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아닌
황정은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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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름대로 황정은 소설을 분류하면 크게 둘로 나뉜다. 첫 번째는 땅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부유하거나(대니 드비토) 땅 밑으로 추락하는 존재들(낙하하다)을 그린 작품으로,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의 그림자, 파씨의 입문이 여기에 속한다(예외가 있어서 단정하기는 어렵다. 마더소년같은 작품들도 그렇고, 파씨의 입문에서도 일탈하는 몇몇 단편들이 있는 까닭이다). 이 존재들은 땅이라는 직선과 삼각형을 이루며 위/아래로 떠돈다(“세 개의 점이 하나의 직선 위에 있지 않고 면을 이루는 평면은 하나 존재하고 유일하다.”). 야만적인 앨리스씨를 기점으로 황정은 작가의 작품세계가 땅에 발을 딛기 시작했다고 나는 생각하는데, 이는 비로소 작가가 현실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신호가 아니다. 부유하던 존재들이 땅이라는 직선에 잠식당하기 시작해 작품세계 역시 변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번에 나온 신작 아무도 아닌역시 그 연장선상에 있는 단편집이다.

 

아무도 아닌에서 자주 마주하는 질문 중 하나는 피해자가 되지 않기를 선택한 화자들의 죄책감이다. 진짜 가해자는 얼마나 치밀한지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이미 당해버린 피해자와 한사코 그 무리에 합류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만 존재한다. 프리모 레비식으로 말하면 구조된 자의 죄책감이다. 그들(그들은 결국 우리다)모두를 당혹스럽고 서글프게 만든 것은 내가 아니라고(상류엔 맹금류, 88) 항변하지만, 이런 항변의 강도가 보여주는 것은 우리가 세계의 폭력에 비-존재가 되어버린 존재들을 방관한 비정한 목격자. / 보호가 필요한 소녀를 보호해주지 않은 어른.”(양의 미래, 56)이 되었다는 반증이다. 작가는 이렇게 쓴다. “네 탓이라고 누군가 노려볼 때 그게 왜 내 탓이냐고 항변하고 싶은데 생각하고 보면 내 탓인 것 같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는 삶. 멀쩡하게 사는 것 같다가도 불규칙한 주기로 돌아오는 혜성 같은 그런 심정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는 삶.”(*)

 

작가가 생각하는 폭력의 근원 또는 가해자는 상류의 자리로 종종 나타나는데, 거기에는 맹금류, 또는 아래에서 시끄럽다고 하든 말든 무라무라무라(누가, 130)라고 떠드는 자들이 있다. 피해자가 되기 싫어서, 즉 비-존재가 되기 싫어서 우리는 상행(上行)을 꿈꾸지만, 상류로 가는 길에는 월식이 시작되고 길조차 보이지 않는 짙은 어둠이 드리운다. 우리를 둘러싼 벽이 내가 미처 상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흉(웃는 남자, 173)하다는 것을 감추기 위해 세계는 가급적 단순한 것이 되(웃는 남자, 166)라고, “조금 더 들어가보자(누구도 가본 적 없는, 154)는 생각도 하지 말고 챙기라는 것들만 챙기며 살라고 요구한다. 똥물을 먹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는 사이, 그 물을 먹지 않을 수 없는 제희의 가족, 진주, 도도의 옆에서 쓰러진 노인은 비-존재가 되어 직선에 파묻힌다. “패턴의 연속, 연속, 연속(웃는 남자, 184)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대상을 향해 분노의 화살을 똑바로 겨누고 있을까. 벽 너머에 터널이 있는 줄 알았는데 아무것도 없다는 이야기처럼, 세계는 우리의 분노를 엉뚱한 곳으로 돌려버릴 만큼 영악하다. 심지어 우리를 한통속으로 만들어버리는 데도 능수능란하다. 누가에서 가 겨우 이사를 온 집의 이전 세입자인 노인을 보며 정당하게 세를 내고 이 집으로 들어왔을 뿐인데 노인을 내쫓았다는 기분(127)을 느끼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소음에 고통스러워하며 스스로 계급적 인간임을 인식하는 가 하는 일은 금융권에서 연체금을 독촉하는 상담원이고, 윗집의 소음에 분노하여 취하는 의 행동은 또다른 소음이 된다. 피해자가 되지 않은 화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나지막이 생각하는 것뿐이다. “안됐다······ 거기까지. 그 너머는 벼랑이니까.”(129)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리처드 세넷의 논의(투게더)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동정은 나는 네가 무엇을 느끼는지 알고 있다, 지금 나는 너다라고 말하는 것이고, 공감은 나는 너와 다르다, 그러나 나는 너에게 주의깊은 관심을 쏟고 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혹은 동정은 같아지면서 멈추는것이고 공감은 다른 채로 나아가는것이다.” 이후 신형철은 이렇게 결론짓는다. “sym-pathy그 감정과 함께 있음이어서 ()’, 같아져 있음’(상태)이고, em-pathy그 감정 속으로 들어감이어서 ()’, 함께 하려 함’(실천)이다.”(**) 동정(sympathy)과 공감(empathy)에 대한 상투적인 정의에 따르면 안됐다는 동정이지만, 신형철의 정리대로라면 이는 동정도 공감도 아니다. “안됐다는 상대가 나와 다름을 전제로 한 감정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상상력을 발휘해 타인과 나를 동일시하려는 노력도, 함께 하려는 실천도 없다. 그러니 우리는 가라앉은 자를 찾고자 자신을 던지는 이들에게 아무도 나를 신경쓰지 않는데 내가 왜 누군가를 신경써야 해? 진주요, 아줌마 딸, 그애가 누군데요? 아무도 아니고요, 나한텐 아무도 아니라고요.”(양의 미래, 59)라며 씨르르, 하고 우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세계가 우리에게 생존의 윤리만을 들이밀었기에 발생한 태도이지, 우리의 잘못이 아니다. 우리의 잘못은 동정하기 위해 공감하려 노력하지 않은 것에, 구조된 자로서 아파하지 않은 데 있다.

