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지금 한나 아렌트를 읽어야 하는가?
나카마사 마사키 지음, 김경원 옮김 / 갈라파고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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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기 시작한 한나 아렌트에 관한 책 중 네 번째 책이다. 이 책의 목적은 저자가 나름대로 이해한 한나 아렌트의 사상을 정리하여 '신서', 즉 입문서의 역할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실제로 이 책은 아렌트의 저서 대부분을 다루고 있으며, 아렌트의 사상이 나오게 된 역사적 배경, 아렌트의 눈으로 본 현대 일본사회(2009년)의 모습을 같이 이야기하고 있어 아렌트 사상의 대략적인 전도(全圖)를 얻을 수 있었다. 각 장에서 주로 다루고 있는 아렌트의 저서는 다음과 같다.


1장 - 『전체주의의 기원』,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2장 - 『인간의 조건』

3장 - 『혁명론』

4장 - 『정신의 삶』, 『칸트 정치철학 강의』


『인간의 조건』의 경우 3장과 4장에도 자주 활용되는데, 아무래도 아렌트 사상의 핵심 중 하나인 '행위'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닌가 싶다. 상당히 많은 저서를 다루고 있음에도 최대한 쉽게 풀이해서 설명하려는 노력이 돋보였고, 이와 관련된 역사적 배경을 같이 언급해 준 점이 인상적이었다. 개인적으로 1장과 2장은 전에 읽었던 『정치와 진리』, 『예루살렘의 아이히만』과 겹치는 부분이 많았으나, 3장과 4장은 제대로 된 설명을 처음 접하는 것이어서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다 읽고 나면 위에 제시한 아렌트의 저작을 읽은 것 같은 착각도 들 정도..라고 표현할 수 있겠다. 물론 4장의 경우, 『정신의 삶』이 유작으로 남았기 때문에 '사유', '의지', '판단' 중 '판단'과 관련된 내용은 이전의 저서를 통한 저자의 추론이라는 사실을 유념해 두어야 하겠지만... (그래서 더 어려웠는지도 모르겠다)


아쉽다기보다 궁금했던 부분은, 악의 평범성(banality)과 관련된 부분에서 'banal'이 때로는 '따분한'으로, 때로는 '평범한'으로 번역된 것이다. 저자가 글을 쓸 때 영어를 이렇게 번역한 것인지, 역자가 이를 옮기면서 이런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일반적으로 '따분함'보다 '평범함'이 통용된다는 점에서 용어가 통일되었으면 하는 소박한 바람이 있다(그리고 '평범함'이 '따분함'보다 그 의미를 더 잘 전달해주는 것으로 생각된다.『예루살렘의 아이히만』(한길사)의 '역자 서문'에 자세히 나와있다). 또 '복수성(plurality)'이 3장에서는 '다원성'(149쪽)이라고 제시된다. 물론 이 앞에는 '가치관의'라는 수식어가 있긴 하지만, 같은 용어가 여러 가지로 나타나는 경우 이 개념이 아까 말한 그 개념이 맞는 건지 혼란스럽다...


아렌트에 대한 책을 읽으면서 느끼는 점은, 파면 팔수록 똑부러지게 결론짓는 것이 없구나.. 하는 것이다. '폴리스적인 인간'을 구현하기 위해 '공적 영역'에서 인간의 '복수성'을 근간으로 한 정치 행위를 옹호했지만, 반(半) 공적, 반(半) 사적인 영역인 '사회적 영역'(대표적인 것이 경제다. 이놈의 경제)이 확대되면서 사적 영역이 배제된 폴리스적 공간은 더 이상 불가능한데, 이에 대한 대안은 찾을 수 없다. 하기야, 애초에 복수성을 바탕으로 한 토의를 통해 공공선을 추구하는 정치행위를 강조한 그녀에게 대안을 바란다는 것이 무리일 수도 있겠다. 정치철학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순간 그것이 진리라고 강조하는 꼴이 되고, 그것은 정치가 참/거짓을 가르는 진리의 영역에 떨어지는, 그녀의 주장을 무너뜨리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결국 폴리스적인 공간의 재현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지만, 그런 공간을 구축하고 진정한 '정치''행위'를 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지도 모른다. 씁쓸한 뒷맛을 남긴 채, 저자 서문에 나온 말을 곱씹는다...


