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갈리아의 딸들
게르드 브란튼베르그 지음, 히스테리아 옮김 / 황금가지 / 199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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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페미니즘에 대한 논의가 뜨겁다. 원래도 뜨거웠지만 일베나 소라넷과 같은 이슈 때문에 더욱 거세진 듯하다. 나는 오래 전부터 페미니즘에 대해 알아야겠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주변에 관심(정서나 태도가 아닌, 학문으로서)을 갖고 있는 사람이 없어 어디서부터 보아야 할 지 막막했고, 그런 주제로 대화를 나눌 기회도 없었다(보통 그런 주제는 대화에서 배척당한다). 말하자면 <이갈리아의 딸들>은 내가 페미니즘에 입문하기 위해 찾은 책이었던 것이다.


이 책을 내 마음대로 '페미니즘 소설'이라고 분류한다면, 나의 평가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먼저, '페미니즘' 소설로서 이 책은 훌륭한 입문서의 역할을 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이 소설이 품고 있는 문제의식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77년에 나온 책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맨움'이 받는 억압과 차별은 현대 사회의 여성에게 주어지는 시선과 별반 다르지 않다. 작가는 소설 곳곳에 현대 사회가 부여하는 차별의 모습을 심어두었다. 그런 모습들이 구시대적으로 느껴지지 않고 현재의 모습처럼 보인다는 것은, 한 편의 블랙코미디를 생각나게 한다.


누가 네가 되고 싶은 것이 될 수 없다고 말했니? 내 말은, 네가 현실적이어야 한다는 거야. 꿩도 먹고 알도 먹을 수는 없어. 네가 아이를 갖는다면, 아이를 키우는 일밖에 할 수 없는 거야. 잘 들어라, 페트로니우스. 어렸을 때 나도 뭐가 될 것인가에 대해 원대한 꿈을 갖고 있었단다. 바다의 낭만, 그것 때문에 네가 괴로워하는 거지. 뱃사람의 위업에 대한 모험 이야기는 이제 그만 읽고 대신 소년들을 위한 책만 보도록 해라. 그러면 네 꿈이 좀더 현실적으로 될거다. 바다에 가고 싶어하는 맨움은 하나도 없어. (14쪽)


맨움을 억압하는 것은 소위 보수적이라고 불리는 움들만이 아니다. 하류 계층, 노동 계급을 지지하고 그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스파크스주의(그러니까 마르크스주의) 역시 맨움을 신경쓰지 않는다. 소위 진보적이라고 불리는 움들도 그들의 존재를 무시하고 차별을 당연시해 왔다는 것이다. 소설은 성 역할을 뒤집어 보여주면서 역사적으로 남성이 여성을 얼마나 멸시하고 차별해왔는지를 보여준다. 물론 자연이 우리에게 부여한 신체적 조건 때문에 그런 것 아니냐는 말을 할 수도 있겠지만, 이 책은 단호하게 말한다. 그것은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기 위해 취사선택한 원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양성 간의 이런 불공평한 노동과 부의 분리를 정당화하기 위해 현재의 우리 모권제 사회는 놀랍고도 자기모순적인 이데올로기를 발전시켰습니다. 자연의 불평등─그것은 사실상 맨움이 (자연적으로) 움에 비해 일반적으로 더 크고 더 힘이 세다는 사실에 근거한다고 여겨집니다─을 고치는 것이 문명의 임무라고 합니다. 이런 불공평을 개선한다는 문명이 실제로는 수세기 동안 맨움의 종속에 의해 존속해 왔습니다. 움은 더 강한 육체적 훈련과 더 나은 영양 상태로 훨씬 더 좋은 환경에서 양육되었고 그 결과 오늘날 움보다 작고 약한 맨움들이 많아졌습니다. 다른 포유동물과 인간을 비교해 보면, 암컷과 수컷의 크기 차이가 움과 맨움의 차이보다 더 크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문명은─이른바 <문명>은─ 맨움을 불구자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방법으로 움이 자연의 불공평함을 고치는 데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맨움이 움보다 힘이 세다는 사실을 계속 입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때문에, 맨움에게 가장 힘든 일을 하라고 요구합니다! (288쪽)


의문이 잠시 들었던 것은, 과연 여성이 후천적으로 신체적 차이를 극복하는 것이 가능할까라는 것이었다. 역사적으로 본다면 페미니즘의 등장은, 인간이 문명을 구축해 자연으로부터의 위협에서 벗어났다는 것, 그리고 기술의 발달과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물론 개인적인 편견일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버지니아 울프는 역사적으로 여성 예술가가 등장하지 않은 이유를 자신만의 공간과 고정적 소득이 부재했기 때문이라고 말했었으니.