 

그렇다면 이 엄혹한 세계에서 쓴다는 것은, 아무런 쓸모도 없어 보이는 쓰기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 작가가 찾은 답은 명실에 있다. “수면 위로 드러난 이름 아래 차갑게 잠겨 있는 이름들(99), 그 일각(一角)을 드러내는 것. 그래서 명실은 실리를 기억하기 위해 쓰기를 택했다. 그녀가 가진 것은 파편들이고 메아리들일 뿐이지만, 그 작은 불빛들이 막막한 어둠 속에서 수평선을 만드는 것(109)이다. 그래서 명실은 쓰려고 한다. 실리가 미처 끝내지 못한 작업을. “모든 것이 사라져가는 이때필요한 것은 기억과 호명이요, “그 아름다운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실리가 생전에 책을 냈더라면 그녀의 책도 한 권이나 어쩌면 몇 권쯤은 있었을 것이다. 실리가 이름을 적어 선물했을 테니까. 아마도 그 책의 첫 페이지엔 명실아, 하고 적혔을 것이다. 다른 것 없이 명실아. 언제고 자신의 책을 낸다면 첫 번째 증정본엔 그렇게 적을 거라고 실리는 말하곤 했지,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고맙다거나 사랑한다거나 말하지 않고, 명실아. 그녀는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대답했고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92)


이 단편집에서 다른 작품과 가장 다른 톤을 가진 작품은 누가복경일 텐데, 나는 복경을 읽으면서 황정은 소설이 다소 무서워졌다는 생각을 했다. 매장을 찾는 고객들에게 항상 웃늠을 지어야 하는 화자는 누군가의 앞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진술하고 있다. 이야기 도중 불쑥 튀어나오는 반말이 주는 날카로운 감정의 기복도 그렇지만, “도게자에 대한 이야기는 읽으면서 정말 섬뜩했다. 이후 그녀는 자존감을 가질 틈도 주지 않는 이 세계에 대고 존귀하다는 것은 존나 귀하다는 의미냐고 묻는다. 이 소설은 소파를 찢지 않았다며 항변하는 그녀의 진술이기도, 살기 위해 똥물을 먹어야 했던 비-존재들의 분노이기도 하다. 작가는 이 엄혹한 세계를 고발하고 폭력에 저항하기 위해 더욱 엄정(嚴整)하게 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악에 받쳐 뜨거운 화자의 목소리와 달리, 이 소설은 나에게 매우 차갑다.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서론에서 이렇게 쓴다. “사유하지 않음, 즉 무분별하며 혼란에 빠져 하찮고 공허한 진리들을 반복하는 것은 우리 시대의 뚜렷한 특징이라 생각된다.” 우리에게 사유의 중단을 요구하고 생존만이 진리라고 말하는 세계의 폭력. 이 안에서 가라앉은 자, 또는 가라앉고 있는 자에 대한 아픔을 느끼는 것이 존재의 비-존재화를 막기 위한 시작이다. 그래서 황정은 소설의 화자들이 느끼는 죄책감은 소중하다. 아렌트는 인간의 어떤 다른 능력도 사유만큼 약하지는 않다고 썼지만, 그 약한 사유가 어둠 속에서 수평선을 만든다. 그들과 내가 다르지 않음을 인식하는 것, 그리고 끊임없이 호명함으로써 기억하는 것, 그것이 동정을 향한 공감의 시작이다.


*  황정은, ‘작가노트’, 2014 5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34-35.

** 신형철, 감정의 윤리학을 위한 서설 1, 문학동네2015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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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7-01-01 01: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광화문에서 시청쪽으로 올라오니 자정이 다 되어가는데도 아랑곳없이 군가 같은 걸 틀어놓고 태극기를 흔들며 ˝무라무라무라˝ 하는 맹금류 어르신들이 있더군요. 촛불을 든 사람들과 태극기를 흔드는 사람들의 대비가 너무 기괴했습니다. 제게 극악스러운 표정으로 태극기를 흔들던 노인을 보며, 저는 당혹스럽고 서글프고...조금 비참한 심정이었습니다.
무수한 평행선들....

아무 2017-01-01 11:55   좋아요 1 | URL
맹금류라기보단 어떻게든 상류에 닿으려 발버둥치는 사람처럼 보이는데요.. 맹금류는 함부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 무서운 부분도 있고.. 어떻게 사유하는지, 무엇을 사유하는지도 중요하지만, Agalma님이 말씀하신 장면을 생각하니 일단 정지된 사유를 시작하는 게 더 절실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들은 어떻게든 부정하고 싶겠지만, 당신들이 믿고 기댔던 가치들은 이제 생명을 다 했다고, 이제 끝장이라고.. 그렇게 말해주고 싶네요. 그들은 또 듣지 않겠지만..

AgalmA 2017-01-01 12:38   좋아요 1 | URL
성질이 사납고 육식을 뜯는 맹금류와 그들이 비슷해보인다 싶어 본문과 연결해 ˝맹금류˝라 표현했는데 그것은 다분히 외형만의 연결이었고, 맹금류의 서식 속성에 대한 아무님의 말씀 듣고 보니 너무 간단히 연결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적 고맙습니다.
아무님이 쓰신 ˝정지된 사유˝라는 표현은 좀더 정교하게 말씀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태극기를 흔들고 있는 그들이야말로 정지된 맹목 상태에 빠져 있으니까요. 그들은 사유가 없다 라고 배제하는 전제를 두더라도.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민주 정부 때는 사유하는 인간들의 힘이 긍정적으로 나타날 수 있었던 거 같다고요. 지금의 전세계적인 우경화 조짐을 보면 이런 상황은 계속 순환되어 나타나겠죠. 그래서 역사의 반복이란 말도 끊임없이 나오는 걸 테고요. 인간은 변화무쌍할 수도 있지만 또한 단순하며 변질하기 쉬워요...

아무 2017-01-01 13:13   좋아요 1 | URL
Agalma님이 그들을 보고 맹금류를 떠올리신 것도 저는 의미있는 연결이라고 생각해요. 그들은 맹금류가 되고 싶어 발버둥치는 사람들일 테니.. 구조된 자의 나쁜 예라고 생각합니다. 운이 좋아 가라앉지 않았을 뿐인데, 가라앉지 않은 걸 세계의 덕으로 돌리는 사람들..
말씀을 듣고보니 그들을 ˝정지된 사유˝의 상태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쉬운 배제라는 생각이 들어 반성하게 됐어요. 사유의 긍정적인 힘으로 얻은 민주화라는 성취가 무너지는 건 너무나 쉽다는 생각도 하게 되고.. 말씀처럼 인간은 쉽게 변하죠. 그래서 지금의 우경화 조짐이 심상치 않게 보이고.. 전 요즘 행동이 너무 절실해서 사유가 다시 홀대받는 건 아닌가라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이럴수록 필요한 건 좀더 깊은 사유와 그걸 정교하게 표현할 수 있는 세밀한 언어겠죠..

