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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씨의 선생님이 말합니다.

위문편지를 씁시다. 나라와 세계의 평화를 지키는 군인 아저씨들에게 편지를 씁시다.

파씨는 안녕하세요, 저는 파씨입니다, 열살입니다, 삼학년 십이반입니다. 제일 잘하는 과목은 미술입니다, 크리스마스엔 선생님께서 아홉 가지 색깔의 연필을 주셨습니다. 파랑과 노랑이 제일 먼저 사라집니다. 흰색과 빨간색이 그다음으로 사라집니다. 파씨는 어제저녁에 추웠습니다. 오늘 저녁에도 추울 예정입니다. 아저씨도 춥습니까, 거긴 춥습니까, 세계는 춥습니까, 파씨는 세계라는 것은 잘 모르지만 거기가 춥고 아저씨가 너무 추워서 지금 울고 있다면 세계는 빌어먹게 나쁜 곳입니다,라고 씁니다. (...) 계속 세계의 평화를 지켜주세요,라고 제대로 된 위문편지를, 그러니까 위문慰問이라니 깜짝이지 싶지만 어쨌건, 진심을 다한 위문으로 위문편지를 쓰라고 말합니다. 파씨는 종이에 안녕하세요, 한 줄을 적고 나머지를 빈 채로 남겨둡니다. 왜냐하면 파씨는 조그맣고, 조그만 파씨의 조그만 평화조차 제대로 실현되지 않는다면 세계의 평화 같은 거대한 것은 파씨가 감히 소원해볼 수 없는바, 파씨는 편지를 빈 채로 내버려두고 부엌으로 내려가서 불을 켭니다.
- 황정은, '파씨의 입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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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때 당신들은 젖비린내 나는 애들에 불과했다고요. 이층에 있는 저 애들처럼!"
나는 인정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우리는 전쟁 때 이제 막 아동기를 벗어나려는,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들이었다.
"그런데도 소설에는 그렇게 안 쓰겠죠?" 이 말은 질문이 아니었다. 규탄이었다.
"모─모르겠습니다." 내가 말했다.
"난 알아요." 그녀가 말했다. "당신은 아이가 아니고 어른이었던 것처럼 쓸 거고, 영화화 되면 프랭크 시나트라나 존 웨인처럼 매력 있고 전쟁을 좋아하고 지저분한 배우들이 당신 역을 맡겠죠. 그럼 전쟁이 아주 멋져 보일 거고, 그러면 우리는 훨씬 많은 전쟁을 치르게 되겠죠. 그리고 그런 전쟁에서는 이층의 저 애들 같은 어린애들이 싸우겠죠."
(25p)

"내가 그렇게 많은 시간을 들여 지구인들을 연구하지 않았다면"하며 그 트랄파마도어 인은 말했다. "나는 `자유 의지`가 무엇인지도 몰랐을 거요. 나는 우주의 유인 행성 서른한 곳에 가 보았고 1백 곳에 대한 보고서를 검토했소. 자유 의지에 대해 조금이라도 언급하는 행성은 지구뿐이더군."
(104-105p)

이 소설에는 대단한 인물이 거의 없으며, 극적인 갈등도 거의 없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심하게 병들고 심히 무력한, 거대한 힘의 노리개들이기 때문이다. 사실, 전쟁의 중요한 영향 가운데 하나는 사람들이 대단한 인물이 될 마음을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191p)

파티 손님들은 모두 어떤 식으로든 검안과 관련이 있었는데, 트라우트만 예외였다. 또 그 혼자만 안경을 쓰지 않았다. 그는 그 자리에서 대단한 인기를 끌고 있었다. 모두들 그 파티에 진짜 작가가 참석한 사실에 몸이 떨리도록 흥분한 것이다. 그의 책은 읽어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
(198p)

