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빨강 2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4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는 소설 속의 '화자'를 어디까지 신뢰해야 하는가? 애거서 크리스티의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은 살인범이 끝까지 독자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뻔뻔스럽게 속이는 소설이다. 이 악한은 객관적이고 선량한 목소리를 가장하여 소설을 읽는 내내 독자들을 혼란시키다가, 마지막 부분에 가서야 뒤통수를 때리고는 낄낄거리며 즐거워한다. 아이리시의 [환상의 여자] 속 화자 역시 사건의 진상을 결코 온전한 형태로 독자에게 보여주는 일이 없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실제 벌어진 일과 전혀 딴판인 설명을 독자에게 진실인양 공개하기도 한다. 비단 추리소설만 그런 것은 아니다. 거의 모든 소설 작품에서, 화자는 자신의 이념을 선전(도스또예프스끼의 [악령]을 생각해보라)하고 자신의 처지를 변명하며 정당화(미스터 리플리는 이 방면에서도 천재적이다)해서 독자에게 납득시키기에 여념이 없다. 편협한 화자는 작중 특정 인물에 치우친 애착을 표하거나 찬양하기도(토마스 만의 [트리스탄]을 읽어보라) 하고, 다른 문화를 저급한 것으로 비하하는가 하면(셜록 홈즈 소설을 굳이 언급할 필요가 있을까?) 고결한 인물을 비열한으로, 천박한 악녀를 영광된 성녀로 묘사하기 일쑤다. 때문에 우리는 소설 속의 화자라는 존재에 대해 한번쯤 심각하게 고찰해볼 필요가 있다. 소설을 읽을 때, 우리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자는 진실을 말하고 있는가. 그는 얼만큼 정치적으로 공정한 사람일까. 그는 자신의 윤리관이나 미학관, 취향을 우리에게 수긍하도록 강요하고 있지 않은가. 무엇보다 화자가 사건에 대해 갖고 있는 기억은 과연 얼마만큼 정확한 것일까. 그가 이야기하는 내용은 세월에 의해 흐려지고, 왜곡되고, 부풀려진 것이 아닐까.

 터키 출신 작가 오르한 파묵의 장편소설 [내 이름은 빨강]이 흥미롭다면, 이는 분명 이 작품에 등장하는 수많은 등장 인물들의 인간적 결함 때문일 것이다. [빨강]은 주인공 카라와 셰큐레를 비롯해서 십 수명의 인물들이 교대로 화자 역할을 맡아 자신을 변호하는 소설이다. 인물들은 마치 동네야구에서 서로 공을 던져보겠다고 싸우는 애들처럼 각 장마다 번갈아가며 이야기꾼으로 나선다. 그리고 이들은 서로 자신은 결백하고, 자신의 미학적 관점은 알라가 보시기에 올바른 것이며, 자신의 외모는 멋지고, 다른 사람은 멍청이거나 악당이거나 신성 모독자임에 틀림없다고 고자질한다. 등장인물들 간에 이론의 여지가 없는 것은 코란의 신성성과 셰큐레의 미모 뿐일 정도로, 화자들은 서로 다른 주장과 진술과 기억으로 독자에게 수십가지 서로 다른 사실을 제시한다. 심지어 주인공인 카라조차도 자신의 증언에서와는 달리, 세밀화가들의 묘사에서는 바보 멍청이에 무능력한 인간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러한 구성은 기존의 소설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텍스트 읽기를 독자에게 체험하게 한다. [빨강]에서는 수많은 주관적 진술들이 한데 모여 커다란 객관적 사실을 드러낸다. 독자는 [빨강]의 인물들을 결코 신뢰하지 않고 그들이 하는 얘기가 전부 사실은 아니라는 점도 알고 있지만(심지어 세 명 중 하나는 살인자라는 사실까지도), 그럼에도 이 모든 진술들은 하나의 고리로 연결되어 '하나의 화자에 의한 단일한 설명'보다도 더 큰 사실성과 설득력을 얻게 된다. 독자는 기존 소설에서 작가의 의도에 일방적으로 끌려가던 처지에서 벗어나, 같은 이야기를 그린 세밀화의 여러 판본들 가운데서 한 점을 선택하는 화원장처럼 진상이 무엇인지를 판단해야 한다. 또한 본래 화자들은 저마다의 세계와 이데올로기를 갖고 독자를 자신에게 맞춰 코드화시키려 안간힘을 쓰는 존재이다. 화자의 숫자가 늘어나는 만큼 독자는 [빨강] 속에서 각각의 화자들이 시도하는 여러 종류의 개별 코드화에 대응해야 하고, 꼭 화자의 숫자 만큼의 서로 다른 '백과사전'을 펼쳐 보아야 하며, 화자가 말하는 이야기가 지닌 개연성을 추론하는 작업 역시도 훨씬 복잡해지고 까다로워진다. 텍스트에 대한 독자의 협력 작업이 기존의 소설에서보다 매우 주도적이고 능동적인 지위를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빨강]은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이 이야기하는 '낯설게 하기'의 기법에 있어서도 주목할 만한 성과를 거둬내고 있다. [빨강]은 기본적으로 이슬람권 소설이며, 비이슬람권 독자에게는 낯설게만 느껴질 16세기 이스탄불의 채색 세밀화를 둘러싼 미학적-종교적 논쟁을 다루고 있다. 중요한 것은, 오르한 파묵이 강력한 박진법을 구사하며 이 화려하고 신비스런 세밀화의 아름다움을 '눈에 보이는 듯이'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인리히 라우스베르크의 수사학 이론에 따르자면, 박진법은 독자가 '재현된 것을 눈으로 볼 수 있도록 제시하는 것'이자 '직접 보여주는 것처럼 말하는 것'에 해당한다. [빨강] 전체를 수놓고 있는 세밀화에 대한 묘사, 셰큐레의 아름다움, 이스탄불 겨울의 풍광 등은 그야말로 눈에 보이는 듯 선명하고 독자의 상상을 유도해내는 면에서 박진법의 한 경지를 일궈내고 있다. 오르한 파묵의 묘사는 알랭 로브그리예보다 신비롭고, 나보코프보다 사실적이며, 기계 장치를 묘사하는 카프카의 꼼꼼함만큼이나 정성스럽다. 이처럼 독자가 '잘 알지 못하는' 대상을 '잘 아는 것처럼' 묘사하는 방식을 통해 [빨강]은 텍스트의 의미 생성과 문체에 있어 두루 성공을 거두고 있다.

 무엇보다도 나는 [빨강]이 이슬람권 작가에 의해 쓰여진 작품으로, 이슬람을 주제로 한 작품으로서는 거의 유일하게 (플로베르나 네르발같은 대문호도 피해갈 수 없었던) '오리엔탈리즘'에서 자유로운 작품임을 지적하고 싶다. 소설 속에서 이슬람 전통을 고수하려는 자들과 유럽 르네상스의 성과물을 도입하려는 자들은 모두 공평한 발언 기회를 얻어 자신들의 미학관과 종교관을 피력한다. 이렇게 다양한 인물들의 이견을 두루 소개하면서도, [빨강]에는 '다양성의 존중'이라는 하나의 동위 주제가 관통하고 있다. 파묵은 이슬람권 작가임에도 이슬람적 가치에 함몰되어 서구의 문물을 배척하는 것을 경계하며, 한편으로는 고유의 정신적 유산이 사라지고 빛을 잃어가는 현실에 대해서도 안타까워한다. 파묵의 소설은 이슬람권 사람들의 정신으로, 이슬람의 사고 방식으로 이야기하면서도 '나와 다른 것'에 대한 열린 입장을 놓치지 않는다. 그렇게, 여러 화가가 힘을 합쳐 완성해낸 하나의 채색 세밀화처럼, [내 이름은 빨강]은 다양성 속에 존재하는 소중한 가치를 이야기한다. 세밀화 '유수프의 유혹'이 지닌 화려한 색채만큼 놀랍도록 아름다운 문체와, 비범한 세밀화가의 실험적 그림처럼 독자의 지위에 대한 색다른 실험을 시도한다. 기존의 소설들이 사실상 독자를 가르치고 속이고 농락하는 텍스트 전략에 기대고 있음을 생각할 때, [내 이름은 빨강]이란 소설을 읽는 것은 독자에게 있어서는 차라리 하나의 감동적인 특권에 가깝다. [내 이름은 빨강]은 전쟁에 불타버리고 세월에 좀슬어버린 옛 세밀화의 운명과 달리, 오래도록 보존되고 읽혀야 할 현대의 고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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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쁜하루 2007-01-30 1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추천이 많은 리뷰는 참으로 오랜만이다.
내이름은 빨강을 읽으며 "이 책 좋아요?" 라는 질문을 참 여러번 받았다. 얼른 읽고 어떻다 라고 말해주고 싶은 심정인데 생각만큼 진도가 빨리 나가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재미가 없다는건 아닌데..참 희한하지...
이 리뷰가 도움이 되어서 책 읽기에 가속도를 좀 붙였으면 좋겠다.
 

[북데일리] 평생 아내와 아이들을 그리워하며, 예술가로서의 입지를 갈구하며, 그리움과 병든 몸에 초라하게 죽어간 이중섭. 한국의 대표화가로 이름을 올리고 있는 현재에도 모조품 논란 등의 구설수에 올라 50주년을 맞이한 2006년에는 그를 기리는 소박한 행사마저 조심스러웠을 정도로 여전히 그의 인생은 쓸쓸하다.

이중섭, 그는 보고 싶지만 보지 못하는 아내 앞에서 사랑을 그리워하는 남자였고, 두 아들이 장난꾸러기가 되어가는 것을 눈으로 지켜보지 못하고 엽서와 편지로만 안부를 묻는 아버지였다. 그의 이런 현실적인 모습이 <이중섭 1916~1956 편지와 그림들>(다빈치. 2003)에 여실히 드러나 있다.

보고 싶은 가족을 위해 그림을 포기해 버리겠다는 선언도 서슴지 않고, 자신을 알아봐주지 않는 대중에 대한 일갈도 서슴지 않는 한 인간으로서의 이중섭은 너무도 인간적이고 너무도 평범하기에 오히려 인정하고 싶지 않은 기분이 들지 않았다.

의미 없는 일이지만 젊은 날의 강렬한 한 장의 그림을 남기고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거나 최고의 자리에서 불의의 사고를 당하는 예술가들과 비교해도 굶주림과 병마, 그리고 가족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으로 쓸쓸히 죽어간 그의 모습은 비참하고 처량하다. 아니, 자신의 손으로 그림을 죽이고 삶의 의지를 놓아버렸으니 그의 죽음 역시 처절한 자살에 가깝다.

그의 편지와 그림들은 대부분 자신과 가족에 대한 지키지 못한 약속이다. 그가 꿈꾸는 가족의 품에서, 그를 인정해주는 대중들 품에서 배부르게 예술을 하며 대작을 그리고 말겠다는 그의 지켜지지 않은, 지키지 못한 약속들인 것이다.

이중섭의 편지와 그림들이 이중섭 본인의 사사로움을 담고 있다면 <아름다운 사람, 이중섭>(문학과지성사. 2000)에서는 그의 그림을 바라보는 통사적인 시각을 다루고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바라보는 이중섭은 요절한 천재, 정신이상 행위 등의 이미지가 강하다. 그 때문에 이중섭의 그림과 우리 사이에는 미묘한 거리가 있다. 그 거리가 종종 이중섭과 그의 그림에 천재적이라는 수식어로 평가를 높여주는 반면, 그와 그의 그림을 바로 볼 기회를 잃게 한다.

그는 못 다 핀 천재, 기이한 행동을 일삼던 광인이기 이전에 한없이 우리와 가까웠던 대한민국의 아버지, 아들, 그리고 친구였다. 그것이 바로 작가 전인권이 이 책을 통해 이중섭을 바라보고자 하는 시각이다. 우리네 화가 중 이중섭만큼 분석이 지나친 작가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분석은 대부분 그의 범상치 않은 정신세계와 그 시각에 따라 조명된 작품에 집중한다. 어떤 경우에는 그의 작품이 가족의 테두리 안에 있는 지극히 개인적인 사유의 발로라고 폄하되기도 한다.

이 두 갈래의 이중섭을 바라보는 시각은 상이하지만 닮은 구석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이중섭을 기이한 천재의 테두리 안에 가둬두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평론이라는 것, 특히나 작가의 변을 더 이상 덧붙일 수 없는 작품의 평가는 다분히 평론가가 작가를 어떤 틀에서 바라보느냐에 달려있다. 때문에 극단적으로 치닫는 작가의 평가는 지극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전인권이 말하는 이중섭 역시 어떤 면에서는 극단적인 시각의 틀에 짜 맞춰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중섭이란 화가를 대중성을 가진 존재로 부각시키는 노력은 그리 흔치 않은 고무적인 일이다.

작가가 이 책을 통해 주목하고 있는 이중섭 그림의 특징은 ‘대중성’이라는 단어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대중성’이라는 단어가 주는 식상함이나 흔함의 거부감을 생각하자면 이중섭의 작품에 이 단어는 어울리지 않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와 우리와의 거리가 얼마나 가까웠는지를 표현하기에는 대중적이라는 말이 그의 작품을 대변할 수 있다. ‘아름다운 사람, 이중섭’의 작가가 이중섭을 우리와 가까운 대중적 작가로 부각시키는 요점은 다음과 같다.

먼저, 그가 평생을 통해 그려온 너무나 유명한 소그림을 예로 들어보자. 그가 고집스럽게 소그림을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분열되는 자아도 개인적인 상실감도 아닌 우리네의 아들로서의 이중섭이고 그의 울타리였던 어머니였고 가족이었다. 또한 그가 표현하는 가족이라는 울타리는 비단 그만의 가족이 아닌 전체적인 공동체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그가 집착했고, 평생을 통해 그렸던 소그림은 해체와 수렴을 거듭하며 공동체를 향해 다가서는 과정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두 번째로, 작가가 소그림 이상으로(개인적으로 나 또한) 주목하고 있는 군동화를 통해 그의 그림을 살펴보자. 이 군동화 역시 소그림만큼이나 많은 평론가들의 도마 위에 오르내리곤 한다. 군동화를 통한 이중섭의 정신세계에 대한 프로이트적 분석과 그의 성적인 불안감을 파고들기도 하면서 말이다.

이 책의 작가 역시 그런 분석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하지만 최대한 그림 외적인 논쟁을 자제하면서 이중섭과 대중의 거리를 줄이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런 노력의 산물은 그의 그림에서 발견한 큰 원에 있다. 이중섭이 그린 것은 결국 그것이 고집스러운 소그림이었든, 장난스러운 아이 이중섭을 담은 군동화, 또는 절절한 사랑과 욕망을 담은 에로티시즘이었던 우리네 공동체를 큰 원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그 큰 원은 그렇게 우리를 담고 이중섭 본인을 담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중섭의 작품이 자신과 가족의 테두리에만 국한된 좁은 세계관의 갇힌 그림이라는 평가를 짚어보자.

그의 그림이 그런 평가를 받는 원인은 그의 작품만큼이나 유명한 엽서그림이 가족을 위한 사사로운 그림이었고, 은지화 같이 어디에서 그린 그림의 크기가 상대적으로 작고,(그림의 크기로 가치를 판단하는 것이 우습지만 종종 그 크기와 대작의 평가가 비례하는 경우가 많다) 이중섭 자신이 자신의 그림을 대작을 그리기 전의 미흡한 작품으로 평가한 사실 등 여러 측면에서 찾을 수 있다.

물론 이중섭이 자신의 그림을 언제나 부족한, 그렇기 때문에 언젠가는 대작을 그리겠다는 욕망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만 보면 그의 그림이 한계에 빠져 좁은 세계에 갇혀있다는 평가가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작가의 대작을 향한 간절한 염원일 뿐 그의 작품을 폄하하는 합당한 이유는 되지 못한다.