'알기 쉬움'을 간판으로 내세우는 '정치사상'(또는 '정치사상 연구')은 그럴듯해 보이고 위세가 대단하다. 그래서 '정치'를 스포츠나 게임처럼, 적과 자기편이 싸워서 이기고 지는 문제로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반응이 쏠쏠하다. 내용이 '알기 쉬운' 사상일수록 거기에 근거해 '알기 쉬운' 슬로건을 내걸고 '자기편'을 많이 결집하여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16쪽)


전문적인 정치사상 연구자도 아니고 일상적으로 '정치'에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닌 불특정 다수가 어쩐지 '자기편'이 되어줄 것 같은 '이론'에는 대개 '어딘가'에서 자주 들어본 듯한 대사가 아로새겨져 있다. 여기에서 '어딘가'란 말할 것도 없이 신문, 텔레비전, 잡지, 최근에는 인터넷 같은 매스컴을 말한다. 미디어에서 자주 접해 어느샌가 익숙해진 단어와 문구를 그럴듯하게 새겨 넣은 글이 무척 '지적(知的)'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17-18쪽)


+) 아렌트에게 관심을 가지고 관련 책들을 검색해보던 때, 아렌트의 사상과 관련해서 내가 자주 접했던 용어 중에는 '세계사랑'이라는 것이 있었다. 그런데 이 책에는 '세계사랑'에 대한 언급이 없다. 이 말은 또다른 책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그녀의 저서 읽기, 아니 구매가 또 미뤄진다는 것을 뜻한다. 일단 내가 이 책을 사기 전에 후보에 올라있던 책은 『아렌트』(홍원표, 한길사, 2011)와 『아렌트 읽기』(엘리자베스 영-브루엘, 산책자, 2011)다. 또다시 고민을 시작해야 한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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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문학과지성 시인선 13
이성복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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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읽는 데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은, 읽다가 잠시 멈추고 생각에 잠기는, 이것이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길어졌기 때문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미궁에서 떠돌 뿐이라 다시 들어가는 것이 두려워졌기 때문이다. 황동규 시인의 해설은 시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지만, 이미지의 연상 작용에 대한 해석이 항상 들어맞는 것은 아니어서 나의 연상이 끊기기도 하였다. 글을 쓰는 지금에 와서도 나는, 내가 그의 시를 이해했노라, 시를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었노라, 라고 감히 말 할 수 없다. 나는 결국 <부패에 대한 연구>를 완성하지 못할 것이다. 별을 하나 남겨둔 것은 내가 이 시집을 이해했다는 오만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작은 표시다.


시집 전체에서 흐르는 비극의 정서와 이미지들, 그리고 '유곽'으로 대표되는 화자의 현실 인식은 처절하다 못해 충격적인 언어로 나타난다. 이를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은 세계일 것이다. 


(...)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솎아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새치는 노인과 便桶

다정함을 그날 몇 건의 교통사고로 몇 사람이

죽었고 그날 市內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무도 그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 '그날' 中


화자가 바라보는 세계, 그리고 화자가 머물러 있는 세계는 모두 '유곽'이다. 그냥 유곽도 아닌 '정든 유곽'이다. 아마 자신과 함께 유곽에서 살아가던 사람들, 병들었는데 아프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정이 들었을 것이다. 세계는 때로 '언덕배기 손바닥만한 땅'에 심은 고추나무의 고추를 몰래 따가던 공사장 인부들의 모습으로, 때로는 '집을 지어야겠으니 / 고추를 따가라'는 집 주인의 모습으로 나타나 화자의 가족을, 작부들을 핍박한다. 그리고 그 핍박은, 도저히 논리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이미지의 형태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이다.


우연히 스치는 질문── 새는 어떻게 집을 짓는가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풀잎도 잠을 자는가,

대답하지 못했지만 너는 거기서 살았다 붉게 물들어

담벽을 타고 오르며 동네 아이들 노래 속에 가라앉으며

그리고 어느날 너는 집을 비워 줘야 했다 트럭이

오고 세간을 싣고 여러번 너는 뒤돌아 보아야 했다

- '모래내 · 1978년' 中


화자는 이 세계에 '질문'을 던질 수 있다는 점에서 자기 주변의 사람들보다는 나은 위치에 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병들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러한 세계 인식 속에서 나타나는 것은 아버지 또는 어른스러운 생활과 같은 것으로 대변되는 기성의 가치들(황동규 시인의 말을 빌리자면 '우상')에 대한 분노다. 하지만 이런 분노와 파괴 행위가 화자 자신을,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 지에 대해 시인은 확신이 없는 듯하다. 이 세계는, 우리를 수없이 흔들면서 자신은 흔들려 본 적 없는, 그런 존재이기 때문이다.