2017-02-08 18: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6-27 23: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에브리맨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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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에 가장 많이 했던 생각은, 나이를 먹는다는 건 싫어지는 게 하나씩 늘어나는 것일까.. 하는 것이었다(나이도 별로 먹지 않았으면서). 예전에는 그냥 넘길 수 있었던 것들이 견딜 수 없어지는 날들이 많아졌다. 버스나 지하철에서 큰 소리로 통화하는 사람, 버스 옆자리에서 끊임없이 어깨에 머리를 기대는 낯선 사람,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는 듯이 말하는 사람, 경험해보지 않았으면 말을 말라는 경험 제일주의, 자신의 말이 어떤 영향과 책임을 갖는지 생각도 안하고 말하는 사람, 기타 등등. 작년까지는 왜 저럴까 하고 넘기면 그만이었는데, 이제는 그런 사람들을 보면 견디기 힘든 짜증이 일고, 마음이 누군가 돌을 던진 연못처럼 출렁인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들이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을 삶에서 이런 것까지 참아가며 살아야 하나...’ 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나는 관념론자가 아니고, “그저 우리 몸만 있을 뿐(58)이라고 믿고, 그렇기에 살아감/죽어감(결국 둘은 하나다)의 순간이 조금이라도 더 만족스럽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런 순간이 쉽게 오진 않겠지만.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 윤동주, 서시


윤동주는 왜 살아가는 것이라 하지 않고 죽어가는 것이라 했을까. “죽는 날까지와 맞추기 위해서일 수도 있지만, “죽어가는 것이라고 쓰는 것이 생명에 대한 경외의 표시였으리라 나는 생각한다. 에브리맨역시 한 남자의 삶의 기록이지만, 겉으로 보기에 의 삶이 경이롭고 존경받을 만한 삶은 아니었다. 이 소설에서 빛나는 것은 여성 편력으로 점철된 의 청장년 시기가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의 몸과 투쟁하며 버텨나가는 의 노년이다. 그래서 더욱 나는 이 소설을 의 삶의 기록이 아닌 죽어감의 기록이라고 부르고 싶다. “한때는 나도 완전한 인간(135)이었다고 믿었지만, 대학살 속에서 완전함 따위는 없었음을 깨달아가는, 그래서 결국 뼈에서만 위로를 찾을 수 있는 죽어감의 과정.

 

최근 읽고 있던 모리스 블랑쇼에 대한 책에는 그의 소설 죽음의 선고를 다룬 부분이 있었다. 소설 속 J가 죽어가는 과정을 서술한 부분을 보며 나는 가 매년 병원에 입원하며 겪었던 투쟁, 그리고 주변 사람들이 사그러드는 과정들이 생각났다. 책에서는 이렇게 쓰고 있다.


이 경험은 세계의 부재를 겪는 공포스러운 체험이다. 나의 모든 능력이 사라져 의미 부재에 직면하는 두려운 체험이다. 속수무책으로 죽어가면서 자신이 자취를 감출 때까지 공포를 겪어야 한다. 죽어가면서 사람은 행동의 세계에서 내쫓긴 실존을 드러낸다. 이 실존 속에서는 내 앎의 근원이었던 진정한 죽음이라는 개념이, 죽어가고 있다는 무한한 수동성으로 바뀐다. 여기에서 죽는 자는 죽어간다는 불가능성과 마주한다. , 세계를 의미 있는 무엇인가로 바꾸는 일의 불가능성과 맞닥뜨리는 것이다. (101)

- 울리히 하세·윌리엄 라지, 모리스 블랑쇼 침묵에 다가가기


하이데거는 죽음을 자기 힘으로 존재하고, 이성적이며, 자의식을 갖고 있는 존재가 인간이라는 생각을 의심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이를 불가능성의 가능성이라고 칭했다. “우리의 모든 가능성이 끝장나는 가능성이라는 뜻으로, 그렇기에 자신의 죽음만이 인간을 개별적인 존재로 설 수 있는 가능성을 드러내도록 한다는 것이다. 블랑쇼는 하이데거의 말을 뒤집어 가능성의 불가능성이라고 말한다. 죽어간다는 불가능성과 맞닥뜨릴 때 나는 익명적이고 비인칭적인 존재가 되어 내 삶이 무의미 속에서 사라지게 한다고 그는 말한다. 죽어감 앞에서 인간은 어떤 행동도 취하지 못하고 모든 수동성보다 더욱 수동적인 수동성을 경험한다. 블랑쇼에겐 이런 죽어감의 경험을 겪도록 해주는 것이 문학이고, 서로가 서로를 암시하는 사유에서 블랑쇼는 죽음과 문학의 경험을 공동체와 연결시킨다. 공동체에 대한 블랑쇼의 사유를 섣불리 말하기엔 아직 부족하지만, ‘가 마지막 수술을 앞두고 형 하위와의 관계마저 끊어졌음을 깨닫는 장면은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그래서 는 부모의 무덤을 찾아갔던 것이 아닐까. 공동체를 이루고 싶어서. 그것이 만 남은 부모에게는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도.


그가 본 것은 잠들어 있는 나이 든 여자의 높은 돋을새김 윤곽이었다. 그가 본 것은 돌이었다. 그 무겁고, 무덤 같고, 돌 같은 무게는 말하고 있었다. 죽음은 죽음일 뿐이다. 그 이상이 아니다. (124)


평범한 삶이었다. 죽기 전까지 모든 가정을 해체시켰다는 것을 제외하면 평범한 삶이었다. 모든 인간은 개별적인 존재이지만, “현실을 다시 만드는 건 불가능(13, 83)하다는 진실 앞에서, 죽을 수밖에 없다는 초라한 진실 앞에서 우리는 모두 에브리맨이 된다. 그래서인지 보석상의 이름이 에브리맨이라는 것은 아이러니하게 다가온다. “다이아몬드란 건 그 아름다움과 품위의 가치를 넘어서서 무엇보다도 불멸(63)이라는 의 아버지의 말처럼, 보석-돌의 무게(영원성)에브리맨이라는 이름의 유한성은 서로 대립하는 이름이다. 이런 아이러니가 주는 쓸쓸함이란.

 

결국 죽어가는 것은 어떤 식으로도 형언할 수 없는 경험이다. 에브리맨가 노년이라는 대학살을 겪는 과정을 통해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수동성 앞에서의 인간을 보여준다. 책을 마지막까지 읽은 뒤 보이는 것은 죽음의 문턱을 넘어가는 의 고독한 모습이다. 다만 내가 생각하는 것은 이런 유한성의 세계에서 우리는 어떤 공동체를 이루며 죽어갈 것인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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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6-12-18 21: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무님이 표현하신 ˝살아있는˝은 윤동주가 저 시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바가 아닙니다. 노래하는, 걸어가는, 스치우는 것처럼 삶도 향하고 움직이기 때문에 멈춤 상태의 ‘살아있는‘이 아니라 ‘살아가는‘의 뜻으로 쓰려 했을테고, 잡힐 것 같지 않은 저 먼 별도 바람에조차 스치우는 존재이니 우리는 살아감에서 살아감(영원성)으로 가는 게 아니라 살아감에서 죽어감(소멸)로 가는 게 이치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죠.

