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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병‘이라는 가치 판단

본래 이 인용은 페이퍼의 아래에 적을 예정이었으나, 밑줄긋기 분량에 제한이 없는 북플과 달리 알라딘서재는 밑줄의 분량이 500자로 한정되어 있어 굳이 먼댓글 기능으로 올려둔다. 정리하는 입장에서 이래저래 난감한 상황이다...


에이즈는 체제 전복에 대한 공포그리고, 통제할 수 없는 환경 오염이나 제3세계에서 끊임없이 들어오는 이민자들을 향한 공포처럼 최근에 표면화된 공포처럼 수세대에 걸쳐 계발되어 왔던 친숙한 대중적 공포를 조성하기에 쉬운 도구인 까닭에, 에이즈가 이 사회의 문명을 총체적으로 위협한다는 식의 망상을 품는 것도 당연하다. 더군다나, 에이즈의 확산이 일촉즉발에 있으며 감염되기도 아주 쉽다는 식의 공포를 계속 조장해 이 질병을 은유로 사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높인다고 할지라도, 에이즈를 불법 행위(또는 경제적·문화적 퇴행)의 귀결로 보는 견해가 줄어들지는 않는다. 에이즈는 비정상적인 행위에 내려진 심판이라는 관념, 에이즈는 무고한 사람들을 공격한다는 관념에이즈를 둘러싼 이 두 관념이 전혀 모순되지 않는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역병이라는 은유의 놀라운 능력이자 효험이다. 역병이라는 은유는 어떤 질병이 (실질적으로) 모든 이들의 질병인 동시에, 병에 걸리기 쉬운 타인들이 초래한 그 무엇이라고 여겨질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다. (201-202)


우리는 끔찍하고 상상조차 할 수 없는그렇지만, 사람들이 꽤 일어날 만한 일이라고 말하는재앙을 주기적으로 의식하면서 살아가는 현대의 삶에 익숙하다. 이미지(카메라가 발명된 1839년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지금의 현실을 꼭 닮은 옛날의 망령)는 대부분의 주요 사건들을 재현할 뿐만 아니라 사로잡는다. 사진이나 전자 기술을 통해 사건들을 모의해볼 뿐만 아니라, 그 사건이 가져올 결과를 산출하기도 한다. 현실은 실제의 것과 실제를 대신하는 변형물로 두 번 이상 분기된다. 사건이 있고, 사건의 이미지가 있는 셈이다. 게다가, 사건과 사건의 투영(投影)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흔히 사람들에게는 실제의 사건이 이미지처럼 현실적으로 보여지지 않을뿐더러, 사건의 이미지를 통해 사건을 확인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정신에 각인된 윤곽을 적절히 사용해, 즉 우리의 정신에 투영된 가장 오래된 사건의 형상을 통해 현재의 사건을 확인하려는 반응을 보인다. (232-233)


물론, 질병이나 질병을 치료하는 과정을 가리키는 모든 은유가 도덕적으로 불미스럽고 왜곡되어 있다는 말은 아니다. 내가 없어지는 꼴을 보고 싶은나는 에이즈가 등장하기 훨씬 이전부터 그랬으면 하고 생각해 왔다은유는 군사적 은유이다. 군사적 은유가 뒤바뀐 형태, 즉 공공의 행복을 운운하는 의학적 모델이 아마 군사적 은유보다 훨씬 더 위험스럽고, 훨씬 더 심각한 결과를 빚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모델은 권위주의적인 법률을 강제적으로 정당화해 줄 뿐만 아니라, 국가 주도의 억압과 폭력(정체(政體)라는 신체의 불건전한부위와 해가 된다는 부위를 마치 외과수술하듯이 제거하거나, 화학 약품으로 통제하려는 것과 같은 행위)을 은연중에 수반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질병과 위생 상태에 대한 우리의 생각에 군사적 이미지가 가져올 결과가 전혀 중요치 않다는 것은 아니다. 군사적 이미지는 지나치게 선동을 일삼고, 상황을 지나치게 왜곡하며, 환자들을 고립시키거나 환자들에게 낙인을 찍는 데 단단히 한몫을 한다. (239)