내가 나를 구할 수 있을까

를 구할 수 있을까

왼손이 왼손을 부러뜨릴 수 있을까

돌이킬 수 없는 것도 돌이키고 내 아픈 마음은

잘 논다 놀아난다 얼싸

天國은 말 속에 갇힘

天國의 벽과 자물쇠는 말 속에 갇힘

감옥과 죄수와 죄수의 희망은 말 속에 갇힘

말이 말 속에 갇힘, 갇힌 말이 가둔 말과 흘레 붙음, 얼싸

 

돌이킬 수 없는 것도 돌이키고 내 아픈 마음은

잘 논다 놀아난다 얼싸

-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中


너는 네가 무엇을 흔드는지 모르고

너는 그러나 머물러 흔들려 본 적 없고

돌이켜 보면 피가 되는 말

상처와 낙인을 찾아 고이는 말

지은 罪에서 지을 罪로 너는 끌려가고

- '너는 네가 무엇을 흔드는지 모르고' 中


이러한 시적 정조가 시집 전체를 지배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죽음과 폭력, 타락의 이미지들은 얽히고 설켜 마치 초현실적인 장면처럼 나타나기도 하고, 연상 작용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 모든 이미지들을 한 번 읽고 해석하는 것은 내 역량을 벗어난다. 아니, 다시 읽어도 해석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다만 여전히 병들어 있는 지금, 아픈 줄은 알고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마지막 시, '이제는 다만 때 아닌, 때 늦은 사랑에 관하여' 전문을 적으며 글을 마무리한다. '송곳'보다 '송곳에 찔린 허벅지'에 대해 이야기하겠다는 이 시가 마지막에 수록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세계의 '송곳'보다 우리의 상처에 주목하겠다는 시인의 의지가 아닐까 싶다. 나도 이제 내가 병들었음을 알고, 아픔을 알고, 잠에서 깨어나 움직이길 바란다. 병들어 있는 것이 이 세계만은 아닐 테니...


이제는 송곳보다 송곳에 찔린 허벅지에 대하여 
말라붙은 눈꺼풀과 문드러진 입술에 대하여 
정든 유곽의 맑은 아침과 식은 아랫목에 대하여 
이제는, 정든 유곽에서 빠져 나올 수 없는 한 발자국을 
위하여 질퍽이는 눈길과 하품하는 굴뚝과 구정물에 흐르는 
종소리를 위하여 더럽혀진 처녀들과 비명에 간 사내들의 
썩어가는 팔과 꾸들꾸들한 눈동자를 위하여 이제는 
누이들과 처제들의 꿈꾸는, 물 같은 목소리에 취하여 
버려진 조개 껍질의 보라색 무늬와 길바닥에 쓰러진 
까치의 암록색 꼬리에 취하여 노래하리라 정든 유곽 
어느 잔칫집 어느 상갓집에도 찾아다니며 피어나고 
떨어지는 것들의 낮은 신음 소리에 맞추어 녹은 것 
구부러진 것 얼어붙은 것 갈라터진 것 나가떨어진 것들 
옆에서 한 번, 한 번만 보고 싶음과 만지고 싶음과 살 부비고 싶음에 
관하여 한 번, 한 번만 부여안고 휘이 돌고 싶음에 관하여 
이제는 다만 때 아닌, 때 늦은 사랑에 관하여

- '이제는 다만 때 아닌, 때 늦은 사랑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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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들
레나타 살레츨 지음, 박광호 옮김 / 후마니타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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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표지 뒷면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었다.


현대자본주의는 어떻게 우리의 불안에 기생하는가?

불안한 일상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탐구


또, 그 밑에는 이런 말도 있었다.


'정신분석학적 통찰을 우리의 친숙한 일상에 적용하는 능숙한 솜씨와 불안이라는 렌즈를 통해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이면을 폭로하고 분석하는 통찰력이 돋보인다.'

