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즈와 그 은유는 수전 손택이 인터뷰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은유로서의 질병의 후속작을 염두에 두고 쓴 것이다. 질병에 가해진 해석을 겨냥하고 은유들을 다루고 있다는 점은 은유로서의 질병과 비슷하나, 에이즈에 가해진 은유와 해석은 도덕적 판단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이는 에이즈가 성관계로 인한 감염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¹

 

물론 손택이 질병을 둘러싼 모든 은유를 배격하는 것은 아니다. 서두에 밝히고 있듯이, 은유는 오래 전부터 과학적 지식과 표현력을 포함해 각종 이해 방식을 낳은 기초(129)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과의학의 발전과 세균의 발견은 질병을 다루는 언어를 공격적인 군사적 은유로 바꾸어 놓았고, 이는 사람들에게 질병을 어느 정도의 희생(구체적으로 말하면, 환자의 희생)이 따르더라도 물리쳐야 할 실체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이와 같은 군사적 은유는 에이즈에도 똑같이 작용하지만, 에이즈는 방탕한 성행위를 한다고 여겨지는 특정 집단에 내려진 역병이라는 은유를 떠안는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이는 질병에 대한 종교적 은유가 성행하던 시기에 나타났던 은유/해석이었지만, 에이즈에 대해서는 이러한 전근대적인 은유가 횡행하고 환자들에게 수치심을 안긴다.


죄를 저지른 개인에게 내려진 징벌이 매독이라는 이런 생각은 사실상 음탕한 짓을 저지른 공동체에게 내려진 천벌이 매독이라는 생각오늘날의 산업국가에서는 에이즈가 이런 대접을 받고 있다과 별다를 바가 없었다. 그렇지만 이런 생각은 매독을 쉽게 치료할 수 있게 되기 전까지 실질적으로 오랫동안 유지됐다. 개인이 초래한(그리고, 악화시킨) 질병이라는 식의 현대적인 방식으로 이해되고 있는 암과 대조적으로, 에이즈는 개인은 물론이고 위험 집단의 구성원이 초래한 질병이라는 식의 전()현대적인 방식으로 이해되고 있다이처럼, 마치 중립적인 것처럼 들리지만 지극히 관료주의적인 이 위험 집단이라는 범주는 질병이 타락한 공동체를 심판해 왔다는 낡아빠진 생각을 재탕하고 있을 뿐이다. (178-179)


정상적인 집단과 그들을 분리하는 사고방식, 외래의 산물(또는 경멸받고 있는 사람들이나 공포를 안겨줬던 소수자들)과 결부(189)시키는 19세기적인 사고가 역병이라는 은유에 잠재되어 있다. 콜레라나 나병, 매독이 유행할 때마다 부상했던 도덕적 천벌, 재앙으로서의 은유가 다시 등장하는 건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공포를 이용해 과거의 가치로 회귀하려 하고, 자신이 원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과감한 조치도 불사하려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에이즈는 자신들의 정치적 의제를 집단심리의 문제, 즉 국가적 자부심과 자신감의 문제로 해석하려 드는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사건이다. 이런 추악한 감정을 다루는 전문가 나리들이 에이즈는 비정상적인 성 관계에 내려진 천벌이라고 제 아무리 우긴다 할지라도, 이들을 움직이는 것은 전혀, 또는 특히 동성애 공포증이 아니다. 이들에게는 에이즈를 활용해 이른바 신보수주의자들의 주요 활동 가운데 하나를 추진하는 것, (좀 부정확한 표현이긴 하지만) 1960년대부터 진행되어 왔다고 말해지는 만인에 대한 문화전쟁을 추진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이 질병에는 의지의 정치즉 편협, 과대망상증, 정치적 유약함을 둘러싼 공포의 정치 일체가 들러붙어 있는 것이다. (201)


이러한 공포는 편견과 모순되는 의학적 사실마저 포용해 양립 가능한 것처럼 포장하고, 신체와 의식의 해방에 전근대적인 도덕(이를테면 순결과 같은)이라는 수갑을 채우며, 장기간 공연되는 연속극으로서의 종말론, 오늘날부터 계속되는 종말(232)을 부추긴다. 하지만 이러한 수사학은 재앙을 성찰하려는 노력을 마비(230)시킬 뿐만 아니라, 환자들을 고립시키고 낙인을 찍는 데 보탬이 될 뿐이다.에이즈를 둘러싼 공포는 발달된 사회가 가져온 주목할 만한 여러 재앙들(237) 중 하나일 뿐이라는 손택의 말에는, 그릇된 은유를 걷어내고 질병을 제대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중요하듯이, 전 지구적인 위기(환경오염, 인구 과잉 등)에도 말세의 수사학을 걷어내고 제대로 보아야 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말세의 언어는 군사적 은유를 대동할 수밖에 없으며, 그것은 어떤 과감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우리를 선동하기 때문이다.

