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스터리츠 을유세계문학전집 19
W. G. 제발트 지음, 안미현 옮김 / 을유문화사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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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스터리츠의 근저를 이루는 의 관찰기는 북미산 너구리에 대한 관찰로 시작된다. “() 분명히 녀석은 아무 특별한 이유도 없는 이런 행위를 통해 자신의 행동과는 무관하게 빠져든 이 잘못된 세상에서 빠져 나오려는 것 같았다.”(8) 뒤에 이어지는 아우스터리츠의 건축사를 읽다 보면 너구리 이야기는 사족처럼 느껴지지만, 아우스터리츠의 탐원기(探源記)를 다 읽고 저 문장을 다시 보았을 때 밀려오는 상념이란 이런 것이다. 그의 이야기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말하는 부분이 아닌, 여기부터가 시작이었구나, 하는 생각.

 

정체성은 우리가 지나온 시간이라는 선을 톺아보며 구성하는(또는 구성되는) 것이다. 그러나 유년 시절의 기억을 상실한 아우스터리츠에게 정체성 찾기의 길은 요원하다. 물론 그러한 내력을 가진 그였기에 공간에 상흔처럼 새겨진 시간성을 추적할 수 있게 되었으니 독자로서는 감사한 일이지만, 기록된 바도, 전해진 바도 없스스로는 어떤 기억의 능력도 갖고 있지 않은 수많은 장소와 물건 속에 달라붙어 있는 이야기들(30)을 기록할 수 있게 된 대가로 얻게 된 매우 위험한 감정의 소용돌이(40)는 그를 불안정한 외줄로 내몬다. 그의 감정을 일렁이게 했던 정거장이라는 공간이 떠남과 머묾의 이중주가 새겨진 장소라는 사실은, 그가 자신의 근원을 찾아 헤매는 기행이 안착하는 일 없이 계속될 것이라는 암시다. 결국 소설에 기록된 그의 삶을 끝까지 따라간 나에게 남은 그의 정체성은 그가 언제나 들고 다녔던, 이후의 그의 모든 삶을 요약하는 베라의 정확한 표현(192)인 륙색이었다.




나는 돌아오는 길에는 항상 리버풀 스트리트 정거장 동쪽 끝에서 내려 한두 시간 그곳에 머물렀고, 아침 일찍부터 벌써 피곤한 다른 여행객들과 노숙자들과 함께 벤치에 앉아 있거나 난간에 기댄 채 서 있으면, 그때 내 속에서 지속적인 당김, 혹은 일종의 심장의 고통 같은 것이 느껴졌는데, 그것은 흘러간 시간의 소용돌이에서 나온 것임을 예감하기 시작했어요, 라고 아우스터리츠는 말했다. (143-144)

 

개인의 기원을 찾아 장소를 끊임없이 수색하던 그의 방랑은 건축사라는 그의 전공과 결합하여 인간이라는 종의 시간 탐색으로 확장된다. 인간이 구축한 공간에 켜켜이 쌓인 시간의 배음을 탐색하는 작업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확한 표현일 것이다. 꾸준하면서 집요해 보이기도 하는 발자취는 인간의 탐욕과 잔혹함으로 귀결되는데, 브렌동크 요새로 대표되는 별 모양의 방어 시설에서 테레지엔슈타트로 이어지는 공간사()의 끈은 세상은 19세기의 종식과 더불어 끝난 것(156)이라는 그의 시간론과 상통한다. 그것은 36도라는 온도를 끊임없이 유지하며 살아가는 인간이라는 종의 숙명인지도 모른다.인간이 항상 빠져 있는 약간 열에 들뜬 상태(105)라는 마술적 경계가 부여하는 나방과 같은 숙명. 그 와중에 공간에 남겨진 개별적 존재로서의 개인사()는 끊임없이 시간의 권위에 저항하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시간과의 부딪침으로 자신의 존재를 전달할 뿐이다. 그것을 들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만.

 

이 소설이 처음부터 끝까지 진술 또는 진술의 진술이라는 방식을 택한 것은, 공간에 달라붙어 있는 이야기들이 시간과 부딪치며 전해지기 때문이고, 그렇게 전해지는 이야기들은 파편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건축사 또는 문명사라는 이름으로 그어진 선에서 벗어난, 그래서 시간에 의해 한 번도 건드려지지 않은 다른 사물들(113)의 말들은 진술 또는 증언의 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고, 이러한 진술들은 (미처 다 읽지 못한) 공중전과 문학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고와 감정의 작동 능력이 마비된 형태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아우스터리츠의 회상이 선형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끝없이 곁가지를 치며 주변 인물과 장소로 확장되는 이유이기도 하고, 그의 이름이 아이러니를 품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폴레옹이 거둔 뛰어난 승전의 장소이자, 스스로 가장 사소한 것까지 주목했다고 믿는 사람들까지도 이미 다른 사람들에 의해 자주 무대 위에서 이리저리 옮겨 다닌 소도구 역할을 하(82) 역사 속 장소는 끊임없이 가장자리를 일각으로 끌어 올리려 헤매던 그의 모습과 대조되는 것이다. “수면 위로 드러난 이름 아래 차갑게 잠겨 있는 이름들을 침잠시키는 역사-시간의 폭력이랄까. 시간의 무자비함 앞에서 그는 한 권의 책을 결코 완성할 수 없었고, 무한히 확장되는 페이지들이 반감과 구역질을 안겨주었지만, “그럼에도 독서와 글쓰기는 항상 그가 가장 좋아하는 일(137)이었다. 모든 것을 추구(芻狗)¹와 같이 여기는 시간의 물결 앞에 모든 시도는 끝에 이르면 무위로 남겠지만, 실패의 연속 사이에서 휘둘리고 있음에도, 자신의 근원을 찾아간 몰다우 강에서 바라본 도시가 "꼭 그려진 그림 속의 니스 칠처럼 지나간 시간의 구불구불한 틈과 균열에 의해 관통되고 있는 것처럼"(180쪽) 보임에도 호명을 멈추지 않는 그의 모습은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어떤 이의 그것과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