대피소 밖은 다음날 오후가 되어서야 밖으로 나갈 수 있을 만큼 안전해졌다. 미군들과 경비병들이 밖으로 나왔을 때, 하늘은 시커먼 연기로 뒤덮여 있었다. 태양은 성난 작은 못대가리였다. 드레스덴은 이제 달 같았다. 미네랄 덩어리 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돌들은 뜨거웠다. 인근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죽었다.
그렇게 가는 거지. (207-20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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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속에 그려보았던 전장의 풍경과 실제로 그 전투가 있었음을 확인하기 위해 직접 눈으로 목격한 전장 풍경의 차이가 너무나 컸으므로, 예전에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모종의 현기증, 어떤 광적인 감정이 그를 엄습했다. 아마도 바로 그런 이유로, 전장에 서 있는 기념비가 극단적으로 조그맣게 보였을 것이라고 그는 썼다. 초라하고 흐릿한 기념비는 마렝고 전투를 상상할 때마다 그를 장악했던 요동치는 광폭함과도, 마치 멸망으로 침몰하고 있는 한 인간처럼 홀로 서 있는 이 끝없는 시체 들판의 광막함과도 어울리지 않았다.
- `벨, 또는 사랑에 대한 기묘한 사실`(20-21p)

병이 지속되는 동안 대화재의 불길에 휩싸인 모스크바 광경, 그리고 열병에 걸리기 직전에 계획해두었던 슈네코프 산 등반이 자꾸만 머릿속에 떠올라 정신이 혼란스러워졌다. 산 정상에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이 여러 차례 반복해서 나타났으며, 세상과의 연결고리를 모두 잃어버린 채 사방에는 오직 거센 바람과 수평으로 휘몰아치는 사나운 눈송이들, 그리고 집들의 지붕을 뚫고 활활 솟아오르는 화염의 혓바닥이 눈앞에 보이는 것이었다.
- `벨, 또는 사랑에 대한 기묘한 사실`(25p)

그때 마담 게라르디는, 사랑은 다른 종류의 많은 문명의 혜택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본성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더욱더 간절하게 갈망할 수밖에 없는 키마이라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우리가 오직 타인의 육신에서 본성을 찾으려 하면 할수록 결국 그것과 멀어지게 될 뿐인데, 왜냐하면 사랑은 스스로 만들어낸 통화에 의해서만 부채 상환이 가능한 열정, 즉 다행스럽게도 인간에게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은 허상의 거래이기 때문이다. 마치 벨이 모데나에서 구입한 깃펜깎이처럼 말이다.
- `벨, 또는 사랑에 대한 기묘한 사실`(26p)

아마도 그러느라 너무 지친 탓인지, 나는 내가 아는 누군가가 방금 곁을 스쳐지나간다는 느낌에 수시로 빠져들었다. 그런데 이런─다른 명칭을 붙일 수 없는─환각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예외 없이 내가 수년 동안 한 번도 떠올린 적이 없는 사람들, 말하자면 이미 죽은 사람들뿐이었다. 또는 죽었을 것이 확실한 사람들, 이를테면 마틸트 젤로스와 외팔이 마을 서기 퓌르구트를 나는 보았다. (……) 그런 돌연한 환각을 몇 번 겪고 나자 내 마음속에는 울렁거림과 현기증으로 묘사할 수 있는 희미한 우려가 싹트기 시작했다. 확실하게 붙잡고자 하는 장면들의 테두리는 점점 희미해졌고, 머릿속에 피어나는 모종의 생각들은 내가 채 인식하기도 전에 와해되었다.
- `외국에서`(37-38p)

우리가 함께한 그날 오전 시간은 충분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날 우리는 하늘을 나는 법을 배웠으리라. 적어도 나는, 품위 있게 추락하는 법을 배웠다. 하지만 최고의 순간은 결코 다다르지 못하는 법. 말하자면 그라이펜슈타인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이제 옛날 같지 않았다는 의미다.
- `외국에서`(43-44p)

카사노바는 인간 이성의 한계를 생각한다. 인간이 실제로 미쳐버리는 일이 흔하지는 않지만, 그럴 만한 계기는 삶의 도처에 널려 있다는 생각이 든다. 원래의 자기 자신에 아주 약간의 균열이 일어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카사노바는 인간의 명확한 판단력을 저 홀로는 깨지지 않는 유리에 비유한다. 단지 외부의 충격에 의해서만 깨지지만, 일단 깨질 때는 또 얼마나 쉽게 깨지고 마는지. 단 한 순간만이라도 잘못 움직이면 끝이다.
- `외국에서`(57-58p)

