기 처분돼 흘러나오는 걸 보면 가슴 아파요.” 장서가가 작고한 뒤 2~3일 안에 헌책방으로 책이 흘러나와 깜짝 놀란 적도 있다고 전했다.

젊은 사서 세로쓰기 책 낮춰 봐

문무속객실유장서(門無俗客室有藏書). 거실에는 친구인 윤양희 교수(계명대 미대 서예과)가 써준 휘호가 걸렸다. 청정지대에 들어온 속객이 물었다. “어찌하여 같은 책이 여러 권 있습니까?” 언뜻 조지훈 시집 <역사 앞에서>가 세권이나 눈에 들어왔다. “귀중한 것은 거둘 수밖에 없어요. 겹치는 것은 누군가에게 선물할 것을 염두에 두고 가져온 것입니다.” 한때 그는 결혼식 등에 책을 즐겨 선물했다. 하지만 받는 사람이 시덥잖아하는 눈치가 보이면서 책의 운명이 걱정돼 그러기를 그만두었다. 그런 흔적이 복본으로 남았다.

감신대 뒤쪽 다세대 주택 옥탑방. 책을 보관하기 위해 따로 들인 열평 안팎의 공간이다. 아파트로 옮겨가고 남은 책들과 신문스크랩 상자가 가득하다. 책 꽂임새나 놓임새가 아침조회에 모인 학생들 닮았다. 논맹 한적이 한켠에 고요하고, <조선사화>(문일평, 청구사) <창에 기대어>(조지훈, 범조사), <백팔번뇌>(최남선, 한성도서) 등 근현대 서책이 누웠다. 민중서관의 한국문학전집 서른 여덟 완질이 추억처럼 쌓였다.

오랫동안 써온 일기와 독서노트, 탁상일기, 교무일지 등이 고스란하다. <나의 일기>로 제본된 것, 종이를 잘라 맨 것, 스프링노트, 실로 꿰맨 것 등 자체가 하나의 노트 변천사다. 군대에서 짧은 휴식중 메모한 것은 낱장으로 끼워져 있다. 사연이 깃들지 않은 책, 손길이 머물지 않은 노트는 한권도 없다.

“이곳에 오면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잊어버립니다.” 시간이 뒤섞인 책무더기에 자신의 기억이 버무려져 있으니 어련하겠는가. 그는 김동인의 소설 ‘무지개’의 마지막 구절이 뇌리에 맴돈다고 했다. ‘무지개 쫓기를 단념한 순간 폭삭 늙어버렸다.’

그는 요즘도 기억창고를 채우고 있다. 책은 책방에 가서 직접 골라야 한다는 게 지론. 인터넷으로 책을 사본 적이 없다. 늦은 점심을 먹고 그는 서대문에서 5호선 지하철을 탔다. 아무래도 동묘 부근의 헌책방으로 가지 싶다.

임종업 선임기자 blitz@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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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어·라틴어·불어 섭렵 ‘도판 읽기’ 독보적 경지




[한겨레] 한국의 글쟁이들/② 미술 전문 저술가 노성두

출판과 궁합이 가장 잘 맞는 예술 장르는 단연 미술이다. 책에 작품 그림이 실리면 보기에도 좋고, 수천년 세월 미술속에 쌓인 이야깃거리가 무궁무진해 책으로 쓸 소재도 많다. 사진도 같은 시각예술이지만 출판 측면에서는 미술과는 비교가 안된다. 최근 ‘교양’ 바람과 맞물리면서 출판시장에는 대중적 미술책이 1년에 수십종씩 쏟아져 나올 정도다.

하지만 이처럼 미술이 출판으로 대중들을 찾아가기 시작한 것은 불과 10년도 채 안된다. 1990년대 이후 미술책을 전문적으로 쓰는 저술가들이 등장해 교양미술책을 펴내기 시작하면서 미술책은 출판의 중요한 새 분야로 떠오를 수 있었다. 그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미술전문 저술가 노성두(48)씨다.

노씨는 국내 미술교양서 필자를 대표하는 1세대 전문 저술가다. 미술저술가들을 나눌때 교양인 차원에서 출발해 대중적으로 알기 쉽게 미술을 소개하는 ‘저널리즘 기반의 저술가’와, 미술사와 비평을 전공한 연구자 출신의 ‘아카데미즘 기반의 저술가’로 구분한다면 이주헌씨는 전자를, 노성두씨는 후자를 각각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이씨는 신문사 문화부 미술담당 기자 출신, 노씨는 미술사학자 출신으로 서로 기반과 출발점은 다르지만 오로지 책만으로 승부하는 프로 저술가로 나선 첫세대 미술저술가란 점에서 같다.

인천 노씨의 아파트는 안방이 작은 방이고 원래 안방인 가장 큰 방은 자료실이다. 책과 도록이 자료실 네 벽을 차지한 것은 물론 방바닥까지 점령해 중간 중간 발디딜 틈만 남겨놓고 있다. “오해하실까봐 말씀 드리는데요, 지금 이 상태가 치운 겁니다.” 워낙 작업량이 많다보니 책상위가 정돈될 틈이 없다. 그래도 이 복잡한 자료더미 안에서 노씨는 원하는 그림이 들어 있는 도록을 10초면 척척 찾아낸다.