남성과 여성의 뒤집기, 이 시도 자체가 당시에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은 분명하다. 현재 한국에서도 이런 식의 낯설게 하기가 전혀 친숙하지 않았고, 지금도 그러하므로. 내가 기대했던 페미니즘에 대한 학문적인 접근은 찾기 어려웠지만(역자 후기에 보면 여성학의 쟁점과 역사에 대한 다양한 패러디가 있는 듯하지만 나는 그 중 일부만 발견한 것 같다), 너무 익숙해져 그것이 차별인지 몰랐던, 혹은 알면서도 무시해왔던 것들을 새롭게 보는 시각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훌륭한 입문서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페미니즘 '소설'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 작품이 훌륭한 작품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것은, 간단히 말하자면 너무 '뻔하다'는 것에 있다. '남성과 여성의 역할 뒤집기'라는 공식으로 이 책의 모든 것이 설명된다는 것이다. 이 소설의 전체를 지배하는 것은 남성과 여성의 의미체계의 알레고리들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소설에서 알레고리를 구사하는 것은 일종의 위험 부담을 내포한다. 말하려는 것이 너무나 극명하게 드러나 뻔한 이야기가 될 위험성이다. 더욱이 2부로 넘어가게 되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너무 강해서 서사를 압도해 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이갈리아의 딸들>이 전하려는 메시지는 분명해졌으나, 그것이 소설로서 훌륭하다고 말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나는 물음표를 남길 수밖에 없다. 애초에 이 책의 목적이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것이라면, 페미니즘에 대한 일종의 삐라로써 기능하기 위한 것이라면 이 논의 자체가 의미 없는 것이겠지만.


더욱이 '남성과 여성의 역할 뒤집기'라는 공식마저 모호해지는 순간이 종종 오는데, 특히 그로와 페트로니우스의 관계에서 그렇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로가 페트로니우스의 아이를 가졌음을 고백하는 장면에서 그가 보이는 모습은 '맨움=여성'이 아닌 한 남자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둘의 모습은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두 인간의 모습이다. 물론 페트로니우스의 거부감이 맨움이 전통적으로 갖는 자녀양육에 대한 부담이나 거부감에서 온 것이라고 설명할 수는 있겠지만, 그의 도피는 소위 저질러놓고 도망가는 남자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다고 느꼈다. 오직 성적 권리만 쫓고 책임은 회피하는 움의 모습이 보인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맨움과 움의 정체성이 이 둘 사이에서 흐려졌다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이 책이 주는 메시지는 분명하고, 여전히 유효하다. 30여 년 전에 나온 책의 메시지가 오늘날까지 유효하다는 것은 비극으로 다가온다. 특히 최근의 이슈들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관심을 주어야 할 영역이며, 메시지가 변질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일 것이다. "맨움해방주의는 인본주의(Huwomism)입니다!"라는 외침이 무색하지 않도록. 이 책 덕분에 나는 더 알아야겠다는 확신을 굳힐 수 있게 되었다.



덧붙임 1)

혹시나 현대 사회는 그래도 점점 성평등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힐러리 여사가 현재 미국의 유력학 대권 후보로 지목받고 있으며, 우리나라도 최초로 여성 대통령(... 긴 말은 생략한다)이 나오지 않았느냐는 생각을 품을 수도 있겠다. 아직 개선할 점이 많지만 그래도 점점 나아지고 있는 것 아니냐고.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다음 글을 읽어볼 것을 권한다. 페미니즘이 갈 길은, 아직도 멀고 험하다.


물론 오바마가 성취한 위업은, 좀더 야심차고 재능 있는 개인들로 하여금 차별받던 그 집단적 범주에서 벗어나서 한층 더 대담하게 오바마가 했던 일을 따라하려고 노력하게 만들 겁니다. 더구나 그와 같은 방식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받게 되는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저항을 완화시킬 뿐 아니라 그에 대한 어떤 이의제기도 불식시키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성공한 사람들이 이룩한 진전이 곧 '그들과 같은 범주에 속하는 사람들'을 열등한 사회적 지위로부터 벗어나게 끌어올려서 그 범주에 속하는 모든 구성원들에게 폭넓은 삶의 전망들을 열어주지는 않을 겁니다. 사실 마가렛 대처가 오랫동안 준-독재적인 통치를 행사했던 상황도 정작 여성의 사회적 평등을 가져왔던 것은 아니었죠. 오히려 당시 그 상황이 입증했던 점은, 어떤 여성들은 분명 스스로가 남자다움을 과시하는 마초게임에 직접 참여해서 남성들을 물리칠 수도 있다는 사실이었을 뿐이죠.

- 지그문트 바우만,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311-312쪽)


덧붙임 2)

문득 엉뚱한 생각을 했는데, 누군가가 이 책을 읽고 '그래. 여성이 남성을 앞서 우위를 차지하는 세상은 끔찍해. 그러니 여성이 사회에 나서는 것은 용납할 수 없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이 책에서 이름을 따온 메갈리아를 보며 그 사람은 자신의 마음을 굳힐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메갈리아의 등장은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던 여성 차별의 극단적인 반작용이다. 내가 보기에 일베, 소라넷과 메갈리아의 전쟁은 이미 진흙탕 싸움이 되어 무엇이 먼저인지를 논하는 것 자체가 의미없는 일이 되었지만, 왜 이 사회에서 메갈리아가 등장하게 되었는지는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그냥 뜬금없이 일부 '남혐'을 주장하는 여성들이 뭉친 것이라고 개인의 문제로 환원하는 일은, 아무짝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누군가는 진흙탕을 정리하고 다시 물이 흐르게 해야 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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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인간인가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기록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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띄엄띄엄 읽다보니 두 달이 넘게 걸렸다. 중간에 책읽기를 아예 쉬었던 기간도 있고 해서 그런가... 천천히 읽는 것이 이 기록을 대하는 예의일 거라고, 그렇게 스스로를 변명할 따름...