 

손택은 인터뷰에서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들은 우리가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를 보여줍니다(252)라고 말한다. 질병을 향한 우리의 이분법과 외국인 혐오증도 마찬가지이며, 이런 사유에 젖어있을 때 우리는 현실을 왜곡하고 극단의 언어에 선동되기 쉬운 상태가 된다. 질병을 차별과 혐오의 언어로 불러온 역사를(매독을 프랑스 발진’, ‘독일 질병’, ‘나폴리 질병’, ‘중국 질병으로 불렀던 광신적 애국주의의 역사), 질병을 가리키는 군사적 은유가 파시즘과 나치즘의 선동 수단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언제나 신중하게 의심해야 할 것이다. 질병은 성적, 도덕적 타락을 보여주는 징표도 아니며, 어떤 희생이든 무릅쓰고 맞서야할 적군도 아닌 그저 질병일 뿐이다. 환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공격이나 반격’, 자책감과 수치심의 낙인이 아닌 '치료'다. 손택의 마지막 문장으로 마무리하자면 이렇다. “저 따위 군사적인 은유는 전쟁광에게나 돌려줘라.”(240)


¹ "HIV 감염인과 한 번의 성관계로 감염될 확률은 0.1~1%인 반면에 감염된 혈액으로 수혈을 받을 때 감염될 확률은 90%나 된다."("에이즈에 대한 오해와 진실 5가지", 메디칼업저버, 2012.11.28. http://www.mo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53367)


댓글(0) 먼댓글(1)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밑줄긋기의 난감함
    from 아무님의 서재 2020-03-09 01:40 
    본래 이 인용은 페이퍼의 아래에 적을 예정이었으나, 밑줄긋기 분량에 제한이 없는 북플과 달리 알라딘서재는 밑줄의 분량이 500자로 한정되어 있어 굳이 먼댓글 기능으로 올려둔다. 정리하는 입장에서 이래저래 난감한 상황이다...에이즈는 ‘체제 전복’에 대한 공포─그리고, 통제할 수 없는 환경 오염이나 제3세계에서 끊임없이 들어오는 이민자들을 향한 공포처럼 최근에 표면화된 공포─처럼 수세대에 걸쳐 계발되어 왔던 친숙한 대중적 공포를 조성하기에 쉬운 도구인 까
 
 
 















국내에 출간된 수전 손택의 은유로서의 질병은 두 편의 독립된 작품인 은유로서의 질병(1978)에이즈와 그 은유(1989)를 한 권으로 묶었다. 앞에 실린 은유로서의 질병까지 읽은 상태인데, 이 책에서 손택은 주로 결핵과 암이라는 질병을 둘러싼 은유와 신화를 다양한 예술 작품을 통해 파헤친다. 손택의 의도는 질병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게 만드는 해석에 반대하며 그러한 해석이 낳는 질병에 대한 오해와 왜곡을 타파하고 투명성을 회복시키려는 것일 테다. 한데 이와 별개로 읽으면서 종종 들었던 생각은, 사회학자 또는 역사가의 입장에서, 사람들이 질병과 연결시키는 이미지나 은유가 당대 사회의 분위기와 대중 심리를 분석하는 데 유용한 자료일 수도 있겠다는 점이었다. 감정 표현을 자제하는 전근대적인 사회 분위기가 감정 표현을 질병으로 은유화했다면, 18세기 이후 사회 계층의 변동과 낭만주의는 결핵을 내적 자아의 표출또는 개성화의 한 방식으로, 감수성과 정념의 표출(또는 소모)로 해석하는 데(바꿔 말하면, 은유화하고 이미지화하는 데) 이바지했다. 결핵의 발병 원인과 치료 방법이 밝혀지기 전까지는. 암을 둘러싼 은유는 “20세기의 경제적 인간이 저지르는 부정 행위, 즉 비정상적인 성장, 에너지의 억제, 그러니까 소모하거나 소비하기를 거부하는 행위를 요약해 놓은 듯한 상상을 통해 묘사(95쪽)되며 전쟁의 언어에서 나온 은유가 지배적이다.


18세기에 가능해진 새로운 인구 이동(사회적이고 지리적인) 덕택에, 재산과 신분은 그냥 주어지지 않게 됐다. 그것들은 드러내야만 하는 무엇인가가 됐다. , 사람들은 의복(‘패션’)을 둘러싼 새로운 관념, 질병을 대하는 새로운 태도를 통해 자신의 재산과 신분을 드러냈던 것이다. 의복(신체 밖을 둘러싸는 외피)과 질병(신체의 내부를 감싸는 일종의 장식)은 자아를 대하는 새로운 태도의 비유가 되기 시작했다. (46-47)


이처럼 결핵이 낭만화됐다는 사실은 자아를 하나의 이미지로 드러내는 독특한 현대적 행위가 만연하게 됐음을 알려주는 최초의 사례이다. 결핵 환자 같은 용모가 혈통을 구별해주는 표식이라고 여겨지게 되자, 결핵 환자의 용모도 매력적이라고 여겨지게 됐다. () 결핵 환자 같은 용모가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연약함이나 뛰어난 감수성의 상징이 되어가자19세기 중엽과 말엽에 산업 제국을 건설했고, 수백 권의 소설을 써냈으며, 전쟁을 일으켜 대륙을 약탈했던 위인들이 점차 뚱뚱해진 것과 대조적으로, 이런 용모는 점차 여성이 갖춰야 할 이상적인 용모가 되어갔다. (48-49)


그러나 이러한 은유와 이미지 때문에 사람들은 미지의 질병이라는 유령을 더욱 두려워하고 현실을 왜곡하기도 했으며, 질병을 가진 자들에게 낙인을 찍어 쉽게 비난할 수 있게 만들어 재활의 의지를 꺾기도 했다. 암을 질병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악마 같은 적으로 취급하는 관습 때문에, 암은 치명적인 질병이 아니라 수치스러운 질병이(88) 되고, 질병의 이미지가 인과응보의 성격을 띠게 되면서 사람들은 암 환자를 감정을 표현하지 못해 생기는 병(75)을 가진 사람으로 비난했다. 질병에 대한 이런 공포는 심리학적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욕구를 자극하고 이로 인해 질병에 대한 오해를 낳기도 했다(많은 사람들이 결핵이나 암을 유발하는 특정 성격이 있다고 믿었으며, 어느 영국 의사는 암 예방법으로 지나치게 힘을 쏟지 말고, 삶의 고난을 마음의 평정으로 견뎌내고, 무엇보다 그 어떤 슬픔에도 굴복하지 말라(81)고 말했다!). 손택은 질병에 씌워진 언어와 이미지의 신화를 파헤치고 내쫓으려 하며, 이러한 은유를 이용하는 사회에 대한 비판으로까지 나아간다.