- 줄리엣 플라워 맥카넬Juliet Flower MacCannell 캘리포니아 대학교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이면'에 대한 분석과 통찰이 이 책에서 차지하는 부분은 매우 적다. 이 책에서 주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은 실제 사례나 예술 작품에서 나타나는 불안의 양상에 대한 분류와 분석이다. 처음에 읽을 때 기대했던 것은 현대 사회에서 불안이 어떤 방식으로 나타나고 그것은 어떻게 이용되는지에 대한 통찰이었는데, 정작 현대 사회의 양상에 대한 언급이 적어서 많이 아쉬웠다. 현대 사회현상들에 대한 이야기는 지그문트 바우만의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에서 좀더 다양하게 찾을 수 있다. 하지만 불안의 다양한 양상들을 보여주고 설명하고 있다는 점과, 라캉의 관점에서 바라본 불안을 해석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독의 가치가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2장 '전쟁 속의 불안'에서는 전쟁 이후 외상적 경험을 겪는 사람들의 사례를 통해 프로이트와 라캉의 불안에 대한 개념을 언급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불안에 대한 프로이트의 초기 이론과 후기 이론, 여기에 대타자라는 개념을 도입해 설명하는 라캉의 불안 등에 대한 개념의 설명이 주를 이루는데, 책에서 꽤 상세히 설명하고 있긴 하지만 라캉의 이론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 없이는 책의 논지를 따라가기가 상당히 어렵다. 더욱이 라캉의 정신분석적 이론은 책의 후반부까지 꾸준히 등장하는 개념이기 때문에 관련 서적과 함께 읽는 것이 필수인 듯하다. 나는 김영사에서 나온 『프로이트&라캉 무의식의 초대』 뒷부분의 용어 해설을 참고하면서 읽었는데, 여전히 '결여'와 '주이상스'의 개념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전쟁 속의 불안'에서 언급하는 것은 주체가 대타자의 결여, 비일관성에 대한 보호막으로서의 환상이 깨질 때 불안이 발생한다는 것, 그리고 대타자의 욕망과 불안 사이의 관계, 불안의 관점에서 바라본 자살과 같은 이야기들이며, 이들을 군 정신의학의 사례에 접목시켜 설명하고자 한다. 이 부분에서 인상깊었던 부분은 불안 없는 전쟁에 대한 부분이었다. 현대 사회, 특히 전쟁에 있어서 불안은 제거되어야 할 정서 상태, 기피해야 할 대상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짙은데, 불안이 억압의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하지만 위험에 대한 예기로도 작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인간에게 떼려야 뗄 수 없는 불안을 척결하려는 움직임이 제2, 제3의 뉘른베르크 항변을 낳을 수도 있다는 점은 인상적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죽음을 극복하려는 시도 역시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


3장 '실패 속의 성공'은 앞서 소개했던 책 표지의 내용과 가장 부합하는, 선택의 자유가 범람하는 현대 사회에서 불안은 어떻게 나타나고 그것이 어떻게 이용되는지를 대타자의 욕망과 주체의 관계 속에서 분석하고 있다. 현대 사회의 현상들과 접목시킨 부분이지만 너무 라캉의 이론에 치중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후의 작품인 『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에서 이 논의가 더욱 확장된 듯하다. 여러 부분 중에 한 부분만을 인용해둔다. 나중에 참고할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


왜 선택의 자유에도 불구하고 더 행복해지지 않는 것일까? 하나의 대답은 주이상스는 우리에게 참 생경한 무언가라는 라캉의 서술에 있다. (즉, 우리는 그것을 합리적인 방식으로 "선택"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되려고 애쓸 때 흔히 가장 외상적이고 공포스러운 무언가와 마주치는 것이다. 미디어는 우리에게 가능한 최상의 방법으로 즐기라고 압박한다 ─ 가능한 최상의 오르가슴을 얻고 최상의 부모, 배우자, 노동자가 되라고 한다. (...) 그러나 진정한 자신이 될 수 있는 방법에 관한 미디어의 이 모든 충고에도 불구하고 대타자에게서 오는 요구는 결여된 것처럼 보이고 만족을 줄 향락을 찾을 자유는 전적으로 주체에게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결과 주체의 불안은 커지는데 내면의 자아의 또 다른 요구 ─ 초자아의 요구 ─ 에 직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불안은 죄책감과 결부된다. (126-127쪽)


4장 '사랑 속의 불안'에 나오는 히스테리증과 강박증, 도착증과 불안에 대한 사례나 5장 '모성의 불안'에 나오는 유아 살해 및 분리 불안에 대한 사례는 현대 사회와 상당히 멀어져 있기도 하고, 텍스트 분석에 너무 치중한 느낌이 있어 아쉬움이 있었다. 그렇지만 자신에게 연애편지를 보내는 현상은 흥미롭게 보았다. 나는 감정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6장의 '증언은 불안을 치유할 수 있을까?'에서 등장하는 윌커머스키의 사례를 통해 현대 사회에서 주체가 대타자의 결여에 대처하는 자세가 변화하는 모습은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특히 기억 회복 치료에 대한 이야기가 흥미로웠는데, 오늘날 미디어 어디서나 심리치료사, 상담사를 만날 수 있다는 점, 심리학에 대한 책이 꾸준히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현상 등과 연결되는 부분이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앞서 '전쟁 속의 불안'에서 병사들이 대타자의 결여를 가리기 위해 죄책감을 형성했다면, 현대 사회는 주체가 스스로 대타자의 권위가 지닌 결여를 폭로하는 양상을 보이는데, 그 대표적인 사례로 저자가 제시하는 것이 윌커머스키의 『편린들』이다. 어쩌면 이는 모든 것을 폭로하고 드러냄으로써 자신의 외상을 회복하면 불안이 사라질 것이라고 믿는 현대의 풍토와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러한 호소 문화가 새로운 대타자에게 권위를 부여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광신적 집단의 지도자, 기억 회복 치료사라는 것이다.