프리모 레비의 책을 사게 된 건 아주 사소한 계기였는데, 황정은 작가가 좋아하는 작가로 몇 번이나 꼽았던 작가였기 때문이다. 이전까지는 그에 대해서 전혀 몰랐기 때문에, 나는 그의 책 중에서 가장 유명한 이 책을 샀다. 그리고 오늘에서야 다 읽고 이렇게 글을 남기는데, 제대로 쓸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다. 중구난방식의 글이 되어버릴지도 모르겠고...


지금 나는 아우슈비츠가 존재했었다는 사실만으로, 우리 시대에 그 누구도 신의 섭리에 대해 말할 수 없으리라 생각한다. (241쪽)


홀로코스트는 인류 역사에 기록될 최대의 절망과 잔악함으로 여전히 맴돌고 있다. 얼마 전 EIDF에서 <홀로코스트의 아이들>이라는 다큐멘터리가 개봉하기도 했지만, 반백년이 넘는 시간이 지나서도 끊임없이 환기되어야 하고 탐구해야 할 대상이기도 하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끊임없는 환기와 소환에 '지겹다'는 반응을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 광기의 시대는 이미 막을 내렸다는 인식 때문일까. 하지만 정말 이 시대가 그런 광기에서 벗어난 시대인지는 의문을 제기해야 할 것 같다. 광기는 좀더 그럴듯하게 포장되었을 뿐, 여전히 우리 주변에서 맴돈다.


파시즘은 죽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가면을 쓰고 모습을 숨기고 있었을 뿐이다. 파시즘은 새옷을 입고 다시 나타나기 위해 변신을 꾀하고 있다. 원래의 모습을 잘 알아볼 수 없게, 좀더 존경받을 수 있게, 그리고 파시즘으로 초래된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파국에서 벗어난 새로운 세계에 걸맞게 새로운 모습으로. (269쪽)


작가는 이탈리아의 파시즘에 저항하는 단체에서 활동하다 붙잡혀 아우슈비츠로 보내졌다. 그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던 생활은 참담하고, 끔찍하기도 해서 책장을 넘기는 것이 두려워질 정도다. 하지만 작가는 자신의 수용소 생활을 공포와 분노의 감정으로 덧칠하지 않았다. 이성과 사유의 언어로 담담하게 써내려갈 따름이다. 이 기록이 가지고 있는 비극성은, 수용소 생활을 통해 이끌어내는 인간에 대한 성찰과 사유를 담담한 어조로 서술한다는 것에 있다.


1월 26일. 우리는 죽음과 유령들의 세계에 누워 있었다. 문명의 마지막 흔적은 우리 주위에서, 우리 내부에서 사라져버렸다. 승승장구하던 독일인들이 시작했던, 인간을 동물로 만들려는 작업은 부패한 독일인들에 의해 완성되었다.

인간을 죽이는 건 바로 인간이다. 부당한 행동을 하는 것도, 부당함을 당하는 것도 인간이다. 거리낌 없이 시체와 한 침대를 쓰는 사람은 인간이 아니다. 옆 사람이 가진 배급 빵 4분의 1쪽을 뺏기 위해 그 사람이 죽기를 기다렸던 사람은, 물론 그의 잘못은 아닐지라도, 미개한 피그미, 가장 잔인한 사디스트보다도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전형에서 멀리 떨어진 사람이다. (263쪽)


그러나 그들을 괴롭혔던 것은 나치 친위대뿐이 아니었다. 수용소는 울타리를 통해 외부 세계와 격리되었고, 그 안에서도 외부 세계와 격리된 새로운 세계와 질서가 생겨났다. 그 와중에 그들은 연대하지 못하고 붕괴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노동과 고통, 그리고 굶주림 때문이었다. 유대인이 유대인을 감독하며 통제하기도 하고, 더 편안하고 덜 허기진 삶을 위해 주변 사람들을 교묘하게 이용해 자신의 명성을 높이는 사람도 있었으며, 도둑질과 다툼, 밀거래가 끊이지 않았다. 수용소라는 '존재방식'이, 그들이 지금까지 품고 있던 '인간'에 대한 정의를 무너뜨리게 만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과연 수용소에서 살아남기 위해 동포를 배신한 유대인을,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지니고 있던 선을 넘은 사람들을 비난할 자격이 있는 걸까. 이 말은 위험한 말이지만, 결국 악이라는 것이 한 개인의 광기가 아니라 평범한 것임을, 악은 어디에나 존재할 수 있고 멀쩡한 사람을 덮칠 수 있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 같다. '작가의 말'에도 나오지만, 수용소 역시 광기의 산물이 아닌, '엄밀한 사유를 거쳐 논리적 결론에 도달하게 된, 이 세상에 대한 인식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러한 절도 행위나 배신에 대해 도덕적인 판단을 내리진 않는다. 다만 이렇게 쓰고 있을 뿐이다.