절대화되는 것은 의학을 위해서도, 심지어는 전쟁을 위한 것일지라도 전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에이즈가 야기한 위기도 절대화같은 것과는 아주 거리가 멀다. 우리는 침략을 받은 것이 아니다. 우리의 육체는 전쟁터가 아니다. 환자는 어쩔 수 없이 생길 수밖에 없는 사상자도 아니고, 적군도 아니다. 우리의학, 사회는 어떤 상대가 됐을지라도……모든 희생을 무릅쓰고서라도 맞서싸울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지 못했다. 다음과 같은 식으로 루크레티우스의 말을 바꿔 쓸 수 있다면, 나는 저 은유, 저 군사적인 은유에 대해서 한 마디 하고 싶다저 따위 군사적인 은유는 전쟁광에게나 돌려줘라. (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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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도시들 이탈로 칼비노 전집 9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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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는 기억으로 넘쳐흐르는 이러한 파도에 스펀지처럼 흠뻑 젖었다가 팽창합니다. 자이라의 현재를 묘사할 때는 그 속에 과거를 모두 포함시켜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도시는 자신의 과거를 말하지 않습니다. 도시의 과거는 마치 손에 그어진 손금들처럼 거리 모퉁이에, 창살에, 계단 난간에, 피뢰침 안테나에, 깃대에 쓰여 있으며 그 자체로 긁히고 잘리고 조각나고 소용돌이치는 모든 단편들에 담겨 있습니다. (<도시와 기억 3>,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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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2008)

폭력은 타인을 침묵시키고, 타인의 목소리와 신뢰성을 부정하고, 내게 타인이 존재할 권리를 통제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한 방법이다. 미국에서는 매일 약 세명의 여자가 배우자나 옛 배우자에게 살해당한다. 미국에서 임신부의 주요한 사망 원인 가운데 하나도 바로 그것이다. 강간, 데이트 강간, 부부 강간, 가정폭력, 직장 내 성희롱을 법적 범죄로 규정하려고 애써온 페미니즘의 투쟁에서 핵심 과제는 우선 여성을 신뢰할 만하고 경청할 만한 존재로 만드는 것이었다. (18-19쪽)


대부분의 여자들은 이중의 전선에서 싸우고 있다. 하나는 무엇이 되었든 문제의 주제에 관한 싸움이 벌어지는 전선이고, 다른 하나는 애초에 말할 권리, 생각할 권리, 사실과 진실을 안다고 인정받을 권리, 가치를 지닐 권리, 인간이 될 권리를 얻기 위해서 싸우는 전선이다. (24-25쪽)


<가장 긴 전쟁>(2013)

(샌프란시스코에서 어떤 남성이 성적 접근을 거부한 여성을 칼로 찌른 사건)

그 남자는 자신이 고른 피해자에게는 아무런 권리도 자유도 없지만 자신에게는 그녀를 통제하고 처벌할 권리가 있다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던 셈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폭력은 무엇보다도 일단 권위주의적이라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폭력은 내게 상대를 통제할 권리가 있다는 전제에서 시작한다.

살인은 그런 권위주의의 극단적 형태다. 살인자는 당신이 죽을지 살지 결정할 권리는 자신에게 있다고 살인을 통해서 단언하는 셈이다. 이것은 타인을 통제하는 궁극의 수단이다. 설령 당신이 고분고분하게 굴더라도 아무 소용없을지 모르는데, 통제의 욕망은 순종으로는 좀처럼 달래기 힘든 격렬한 분노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 행위의 이면에 모종의 두려움과 취약함이 깔려 있을지라도, 아무튼 그런 행위는 타인에게 괴로움을, 더 나아가 죽음을 부여할 자격이 자신에게 있다는 생각에서 나오기 마련이다. 그런 의식이 범인도 피해자도 비참하게 만든다. (45-46쪽) 


강간을 비롯한 폭력적 행동들, 극단적으로는 살인에까지 이르며 폭력을 쓰겠다는 위협까지 포함하는 이 모든 행동은 일부 남자들이 일부 여자들을 통제하려는 시도로 펼치는 방어막에 해당한다. 대부분의 여자들은 그런 폭력이 두려워 스스로를 제약하며, 그러다보면 자신도 익숙해져서 그런 상황을 거의 의식하지 못하게 된다. (50쪽)


<거미 할머니>(2014)

어머니들이 사라지고, 그 어머니들의 아버지들과 어머니들이 사라진다. 점점 더 많은 삶들이 세상에 살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지면서 숲이 나무로, 그물이 직선으로 다듬어진다. 혈통이나 영향이나 의미의 내러티브를 단선적으로 구성한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나는 예술사에서도 그런 일을 줄기차게 보았다. 삐까소(Pablo Picasso)가 폴록(Jackson Pollock)을 낳고 폴록이 워홀(Andy Warhol)을 낳는 식으로, 예술가는 반드시 다른 예술가에게서만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듯한 설명이다. (104쪽)


<울프의 어둠>(2009)

미래는 어둡고, 나는 그것이 미래로서는 최선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이 선언은 예사롭지 않다. 이 선언은 우리가 거짓된 점괘를 믿거나 울적한 정치적 혹은 이데올로기적 내러티브를 미래로 투사함으로써 모르는 것을 아는 것으로 바꿀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이 선언은 어둠을 칭송하며─'나는 ... 생각한다' 부분이 암시하듯이─스스로의 선언에 대해서조차 기꺼이 불확실함을 인정한다.