이 책을 통해 현대 사회에 만연한 불안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답을 얻고자 한다면 이 시도는 실패일 것이다. 결국 저자가 말하려는 바는 불안이 주체를 혼란스럽게 하고 잘못된 환상의 틀을 만들기도 하지만, 결국 이 감정이 인간과 분리될 수 없는 필연적인 감정이라는 것을 말하려는 듯하다. 현대 사회에서 불안을 기피하고 심지어 제거하려는 풍토를 꼬집으려는 듯도 보이나, 이것이 너무 다양한 사례들과 함께 제시되다 보니 주장이 뚜렷해지지 못한 감이 있다. 더욱이 텍스트에 대한 분석과 그 안에서 나타나는 불안을 설명하려는 측면이 두드러지다 보니 현대 사회에 대한 이야기가 적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 책을 통해 가장 크게 얻은 점은 라캉에 대한 약간의 피상적인 이해와 호기심이니, 헛읽었다고 말하는 것 오만일 것이다. 저자의 TED 강연도 보았는데, 이제 내가 읽어야 할 책은 『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와 『프로이트&라캉 무의식의 초대』이지만, 읽다 만 책이 여럿 있어 언제 읽게 될 지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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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6-03-13 14: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현대 자본 소비 사회를 들여다보면 ˝ 불안 ˝ 이라는 요소가 상품 가치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상품성 있는 심리 상태인 것 같습니다. 불안하면 소비가 위축되다고 하는데, 이것은 전체적인 경제 현상이고 단순하게 상품이라는 영역만 놓고 보면 불안 상품은 잘 팔립니다. 교육 상품도 일종의 불안 상품이잖아요. 대학 못가면 미래가 없다.. 이것도 일종의 불안 심리를 이용해서 교육 상품을 파는 방식이고... 말이죠..

아무 2016-03-13 14:45   좋아요 0 | URL
이 책의 저자는 불안이라는 요소가 상품으로 이용되는 것의 핵심을 `선택`에 두고 있더군요. 개인에게 선택의 폭이 넘쳐나고, 대중매체는 끊임없이 향락을 추구하라고 요구하는 사회에서 개인은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과거의 상품 광고가 시청자로 하여금 모델과 동일시하는 것을 전략으로 삼았다고 한다면, 오늘날의 광고는 의도적으로 과장된 것임을 드러내서 개인에게 더 큰 불안감을 주고 그런 심리를 이용한다는 것이죠.. 개인은 자신의 선택을 대신해 줄 대타자를 찾고... 이와 관련해서는 이 책에 잠시 언급된 `큐레이터의 권력`에 대한 이야기가 흥미로웠는데, 본문엔 없고 각주에서만 다루고 있었습니다.. ^^;;

곰곰생각하는발 2016-03-13 16:32   좋아요 1 | URL
오, 그렇습니까 !!!!!! 이 책 읽어야 겠네요.. 제가 나름대로 자본주의의 특징 중 하나를 선택장애`라고 보았습니다. 옛날에는 검은고무신과 흰고무신 둘 중 하나를 선택하면 되었는데 이제는 신발 하나 고르는 데도 엄청난 경우의 수가 발동되게 됩니다. 상품 종류도 많고, 디자인도 무궁무진하고, 할인 가격은 다 다르고... 최선의 선택을 했다 해도 다른 곳에서는 50% 더 싸게 파는 곳이 있으면 뚜껑이 열리잖습니까. 그래서 현대인은 무엇을 선택할 때 항상 주저하게 됩니다. 이거 오늘 사면 내일 90% 세일하는 것은 아닐까 ? 이런 근심들이 모여서 불안을 야기하고, 불안은 곧 삶의 질을 떨어트리고.... 불안의 증가는 곧 정신병을 증가시키고, 정신적으로 피페하게 되면 범죄가 늘어나고 범죄가 늘어나면 불안 상품이 많이 팔리고... 결론은 자본 세력은 꾸준히 불안 이미지를 판다.. 여기까지게 제 생각입니다. 이거 어느 페이퍼에다가 제가 쓴 게 있는데.. 알라딘이 하도 개떡같아서 검색 기능이 거의 엉망이에요...