이상의 작가 전인권이 집어내고 있는 이중섭이 아름다운 이유 중 몇가지이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이런 분석적인 원인이 아니다. 그 어떤 것보다 우리가 이중섭을 사랑하는 이유는 그의 그림이 보는 이의 가슴을 찢고 지나가는 강렬한 선과 소처럼 눈을 껌뻑이며 멍하게 바라보게 하는 색채로 대중과 이중섭, 그리고 우리 모두의 가족이 하나로 엮인 커다란 원을 무의식 속에 심어준다는 사실이다.

개인적으로 그림을 보는 자신의 시선에 타인의 시선을 겹치는 일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기에 좋아하는 작가의 그림에 대한 평론가의 거창한 분석에 상당한 거부감을 갖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작가에 대해 알고 싶어지면 질수록 그와 관련된 서적에 빠지게 된다. 또한, 화랑을 찾아 쉽게 볼 수 없는 작품이라면 도판을 통해 그림을 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관련된 책을 더 가까이 할 수밖에 없다.

이중섭의 경우도 그렇다. 어린 시절 과자상자에 더불어 온 그의 그림이 담긴 엽서 한 장으로 그를 마음에 품게 된 이후로 조금 더 그를 알고자 하는 욕망도 커져갔다. 하지만 그 욕망을 채워가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황소그림의 엽서를, 현대미술관에서 본 닭그림(부부였던 것 같다)을 처음 보고 느낌 순수한 감동이 흐려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중섭의 인간적인 감정이 고스란히 담긴 ‘이중섭, 편지와 그림들’을 읽고 나서는 너무도 인간적인 그의 모습에 배신감이 들기도 했고, ‘아름다운 사람, 이중섭’을 읽는 동안에는 대중과 이중섭의 거리를 좁히려는 작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타인의 생각에 지배를 받는다는 의심에 도리어 작가와의 거리 두기에 몰두하기도 했다. 어쩌면 나 역시 나만의 틀에 이중섭을 가둬두고, 그 틀을 벗어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너무도 인간적인 편지에 나타난 이중섭과 전인권이라는 평론가가 보고 있는 공동체 안의 이중섭의 모습, 이 두 가지 모두 그가 가진 얼굴일 수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익히 알고 있듯, 자연스럽게 그의 작품에 눈을 빼앗기는 것이다. 눈을 빼앗기고 마음을 빼앗기고 나면, 그림과 화가에 대한 관념이 종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뻗치는 순간이 오게 되고, 그 때가 되면 그 생각을 잡으려고 하지 않고 방치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 자연스러운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드러낸 전라의 이중섭과 광기어린 천재가 아닌 우리의 공동체 속의 이중섭을 품고 있는 그가 평생을 그린 커다란 원이 있기 때문이다.

[이광준 시민기자 yakwang7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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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인터뷰] 소설가 공지영

"내가 닮고싶은 여성이라니… 세상이 달라졌나봐요"
운동권·미모·세번의 이혼… 그리고 78만부 팔린 잘나가는 작가




이 만남은 뜨겁다. 덕담이나 입에 발린 말은 사양한다. 까칠하게 묻고 집요하게 말꼬리 잡는다. 새해를 맞아 한국일보가 논란과 화제의 중심에 서있는 사회 각계 인물들을 찾아가 그들의 생생한 모습을 파헤치는 다자(多者) 입체 인터뷰를 선보인다. 한 무리의 기자들이 치열하게 묻고 따지는 반론과 해명의 이 펄펄 끓는 현장으로 독자 여러분을 초대한다./편집자주

아주 좋거나 아주 싫거나! 그 중간은 없다. 소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으로 신드롬을 일으킨 소설가 공지영(44)씨. 어지간히 잘 나가는 작가도 1만부를 넘기기 어려운 문학의 장기 침체 속에서 홀로 78만부가 넘는 판매고를 올린 그에게는 작품 외에도 늘 다양한 이미지가 따라붙는다.

운동권, 페미니스트, 미모, 세 번의 이혼, 성이 다른 세 아이를 기르는 '싱글맘'…. 공지영이라는 이름과 함께 떠오르는 저 단어들로 인해 오해와 편견의 한 가운데 서 있는 그를 한국일보 문화부 기자 네 명이 만났다. 지난해 12월28일 오후 6시, 홍대앞 한 퓨전식당에서 시작된 이 까칠하고도 뜨거운 인터뷰는 술잔을 기울이며 자정을 넘겨서까지 계속됐다.







_<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덕분에 지난 한 해가 ‘나의 행복한 시간’이었겠어요.

“네. 당분간 생활비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아서 그게 제일 행복하고요. ‘사형제 폐지에 대해 다시 생각했다’는 독자들의 반응이 작가로서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어요.

_불편한 반응들도 있지 않아요?

“많죠. 반은 그렇다고 보면 돼요. 참 이상한 게 그런 리뷰들은 대개 ‘나는 공지영이 너무 싫다’로 시작하는데 끝에 가면 ‘그런데 책은 다 읽었다’ 이렇게 끝나.(웃음) 이게 되게 이상한 현상인 거 같아요. 처음엔 ‘왜 나를 미워하지? 싫으면 안 읽으면 되지 왜 다 읽고, 여기다 리뷰까지 달면서 날 미워할까’ 생각했는데, 뭐 어차피 대중들의 시각이란 게 완벽하게 일치하는 게 이상한 거죠. 어쨌든 저야 팔아주시니까 고맙죠.

_78만부나 팔았으면 죽을 때까지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은데 겨우 생활비 걱정 면한 건가요.

“아니, 얼마 전까지 생활비 걱정 했다니까 왜 그래요.(웃음) 막내 대학까지 보낼 수 있을까 생각하며 밤마다 울었다니까요.”

_한 달 수입이 30만~50만원도 안 되는 작가들도 많은데 그렇게 말하면 다른 작가들 맥빠지겠어요.

“맞아요. 좀 그렇긴 하죠. 하지만 다 사연이 있으니까 걱정이 된다는 거죠. 돈이라는 게 번대로 착착 쌓일 수도 없는 거고….”

_공지영 소설은 20대 여성이 가장 많이 읽잖아요. 젊은 세대와 통하는 게 있다는 얘긴데.

“대학 때 지방에서 올라온 친구들이 ‘중학교 때 전기가 처음 들어와서 감전된 적 있다’ 이런 얘기들을 막 하는데 너무 놀랐어요. 전 공선옥씨의 <오지리에 두고 온 서른 살>을 읽고 도무지 이해가 안 갔어요. ‘왜 대학까지 중퇴한 여자가 이런 데 가서 이 고생을 하지? 취직을 하든가 장사라도 하지’ 이해가 안 가요. 나중에 느꼈는데 60년대산들은 지역이 불균형하게 개발될 때다 보니까 지역별로 세대차가 막 나더라구요.

저는 우연히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경제개발의 혜택을 제일 먼저 입은 세대로 자라나서 초등학교 2학년 때 아파트로 이사를 갔어요. 바로 롤러스케이트 타고, 자전거를 탔죠. 당연히 TV도 봤고. 어떤 의미에서는 70년대 중반산들과 같은 경험을 가진 거예요. 아파트키드라는 거, 대도시적 감수성 가진 거. 문학소녀일 때는 대도시에 태어난 게 너무 창피했었어요. 그때 문학은 다 농촌정서 얘기하는데 나는 도저히 그게 무슨 얘긴지도 모르겠고, 그러면서 열등감을 느꼈는데, 시대가 변하면서 오히려 제 정서가 더 보편적이 된 거 같아요. 제가 잘 해서 선취한 것이 아니라 제가 자라온 환경이 그렇게 만든 거죠.”

_공지영씨의 좌파적 가치가 젊은 세대와 통하는 것 아닐까요.

“전 제가 좌파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어느날 토론에 나갔다가 충격을 받았어요. 저는 낙태에 관해 기본적으로 반대입장 취하거든요. 그런데 ‘넌 좌파가 어떻게 낙태를 반대하느냐, 더군다나 페미니스트인데’ 하면서 굉장히 공격을 받았어요. 나중에 생각해보니 내가 정치적인 면에서만 좌파고 나머진 굉장히 보수적이더라구요.”


문체 별로다… "단문으로 쉽게 쓴 게 왜 잘못됐나"
외모 덕 봤다… "문학계의 심은하 놀림도 받아 못생겼다면 책이 배는 팔렸을 것"
돈 많이 벌었다는데… "스물셋부터 가장 노릇 생활비 걱정 던 지 얼마 안돼 지금 사는 곳이 첫번째 내 집"



_예를 들면요?

“결혼 같은 거. 이거 웃긴 얘기지만, 남자와 여자는 꼭 결혼을 해야한다든가, 하하. 사람들이 왜 자꾸 결혼을 하냐고 물어서 제가 ‘아니, 사랑하면 결혼해야 되는 아냐?’ 그랬거든요. 물론 요즘 좀 생각이 바뀌었지만. 아무튼 그런 면에서 되게 보수적인데, 저는 사안에 따라서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는 게 훨씬 더 고뇌에 차고 가치 있는 삶인 것 같아요. 좌파, 우파로 나누면 제가 어느 쪽인지 모르겠고, 최소한 상식과 합리가 있는 길을 가고 싶어요.”

_운동은 왜 했어요?

“나 진~짜 운동하기 싫었어요. 안 하려고 엄청 애썼고. 그런데 왜 하필 나랑 친한 애들은 다 운동하고, 잡혀가고, 죽고 그러는지. 난 무섭고 귀찮고 싫고 피하고 싶었는데 운동하는 사람들이 너무 예쁜 거예요. 내가 생각하는 인간의 이상을 가장 근접해 실현하고 있었어요. 사람을 좋아하다 보니 이쪽으로 따라갔죠.

또 하나는 안 하고 있으면 너무 괴로워서 견딜 수가 없는 거예요. 차라리 내가 가서 괴로움 당하는 게 낫지. 멀리서 남들 괴로워하는 거 보면서 마음 괴로운 거보다 몸으로 때우는 게 덜 괴로웠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 거예요. 그것이 오늘날의 절 만드는 데 상당한 기여를 했죠. 만약 이 과정이 없었다면 저는 정말로 재수없는 부르주아 여성이 됐을 거예요. 전두환이라는 사람이 내 인생에 기여한 바가 참 많아요. 나를 정말 사람 만들어줬죠.”

_운동하면서 아버지와 갈등 많았잖아요.

“전 아버지가 특별히 사랑하는 딸이었어요. 제가 1남2녀의 막내거든요. 초등학교 때 아버지가 외국인 회사에 취직을 했는데, 전용차로 도요타 크라운이라는 커다란 외제차가 나왔어요. 제가 대학교 3학년 때까지 아버지는 아무리 술을 많이 드시고 온 날이라도 직접 운전해서 학교까지 태워다 주셨어요. 전 남들도 다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었더라구요.

제가 태어나기 전부터 저희 집이 한국일보를 봤는데, 아버지는 ‘장명수란 여자가 대단하다.난 니가 그런 여자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어요. 저한테 기대를 많이 하셨죠. 그런데 대학교 2학년 때 형사가 집으로 찾아오면서 난생 처음으로 아버지한테 뺨을 한 대 맞았죠. 아직도 정치적인 의견은 많이 다르지만 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느끼고 있어요.”

_사실 공지영 소설이 문체가 아름다운 것도 아니고, 미학적으로 뛰어난 것도 아니잖아요. 서사가 강해서 번역해도 잃을 게 하나도 없는데.

“전 소설을 대하는 입장이 동시대의 다른 문인들과 달라요. 그래서 이런 삐그덕거리는 일들이 있는 것 아닌가 생각해요. 저는 문체가 아름답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어요. 그게 뭐예요, 도대체? 아름다운 단어를 써야 아름다운 문체인가요?

저는 처음부터 미사여구 쓰지 않고, 화려한 문체보다는 단문으로 이해하기 쉽게 쓰려고 했어요. 소설은 캐릭터와 상황의 문제예요. 중요한 건 캐릭터를 어떻게 설정하고, 그 캐릭터를 어떤 상황에 배치하는가죠. 사람들은 <춘향전>이나 <베니스의 상인>을 원전으로 읽지 않아도 춘향이와 샤일록이라는 캐릭터는 알아요. 제가 추구한 것은 삶의 본질, 인간성, 시대의 본질을 전달하는 거예요. 그래서 문체가 어쩌고 저쩌고 하는 말 들었을 때 굉장히 당황했어요. 서사가 강한 게 뭘 그렇게 잘못을 하는 건지 잘 모르겠더라구요. 나는 소설이 그런 거라고 생각하고 시작했는데, 항상 보면 ‘극단적인 캐릭터다’, ‘문체가 너무나 거칠다’ 이런 평들을 하니까. 왜 내가 추구하는 것들은 하나도 얘기 안 하죠?

_이제 공지영이라는 이름은 확실한 브랜드가 된 것 같아요. 무슨 책을 써도 기본은 팔린다는 관측인데.

“그건 오직 신만이 아시는 거죠. 독자들은 너무 변덕스러워서 그 기호를 따라가다가는 제가 망해요. 그냥 제 배짱대로 쓰는 거죠. 우리 문단에서 ‘밥벌이 때문에 소설 쓴다. 밥벌이 안되면 미련 없이 떠난다’고 말하는 사람이 저랑 김훈 선배예요. 난 가장이기 때문에 노동의 대가가 충분치 않을 경우 하시라도 국수집을 할 태도가 돼 있어요. 국수 맛있게 마는 비법이 하나 있거든요. 제겐 프로작가로서의 내 노동이 우리 아이들과 나를 먹여 살릴 수 있느냐가 굉장히 중요해요.”

_얼마 전 라디오 설문조사에서 미녀배우들과 함께 ‘20대 여성이 뽑은 닮고 싶은 여성’ 4위에 올랐어요.

“하하하. 1위가 김혜수, 2위가 고현정, 3위가 이나영, 5위가 손예진이었어요. 내가 그거 다 외워. 황당했지만 기분은 좋았어요. 내가 올 초에 3번 이혼한 사실을 밝힐 때까지 어려운 과정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제 남의 반응은 신경 쓰지 않겠다는 결심이었는데요, 정말 깜짝 놀랐어요.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아, 이 죄인을’이었고. 난 나대로 불행하게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나를 닮고 싶다니. 세대가 바뀌긴 바뀌었나 봐요.”

_남성잡지 <에스콰이어>가 뽑은 ‘남성들이 가장 만나고 싶은 작가’ 1위에도 올랐어요.

“와. 그러니까 자꾸 광고가 들어와서 날 힘들게 하는구나.”

_무슨 광고요?

“커피 광고도 들어오고, 소주, 아파트 광고도 들어왔어요.”

_거절하셨어요?

“네. ‘묶어서 한 10억 부르고 한 십년 쉬어?’ 하는 그런 생각도 했는데요(웃음). 예전에 돈이 너무 없을 때였는데, 자동차 지면 광고가 들어온 적이 있어요. 너무 유혹적이었죠. 하지만 내가 자본주의도 비판해야 하는데, 거기 가서 ‘이 차 사세요. 좋아요’ 그렇게 말할 수는 없잖아요. 내가 언젠가 그랑 부르주아를 소설에 등장시켜서 깔 수도 있는데, ‘이 차 너무 좋거든요’, ‘이 소주 너무 좋아요’ 이러면 내가 나중에 그걸 어떻게 비판을 해요. 거창하게 이야기하면 자유를 위해 돈을 포기한 거죠. 얼굴 팔리면 제 생명이 끝나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건 익명으로서의 삶이 끝나는 것이고, 그건 내가 보통인들이 느끼는 체험을 못하고 특별 대우를 받는다는 의미잖아요. 그러면 저의 작가로서의 삶도 끝난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가장 중요한 이유예요.”

_본인도 자기가 예쁜 거 아시죠?

“아니요. 몰라요.”(웃음) 사실 그거 작가생활 하는 데 저 너무 불리해요. 전 정말 제가 못 생겼으면 책이 배는 팔렸을 거라고 생각해요.

_(이구동성으로) 그 반대 아니에요?