사람들은 대부분 어둠을 두려워한다. 아이들의 경우에는 말 그대로 캄캄한 것을 두려워하고, 어른들의 경우에는 무엇보다도 자신이 모르는 것, 못 보는 것, 모호한 것이라는 어둠을 겁낸다. 그러나 무언가를 구별하고 규정하기 힘든 밤이란 한편으로는 우리가 사랑을 나누는 시간이다. 사물들이 합쳐지고, 변화하고, 매료되고, 흥분하고, 충만해지고, 사로잡히고, 풀려나고, 재생되는 시간이다. (122-123쪽)


빈틈을 메운다는 것은 우리가 완전히 알지는 못하는 어떤 진실을 완전히 안다고 착각하는 어떤 거짓으로 바꾸는 일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다 안다고 착각할 때는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자각할 때보다 사실 더 모른다. 완결된 지식을 가진 척하는 이런 태도는 어쩌면 실패한 언어의 문제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대담하게 단언하는 언어는 뉘앙스와 모호함과 성찰을 간직한 언어보다 더 간명하고 덜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후자의 언어에서라면 울프는 달리 비길 상대가 없었다. (125쪽)


<#여자들은다겪는다>(2014)

T. M. 루어먼(Luhrmann)은 지난해(2013) 신문에 실은 멋진 기고문에서, 인도에서 정신분열증 환자들이 환청을 들을 때는 머릿속의 목소리가 집 청소를 하라고 말하곤 하는 데 비해 미국 환자들은 폭력적인 행동을 하라는 말을 듣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문화는 중요하다. 형사사건의 피고 측 조사관으로 일하기 때문에 정신이상과 폭력에 관해서라면 속속들이 잘 아는 내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 현실과의 접촉을 잃기 시작하면, 병든 뇌는 무엇이 되었든 그것을 둘러싼 환경에 집착적으로, 망상적으로 매달리기 마련이야. 주변 문화의 질병에." (178-179쪽)


내가 최근에 읽은 글 중에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1964년에 뉴욕 퀸스의 주택가에서 살해된 그 유명한 캐서린 '키티' 제노비스(Catherine Kitty Genovese) 사건을 이야기한 『네이션』 기사였다. 기사를 쓴 피터 베이커(Peter Baker)가 우리에게 환기해준바, 제노비스가 강간당하고 살해되는 광경을 자기 집 창문으로 목격한 이웃들 중 일부는 낯선 남자가 저지른 야만적인 폭행을 남편이 '자기' 여자에게 권리를 행사하는 장면으로 오해했을지도 모른다. "당시에는 남자가 아내나 연인에게 가하는 폭력은 대체로 사적인 일로 치부되었던 것, 그것이 분명 중요한 문제였다. 1964년의 법률적 시각에서 남자가 아내를 강간하는 일은 있을 수 없었따는 것이 분명 중요한 문제였다."

'아는 사람에 의한 강간' '데이트 강간' '부부 강간' 같은 용어들은 만들어지지도 않은 시점이었다. (188-189쪽)


우리는 폭력과 권력 남용이 성희롱, 협박, 위협, 구타, 강간, 살인 같은 범주들로 서로 깔끔하게 분류되는 것처럼 다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때 내가 무슨 말을 했던 것인지 이해하겠다. 나는 그것이 자칫 미끄러지기 쉬운 비탈이라는 사실을 이야기한 것이었다. 우리가 여성 혐오의 다양한 양태들을 구획하여 각각 별도로 다루기보다 그 비탈 전체를 이야기해야 하는 까닭은 바로 그것이다. 구획화란 큰 그림을 조각냄으로써 전체가 아니라 부분만 보게 하는 것이다. (197-198쪽)


<판도라의 상자와 자원경찰들>(2014)