보석의 영원성과 에브리맨의 유한성을 대비시키는 분석 좋네요^^

아무 2016-12-18 23:12   좋아요 1 | URL
댓글을 보고 제가 쓴 글을 다시 보니 제가 앞에서는 ‘살아감‘이라고 쓰고 뒤에서는 ‘살아있는‘이라고 썼네요. 손가락에 가해지는 관성의 힘이란..^^;;

말씀하신 부분에는 100% 동감합니다. 특히 멈춤이 아닌 움직임의 상태라는 것... 말미에 고은 시인의 ‘문의마을에 가서‘를 적으려 하다 내키지 않아서 말았는데, 생각해보니 시에서 죽어감의 이미지가 제게 또렷하게 보이지 않아서 그런 것 같네요.

말씀하신 보석은 글을 쓰려고 밑줄 친 부분들을 다시 훑다가 떠올라서 쓴 것입니다. 책을 읽으면서 생각할 때가 아니라 정리하려고 글을 쓸 때 이해의 순간이 종종 오기도 해요. 그런 이해의 순간을 자주 만나기 위해서라도 시간이 있어야 하는데... ㅎㅎ..

AgalmA 2016-12-18 23:16   좋아요 1 | URL
아하...말이 엉켜버린 거군요. 수차례 훑어봐도 오픈하면 막상 그럴 때 있죠^^; 제가 너무 빨리 댓글을 달았나봄;; 아무님 이런 리뷰 정말 기다려와서 기쁜 마음에ㅎㅎ

리뷰가 고역이긴 한데 말씀처럼 그런 줄기들이 이어지는 걸 발견하는 기쁨이 숨은 보답이라^^

아무 2016-12-18 23:38   좋아요 1 | URL
리뷰를 쓰고 싶게 만드는 책들이 있어요. 어떤 책은 100자평으로 쓰고 싶은 책이 있고..ㅎㅎ 글자 수가 애정도를 담보하는 건 아니지만, 각잡고 리뷰를 쓰기로 마음먹은 다음엔 말씀처럼 고역의 시작이죠^^;

전 아마 다음날은 되어야 발견했을 거예요 ㅎㅎ 이틀 지나면 더이상 교정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덕분에 서시에 대한 Agalma님의 평도 읽게 되고 좋네요^^

2016-12-23 20: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2-23 23: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쓰레기가 되는 삶들 - 모더니티와 그 추방자들 What's Up 4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정일준 옮김 / 새물결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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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레 난민촌에 장벽을 추가로 세우겠다는 뉴스를 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올랑드 대통령이 난민촌을 연내에 철거하겠다고 밝힌 뉴스가 나왔다. 헝가리는 EU의 난민할당제를 거부하겠다며 국민투표를 실시했지만 투표율을 채우지 못해 부결됐고, 요르단은 더 이상 시리아 난민을 받기 어렵다는 의사를 강하게 표시했다. 메르켈은 난민 수용 정책을 여전히 강하게 밀고 있지만 유럽은 여전히 골머리를 앓고 있고, 이를 의식한 듯 차기 유엔 사무총장은 소위 난민 문제 전문가라는 사람이 이어받게 됐다. 일련의 뉴스들을 보면서 나는 메르켈이 숱한 반대에도 난민 수용을 밀어붙이는 이유가 단순히 인도주의 때문은 아닐 텐데라는 의문이 들었다. 한국은 난민 문제와 거리가 멀어 보이지만 조금만 눈을 돌려도 쉽게 볼 수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문제(김재영, 코끼리), 농어촌의 국제 결혼 문제 등 비슷한 문제들이 산적해있다. 다만 외면하고 있을 뿐. 일각에서는 난민들의 범죄율과 자국에 동화되지 못하고 일탈하는 이민자들의 모습이 더욱 부각된다. 사실 트럼프가 공화당 대선 후보까지 올라간 것도 사실 그들우리의 삶을 비참하게 만들었다고 호소한 결과가 아니었나. 정말 장벽을 차단하고 경계를 강화하고 그들의 유입을 막는 것이 해결책이 될 수 있는지.

 

2004년에 출간된 바우만의 쓰레기가 되는 삶들쓰레기라는 개념을 통해 오늘날 세계가 처한 현안들을 진단한다. 이 책에서 쓰레기는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지만 주로 사용되는 의미는 인간 쓰레기. 그는 인간 쓰레기의 생산 문제를 현대화, 지구화의 결과이자 현대성의 산물로 본다. 현대적인 생활 방식이 전지구적으로 확산됨에 따라 과거 선진국들이 쓰레기를 처리하던 배출구가 막힌 결과라는 것이다. 과거의 쓰레기는 다시 재활용될 수도 있는 노동 예비군의 성격을 띠었지만, 오늘날 쓰레기로 규정되면 그 속성이 영구화된다. '한 번 쓰레기는 영원한 쓰레기'인 것이다. 여기서 인간 쓰레기는 두 부류로 나뉘는데, 하나는 현대에 들어와 질서정연한(법을 준수하는/규칙이 지배하는) 주권 영역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배출된(68) 호모 사케르이고, 다른 하나는 경제적인 진보 과정에서 발생한 부수적 희생자들인 잉여 인구다.(80) 이들은 정치 권력에 의해 사회 부적응자, 안전을 위협하는 자로 낙인찍히고 도태된다. 국가는 국민의 안전이라는 미명 아래 그들을 격리하면서 국가가 불안과 불확실성을 잘 통제하고 있음을 과시하기도 한다.


잉여 인간들은 어떻게 해도 승산이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 현재 칭찬받고 있는 삶의 방식에 맞추려고 하면 즉각 사악한 오만함, 거짓 허세, 노력도 하지 않고 보너스를 달라고 요구하는 뻔뻔한 자들이라는 등의 비난을 받게 될 것이다범죄적 의도를 갖고 있다는 말까지는 듣지 않겠지만 말이다. 반면 공공연히 분개를 표명하면서 가진 자들에게는 유익하지만 이들과 같은 무산자에게는 독이 될 가능성이 큰 삶의 방식을 존중하지 않으면 이것은 즉시 여론’(좀더 정확히 말해, 선출되거나 자임한 대변인들)당신에게 이제까지 쭉 이야기 해온잉여 인간들은 단순히 이질적인 존재가 아니며 사회의 건강한 조직을 갉아먹는 암적 존재이자 우리의 생활 방식우리의 가치를 위협하는 불구대천의 적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증거로 간주될 것이다. (83쪽, 강조는 인용자)


정치 권력은 국민들에게 규율과 법규의 준수를 요구하면 취약성과 불확실성을 완화시켜 주겠다고 약속하며 그 정당성을 획득했다. 때때로 그들은 국가의 보호에 대한 수요를 증가시키기 위해 위협을 창조해내기도 했지만, 현대로 올수록 국가 정체성을 복지 국가로 규정하면서 개인의 불행과 재난을 국가가 책임질 것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의 영향으로 자유 시장의 논리가 몰아친 현재, 국가는 더 이상 불확실성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으며, 개인이 사적으로 대처해야 할 문제로 전환시켰다. 또한 이로 인해 촉발된 집단적 두려움을 경제적 이주자와 망명자 들의 책임으로 돌려버린다. 이렇게 국가의 정체성은 '복지 국가'에서 '형사 국가', '형벌 국가'로 전환된다.