암에 대한 우리의 관점, 그리고 우리가 암에 부여하는 은유들은 상당 부분 우리의 문화가 지닌 거대한 결점을 퍼뜨리는 수단이다. , 죽음을 대하는 천박한 태도, 감정 드러내기를 두려워하는 우리의 불안, 우리가 실제로 직면한 성장의 문제를 앞뒤 가리지 않고 대하는 우리의 무모함, 소비를 적절히 규제하는 선진 산업사회를 건설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무능력, 점차 가중되고 있는 역사의 폭력을 둘러싼 공포를 정당화하는 우리의 태도 같은 결점을 말이다. 예상컨대, 암의 은유가 생생하게 반영해 주고 있는 이런 문제들이 해결되기 훨씬 이전에, 그런 은유가 곧 진부해질 것이다. (124)


암을 둘러싼 은유가 대부분 전쟁의 언어를 반영한다는 사실, 나치와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등의 정치 세력이 은유를 독점하려 했다는 사실은 은유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암의 은유가 폭력을 선동하는 것이자,숙명론을 조장할 뿐이며, ‘가혹한조치를 정당화해 줄 뿐(119)이라는 사실은 달리 말하면 공포심을 조성하고 어떤 조치든 정당화하려는 그들의 의지가 은유를 부추겼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현대 사회의 문제를 진단하는 데 있어 이라고 지칭되는 사회 현상뿐만 아니라, 그것을 이라고 지칭하는 정치세력의 의도까지 파악하는 것이 중요함을 의미한다. 이것을 질병의 사회학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손택은 암이 이해되고 완치되는 비율이 높아진다 해도, 다시 말해 암이 탈신비화된다 해도 끔찍한 그 무엇인가를 암과 더 이상 비교하려 들지 않을 , 온통 신비로움으로 뒤덮여 있고,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숙명이라는 환상을 짊어지고 있는 질병(124)에 다시금 은유가 이용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책을 읽는 시점이 이러한바, 현재 우리 사회의 모습에 비추어 이 책을 읽으며 우리는 어떠한지 돌아보게 된다. 빅데이터 분석도 가능해진 시대이므로, 시간이 지난 뒤 COVID-19(‘코로나19’로 지칭하지 않은 건 손택의 투명성을 지지하기 때문이다)를 두고 발화된 우리의 언어들을 분석하고 2020년을 진단하는 새로운 은유로서의 질병이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병명이 바뀌는 과정, 끝없이 증폭되는 공포와 그것을 부추기고 이용하는 세력, 그리고 질병과 환자를 향했던 이미지와 은유들도 함께. 그 시점의 우리는 2020년의 우리를 자랑스러워할 것인가, 부끄러워할 것인가. 많은 일이 있은 뒤에 적어도 우리는 냉철하고 냉정하게 진단했다라고 말할 수 있길 바랄 따름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디디의 우산 - 황정은 연작소설
황정은 지음 / 창비 / 2019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래 전 황정은 작가의 소설집 아무도 아닌의 리뷰를 쓰면서 나는 그의 소설세계를 내 나름대로 분류한 적이 있었다(https://blog.aladin.co.kr/amour91/9018361). 땅에 발을 딛기 시작한 두 번째 경향에 대한 나의 견해는 동일하지만, 디디의 우산에서 이 경향은 변화를 맞은 것으로 보인다. “각각의 패턴으로 맞물려(35) 있는 고유한 개인을 하찮게 만들어버리는 세계의 엄혹함 때문일까. 소설에서 세계는 재구성이라는 체를 거치지 않고 직접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것은 세계-현실의 압도적인 힘이 소설로 틈입해 온 결과이기도 하고, 무자비하고 적나라한 세계(특히, ‘한국이라는 세계)에 대해 이야기해야겠다는 작가의 결단이기도 하다. 그동안 책에서 빠져 있던 작품 해설과 작가의 말이 들어갔다는 점, 두 작품에 담긴 최근 한국 사회의 편린들을 보고 있으면 최근 몇 년 동안의 한국 사회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게 많았던 작가의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디디의 우산과 단편 웃는 남자의 뒤를 잇는 ddd를 잃고 난 뒤 d가 살아가는/버텨가는 모습을 다룬다. 이웅평 대위의 귀순, 세운(世運)상가, 광화문 촛불시위 등 다양한 이야기를 지배하는 분위기는 환멸이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 현실에 대한 환멸과 좌절. 그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이웅평 대위 이야기이다.