“아뇨, 아뇨. 강동원과 이나영의 연기력이 폄하되는 것과 같은 이치 아닐까요. 장동건씨가 전에 “정말 잘 생긴 게 이렇게 핸디캡일지 몰랐다”고 했는데, 난 잘 생겼다고 생각지도 않지만 이렇게 노력을 많이 했는데도 사람들은 아직도 여전히 내 얼굴만 봐요. 얼마 전 조선일보에서 박완서 선배가 공지영 신드롬의 원인 중 하나로 미모를 꼽았을 때 굉장히 불쾌했어요.”

_그런 말도 종종 듣지 않았어요?

“예. 들었어요. 지금은 너무 영광이죠, 사실.”(웃음)

_지금은 사회 모든 분야에서 외모가 메리트가 되잖아요.

“내 직업에선 핸디캡으로 작용해요. 전에 김훈 선배가 재미있는 농담을 했는데, ‘우리 업계가 이게(외모)가 좀 낮아’서 그렇대요. 영화인들이 저희한테 ‘너희는 공지영이 심은하급 되나보지?’ 하고 비웃어서 다들 자지러지게 웃은 적도 있어요.”

_소위 운동을 했다는데, 드러난 작가의 사생활이 너무 풍족했고, 지금도 소설 써서 충분히 보상을 받는 것 같아서 배신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많은데요. 잘 나가는 작가 공지영에 대한 비판의 기저에는 그런 것이 있지 않을까요.

“분명히 그런 게 있는 것 같아요. 전 제가 얼마나 유복하게 살았는지 정말 몰랐어요. 다들 비슷하게 사는 줄 알았어요. 제가 재벌집 딸도 아니고, 배고픔의 서러움을 겪지 않았을 뿐이지 저도 아버지 월급을 받아야 용돈을 받을 수 있는 평범한 아이였어요. 그런데 이 문단이라는 데를 나오니까 전부 가난한 사람들인 거예요.(웃음) 이 계가 진짜 나를 너무나 부자로 만들어준 거야. 내가 이 계가 아니라 화류계, 영화계를 들어갔으면 난 굉장히 평범한 집에서 자란 평범한 애였을 텐데, 전통적으로 가난한 것이 미덕이 중요한 계에 들어와서, 제가 아주 계를 잘못 들었죠. 엉뚱한 제가 갑자기 난데없는 상류층에, 난데없는 미모에 황당해요.

대학 때 우리집이 차압을 당해 먼 잠실로 이사 갔어요. 그때 시인 기형도 형이 몇몇 형들이랑 저희 집에 놀러왔는데, 이 형들이 와서는 나를 경원하고 멸시하는 표정인 거예요. 나는 그 형들이 아무 말도 안해서 얼마나 가난한지 정말 몰랐어요. 나중에 기형도 산문집 읽고 절대가난이라는 걸 알았는데 미안하기도 했고 분하기도 했어요. 왜 나한테 슬프고 가난하다고 말하지 않았을까. 그러면 나는 “형, 우리집 너무 누추해”라고 말하지도 않았을 텐데. 너무 배신감 느낀 거예요.

‘캐비어 좌파’라는 말이 있잖아요. 캐비어를 먹는 사람은 꼭 우파여야 하나요? 비록 캐비어를 먹지만, 좌파적 입장에서 제3세계 얘기하는 게 사실은 더 훌륭한 게 아닐까요.”

_나는 몰랐고, 이 업계가 가난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은 수긍하기 좀 그런데요.

“나 잘못하면 필화사건 나겠다. 그리고 저 좌파적으로 살았어요, 왜 이러세요.(웃음) 저 연탄 때는 10평짜리 전세 아파트 살다가 연탄가스 먹고 병원에도 가고, 원당읍에 15평 주공 아파트에도 살았고 계속 전셋집 옮겨 다녔어요. 혜화동 천에 십만원짜리도, 삼선교 2,500짜리 반지하도 살았어요. 아 진짜, 이런 구차한 변명까지 해야 되나. 지금 사는 집이 제 첫 집이에요.

제가 차를 바꾼다고 하니까 어느 선배가 벤츠를 사라고 하더군요. “아니, 어떻게 작가가 벤츠를 타” 그랬더니, 그 선배는 우리 문인들이 잘 되서 외제차 타면서 지탄받는 그런 사회가 됐으면 좋겠대요. 그 말을 듣고 20년 동안 간직해왔던 부에 대한 죄의식을 털어버렸어요. ‘인세 많이 들어와서 좋아요’ 라고 말하고 다닌 지 몇 년 안됐어요. 옛날에는 ‘저는요, 꼭 팔려고 했던 건 아닌데요’ 그랬거든요.

나는 진짜 밥을 벌기 위해서 밤 새워가며 앉아서 글 썼어요. 이제껏 결혼을 3번 했지만 지금까지 제가 생활비를 대지 않은 적이 한 번도 없었거든요. 23세 이후부터 현재까지 내가 집안의 가장이었고, 사력을 다해 글 쓰는 게 내 밥벌이었어요. 어떻게 하면 내가 독자들이 좀 더 좋아할 수 있는 책을 써서 생활비를 댈까 이것이 오직 나의 관건이었죠. 돈은 버는 족족 어디로 갔지만.(웃음) 그래서 <우행시>로 평생 처음 돈을 저축했어요. 남편이 없기 때문에 이제 돈 저축이 되는 거죠.”

_소설에 늘 사회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데, 그런 비판이나 죄의식을 풀기 위한 건가요?

“그런 면도 없지 않아요. 22세에 첫 결혼을 했는데 그때부터 제 인생이 내 의지와는 상관없는 다른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더라구요. 제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아무리 인내를 해도 어쩔 수 없는 방향으로, 너무 끔찍하고 슬프고 진짜 어디 가서 하소연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이런 부분들이 나로 하여금 <우행시>에서 사형수를 만나러 가게 했어요. 내가 사형선고를 받은 것 같은 기분이었던 것 같아요. 나는 왜 여기까지 왔나, 나는 왜 이런 낙인을 줄줄이 달고 있나, 난 왜 전과 기록처럼 이런 걸 줄줄이 달고 서 있어야 하나, 이런 게 너무 절망스러웠어요. 사회적 사형선고 받은 느낌이었어요.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삶이 극한으로 내몰렸던 마음의 경험을 했기 때문에, 정말 내 인생이 정말 밑바닥까지 내려가는 체험들을 했기 때문에 나는 사형수들에게 감정 이입을 할 수 있었어요. 결국 이 모든 것이 내가 소설가로 만들어지게 된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나를 좋은 환경에 놔두었다면 밤 새워 내가 굳이 글을 쓸 이유도 없었겠죠. 돈 있고 남편이 등 따시고 배부르게 해주면 내가 뭐 하러 글을 써요.”

_공지영에 대한 관심이 작가에 대한 관심엔 파란만장한 사생활에 대한 호기심이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데요.

“제가 두 번째 이혼을 했을 땐데 안티들이 나를 너무 상처 주더라구요. 제가 친구에게 “나 너무 불쌍하지 않냐. 난 심지어 이혼까지 이렇게 많이 해서 진짜 힘들다” 했더니 그 친구가 “너 이혼했다는 사실 때문에 미움 받는 거야. 여자들이 너 같은 경우라고 다 이혼하는 게 아냐. 너는 능력 있으니까 이혼했어” 하더라구요. 난 항상 하늘이 몇 조각 나는 경험을 하는 건데, 그런 말 많이 들어요. ‘나도 당신만큼 능력이 있으면 당장 이혼했어’라는 말. 솔직히 그때 화가 많이 나서 조금만 어렸으면, “저 있잖아요. 제가 이혼했을 때 천만원에 10만원 하는 지하방에 살았거든요. 난 그때 소설 수입도 하나도 없었거든요” 그랬을 텐데 지금은 죽음의 시간 같은 것들을 넘어왔기 때문에 이해해요.”

_죽음의 시간이라뇨?

“마지막 이혼이 너무 힘들었어요. 제 소원이 비행기 사고가 났으면 좋겠다, 트럭이 나를 덮쳤으면 좋겠다 그런 거였어요. 그땐 친한 친구에게도 더 이상 말할 수 없어서, 하느님한테 갔어요. 18년 만에요. 가서 “항복합니다. 저 좀 살려주세요” 이야기했고, 그랬더니 정말 살려주시더라구요. 제가 그 힘을 가지고, 남들이 보기엔 당당하고 내가 보기엔 좀 담담하게 사람들 앞에 나섰죠.”

_또 결혼하실 겁니까?

“저는 결혼이란 제도를 상당히 좋아해요. 저희 식구들이 다 첫사랑이랑 결혼해서 아무 문제 없이 행복하게 살았어요. 그래서 처음 만나면 빨리 결혼해야 하는 건지 알았고, 그렇게 하면 결혼이란 게 아무 문제가 없을 줄 알았죠. 그런데 내가 해보니까 나는 왜 안 되는 거야. 결혼이란 제도의 미덕이 있어요. 약속을 관철하게 하는 약간의 강제적 힘 같은 것. 사람이란 너무 변덕스럽고 불안하니까요. 그건 아직도 믿어요. 하지만 앞으로 또 결혼을 할지는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사랑은 하고 말 거야. 언젠가.

사람들은 그렇게 당하고도 또 사랑을 하고 싶냐고 물어보는데, 내가 만난 것은 저 사람이었지 남자 일반은 아니에요. 전 ‘남자는 다 그래’라는 말 참 싫어해요. 그건 여자는 다 그래란 말과 똑같다고 봐요.”

_앞으로 쓸 작품은요?

“저희 큰 딸이 고3이고 밑으로 초등학생 아들 둘이 있는데, 우리 가족을 모델로 한 <즐거운 나의 집>을 쓸 거예요. 참 축복인 게 우리 애들이 무지 밝아요. 나의 죄책감이 있기 때문에 학교 가면 애들이 밝나 안 밝나 그런 것부터 보거든요. 다들 에미 닮아서 대책 없이 밝아요.

언젠가 제가 딸한테 “엄마가 이혼 너무 많이 해서 미안해, 너한테 이런 모습 보여줘서 미안해” 얘기하니까 자기는 그거 잘 모르겠대요. 자기가 오직 항의할 수 있는 건 단 한 가지, “우리 아빠랑 왜 이혼했어”뿐이고, 나머지는 엄마의 사생활이니까 인정한대요. 대신 자기가 엄마를 좋아하는 이유는 “엄마는 엄마 차의 시동을 한 때 껐지만 엄마의 열쇠를 던져버리지는 않았잖아. 내 친구 엄마들은 다시 못 찾게 강물 속에다 다 던져버렸어. 그래서 누가 밀어주기 전에는 다신 못 떠나. 그런데 엄마는 그것을 주머니 속에 감춰두고 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다시 시동을 켜고 떠났잖아” 그러는 거예요. 저 이제는 안 버려요. 이제는 열쇠를 버릴 생각도 없고, 시동을 끌 생각도 없어요.”

_사람들이 많이 알아보죠?

"아니에요. 전혀 몰라봐요. '혹시 공지영씨와 많이 닮았다는 소리 안 들어요?' 이런 말도 들어봤어요. 그럼 '아니요' 그래요. 난 공지영이지 닮은 건 아니니까. 지면사진과 달리 실제로 생기발랄해서 더더욱 못 알아봐요. 그런데 TV는 잠깐만 나와도 알아보더라구요. 아주 소름끼쳤어요."

_운동 할 때 아버지와의 갈등도 많았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어떻게?

"화해했죠. 난 우리집이 남녀차별 심한 집이라고 생각했어요. 삼계탕을 하면 오빠와 아버지만 다리를 주고, 언니랑 난 날개를 줘. 엄청 싸웠어요. 닭 한 마리만 더 샀어도 제가 페미니스트가 안 됐을 거예요.

저는 아버지가 굉장히 특별히 사랑하는 딸이었어요. 난 다른 사람들도 다 그런 줄 알았는데, 저희 아버지는 경제 개발의 혜택을 제일 먼저 얻었어요. 초등학교 때 외국인회사 취직했는데 아버지에게 전용차로 도요타 크라운이라는 차가 나왔어요. 굉장히 큰 차예요. 아버지가 미국 유학 시절 운전을 하셨기 때문에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차로 태워 줄 정도로 절 사랑하셨어요. 그 전날 술에 떡이 돼 들어오실 때에도 절 학교 데려다 주고 다시 집에 가서 씻고 출근하실 정도였어요. 해달라는 것은 다 해주시면서 혼자 못 다니게 하시고.

그 시간은 단순히 저를 날라다주는 시간이 아니라 아버지 차 안에서 함께 뉴스 들으며 이런 저런 의견을 교환하는 시간이었어요. 역사적 주요사건 거의 다 아버지 차 안에서 들었죠. 기대를 많이 하셨어요.

제가 태어나기 전부터 한국일보를 봐 왔어요. 소년 한국일보를 보고 한글을 깨치고. 중고등학교 때 장명수 칼럼이 있었어요. 아버지가 어느날 "나는 내 딸이 기자가 되는 건 싫어. 팔자 세. 그런데 장명수란 여자가 참 대단하다. 논조를 보면, 남자들보다 훨씬 뛰어난데 난 니가 이런 여자가 되면 좋겠다"는 말씀도 하셨어요. 그때 칼럼 열심히 읽으며 나도 그렇게 되고 싶다는 생각했죠. 그런데 대학교 2학년 때 형사가 집으로 찾아오면서 아버지가 앞으로 9시까지 집으로 들어오라고 하시데요. 난 영문도 모르고 그 이유를 물었는데, 형사 말이 나쁜 놈들이 널 꾀어서 널 나쁜 쪽으로 몰고 간다고요. 아버지가 평생 처음으로 저한테 강압을 하면서 강경하게 나오시는 거예요. 그래서 그때부터 갈등했어요. 근데 그때 난 스물이 넘었는데 왜 상의도 없이 아버지 맘대로 결정하냐며 대들었어요. 아버지는 내가 널 못 믿어서가 아니라 세상을 못 믿어서 그런다 그러시길래 '내가 당할 수 있는 최악의 일, 예컨대 길거리에서 성폭력을 당한다거나 끌려가서 고문당하면 둘 다 상처니까 아버지가 치료하는 데 도움을 주면 되지 왜 아버지가 그것 때문에 일어나지도 않은 일까지도 왜 미리 걱정부터 하냐'고 대들다가 난생 처음으로 뺨을 한 대 맞았죠. 아직도 정치적인 의견을 많이 다르지만 사랑이란 부분을 많이 느끼고 있었죠."

_닭다리는 누구한테 줘요?

"전 딸이 너무 좋아요. 대를 잇는다는 말은 이해가 안 되는 게, 제가 공자 78대손이라 자신 있게 말하는데, 아이고 웬 대를 이어. 왕관하고 영토가 꽤 넉넉한가 보지? 무슨 대를 이으려면 왕관을 없어도 영토는 좀 있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영토도 없는 사람들이 무슨 대를 어떻게 잇는다는 건지 이해가 안 가요."

영화는 실망스럽지 않았어요? 캐스팅도 젊은 배우고.

"전 만족해요. 선남선녀가 안 나오면 누가 보겠어요. 이쁜 여자가 나오니까 시간이 잘 가잖아."

영화 흥행이 책 매출에 엄청난 영향을 주는데 다소 맥 빠지는 쓸쓸함도 느낄 것 같아요. "영상의 막강한 파워를, 영상이 문화를 지배하고 있는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 인정해요. 문학은 갔구나, 아름다운 문학이여, 이런 식으로 생각지는 않아요. 그게 영화화 됐다는 것은 이미 제 작품을 본 독자들이 많다는 의미도 되니까. 영화 때문에 팔리긴 했어도 영화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하니까요."

_봉순이 언니 만나셨어요?