국가 권력은 불확실성을 박살내기는 고사하고 진정시키기도 힘들다. 국가 권력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기껏해야 불안의 초점을 손에 닿는 대상으로 다시 맞추는 것뿐이다. 손을 쓸 수 없는 대상으로부터 적어도 그들이 다루고 통제하는 척이라도 할 수 있는 대상으로 초점을 옮기는 것이다. 피난민, 망명자, 이주자지구화가 생산한 쓰레기는 이러한 조건에 완벽히 들어맞는다. (124쪽, 강조는 인용자)


그들이 점점 늘어나면서 지구가 감당할 수 있는 수치를 넘었고, 쓰레기 배출구는 막혀버렸다. 그리고 인간 쓰레기들이 서구 사회의 우리와 같은 공간에 머문다. 이런 뒤섞임 속에 쓰레기화는 그들만의 문제가 아닌 모든 사람의 잠재적 전망이 되어버린다. 이를 막기 위해 서구 사회는 그들의 나라에 피임법을 전파하며 인구 조절을 강하게 요구하기도 하고(1994년 카이로 국제회의. 하지만 인구 밀도가 높은 나라의 대부분은 유럽이다), 이미 자국에 들어와 있는 쓰레기들을 격리하기 위한 게토를 건설한다. 이때의 게토는 고전적인 게토처럼 잔인한 인종적 배제에 대항하는 보호막 역할을 수행(150)하지 않는, 오로지 격리와 사회적 추방만을 담당하는 하이퍼게토.


어제는 자본과 자본의 노동력 이용 방식을 자유화하기 위해 작은 국가를 슬로건으로 내세우고 투쟁해 가시적 성공을 거둔 사람들이 오늘은 고용 조건의 규제 철폐가 낳은 유해한 사회적 결과와 사회의 취약 지역에 대한 사회적 보호의 악화를 현 상태대로 봉쇄하고 감추기 위한 큰 국가를 열렬히 요구하고 있다.

 

물론 와캉이 지적한 사실은 결코 역설이라고 할 수 없다. 누가 봐도 명백한 이러한 심경 변화는 인간 쓰레기를 재활용하는 것에서 폐기하는 것으로 전환하는 과정의 논리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이러한 전환은 너무나 철저한 것이어서 국가 권력의 강력하고 정력적인 도움이 필요했으며, 국가는 이에 응했다. (154-155, 강조는 인용자)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은 과거에도 존재했다. 종교는 이를 이용해 자신들이 고안한 신에게 복종할 것을 요구했고, 정치 권력이 그 뒤를 이었다. 다만 과거엔 종교나 국가가 복종을 대가로 안정을 약속했다면(물론 그 약속이 항상 지켜지진 않았다), 현대에는 인간 쓰레기들로 규정된 이들을 불안의 원인으로 지목한다. 9.11 테러 이후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공허한 은유 아래 미국 정부는 국민들의 불안을 끊임없이 자극했고, “그들의 배제만이 답이라고 외쳐왔다. 바우만은 이러한 현상을 두고 새로운 빅브라더, ‘배제의 빅브라더가 등장했다고 말한다. 과거의 빅브라더가 포함에 열중했다면, 새로운 빅브라더는 인간 쓰레기를 배제하는 데 열중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점점 접촉 횟수가 잦아지는 그들에 대한 불안 때문에 빅브라더를 열렬히 지지하고, 더 강한 조치를 취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난민촌을 폐쇄해 달라고, 내 눈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치워달라고 시위하는 사람들을 보라.



오웰이 기술한 과거의 빅브라더는 포드주의 공장들과 군대 막사들과 수많은 크고 작은 (벤덤/푸코가 묘사한 종류의) 파놉티콘들을 지배했다그리고 그의 유일한 바람은 우리 조상들이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고 길 잃은 양을 무리로 돌려보내는 것뿐이었다. () 오늘날의 새로운 빅브라더의 관심은 배제그들이 있는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사람들을 골라내, 거기서 쫓아내면서 그들에게 어울리는 곳으로 추방하거나 (더욱 바람직한 것은) 아예 처음부터 근처에도 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새로운 빅브라더는 이민국 관리들에게 입국 불허자 명단을 제공하고, 은행가들에게 신용 있는 회사에 취직해서는 안 되는 사람들의 명단을 제공한다. 그는 경비원들에게 관문 앞에서 정지시켜서 관문으로 보호되는 공동체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아야 할 사람들이 누구인지 지시한다. (241, 강조는 원문)


실제로 무슬림이나 난민, 이주자에 의한 범죄가 급증하고 있는 건 사실이지 않느냐고 통계를 제시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통계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나, 단순히 그들때문에 이 모든 일이 발생했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나 쉽고 단순한 설명이다. “그들사방에 만연해 있는 사회적 잉여에 대한 두려움에 의해 촉발된 불안감을 해소시킬 수 있는 편리한 표적이 되고(119) 있는 것은 아닌지, 여기에 휘둘리면서 전쟁에 대한 규제의 완화가 이루어지고 세계가 하나의 거대한 변경 지역이 되어가는 것은 아닌지 복합적으로 고민해야 한다. 바우만은 자신이 고안한 유동하는 현대(Liquid Modernity)”라는 틀에 쓰레기라는 개념을 보태 사회 현상을 진단하고 보여주는 것이다.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지가 이것뿐인지, “포함/배제의 게임이 공통의 인간 생활을 영위하는 유일한 방식인지(244) 고민하고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보유(補遺) 돌직구와 사이다

 