나는 '선'과 '악', '옳음'과 '그름'이라는 단어가 수용소에서 어떤 의미를 지닐지 한번 생각해보라고 여러분에게 권하고 싶다. 우리가 스케치한 그림과 위에 예시한 예들을 토대로 세상의 일반적인 도덕이 철조망 이쪽 편에서 얼마나 효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 각자 판단해보시기를. (130쪽)


이 책은 단순히 홀로코스트에 대한 담담한 기록으로 끝나지 않는다. 방금 위에서 고통과 공포의 감정을 최대한 절제하며 담담히 서술한다고 했지만, 그에 못지 않게 이 책은 문학적인 표현들로 가득하다. '작품 해설'을 쓴 서경식 교수의 말을 빌리자면, 이 책의 줄기에는 단테의 <신곡>과 그리스 로마 신화가 자리하고 있다. 작가는 <신곡>을 통해 지옥의 모습을 보여주는 단테처럼, 아우슈비츠에서 나타나는 지옥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하지만 그 지옥 안에서도,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는 그 세계에도 그가 인간에 대한 끈을 놓지 않은 것은, 로렌초나 알베르토와 같은 사람들이 '인간다움'이라는 의미의 생존을 증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렌초의 이야기는 아주 잠깐 등장하지만, 그가 끝까지 지옥에서 버틸 수 있게 해주었던 작은 힘이 되었다는 점에서 인상적이었다.


(...) 나는 지금 내가 이렇게 살아 있게 된 것이 로렌초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물질적인 도움 때문이라기보다는 그의 존재 자체가 나에게 끝없이 상기시켜준 어떤 가능성 때문이다. 선행을 행하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평범한 그의 태도를 보면서 나는 수용소 밖에서 아직도 올바른 세상이, 부패하지 않고 야만적이지 않은, 증오와 두려움과는 무관한 세상이 존재할지 모른다고 믿을 수 있었다. 정확히 규정하기 어려운 어떤 것, 선(善)의 희미한 가능성, 하지만 이것은 충분히 생존해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187쪽)


이 책에 대해서 아쉬운 점은 딱 한 가지다. 책에 자주 등장하는 수용소와 관련된 용어들에 대한 정리가 맨앞이나 뒤에 있었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것이다. 책에서는 용어가 최초에 등장할 때 설명을 붙인 뒤에는 따로 주를 달지 않았는데, 뒤로 갈수록 기억은 안 나고 그 용어에 대한 설명이 어디에 있었는지 찾지 못해 이해가 어려운 경우가 종종 있었다. 물론 이것은 내가 너무 띄엄띄엄 책을 읽어 기억이 희미해진 탓도 있겠지만...


나로서는 이 책의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글을 쓰기에는 역부족이다. 이 책이 품고 있는 가치는 내가 쓴 것보다 훨씬 무궁무진하다. 아우슈비츠에서 이미 파괴되어 버린 '인간'의 척도를 다시 성찰하는 작가의 모습은 날카롭고, 그 자체로 인간적이다. 그리고 지금 나는, '인간'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상실한 지금에 서서, 이 책을 딛고 서서 묻고 싶다. 무엇이 인간인가?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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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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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채식주의자


첫인상을 요약하자면, 피가 한 줌 흩뿌려진 '내 여자의 열매' 같았다. 이 작품의 초점은 갑작스럽게 육식을 중단한 '나'의 아내, 영혜에게 집중되어 있다. 왜 그녀는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했는가. 꿈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나오지만, 그것은 육식으로 대표되는 동물성을 거부하겠다는 한 동물의 몸부림처럼 보인다. 이 세계는 살아남기 위해서 반드시 육식을 해야 한다고 인간에게 강요하는, 그런 세계다. 그리고 인간들은 그것이 정언 명령인 양 육식의 논리, 즉 동물성의 규칙을 지키며 살아간다. 육식의 논리는 잡아먹는 자와 먹히는 자의 상하 관계를 생산하고, 이를 거부하는 영혜는 채식주의자, 라는 이름으로 규정되어 핍박받는다. 그렇다면 영혜는 정말 채식주의자인가. 영혜는 소위 건강을 위해서나 동물을 보호하기 위해 채식을 하는 채식주의자와는 다르다. 그녀가 채식을 하는 것은 잔혹함과 폭력성을 품고 있는 동물성 자체에 대한 거부이기 때문이다. 이런 채식으로의 변화에는 어린 시절 겪었던, 개에 대한 폭력의 경험이 자리하고 있다.


"네 꼴을 봐라, 지금. 네가 고기를 안 먹으면, 세상사람들이 널 죄다 잡아먹는 거다. 거울 좀 봐라, 네 얼굴이 어떤가 보란 말이다." (60쪽)


하지만 인간은 이 세계의 질서를 거부하는 자를 가만두지 않고 잡아먹으며 살아왔다. 아니, 생존해왔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그것이 약육강식이라는 논리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이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고기를 먹이려던 장인의 몸부림은, 자신의 혈육을 이 세계에서 살아남도록 하려는 어떤 보호본능과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이미 동물의 삶을 거부하기 시작한 영혜에게, 그것은 죽음과도 같은 것이다. 결말부에서 밖으로 나와 환자복 상의를 벗고 있는 영혜의 모습은 광합성을 연상시키는데, 이는 그녀가 단순히 동물성을 거부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식물성을 지향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다만 의문이 드는 것은, 왜 그녀가 동박새를 물어뜯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동물성의 폭력에 대한 작은 저항일까.