"그게 다 사실이 아니고 소설이에요. 시집가서 남편이 죽는 것까지만 실화예요. 나중에 언니가 찾아왔어요. 그래서 내가 저 언니가 책 읽었으면 어떡하지 했죠(웃음). 다행히 안 읽은 눈친데, 언니가 워낙 순하고 그래서 읽었더라도 봐줬을 거예요. 어린 시절 세팅이나 언니 존재는 실화예요. 30년 만에 만났는데, 잘 살더라구요. 멀리 멀리 시집갔는데 분당 우리 집옆에 죽전에 살더라구요. 옛날에 거기 땅이 있어서 보상 받아 아파트 살고 있었고 아이들도 잘 키워서 아들 하나는 분당 삼성플라자 직원이더라구요.

-산도르 마라이 좋아한다면서요.

"내가 왜 그렇게 좋아하나 봤더니, 그 사람이 운명과 싸우더라구요. 현대 유럽작가와 다르게 운명이나 비극을 담고 있다는 평을 봤어요. 아마 그런 것이 나를 매료시킨 것이 아닌가 싶어요. 제 자신이 마흔이 넘어갈 무렵에 운명이란 게 있구나, 너무 강력해서 내가 피할 수가 없구나 하는 생각이 굉장히 많이 들었거든요. 나의 노력, 의지, 선의와 상관없는 그런 일들이 내 인생에서 일어나고 있는 꼴을 보는 순간들이 있었어요. 운명이란 것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구나 라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제가 가진 많은 것들, 말하자면 키가 큰 것, 좋은 부모님 만난 거. 머리가 그렇게 나쁘지 않았던 거, 그래서 공부도 잘 했던 거, 가난하지 않게 살았던 거. 내 의지가 하나도 개입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우스운 말이지만 얼굴 생긴 것도 내 의지랑 아무 상관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 그런 것들이 나를 규정해 왔고, 내 의지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는 거예요. 아, 이게 장난이 아니구나 느끼면서 신에게 돌아간 것 같아요. 정말 항복합니다라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운명이라는 것을 생각할 기회가 많았어요. 작가로서는 그게 행운이었던 것 같아요. 한 여자, 한 인간으로서 굉장히 많은 비극을 갖고 있지만, 작가가 되는 데 고통의 문제, 폭력, 운명의 문제를 나로 하여금 깊이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줬던 거 같아요."

-산도르 마라이 <하늘과 땅> 같은 글을 읽다보면 단어 하나하나 고르는 데 고심하는 것을 느낄 수 있어요. 자신의 운명과 문학을 통해 정면 승부하는 치열함을 느낄 수 있는데. 문학계 안팎에 들리는 공지영이라는 스타에 대한 얘기들에 대해서 까놓고 얘기하자면, 공지영의 소설들은 서사가 강해서 문체가 아름다운 것도 아니고, 멋진 표현이 있는 것도 아니고, 번역해도 잃을 게 하나도 없어요.

"저는 소설이라는 걸 대하는 입장이 동시대의 다른 문인들과 달라요. 그래서 이런 삐그덕거리는 일들이 있는 것 아닌가 생각해요. 저는 문체가 아름답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어요. 그게 뭐예요, 도대체? 아름다운 단어를 써야 하는 것인지. 괴테가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리라"라고 말했는데, 전 그게 굉장히 아름다운 문체라고 생각해요. 여기에는 화려한 수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삶을 짜낸 한 방울의 결정, 그게 아름다운 문체라고 생각하는데, 산도르 마라이가 그래요. 저는 삶에 대한 통찰, 인간성 본질에 대한 통찰에서 섬광처럼 지나가는 것을 발견해내는 것, 다른 사람들은 흘려보내고 못 보는 그것을 그 틈을 비집고 빛을 쫙 쏘여줬을 때, 초음파처럼 내장의 종양을 딱 보고 그걸 한 마디로 표현해내는 것이 아름다운 문체라고 생각해요.

저는 처음부터 미사여구 쓰지 않았아요. 단문으로 쓰고, 이해하기 쉽게 쓰고, 짧은 단어 속에 화려한 문체보다는 제가 괴테를 좋아했다시피 그런 생각을 전달하고자 했어요. 원래 시인으로 데뷔했는데, 소설을 택한 이유는 시는 너무 힘든데 제가 이야기는 그럴듯하게 지어낼 자신이 있었거든요.

춘향이나 샤일록은 원전 읽은 사람 없어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캐릭터들을 알아요. 소설은 캐릭터와 상황의 문제예요. 중요한 건 캐릭터를 어떻게 설정하고, 그 캐릭터를 어떤 상황에 배치하는가 하는 것이죠. 제가 추구한 것은 삶의 본질, 인간성, 시대의 본질을 전달하는 것이 큰 목적이에요. 그래서 문체가 어쩌고 저쩌고 하는 말 들었을 때 굉장히 당황했었어요. 서사가 강한 게 뭘 그렇게 잘못을 하는 건지 잘 모르겠더라구요. 나는 소설이 그거라고 생각하고 시작했는데 항상 보면 극단적인 캐릭터다, 문체가 너무나 거칠다 이런 평들을 하니까 내가 추구하는 것들을 하나도 얘기 안 하고 어 내가 왜 이런 비판을 받아야 하는지 잘 모르겠더라구요.

<춘향전>이나 셰익스피어의 소설미학과 다른 시대인데. 공지영의 소설은 낡았다. 오래됐다. 이런 비판 가능한 거 아닌가요.

"굉장히 중요한 얘긴데, 어떤 의미에서 그런 비판 좋아해요. 문학의 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은 정공법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서사의 회복과 캐릭터의 독특성으로요. 제가 현대 문학 중 가장 꼽는 것은 해리 포터예요. 그 소설은 책을 읽지 않는 애들을 책을 잡게 만들었죠. 그게 19, 20세기 정통 영국소설의 문법이거든요. 그래서 그건 저의 개성이라고 생각해요. 다른 건 잘 못하니까(웃음). 그건 제가 좀 자신이 있거든요.

서운할 때 드는 생각은 저라는 사람이 2000년대 대한민국 3만 명 중 하나인 소설가인데 왜 나에게 이 모든 것을 원하나, 나는 이런 소설을 쓰는 개성이 있는데, 이런 장점과 단점이 있는데, 누구는 현대소설의 새로운 흐름을 보여주고 각자 장단점 있는데. 그것은 비추지 않고, 평자들이 먼저 현대문학은 이런 것이라는 규정을 두고 너는 맞지 않아 이렇게 얘기하는 것이 너무 편협한 사고 아닌가 생각해요.

우리가 최민식 송강호 같은 배우들한테 너희는 왜 그렇게 얼굴이 크냐, 요즘 영화배우답지 않게, 안 그러잖아요. 이나영 강동원 같은 경우는 연기는 좀 못하지만 클로즈업 하면 우리가 즐겁고. 그런 게 다채로운 영화를 만들어가듯이 그렇게 해서 한국문학을 전반적으로 다양성 속에서 크게 아우를 필요가 있어요.

-다양하게 아우를 수 있는 시장상황이면 좋지만 혼자 책은 다 팔고 계시잖아요.

"다양하게 아우르지 않으니까 독자들이 자꾸 떨어져나가는지도 모르죠. 예를 들면 넓은 품을 보여주자, 이거예요. 한국영화 얼마나 다양해요. 그러고 나서 우리가 아, 이것도 볼 만하네, 전쟁영화도 있고 뭐 이렇게 김기덕씨 영화도 있는 거고. 김기덕씨 영화 보고 넌 왜 이렇게 서사가 없냐고 욕할 수도 없는 거고, 강우석 투캅스 보고 넌 왜 이렇게 영상의 미학이 없냐고 할 수도 없고. 포용의 문화가 좀 아쉬워요. 그러니까 자꾸 색다른 개성을 가진 외국 작가의 소설을 읽고.. 전 외국소설 읽는 게 나쁘다고 생각하지도 않지만. 평론가들이 그걸 왜 포용 못하나 안타까워요."

_평론가들로부터 외면 받으면서 “넌 네 길을 가라, 난 내 길을 간다” 식이 돼버렸는데.

“그럼 내가 어떡해요. 그 사람들이 하라는 대로 할 수도 없는 거고. 상도 안 주는데 내가 왜 해.(웃음) 사실 보상이란 게 꼭 평론가들만이 주는 건 아니고, 제가 독자들한테 물질적이거나 심리적으로 보상받기 때문에 상관 없어요. ‘나는 왜 문학적으로 평가 받지 못하는 거야’ 그런 생각도 별로 안 하고. 이 시대의 평론가들, 상을 주는 심사위원들이 모든 문학을 끝까지 쥐고 있고, 앞으로도 쥘 수 있을지…, 아, 이렇게 자꾸 말하지 말라 그랬는데, 사람들이.(일동 웃음) 이러면 점점 멀어져서 돌이킬 수 없다는데.”

-상하고 인연은 진짜 없죠?

"인연 많아요. 세 번이나 받았으면 많이 받은 거 아니에요. 이정도면 됐죠. 뭐. 이상문학상, 동인문학상…,. 이런 말해서 좀 그렇지만, 솔직히 이상, 동인 별로 존경하지도 않는데. 내가 별로 좋아하는 작가도 아니고."

-한국일보문학상이면"

"그건 괜찮아요. 근데 안주잖아."(웃음) 근데 이 문제는 정말 중요해요. 이상, 동인을 존경하지도 않는데, 내가 그 상을 받아야하는 것이 정말 중요한가. 저는 만해문학상을 받으면 좋겠는데… 만해는 내가 존경하는 인물이니까. 그 이름으로 받으면 좋을 것 같은데, 근데 안 주는데 뭐 어떡해.

그래서 이번에 엉뚱한 상을 또 받았잖아요. 엠네스티서 주는. 상금도 한 푼도 없더라구. 근데 너무 좋았어요. 엠네스티란 단체를 정말 좋아하고 존경해요. 그래서 상 타니까 너무 기뻤어요. 그것이 또 사형제에 대한 문제여서 가문의 영광이다 그런 생각하고 수상소감도 그렇게 했어요. 한국일보를 꼭 존경해서는 아니지만(웃음) 차라리 가치 중립적인 것은 괜찮은데….

-공지영 신드롬이라는 것은 어떻게 생각해요?

"아, 근데 그거 94년도에도 한 번 했었어요. 공지영 신드롬, 최영미 신드롬이 있었는데. 전 데뷔 때부터 문학 지상론자는 아니거든요. 이 문장 하나 만들기 위해 내 목숨 다 바치겠다,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전. 그래서 사실 보상이란 것이 꼭 평론가들만 주는 건 아니고, 제가 독자들한테 물질적이거나 심리적으로 보상받기 때문에 독자들의 리뷰나 그런 것으로부터도 받아서 그것이 어떤 일이든 그것이 상관이 없어요. 나는 왜 문학적으로 평가받지 못하는 거야. 뭐 그런 생각도 별로 안 하고. 이 시대의 평론가들, 상을 주는 심사위원들이 모든 문학을 끝까지 쥐고 있고, 앞으로도 쥘 수 있을지…, 아, 이렇게 자꾸 말하지 말라 그랬는데, 사람들이.(일동 웃음) 이럼 점점 멀어져서 돌이킬 수 없다는데."

-심중의 얘기들을 감추지 못하는 성격으로 자신이 준 상처, 받은 상처 그런 기억들은?

"내 말투, 농담을 함부로 하지 말자 뭐 그런 거 있어요. 저 사람들에게 정말 악의 없어요. 근데 항상 너무나 미움을 많이 받는데, 내 친구가 그러더라구요. 넌 항상 본질을 빨리 파악하는 능력이 있어서 그걸 말하는 것 자체가 상처를 주는 것 같다고.

제가 상처 받는 건 언제나 이런 거예요. 봉순이 언니에서도 많이 썼는데. 이런 말 해도 되나. 난 꼬인 데 가 없고 사람을 오래 미워하는 법이 없어요. 시인 김정환형한테 "형. 난 왜 이렇게 사람들이 나한테 잘못한 거 금세 잊어버리지" 푸념하니까 "지영아, 넌 너무 착해" 이럴 줄 알았더니 "넌 너무 머리가 좋아서 그래"라더군요. 똑똑한 사람들은 남 미워하는데 오래 끙끙거리지 않고 비생산적인 일에 신경을 쓰지 않는대요.

난 그냥 말에 사람들이 상처받고 그러는 것 같아요. 난 금세 잊는데, 나한테 상처받았다는 사람은 너무나 많이 나타나는 거예요. 넌 날 상처 입혔어, 그러면서 가버려요. 아니라고 해도 그리곤 다시는 나를 안 보는 거예요. 그런 것에 제가 상처받았죠."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들은 상처를 받지 않을 걸로 생각하는데.

"네. 별로 상처 안 받아요. 하도 받다보면 나도 살아야 되니까 처리하는 법을 배우잖아요. 30분 정도 걸려요. 미움을 하도 많이 받아서. 고등학교 때 왕따였어요. 어느날 보니 나를 따 시키더라구요. '어머. 사실 나도 너희들과 얘기하고 싶지 않았어' 생각하고 혼자 그렇게 살았어요. 전 진짜 조숙해서, 지금은 그 조숙만 믿다가 미숙의 경지에 다다랐지만, 친구들이 말하는 것을 참을 수 없었어요. 드라마 얘기하고, 전 그런 얘기 하면 옆에서 고개 돌리고 다른 책을 읽고 그랬는데 친구들은 그게 오만방자해 보였겠죠.

-소설 낼 때마다 소외 당하지도 않았지만, 이처럼 단기간에 뜨겁진 않았잖아요. 뭐가 달라졌나요?

"제 소설보다 제가 취재해서 쓴 현실 자체가 더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거 같아요. 그게 좋았어요. 다른 소설들은 제 경험 윤색하거나 시대의 얘기였는데 이건 전혀 동떨어진 세계를 발견하고 '어떻게 이런 일이' 해서 그걸 옮겨다 이쪽에 준 거죠. 그게 너무 가슴 아파서 취재하는 동안 많이 울고 취재 시작부터 소설 쓴 후까지 마음이 아프기도 했어요. 이 책보다 <사랑 후에 오는 것들>이 더 뒤인데, 그건 제가 전적으로 지어낸 소설이라 그게 각광받았다면 내가 잘 나서 그랬구나 그런 생각했을 텐데 제가 취재治퓽?각괏예騁耐?때문에 각별한 느낌이 있었어요. 나는 어떤 의미에서 말 그대로 인터뷰어, 옮겨놓은 사람이기 때문에 이 현실이 각광받는 게 더 중요했고. 다른 게 각광받았다면 느낌이 달랐을 듯해요."

-이젠 스타라 무슨 책을 내든 잘 팔릴 것 같은데요.

"그건 아니에요. 조용필도 안 팔리는 시대인데. 우리사회가 생각보다 그렇지 않아요. 지금 네티즌들이 얼마나 무서운데요. 제가 제 작품을 두고 하는 말이라 그렇지만 저는 독자들이 무지 냉정하고 제가 스타라면 그것에 대한 안티의 눈도 굉장히 많아서, 제가 정말 정신 차려서 내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소설을 내지 않으면 바로 끝장날 거라고 생각해요. 94년에 베스트셀러 여러 개 낼 때부터 생각한 건데 독자라는 사람들은 굉장히 변덕스럽고 어떤 의미에서 굉장히 냉정하고 정확해요. 그 사람들은 자신의 노동의 대가를 바라고 있거든요. 스타작가에 대한 평가는 더 혹독하고.

지금도 생각하는 건. 94년부터 제가 아까 생활비 걱정 안 해서 감사하다는 얘기는, 내가 우연히 독자 기호에 맞아떨어져서 이렇게 됐지만, 어떤 의미에서 소설을 쓰는 것은 대중의 기호를 맞춘다는 것은 할리우드 사람들도 잘 몰라요 그거. 그렇기 때문에 반 장사(50%)예요. 내가 그것을 따라가다 보면 바로 망해요. 그래서 내 자신의 내적 필연성을 따라갈 수밖에 없어요. 내 자신에게 이 걸 쓰는 동안 이것만 생각하고 내 자신에게 도움이 됐다면 평가는 온니 갓 노우즈거든요. 거의 신경 안 써요. 이게 제 배짱일 수 있고."