오늘날 한국 예능과 드라마에서 주목할 만한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돌직구와 사이다일 것이다. 드라마의 전개가 조금만 더뎌지면 우리는 고구마라며 불평하고, 시원시원하게 쭉쭉 전개가 나가면 사이다라며 시원해한다. 예능에서도 우리가 선호하는 건 그들의 돌직구또는 사이다발언이다. 현대 사회가 되면서 자극이 점점 다양해지고 빈번해져 감각이 무뎌졌기 때문에 더 센 것을 원하게 되었다고 설명할 수도 있다. 어느 쪽이 먼저인지는 알 수 없으나, 오늘날 뉴스도 그렇고 정치에서도 더 센 말이 흥하고 진위여부와 관계없이 대중에게 어필하는 것으로 보인다. 따지고 보면 브렉시트, 두테르테, 트럼프 모두 강경한 발언과 자극이 성공한 경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불안정한 현재의 원인을 단순명료하게 그들때문이라고 지적해 주었으니까. 하지만 그럴 듯하다고 다 맞는 이야기는 아니며, 그들의 발언이나 행동은 카프카의 을 생각나게 한다. 안전 강박증에 걸린 짐승이 평생 지하 은신처를 파지만 공포만 가중되고 만다는 이야기처럼, 사회 안정을 위해 실시하겠다는 그들의 행위가 더 큰 위험을 부를 것이다. 바우만이 인용한 크라카우어의 말처럼 존재적 두려움이 유발한 조치들은 그 자체가 존재에 대한 위협이다.’ 듣는 사람은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것 같아 시원하겠지만, 가려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생채기가 날 때까지 긁어주는 사람이 아니라, 가려운 이유가 모기 때문이고, 그것으로 인해 말라리아에 감염될 수 있다고 경고해주는 진단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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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자리 2016-10-12 11: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얼마 전에 다큐 영화 <장벽 너머>를 봤었는데요,

(남아프리카와 짐바브웨를 가르는 경계,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 스페인과 모로코를 나누는 멜리야를 배경으로 장벽을 지키는 사람들과 넘으려는 사람들을 보여주는)

인상적인 건 그 경계를 다니며 국경을 넘으려는 사람들이 마실 수 있는 물을 놓아두는 분들이었어요.

보이는 장벽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장벽들도 많은 요즘, 이런저런 생각들이 많았었는데 이 글을 보니 `진단자`들이 시급하단 생각을 하게 돼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ㅎ

아무 2016-10-12 16:22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영화는 보지 못했지만, 국경 지대에 물을 놓고 가는 분들의 마음을 생각하니 짠해지네요. 바우만은 책에서 인도주의 활동가들의 활동이 ˝우리˝의 죄책감을 덜어내는 값싼 배제 수단일지도 모른다고 말하지만, 저는 그런 활동이 가장 소박하지만 의미있는 시작이 될 수 있다고 믿고 싶어요.

한국 사회는 진단이 너무 많아서 문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요즘 들어 점점 제대로 된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없다는 느낌이 자주 들어요. 사이비 진단을 가려내는 것도 일이지만, 질문을 제대로 던져야 제대로 된 진단도 할 수 있을 텐데... ˝보이지 않는 장벽˝에 좀더 집중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6-10-12 14: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아, 좋은 글입니다. 바우만의 쓰레기... 좋은 책이죠.. 쓰레기 중에서 가장 골치 아픈 쓰레기는 인간 쓰레기죠...

아무 2016-10-12 17:09   좋아요 0 | URL
바우만의 책을 읽을 때마다 감탄하는 게 10여 년의 갭이 있는데도 전혀 낡은 것처럼 안 보인다는 점입니다. 그게 현대 사회의 비극이기도 하겠지만.. 좋은 책이었는데 계속 품절 상태라 아쉬워요. 저도 중고로 사서 읽었습니다 ㅎㅎ 요즘 한국 정치에서 배제의 원리가 가장 강력하게 작동하는 것이 아닌가 싶네요..

cyrus 2016-10-12 17: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이 바우만에 입덕하기 위한 필수 도서인데, 품절본이 돼서 아쉬워요.

아무 2016-10-12 19:15   좋아요 0 | URL
저도 그 점이 많이 아쉽습니다. 분량에서나 내용에서나 이 책이 바우만에 입덕하기 좋은 책이라서.. 그래도 전 <액체근대>가 더 좋았습니다. 하지만 이 책이 갖는 파급력이 더 크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러다 액체 시리즈를 다 읽어볼 것 같은... ^^;;
 
눈먼 자들의 국가 - 세월호를 바라보는 작가의 눈
김애란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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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고통리뷰를 쓰면서 떠올렸던 것이 진은영 시인의 글이었는데, 내가 이 책을 절반만 읽고 말았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책장에서 꺼내보니 열두 개의 글 중 여섯 편만 읽은 상태였고(황정은 작가의 글까지였다), 이후 틈이 나는 대로 조금씩 나머지 글들을 읽기 시작했다. 읽는 동안에도 이곳은 제대로 돌아갈 뜻이 없다는 듯 요동쳤고,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들은 브레이크 없는 기관차처럼 폭주했다. 그날 이후로 더 이상 한 발짝도 나가지 않겠다는 듯이. 여전히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이런 정지 상태에서 열두 편의 글을 읽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이 글들은 어디에 서 있을 수 있을까.


부끄러운 고백을 먼저 해야겠다. 당시 나는 뉴스를 거의 보지 않았고, SNS도 하지 않았으며, 한국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관심을 두고 있지도 않았다. ‘거의가 아니라 아예라고 고쳐 써도 그 말은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날, 그러니까 세월호 사건이 발생했을 때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그런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고 하루를 보냈다. 시간이 지나 친구와 함께 서울광장에 분향하러 갔을 때도 나는 제대로 이 사건의 윤곽을 알지는 못했다. 아마 난 그때 사고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내가 이 거대한 괴물을 어렴풋하게나마 인식한 것은 10월 즈음, 그러니까 이 책이 나올 때 즈음이었다. 하지만 난 이 책을 사 놓고도 읽지 않았고, 책장을 펴 본 것이 작년 416일이었다. 지금도 나는 노란 리본을 볼 때마다, 이 책이 꽂혀있는 것을 볼 때마다 과거의 무지했던 내가 떠올라 몸서리친다. 스마트폰 중독이라고 부를 만큼 수시로 온갖 뉴스를 확인하는 것도 이 죄책감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장황하게 썼지만, 남은 부분을 마저 읽는다는 것은 내 마음 깊은 곳에 맺혀 있는 죄책감과, 울분과 마주하는 일이었다.


말을 바꾸어 하자면, 시작(詩作)<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 것이다.

