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싸우듯이
정지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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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후장사실주의자로 알려진 8명 중에 소설가는 4명이다. 오한기, 이상우, 박솔뫼, 정지돈. 나는 오한기와 이상우는 포기했고, 박솔뫼와 정지돈은 아직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정지돈의 경우 「건축이냐 혁명이냐」, 「미래의 책」, 「나는 카페 웨이터처럼 산다」를 읽었었지만 무슨 내용인지 전혀 이해되지 않았었는데, 이번에 단행본으로 쭉 읽다보니 흐릿하게나마 그림이 잡히는 듯했다. 물론 아홉 편의 단편 중에 마음에 들었던 작품은 없었지만, 정지돈의 작품론을 대충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고나 할까.


아홉 편의 단편들은 '장'과 '우리들'로 나뉘어 있는데, 이 기준은 작품에 '장'이라는 인물이 나오느냐 나오지 않느냐다. '장'으로 분류된 네 편의 단편은 공통적으로 어떤 인물이 책을 찾아나서는 과정을 그린다. 그 책은 가상의 것이기도 하고 실제로 존재하는 대상이기도 한데, 이 과정 중간중간에 특정 작가(사데크 헤다야트, 보리스 사빈코프 등등)와 관련된 사실들이 '인용'된다. 이것 때문에 그의 소설을 두고 지식조합형 소설이라는 말을 자주 하지만, 인용은 기억상실에 걸린 '화자-나'(「뉴욕에서 온 사나이」)가 세계를 이해하려는 방식에 가깝다. 에리크가 헤다야트의 『눈먼 부엉이』 판본을 모으고(「눈먼 부엉이」), 장이 일기에 사빈코프의 『창백한 말』을 받아적는 것(「창백한 말」) 역시 이와 연결되며, 작가가 소설을 바라보는 시선과도 관련이 있다. 「일기/기록/스크립트」에서 인용되는 유리 로트만의 표현을 빌리자면, "날마다 반복되는 평범한 행위들이 의식적으로 예술 텍스트의 규범과 법칙을 지향"하는 행위시학의 방식, 예술과 삶이 뒤섞이는 방식에 가까운 것이다.


나는 가끔 무슨 말을 하고 싶은데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모르겠다고 했다. 아무 말이나 하고 싶지만 아무 말이나 들어줄 사람이 없다고 했다. 에리크는 자신도 동일한 문제를 가지고 있으며, 우리는 모두 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는 내게 글을 쓰라고 말했다. 글을 쓰면 삶이 조금 더 비참해질 거라고, 그러면 기쁨을 찾기가 더 쉬울 거라는 게 그의 말이었다. 나는 그것 참 듣던 중 반가운 소리라고 했다.

- 「눈먼 부엉이」 (34)


장의 이야기는 그가 글을 쓰게 된 계기에 대한 것이었다. 평범한 회사원이던 그에게 어느 날부터 의미를 알 수 없는 문장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는 문장들을 기록하기 시작했는데 그 양은 날이 갈수록 늘어나 노트를 가득 채웠으며, 회사 일에 집중하기 힘들 정도로 시도 때도 없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급기야 그는 쏟아지는 문장에 파묻혀 마치 죽은 사람처럼 정신을 잃거나 몽유병자처럼 떠돌기도 했다. 정신을 차려보면 생소한 공원이나 카페, 건물의 계단 위였다. 장은 회사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 「미래의 책」 (104-105)


'우리들'로 넘어가면 작품의 서사는 더 줄고 인용이 압도적으로 늘어나는데, 이 역시 '장'에서 살짝 드러났던 메타소설적 요소가 더욱 강화된 것이다. 「주말」은 어느 날 서해안의 항구들을 여행한 뒤 고다르의 「주말」(1967)을 보며 떠올랐던 이야기의 인용이며, 「건축이냐 혁명이냐」 역시 고다르의 「김중업」을 찾다가 발견하게 된 황손 이구와 그가 살았던 건축사(史)의 인용이고, 「나는 카페 웨이터처럼 산다」도 책을 찾다가 발견하게 된 프레데릭 키슬러와 레이몽 루셀에 대한 인용의 연속이다. 그리고 여기에서도 작가가 소설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이 살짝 드러난다. 중요한 것은 "대화의 내용보다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며, "소위 말하는 미술품보다 이런 기록물이 더 미학적"이라는 것.


어느 순간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 이라는 프랑스 철학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내가 그의 책 반딧불의 잔존이 국내에 번역되었다는 말을 하자 동기는 반가운 기색을 드러내며 지금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이 사진작가 아르노 지쟁거와 파리의 팔레 드 도쿄에서 환영의 새로운 역사Nouvelles Histoires de Fantômes라는 전시를 진행 중이며 전시의 부제는 새로운 유령의 이야기라고 했다. 전시장은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과 아르노 지쟁거가 수집한, 언뜻 봐서는 연관을 찾을 수 없는 다양한 이미지와 수집물로 가득하며 그러한 이미지는 통상 말하는 예술적인 무언가가 아닌 단순한 기록 사진과 사소한 물품이 뒤섞인 것들로, 이를 통해 기획자들의 이미지의 도서관, 그러나 원하는 정보를 정확히 찾을 수 없고 고정된 정보가 존재하지 않으며 기묘한 확장성과 통일성이 있는 이미지의 궁전을 만들어냈다고 말하며 이는 아비 바르부르크로부터 이어져온 프로젝트에 연원을 두고 있다고 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박찬경이 한 이야기, 자신은 이상하게도 1960년대에 찍힌 다큐멘터리 사진, 전혀 결정적인 순간이라고 할 수 없는 사진을 보며 매력을 느끼는데, 이는 소위 말하는 미술품보다 이런 기록물이 더 미학적이기 때문에, 빈티지한 취향이나 사회적 요인 때문이 아니라 아름다움 그 자체로서 그런 기록물이 앞서기 때문에 그런 기록물을 수집하는 행위로 작품을 만들어왔다고 한 말을 떠올렸다.

- 「건축이냐 혁명이냐」 (165) (강조는 인용자)


물론 나의 이 독법으로는 「만나는 장소는 변하지 않는다」를 설명할 수 없다. 이 작품은 화자인 '정지돈'이 엔카베데(소련의 정치경찰)에게 붙잡혀 콜호스로 가다가 돌아오는 이야기다. 이 작품에도 여러 인물들이 나오지만 내가 알아본 인물은 조지 스마일리밖에 없다... 물론 그것이 나에게 더 공부해야 되나라는 고민을 안겨주진 않는다. 이 소설집은 아는 만큼 보이는 소설들의 집합이고, 이 소설집이 아니었다면 이름도 들어보지 못했을 인물과 책과 영화 들의 쓰나미 같아서 도저히 찾아볼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왜 이런 소설을 쓰는가.