그런데 그것을 아시나요? 이웅평 대위가 전투기를 몰고 남한으로 넘어온 이유가 환멸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북측에서 해변을 산책하다가 남쪽에서 생산된 라면 봉지를 주웠는데 이런 안내문이 적혀 있었대요. 불량품은 판매처에서 교환이나 환불을 해드립니다. 그것을 읽고 남쪽에 라면을 쌓아놓고 파는 장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자기가 속한 체제에 깊은 환멸을 느끼게 된 나머지 귀순을 결심했다고 하네요. 그 내용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그가 부러웠습니다. 두 손으로 조종간을 붙들고 목적지를 향해 전투기를 몰아갔을 그 새끼가 너무 부럽다…… 남쪽의 가요를 방송하는 라디오 채널에 주파수를 맞춰두고 음악이 흐르는 전투기에 실려 북측과 남측의 경계를 향해 날아가던 순간, 그 아득한 허공을 날던 순간의 그가 말입니다. 죽음과는 얇은 금속판 한겹만을 남겨둔 채 체공하고 있었지만 그는 분명히 환멸의 반대 방향으로 날아가고 있었어요. 그는 그것을 가지게 된 거죠. 탈출의 경험을.

내게는 그것이 없어.

나는 내 환멸로부터 탈출하여 향해 갈 곳도 없는데요. (113-114쪽)


전쟁은 완전하게 중단된 적이 없는 것 같(28)은 이 세계는 세운(世運) 그 자체인 인간 개개인이 아니라 상권과 자본만을 되살리려 할 뿐, 인간을 하찮음에 가두고 자신의 부재만을 기다리게 할 따름이다. ‘혁명이라고 말했던 dd세계의 잡음이 거센 물살처럼 그 뒷모습들을 쓸어버(45)렸고, d처럼 애인(愛人)을 잃(144)고 하찮음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격벽에 가두었다. 탈출의 가능성, ‘바깥을 상상할 가능성마저 차단해버리는 격벽. 저항하려 하였으나 저 차벽이 만들어낸 흐름을 충실하게 따라 찌꺼기처럼 여기 도착(133)하게 만들어버리는 세계. “혁명을 거의 가능하지 않도록 하는 혁명(133)을 구축해버린 세계. '애인'을 잃었기에, 그래서 함께 연대할 사람이 없기에 d는 이러한 세계에서 권태, 환멸, 한 조각의 정나미도 남지 않은 삶(138)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이 한 조각의 불빛 같은 희망을 남기는 것은 마지막을 매듭짓는 진공관의 이미지 때문이다. 이는 소설의 맨 처음, ddd가 함께 본 번개의 이미지와 연결된다. ddd를 만나게 했던 번개의 뜨거움과 흐르는 빛과 신호로 채워진 진공관(眞空管)의 뜨거움. 세계는 공간(空間)을 만들어 수많은 목소리들의 흐름을 막으려 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지만, 하찮음에 저항하는 고유한 개인들의 뜨거움은 피부를 뚫고 들어온 가시처럼 집요하게 남아(145) 환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나아갈 것이라는 메시지로 읽힌다. 그것은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가 제시하는 답이기도 하다. 탈출이 불가능하다면 여기서 날 수밖에, 여기서 마찰하는 수밖에 없어.”(292)


d가 한국 사회의 혁명 직전의 세계를 다룬다면,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는 혁명 중과 직후의 세계까지를 다루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작품은 1996년부터 이어져 온 세계의 탄압, 특히 소수자를 향한 탄압이 혁명 이후까지 진행형임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책과 신문 기사의 인용이 이어지는 이 작품은 단상처럼 보이기도, 에세이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것은 반복되어 호명되는 롤랑 바르트의 문장이 작품의 기저에 흐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산다는 것은 말하는 것입니다. () 산다는 것은 () 우리보다 먼저 존재했던 문장들로부터 삶의 형태들을 받는 것입니다.˝(242, 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


아니야 언니.

라고 김소리는 말했지.

사람들은 그런 걸 상상할 정도로 남을 열심히 생각하지는 않아.


그것을 알/생각할 필요가 없으니까. (263)


그것을 알 필요가 없다.

나는 그 태도를 묵자墨字의 세계관이라고 부른다. (267)


우리는 그것을 말할 필요가 없었다.

묵자의 상태가 상식이라서 그걸 부를 필요도 없어, 그것이 너무 당연해 우리는 그것을 지칭조차 하지 않는다. (274)


이 작품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는 세계의 태도는 점자(點字)와 반대되는 묵자(墨字)의 세계관, 즉 상식(common sense)의 태도이다. 동성애, 여성 문제와 같은 화제를 대하는 다수의 태도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닌 상식, 즉 감()에서 나온 것이며 그것은 생각을 하지 않는 상태에 가깝다(265)는 것이다. 상투어를 말할 때 드러나는 말하기, 생각하기, 공감하기의 무능성(220). 한나 아렌트의 말을 통해 작가가 말하고 싶은 것은 상투어가 곧 이 세계가 우리에게 휘두르는 이라는 것일 테다.


그렇지. 툴을 쥔 인간은 툴의 방식으로 말하고 생각한다.