2. 몽고반점


이 소설 전체를 지배하는 키워드는 탐미와 관능인 것 같다. 여기에서 초점은 영혜의 형부인 '그'에게로 옮겨간다. 비디오 아트를 제작하는 그는 오로지 대상의 이미지를 탐(구)하는 사람으로 보인다. 그런 그를 사로잡은 몽고반점의 이미지, 그리고 영혜의 이미지는 그에게 끝없는 창작과 소유의 욕구를 불러 일으키는데, 그의 동물적 욕망을 들끓게 하는 것이 다름아닌 영혜의 식물성이라는 것은 참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식물성의 이미지는 바로 몽고반점, 성년에 이른 어떤 동물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는 몽고반점으로 집약된다. 


반점은 과연 엄지손가락만한 크기로 왼쪽 엉덩이 윗부분에 찍혀 있었다. 어떻게 저런 것이 저곳에 남아 있는 것일까.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약간 멍이 든 듯도 한, 연한 초록빛의, 분명한 몽고반점이었다. 그것이 태고의 것, 진화 전의 것, 혹은 광합성의 흔적 같은 것을 연상시킨다는 것을, 뜻밖에도 성적인 느낌과는 무관하며 오히려 식물적인 무엇으로 느껴진다는 것을 그는 깨달았다. (101쪽)


아마 그의 욕망은 자신과 전혀 다른 어떤 대상에 대한 호기심과 소유욕, 더 나아가면 파괴의 욕구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나체의 몸에 꽃을 그린 영혜를 탐하고 취하는 것은 자신과 다른 대상의 이미지를 취하고자 하는 동물의 욕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정말 하고 싶었어요...... 그렇게 하고 싶었던 적이 없었어. 그 사람 몸에 뒤덮인 꽃이요...... 그게 날 못 견디게 했던 거야. 그것뿐이에요." (131쪽)


영혜는 이제 동물성을 거부하는 것에서 나아가 식물성을 지향한다. 그리고 자신의 본질과 전혀 다른 식물성에 대한 지향은 식물성을 탐닉하는 것으로 변하는데, 몸에 꽃을 그리고 온 형부와의 결합을 허락한 것은 식물성의 이미지를 욕망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는 그녀의 식물성을 소유하기 위해 자신에게 식물성의 이미지를 덧씌우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모습을 본 다른 사람들은 "안돼 보여. 온몸에 꽃을 그려놓은 형 모습이......"(137쪽)와 같은 반응을 보이고, 식물성의 이미지를 욕망하는 것조차 불허한다. 식물성을 탐했던 인간은, 정신병원으로 끌려가 동물성의 법칙을 주입받고 교정되어야 할 대상일 뿐이다.


읽으면서 그가 찍고 싶어했던 남녀의 교합으로 점철된 '몽고반점 2'는 절대 찍힐 수 없을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그래서인지 뒷부분을 읽으면서 뜨악했던 순간이 있었다. '몽고반점 2'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굉장히 관능적으로, 때로는 퇴폐적인 모습으로 그려지기까지 한다. 자신이 욕망하고 소유하고자 하는 자기파괴적인 충동이 인상적이기도 하면서, 어쩌면 그것 역시 동물성의 한 면모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이 단편의 흐름과 상관없이, 표현의 자유에 대한 최근의 이슈가 잠시 떠오르기도 했다. 난 예술에 있어서는 표현의 자유에 제한을 두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쪽이지만, 분명히 많은 고민과 논의가 필요한 지점이긴 하다. 이미 그 논의는 확산되지 못하고 수렴되어 버렸지만...


그때까지 그는 자신이 사회적 이슈에 대한 작품으로 화를 겪을 수는 있으리라는 상상은 해본 적이 있었지만, 음란물을 제작한 자로 낙인찍힐 수 있다는 생각은 미처 해보지 못했다. 작품을 만들며 그는 언제나 자유로웠으므로, 자신에게 무한정의 자유가 허락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조차 실감한 적이 없었다. (75쪽)


3. 나무 불꽃


제목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보진 않았는데, 지금 쓰면서 떠오르는 이미지는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타오르는 불꽃이다. 인간이라는 종이 나무로 대표되는 식물을 파괴하는 불로 인해 이 세계에서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을 표상하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들고... 작품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이제 동물이 아니야 언니.

중대한 비밀을 털어놓는 듯, 아무도 없는 병실을 살피며 영혜는 말했다.

밥 같은 거 안 먹어도 돼. 살 수 있어. 햇빛만 있으면.

그게 무슨 소리야 네가 정말 나무라도 되었다고 생각하는 거야? 식물이 어떻게 말을 하니. 어떻게 생각을 해.

영혜는 눈을 빛냈다. 불가사의한 미소가 영혜의 얼굴을 환하게 밝혔다.

언니 말이 맞아...... 이제 곧, 말도 생각도 모두 사라질 거야. 금방이야.

영혜는 큭큭, 웃음을 터뜨리고는 숨을 몰아쉬었다.