노씨는 99년 첫 책을 낸 이후 지금까지 모두 61종의 성인·어린이용 미술책을 짓거나 번역했다. 해마다 8~10권씩을 펴낸 셈이다. 해박한 인문학적 지식과 도판해석 능력은 다른 미술저술가들이 부러워하는 노씨의 자산이다. 미술가와 그림에 얽힌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주는 저술가들은 여럿이어도 노씨처럼 서양 미술 도판을 직접 보면서 그림속에 담긴 의미를 해석해내는 미술저술가는 없었다. 또한 미술사 주요 1차자료를 직접 원전해석할 수 있는 저술가도 노씨가 처음이었다. 독일어는 물론 르네상스 미술로 박사학위를 딴만큼 이탈리아어, 그리고 고전미술의 공식언어랄 수 있는 라틴어, 영어와 불어를 번역할 수 있는 어학능력도 노씨만의 트레이드마크다. 영어판을 통해 2차 습득하는 지식이 아니라 원전에 직접 접근할 수 있는 미술저술가는 지금도 드물다. 고정팬들은 노씨의 문장이 미문이란 점을 첫번째 매력으로 꼽는다.

99년 첫책 이후 61종 짓거나 번역

노씨가 저술가로 나선 것은 교수자리를 얻지 못한 게 계기가 됐다. 학부에서 독문학을 전공했던 노씨는 독일로 유학가서 미술사학으로 전공을 바꿔 10여년 공부한 뒤 94년 귀국했다. 그러나 교수자리는 그에게 오지 않았다. 96년 결혼 직후 노씨는 아내에게 “다 때려치우고 글을 써서 먹고 살테니 앞으로 1년만 버텨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1년 동안 노씨는 자신을 저술가로 ‘재부팅’하는 체질개선작업에 돌입했다.

이 기간에 노씨가 전범으로 삼은 ‘글스승’은 2명이다. 첫번째가 고은 시인이다. “땀냄새 나는 현장감이 일품”이어서 고은 시인의 시를 거듭 음미하며 읽었다. 다음 글쓰기 모델은 <중앙일보> 바둑전문기자 박치문씨. “검은돌 흰돌 두개만 가지고 우주처럼 써대는 수사에 감탄해” 문장을 곱씹었다. 그렇게 자기 문체를 만들면서 번역할 책 목록을 뽑아 여행가방에 책을 넣고 무작정 출판사들을 찾아갔다. 그렇게 해서 나온 첫 번역서가 <알베르티의 회화론>(사계절)이었다. “원래는 고전번역을 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금방 깨달았죠. 번역, 그것도 고전번역은 정말 먹고 살 수 없다는 것을요.” 그래서 저술에 모든 활동을 맞췄고, 그의 이름을 알린 첫 본격 저술서로 나온 책이 <보티첼리가 만난 호메로스>(사계절·99년)다.

노씨가 세운 저술 원칙 1번은 ‘신뢰성’이다. 노씨가 보기에 우리 미술책의 문제점은 비전공자들이 쓴 미술책이 많아 너무 오류가 많고, 그런 오류가 정설처럼 재생산된다는 점이다. “7년쯤 전 어린이책 베스트 1위에 오른 미술책을 들춰봤다가 크게 충격을 받았어요. 맞는 내용보다 틀리는 내용이 더 많았습니다.” 이후 노씨는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미술책에 더 많은 시간을 쏟게 됐다. 성인용 정통 미술단행본은 잘 안팔리기 때문에 생계를 위해 내린 선택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아이들에게 정확하게 가르쳐야 겠다는 의무감이 앞섰다. “밀로의 비너스가 ‘8등신’ 기준으로 만들었다고 미술책에 흔히 나오지요. 그런데 고대 그리스의 인체 비례의 기준은 머리가 아니라 발바닥이었어요. 머리 기준은 15세기 이후 등장한 것인데도 검증도 않고 인용해서 쓰고 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주검 60구를 해부해 인체에 대한 지식을 쌓았다는 것도 대표적인 오류다. “다빈치가 쓴 수기를 직접 번역해보니 30구였습니다. 왜 60구란 수치가 나왔는지 모르겠어요.” 이렇게 믿을만한 책을 쓴다는 자부심을 잘 보여주는 책이 최근 나온 청소년용 미술책 <춤추는 세상을 껴안은 화가 브뢰겔>이다. 브뢰겔 그림을 이해하려면 16세기 네덜란드 속담을 알아야 하는데, 이를 위해 그림에 숨어있는 당시 네덜란드 속담 126개를 모두 번역해 부록을 실었을 정도다.

미술저술가의 길을 연 개척자로서의 위상과는 달리 그의 실제 수입은 의외다 싶을 만큼 적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본격 저술가로, 그것도 미술저술가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쉽지 않은 일인지, 동시에 우리나라 미술출판의 현실과 한계가 무엇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해마다 8권 이상 책을 내는데 그가 ‘책’만으로 버는 수입은 한 해 2000만원 안팎. 노씨가 쓴 책을 보면 번역서를 뺀 일반인용 책은 의외로 적고, 그나마 나오는 기간도 1~2년에 한 권 정도다. 그리고 이 책들은 대부분 말랑말랑한 에세이류가 많아 ‘노성두의 주 저’란 이름을 내걸 만한 책은 없다는 비판도 듣는다. “죄짓는 기분이죠. 그런데 도무지 조금이라도 학문적인 책은 내고 싶어도 낼 엄두가 안나요. 언론에서도 크게 다룬 책이 3000부도 안팔린 경우도 있습니다.”

저술 원칙은 ‘믿을만한 책’

우리 출판시장에서 교양미술책은 팔리는 주제만 중복출판된다. 인상파, 특히 고흐에 대한 책만 계속 나온다. 노씨가 다루는 근대 이전 고전미술들은 아직 대중들에겐 어려운 미술이란 관념이 강하게 박혀 있다. 그 간극이 메워질 때까지 저술가로서 노씨가 가야할 길은 아직도 많이 남아 있는 듯하다.

글 구본준 기자 bonbon@hani.co.kr, 사진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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