베로나에서 이곳을 거쳐간 카프카 박사도 나와 마찬가지로 이 역에서 내려 이 화장실을 사용했을까, 지금 나처럼 바로 이 거울을 들여다본 것은 아닐까. 그랬다 해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거울 근처에 있는 그라피티 중 하나가 나에게 그 사실을 암시해주었다. 사냥꾼이라는 글자가 서툰 솜씨로 쓰여 있었다. 손을 말리면서 나는 글자 앞에 슈바르츠발트의라고 덧붙여놓았다.
- `외국에서`(86p)

루치아나가 페르네트를 가지고 왔다. 이번에도 그녀는 잠시 동안 곁에 서서 내가 펼쳐들고 있는 신문을 들여다보았다. 하녀, 하고 그녀가 입속말로 중얼거렸고, 그녀의 손이 내 어깨를 건드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때 내 머릿속을 스친 것은, 사실상 모르는 관계라고도 할 수 있는 그런 낯선 여인이 시도한 신체 접촉은 살면서 참 드물었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전혀 예상하지 못한 순간 우연히 일어난 피부 접촉은 늘 그랬듯이 무게도 중력도 없는 어떤 것, 실제라기보다는 허상과도 같은, 그래서 한없이 투명한 사물처럼 나를 관통해가는 성격을 띠고 있었다. (……) 이날 오후 리모네에서도 당시 맨체스터에서와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주변 사물의 형체가 초점이 맞지 않는 안경 렌즈를 통해 세상을 볼 때처럼 일제히 흔들리며 의식 속에서 와해되어 사라졌다.
- `외국에서`(95-96p)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할 수 있는 사실은, 그때 순간적으로 갑자기 내가 어디에 있는지 전혀 알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지난 수일간 여기저기 헤매고 다니다 마침내 이곳에 도달하게 된 나 자신을 정당화하려는 필사적인 시도에도, 지금 내가 살아 있는 사람들의 세상에 있는 것인지 그 너머 다른 세계를 서성이는 것인지 확신할 수 없는 상태로 빠져들었다. 이렇게 기억을 상실한 상태는 대성당 꼭대기층 갤러리로 올라갈 때까지 지속되었고, 빈번하게 나를 엄습했던 현기증에 다시금 휩싸였는데, 내게는 완전히 낯설고 이상하게 보일 뿐인, 허공을 가득 뒤덮은 연무에 가려 흐릿하게 보이는 이 도시의 파노라마를 시야에 담는 순간에도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다.
- `외국에서`(112-113p)

퇴근 후 나는 산문 속으로 구원을 찾아 떠나는 겁니다, 하고 살바토레가 말을 이었다. 사람들이 섬으로 휴가를 떠나듯이 말이죠. 온종일 소음이 홍수를 이루는 편집국 한가운데에 앉아 있다가, 저녁이 되면 내내 나만의 섬에 있게 되는 셈이죠. 그리고 책의 첫번째 문장을 읽기 시작하면 노를 저어 물 가운데로 점점 더 멀리 나아가는 느낌이 들곤 한답니다. 오직 저녁시간의 이런 독서가 있었기에 나는 이날까지 제정신을 유지하고 살아올 수가 있었던 거지요.
- `외국에서`(124p)

마담 게라르디는 그곳에서 한 광부에게, 이미 죽어버리기는 했지만 도리어 그 덕분에 수천 조각의 크리스털로 뒤덮인 나뭇가지 하나를 선물로 받았다. 그들이 숙소로 되돌아왔을 때, 가지 위에 내리쪼인 햇빛이 결정체의 표면에서 수천 갈래의 영롱한 파편으로 쪼개졌다고, 그것은 무도회장 조명의 환한 빛이 신사들의 손을 잡고 빙글빙글 도는 숙녀들의 다이아몬드 장신구 위로 부서질 때만 나올 수 있는 그런 찬란함이라고 벨은 썼다.
죽은 나뭇가지를 기적의 예술품으로 만드는 그 오랜 결정화 과정은, 우리 영혼의 암염광산에서 성장해가는 사랑의 알레고리처럼 느껴졌다고 벨은 묘사했다.
- ‘벨, 또는 사랑에 대한 기묘한 사실’ (28p)