-너무 일찍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서 다음 작품에 부담은 없어요?

"무소의 뿔 다음에 고등어 쓰는 데 출판사에서 이거 최소 50만부 찍어야 하는데 이러는 거예요. 난 고등어는 절대 안 팔린다고 생각했는데 이것도 성공하니까 이젠 불안하더라구요. 그 때 내가 대중들을 따라가면 망한다 그런 생각했어요."

-일본 작가들 작품은 어때요?

"전 별로 안 좋더라구요. 키친 하나 빼고 별로예요. 차라리 우리 작가들 소설이 나은 것 같아요"

-어떤 독자들이 기억에 남아요?

"제가 제일 행복해 하는 독자들이 있는데 그게 30대 중반의 독자들이에요. 선배들의 강요로 <더 이상 아름다운 방황은 없다>를 대학 초년에 읽고, 그 후 <무소 뿔> 읽고 그랬던. 저와 함께 성장해온 친구들이죠. 그 친구들이 출판사의 편집하는 사람이 많아요. 저도 내년 데뷔 20년인데 그럴 때 가장 행복해요.

-왜 소설을 써요?

"얼마 전에 문학 캠프를 갔는데, 김훈 선생과 함께 독자와의 대화를 했어요. 왜 소설을 쓰시냐는 질문이 있었어요. 선배가 "난 밥을 벌기 위해 쓴다. 이게 밥이 안 되는 순간 미련 없이 떠날 거다" 그러더라구요. 깜짝 놀란 게 문단에 나와서 밥 때문에 소설을 쓴다고 했던 게 저였는데 김훈 선생님도 그렇더라구요. "저도 그렇다. 난 가장이기 때문에 노동의 대가가 충분치 않을 경우 하시라도 국수집을 할 태도가 돼 있다" 그랬죠.

근데 문단에서 우리 둘만 그런 것 같아. 전 문학 지상주의자도 아니고. 문학이 모든 것을 대변하는 것도 아니고, 문화의 베이스이긴 하지만. 그렇더라도 내가 밥도 안 되고 애들도 굶고 있는데 내가 거기 가 있을 필요도 없고, 프로작가로서 이게 내 노동으로서 우리 아이들과 나를 먹여 살릴 수 있느냐가 굉장히 커요. 반농담으로 국수집 차릴 거다, 국수 아주 맛있는 비법이 하나 있어요, 그랬어요. 실제 가격을 얼마로 매길까 고민도 많이 했다니까요."

-어떤 작가 좋아해요.

"황석영의 단편 <몰개월의 새> 제일 좋아해요. 황 선생님은 영화적 작법을 써요. 감정을 묘사하는 대신 정황으로 묘사를 해요. 외로움을 묘사하는 대신 우두커니 서 있는 빗자루, 우산을 쓰죠. 그게 단편에서 두드러지는데 객관적이고 냉정한 묘사를 해요. 저는 '그때 혼자 있는 게 어땠다'는 식으로 써버리거든요. 그분의 문학과 사회에 대한 자세들이 좋아요. 상복도 없어요. 그 다음은 박경리 선생님. 그 분도 상을 하나도 못 받았어요. 그래서 좋아한 것은 아닌데, 하도 상 때문에 말이 많아서 찾아보니까 그런 것 같아요. 박경리 선생님은 김성종 문학상인가 하나 받았어요. 젊은 작가는 박민규. 저는 <카스텔라> 좋게 봤어요. 저는 젊은 작가들이 좀 더 도발적이었으면 좋겠어요. 저는 이미 늙어서 아이들을 부러워 하는 형편이니까 형식 내용 모두 도발적으로 가면 제가 대리만족을 느낄 수 있을 것 같고. 그의 소설은 상당히 슬퍼요. 그래서 연민이 크다는 점이 좋았어요. 다른 작가들은 읽고 나면 이들이 나보다 젊은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장편은 주목을 받았지만 단편은 기억되는 게 없는 듯해요.

"세계적으로 유명 소설가들이 단편으로 주목받은 경우는 거의 없어요. 단편으로 주목받은 건 일본 정도. 주로 장편을 좋아한 후 단편을 좋아하는 식이죠. 우리 문단의 폐해일 수 있는데 이것도 시각의 차이인 것 같은데, 서사고 로망이고 하는 것은 장편이 아니면 생각할 수 없어요. 누가 단편으로 주목 받나? 에쿠니 가오리, 코엘료 다 장편이에요. 전 그 짧은 순간 그 사람을 다 표현할 수 없어요. 김유정의 경우는 단편을 잘 쓰는데, 당시엔 기자를 말한다면 떠오르는게 있어요. 그런데 현대는 너무 달라요. 조선일보 기자, 한국일보 기자, 한겨레 기자 다 다른 것 같아요. 그 사람들을 묘사하면 길어지고. 상황을 묘사하면…, 쉽지 않아요.

잘 쓴 단편의 경우는 일부를 떼고 보면 한 편의 시 같아요. <몰개월의 새>의 경우도 그랬고. 그 작품은 이성복의 시 같아요. 그런 부분은 장편에서는 그렇게 쓸 수는 없어요. 장편과 단편 소설은 서로 다른 장르라고 생각해요. 김유정 이후에도 김승옥 <무진기행> 하나 빼면 와 닿은 것은 별로 없더라. 단편으로 노벨상 받은 사람은 없어요."

-20대 여성이 뽑은 닮고 싶은 여성 4위에 올랐어요.

-하하하. 1위가 김혜수, 2위가 고현정, 3위가 이나영, 5위가 손예진이에요. 내가 그거 다 외워. 나도 황당했어, 그거. 황당했지만 기분은 좋았어요. 그게 내가 올 초에 3번 이혼한 사실을 밝힐 때까지 나의 그 과정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건 이제 거의 말하자면 이제 남의 반응은 신경 쓰지 않겠다는 그런 결심이었는데요. 깜짝 놀랐어요.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아, 이 죄인을"이었고, 20대 여성이 난 나대로 불행하게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나를 닮고 싶다니. 그렇다면 이 사람들은 공생활과 사생활을 분리시키나? 아무튼 세대가 바뀌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남성잡지 <에스콰이어>가 뽑은 남성들이 가장 만나고 싶은 작가 1위에도 올랐어요.

"와~. 그러니까 자꾸 광고가 들어와서 날 힘들게 하는구나."

-무슨 광고요?

"맨 처음에엔커피 광고도 들어오고. 소주, 아파트 광고도 들어왓는데 다 거절했어요.

-거절한 이유는? 가격이 안 맞아서?

"하하. '다 묶어서 한 10억 부르고 한 십년 쉬어?' 그런 생각도 해봤는데요. 그 전에도 광고 제의가 들어왔어요. 한 번은 돈이 너무 없는데 자동차 지면 광고가 6개월 단발 5천만원으로 들어온 거예요. 그게 너무 유혹적이었어요. 책 못 쓰고 돈 못 벌고 있을 때. 그런데 그냥 너무 이상했어요. 내가 자본주의도 비판해야 하는데 내가 거기 가서 이 차 사세요 그렇게 말할 수는 없잖아요. 나를 자유롭지 못하게 해요. 내가 언젠가 그랑 부르주아를 소설에 등장시켜서 깔 수도 있는데, 그런 작가인데, 거기 가서 이 차 너무 좋거든요, 이 소주 너무 좋잖아요, 이러면 내가 나중에 그걸 어떻게 비판을 해요. 거창하게 이야기하면 자유를 위해 돈을 포기한 거죠. 그 분들이 나쁜 자본가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얼굴 팔리는 것은 내 생명이 끝나는 거라 생각했어요."

-소주를 비판할 일은 없을 거 같은데.

"얼굴 팔리는 건 제 생명이 끝나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얼굴이 팔리기 시작하면 익명으로서의 삶이 끝나는 것이고, 그건 내가 보통인들이 느끼는 체험을 못하고 특별 대우를 받아야 하는 것이잖아요. 저의 작가로서의 삶도 끝난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가장 중요한 이유예요. 시사 프로그램, 역사 프로그램, 여행 프로그램 같은 TV 진행도 들어오는데 평면으로 박힌 것과 TV에 나온 것은 정말 달라요. '느낌표'에 나온 후에 전철 탔을 때 알아보는데 엄청 놀랐어요. 한 100억 정도 주면 한 번 생각해볼까, 모든 것을 작파하고.. 아직은 내 자유의 값은 높으니까." (웃음)

-소설이 밥 벌이이기 때문에 쓴다고 했는데, 다른 밥 벌이를 사용할 수도 있잖아요.

"아니죠. 그 때도 난 얼굴 팔리는 직업을 선택하지 않아요. 소설이, 독자들이 나를 이 영역에서 내쫓는다면 모를까, 내가 소설 쓰다 폐병 걸리고 우리 애는 아파서 울고 그러면 몰라도 그렇지도 않은 상황에서 그 쪽으로 갈 필요는 없으니까.요 아직은 나를 그래도 밥은 먹게 하니까, 지금은 잘 먹고 있지만, 예전에도 밥은 먹게 했으니까. 저는 할 줄 아는 게 소설 쓰는 것하고 국수밖에 없어요."

-되게 예쁘시잖아요. 아시죠?

"아니요. 몰라요."(웃음)

-에이. 아시면서

-(웃음) 아니, 진짜 몰라요.

-덜 이뻤으면 따를 당하겠어요? 작가 생활에 어떤 영향을 끼쳤죠?

"너무 불리해요. 저 정말 제가 못 생겼으면 책이 배는 팔렸을 거라고 생각해요."(웃음)

-(이구동성으로) 그 반대 아니에요?

"아뇨, 아뇨. 강동원과 이나영의 연기력이 폄하되는 것도 같은 이치 아닐까요. 장동건씨가 전에 "정말 잘 생긴 게 이렇게 핸디캡일지 몰랐다"고 했는데, 난 잘 생겼다고 생각지도 않지만 이렇게 노력을 많이 했는데도 사람들은 아직도 여전히 내 얼굴만 봐요. 그래서 이번에 이건 좀 얘기할래요. 조선일보에 모 선배(박완서)가 공지영의 신드롬의 원인 중 하나로 미모 얘기했을 때 굉장히 불쾌했어요."

-그런 말도 종종 듣지 않았어요?

"예. 들었어요. 지금은 너무 영광이죠, 사실."(웃음)

-지금은 사회 모든 분야에서 얼굴이 무기잖아요.

"저는 한번도 그렇게 생각 안 했어요. 내 직업에서는 핸디캡으로 작용해요. 물론 하나님이 '너 옥동자 얼굴 할래, 니 얼굴 할래' 하면 "오우, 하나님 그거 안 할래요" 하겠지만 작가로서는 좀.. 좀 많이 그게... 김훈 선생이 너무 중요한 지적을 한 적 있는데, 누가 "공지영씨 미모 때문에 소설이 많이 팔린다고 한 적 없냐"고 물었어요. 그때 김훈 선생이 "예. 공지영씨 이쁘죠"하고 한숨을 푹 쉬더니 "우리 업계가 굉장히 이게(얼굴 외모) 좀 낮아요"라고 농담을 했어요. 너무 재치 있는 대답이라고 생각해요. 미모의 작가들 많았죠. 최정희, 노천명, 김채원 깜짝 놀랄만한 미모라고 하더라구요. 강석경 선생님도."

-소위 운동을 했다는데, 드러난 공 작가의 사생활, 풍족했고 아쉬운 것 없었던 것 같고. 지금도 소설 써서 충분히 보상을 받는 것 같고. 작가가 소설에서 얘기하는 바와 삶이 떨어져있지 않나 싶은 배신감이 드는데요.

"'캐비어 좌파'라고 캐비어를 먹는 좌파라는 속어가 프랑스에 있어요. 그럼 캐비어를 먹는 사람은 꼭 우파여야 하냐. 태생적 한계죠. 아까 제가 운명이라고 했잖아요. 어떻게 태어나고 보니까 그렇게 돼 있었는데, 이 사람들이 비록 캐비어를 먹으면서도 좌파적 입장에서 제3세계 얘기하는 것이 사실은 더 훌륭한 게 아닐까요. 저 자신도 자기는 압구정동 살면서 좌파 얘기하고 하는 게 좀 그렇더라구요. 우리 시대 유명한 평론가 있잖아요. 하지만 그건 사회적 여유의 문제인 듯해요. 자기가 힘들 땐 그런 사람들 미워할 수 있는데 한걸음 물러나 바라보면 저 사람이 태생이 저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걸 좀 참작해주는 게 더 옳은 생각 아닌가 싶어져요."

-소설에서 환경 중요하다고 얘기하면서 삶에선 음식물쓰레기 아무데나 버리고 하는 사람들 싫잖아요. 행동과 삶이 동떨어진 사람들에 대한 비판과 비슷한 게 잘 나가는 작가 공지영에 대한 비판의 기저에는 있지 않을까요.

"분명히 그런 것이 있는 것 같아요. 내가 선택하지 않았는데 왜 이런 걸로 비난을 받아야 하나 했던 거구요. 전 제가 얼마나 유복하게 살았는지 정말 몰랐어요. 평균 비슷하게 사는 줄 알았는데. 재벌집 딸도 아니고 월급을 많이 받는 월급쟁이었는데. 돈 때문에 배고프거나 슬픈 일이 없었다는 것이지 재벌도 아니고 배고픔의 서러움을 겪지 않았을 뿐이지 저도 아버지 월급을 받아야 용돈을 받고 평범하게 자랐어요.

그런데 이 문단이라는 데 나오니까 전부 가난한 사람들인 거예요.(웃음) 이 계가 진짜 나를 너무나 부자로 만들어준 거야. 내가 이 계가 아니라 화류계, 영화계를 들어갔으면 난 굉장히 평범한 집에서 자란 평범한 애였을 텐데. 문학 미술 연극 등 전통적으로 가난한 것이 미덕인 계에 들어와서, 제가 아주 계를 잘못 들어서, 엉뚱한 제가 갑자기 난데없는 상류층에, 난데없는 미모에 이게 황당해.

농담인데 평양 가려고 교육 받는데, 영화계 C모씨, 시나리오 작가 S모씨가 함께 교육을 받았어요. 나랑 같이 얘기하고 있는 남자작가들을 보고 씩 비웃으면서 하는 말이 "아니 여기는 공지영이 심은하급인가보지?" 하길래 한 작가가 "너희는 영화계에서 풍족해서 그런지 몰라도 우리는 지영이라도 족하다" 그랬어요.(웃음) 그 영화계 인사가 제 친구였는데, 어떻게 쟤를 보고 저러냐, 진짜 불쌍한 계다 그래서 막 웃었던 기억이 나요.

-나는 몰랐고, 이 업계가 가난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은 독자들이 수긍하기엔 좀 미흡한 거 아닌가요.

"나 잘못하면 필화사건 나겠다."(웃음)

-갸륵할 수는 있는데, 생활 우파, 사상 좌파의 불균형이 아마 분노를 일으키는 것 같아요. 좌파적 사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좌파적 생활에 가까우려고 노력은 해야 하지 않나 뭐 그런 거. 좌회전 깜빡이 켜고 우회전 하는 건 좀 그렇잖아요.

"전 그말이 옳다고 봐요. 정치가와 성직자라면. 그리고 저 좌파적으로 살았어요, 왜 이러세요.(웃음) 전 연탄 때다가 10평 짜리 아파트에 살다가 연탄가스 먹고 병원에도 가고.

94년에 갑자기 책이 너무 잘 팔려서 그렇지. 근데 저는 지금 집이 처음 집이에요. 97년 분양가 낮을 때 처음 내집 마련 했어요. 그 전까지 전부 전세 살았고. 아 진짜, 이런 구차한 변명까지 해야 되나. 저도 94년 갑자기 책이 잘 팔려서 그런 건데. 소파도 <봉순이 언니>가 잘 팔리길래 처음으로 2002년에 처음 사고 그랬어요. 저 지금이 너무 좋아요. 이사 안 가도 되고. 이제는 제가 어떤 좌우파를 떠나서 합리적인 발언하고 싶다는 게 제가 이 나이에 계속 전세 살면 좀 그렇잖아요, 애들 데리고.