정말 금방이야. 조금만 기다려, 언니. (186-187쪽)


식물성의 이미지를 탐했던 영혜는 이제 식물이 되려 한다. 그러나 동물이 식물로 변하는 방법은, 죽음뿐이다. 그런 영혜를 바라보는 언니는 동물성의 세계에서 살아왔던 자신의 삶이 무너진 것을 느낀다. 그것은 어떤 질병의 형태로 오는데, 이 세계가 보았을 때 그것은 떼어내기만 하면 되는 폴립의 형태로 존재한다. 끝없이 식물이 되려는 영혜의 모습이 동물성의 세계에서 살아남고자 인내하면서 쌓여왔던 내면의 고통과 압박감을 수면 위로 드러내게 만들었다. 어떻게든 견뎌내고자 세계의 질서에 순종했던 그녀의 삶은 결국 죽은 것과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봄날 오후의 국철 승강장에 서서 죽음이 몇달 뒤로 다가와 있다고 느꼈을 때, 몸에서 끝없이 새어나오는 선혈이 그것을 증거한다고 믿었을 때 그녀는 이미 깨달았었다. 자신이 오래 전부터 죽어 있었다는 것을. 그녀의 고단한 삶은 연극이나 유령 같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그녀의 곁에 나란히 선 죽음의 얼굴은 마치 오래전에 잃었다가 돌아온 혈육처럼 낯익었다. (201쪽)


세계가 가하는 고통이 너무나 극심했던 어느 새벽, 아이의 젖내와 배냇내가 배어있는 보라색 면티셔츠마저 그녀에게 안도감을 주지 못했던 새벽에 그녀는 아파트 뒷산을 오르고, 그곳에서 고통과 두려움과 함게 '이상한 평화'를 느낀다. 그리고 새벽마다 빈 욕조 안에서 '캄캄한 숲이 덮쳐'오는 것을 본다. 그것은 동물적인, 그래서 폭력적인 세계에서 벗어나고 싶은 무의식적 욕망일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영혜처럼 이 세계를 거부할 용기가 없다. 그래서 그녀는 '어쩌면 꿈인지 몰라'라고 되뇌며 영혜를 병원으로 보내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이 연작소설을 매듭짓는 성과를 거두고 있긴 하지만, 세 편 중에선 가장 인상적이지 않았던 작품이었다. 한강스럽지 않았던 작품들 뒤에 갑자기 한강의 색채가 물씬 배어든 작품이 나온 것 같았다고나 할까... 세 작품 중 한강 특유의 서정성이 돋보여서 이질적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좀더 처절하지 못해서, 격렬하지 못해서 만족하지 못했나 싶기도 하고...


사실 오늘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영혜의 언니와 같은 삶을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세계의 질서를, 동물적이어서 폭력적이고 잔혹한 그 질서를 차마 거부할 생각을 못하는 사람들. 거부하면 죽음의 길만이 드리워질 것을 알기에 그냥 생존하고 있는 사람들. 어쩌면 세계는 이미 저항할 수 없을 만큼 동물성 그 자체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식물의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이 필요한 것일까.


별점에 대해 굉장히 고민을 많이 했는데, '몽고반점'이 주었던 강렬한 인상을 생각해서 네 개를 매기기로 했다. 사실 '몽고반점'이 워낙 강렬해서 다른 두 작품의 빛이 바래지는 것 같기도 하다. '채식주의자'도 되게 선명한 작품인데도.. 지금까지 읽었던 한강의 작품(그래봤자 장편 두 권이지만)과 다른 면모가 보여서 인상적이었던, 그래서 궁금해지게 만든 작품이기도 하다. 앞으로 더 찾을 시간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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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당 (무선) - 개정판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9
레이먼드 카버 지음, 김연수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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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은 것은 정확히 말하면 세계문학전집 판본이 아니고, 그 전에 나온 판본(2007년)이었다. 어렸을 때 읽었던 모파상이나 오 헨리의 단편을 제외하면 외국작가의 단편집을 읽은 것은 이번이 처음인데, 읽으면서 느꼈던 것은 한국문학에서 말하는 단편과 외국문학에서 말하는 단편은 장르가 아예 다른 것 같다는 것이었다. 외국문학이 단편(short story)이라는 이름처럼 짧은 이야기를 통해 한 단면을 보여주는 스케치라면, 한국문학의 단편은 삶의 한 단면을 더 깊게 파고들고자 하는, 일종의 짧은 장편(novel)을 지향하는 소묘와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개인적인 생각일 수도 있겠지만, 카버의 <대성당>을 읽은 뒤 내가 했던 생각은 이런 것이었다.


<대성당>에는 총 열두 편의 단편이 실렸다. 각 단편들의 분량은 제각각이라 '이거 장편(掌篇)소설인가?'하고 생각했던 이야기도 있고, 길다는 생각이 들었던(물론 분량을 확인해보니 단편의 분량이었다) 이야기도 있었다. 각기 다른 직업을 가지고 있고, 다른 환경에서 살고, 다른 인간관계를 맺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 읽고 나서 이 열두 편에 나오는 인물들의 삶은 하나로 통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한숨을 쉬더니 몸을 뒤로 기댄다. 그녀는 손을 내게 내맡겨둔다. "이렇게 말할 거예요. '꿈은 아시다시피 빨리 깨면 좋은 거지요.' 그렇게 말할 거예요." 그녀는 무릎까지 치마의 주름을 편다. "누가 물으면 그렇게 대답할 거예요. 하지만 이젠 그렇게 묻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그녀는 다시 숨을 내쉰다.