인터뷰에도 나오지만 작가가 가장 큰 관심을 드러내는 사람은 장 뤼크 고다르다. 매체에 대한 고민과 문학과 예술에 대한 조예를 영화에 녹여내는 방식, 그리고 매체를 뛰어넘어 영화에 대한 정의를 바꾸겠다는 의지 등이 그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것 같다(고다르에 대한 이야기는 2분 10초쯤부터 나온다). 소설에 대한 그의 생각이 많이 녹아있는 글이 「일기/기록/스크립트」인데, 그는 서두에서 하스미 시게히코를 인용하며 이렇게 말한다. "미술도 문학도 어느 순간 연주자의 시대가 되었다"고. 이후 그가 니콜라 부리오의 "기호 탐험가semionaut"를 인용하며 지목하는 소설가는 제발트, 데이비드 실즈, 엠마뉘엘 카레르다.


데이비드 실즈는 문학은 어떻게 내 삶을 구했는가(2014)에서 이렇게 쓴다. “나는 위대한 인물이 방에서 홀로 걸작을 쓴다는 생각을 이제 믿지 않는다. 내가 믿는 것은 병리학 실험실, 쓰레기 매립지, 재활용 센터, 사형선고, 미수로 끝난 자살 유언장, 구원을 향한 돌진으로서의 예술이다.” 그는 소설가였지만 어느 순간 픽션 쓰기를 그만둔다. 그는 자신이 끌어 모은 온갖 잡다한 메모와 기억을 콜라주한다. 그의 글은 논픽션인가, 에세이인가, 자서전인가. 이건 그냥 책이다. 빌렘 플루서는 글쓰기에 미래는 있는가(1987)에서 새로운 창작자는 자기 스스로를 더 이상 독창적인 창작자로서가 아니라 언어 배열자로서 인식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그가 조작하는 언어도 역시 그에게서는 더 이상 그 자신의 내면 속에서 집적되어 있는 원자재로서가 아니라, 그 자신을 매개로 배열되기를 그에게 강요하는 하나의 복합적인 체계로서 나타난다. 그는 자신의 고유한 시간 흐름들을 짜깁기하고 있다. 그는 더 이상 행을 따라가면서 읽지 않고, 자신의 고유한 망을 짜고 있다.” 잘나가던 소설가였던 카레르 역시 어느 순간 픽션 쓰기를 그만둔다. 카레르의 리모노프(2011)는 논픽션인가 팩션인가 에세이인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나 리샤르드 카푸시친스키는 어떤가.

- 「일기/기록/스크립트」 (289-290) (강조는 인용자)


그는 사람들이 흔히 '형식'이라고 규정하는 것에 의구심을 품고 있는 듯하다. 현재에 적확한 형식이 있다는 환상을 부정하고 그것을 따르지 않으려는 거부감이 그의 작품에서 움틀댄다. 그는 어쩌면 자신을 "어떤 사조가 개가를 올리는 그 시점에 이미 거기서 이탈"하려는 작가로 규정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시간이 지난 후에, 우리는 "우리는 외친다. 볼라뇨라고."를 패러디해서 "우리는 외친다. 후장이라고."라고 외치며 열광하게 될까. 나는 이에 대해서 회의적이지만, 그들이 배수아나 정영문의 흐름을 새롭게 이으려고 노력하는 작가들로 보이기도 한다.


하나의 거대한 잡학사전 같은 이 책에서 마지막으로 인용하고 있는 작품은 플로베르의 『부바르와 페퀴셰』의 마지막 부분이다. 마지막에 모든 일에 실패하고 다시 필경을 시작하는 그들의 모습을 인용한 것은 필경-인용이야말로 새로운 예술-삶의 모습, 김수환이 『책에 따라 살기』에서 말하는 "책 읽기 모델"이라는 암시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의 소설이 앞으로 소설이 나아갈 새로운 방향이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한 치 앞도 모르는 것이 내 좁은 눈이기에 판단을 유보해둔다..

‘책에 따라 살기’는 유리 로트만이 쓴 표현으로 행위시학이라는 로트만의 연구영역의 "집중적인 고찰 대상"이다. 행위시학이란 "날마다 반복되는 평범한 행위들이 의식적으로 예술 텍스트의 규범과 법칙을 지향했으며 직접적으로 미학적인 것으로 체험되는" 상황을 가리킨다. 김수환에 따르면 삶과 예술을 섞어놓으려는 이러한 현상은 18세기 러시아에만 국한된 현상은 아니다. (…) 예술-삶의 뒤섞임은 모든 시대의 가장 급진적인 예술이 결과적으로 닿았던 최종적인 형태이며 작가들이 탐구했던 처음이자 마지막 주제이다. 그러니까 김수환/유리 로트만의 ‘책 읽기 모델’은 예술-삶이 맞이하게 되는 필연적인 결과 아닐까.
- 「일기/기록/스크립트」 (300-3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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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6-07-30 1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리 로트만 진짜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네요. 영화적 서사와 소설의 서사인가... 뭐 그런 책이 있었었었는데 말입니다..

아무 2016-07-30 14:03   좋아요 0 | URL
저도 에코 때문에 기호학 공부를 해볼까 생각할 때쯤에 이름만 듣고 읽어보진 못했는데, 이번에 찾아볼까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른건 몰라도 지적인 자극은 충분히 준 소설집이었습니다 ㅎㅎ..

곰곰생각하는발 2016-07-30 14:11   좋아요 0 | URL
정지돈 정지돈 하네요.. 여기저기서.... 그래도 읽을 생각은 하지 않았는데(솔직히 고백하면 전 한국 소설 스타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이 글 읽으니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무 2016-07-30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고 나면 실망하실지도 모릅니다. 저도 흥미롭지만 소설로는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하지 않거든요..ㅎㅎ 그래도 영화에 대한 지식이 저보다 많으신 곰발님은 다른 재미를 찾으실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드네요. 전 고다르 영화를 한편도 본 적이 없어서..^^;;

곰곰생각하는발 2016-07-30 14:22   좋아요 1 | URL
전 제가 읽은 책 가운데 팔 할은 재미없어 하기에 추천한 책이 재미없다고 실망하지는 않습니다. 유독 책 거의 안 읽는 사람들이 추천해 달라고 해서 추천하면 재미없다고 지랄하더라고요...
그래서 책 안 읽는 사람이 책 추천해 달라고 하면 추천 안 합니다..ㅎㅎ

cyrus 2016-07-31 13:17   좋아요 1 | URL
To. 곰발님 // 캐공감입니다! 전 제 동생에게도 책 추천하지 않습니다. 동생이 책을 많이 읽지 않거든요. 보긴 하는데 거의 여행 에세이를 선호하기 때문에 제가 다른 분야의 책을 추천하는 의미가 없어요. ^^

곰곰생각하는발 2016-07-31 1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절실히 깨닫게 되죠. 책 안 읽는 사람에게 책 추천하다가는 욕만 잔뜩 먹는다는 사실. 책 추천은 알라디너끼리 하는 게 최상입니다.
 