아무 2016-03-13 17:45   좋아요 0 | URL
선택에 대한 부분은 3장에서 다루고 있긴 한데, 논의가 좀 적습니다...^^;; 선택 장애가 사실 그런 부분에 있어서 불안이라는 정서가 조장되기도 하죠. 반면에 불안이라는 감정이 절대 존재하면 안되는 것으로 치부되기도 하면서도.. 그런 부분에서는 자기계발이나 심리치료 같은 분야가 흥하기도 하구요. 그것 역시 또다른 불안을 야기해서 소비를 부추기는 순환의 고리가 보이기도 합니다만... 선택의 문제를 좀더 파고든게 아마 저자의 <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인 것 같습니다. TED 강연에서도 이 주제로 이야기를 하던데, 조만간 이 책도 읽어보려구요.. ㅎㅎ

수이 2016-03-13 1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 반장님? :)

아무 2016-03-13 17:46   좋아요 0 | URL
반장.. 이라는 호칭이 어색하긴 하지만.. ㅎㅎ 네 제가 어제 부내(?) 풍기던 그 사람이 맞습니다 :-) 어제 미처 말씀 못 드렸는데 책 선물 정말 감사합니다. 몇 년 만에 책을 선물로 받는지 모르겠네요^^;; 잘 읽을게요!!

수이 2016-03-13 19:49   좋아요 1 | URL
반장님의 부내에 매우 해피한 저녁을 보낸 야나입니다. ㅋ
멀리 이사 가서 자주 못 보아 안타까운 마음_ 어쩔 수 없지만 가끔이라도 좋으니 쭈욱 정기적으로 와주세요. 아무님의 독서 실력을 이 비루한 제가 따라갈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온라인으로나마 꾸준하게 소통하면서 다양하게 책 읽고 싶어요. 좋은 밤! :)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 - 교양인을 위한 구조주의 강의
우치다 타츠루 지음, 이경덕 옮김 / 갈라파고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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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는 비유하자면 구조주의라는 코스 요리를 즐기기 위한 좋은 에피타이저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만큼 쉽게 풀이한 입문서를 읽게 될 일도 드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다만 롤랑 바르트에 대한 설명을 다룬 4장은 너무 맛보기로 제공되어 대형마트의 시식 코너에 왔다간 느낌이 있었고, 라캉의 경우 요리사가 최선을 다했지만 여전히 먹기 어려운, 말하자면 우유 없이 먹는 카스테라의 느낌이 있었다. 물론 이는 개인적인 취향일 뿐이며, 그들의 사상의 범주가 너무나 넓고 어렵기로 소문이 자자하니, 저자의 탓만 하기는 어렵다. 게다가 이 분량에 이 정도라도 담아낸 것이 대단한 것이겠지.. 입문서의 역할을 제대로 해내고 있지만, 이 책만 읽고 하산하는 것은 주마간산과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책 한 권만 읽은 사람이 세상에서 제일 무섭다고 했다. 나중에 (내가, 또는 나 혼자) 그들의 저작을 읽는 데 참고하기 위해 각 장에서 다루는 개념들을 정리해둔다. 그들은 이제 나에게 강의의 서문을 열었을 뿐이다.




제1장

마르크스 - 헤겔의 자기의식, 지동설적 인간관

프로이트 - 무의식의 방, 억압 기제

니체 - 계보학, 공리주의와의 차이, 대중사회, 귀족, 초인, 거리의 파토스


제2장 (소쉬르) - 가치(valeur), 기호, 타인의 말


제3장 (푸코) - 민족적 정체성의 환상, 광기의 역사(부드러운 격리), 신체의 역사화, 두 개의 신체, 고통의 역치와 문화적 배경, 신체의 지배, 성의 해방과 목록화 그리고 권력, 제도에 대한 의심도 제도에 속함


제4장 (바르트) - 소쉬르의 징후/상징/기호, 랑그(langue)/스틸(style)/에크리튀르, 징후가 없는 언어 사용, 저자의 죽음, 텍스트와 독자, 에크리튀르의 영도


제5장 (레비-스트로스) - 사르트르와 논쟁, 이항대립, 친족관계, 증여와 답례의 반복


제6장 (라캉) - 거울 단계, 오이디푸스, 정신분석적 대화, '나(je)'와 '자아(moi)'의 양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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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adhi(眞我) 2016-03-04 18: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처럼 철학을 모르는 이에게 적합한 책인가보네요. 책을 한 권만 읽고 다 아는 것처럼 구는 ㅋㅋㅋ 딱 제 얘기같아서 마구 찔립니다.