그 전에 제가 부모 밑에서 살 때는 좋은 집에서 잘 살았어요. 바로 독립해서 그 다음에는 전 10평, 원당읍에 15평 주공 아파트 살고 그리고 나서 계속 전셋집 옮겨 다녔죠. 혜화동 천에 십만원짜리도, 삼선교 2500짜리 반지하도, 수유리 3천짜리 2층집도 살았어요. <고등어>가 잘 팔려서 처음으로 수유리 극동아파트 고층에 전세를 살았어요. 그 당시 내가 돈을 못 벌어서 그런 것은 아닌데 솔직히 그런 쪽에 관심이 없었어요. 그리고 다 잘 살자고 운동하는 거였는데, 왜 다 못 살자고…, 그걸 위해 좌파가 있는 건데.

기회의 평등을 평등이라 배웠는데 지금은 결과의 평등을 요구하는 것 같아요. 제가 충격 받았던 게 얼마전 차를 바꿨어요. 10년 된 차인데 에어컨이 말썽을 부려서 어느 선배에게 "요새 무슨 차가 좋아?" 물었더니 그 선배가 '야, 벤츠는 어때?'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아니 어떻게 작가가 벤츠를 타" 그랬더니, 그 선배는 "나는 우리 문인들이 잘 되서 외제차 타면서 지탄받는 그런 사회가 됐으면 좋겠어" 하더라구요. 전 그 말을 듣고, 제가 20년 동안 간직해왔던 부에 대한 죄의식을 털었어요. 내가 정당하게 내 노동의 대가로 돈을 벌었다면, 사실 20년 동안 부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렸는데 지겹더라고요. "인세 많이 들어와서 좋아요"라고 말하고 다닌 지 사실 몇 년 안됐어요. 옛날에는 "저는요, 꼭 팔려고 했던 건 아닌데요…" 그랬는데.(웃음)

-죄책감은 좀 남아있는 거죠?

-(단호하게) 없어요.(웃음) 진짜 죄책감 많았어요. 또 그걸로 비난도 엄청 받았고. 지금도 잘 모르겠는데 내 책이 많이 팔리는데 왜 내가 비난을 받아야 되나, 다들 팔려고 책 내는 거 아니에요?

내가 다른 계에 있었으면 평범한 중류층 가정에서 자란 건데 왜 이 계에 와갖고.(웃음) 제가 진짜 몰랐던 게 그것 때문에 충격도 받고 죄책감도 더했던 건데, 이건 고인이 됐으니까 소송은 안하겠지, 기형도 형 같은 경우, 학교 때 만났는데, 제가 대 2학년 때 차압을 당해 먼 잠실로 이사 갔어요. 선배들이 집들이하라고 해서 한 번 불렀는데 이 형들이 나를 경원하고 멸시하는 표정인 거예요. 나 그 형들이 아무 말도 안해서 얼마나 가난한지 정말 몰랐어요. 나중에 기형도 산문집 읽었을 때 너무 배신감 느낀 거예요. 왜 이렇게 슬프고 가난하다고 말하지 않았을까.

그러면 나는 "형, 우리집 너무 누추해"라고 말하지도 않았을 텐데. 죽은 다음에 책이 나왔으니까. 그냥 나를 경원하는 표정으로 니가 뭘 아니 하는 표정으로 쳐다봤지 한 번도 자기네들의 얘기를 해 준 적도 없으면서. 그래서 나도 알 거 다 알고 고생 다 해봤는데 그랬던 거죠. 어느날 절대가난이 있었구나 그걸 맞닥뜨리면서 미안하기도 했고 분하기도 했어요. 나한테 얘기하지 않고 소통하지 않고 자기들 판단대로 했던 거잖아요. 더군다나 내가 축적한 것도 아니고 그 집의 딸이어서, 어디 갈 데도 없고 해서 그 집에 살았던 것뿐인데 왜 이런 말을 하나.

독자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예요. 운명이란 말 많이 꺼냈는데. 제가 선택하지 않았지만 태어났고, 자수성가한 부모 덕에 아현동 빈민가에서 여의도로 가서 살았고, 머리가 나쁘지 않게 살았고, 공부 잘했고, 모두 제 의지가 개입되지 않은 부분인데 비난해요. 근데 나는 왜 비난을 당해야 하나. 더 나가면 글 재주라는 것도 이제는 타고 났다는 생각이 들어요. 예민한 감수성 같은 것도. 그 대신 난 내 의지를 칭찬해 줘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해요. 나는 진짜 밥을 벌기 위해서 밤 새워가며 앉아서 글 썼어요.

왜냐면 이건 처음 밝히는 건데 제가 이태껏 결혼을 3번 했지만 지금까지 제가 생활비를 대지 않은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에요. 23세 이후부터 현재까지 내가 모든 집안의 가장이었어요. 글 쓰는게 나의 밥벌이었고, 난 생명을 다해서 사력을 다해서 어떡하면 내가 독자들이 좀 더 좋아할 수 있는 책을 써서 내가 좀 팔아서 생활비를 댈까 이것이 오직 나의 관건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돈은 버는 족족 어디로 가고(웃음), 그래서 <우행시>로 처음 돈 저축했어요. 참고로 말씀드리면, 괄호 열고 남편이 없기 때문에 이제 돈 저축이 되는 거죠."

-아까 생활비 얘기가 그 얘기군요.

"평생 처음 저축해봤어요. 이번에도 웃긴 에피소드가 생활비 들어오니까 너무 좋은데 1년 보통예금에 이자가 만원쯤 되더라구요."

-연애 안하세요?

"소개 좀 시켜줘 봐요. 지금 사실 너무 편안해요. 누구하고도(고개 절레절레). 정말 해외여행을 가니 누가 뭐래, 술을 먹는다고 누가 뭐래 난 너무 좋아."

-소설에 사회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데 그런 비판이나 죄의식을 받아온 것을 풀기 위한 것인가요?

"그런 면도 없지 않아요. 제 중 1학년때 웃긴 얘기가 있어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아주 가난한 사람에 대한 연민이 많았어요. 제가 서울여중이라는 서강대 옆 중학교를 다녔는데 공덕동에서 48번을 타고 다녔어요. 그때 우리 엄마가 연보라색 벙어리 장갑을 짜 줬는데, 어느날 한 아저씨가 길을 물어보는데 손을 보니까 손이 터져서 막 피가 나는 거예? 그래서 제가 버스 타기 전에 손이 아플 것 같다며 그걸 억지로 드리고 창피해서 막 뛰어서 버스를 탄 기억이 있어요. 지금 생각하면 돈을 주든지 왜 그 이쁜, 할아버지가 낄 수도 없는 것을 드렸을까. 이것이 어떤 상징일 수 있겠다 싶어요.

사형수 문제도 그런 연민이 기본적으로 깔리고요. 22살에 첫 결혼을 했는데 그 때부터 제 인생이 내 의지와는 상관없는 다른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더라구요. 제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아무리 인내를 해도 어쩔 수 없는 방향으로, 너무 끔찍하고 슬프고 진짜 어디 가서 하소연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이런 부분들이 나로 하여금 <우행시>의 사형수 만나러 가게 했어요. 내가 사형선고를 받은 것 같은 기분이었던 것 같아요.

나중에 생각하니까 더 이상 물러설 데도 없고, 나는 왜 여기까지 왔나, 나는 왜 이런 낙인을 줄줄이 달고 있나. 도대체 난 뭔가. 난 한번도 이런 걸 원한 적도 없고, 난 별로 잘못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난 왜 여기까지 왔을까. 난 왜 전과 기록처럼 이런 걸 줄줄이 달고 서 있어야 하나, 이런 게 너무 절망스러웠어요. 사형선고를 받은 기분, 사회적 사형선고 받은 느낌이었죠. 그래서 사형수에게 갔고 가서 그들의 삶이 독자들이 보는 것과 전혀 다르게 나하고 너무 닮아있었다는 생각을 한 거예요. 감정이입이 무지무지 잘됐던 듯해요. 너희들도 이런 걸 원치 않았겠지, 어느날 보니까 자기가 이런 처지가 돼 있었겠구나 싶었어요. 각도는 다르지만 감정이입하긴 좋았죠.

그 모든 것이 결국은 내가 소설가로 만들어지게 된 과정이라고 생각했어요. 게으르고 놀기 좋아하고, 나를 좋은 환경에 놔두었다면 밤 새워 내가 굳이 글을 쓸 이유도 없었겠죠. 돈 있고 남편이 등 따시고 배부르게 해주면 내가 뭐 하러 글을 써요. 그땐 아, 아름다운 백합화, 막 문체 신경 쓰고, 솔직히 그랬을지도 몰라요. 근데 너무나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삶이 극한으로 내몰렸던 마음의 경험을 했기 때문에, 내 인생이 정말 밑바닥까지 내려가는 체험들을 했기 때문에 나는 사형수들에게 감정 이입을 할 수 있었어요. 그건 독자가 어떻게 보든 상관없이 소설가로서의 나의 자부심이에요. 나는 그곳에 갔었고, 내가 그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함께 친구가 될 수 있다는 확신, 소설가로서 자부심이 생겼어요.

-공지영이라는 작가에 대한 관심에는 파란만장한 사생활에 대한 호기심이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데요.

"제가 두 번째 이혼하고 있었을 때 너무나도 안티들이 나를 상처 주더라구요. 친구에게 '나 너무 불쌍하지 않냐. 난 심지어 이혼까지 이렇게 많이 해서 진짜 힘들다' 했더니 '너 이혼했다는 사실 때문에 미움 받는 거야' 하는 거예요.

아니 요즘 이혼이 그렇게 큰 죄도 아니고 '나도 이거 어쩔 수 없었는데, 너도 어떤 상황인지 알잖아' 그랬더니 '나도 네가 미워. 넌 이혼도 했잖아" 그래요. 아니 난 항상 하늘이 몇 조각이 나는 경험을 하는 건데, '야 너 여자들이 너 같은 경우라고 다 이혼하는 게 아냐. 너는 능력 있으니까 이혼했어' 그러더라구요.

그런 말 많이 들어요. "나도 당신만큼 능력이 있으면 당장 이혼했어"라는 말도 들었어요. 솔직히 그때 화가 많이 나서 조금만 어렸으면, "저 있잖아요. 제가 이혼했을 때 천만원에 10만원 하는 지하방에 살았거든요. 난 그때 소설 수입도 하나도 없었거든요" 그랬을 텐데 지금은 죽음의 시간 같은 것들을 넘어왔기 때문에 이제는 생각해요. 각자의 길이 있고 자기 몫의 짐을 지고 걸어가는데, 어떤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의 짐이 가벼워 보이는 것이고. 내가 보기에는 그 여자들 팔자가 더 좋아보이기도 하고, 가끔 나도 그 사람들이 부럽기도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게 내 길이니까 내 운명이고 내 짐이니까 걸어간다 생각하면 너무 평안하고 감사해요.

이 얘긴 꼭 써주세요. 요즘은 너무 행복하냐고 물어보는데 정말 행복해요. 아침에 일어나서 제일 먼저 성모상 앞에 촛불을 켜고 내가 생각하는 사람 이름을 하나씩 불러요. 우리 애들 이름부터요. 집이 너무 따뜻해서 감사해요. 건강하고 밤에 아이들이 잘 자는 것 감사해요. 내가 기도할 수 있는 것도 감사해요. 그 세 가지 기도를 할 수 있어 감사하고. 그것을 하고 나면 하루가 기쁘고 즐거워요.

94년에 이보다 더 많은 돈을 벼락같이 벌었어요. 하나도 안 행복했어요. 정말 지옥 같았어요. 지금은 빚도 좀 갚고, 저축 조금 하고, 열심히 하면 막내도 대학 보낼 수 있을 것 같고 너무 행복해요. 아주 해피하게 살고 있어요."

-그동안 많이 힘드셨어요?

"제가 죽음을 넘어섰다고 얘기한 것이. 소원이 이거였어요. 비행기 사고가 났으면 좋겠다. 트럭이 나를 덮쳤으면 좋겠다. 그건 다른 사람에 폐 끼치지 않고 나 혼자 끝내면 되니까. 그래서 죽음에 대한 고찰이 <우행시>에 많이 들어갔어요. 오이디푸스 말대로 모든 것이 운명이었지만 내가 한 거죠. 마지막 고비가 너무 심했고, 너무 힘들었고, 저로서는.. 그 고비를 잘 넘게 한 힘은, 그땐 친한 친구에게도 더 이상 말할 수 없어서, 그래서 하느님한테 간 거죠, 18년 만에. 가서 '항복합니다. 저 좀 살려주세요' 하고 이야기했고, 정말 살려주시더라구요. 제가 그 힘을 가지고, 남들이 보기엔 당당하고 내가 보기엔 좀 담담하게 사람들 앞에 나섰고, 지금도 애들을 위해서 행복하게 살려고 생각했는데, 저절로 행복해졌어요."

-큰 딸이 소설을 쓰면 엄마에 관한 걸 쓴다고 했다면서요?

"내가 엄마가 이혼 너무 많이 해서 미안해, 너한테 이런 모습 보여줘서 미안해 얘기하니까 자기는 그거 잘 모르겠대요. 왜냐면 자기가 오직 항의할 수 있는 건 단 한 가지, '우리 아빠랑 왜 이혼했어'는 항의할 측면이 있는데, 나머지는 엄마의 사생활이고, 자기는 인정하는데, 대신 내가 엄마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엄마는 엄마 차의 시동을 한 때 껐지만 엄마의 열쇠를 던져버리지는 않았잖아"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무슨 소리야. 열쇠를 던지는 엄마가 어딨어" 했더니 "아냐, 엄마. 내 친구 엄마들은 다 던져버렸어. 강물 속에다. 다시 못 찾게. 그래서 다신 못 떠나. 누가 밀어주기 전에는. 근데 엄마는 그것을 주머니 속에 감춰두고 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다시 시동을 켜고 떠났잖아" 그러더라구요. 이제는 안 버려요. 이제는 버릴 생각도 없고, 시동을 끌 생각도 없어요.

저는 결혼이란 제도를 상당히 좋아해요. 저는 집안이 우리 엄마 아버지가 동네 첫사랑이었어요. 14살에 만난. 아버지는 보통 한국 남자들이 그 시대에 저지를 수 있는 죄책사유를 하나도 저지르지 않았고, 지금도 손 잡고 우리 다음에 태어나도 또 만나자 이런 쓸데없는 소리하고, 더군다나 언니 오빠 다들 처음 만난 사람들과 결혼했어요.

지금까지 다 무난하게 살았고. 난 사람이란 다 저런 건 줄 알았어요. 그래서 처음 만나면 빨리 결혼해야 하는 건지 알았고, 그렇게 하면 결혼이란 게 아무 문제가 없는 건 줄 알았고. 그런데 내가 해보니까 나는 왜 안 되는 거야. 그래서 엄청 갈등을 했죠. 그래서 저는 아직도 결혼에 대해 좋은 이미지를 많이 갖고 있어요. 내 주변에 좋은 결혼생활을 보여주는 사람이 많으니까. 특히 엄마는 아직도 '김장 했는데 아버지가 하루종일 마늘만 까고 파는 안 까주셨다' 뭐 이런 푸념도 해요.

그런 것만 보고 살다가 이런 세계가 있다는 걸 우리 가족들도 나 때문에 안 거예요. 대신 가족들이 한 번도 나를 비난한 적이 없었어요. 그건 너무나 큰 힘이에요. 너무나 이해해줬고, 그 집 귀신 되라 이런 얘기 절대 한 적 없어요. 하루 빨리 탈피해라, 오히려 밍기적거린 건 나였고, 지금도 굉장히 어떤 의미에서 자랑스러워해 주시고. 그게 큰 힘이죠. 우리 애들도 아빠가 없으니까 오빠가 아빠노릇 비슷하게 놀이공원이라도 한 번 더 데려가려고 하고. 농담으로 이 모든 게 나를 소설가로 만들려는 하느님의 프로젝트라고 생각한다고 말해요."