미래를 도모하는 방식 가운데
김엄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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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 '삶'과 '생활'이라는 단어를 구분해서 사용하는 사람으로서 말하자면, 이 소설집에 실린 소설들이 이야기하는 것은 '생활'이다. 그런데 다 읽고 나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삶을 산다는 것은 착각이고, 사실 모든 것이 지리멸렬한 '생활'로 편입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


『미래를 도모하는 방식 가운데』에 실린 아홉 편의 단편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주인공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무기력하다. 실제로는 열심히 무언가를 하려는 것처럼 보이는 인물들의 행동도 다르게 살아보겠다는 제스처가 아닌, 그냥 일상으로 편입되어버리는 소극에 불과하다. 그래서인지 단편 안에서 비슷한 문장 구조가 반복되거나 변주되고 이를 이용한 언어 유희가 종종 등장한다.


영철은 집에만 오면 밥 생각이 없어졌다. 그에 비해 아내는 온종일 밥 생각뿐이었다. 그녀에게는 끼니 해결이 하루 일과 중 가장 큰 고민이었다. 영철이 출근한 뒤에 혼자 먹는 밥은 맛이 없었고, 영철이 퇴근한 뒤에 그와 함께 먹는 밥은 더 맛이 없었다. 그녀는 친정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고민을 토로했다. 엄마, 뭘 먹어도 맛이 없어. 나 알지? 뭐든지 맛있게 먹는 거. 김영철이랑 같이 살면서부터 입맛이 죄다 떨어졌나 봐. 어쩌면 좋아? 친정 엄마는 오이지와 게장을 추천했다.

- 「영철이」 (87쪽)


나도 며칠 그랬어. 그럴수록 잘 먹고 잘 자야 돼. 당신 밥은 잘 먹고 살아? 아내가 물었다. 밥맛이 없네. 혼자 먹어도 맛이 없고, 동생 식구랑 같이 먹으면 더 맛이 없으니. 아내는 영철에게 오이지와 게장을 추천했다. 

- 「영철이」 (106쪽)


비슷한 문장이나 단어의 반복이 주는 리듬감이나 언어 유희가 단편들을 읽는 하나의 재미이긴 하나, 이것이 가끔 과하다고 느껴질 때도 있다. 이를테면 "괜찮찌개" 같은 것들(「그의 사정」). 이런 문장의 반복들이 특징없는 인물들과 결합하면서  무의미함과 덧없음이 증폭되는데, 이런 인물들을 그려내는 데는 작가의 세계관이 한몫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한다. 그녀가 바라보는 세계는 "떡이나 개, 가끔은 좆"으로 요약되는, 원하는 고기를 먹기 위해 사장이 주는 "그 개 같고 좆같은 떡을" 받아먹으며 자아실현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하는 돼지우리의 세계다.


라라 양은 내가 아는 돼지 중에 가장 똘똘하고 예뻐요. 내가 잘 먹이고 잘 키워줄게요. 뭐든지 잘 먹어야 해요. 자, 아아. 사장은 서빙 아줌마가 놓고 간 인절미를 라라의 입 앞에 내밀었다. 그다음에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아앙. 라라가 그 개 같고 좆같은 떡을 받아먹은 것이다. 라라는 인절미를 모두 삼킬 때까지 웃고 있었고 행복해 보였다. 저것이 라라가 말하는 직업윤리와 자아실현의 길이라면, 과연 그녀는 돼지였다.

- 「돼지우리」 (28쪽)


떡 이외의 모든 음식에서 오르가슴을 느낄 수 있는 우라라가 사장이 주는 떡을 넙죽 받아먹는 장면, '나'가 자신의 손이 "돼지 족"이 되는 것을 바라보는 장면은 '돼지우리'라는 고깃집 이름과 연결되며 작가가 바라보는 세계의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여기서 우라라와 '나'는 사장에 대한 강한 거부감도, 번듯한 직업을 갖지 못한 것에 대한 자괴감도 보여주지 않는다. 우라라는 의식주 중 '식'만을 중요하게 여겼기에 고기만 먹으면 되는 (비)정규직에 지원했을 뿐이고, '나' 역시 불어오는 살을 바라보며 그냥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돼지우리 속에서 살아가는 돼지족(族)의 자화상이라고 해야 할까.


결국 이들이 보여주는 일상은 현실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모습들이다. 하루하루를 들여다보면 제각기 다른 일들이 일어나지만 그것들이 삶의 전환점이 되거나 의미를 획득하지 않고 일상이라는 이름으로 묶이듯이, 그들이 도박장에서 운수 좋게 삼뻑을 하거나, 바다로 갑자기 떠나거나, 어떤 새 폴더도 아닌 '느시' 폴더에 매뉴얼을 저장하기로 하는 행동들도 어떤 전환점이 되지 않고 일상에 포섭된다. 그러므로 Y에게 사기를 친 김수동이 누군지(「어느 겨울날」), 왜 하필 '느시' 폴더인지(「느시」), 왜 E가 발목을 돌리는 습관을 갖게 되었는지(「고산자로12길」)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어차피 작가는 해답을 제시해주지 않는다).


단편들은 발표된 순서대로 실려있는데, 뒤로 갈수록 안 그래도 약했던 인물들의 활동은 점점 더 축소되는 모습을 보이고, 점점 더 무기력해진다. 심지어 「고산자로12길」과 「느시」로 가면 인물들은 이름마저 상실하고 a, b, c 같은 이름으로 불리며, 회사에서 얼마든지 대체가능한 일상을 보내는, 일하다가 다른 듯 비슷한 메뉴의 점심을 먹고 뒤풀이를 하는 패턴만 보여줄 뿐이다. 단편집을 처음 읽을 때는 충격적일 만큼 단조롭고 무기력해서 흥미있게 읽었지만(무사건성이라고 불러야 할까?), 신선함에 익숙해진 뒤에도 이런 작법이 의미있을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남는다. 시의성은 가질 수 있겠으나, 삶과 생활의 경계마저 붕괴된 인물들의 무기력한 삶을 그려낼 뿐 질문을 품고 있지는 않다는 인상평으로 정리할 수 있을 듯하다. 아마 그래서 등단작인 「돼지우리」가 제일 마음에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장편소설에 선뜻 손이 가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어쨌건 나는 이제 직업을 가진 거야. 여기가 내 첫 직장이니까 축하나 해줘. 나는 직업윤리를 엄수하는 성실한 일꾼이 되겠어. 라라는 혼자서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했다. 그리고 진짜 내가 돼지가 되었다 치자. 너도 들었지? 본연의 모습을 찾는 거래. 자아실현이야. 그거야 말로 내가 바라는 거야. 이제 떡 같은 면접은 집어치우는 거야. 자유야 자유. 나는 내가 되는 거야. 돼지가 되는 거라고. 라라는 입을 크게 벌리고 괴상스럽게 웃었다. (「돼지우리」, 27쪽)