그리고 어찌된 영문인지, 툴을 쥐지 못한 인간 역시 툴의 방식으로…… (189-190)


1996년부터 시작된 봉쇄라는 툴은 시간이 지나면서 차벽으로 형태를 완성시켰고, “물리적으로 고립시키고, 폭력이라는 틀을 씌운다.”(188)는 툴의 원리는 툴을 가지지 못한 시민들에게까지 작용해 강박에 가까운 평화적 시위에 대한 사람들의 열광(302)을 낳는다. 시민들의 꾸준한 저항과 승리의 역사로 기록될 촛불 혁명에도 묵자라는 이름의 툴은 평화적으로 시위하는 착한 시민이라는 자부(302), “惡女 OUT”(304)이라는 팻말로 여전히 존재한다. 툴과 권위와 상투가 휘두르는 폭력이 1996년의 모습 그대로 여전히 존재하는데, “우리는 지난 계절 내내 새로운 문장을 써왔고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그 문장은 이제 완성되었다(314)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는때라는 건 도래할 수 있는 것인가. 롤랑 바르트의 말을 다시 받자면, 산다는 것이 우리보다 먼저 존재했던 문장들로부터 삶의 형태를 받는것이기에, 이토록 상투적이어서 폭력적인, 지금껏 우리가 이어받아온 삶의 형태와 단절하고 새로운 문장을 끊임없이 써야하는 것이 아닐까. 강지희 평론가의 해설을 빌려 말하면,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혁명의 감격이 날카롭게 단절되는 지점들, 혁명이 휩쓸고 간 자리에 남겨진 부스러기 같은 존재들(328)이 손쉽게 지워지지 않도록 끊임없이 세계와 마찰한 기록이자, 그들까지 끌어안고 새로운 문장을 쓰려는 작가의 노력이다. 상식과 묵자라는 이름으로 그들을 공격하는 혐오와 폭력을 막아주는 우산과 같이.


서수경과 나는 그 침묵 속에서 함께 침묵하는 동안 평화적 시위를 원하는 사람들의 갈망에서 상처를 보았다. 누군가 다치는 광경을 우리는 너무 보았다.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게 아니었을까. 누구도 다치게 하지 말라, 우리는 이미 너무 겪었다고. (309쪽)


열세번째 이야기를 시작하고 싶다.”(159)고 쓴 김소영의 이야기는 12장으로 끝난다. 누구도 죽지 않는 이야기, “누구에게도 소용되지 않아, 더는 말할 필요가 없는(316-317) 열세번째 이야기는 가능할까. 여전히 혁명은 미완성이기에, 여전히 묵자의 세계가 고유한 개인의 존재를 지우고 있기에, 혐오가 상식의 탈을 쓰고 존재들을 지우고 밀어내고 있기에,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는이야기가 아닌 모든 것을 말할 필요가 있는이야기가 필요할 것이다. 그것이 지난 격변의 시기를 거쳐 온 우리의 증언이자, “사유라기보다는 굳은 믿음에 가깝고 몸에 밴 습관에(265) 가까운 상식-묵자를 휘둘러왔던 자신에 대한 반성이고, 여전히 달라지지 않는 세계에 부딪치며 우리가 일으키는 마찰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d의 마지막 문장은 세계가 비-존재로 만들어왔던 존재들이 이어갈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처럼 들린다. 무척 뜨거우니, 조심을 하라고.”(14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밤이 선생이다
황현산 지음 / 난다 / 2013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품격(品格)’이란 단어를 사전에서 찾으면 두 가지 뜻이 나온다. 첫째, “사람 된 바탕과 타고난 성품”, 둘째, “사물 따위에서 느껴지는 품위”. 표준국어대사전에서 뜻풀이를 둘로 나눈 것은 단어가 사람에게 쓰일 때와 사물에 쓰일 때를 구분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사람과 사물의 구분에 관계없이 내가 찾고자 하는 뜻은 두 번째에 가까운 듯하니 조금만 더 추적하자면, ‘품위(品位)’란 단어의 여섯 가지 뜻 중에 사람이 갖추어야 할 위엄이나 기품”, “사물이 지닌 고상하고 격이 높은 인상에 주목할 수 있다. ‘위엄(威嚴)’존경할 만한 위세가 있어 점잖고 엄숙함, ‘기품(氣品)’인격이나 작품 따위에서 드러나는 고상한 품격을 나타내는 말이니 품위의 두 가지 뜻은 일맥상통한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품격이라는 단어에서 이렇게 멀리까지 온 것은, 선생의 글에 배음(背音)처럼 흐르는 품격이란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규명하기 위한 나의 짧은 추적이다. 그리고 오랜 시간 끝에 내가 다다른 생각을, 구태의연한 정의를 약간 비틀어 말하자면, 문체(style)가 곧 그 사람의 태도(attitude)를 가리킨다고 정리할 수도 있겠다.


훌륭한 에세이가 갖추어야 할 자질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황현산이라는 평론가의 에세이가 갖는 자질이란 평이하지만 엄정하게 골라낸 언어로 상념을 펼쳐내 독자를 어느새 그의 세계로 스며들게 하는 경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글은 목표를 향해 돌진하는 사냥개의 솜씨도 아니고, “열정을 지닌 개인의 과격한 언어들(200)의 전위도 아니지만, 한 걸음씩 천천히 다가가는 문장들은 어느새 핵심에 이르러 과녁을 정확히 맞힌다. 여러 지면에 실렸던 글을 모은 만큼 다루고 있는 주제는 다양하지만, 읽다 보면 어느새 문장들은 문제의 중심에 닿아 있다. 하지만 그 문장들은 과시하는 창(槍)이 아니라 불현듯 꽂힌 비수에 가깝다. 힘을 주었다는 인위적인 시늉 없이 그 힘을 전달하는 문장의 내공이 글에서 풍기는 고고한 향기를 좌우한다고 해야 할까. 그래서 나는 때로 새삼스러운 말들을 읽으면서도 그것을 우리에게 과거의 상처는 너무 악착스럽고, 미래에의 걱정은 갈수록 두터워질 뿐이다. 그래서 현재는 그만큼 줄어들고 눈앞의 삶을 깊이 있게 누리는 것이 용서되지 않는다.”(42)와 같이 표현하는 펜끝을 보며 감탄하는 것이다.