그러면 온몸으로 동시에 무엇을 밀고 나가는가. 그러나나의 모호성을 용서해 준다면<무엇을>의 대답은 <동시에>의 안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즉 온몸으로 동시에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 되고, 이 말은 곧 온몸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 된다. 그런데 시의 사변에서 볼 때, 이러한 온몸에 의한 온몸의 이행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것이 바로 시의 형식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 김수영, 시여, 침을 뱉어라힘으로서의 시의 존재


남은 절반을 읽으면서 내가 끊임없이 떠올린 것은 온몸이라는 단어였다. 읽으면서 이 책에 실린 글들이 머리유형과 심장유형으로 구분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강했기 때문이다. “온몸유형이 없었느냐고 묻는다면, ‘잘 모르겠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학부생 시절, 김수영에게 시란 머리로만 쓰는 것(언어파)도 아니요, “심장으로만 쓰는 것(서정파)도 아니다, 그런 구분 없이 온전한 자유로 시를 쓰는 것이다, 라고 배웠으나, 여전히 잘 가늠되지 않는다. 조금 더 그의 말을 따라가보면,


예술성의 편에서는 하나의 작품은 자기의 전부이고, 산문의 편, 즉 현실성의 편에서도 하나의 작품은 자기의 전부이다. 시의 본질은 이러한 개진과 은폐의, 세계와 대지의 양극의 긴장 위에 서 있는 것이다.


은폐대지는 하이데거에게서 가져온 말이다. 하이데거는 세계는 존재의 진리를 구현하기 위해 자기 폐쇄성을 가진 대지와 투쟁한다고 말한다. 아마 김수영이 말하고 싶었던 온몸의 시는 형식으로서의 예술성내용으로서의 현실성이 서로 끊임없이 시의 전부가 되려는 긴장일 것이고, 그것이 이 세계에 충격을, 혼란을 불러일으켜야 한다는 의미가 아닐까.

 

머리로 썼는가, 가슴으로 썼는가. 아니면 진정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가. 열두 편의 글을 이런 식으로 재단하는 것은 그들의 분노를, 질문을 무시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저 깊은 불의를 참지 못하고 분노하는 글도, 불의를 떠받치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맨얼굴을 들춰내는 글도 우린 여전히 필요하다. 어쩌면 이 글들이 온몸으로 밀고 나갈 수 없게 만드는 건 꿈쩍도 않는 저 세계 때문일까. 그렇다면 세계의 어느 구석을 믿어보려하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반드시 답신을 주어야 하지 않을까(황정은, 가까스로, 인간, 97-98). 그것이 이 글들을 혼란의 씨앗이 되도록 만들어주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하루가 가고 또 간다. 또다른 죽음에 애도할 시간마저 주어지지 않는 세계의 하루가. 나와 당신이 이 글을 매개로 만나 함께 나아갈 수 있는 날이, “자정의 그림자처럼긴 우리의 수치심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을까. 더 많은 말과 글들이 그날이 오게 할 혼돈의 씨앗이 되기를 바라며, 시론의 마지막을 인용하는 것으로 끝을 대신하려 한다..


이 시론도 이제 온몸으로 밀고 나갈 수 있는 순간에 와 있다. <막상 시를 논하게 되는 때에도> 시인은 <시를 쓰듯이 논해야 할 것>이라는 나의 명제의 이행이 여기 있다. 시도 시인도 시작하는 것이다. 나도 여러분도 시작하는 것이다. 자유의 과잉을, 혼돈을 시작하는 것이다. 모기소리보다도 더 작은 목소리로 시작하는 것이다. 모기소리보다도 더 작은 목소리로 아무도 하지 못한 말을 시작하는 것이다. 아무도 하지 못한 말을. 그것을.


+) 예전에 읽을 때도 그랬지만, 이번에 다시 읽으면서도 가장 아팠던 글은 황정은 작가의 글이었다. 그것은 나 역시도 세계가 존나 망했다고(96) 생각해왔기 때문에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이번에도 다시 읽으면서 울컥하는 순간들이 있었다. 이 글은 세계와 꼭 같은 정도로 내가 망해버리지 않기(97) 위해 쓰는 응답이다. 9월의 막바지에 또다른 죽음을 뉴스로 보며 나는 다시 절망했지만, 9월이 지난 뒤에 내가 세상은 원래 이렇게 생겨먹었으니라고 말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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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27 08: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9-27 10: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09-27 1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뉴스와 SNS. 물론 사회를 제대로 보려면 둘 다 봐야겠지만, 진실을 왜곡하고, 선동이 판 치는 현실이라 뉴스 보기가 꺼려집니다. 그래도 진실만을 찾는 분들이 있기에 그분들 믿고, 실날 같은 희망을 찾습니다.

아무 2016-09-27 13:50   좋아요 0 | URL
그게 참 어렵습니다. 늘어나는 양만큼 주의해야 하는 게 분별력이라서요. 잘 골라내는 게 중요한데, 그걸 잘 알기도 어렵게 점점 정보 전달 방식이 교묘해지는 게 느껴져요. 그래서 뉴스를 볼 때마다 감정 소모가 심해지고.. 그렇지만 눈을 부릅뜨고 보는 게 희망이 이어지는 길이겠죠..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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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가장 간명하게 정리한 문장은 2005년 대산문학상 심사평에서 찾을 수 있다. “김연수의 소설은 알 수 없으며 말로 표현하는 것은 더더욱 가능하지 않은 그 진실에 대해 알고자 하고 나아가 말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이걸로 부족하다면 김병익 평론가의 해설을 참조할 수 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해야 하는 불립문자의 문자적 설법처럼 모순된 진실에 대한 증언이며, 인간은 결코 서로 이해될 수 없는 소통 불가능의 관계로 맺어질 수밖에 없는 갈등의 존재라는 절망적 세계 해명의 인식”. 이걸 수록작의 한 제목으로도 요약할 수 있다. 바로 뿌넝숴不能說’. 즉 여기 실린 아홉 가지 이야기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것, 또는 재현할 수 없는 것을 언어화해보려 하는 작가의 치열한 시도들이다. 이미 실패가 예정되어 있는 시도이긴 하지만.

 