너는 인생이 뭐라고 생각하냐? 대뜸 영철이 팔광에게 물었다. 테트리스요. 팔광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테트리스? 벽돌 쌓는 게임 말이냐? 영철이 소주를 홀딱 원샷하며, 되물었다. 그냥 쌓기만 하는 거 아니에요. 이상하게 쌓으면 죽어요. 잘 쌓아야지 없어지고 다시 쌓을 수 있어요. 또 쌓고 없애면, 벽돌이 내려오는 속도가 점점 빨라져요. 나는 그 속도를 따라서 계속 쌓고 없애야 돼요. 속도를 못 따라가면 나는 죽어요. 없애기 위해서 쌓는 것 같지만, 쌓기 위해서 없애는 거예요. 팔광은, 테트리스를 신앙 삼은 듯, 허공에 대고 빠르게 이야기했다. 미친놈, 그게 왜 인생이야? 영철이 헛웃음 치며 물었다. 죽으면 열 받거든요. 팔광이 단호히 대답했다. (「삼뻑의 즐거움」, 42-43쪽)

행복이 뭐예요? 다섯 살 된 영철의 조카는 TV를 보다가 이것저것 영철에게 자주 물어보았다. 행복이 뭔지 모르니? 영철이 조카에게 되물었다. 몰라요. 조카가 대답했고, 나도 몰라, 너도 죽을 때까지 모를 가능성이 다분하다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어제 너희 아버지가 케이크를 사 와서 네 기분이 어땠니? 조카에게 물어보았다. 빨리 초 켜고 싶었어요. 불 끄고 먹고 싶었어요. 빨리 먹고 싶었어요. 조카는 어제 먹은 케이크의 기억이 생생했는지 양팔을 세차게 흔들었다. 그게 행복이란다,라고 영철은 말해주려다, 아이에게 거짓말을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아니 어쩌면 조카에게는 그것이 행복일 텐데 싶어서, 그게 행복이란다, 말해주려다, 아무래도 영철이 생각하기에 행복이란, 행복이라는 게 그러니까 그렇게 그런 게 아닌데 싶어서, 그랬구나, 케이크를 좋아하는구나, 조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영철이」, 103-1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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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6-07-21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소설집 읽었씁니다. 말장난 같다고나 할까요. 적당히 쓰면 좋은데
과도하게 쓴 느낌.. 오히려 말장난을 위해서 서사를 비튼 것 같기도 한 작품 읽은 듯한 느낌..
뭐야. 이거 이런 생각이들더군요..

아무 2016-07-21 13:47   좋아요 0 | URL
말장난이 과하다는 느낌이 분명히 있죠. 사실 뒤로 갈수록 서사도 별로 중요해지지 않는 작품이라.. 언급하지 않은 작품은 개인적으로 정말 별로여서 할 말이 없었던 작품입니다. 표제작이라든가.. 기타 등등..
한번쯤은 읽을만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다른 작품도 계속 볼지는 잘 모르겠네요 ^^;;

cyrus 2016-07-21 14: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장난은 곰발님처럼 읽는 사람 마음을 밀당하면서 써야 재미있습니다. 이 책을 안 읽어봐서 잘 모르겠지만, ‘괜찮찌개’는 억지스러운 표현으로 느껴집니다.

아무 2016-07-21 14:47   좋아요 0 | URL
`괜찮다`는 말을 반복, 변주하면서 나왔던 말이었습니다. 그것도 밑줄에 적으려다 그냥 안 적었는데.. 말장난에서 가장 중요한 건 밀당이죠. 제가 매번 곰발님 글을 보며 감탄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에리직톤의 초상 이승우 컬렉션 1
이승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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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물의 여신 데메테르의 신성한 정원에는 숲의 요정들이 둘러싸며 놀던 커다란 나무가 있었다. 에리직톤은 요정들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그 나무를 도끼로 쓰러뜨렸다. 분노한 데메테르는 리모스를 보내 그에게 아무리 먹어도 허기를 느끼는 저주를 내렸다. 그는 눈에 보이는 모든 음식을 먹어치웠지만 배고픔을 면할 수 없었다. 부자였던 그는 음식을 구할 돈이 더 이상 없게 되자 자신의 딸까지 팔았다. 아버지에 의해 팔려진 그녀는 예전에 자신의 순결을 앗아갔던 포세이돈에게 도움을 청했다포세이돈은 그녀에게 원하는 대로 모습을 바꿀 수 있는 변신의 능력을 주었다. 그녀는 모습을 바꾸어 그녀의 주인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었다. 그녀의 능력을 알게 된 에리직톤은 되돌아오는 딸을 다시 팔아가며 허기를 채워나갔다. 그러나 그의 끝없는 배고픔은 자신의 몸을 모두 뜯어먹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소설은 데메테르가 아닌 시어리어스의 숲이라고 적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저격사건을 모티프로 창작된 소설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은 병욱('나')를 제외하면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하나는 정상훈 교수와 그의 딸 혜령으로 대표되는 수직지향적 인물이다. 이들은 끊임없이 신과의 관계를 회복하고자 하며, 수직적 관계의 회복 없이 수평적 관계의 개선이 불가능하다고 여긴다. 혜령은 후반부에 가서야 이를 명시적으로 드러낸 듯 보이지만 이전의 모습에서도 이런 세계관을 지니고 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정상훈 교수의 설교를 잠시 보자.


그런데 눈치채셨겠지만 인간이 인간을 향해 저지르는 이런 수평적 폭력은 신과 인간 사이의 수직적 폭력을 전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 아벨이 카인에게 무슨 짓을 해서 카인이 아벨을 죽인 것이 아닙니다. 둘 사이에 분리가 일어났을 뿐입니다. 아벨은 카인이 아니고 카인은 아벨이 아니게 되었다는 것뿐입니다. 신과 인간 사이 관계의 궤멸이 인간과 인간 사이 관계의 궤멸을 불러냅니다. (...) 절대자와의 비뚤어진 수직 관계를 방치하고 인간 사이의 평등한 관계만을 기획하는 것은 환상에 불과합니다. (21쪽)


이와 반대로 형석과 태혁, 델브루케로 대표되는 수평지향적 인물들이 있다. 이들의 눈에 신이나 신화로 대변되는 수직과 초월의 논리는 현상 구조의 영구화에 기여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이들의 동기는 각각 달랐지만, 절대자의 논리에 도전한다는 점에서 닮아있고, 에리직톤의 초상(肖像)들이다. 결국 그들이 지향하는 것은 신화의 해체이며, 그를 통해 실현되는 해방이다. 태혁이 쓴 글처럼.


이 에리직톤의 신화와 기본적으로 구조가 같은 설화가 「출애굽기」에서 발견된다. 출애굽의 영웅 모세는 에리직톤의 다른 이름으로 읽을 수 있다. 에리직톤이 실패한 싸움에서 모세는 승리한다. 성공했는가, 실패했는가, 두 사람의 차이는 그것뿐이다. (...) 그리하여 비로소 인간을 억압하는 잘못된 신화가 해체되면서 경이적인 새로운 신화가 싹트기 시작한다. 새로운 신화 속에서 신적인 힘은 이제 더 이상 억압적인 절대 권력을 후원하는 역할을 하지 않는다. 우리는 여기서 잘못된 권력 구조를 영속적으로 보장해주는 대신 억눌린 자들의 옹호자, 노예들의 구원자로 다시 태어나는 신적 권위를 만난다. 신화에 기댄 권력은 사실상 붕괴되고, 안정과 질서의 신화는 자유와 해방의 삶으로 대치된다. 모세에게 와서 비로소 에리직톤은 명예를 회복한다. 그러니까 모세는 비신화화한 에리직톤이다. (244-245쪽)


나는 기꺼이 에리직톤이기를 원한다. 에리직톤의 신화를 부수기 위해 더 많은 에리직톤들이 필요하다는 것이 내 믿음이다. 에리직톤들이 결속하여 마침내 신화를 부수게 되는 순간에 얻게 될 빛나는 이름을 나는 알고 있다. 그것은 모세이다. 즉 해방자이다. (...)