-아이러니하게 이 과정을 겪고 사랑에 대한 소설을 썼어요.

"죽는 줄 알았어요. 츠지의 제안이 너무 매력적이라서 쓰기로 했는데 너무 겁이 나더라고요. 구상을 하는데 필이 전혀 안 오는 거예요. 이건 순전히 필로 해야 하는 건데. 옛날 필 살리려고 7080 노래를 받아서 매일 들었어요. 내가 사랑을 아직 믿었던 시절의 느낌을 다시 가져보려고 무지무지 애를 썼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 리뷰에 "이 여자는 연애를 안 했나 보다"라는 게 있었는데 그걸 보고 "어머, 너무 정확하다" 했어요.(웃음) 사형수를 취재하는 게 훨씬 쉬웠어요. 그러니까 얼마나 좋아요. 앞으로 진짜 사랑을 하면 앞으로 연애소설을 얼마나 잘 쓰겠어."

-사랑을 믿어요?

"지금은 진짜 믿어요. 사형선고를 받은 기분으로 사형수에게 갔는데, 저는 남녀간의 사랑이 따로 분류되는 사랑이라고 생각지 않아요. 사형수 보면서 사랑을 믿게 되었어요. 사형수들은 어쩜 개만도 못한 사람이었는데 교화위원들이 10년 넘게 그렇게 돌보면서 교화가 된 거예요. 그러면 왜 나에게 그런 사랑을 주냐고, 나 너무 힘들다고 하는 윤수 같은 상황이 온대요.

처음엔 빵이나 얻어 먹고 그러다가 그들의 진심을 읽고 화를 내고 그 후부터 변하는 식으로요. 야, 이거 정말 인간이 변하는 것이구나. 그 아줌마들은 봉사하러 오는 천주교 신자들일 뿐인데 그냥 와서 '이거 먹어봐. 이거 방에 들어가면 못 먹어 어서 먹어' 엄마처럼 그런 것 뿐인데 사형수들은 한번도 못 받아본 사랑을 접하면서 금방 변하는 거예요. 사람들은 '그렇게 당하고도 또 사랑을 하고 싶어?' 물어보는데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래요.

이건 제 의지의 노력이었는데, 내가 만난 것은 저 사람이었지 남자 일반은 아니다. 제가 싫어하는 말은 남자는 다 그래. 저 그런 말 되게 싫어해요. 그것은 여자는 다 그래란 말과 똑같다고 봐요. 심수봉 노래는 가끔 부르기도 하지만. 저도 남자들 좋아해요. 아가페와 에로스라는 이분법을 잘 모르겠어요. 에로스만의 사랑이 있나요? 그런데 저는 플라토닉 러브는 너무 싫어하거든요. 저는 그게 제가 그렇게 싫어하는 하룻밤 사랑과 차이가 없는 것 같아요. 어떻게 플라토닉만 해요? 난 이해가 안 가.

-난 남녀간의 사랑이 다시 온다면요?

"그럼요. 기꺼이."

-결혼은요?

"전엔 시댁이라는 것을 상정하지 못했는데, 하고 나서 이거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은 특별히 없는데 그렇다고 다신 안해 그렇게 말하지도 않아요. 그것도 결혼에 얽매인 것이니가요. 요즘은 모든 모토가 물 흘러가는 대로 운명대로 가자예요. 결혼이란 제도의 미덕도 있어요. 약속을 관철하게 하는 약간의 강제적 힘 같은 것. 사람이란 너무 변덕스럽고 불안하니까. 그건 아직도 믿어요. 결혼의 장단점은 있으니까.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사랑은 아무튼 하고 말 거야. 언젠가."

-<사랑 후에 오는 것들>은 한일문제가 결부되지만 그것 없이도 사랑 얘기는 쓸 거예요?

"너무 쓰고 싶어요. 그런데 질료가 별로 없어서. <폭풍의 언덕> 같은 소설을 쓰고 싶어요. 울부짖는 사랑 같은 거. 괜히 썼다가 연애 못해봤다는 소릴 듣는 거 아냐?"

-<우행시>도 사형수를 살려야 한다고 울부짖는 건 아니잖아요.

"사형제 폐지 이유 중 하나가 오심의 가능성이에요. 저는 윤수가 무죄라는 것이 아니라, 그가 죽고 싶었다는 사실(자살 충동)에서 범죄가 일어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고, 이런 사람의 경우, 살해하기 전에 자살 기도를 해 본 사람이고. 법적으로는 누가 찔렀나가 중요한데 작가의 눈에는 죽은 사람의 손에서 반지를 빼고 그런 행동이 더 나쁘다고 보인다는 것이죠. 그게 더 나쁜 게 아닌가요?

유영철 사건이 책을 쓰던 중간에 일어나서 마지막에 그 부분을 썼다가 뺐는데.,저런 놈은 죽여야 하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사형수들도 그렇게 말하더라고요. 저런 놈은 죽여야 된대요. 자기들은 4명 밖에 안 죽였다면서. 사람들은 참 우스운 존재에요. 유영철을 보면서 그도 죽이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글을 썼어요. 유영철이 몸 파는 여자들은 죽어 마땅하다고 말하는 거 이슬람에 가면 정당한 살인인 거예요. 그를 살려둬야 그의 행동이 진짜 범죄가 된다고 생각했어요. <우행시> 쓸 때 한 달 반 이상 악몽에 시달렸어요.

너무 무서워서. 살인이 사람에게 주는 악영향이 엄청 나요. 최재천 교수, 신부님 모두 살인 연구하면 악몽에 시달린대요. 저도 우리집이 28층인데 노출되지 않았는데도, 창문만 흔들려도 불안한 거예요. 살인에 대한 것은 글자만 봐도 악한 기운 같은 게 있는 것 같아요. 임신하면 좋은 책보고 좋은 거 보는 게 맞는 것 같아요.

삶이 피폐해 지는 듯했어요. 신부님들도 다 그래요. 최재천 교수도 그러시더라구요. 저는 그 때는 정말 너무너무 무서웠어요. 성스러운 기운을 받아 중화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매일 교회 갔어요. 유영철 공판에 매번 갔는데 이래 이래서 살인을 했습니다 라고 하는데 너무 지적이야. 변호사인 줄 알았어요. 너무 잘 생기고, 눈도 너무 예뻐요. 그런데 간을 빼 먹어다는 둥. 임신한 여자를 어쨌다는둥 엽기도 이런 엽기가 없어요. 저런 놈은 죽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어느날 유영철이 우리 신부를 만나자고 했대요. 자기가 어릴 적 개신교 교회에서 상처를 받아서 목사는 싫다면서. 살인할 때 교회의 십자가가 잘 보이는 곳에서 했대요. 우리 신부님이 떨면서 만났는데, 보고 와서 하는 말이 "사람이데"였어요. 앞으로 자기를 볼 일 없을 거라면서, 저는 회개하면 더 힘들 것 같다고, 사형제 폐지하지 마시고 저는 그렇게 가렵니다라고 하더랍니다.

-현재 준비하고 있는 작품은요?

"우리집을 모델로 한 <즐거운 나의 집> 써야 합니다."

-작품 쓸 때 시간관리는?

"저도 노동자인데 낮에 쓰고 일과 시간에 써야죠. 밤에는 자거나 술 마시거나 놀아야죠. 애들이 크고 나서 바뀌었어요. 엄마 노릇이라도 하려면 아침에는 일어나야 하니까. 밤에 하면 애들을 못 챙겨주고. 그러니까 밤에는 일찍 자려고 하고. 그러다 보면 점심때 시간이 남아요. 애들 재우고 새벽 3~4시까지 하기도 했는데. 주로 2시부터 5~6시까지 쓰죠. <우행시>는 너무 잘 써져서 단 두 시간만 자면서 쓰기도 했어요. 출판사에 일정보다 일찍 넘겨줄 정도였죠."

-또래 작가들과 친분은?

"아무도 안 친해요. 전에 친해지려고 노력한 적 있었는데 내가 한 말이 바로 소설로 나오더라구요. 작가들은 친해지면 안돼요. 먼저 쓰는 게 임자인데 난 게으르니까. 시인들은 더 심하답니다."

-애들은 말은 잘 들어요?

"어휴. 지옥 같은 날들이에요.(웃음) 엄마 말을 끝끝내 안 듣는 이 아이들. 큰 딸이 제일 말을 안 들어요."

-수능은 잘 봤어요?

"당연히 못 봤지."

-심리학과나 사회복지학과로 가려고 해요. 수시에 다 떨어져서 네가 더 큰 사람이 되게 만들려는 하나님의 신호다 그랬어요. 저는 고졸이라도 괜찮다고 말하기도 했어요. 저도 많은 고민을 했지만 21세기가 서울대 법대, 연대 영문과 뭐 이런 것이 필요 없는 시대가 될 거라 생각해요. 학문할 사람이 아니라면. 근데 딸은 발끈하더라구요.

-고 3엄마들의 열성이 중요하던데. 고3 엄마로서는?

"제가 고 3때 못 일어나 챙겨주지 못한 적이 많아서 너무 미안해요."

-연말연초 계획은?

"집에 있어요. 애들 다 키우고 나면 봉쇄 수도원에 가서 한 일년 동안 가고 싶어요. 국내로요. 아무리 서로 묵언을 해도 그렇지 굳이 말도 안 통하는 해외 가서 어쩌자는 거예요. 애들만 크면 맘대로 여행도 다니고. 아이들이 제 쓸데없는 욕망의 발목을 잡는, 현실에 묶어주는 족쇄이기도 하고, 하나의 축복이고 행복인 것 같아요.

우리 애들은 제가 가장 축복인 게. 우리 애들이 무지 밝아요. 학교 가서 볼 때 애들이 밝나 안 밝나 그런 것을 봐요. 나의 죄책감이 있기 때문에. 근데 애들이 다들 에미 닮아서 대책없이 밝아요. 애들에게 상처 주는 선생님들이 있잖아요. 막내의 경우도 왔어요. 저는 '니가 이런 선생님을 만났단다'하고 솔직히 말해요. 선생님이 다 너 잘 되라고 하는 소리야 라고 하고 싶진 않아요. 선생님이 우리 막내를 너무 애정 결핍으로 보는 것에 대해 상처받았어요. 엄마가 너무 바쁘니까 우리 애들을 그렇게 보시는 거죠. 제가 학교 가면 선생님들이 그런 얘기해요. 바쁜 것 가지고 말이죠. 전 우리 부모 세대처럼 다 널 위해 하는 거란 말하지 않고 1년간 힘든 시간을 보내야 할 것 같다고 말했어요. 난 애들에게 거짓말로 감싸고 싶지 않았어요."

-솔직한 것도 하나의 능력이라고 생각하는데요. 부르주아의 건강성이랄까요, 그런 게 있는 것 같아요.

"그게 저에요. 저."



● 공지영 약력

▦1963년 서울 출생

▦81년 서울 중앙여고, 85년 연세대 영문과 졸업. 민족문학작가회의 전신인 자유실천문인협의회와 출판사에서 근무

▦87년 구로공단 인근 전자부품 제조업체에 취업했다가 한 달 만에 발각돼 강제 퇴사. 같은 해 12월 제13대 대통령선거 당시 구로을구 개표소 부정개표 반대 시위에 참가

▦88년 계간지 <창작과 비평>에 <동트는 새벽>으로 등단

▦장편 <더 이상 아름다운 방황은 없다>(1989) <그리고 그들의 아름다운 시작>(1991)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1993) <고등어>(1994) <착한 여자>(1997) <봉순이 언니>(1998)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2005) <사랑 후에 오는 것들>(2005)

▦소설집 <인간에 대한 예의>(1994) <존재는 눈물을 흘린다>(1999) <별들의 들판>(2004), 산문집 <상처 없는 영혼>(1996) <빗방울처럼 나는 혼자였다>(2006)

▦제7회 21세기 문학상(2001) 제27회 한국소설가협회 한국소설 문학상(2002) 제12회 오영수 문학상(2004) 제9회 엠네스티 언론상 특별상(2006)

김회경기자 aurevoir.co.kr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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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동아]내 손안의 만능비서 ‘다이어리’ 키워보시죠

하나 : 자신의 생활 스타일에 맞는 다이어리를 선택하라
처음 다이어리를 구입하는 사람이라면 마음에 드는 디자인을 기준으로 고르는 것이 좋다. 그것이 다이어리 이용 습관을 오래 지킬 수 있게 해준다. 다이어리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던 사람이라면 양쪽 페이지에 한 달 일정을 적어 넣을 수 있는 월간(monthly) 타입의 다이어리를 쓰는 것이 좋다. 그리고 약속이 많은 사람이라면 주간(weekly) 타입의 다이어리가 요긴하다. 주간 스케줄 기입란이 왼쪽 페이지에 있고, 오른쪽 페이지에는 메모난이 있다. 메모난에는 주간 스케줄을 원활하게 운영하기 위해 필요한 정보를 적어두면 편리하다. 이를테면 약속 장소의 전화번호나 약도 등과 같은 것을 적어둔다. 오른쪽 페이지의 정보들은 그 자체로 좋은 기록이 된다. 일반적으로는 월간 타입과 주간 타입 특성을 함께 지닌 monthly · weekly 타입의 다이어리를 사용한다. 월간 캘린더에 한 달 일정을 대략 적고, 주간 스케줄난에 자세한 내용을 적으면 된다. 다이어리를 다양하게 사용해보면 어떤 다이어리가 자신의 생활 스타일에 맞는지 알 수 있다. 자신에게 맞는 다이어리를 찾은 뒤에는 해마다 속지만 갈아끼우며 계속해서 같은 다이어리를 사용하는 것이 좋다.


둘 : 다이어리 첫 페이지에 일년지계(一年之計)를 담아라
연말이나 연초에 새 다이어리를 사면 맨 첫 페이지에 ‘올해 이것만은 꼭 하겠다’는 것들을 적는다. 예를 들어 책을 몇 권 이상 읽겠다거나 어디 어디를 여행하겠다거나 자격시험을 보겠다는 등등. 몇 년 전 하버드대학에서 “당신의 인생은 성공했는가”라는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다. 이 질문에 겨우 3%만이 “매우 만족한다”고 대답했고, 나머지는 “그럭저럭 만족한다”(30%)거나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어느 한쪽은 다른 사람의 도움 없으면 안 된다”(67%)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이 있다. 매우 만족한다고 대답한 사람들에게 공통점이 나타나는데, 그것은 바로 ‘구체적인 목표를 메모한다’는 것이다. 막연한 소망만 가지고 있다면 소망은 소망에 머문 채 무엇 하나 실현되지 않지만, 소망을 구체적으로 적어두면 그것을 이루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따라서 목표를 이루고 싶다면 그것을 눈에 띄는 곳에 적어두고 날마다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번 실천해보라.