나도 지금을 살고 있는 또 하나의 사람인지라, 모든 글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은 아니었다. 때때로 나는 글을 읽으며 향수(鄕愁)나 보존에 지나치게 기운 견해들이 아닌가 하며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감수성의 필요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문장들을 보며 이성(理性)의 필요를 떠올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나와 다름에도 불구하고 눈을 돌리지 못하고 존중의 뜻을 표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의 문장이 가진 고아(高雅)함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문장을 다루는 데서 느껴지는 그의 태도, 어떤 것도 허투루 보고 쓰지 않고자 하는 태도와도 관련된다. 진실을 꿰뚫으면서도 해석의 여지와 반성의 겨를을 누리는 새로운 문체의 개발(201)을 지향하는 그의 문장에 표하는 나의 존중은, 언어를 잘 골라서 문장으로 펼쳐내고 싶은 나의 바람이자 닮고 싶은 문장을 만난 나의 마음이기도 하다.


많은 부분에 밑줄을 치며 읽었지만 내 눈을 오래 사로잡았던 글들은 시의 소용에 대한 글과 문학과 문학적인 것을 이야기한 글이었다. 시적인 가사를 품은 노래와 시를 가름하는 기준, 문학과 문학적인 것을 가름하는 기준은 가지 않은 길을 개척하려는 고독한 시도들로 귀결된다. 문학은 문학적인 것을 목표로 삼지 않는다.”(289)는 말이나 시인이 시를 쓰는 것은 "사물에 대한 새로운 감수성을 개척한다는 것이며, 그것들을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형식과 이미지를 만든다는 것이다.”(184)는 말들처럼, 중요한 것은 생각을 소비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생산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뜻일 테다. 물론 이러한 견해의 극단이 결국 이전의 오만한 견해들처럼 고급문화와 대중문화를 가를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의 글은 그 지점으로 넘어가지 않으려는 치열함과 겸손을 가졌다.


처음으로 돌아와서, 문장의 품격이란 글쓴이의 태도와 관련되는 것이며, 그러한 태도는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온다. 한 권의 책에서 그가 견지한 시선-태도란 사소한 것도 허투루 보지 않으려는 마음일 것이다. 글쓰기가 독창성과 사실성을 확보한다는 것은 바로 당신의 사정을 이해하기 위해 나의 사소한사정을 말한다는 것(176)이라는 말처럼, 사소함에서 다름을 보고 이를 확장시키는 노력이 품격의 한 부분일 것이다. 그런 시선을 가진 사람이 성장통이라는 단어가 젊은 날의 고뇌와 고투를 그 미숙함의 탓으로 돌려버리기도 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젊은 날의 삶은 다른 삶을 준비하기 위한 삶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를 위한 삶이기도 하며, 어쩌면 가장 아름다운 삶이 거기 있기도(88) 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사소함만 가진 문장은 고졸(古拙)함에 그치고, 이를 합당한 언어와 정직한 수사법으로표현하려는 노력이 함께할 때 문장은 고아함을 입는다. 결국 문체가 가리키는 글쓴이의 태도란 세계를 바라보는 자세와 언어를 다루는 자세를 아우르는 개념일 것이다. 이러한 자세에는 세계의 고통을 더욱 아프게 받아들이는 마음도 있을 거라고 믿으며, 기억과 예술의 윤리를, “인간 의식의 맨 밑바닥까지 진실을 추구하는 작업(84)으로서의 문학을 말했던 그의 모습을 보며 나는 자꾸 아래의 문장을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비극은 그다음에 올 것이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죽음도 시신도 슬픔도 전혀 없었던 것처럼 완벽하게 청소되어, 다른 비슷한 사연을 지닌 동네와 거리들이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세련된 빌딩과 고층 아파트들의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그 번들거리고 말쑥한 표정으로 치장”(진은영 시인, 용산 멜랑꼴리아)될 때 올 것이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부끄러움이 무엇인지 모를 것이다. 사람이 억울한 일을 당하면, 사람이 불타면, 사람이 어이없이 죽으면, 사람들은 자기가 그 사람이 아닌 것을 다행으로만 여길 것이다. 그러고는 내일이라도 자신이 그 사람이 될까봐 저마다 몸서리치며 잠자리에 누울 것이다. (33)