그러니까 신은 신화를 거부한다. 신화를 창조하고 신화 속에 안주하는 것은 신이 아니라 인간들, 신과 신화를 이용해 현실을 유지시키려는 자들이다. 신을 신화 속에 가두지 말아야 한다. (246-247쪽) 


기독교적인 세계관에 근거한 작품이고, 그만큼 관념적인 색채가 짙다. 하지만 1부에서 중심을 이루던 신과 인간의 관계는 2부에서 80년대라는 시대적 상황과 결합하며 새로운 의미들을 파생시킨다. 81년에 발표했던 1부에 2부가 붙음으로써, 정확히 말하면 태혁이라는 인물이 추가됨에 따라 관념들이 형체를 갖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태혁이 에리직톤에 새롭게 부여하는 의미들, 더 큰 악의 제거를 위해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신의 뜻이라고 볼 수 있는지의 문제 등은 이 작품을 읽으면서 고민하게 되고 의문을 던질 수 있는 이야기들이다. 그리고 이야기 속에서 그들은 수직의 회복과 붕괴를 놓고 끊임없이 대립각을 세운다.


신이 아닌 인간들의 결말은 처참하다. 그들의 이름은 모세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형석과 델브루케의 교황 암살 시도는 두 번 모두 실패로 돌아갔고, 노동운동을 하던 태혁은 방화 사건의 주범으로 경찰에 끌려갔다. 수녀원으로 들어가 수직의 회복을 지향하던 헤령 역시 경찰들의 수녀원 습격으로 또다시 상처를 입고, 그들을 지켜보던 주변인 병욱도 외압으로 인해 신문사에서 해고를 당한다. 


마지막 부분에서 고아원에 들어간 헤령과 그녀를 찾아간 병욱이 보여주는 태도는 수직과 수평의 공존을 지향하는 듯하지만, 내가 보기엔 수직 안에서의 수평을 지향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생의 이면』과도 연결된다. 성(聖)이 다른 곳에 있는 게 아니라 속(俗)의 한복판에 있다는 태도.


"(...) 사람들 속에서가 아니면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는 이 단순하고 소박한 진리를 깨닫기가 왜 그렇게 어려웠는지 모르겠어요. 애초에 신앙과 삶을 별개인 양 구별해서 생각한 게 착각이었다고 해야 할까? 믿음이 삶과 떨어져서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무엇이 아니잖아요. 삶에서 떨어져 나간 신앙이란 있을 수 없고, 따라서 인간에게서 떨어져 나간 신 또한 무의미하겠지요." (294쪽)


나는 비로소 성(聖)의 뜻을 이해할 것 같은 심정이 되었다. 인도인들은 평범한 바윗덩이에 붉은 고리를 걸어 놓음으로써 그 바위를 성별(聖別)시킨다. 붉은 고리에 무슨 특별한 힘이 있어서는 아니다. 그것은 그냥 붉은색의 평범한 고리일 뿐이다. 그러나 그 붉은 고리는 그 바위를 성역이라고 선언한다. 그리하여 그 바위는 거룩한 바위로 화한다. 성은 속(俗)의 한복판에, 하나의 문으로 구별되어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전혀 다른 세계가 나타나는 것이다. (『생의 이면』, 154쪽)


이는 개혁과 형식 사이에서 "팽팽하게 긴장을 유지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라고 생각하는 병욱의 태도에서도 나타난다. 개혁과 형식의 포섭은 실현될 수 없는 이상이기에 둘 사이의 긴장을 항상 유지하는 지향성. 종교적인 관점에서 보면 결국 절대자와의 수직적 관계 아래에서 수평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신화를 전복하지 않고 유지하겠다는 태도가 아닐까. 이는 정 교수에게 주례를 부탁한 뒤 약혼자 희수에게 전화를 거는 마지막 장면에서 더욱 굳어지는 듯하며, 이후의 병욱은 결국 목회자의 길을 걸을 것 같다는 암시를 내게 준다. 1부의 결말과 2부의 결말이 주는 느낌은 분명 다르지만(정말 다르다. 첫 중편소설인 1부에서 끝났다면 나는 별로 좋은 평가를 내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 사유의 끝은 비슷한 것이 아닌가라는 느낌을 준다. 1부의 결말이 수평을 지향하는 자의 몰락을 보여준다면 2부의 결말은 수평마저 포섭해버린 수직의 느낌이랄까... 내 짐작이 맞다면 정말 기독교적인 결말이다라는 생각이 든다. 하긴 그런 세계관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니까..


그의 다른 소설이 그렇듯, 소설 속 인물들이 보여주는 사유는 치밀하면서 치열하고, 관념적인 색채가 두드러진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주제와 관념의 무거움을 문장의 힘으로 극복할 줄 안다. 읽으면서 얼마나 밑줄을 많이 그었는지..(물론 원래도 많이 긋는다) 유려하게 읽히는 문장을 빠르게 따라가다 보면, 깊은 사유가 담긴 묵직한 질문들이 에리직톤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형석의 꿈과 사상, 태혁의 손으로 재해석된 신화, 주변인으로서 고뇌하는 병욱의 시선 등 각각의 사유들은 날카롭게 인간 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새로운 신화를 창조하려는, 기존의 신화를 해체하고 자유와 해방의 삶을 찾으려는 시도는 오늘날에도 좌절될 수밖에 없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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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실격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3
다자이 오사무 지음, 김춘미 옮김 / 민음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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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렬한 이상주의자였던 적이 있었다. 정답만을 강요하는 사회/학교에서 자유를 찾고,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는 거인이 될 거라고 생각했던 시절. 스무 살이 되면 공부나 기타 행동에 대한 강요나 억압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누리며 낭만을 쫓는 예술가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시절. 교과서 속 지식이 아닌 진정한 앎의 세계를 찾아 헤매며 글을 쓰겠다는 신념으로 충만했던 시절. 그때의 나는 아마 주변 또래들과 내가 다르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나'는 남들과 달리 수능을, 좋은 대학을 넘는 진정한 가치를 추구한다는 믿음이 있었으니까. 돌이켜보면 그저 책 몇 권을 더 읽었던 사람이었지만.


『인간 실격』을 읽으면서 그 시절을 떠올리게 된 것은, 그때의 내가 요조와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 시기에 이 책을 읽었더라면 성전처럼 떠받들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해서였다. 그때의 나도 요조가 품었던 질문 중 일부를 앓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다만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나'가 아니어서, 그의 삶이 마냥 긍정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나 역시 "인간"이라는 종의 질서에 편입되었기 때문일까?