단편들의 대부분은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위해 어떤 역사나 책을 가지고 와서 그것을 교직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각의 단편들은 이런 전개방식에서 형식적인 공통점을 갖기도 하고, 작가의 세계관/역사관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기도 한다. 그 세계관을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하면 인간관계의 소통 불가능성’, ‘역사 또는 진실의 이면과 모순일 텐데, 이 둘은 모두 말로 표현할 수 없음에 수렴한다. ‘소설은 현실의 재현이다라는 명제에서 그는 현실재현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앞서 말한 두 가지 주제 중에서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후자인데,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단편은 뿌넝숴不能說. 지평리 전투를 겪은 중공군 출신 노인의 진술로만 이루어진 이 소설에서 역사와 세계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 매우 강하게 나타난다. “전쟁에는 진실이 있지만, 전쟁 이야기에는 조금의 진실도 없으(69), “역사라는 건 책이나 기념비에 기록되는 게 아니인간의 몸에 기록되는게 진짜 역사라는 것(80). 그렇기에 운명이 드러나는 순간에 언어 같은 것은 사라지는것이다(70). 그렇기에 작가는 기록된 역사에 회의적이며, 역사의 우연성과 그 이면에 끊임없이 천착한다. 이런 주제에 가장 잘 부합하는 소재(한국 전쟁)를 선택했기 때문에 뿌넝숴不能說가 가장 돋보였던 게 아닌가 싶다. 특히 노인이 손가락을 잃게 된 이유를 감추어 이야기의 진위를 의심하게 하는 형식은 진실이라는 것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전쟁이라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이 책에서 인간과 인간 사이의 소통은 대부분 실패한다.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에서 는 우연히 만난 전처와 걸었던 산책로를 지도에 그리면서까지 산책의 의미를 찾으려 하지만, 거기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그 중심에 연암 박지원이 중국에서 들여와 심었다고 전해지는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는 농담뿐이다. ‘는 혼잣말을 하지 않고, 꿈도 잘 꾸지 않는다고 스스로 믿는 이성적 인간이지만, 그런 이성으로도 삶의 행로라는 하나의 거대한 농담(30)은 이해할 수 없다. “내 생각과 달리, 나는 여전히 혼잣말을 잘(18)하기 때문이다. ‘농담이라는 것은 말이 되지 않음’, 이치에 맞게 설명할 수 없음이다. 결국 농담은 이 단편집 전반을 지배하는 우연의 모습 중 하나다. 투신한 그녀와 자신의 사랑을 소설로 쓰려 했지만 인과관계에 맞는 문장만 남겼더니 서로 사랑했던 순간이 모두 사라졌다는 아이러니 역시(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142), 삶이, 사람 사이의 소통이, 세상이 얼마나 많은 '농담'으로 채워져 있는지 보여주는 증거다. 그러니 그 모든 것을 인과관계로 정리해버리는 역사는 얼마나 가혹한가.

 

상당히 일관된 테마로 구성된 작품이지만 이를 다루는 형식이 다양한 편이고, 이야기 역시 온도 차가 커서 골라 읽는 재미를 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작가의 노고와 형식적 고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는 역사적 허무주의가 흐르는 것처럼 보이는데, 내가 보기에 이것은 작가의 감상적인 문체에 기인한 것이다. 역사의 이면을 들추고 우연을 추적하는 작가의 투쟁이 감상적인 문장 때문에 아련해지고 모호해진다. 대다수의 단편에서 시구(詩句)가 자주 인용되는 것 역시 이와 관련이 있다. 심지어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뿌넝숴不能說역시 그랬는데, 노인과 조선인 여성 구호원 사이에서 항상 등장하는 것이 한시다. 거대서사(전쟁)와 그 파도에 뛰어든 개개인의 소서사 사이의 긴장감은 한시의 낭만적인 분위기에 희석된다. 작가의 입장에서 보면 죽음이 발에 걷어차일 만큼 흔한 전장에서 피어난 개개인의 낭만적 사랑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고 변명할 수 있겠지만, 이 단편에서 강조되어야 했던 것은 전쟁이 얼마나 그들을 파괴했는지, 왜 그녀가 모든 남자의 손가락을 자르고 싶어했는지가 아닐까. ‘이야기를 어떤 문장으로 감싸는지에 따라 내러티브의 분위기와 응집력도 달라지는데, 이런 식의 감성적인(혹은 감상적인) 문장은 그들의 투쟁을 아련한 것으로, 마치 추억처럼 만든다. 밑줄 긋기에는 좋겠지만.

 

아마 이런 식의 감성이 극대화된 단편이 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일 것이다. 예전부터 나는 이 단편이 정말 좋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그것은 주인공 의 행적이 갖는 낭만성이 김연수의 문장과 결합해 시너지 효과를 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식으로든 나 아닌 ()타자를 이해해보겠다는 그의 몸부림은 결말에 이르면 따뜻함으로 덮이면서 연민을 부르고, 이제까지 쫓아왔던 의 행적이 허무하게 느껴지게 한다. 결국 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나온다는 수정의 니르바나(177)는 죽음 이후에야 가능한 것이냐는 허무함. 작품을 지배하는 세계관/역사관의 한계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책의 전반을 아우르는 주제의식에는 일련의 허무주의가 흐른다.

 

내가 김연수의 소설을 처음 읽은 것은 6년 전이고, 이번에 읽은 것이 세 번째이다. 예전에 읽었을 때도 내가 느꼈던 건 실망감이었다(근데 왜 집에는 그의 책이 네 권이나 있을까). 그때 읽었던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7번국도 Revisited보다는 이 책이 훨씬 나았지만, 엄청 좋았다고 말하기는 힘들 것 같다. 물론 나름 읽어볼 만한 작품이고, 다양한 형식을 보는 즐거움도 있으며, 다양한 역사적 사실을 이야기와 엮어 텍스트(text)로 형상화하려는 작가의 노고가 돋보이지만, 그것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작품도 있고(일곱 번째 단편이라고 차마 말할 수 없다), 형식적으로 잘 이루어졌다 해도 보이는 한계점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몇 가지 의문점들이 풀리긴 했다. 왜 그가 이토록 역사에 천착하고 있는지도(그는 이후에 역사소설을 세 권 썼고, 악스트 인터뷰에 따르면 지금 쓰고 있는 작품 역시 임진왜란 당시 일본을 다룬 소설이다).

 

+) 딴지 하나. 그건 새였을까, 네즈미에는 화자인 네즈미와 그의 연인 세희, 그리고 세희의 동생 세영이 나온다. 중간 즈음에 세영이 네즈미에게 진짜 이름이 뭐냐고 묻는 장면이 있다. ‘네즈미가 일본어로 라는 뜻이기 때문에 그것이 진짜 이름일 리가 없다고. “() 그렇지 않아, 미스터 네즈미 요시히로? 당신은 누구지?”(46) 네즈미는 이름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며 끝까지 이름을 밝히지 않는데, 내가 알기로 일본 이름은 성+이름이다. 우리나라처럼. ‘요시히로라는 이름에 다른 뜻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것은 내가 보기에 오류다. 그러므로 내가 대신 세영의 질문에 대답하자면, 그의 이름은 요시히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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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6-09-25 2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은 처음 읽은지 10년이 됐지만 여전히 제가 제일 좋아하는 단편입니다ㅎㅎㅎ

아무 2016-09-26 00:17   좋아요 0 | URL
저도 이 단편집에서 두번째로 좋았던 작품이었습니다. 다만 몇몇 장면에서 갸웃하게 되는 부분이 있어서..;; 단편 하나하나에 대한 코멘트를 쓸까 하다가 너무 길어질 것 같아 최대한 압축해서 쓰려고 했는데, 쳐내다보니 제가 생각하는 단점이 많이 부각됐네요..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이 김연수 작가의 장기가 가장 뚜렷하게 잘 나타난 단편인 듯 싶습니다. `그`와 `나`의 배치도 인상적이었구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