부고를 들었던 날, 내가 받은 책 중 하나는 말과 시간의 깊이였다. 작고하기 며칠 전 오랜만에 나는 선생의 트위터를 훑다가 악의 꽃번역과 교정을 끝내고 주석을 달기만 하면 된다는 트윗을 보고 반가워하였으나, 반가움은 허망함으로 나를 반겼다. 사 놓고 묵혀둔 지 오래된 책을 이제서야 읽게 된 것을 안타까워하며, 남겨진 책들을 천천히 곱씹으며 내 고유의 문장의 품격을 찾고 싶다고 생각한다. 세상을 지탱하는 곧은 형식들은 차가운 바람 속에 남아 있다.”(241) 어른다운 어른, 존경이 아닌 존중받을 만한 어른도 찾기 힘든 이 시기에 전해온 부고는 안타깝기만 하다. 부디, 영면하시기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투명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병철은 피로사회에선 우울증을, 심리정치에선 빅데이터를 단서로 현대 사회를 진단했고, 투명사회에서는 투명성이라는 개념으로 현대 사회를 진단한다. 그의 다른 저작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듯, 그가 진단하는 현대 사회의 모습은 자기착취, 긍정성, 성과주체와 같은 단어로 대표될 수 있을 것이다. 투명사회에서 그가 주로 주목하는 것은 디지털 매체를 통해 드러나는 커뮤니케이션의 양상이다. 대체로 그의 관점에 동의하나, 나의 좁은 식견으로 몇 가지 주장들은 지나치게 나아간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부정성-타자의 추방으로 인한 긍정성의 과잉으로 대표되는 그의 주장이 이 책에서도 반복되고 있으므로 책의 전반적인 내용을 훑는 것보단 내가 읽으면서 느꼈던 몇 가지 의문점들에 대한 정리로 리뷰를 갈음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

  


1. 전시사회: 사진에 관하여


그때는 그랬지라는 시간적 내용이 바르트에게는 사진의 본질이다. 사진은 과거에 존재한 것에 대한 증서이다. 따라서 슬픔이 사진의 근본 정조가 된다. 바르트에게 날짜는 사진의 일부이다. “왜냐하면 날짜는 삶, 죽음, 세대의 불가피한 소멸을 환기하고 다시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날짜는 사진에 죽음과 무상성을 기입한다. () 전시가치로 가득 차 있는 오늘날의 사진은 이와는 다른 시간 구조를 지닌다. 서사적 긴장이나 소설Roman의 극적 구성을 허용하지 않는, 운명도 없고 부정성도 없는 현재가 사진의 시간 구조를 결정한다. 사진의 표현은 낭만적romantisch이지 않다. (31-32)


저자가 바르트의 사진과 오늘의 사진을 구별짓는 기준은 방식의 차이, 즉 아날로그적 방식과 디지털 방식의 차이다. 아날로그적 방식으로 촬영된 사진은 사멸의 가능성을 가진 반면, 디지털 사진은 불멸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제의가치를 지니고 있던 사진은 페이스북과 포토샵의 시대에 전시가치로 전락한다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하지만 촬영과 인화의 방식이 바뀌었다고 해서 사진의 시간성이 상실되었다고 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디지털 방식의 사진도 여전히 과거에 존재한 것에 대한 증서이자, 돌아갈 수 없는 시간에 대한 슬픔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디지털 사진에서 그런 애상의 정조, 즉 부정성의 정조는 전시되는 순간에 오는 것이 아니라 전시된 뒤 시간이 지난 이후에 온다. 한때 페이스북에서 제공한 기능 중 ‘1년 전의 나는 이런 흔적을 남겼습니다.’와 비슷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플랫폼 자체가 전시가치를 우위에 점하도록 하는 형식을 가지고 있으나, 그렇다고 오늘날의 사진에서 바르트의 사진론이 있을 자리가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마찬가지의 입장에서 디지털 사진이 지시체와 사진의 연결을 분리시킨다는 다음 글에도 나는 마냥 동조할 수는 없는 것이다.


롤랑 바르트는 사진을 지시체의 발산으로 정의한다. 재현은 사진의 본질이다. 한때 존재했던 진짜 대상에서 빛줄기가 나와 필름에 자취를 남긴 것이 사진이다. 사진은 실재했던 지시체의 준-물질적 흔적을 보존하며, 언제나 자신의 지시체에 순응한다.” () 디지털 사진은 실재의 종말을 알리는 표지가 된다. 그 속에는 실재에 대한 암시가 더 이상 담겨 있지 않다. () 디지털 사진은 하이퍼포토그래피로서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하이퍼리얼리티를 제시한다. 실재는 그 속에서 오직 인용 혹은 파편으로서만 현존한다. 실재에서 따온 다양한 조각들이 서로 연결되고, 상상적인 것과 뒤섞인다. 이로써 하이퍼포토그래피는 지시체에서 완전히 분리된 자기지시적인 하이퍼리얼 공간을 창출한다. 하이퍼리얼리티는 아무것도 재현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직 제시할 뿐이다. (200-202)



2. 이름은 존경의 필요조건인가


 

존경은 이름과 결부되어 있다. 익명성과 존경은 양립할 수 없다. 디지털 매체를 통해 촉진되고 있는 익명적 커뮤니케이션은 존경심을 대대적으로 파괴하며, 조심성 없고 존중할 줄 모르는 문화의 확산에 함께 기여하고 있다. 악플 역시 익명적이다. 바로 이 점에 악플의 폭력성이 있다. 이름과 존경은 서로 엮여 있다. 이름은 인정의 기반이다. 인정은 언제나 기명적으로 이루어진다. 책임지기, 신뢰하기, 약속하기와 같은 행위 역시 기명성과 연관되어 있다. 신뢰란 이름에 대한 믿음으로 정의할 수 있다. 책임지기, 약속하기 또한 기명적 행위이다. 메시지를 전령과 분리하고 뉴스를 송신자와 분리하는 디지털 매체는 이름을 제거한다. (117-118)