늘 인간에 대한 공포에 떨고 전율하고 또 인간으로서의 제 언동에 전혀 자신을 갖지 못하고 자신의 고뇌는 가슴속 깊은 곳에 있는 작은 상자에 담아두고 그 우울함과 긴장감을 숨기고 또 숨긴 채 그저 천진난만한 낙천가인 척 가장하면서, 저는 익살스럽고 약간은 별난 아이로 점차 완성되어 갔습니다. (19쪽)


어린 시절부터 요조는 자신이 '인간'과 다른 종(種)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의 행동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기에 요조는 인간에 대한 "최후의 구애"의 방법으로 익살을 선택한다. 익살은 스스로를 우스꽝스럽게 만들어 타자의 경계심을 풀어주는 것이다. "음산한 도깨비 같은" 자신을 받아줄 수 없는 인간 세계에서 요조가 살아남는 방법은 스스로를 낮추는 익살이라는 연기였다. 하지만 요조가 동질감을 느꼈던 다케이치는 그의 연기를 알아채고, 그 앞에서 요조는 자신과 가까운 모습을 내보인다.


"나도 이런 도깨비 그림을 그리고 싶어."

인간을 너무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무시무시한 요괴를 자기 눈으로 확실히 보기를 바라는 심리. 신경이 날카롭고 쉽게 겁먹는 사람일수록 폭풍우가 더 강하게 몰아치기를 바라는 심리. 아아, 이 일군의 화가들은 인간이라는 도깨비에게 상처 입고 위협받다 끝내는 환영을 믿게 되었고 대낮의 자연 속에서 생생하게 요괴를 본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익살 따위로 얼버무리지 않고 본 그대로 표현하려고 노력한 것입니다. 다케이치가 말한 것처럼 과감하게 '도깨비 그림'을 그려낸 것입니다. (40쪽)


그리고 호리키가 있다. 요조는 자신의 정체를 알아챈 사람으로 다케이치와 검사를 말하지만, 내가 보기엔 호리키도 요조의 정체를 알고 있었을 것 같다. 다만 그는 "인간"답게 요조를 이용했을 뿐. 어쨌든 호리키와 만난 덕분에 요조는 자신에게 공포를 주는 "이 세상의 합법"에서 "비합법"으로 도피한다. 하지만 세상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를 질책하고, 이때부터 그의 인생은 파멸로 치닫는다. 달리 말하자면, 그의 파멸은 끊임없이 죄가 쌓이는 과정이다.


요조의 여성 편력은 그가 여자를 다른 인간만큼, 아니 그들보다 더 이해할 수 없는 생물로 여겼다는 점에서 선뜻 이해가 되지 않지만, 그가 두려워하는 인간 세상의 원형이 아버지라는 것을 생각하면 납득이 되기도 한다. 실제로 그가 창녀를 묘사한 부분을 보면 "인간도 여성도 아닌 백치 혹은 미치광이"처럼 느껴져 "안심하고 푹 잘 수 있었"다고 되어 있다. 그에게 항상 실체 없는 공포의 대상이었던 세상의 남성성이 그를 여자와 "동류"라고 인식하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언제나 인간과 세상에 몸을 움츠리고 있던 요조가 변한 것은 세상에 대한 인식이 변하면서부터다. 호리키와의 대화 도중 그는 문득 세상이 실체 없는 것이 아닌 개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야비한 술꾼"으로 전락해 무뢰한으로 파멸해간다. 세상이 부여하는 억압과 멸시를 못 이긴 나머지 세상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행위가 아니었을까. 그가 무뢰한이 되어가는 과정 역시 자신을 '인간'으로 받아주지 않는 세상에 대한 반항이었을지도 모른다.


세상, 저도 그럭저럭 그것을 희미하게 알게 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세상이란 개인과 개인 간의 투쟁이고, 일시적인 투쟁이며 그때만 이기면 된다. 노예조차도 노예다운 비굴한 보복을 하는 법이다. 그러니까 인간은 오로지 그 자리에서의 한판 승부에 모든 것을 걸지 않는다면 살아남을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럴싸한 대의명분 비슷한 것을 늘어놓지만, 노력의 목표는 언제나 개인. 개인을 넘어 또다시 개인. 세상의 난해함은 개인의 난해함. 대양(大洋)은 세상이 아니라 개인이다, 라며 세상이라는 넓은 바다의 환영에 겁먹는 데서 다소 해방되어 예전만큼 이것저것 한도 끝도 없이 신경 쓰는 일은 그만두고, 말하자면 필요에 따라 얼마간은 뻔뻔하게 행동할 줄 알게 된 것입니다. (97쪽)


요조의 파멸은 자신의 구애를 받아주지 않은 인간에 대한 도피 또는 반항처럼 읽히기도 하고, 소속될 수 없음에 대한 죄의식이 쌓이는/쌓는 과정으로 보이기도 한다. 요조를 보면서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라고 생각했던 이유는, 요조가 보여주는 끊임없는 자기비하와 죄의식의 밑바탕에 나르시시즘이 깔려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어쩌면 난 요조가 아니라 요조 너머에 보이는, 자의식으로 충만한 다자이 오사무를 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죄와 벌. 도스토예프스키. 언뜻 그 생각이 머리 한쪽 구석을 스치자 흠칫했습니다. 만일 저 도스토 씨가 죄와 벌을 유의어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반의어로 병렬한 것이었다면? 죄와 벌, 절대 서로 통할 수 없는 것. 얼음과 숯처럼 융화되지 않는 것. 죄와 벌을 반의어로 생각했던 도스토예프스키의 바닷말, 썩은 연못, 난마(亂麻)의 그 밑바닥...... 아아, 알 것 같다. 아냐, 아직...... 하며 머리에서 주마등이 빙글빙글 돌고 있을 때였습니다. (115쪽)


죄와 벌을 반의어라고 생각한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자신에게 내려진 벌이 자신의 죄와 무관하다는 이야기일까? 그렇다면 요조의 죄의식과 그의 삶에 부과된 비극은 별개라는 뜻인가? 여러가지 생각들이 뒤엉키지만 명료한 답을 내기는 어렵다.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이런 생각을 하던 찰나에 그에게 커다란 벌이 닥쳤다는 것, 그에게 있어 "무구한 신뢰"의 상징이었던 요시코가 강간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는 점이다. 그가 의탁했던 마지막 희망마저 더럽혀지면서 그의 몰락은 끝을 향해 간다. "신뢰는 죄인가요?"부터 "무저항은 죄입니까?"까지. 그리고 그 끝에는 "인간 실격"의 낙인을 찍는 정신병원이 있다. 인간 실격이라는 단어를 내뱉는 요조를 바라보며, 요조가 끝내 속할 수 없었던 인간이란 무엇인지 질문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누구나 이 세계에 의문을 갖는 순간이 오지만(카뮈의 말을 빌리면, "무대장치들이 문득 붕괴되는" 순간이다), 요조처럼 세상의 모든 것에 민감해지고 그들과 어울릴 수 없음에 고통받다가 결국 파멸에 이르는 사람은 드물다. 우리는 요조처럼 앓는 듯하지만 결국 세상과 타협하기 때문이다. 인간과 자신을 별개의 종으로 인식했던 요조를 자의식 과잉이라고 비판할 수는 있겠지만, 그를 받아들이지 않고 격리시켜 버린 세상과 인간이 과연 옳았는지 질문할 필요가 있다. 결국 이 소설에서 보게 되는 것은 끝없이 추락하는 요조가 아닌, 그를 끝없이 낙하하게 만드는 세상, 인간, 나, 우리다.