K 박사는 육체를 배제한 사랑의 이론을 단편적으로 풀어놓는다. 그런 사랑에는 가까이 있거나 멀리 있는 것 간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 적어도 우리가 눈을 뜨고 있는 한 행복의 근원은 자연이지 이미 오래전에 자연으로부터 유리된 우리의 육체가 아님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어리석은 연인들은, 사랑에 빠지면 대부분 다 어리석어지기 마련인데, 아예 눈을 감아버리거나, 결과적으로는 마찬가지지만, 욕망으로 흐려진 눈을 찢어져라 크게 떠버리기 마련이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성욕으로 그 어떤 때보다 더 대책 없는 상태로 빠져들게 된다. 이제 머릿속에서 제멋대로 자라나는 상상은 걷잡을 수가 없다. 끊임없는 변화와 반복을 요구하는 강박이 인간을 굴복시킨다. 이미 그가 여러 번의 경험을 통해서 잘 알고 있듯이 일단 그런 강박에 사로잡히면 모든 것이, 인간이 영원히 붙들어놓고 싶어하는 사랑하는 사람의 형상조차도, 허공에 산산이 흩어지고 만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하게도, 그가 인식하기에 광증과 실제로 맞닿아 있는 것이 분명한 그런 상태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상상으로 만들어낸 검은색 나폴레옹식 사령관 모자를 그 자신의 자의식 위에 씌워주는 일이다.

그런데 바로 이 순간 그에게 가장 필요 없는 사물이 바로 그런 사령관 모자다. 왜냐하면 이 호수 위에서 그들은 그야말로 육체가 거의 없는 상태에 가깝기 때문이며, 그들 개인의 무의미성을 통찰할 수 있을 정도로 자연에 걸맞은 혜안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 ‘K 박사의 리바 온천 여행’ (150-150p)

그는 특히, 세월이 흐르면서 많은 일이 내 안에서 저절로 설명되고, 그럼에도 그 일들이 더욱 선명해지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더욱 수수께끼처럼 변해간다는 말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나는 이어서 말했다. 과거에서 끌어올린 그림들을 더 많이 모으면 모을수록 그것들이 과연 내가 기억한 대로 흘러갔던 것인지가 더욱 모호해질 뿐이라고, 왜냐하면 과거에 속한 그 무엇도 평범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또한 설사 그렇지 않다 해도 최소한 경악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 ‘귀향’ (19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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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려는지 습기 찬 바람이 불어 재가 날았다. 상자를 들고 검은 집을 천천히 돌아봤다. 이곳에는 지난 시간이 있었다. 그것들은 모두 불에 탔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많은 날이 여기에 있었다. 그것들도 불에 탔다. (64p)

뭐든지 할 수 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시절, 벗어나고 싶지만 어디로 가야 할 지 모르던, 벗어나 도달한 곳이 다시 벗어나야 할 곳이 되던 시절, 밤과 낮이 같고 여름과 겨울이 같고 오늘과 내일이 같은 시절이었다. 생각해보면 지금과 별다르지 않았다. 당시는 그걸 몰랐다. 생의 가장 참혹한 시기를 지나는 줄 알았다. 그 시절을 건너고 나면 또다른 시절을 건너기 위해 발목을 적셔야 한다는 걸 알 수 없었다. (136p)

그 눈빛을 품고 지낸 사 년간, 시간은 참으로 울퉁불퉁하게 흘러갔다. 시간이라는 게 원래 그렇다는 걸 몰랐던 건 아니었다. 그때도 알고 있었다. 더불어 그곳에서 보낸 시간이 뭉텅 잘려나가게 될 것을, 그 삶이 버려지는 게 아니라 나머지 삶에 영영 덧씌워지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174p)

그곳에 있을 때는 실패가 분명함에도 쉽게 떠날 수 없었다. 그럭저럭 유지하는 게 더 실패하지 않는 일인 줄 알았다. 생각해보면 성공이라고 여겨온 것도 보잘것없었다. 표면장력으로 간신히 유지되는 무지개 빛깔의 얇은 막과도 같았다. 그때는 아무리 얇을 지라도 그것을 유지하고 싶어 여러모로 애썼다. (21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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