- '굴레' (p310)


굳이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미국 중산층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들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중산층'이라는 말이 얼마나 폭력적인 말인지, 얼마나 에둘러 하는 말인지를 생각하면 이렇게 정리하고 싶지는 않다. 작가가 잠시나마 보여주는 이들의 생활은, '중산층'이라는 말로 묶어버리기엔 너무나 개별적이기 때문에.


내가 읽은 바에 따르면, 카버의 단편들은 이 사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여기서 이것이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무의미한 것 같다. 그저 작가가 스케치하는 사람들의 모습, 삶의 모습을 따라가며 읽다 보면,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쓸쓸함과 아련함, 찌르르한 떨림이 온다. 이 글을 쓰면서도 읽은 느낌을 어떻게 써야할지 고민이 많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빵 한 조각을 내놓는 일밖엔 없는 것 같다.


"뭘 좀 드셔야겠습니다." 빵집 주인이 말했다. "내가 갓 만든 따뜻한 롤빵을 좀 드시지요. 뭘 좀 드시고 기운을 차리는 게 좋겠소. 이럴 때 뭘 좀 먹는 일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될 거요." 그가 말했다.

-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p141)


가장 좋았던 단편은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과 '대성당', '열'이었다. 생각해보니, 이 세 단편의 공통점은 '공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롤빵으로 나타나는 위로와 공감, '열'로 나타나는 이별의 아픔을 들어주고 위로해주는 웹스터 부인, 맹인과 함께 '대성당'을 그리며 얻게 되는 이해와 공감. 김연수 소설가의 말처럼 그간의 카버 작품과 달리 '낙관적이고 희망적'인 작품들에 끌렸다고 해야 할까. 치밀한 분석과 집착은 보이지 않았지만, 단순한 스케치만으로도 분위기를 형성하는 것에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는 물론 '리얼리즘의 대가'로 불리는 카버의 치밀한 묘사력이 있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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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12-09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회화로 치자면, 제게 카버는 인상파죠. 화가가 보여주는 그 날의 빛, 터치 같다고 할까.
한국 단편이 주로 신춘문예나 등단용으로 활성화돼서 카버식의 단편을 미완성으로 보는 시선이 많았다고 생각해요. 그간 한국 단편은 굉장히 편향적이었죠. 그러니 문단 중심주의, 작가 중심주의가 나올 수밖에 없었던 거고. 요즘은 달라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다행이라고도 생각합니다~ 작가 만큼이나 독자도 다양한 시각과 이해력을 갖춰야 안정적으로 나아지겠죠.

아무 2015-12-09 23:53   좋아요 1 | URL
인상파라는 표현이 스케치보다 확 와 닿네요^^ 확실히 카버의 단편이 신춘문예에 투고되었더라면 지금도 등단작이 되기는 힘들 것 같은... 요즘의 한국 단편들을 보면 미니멀리즘보단 복잡함을 추구하는 경향 같은 게 보이기도 해요.
그나저나 오늘 서울 올라오면서 빨간책방을 듣는데, 이동진 씨가 저랑 똑같이 세 편을 꼽아서 조금 놀랐습니다. 소오름...;; 몇 편을 다시 보고 있는데, 다시 읽을수록 새롭게 보이는 것들도 있고..^^
 
백의 그림자 - 2010년 제43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 민음 경장편 4
황정은 지음 / 민음사 / 2010년 6월
평점 :
절판


리뷰를 시작하는 가장 나쁜 방법이 있다면 그건 바로 '작가의 말'을 인용하는 것이다(feat. 금정연). 황정은은 '작가의 말'에서 이렇게 말했다.


여전히 난폭한 이 세계에

좋아할 수 있는 (것)들이 아직 몇 있으므로

세계가 그들에게 좀

덜 폭력적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왔는데 이 세계는

진작부터

별로 거칠 것도 없다는 듯

이러고 있어

다만

곁에 있는 것으로 위로가 되길

바란다거나 하는 초

자기애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고

다만

따뜻한 것을 조금 동원하고 싶었다

- '작가의 말' 중에서(171-172p)


파리 테러에 대한 뉴스를 들었을 때, 폭력시위다 과잉진압이다로 왈가왈부하느라 본질이 또다시 지워지고 있는 뉴스를 들었을 때, 내가 처음으로 떠올렸던 것은 바로 저 문장이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 세계는 여전히 난폭하구나, 하고.


작년 겨울 <계속해보겠습니다>로 처음 만나게 된 황정은의 소설은 큰 인상을 남기지 않았었다. 다만 좀더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해보고 다른 작품을 찾았을 따름이다. 그런 내가 그녀의 열성적인 팬이 되었던 이유는, 아마 <百의 그림자>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오늘 책을 다시 펼쳤다. 처음 읽은 것은 도서관 책이었으니 이 책은 처음 펼쳐보는 셈이다. 처음 읽는 마음으로 읽어 내려갔다. 나는 수없이 많은 페이지를 접었고 밑줄을 쳤다. 두 번째 독서의 다른 점은, 처음 읽을 때는 미처 보지 못한 것에 주목할 수 있는 시간을 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다시 읽으면서 주목한 것은, 이 세계의 폭력성이 어떤 방식으로 드러나고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가마가 말이죠, 라고 무재 씨가 말했다.