요조의 수기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끝이 난다. "고뇌의 항아리가 텅 빈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오랫동안 그를 불안과 공포 속에 가두었던 세상이 아버지의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하지만 아버지가 죽은 뒤에도 세상이라는 이름의 아버지는 여전히 그를 받아줄 생각이 없다. 요조의 깨달음처럼 "모든 것은 지나간다는 것"이 '인간' 세상의 진리지만, 지나가기만 할 뿐 세상의 폭력은 나아지지 않는다. 그런 세상을 향해 작가는 말한다. "그 사람의 아버지가 나쁜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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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6-08-27 2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자이 오사무의 이 책을 오래 전에 읽었습니다. 어빙 고프만의 저서를 보면서 오사무가 새삼 대단해 보였습니다. 고프만이 하고 싶은 페르소나 얘기....이미 오사무가 이 책에서 요조를 통해 극명히 보여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저는 이 책을 3번 읽었는데, 첨에는 왜 이따위 책을 작가가 썼는지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생각을 거듭할수록 이 책의 가치가 돋보였습니다. 아무 님의 리뷰로 다시 보니 새롭네요!^^

아무 2016-08-28 01:11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저는 읽으면서 고등학생 때가 많이 생각나더라구요 ㅎㅎ 고프만의 책은 아직 읽어보지 못했는데, 읽으면서 인간실격과 비교해보면 이 책이 새롭게 보일 것 같아요. 별점이 더 올라갈 수도..ㅎㅎ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액체근대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이일수 옮김 / 강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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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토피아적 상상력을 이야기할 때 항상 거론되는 것은 오웰의『1984』나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다. 두 작품은 디스토피아 소설의 고전으로 자리잡았고, 후대 작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정치사회적으로도 자주 인용되는 텍스트이다. 그러나 바우만은 두 작품 모두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과 다르다고 말한다. 그들이 살던 시대는 "감독관들, 설계자들, 감시자들이 없이는 미래의 사회라는 것을 생각해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디스토피아적 각본과는 정반대로, 이러한 결과는 독재나 종속, 억압이나 노예화를 통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또한 '체제'가 사적 영역을 '식민화'해서도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이다. 오늘날의 상황은 선택하고 행동할 개인의 자유를 제한한다는 혐의를 (옳게 혹은 그릇되게) 받고 있는 족쇄와 사슬이 근본적으로 녹아버린 데서 발생하였다. 질서의 경색은 인간 주체의 자유가 만든 인공물이자 침전물이다. 이 경색은 '브레이크를 푼' 전반적 결과이며 규제 철폐, 자유화, '유연화', 증가된 유동성, 재정·부동산·노동시장을 풀고 조세 의무를 풀어준 결과이다. (13쪽)


바우만은 우리가 흔히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부르는 시대를 액체근대, 또는 유동하는 근대로 규정한다. 그가 바라본 현대 사회는 단단하고 굳건했던 질서들이 액화된 사회, 공적인 것들이 사적 문제에 침식된 사회, 그로 인해 대문자 정치(Politics)는 사라지고 생활정치만 남은 사회, 아고라가 없는 사회다. 과거 비판이론은 사적인 자율성을 공공성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을 과제로 삼았지만, 이제는 역으로 사적인 것이 넘쳐나는 생활세계에서 공공 정치가 자신의 기능을 되찾도록 하는 데 관심을 두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오웰과 헉슬리의 시대를 지배했던 여호수아 담론의 시대가 저물고 있는 것이다.


『액체근대』에서는 해방, 개인성, 시/공간, 일, 공동체라는 다섯 가지 테마를 중심으로 유동하는 근대를 고찰한다. 각각의 테마가 명료하게 나뉘어 논의되는 것은 아니어서, 각 장의 테마가 아닌 다른 테마들이 함께 언급되기도 한다. 구성이 허술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다섯 개의 테마가 서로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고체 근대의 질서가 액화되면서 해방된 개인에게 주어진 자유와 그에 따른 책임의 개인적 부담, 이 두 가지는 생산자 주체가 소비자로 전환되면서 도래한 소비자주의와 연결된다. 이는 일이 갖고 있던 위상이 훼손되어 "소비자의 미학적 필요와 욕구를 만족시키고 즐겁게 해주는 능력 여부로 평가"되는 현실과도 관련되며, 자유와 책임의 무제한적 제공 아래 불안에 빠진 개인을 유혹하는 공동체주의와도 관련이 있는 것이다.


왜 현대 사회의 개인은 소비(쇼핑)에 집착하는가? 그것이 불확실성의 시대와 범람하는 사적 자유, 그리고 무한한 기회 속에서 개인이 자신의 삶을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인생의 본보기, 생계에 필요한 기술과 같은 자기계발의 방법들도 쇼핑한다. 하지만 그것들 역시 조만간 그 가치를 상실하게 되며, 세상에 "무한한 목표들이 가득"하기 때문에 소비는 멈추지 않고 만족되지 않은 상태를 유지한다. 바우만이 비유한 대로, 고체 근대(생산자 사회)가 지향했던 것이 "건강"이라는 기준이었다면, 액체 근대(소비자 사회)가 지향하는 것은 "균형 잡힌 몸매(fitness)", 즉 콕 집어 정의내릴 수 없기에 도달할 수 없는 상태인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액화되고 이동성이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공간은 여전히 무겁고 부동적(不動的)이며, 그로 인해 한때 정복의 상징이었던 공간의 가치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노동 역시 마찬가지다. 고체 근대 시기에 자본과 상호 결속을 유지했던 노동은 몸이 한결 가벼워져 전지구적으로 노는 자본을 따라가지 못한다.