혁명은 사실 특정 체제에서 권력을 확보하는 일이 주가 되는 사건이 아니고, 그보다는 파열을 통해서 새로운 사상과 제도가 탄생하고 그 충격이 퍼지는 사건이었다. 그레이버는 "1917년 러시아혁명은 소련 공산주의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뉴딜 정책과 유럽 복지국가들을 낳았다는 점에서 세계적 혁명이었다"라고 말한다. 그 말인즉 러시아혁명이 재앙만을 낳았다는 종래의 가설을 뒤집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는 이어서 이렇게 말했다. "대열의 맨 마지막은 1968년 세계혁명이었다. 1848년 혁명과 상당히 비슷한 방식으로, 1968년 혁명은 중국에서 멕시코까지 거의 모든 곳에서 터졌고, 그 어디에서도 권력을 잡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그것은 국가관료주의에 대항하는 혁명이었고, 개인적 해방과 정치적 해방을 분리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혁명이었으며, 그 혁명이 남긴 가장 영속적인 유산은 현대 페미니즘의 탄생일 것이다." (213-2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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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능동적인 시민의 혁명적 활동이 성과를 거두어 국민국가의 틀 속에서 (국민으로서) 시민의 권리가 확립되고, 시민의 대표로 이루어진 의회를 중심으로 정치가 움직이게 되면, (정치에 관심이 없는 사람까지 포함하여) 모든 사람에게 '시민'으로서 정치에 참가하고 선거 때 투표할 자격이 주어진다. 그렇게 되면 역설적으로 이미 국내에서는 자유를 위한 투쟁이라는 긴장감이 사라진 결과, 정치를 남의 손에 맡겨도 괜찮다고 여기는 수동적인 사람들도 늘어난다. 19세기 후반에 국민국가를 기반으로 복지와 공공사업이 정비되자, 수동적 시민은 정치의 소비자로 변했다. 이것이 '대중'에 깃들어 있는 일반적 이미지다. (60쪽)


전체주의는 현실 세계의 불안이나 긴장감을 견딜 수 없게 된 대중이 도망갈 수 있는, 그야말로 '총체적' 공상세계를 구축한다. 총체적인 공상적 세계 안에서 대중은 편안함을(at home) 느낄 수 있다. 다만 이 공상적 세계는 전면적으로 현실세계에서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상당히 왜곡시킨 형태로 가공됨으로써 전체주의적 공상의 기반이 된다. (63쪽)


그런데 한나 아렌트에 따르면 그러한 공감의 '정치'는 토론을 활성화하거나 관점을 다양하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불행한 사람들'에게 공감하는 것을 인간적이고 올바른 모습이라고 강요하는 배타적 가치관으로 기울기 쉽다. 경우에 따라서는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에게 공감하지 않는 자들을 비인간적이라고 손가락질하며 배제하려는 경향마저 낳는다. (...)

실제로 프랑스혁명 과정에서는 '공감하지 않는 무리'를 대량으로 숙청하는 공포정치(Terror)가 이루어졌고, 똑같은 일이 20세기 좌파적인 '해방'의 '정치'에서도 되풀이되었다. '공감'을 '정치'의 무대 위로 끌고 들어오면 자신들과 똑같이 공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에 대해 관용이 없어지는 한편, '사이'를 두고 논의할 수 없게 된다. (152-153쪽)


요컨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법정에 들어가는 것은 자연적인 자아가 아니다. 법 앞에 드러내는 모습은 법에 의해 만들어지고 권리와 의무를 가진 인격(person)이다." persona를 벗겨내 버리면 남는 것은 권리와 의무가 없는 개인(individual)이며, 아마도 '자연인'일 것이다. 한마디로 본래적 의미의 인간(human being)이자 사람(homo)일 것이다. 이를테면 이는 노예처럼 법의 영역과 시민의 정치조직 외부에 놓은 사람을 의미하는데, 말할 필요도 없이 정치적으로 무의미한 존재다.

- 한나 아렌트, 『혁명론』(이 책 164쪽에서 재인용)


'자유의지'를 말할 때 우리는 타인의 강제나 압력에서 '자유로운' 의지 같은 것을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서양철학사에서 전통적으로 문제 삼아온 '자유의지'는 그 이상의 것, 도는 그것과 다른 것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그것은 자연계를 지배하는 물리적인 인과법칙에서 '자유롭다'는 뜻이다. (2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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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스템에서는 어떤 모순도 근본적으로 해결되지는 않지만, 또 어떤 모순도 혁명이 일어날 정도로는 쌓이지 못한다. 고작해야 `선거 혁명`이다. 즉 오늘날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 사이의 논쟁은 적당한 온도의 온수를 놓고 뜨거운 물이 나오는 수도관과 차가운 물이 나오는 관 사이에 레버를 어느 위치에 놓느냐를 두고 벌이는 싸움에 불과하다.
(18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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