아무 2016-03-04 20:53   좋아요 0 | URL
저도 마찬가지죠ㅎㅎ 할 수 있는 건 더 알려는 마음을 다잡는 것뿐..^^;; 입문서로는 좋은 책인 것 같아요. 쉽게 설명해주고 더 알고 싶은 호기심도 불러일으키는.. 참고도서도 알려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제국의 위안부 - 식민지지배와 기억의 투쟁
박유하 지음 / 뿌리와이파리 / 201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박유하 교수가 국민참여재판을 신청하면서 삭제판을 무료배포하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이 책을 찾아보지 않았을 것이다. 텍스트를 제대로 읽지 않고 지레짐작하는 것은 언제나 위험을 수반한다. 짧게 인용된 표현의 앞뒤만 잘라내도 마음대로 이용당할 수 있는 것이 언어이기 때문에 그렇다. 나로서는 이번 사태의 본질을 알고 싶었고, 이 책의 어떤 부분이 '위안부' 분들의 분노를 사게 되었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다. 이런 때에 삭제되기 전의 초판을 빌릴 수 있었다는 게 다행인 듯 싶다.


이 책에 대해서 한줄평을 쓰라고 한다면 나는 아마 이런 식으로 적을 듯하다. '문제의식은 좋았으나, 정작 '제국'이 없다.' 이 책이 겨냥하고 있는 대상은 흔히 우리에게 각인되어 있는 '위안부'의 이미지이고, 그러한 이미지를 당사자에게 덮어씌운 정치세력(좁게 본다면 정대협)이다. 결국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위안부'는 우리가 생각하는 단일한 형태가 아닌 매우 다양한 형태로 존재했으며, 이는 단순히 일본군의 직접적인 억압이 아니라 식민지로 표상되는 제국주의의 모순적인 구조에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일반 사람들의 통념과 배치된다는 점에서 자극적이기도 하고, 쉽게 수긍이 가지 않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앞부분에서 저자가 가장 즐겨 인용하는 것은 90년대에 정대협에서 펴낸 '위안부'들의 증언이다. 그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논지가 전개되고 있기 때문에 저자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게 되는데, 오히려 중간에 어줍잖게 소설이나 영화를 자료로 활용하는 것이 오히려 독이 되는 것 같다.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전세계적으로 존재했던 위안부 문제가 아닌, 일본이라는 제국에 속해 있었던 '위안부'의 존재다. 여기서 저자가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위안부'와 정신대는 전혀 다른 개념이고(정신대는 국가총동원법에 따라 교육제도 안에 있던 사람들을 연행한 것이라고 나온다), '위안부'를 직접적으로 모집한 주체는 군인이 아니라 업자들이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그들의 증언을 토대로 일제 강점기의 '위안부'가 갖고 있던 총체적인 모습을 재현하고자 하며, 획일화된 기억이 아닌 총체적인 기억의 복원이 그 뒤에 숨겨진 '제국'의 모순을 똑바로 볼 수 있게 해줌을 강조하려는 듯하다. 하긴, 같은 '위안부'였어도 이들이 처해있던 장소와 조건이 다르고 사람이 각각 달랐을 것인데, 어떻게 그들의 모습이 하나의 이미지로 정형화될 수 있겠는가. 더욱이 식민통치 속에 억압받는 민족이면서 외부에는 '일본의 2등 시민'으로 인식되는, 이러한 이중성을 양산해낸 식민지 구조에 '위안부'의 비극이 존재한다고 이 책은 말하고 있다.