오늘날 자본은 여행가방에 서류케이스, 휴대폰, 노트북만 담고 가볍게 이동한다. 거의 어디에서든 잠깐 머물 수 있고, 원하면 아무 때나 훌쩍 떠나면 된다. 반면에 노동은 과거에도 그러했듯이 오늘날에도 움직일 수가 없다. 그러나 영원히 고정되어 있을 곳으로 예상되었던 그 장소는 예전의 확고함을 상실하였다. (95쪽)


이런 점에서 무거운 근대에서 가벼운 근대로 가는 길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다. 그러나 그 골조는 새로운 내용으로 채워졌다. 좀더 정확하게는, '불확실성의 원천에 근접함'을 추구하는 일은 하나의 단일한 목표인 즉시성으로 좁혀지고 집중되었다. 더 빨리 움직이고 행동하는 사람들, 운동의 순간성에 가장 근접한 이들이 이제 세상의 지배자들이다. 그들만큼 빨리 움직이지 못하거나, 자유자재로 떠나지 못하는 범주의 사람들이 피지배자들이다. 지배는 도망가고, 결속을 끊고, '다른 어딘가에 있을' 능력과 이것들을 실행하는 속도를 결정할 권리에 있다. (193쪽)


그러니까 즉시성에 근접한 지배자란 소프트한 자본을 쥔 자를 말하며, 자본을 쥔 지배자는 더욱 더 가벼워지기 위해 노동이 소요를 일으킬 힘을 빼앗고 이동을 막아버린다. 대표적인 것이 합병, 감원 전략 같은 것들이다. 이를 막을 굳건한 질서는 이제 없다. 설령 누군가 막으려고 해도, 신속하게 빠져나가면 그만인 것이다. 끊임없이 자본과 이에 근접한 자가 도망가지 않을까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현실. 이 책이 출간된 지 15년이 넘었지만 저자가 바라보는 현실과 오늘을 사는 우리의 현실은 여전히 비슷하다.


그러나 자본은 전례 없이 초지리적이고, 가볍고, 모든 짐을 훌훌 벗어던진 채 실물 기반에서 벗어나고 있으며, 이미 달성한 공간적 이동성은 지리적 구속을 받는 정치집행 주체들을 위협하여 순순히 자신들의 요구에 응하도록 굴복시킬 정도가 되었다. 지역적 유대를 끊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겠다는 위협(암묵적이어서 그저 추정만 되는)에 대해, 책임감 있는 정부라면 그를 통해 이득을 얻고 정부 기능을 유지하기 위해, 자본이 투자를 그만두겠다는 위협을 거두어들이도록 가능한 모든 정책을 실시하면서 최대한 신중하게 사안으로 다루어야 한다. (...) 역설적이게도, 정부들은 자본이 떠나겠다는 사전통고를 촉박하게 하거나 아예 통고조차 없이 훌쩍 떠날 자유를 확연히 보장해주어야만 자본을 제자리에 붙들 희망이 있다. (240-241쪽)


모든 것이 영구적 불확실성으로 귀결되고, 유대와 동반 관계마저 소비되는 사회에서 개인은 불안에 떨고, 자신에게 부과된 선택의 책임에서 회피하고자, 그리고 소속감을 통해 불안에서 해방되고자 공동체를 찾기 시작한다. 그러나 바우만이 보기에 현대(아마 90년대 후반일 것이다)의 공동체주의와 공동체들은 자기 주변에 산재한 문제들을 자력으로 해결해야 하는 개인의 부담을 잠시 벗게 해주는 "짐 보관소"로서의 공동체 또는 "카니발 공동체"이며, 개인의 고독을 해소해주기 위해 희생양을 찾는 "화약고 공동체"다. 이러한 (가짜) 공동체들은 '민족성'과 결합하여 희생양을 찾고, 폭동을 통해 카니발 의식을 치른다(바우만은 유고슬라비아 전쟁을 예로 든다).


짐 보관소/카니발 공동체 들이 지닌 한 가지 효과는, 이것들이 흉내내고 있고(오도하는 방식으로) 맨 처음부터 복제하거나 만들어보겠다고 약속한 '진짜'(즉, 포괄적이면서도 지속적인) 공동체로 모아지는 것을 제법 효과적으로 피해간다는 점이다. 이것들은 미처 분출되지 못한 사회성의 충동들을 집약하는 대신 분산시킴으로써, 극히 어쩌다 한 번씩 드물게 일어나는 조화롭고도 합심을 이룬 집단적 행동들 속에서 필사적으로, 그러나 허망하게 구제책을 찾으면서 고독을 영구화하는 데 기여한다. (319쪽)

 

그렇다면 이미 막을 수 없을 만큼 액화된 시대에 사는 우리가 선택해야 할 길은 무엇인가? 바우만은 정확한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하지만 마지막 부분에서 제시하는 사회학의 임무를 답으로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거리를 두고 시간을 내는 것", 그리고 "장차 닥칠 숙명을 초래하는 복잡한 원인의 그물망을 알아내는 것"이다.


몇 달 전 자신이 의식하지 못한 채 저지르는 행동을 악한 행동으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는데(아마 '악의 평범성' 이야기를 하다가 그런 말이 나온 듯하다), 나는 그때 프리모 레비의 말을 인용하면서 모르는 것,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은 죄라는 논지의 발언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죄'라는 말이 너무 격했던 것 같지만, 다시 생각해봐도 그때와 지금의 내 생각은 많이 바뀌지 않았다. 원했든 원치 않았든 이 세상에 던져졌다면, 그리고 사회에서 살고 있다면, 우리 주변의 문제가 무엇인지 관심을 두고 지켜보아야 하지 않을까. 비록 '즉시성'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문제들, 뉴스들은 "가장 빨리 상하는 상품"이 되었지만, 적어도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문제에 대한 자기 주관을 세울 만큼 성찰할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 그것이 바우만이 생각하는 '사회학의 쓸모'일 것이고, 하루에도 잊지 말아야 할 비극이 수도 없이 보도되는 현실에서 사회학이 어느 때보다도 더욱 요청되는 이유일 것이다. 더 나은 사회에 대한 질문 없이 "TINA(There is no alternative)라는 주문"을 외우는 행위는 오늘날의 액체 근대 사회에서 겪게 되는 불행들을 보지 않겠다는 안이의 소치다.

사회학을 하는 길에서 `참여`와 `중립`을 선택할 여지는 없다. 참여하지 않는 사회학은 아예 불가능하다. 대놓고 밝히는 자유주의적 입장에서부터 철두철미한 공동체주의적 입장까지 오늘날 통용되는 수많은 사회학 상표들 한가운데서 도덕적 중립 입장을 취하려 한다면 이는 헛된 노력이다. 사회학자들은 자신들의 글이 지닌 `세계관`의 효과나, 인간의 개별적 혹은 연대의 행동에 그 세계관이 미치는 여파를 부정하거나 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는 모든 다른 인간들이 나날이 직면하고 있는 선택의 책임을 저버리는 대가를 치러야만 한다. 사회학이 하는 일은 그러한 선택들이 진정 자유로운지, 인류가 지속되는 동안 그 자유가 유지되는지, 더욱 더 자유로워지는지 잘 살펴보는 일이다. (3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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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6-08-27 2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웰과 헉슬리의 디스토피아 소설이 있었던 건, 예브게니 짜마친이 있었기에 가능했겠지요. <우리들>을 보면 오웰과 헉슬리가 어떻게 영향을 받았는지 대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아무 2016-08-28 01:09   좋아요 0 | URL
저도 짜마친의 <우리들>이 그 둘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얘기를 듣고 진짜 읽어보고 싶더라구요. 아마 9월에는 구입할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