이름이 부여되지 않으면 존경은 부여될 수 없는 건가라는 의문은, 당장 알라딘서재를 이루는 커뮤니티만 보아도 의구심이 드는 대목이다. 막연하게 생각했을 때 존경이란 그 사람의 행동과 언어의 총체로 부여받는 것이 아닌지. 아니면 저자가 여기서 사용하는 이름의 함의가 훨씬 넓은 것인지. 물론 악플을 도래하게 한 원인 중 하나가 익명성이라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너무 쉽게 대립항을 설정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3. 여기에도 메시지의 권력은 있다


블로그, 트위터, 페이스북 등의 매체는 커뮤티케이션을 탈매개화한다. 오늘의 의견사회, 정보사회는 이처럼 탈매개화된 커뮤니케이션의 바탕 위에 세워져 있다. 누구나 정보를 생산하고 송출한다. 커뮤니케이션의 탈매개화로 인해 한때 사회를 대표하는 엘리트, “여론 형성자”, 심지어 여론의 사제로까지 여겨져온 기자는 이제 불필요하고 시대착오적인 존재로 취급될 지경에 이르렀다. 디지털 매체는 모든 종류의 사제 계급을 몰락시킨다. 전반적인 탈매개화는 대표의 시대에 종지부를 찍는다. 오늘날에는 누구나 직접 나서려 하며, 자기 의견을 어떤 중개자도 통하지 않고 직접 발표하고 싶어 한다. 대표는 참가 혹은 발표에의 동참으로 바뀌어간다. (138)


탈매개화로 인해 대의 민주주의는 무너지고, 정치는 즉흥성과 신속성을 요구하게 된다는 게 글의 요지이며, 투명성의 요구가 획일화를 자발적으로 강요하게 한다는 것이 책의 메시지다. 정치의 모든 것이 정말 투명해지는 추세인지에 대한 논의는 차치하고, 이러한 탈매개화가 정말로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에서 사제 계급을 몰락시키고 있는지는 주목해보아야 한다. 모두가 메시지를 직접 낼 수 있는 플랫폼 안에도 유효한, 즉 영향력 있는 메시지를 보내는 메신저는 여전히 존재하며, 그들이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여론 형성자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쉽게 볼 수 있다. 새로운 여론 형성자와 기존의 여론 형성자가 대체로 일치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4. 친밀사회-여기도 여전히 극장이다


친밀사회는 제의화된 동작과 격식을 갖춘 행동을 불신한다. 그런 것들은 겉치레이고 진정성이 없다는 것이다. 제의는 탈개인화, 탈인격화, 탈심리화를 촉진하는 외면화된 표현 형식들로 이루어진다. 제의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표현적이지만, 그렇다고 자기를 전시하거나 노출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친밀사회는 심리화되고 탈제의화된 사회다. 그것은 고백의 사회, 노출의 사회, 거리를 모르는 포르노의 사회다. (75-76)


소셜미디어가 심리적 거리를 제거한 공간을 만들어냄에 따라 우리는 모든 것을 전시하고 표현하며, 그럼에 따라 공적 영역은 상실되고 사적 영역만이 남는다는 것이 주장의 핵심이다. 그러나 저자가 말하는 소셜 네트워크에도 여전히 18세기의 세계 극장의 속성이 남아 있으며, 우리는 우리가 보여주고 싶은 것, 또는 보여줘도 괜찮을 법한 것만을 제시한다. 그리고 이 안에도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동안 지켜야 할 예의, 상호작용 의례는 존재하며 여전히 형성 중이다.

 

 

이외에도 저자가 벤야민을 빌려 이야기하는 미()와 숭고의 차이는 내가 주워들었던 칸트의 정의와 사뭇 달라서 혼란스러웠으나, 이 책의 핵심적인 논의와는 거리가 있으므로 접어두기로 했다. 읽으면서 느꼈던 것 중 하나는, 현대 사회를 비판할 때에는 항상 근대로의 회귀를 주장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긍정성의 과잉과 성과주체의 자기착취라는 저자의 통찰은 새겨들어야 할 것이지만, 사유와 권력의 중요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근대적 질서의 회귀를 주장하는 것으로 비치기 쉽다. 근대로부터 배워야 할 것은 분명히 있지만, 지나간 시간은 되돌릴 수 없고, 모색해야 하는 것은 새로운 삶의 형식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AgalmA 2018-08-15 16: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병철 저자 책을 읽으면 명확하고 간명한 전개와 추진이 장점이라 그게 대중적 인기와 인지도를 넓힌 요인이기도 할 텐데요. 아무님 의견처럼 저자가 자신이 가진 패로 대립항들을 너무 일직선으로 연결하고 있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늘 들어요. 그래서 다 읽고 나서 그걸 고민하는 게 장점이라면 장점이고 단점이라면 단점 같달까요? ‘질문을 주는 책‘의 의미가 이런 건 아니라 생각되어서^^;;

아무 2018-08-15 22:19   좋아요 1 | URL
간명한 전개와 추진, 그리고 말하고자 하는 바의 선명함이 한병철을 읽는 즐거움 중의 하나라고도 말씀드릴 수 있을 텐데요. 다만 저자의 사상은 <피로사회>에서 전개한 이야기들이 점차 발전, 심화되는 형태인데 제가 신선함을 잃은 것도 별점에 영향을 준 거 같습니다. 책이 주는 질문이란 아무래도 책을 벗어나거나 거기에서 더 나아가는 질문들이 되어야 할 듯 싶은데, 제가 품은 질문들도 이런 류의 질문들은 아니었던 거 같아요^^;; 뒤에 남은 책들을 제가 찾아볼지에 대한 의구심도 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