전부 다르게 생겼대요. 언젠가 책에서 봤는데 사람마다 다르게 생겼대요.

그렇대요?

그런데도 그걸 전부 가마, 라고 부르니까, 편리하기는 해도, 가마의 처지로 보자면 상당한 폭력인 거죠.

가마의 처지요?

가마의 처지로 보자면요, 뭐야, 저 '가마'라는 녀석은 애초에 나와는 닮은 구석도 없는데, 하고. 그러니까 자꾸 말할수록 들켜서 이상해지는 게 아닐까요.

- '가마와 가마와 가마는 아닌 것' (38p)


차라리 그냥 가난하다면 모를까, 슬럼이라고 부르는 것이 마땅치 않은 듯해서 생각을 하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라고 무재 씨는 말했다.

언제고 밀어 버려야 할 구역인데, 누군가의 생계나 생활계, 라고 말하면 생각할 것이 너무 많아지니까, 슬럼, 이라고 간단하게 정리해 버리는 것이 아닐까.

그런 걸까요.

- '오무사' (114-115p) 


개체를 무시하고 일반화해 버리는 것, 일부분만을 가지고 모든 것인 양 말하는 것, 그것이 이 세계가 가진 폭력성의 근원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리고 은교와 무재, 전자상가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 상가에는 '가동과 나동과 다동과 라동과 마동으로 구별되는 상가'와 사람들이 있는데, 그냥 '전자상가', '슬럼'이라고 싸잡아 부르는 것, 그래서 별것 아닌 하찮은, 사소한 무리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 그것이 세계가 언어라는 무기로 휘두르는 폭력이 아닐까.


그리고 그림자가 있다. 그림자는 전자상가 사람들에게 짙게 드리워지고, 불쑥 일어나기도 하고, 발을 걸기도, 심지어 그들을 집어 삼키기도 한다. <파씨의 입문>까지 나타나는 황정은 소설의 환상성은, 이 세계의 폭력을 차마 써내려갈 수 없었던 작가의 한 방편이 아니었을까 싶다. 움직이는 그림자의 환상은 그들이 견뎌내는 삶의 쓸쓸함과 아픔을 처연하게, 그리고 생생하게 보여준다. 유곤 씨가 성경을 던져 쥐며느리를 잡는 이유를, 그림자가 일어나는 장면만큼 생생하고 명확하게 보여주는 언어가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무재 씨.

네.

나는 이렇게 차가운 음식 말고 따뜻한 음식이 먹고 싶어요. 국물이요, 먹으면 배가 따뜻해지는, 따끈하고 맑고 개운한 국물이 있는 것을, 듬뿍 먹고 싶거든요, 라고 훌쩍거리며 말하다가 코를 닦고 국수를 마저 먹었다.

- '항성과 마뜨료슈까' (147p)


그들은 따뜻함을 찾는다. 금속처럼 차가운 세계의 폭력에 맞서서, 폭력에 움직이는 그림자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하지만 그들에게 세계에 맞서는 법은 나도 똑같이 느끼고 있다고, 여기도 똑같이 캄캄하다고 공유하고 공감하는 것밖에 없는 듯 보인다. 정전 속에서 컵을 깨뜨린 은교가 무재와 통화하는 장면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내 눈길을 오랫동안 붙잡는다. 그들의 주변을 그림자로 뒤덮어버린 정전 속에서 체념하며 '모르도록 어두워지자'는 은교가 그림자의 심연에 침몰하는 것을 막아주는 것은 '어두워요, 여기도'라고 말하는 무재다.


하지만 이 세계는 여전히 난폭하고 무자비해서, 공감과 연대만으로 극복하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렇기에 세계는 전구 하나의 배려가 있는 오무사도, 가동도 무너뜨려 버렸다. '따뜻한 것을 조금 동원하고 싶었다'는 작가의 말은, 그것만으로 이 세계가 나아질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아는 한 인간의 희망이 아니었을까.


따라오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따라오는 그림자 같은 것은 전혀 무섭지 않았다.

- '섬' (168p)


그들의 사랑이 어떻게든 이 세계와의 투쟁에서 생존할 수 있게 해줬으면 싶다. 아니, 그냥 견뎌내게만이라도 해줬으면 싶다. 하지만 이 세계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안다. 그래서 내 마음 한 켠에는, 그들은 결국 그림자의 파도에 묻혀버렸을 것이라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 이 소설이 더 아프고 쓸쓸하게 읽히는 지도.


며칠 전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까지 구입하면서 황정은 소설을 전부 구입했다. 내가 읽었던, 책으로 묶이지 않은 작품만으로도 단편집 하나가 묶일 것 같은데. 하루빨리 새 책이 나왔으면 좋겠다. 난폭한 이 세계의 폭력을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그녀의 이야기가, 나는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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