셋 : 포스트잇을 활용하라
다이어리와 포스트잇을 함께 사용하면 그야말로 큰 효과를 발휘한다. 스케줄난에는 시간과 장소가 정해진 일정들을 기록하고, 메모난에는 ‘누구에게 전화하기’ ‘무엇을 구입하기’ ‘머리하기’ 등과 같이 시간과 장소가 한정돼 있지 않아 자칫 잊기 쉬운 일들을 포스트잇 1장에 1건씩 적어서 붙여둔다. 이때 일의 중요도에 따라 순서를 정해 붙이면 더욱 효과적이다. 이런 ‘자잘하게’ 해야 할 일들은 언제 생각날지 모르기 때문에 항상 포스트잇 한 묶음을 주머니에 넣어가지고 다니면 좋다. 해야 할 일이 생각나면 바로 주머니에서 포스트잇을 꺼내 메모한 뒤 잠시 포스트잇 뒤쪽에 붙여 보관한다. 그리고 나중에 다이어리에 옮겨 붙인다. 한 가지 일이 끝날 때마다 하나씩 떼어낸다. 그 주의 메모난에서 포스트잇이 모두 떨어졌을 때 주간 업무는 완전히 끝나는 것이다. 만약 그 주에 끝내지 못한 일이 있다면 그 포스트잇을 다음 주 메모난으로 옮겨 붙이면 된다. 때로는 3주 뒤에 해야 할 일이 갑자기 생각날 때도 있다. 그러면 포스트잇에 적어 3주 뒤 메모난에 붙여두기만 하면 된다. 따로 포스트잇에 해야 할 일을 적어두면 비주얼하게 그 일들을 파악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넷 : 숨어 있는 시간을 ‘살려라’
다이어리는 주요 업무나 약속을 잊지 않게 해주는 구실을 한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하고 의미 있는 일은 숨어 있는 시간을 ‘살리는’ 것이다. 다이어리를 잘 활용하면 자투리 시간도 그냥 흘려보내지 않을 수 있게 된다. 가령 거래처 사람과 만나기로 했는데 약속 시간보다 10분 정도 일찍 도착했다. 그렇다면 다이어리의 그 주 메모난을 펼치고 남아 있는 포스트잇을 살펴본다. 그런 뒤 10분 동안 전화로 할 수 있는 일이 적힌 포스트잇을 찾아내 그 일을 처리하는 것이다.
시간을 ‘살리고,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하는 김에 ~까지 한다’는 멀티태스킹이 필요하다. 즉, 자신이 해야 할 일 중에는 장소나 사람으로 연계되는 것들이 있을 터. 그런 것들을 확인한 뒤, 어디에 간 김에 또는 누구를 만난 김에 할 수 있는 두서너 가지 일을 한꺼번에 처리하는 것이다. 그러면 누구나 똑같이 가지고 있는 시간을 몇 배로 늘려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다섯 : ‘언제 어디서나 즉시’ 이용 할 수 있는 정보 뱅크로 만들어라
시간관리와 일정관리에 덧붙여 정보관리까지 한다면 다이어리의 부가가치는 더욱 높아진다. 여기서 정보라고 하는 것은 인터넷을 이용하면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무엇인가를 보고 자신이 깨달은 것, 다른 사람들의 훌륭한 발언, 업무에 도움이 될 만한 신문기사, 퍼뜩 떠오른 아이디어 등 자기 자신이 직접 보고 들은 것을 모은 생생한 정보를 말한다. 그런데 그 정보를 집에 두거나 컴퓨터에 저장해놓아서 필요할 때 바로 쓸 수 없었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정보란 모아야 하며, 또한 모았어도 정리해야 하며, 무엇보다 필요할 때 바로 꺼내 쓸 수 있어야 한다. 늘 가지고 다니는 다이어리에 필요한 모든 정보를 집약해놓으면 ‘언제 어디서나’ 그 정보를 사용할 수 있다. 이때에도 포스트잇을 활용하면 좋다. 그러면 낡은 정보는 새로운 정보로 계속 교체할 수 있고, 쓸 일이 없어진 정보는 다른 노트 등에 붙여 보관할 수도 있다. 게다가 지난해 다이어리에 붙여놓았던 것이라도 아직 쓸모가 있으면 새 다이어리에 옮겨 붙일 수도 있다. 따라서 12월 말엔 그해 다이어리에 붙어 있는 쓸 만한 여러 정보를 새 다이어리에 옮겨 새 데이터뱅크를 만들어야 한다.

여섯 : 다이어리를 통해 인맥을 만들고 유지하라
다이어리는 인맥을 만들고 다지는 밑바탕이 되기도 한다. 새 다이어리를 구입하면 가장 먼저 생일이나 기념일 등을 적어 넣는 것은 기본이다. 알고 지내는 사람들의 생일, 기념일 등을 잊지 않고 챙겨주는 일이야말로 인간관계에서 꼭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바로 부하직원과 상사의 생일을 다이어리에 적어 넣어보자. 그리고 누군가를 처음 만나면 그날의 메모난에 ‘~씨, ~에서’라고 그 사람의 이름과 만난 장소를 적는다. 다시 그 사람과 만날 것을 대비해 그 사람이 한 말을 적어두면 더욱 좋다. 그러면 그 사람을 기억하기 쉽기 때문이다. 명함에 적어둘 수도 있지만, 인맥을 일원화해 관리하기 위해서는 다이어리를 활용하는 편이 낫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인맥을 확장하는 것 못지않게 기존에 알고 지내는 인맥을 유지하는 일이 중요하다. ‘언제 한번 만나자’고 해놓고 시간을 내지 못해 만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동안 만남이 뜸했던 인맥을 포스트잇 한 장에 한 명씩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어 금주 메모난에 붙여두자. 자투리 시간을 활용해 전화를 걸면 되고, 시간이 나지 않더라도 다음 주 메모난에 옮겨놓기만 하면 된다. 머릿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메모가 되어 있기 때문에 언젠가는 실행에 옮길 수 있다.

일곱: 컬러펜을 사용하라
다이어리에 뭔가를 기록할 때 컬러펜을 사용하면 더욱 효과적이다. 예를 들어 왼쪽 스케줄난에는 검은색 볼펜으로 일정을 기록하고, 오른쪽 메모난에는 일정을 소화하면서 잘된 것은 빨간색 볼펜으로, 잘못된 것은 파란색 볼펜으로 메모한다. 이렇게 색 구분을 해서 메모하다 보면, 시간이 지난 뒤 이전 것을 보았을 때 참고가 된다. 특히 파란색으로 적힌 사항을 중심으로 읽고, 그와 같은 잘못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단순하게 일정만 적어 넣는 것이 아니라, 반성과 개선을 유도할 수 있는 다이어리를 만들어야 진짜 ‘다이어리의 달인’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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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06-12-26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담아갑니다

하늘바람 2007-01-01 06: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10679

 

새해 복 많이 받으셔요


이쁜하루 2007-01-01 2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하늘바람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제 서재 새해 첫 이웃이시네요 ^^
건강하게 아이도 잘 낳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심규진 기자의 인물탐험] 개그우먼 김미화
외모 학벌 가난 뛰어넘은 ‘개그계의 대모’

미디어다음/ 심규진 기자

나는 언제나 ‘개그우먼’

야구방망이, 일자눈섭으로 남편을 호령하던 '순악질여사' 김미화씨. 24년 방송 경력에 TV토크쇼 '김미화의 U', 라디오 시사프로그램 '김미화의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을 진행하는 무게감 있는 방송인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개그맨 시절 특유의 재기발랄함과 당찬 에너지는 여전하다. MBC 라디오국에서 만난 그는 방송 프로그램의 안주인보다 열정 넘치는 끼로 무대를 휘어잡는 개그콘서트의 대모가 더 어울려 보인다.

"제가 방송을 한다고 해서 아나운서나 기자보다 더 잘할 수 있겠어요. 흉내내기일 뿐이죠. 그러나 개그우먼한테 이런 걸 맡겼더니 잘 못하더라는 소리를 들을 수는 없어요. 열심히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거죠."

'나는 개그우먼이다'라는 정체성을 단 한순간도 부인한 적이 없다는 얘기다. 자기 중심을 확실히 잡으면서도 왕성한 호기심만큼 자신의 영역을 넓혀나가고 있다. 3개월 천하로 단명하는 개그맨이 부지기수인 마당에 김미화만큼 장수하는 개그맨을 찾기란 쉽지 않다. '여성' 개그맨으로 더더욱 그렇다.

김미화의 경력은 여러 면에서 특별하다. 그다지 예쁘지 않은 외모로 화장품 광고를 찍은 최초의 개그우먼이다. 직접 프로그램 제안서를 써서 개그 프로그램을 기획해 낸 최초의 여성이기도 하다. 여성단체부터 환경단체에 이르기까지 사회운동, 대안운동에도 열심이다. '대충대충' 넘어가는 법 없이 뭐든 열정적으로 똑부러지게 해낸다는 점에서 존경받는 연예인이다.

"특별히 출세욕이 있다거나 욕심이 많다거나 한 건 아니에요. 개그에 대한 열정이 저의 시야를 많이 넓힌 거죠. 대학에 간 것도 개그에 대한 저질시비가 한창이었을 때 내가 못 배웠다고 전체 개그계가 욕먹는 게 아닐까 싶어 더 많이 배워보자는 노력에서였어요. 시사프로그램을 맡게 된 것도 개그맨한테 맡겨도 신뢰할만하다는 인정을 받고 싶어서였죠."

못 배웠다고 손가락질 당하는 게 싫으니, 더 많이 배우며 성장하고, 개그맨이 할 수 있을까라는 세상의 의구심엔 최선의 대답을 주기 위해 노력할 뿐이란다.

돌이켜보면 개그우먼 김미화의 삶은 역류한 적이 없었다. 순리대로 자연스럽게 살자는 주의란다. 그래선지 그의 말투에선 느끼함이나 과장됨이 없이 담백한 장맛이 느껴진다.


시련- 극복하라. 김미화처럼

사진=미디어다음 김준진

서울 수유동에서 자란 그는 폐병에 걸린 아버지와 지긋지긋한 가난이 싫어 동네 아이들과 바깥에서 노는 시간이 더 많았다. 사람들을 불러모아 개그맨 흉내로 웃음을 주는 일이 가장 큰 낙이었다.

"찰리 채플린, 배삼룡, 서영춘 선생님을 존경해요. 어렸을 적부터 개그맨이 꼭 되고 싶다고 강렬히 열망했고 그 꿈이 이뤄지면서 자연스레 새로운 꿈을 향해 도전하는 삶을 살아온 것 같아요."

'아버지 없는 아이'라는 놀림을 받거나 아이들과 싸우고 선생님에게 무시를 당했을 때도 소녀 김미화를 지켜준 건 '웃음'이었다.

"짜증내고 화내고 우울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죠. 대신 아이들과 신나게 까불고 재미있게 해 주었어요. 그러면 제 편이 생기고 인기가 많아지고 친구가 많아지더군요."

고달픈 이웃에게 웃음으로 삶의 활력을 주는 개그철학은 어린 시절부터 체화된 것이다. 단순히 인기에 대한 동경이나 연기자가 되기 위한 징검다리로 개그맨이 되는 대개의 연예인 지망생들과는 출발부터 달랐던 셈이다. 가난이나 학벌, 외모 등에 콤플렉스를 느껴 삐뚤어지기 쉬울 법한 성장환경이었지만 그를 지켜준 것은 개그맨을 향한 꿈과 강한 모성이었다.

"어머니가 아주 강한 분이셨어요. 안 해 본 장사 없이 저희들을 키우셨고 가난하지만 한 번도 약하거나 비굴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셨어요."


애정- 연대하라. 김미화처럼

첫 단추를 잘못 채운 것은 결혼이었다.

스물 셋 어린 나이에 잘못된 선택을 했다. 가난하고 상처받았던 가정사에 대한 도피심리나 보상심리가 잘못된 결정으로 몰아간 것 같기도 하다고. 하지만 인기를 잃는 것이 두려워서 고통에 정면으로 맞서지 못하고 외면으로 일관하기도 했다.

"남편과의 만남을 그럴 듯하게 포장한 건 언론들이었죠. 처음부터 잘못된 선택이라는 걸 알았지만 당시엔 연예인에게 사생활도 용납되지 않던 시절이었잖아요. 이혼하거나 사생활에 문제가 있다면 한순간에 퇴출당하던 시절이니까. 계속 고름을 방치했던 거죠. 겁이 나서."

커리어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가정사의 불행을 연장시킨 것인지도 모른다. 그가 남편과의 이혼을 선언하고 여성으로서 직면하기 힘든 불행한 개인사를 고백했을 때, 일반적인 연예인들의 사생활에 따라붙는 악성 댓글이 그다지 없었던 것은, 그의 열정과 진심을 대중들도 알아챘기 때문일 것이다.

"제 호적이 호주제로 인해 잘못돼 있다는 것을 고백한 것도 특별히 대중의 관심을 끌거나 하겠다는 의도가 아니었어요. 여성단체 활동을 하던 차에 자연스레 '나도 호주제의 피해자'라는 얘기가 나온 거죠. 그런데 그 일로 가족들이 너무 마음이 상해서 하마터면 가족을 잃을 뻔 했어요."

성공한 사람이라면 귀족적인 생활을 추구하며, 힘겨웠던 과거를 말끔히 씻어내고 싶어하는 게 당연지사 아닐까. 그런데도 그는 여전히 동대문 시장에서 옷을 사고, 매니저 없이 홀로 일을 처리하며, 금전적 보상이 없는 사회 봉사 활동에도 열심이다. 여성들과 강하게 연대하면서도, 개성 강한 남성 후배들을 한데 아우르는 리더십도 발휘한다. 뿌리를 인정하고, 시련과 장애물을 정면 돌파하는 용기, 그가 '동지'들과 연대할 수 있는 이유일 거다.

"누가 여성 개그맨은 아이디어를 못 짠다고 했나요? 누가 여성은 예뻐야만 한다고 했나요? 그런 고정관념들과는 싸우고 제 목소리를 냈어요. 그런 편견들이 사실이 아니라고 증명하기 위해 더 치열하게 노력하게 됐고요."


관계- 처세하라. 김미화처럼

사진=미디어다음 김준진

김미화는 단순히 개그우먼이라는 수식에 자신을 가둬두지 않았다. 매너리즘에 빠질 때마다 그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앞으로 전진했다. 때로는 싸우기도 하고 때로는 인내가 필요하기도 했다. 얼굴이 못생겨서 안된다는 PD에게는 직접 아이디어를 내서 짠 개그코너를 들고 갔고, 나이가 들어서 안된다는 애기를 들었을 때는 중장년층 코미디 프로그램 '코미디 세상만사' 기획서를 들고 갔다.

"개그콘서트를 만들었을 때는 후배들이 활약할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주자는 생각이 컸어요. 지금은 개그콘서트를 시작으로 방송 3사에 공개 개그 프로그램이 생겼으니 정말 뿌듯하지요."

개그계의 대모, 여왕벌로 칭송되는 그의 처세술의 비결은 무엇일까. 부당함에는 당당하고 의연하게 맞서돼, 누군가를 아프게 찌르는 일은 가급적 피한다.

"잘못이나 부당한 것을 보고도 침묵하는 스타일은 아니에요. 경쟁을 피하지도 않고요. 순악질 여사 할 때 김한국씨와도 많이 싸웠죠. 좋은 개그를 위한 긍정적인 싸움이었던 거에요. 그러나 뒤에서 남 얘기하는 것은 절대 하지 않았습니다. 또 여자라서 개그를 못한다거나 소품처럼 있어야 한다는 성차별에는 당당하게 맞섰어요. 제 기준에서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판단이 들면 냉정하게 다시 보지 않습니다."


성공- 진취하라. 김미화처럼

20년이 넘는 방송 연륜만큼 더해진 것이 있다면 성공한 여류인사에게서 느껴지는 여유와 따뜻한 인격이다. 방송국을 지나다니는 사람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친한 누나처럼 안부를 살뜰히 챙긴다. 꼭 자상한 선생님 같다.

그의 과거를 이야기 하는데만 한 시간이 훌쩍 넘어갔다. 현재와 미래를 얘기할 시간도 없이 빠듯하게 진행된 인터뷰. 그는 "저에 대해서는 너무 많이 알려졌잖아요. 잘 써주세요"라는 양해를 구하고 자리를 떴다.

마흔 셋의 나이에도 소년같은 젊음과 활력이 넘치는, 씩씩한 뒷모습이 이렇게 얘기하는 듯 했다. "진취하라. 김미화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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씩씩하니 2006-12-05 1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아,,이렇게보니 참 대단해요..열심히 사는 모습 그 누구든 그럴 때 가장 빛나는거지요..

이쁜하루 2006-12-06 0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열심히... 우리모두 화이링해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