그러나, 저자의 굉장히 풍부한 사료 연구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갖는 문제점은 상당히 많아 보인다. 저자는 소위 정대협 등의 단체들에 의해 제공되어 굳어진 '위안부'의 이미지를 깨고 총체적인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그랬는지, '위안부'의 동원이 대부분 '업자'들에 의해 이루어진 것임을 지나치게 많이, 반복적으로 강조한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저자의 의도였던 '위안부'의 총체적인 모습이 흐려지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이 와중에 저자가 끊임없이 지적하는 것 중 하나는 일본이 식민지 사회에서 구축한 제국주의적 질서와 계급 차별, 그리고 가부장제인데, 이것이 어떤 모순을 생산해서 어떻게 작용해 '위안부'가 생겨나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매우 적다. 기껏해야 이 책의 제4부 '제국과 냉전을 넘어서'의 한 꼭지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이 전부다. 그러다보니 '직접적인 책임은 업자에게 있다'는 주장만 강조되는 결과를 낳게 된 것이다. 게다가 이러한 고정적 이미지를 만들어낸 주범인 정대협을 지나치게 의식한 나머지, 정대협 비판에 지나치게 치중해 있거나 고정된 이미지에서 벗어난 사례에 너무 집중한 감이 있다. 마지막으로 일본에 대한 저자의 신뢰가 확고하다 못해 순진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는데, 뭐 책이 쓰여진 시기와 달리 지금은 평화헌법이 위태위태하니 그럴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도 했다. 


사실 이 책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것은 오늘날까지 우리 머릿속에 그려지는 '위안부'의 이미지를 주입한 정대협과 진보세력이다(그래서 정대협이 더욱 발끈해서 소송까지 제기한 게 아닐까). 자신의 입맛에 맞는 사실들만을 선별적으로 수용하고 공개하면서 피해 당사자들에게 '민족'과 '이념'의 도구가 되도록 조장했다는 것인데, 내가 보기엔 이 책에서 보이는 과거 일본의 행적 역시 오해의 여지를 충분히 남겼다는 점에서 잘한 건 없고, 일본 내부도 서로 분열하는 와중에 '위안부' 문제를 현재의 전후일본에 대한 인식문제로 치부하면서 본질에서 멀어진 감이 있다. 지금은 일본 사회가 점점 더 우경화되는 듯한 상황에서, 저자가 기대하는 일본 정부의 새로운 조치가 가능할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리뷰가 더 산으로 가기 전에 논란이 되고 있는 표현들에 대해 잠시 언급하자면(그렇다. 언제나 그렇듯, 결국에는 표현이 문제다), '동지적 관계'라든가 '신체적,정신적으로 위안을 주는...', '애국하는..'과 같은 표현이 사용된 맥락은 일본이 구축한 제국적 질서 아래에서 조선인은 일본과 표면적으로 그런 관계를 성립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맥락과 저자의 논조를 따라서 읽으면 왜 이런 표현을 썼는지 이해는 가는데... 그래도 논란의 여지가 있는 표현을 피하는 것이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정대협이 '위안부' 당사자들의 개별적인 목소리를 무시한다는 비판을 하는 저자가 정작 그들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은 표현을 쓰는 아이러니라니.. 이런 표현이 결국 비판적 논의의 장을 흐리고 본격 명예훼손 소송의 장을 열었다. 국민참여재판이 제대로 이루어지긴 할지, 아니, 무료배포된 판본을 제대로 읽고 오는 판사, 검사, 배심원이 있을지 모르겠다..


저자의 문제제기는 분명 수긍할 법하지만, 비판의 여지가 충분히 있고, 좀더 알아봐야 할 주제이기도 하다. 이 책이 무엇보다 크게 실패한 것은 일본의 태도 변화에 대한 낙관적 전망, 그리고 제국주의의 모순적 구조를 파헤치지 못한 점이 제일 클 것이다. 하지만 저자의 자료조사 범위는 상당히 넓어 여러모로 참고할 만한 인용자료들이 있었다. 출간 후 옹호 및 비판이 굉장히 활발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옹호 쪽에서는 정승원 연구원의 기고문(4회), 비판 쪽에서는 정승환 부교수의 논평(6회)이다. 인터넷에 따르면 저자가 정승환 부교수의 논평에 대한 반박도 기고했다고 하는데, 이런 식으로 주장의 타당성이나 신뢰성을 따져가는 논의가 더더욱 필요한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방금 언급한 논평들은 인터넷으로 확인할 수 있는데, 저걸 읽기 전에 내가 먼저 해야 할 일은 반납하기 전에 체크해야 할 부분을 다시 찾아 타이핑하는 일이다...


+) 꼬투리 잡는 심정으로 말하자면, 이 책에서의 문장부호 사용이 상당히 조잡했다. 열어놓고 안 닫는 경우는 부지기수고... 그리고 인용방식이 처음에 저자와 연도만 밝혀놓고 이후에는 쪽수만 괄호로 표기하는 식이어서, 이게 어디서 발췌한 건지를 찾기가 굉장히 난해했다. 이럴 거면 차라리 각주를 달아라... 제2판의 PDF 파일을 확인하진 않았는데, 이건 안 바뀌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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