  

그녀가 가진 것은 파편들이었다. 문장이라기보다는 목소리였고 모으려고 할수록 멀어지고 흩어지는 메아리들이었다. () 수만 권의 책들, 유명하고 위대한 이름들. 그것들은 일각一角이었다. 일각에 불과했다. 수면 위로 드러난 이름 아래 차갑게 잠겨 있는 이름들이 있었고 그중에 실리가 있었다. () 얼마나 난처하고 허망한가. 허망하지만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게 필요했다. 모든 것이 사라져가는 이때. 어둠을 수평선으로 나누는 불빛 같은 것, 저기 그게 있다는 지표 같은 것이.

그 아름다운 것이 필요했다.

- 황정은, 명실중에서

 

홀로코스트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소설이 이에 국한되지 않는 것은, 시간이라는 이름의 보편성이 할퀴고 간 자리를 기록하려는 아우스터리츠-제발트의 집념 때문이기도 하고, 이를 표현하는 문장들이 품고 있는 애수와 처연함 때문이기도 하다. 엄혹한 역사가 진행 중인 현실을 마주하려는 그의 문장이 이런 감정을 빚어내는 것은 잠겨 있는 이름들에 대한 애도의 표시이자, 압도하는 시간의 폭주를 바라보는 작가의 회의 때문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들이 취하는 기록자로서의 태도는 이민자라는 특수성에 기인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면 우리는 그 이름들과 무관한가. “() 이 세상을 이렇게 어둡게 하는 것은 무엇이었나요? 하고 말했어요. 일라이어스가 그녀에게 대답했지요. 잘 모르겠소, 여보, 난 모르오.”(73) 평생을 자신이 믿었던 세계의 섭리 속에 살다가 무너져버린 일라이어스처럼, 우리 역시 아우스터리츠와 다를 바가 없다. 다만 공간에 새겨진 이름을 발견할 감각을 기르지 않았을 뿐. 결국 우리 모두는 자신의 행동과는 무관하게 빠져든 이 잘못된 세상속에 있기에, 난처하고 허망하지만 아름다운 것을 필요로 한다. 설령 그것이 아무것도 바꾸지 못할지라도.

 

아우스터리츠의 진술은 자신의 아버지와 마리 드 베르뇌유를 찾을 것이라는 다짐으로 끝난다. 이 작업은 현실의 그림자가 무에서부터 감광지에 나타나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과 같이 붙잡으려 하면 너무나도 빨리 사라져 버리는 기억(87-88)이기에, 아우스터리츠의 여정은 결코 끝나지 않고 언제나 진행형일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내가 떠올린 것은 종종 인간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떠올리는, 끊임없이 바위를 밀어 올리는 시지프의 모습이었다. 허망하며 허망하고, 이미 그 끝이 예정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호명하기를, 기억하기를 멈출 수 없는 것은 그것마저 없다면 무너질 것이라는 윤리적 감각의 외침 때문이다. 다만 어떤 방식으로 그들, 또는 당신을 불러야 할지 그 자세를 생각할 따름이다..



¹ 천지는 어질지 않아 만물을 추구와 같이 여긴다.”(노자, 도덕경) 추구(Straw Dogs)는 존 그레이의 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의 원제이기도 하다.



덧붙임) 행복한 책읽기책읽기의 괴로움

오랫동안 나에게 아우스터리츠는 숙제와 같은 책이었다. 제발트 읽기라는 다짐이 긴 시간 동안 미뤄지고 있다는 반성의 외침이기도 했다. 결국 불현듯 손에 집게 된 이 책을 다 읽은 뒤 내가 느꼈던 감정은 김현 평론가의 책 제목들과 같았다. 때로 한 페이지가 넘게 이어지는 제발트의 문장들을 읽어나가는 것은 나아가기를 포기하고 싶을 만큼 괴로웠으나, 현기증. 감정들에서 내가 담고 있던 물음표가 느낌표로 바뀌는 순간을 경험했으니 행복한 책읽기였다고 회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고생 끝에 낙이 온다.’와 같은 구태의연한 말로 표현될 수 없는 것으로, 어떤 감정이 다른 감정을 상쇄할 수 없는 상태이다. 단순한 공존이라고도 할 수 없는 이 감정의 뒤섞임은, 내가 다시 이 책을 펼쳐볼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에서 오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알다시피 모든 강들은 필연적으로 양쪽으로 경계를 갖지요. 그렇게 본다면 시간의 강변이란 무엇일까요? 유동적이고 상당히 무겁고 투명한 물의 특성에 상응하는 시간의 특성이란 무엇인가요? 시간 속으로 잠기는 사물들은 시간에 의해 한 번도 건드려지지 않은 다른 사물들과 어떤 차이가 날까요? 빛의 시간과 어둠의 시간이 동일한 원 속에서 나타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나요? 왜 시간은 한 곳에서는 영원히 정지하거나 점차적으로 사라지고, 다른 장소에서는 곤두박질을 치나요? 우리는 시간이 수백 년 혹은 수천 년 동안 일치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을까요, 라고 아우스터리츠는 말했다. (113-114쪽)

그들의 체온은 포유동물이나 고래, 전속력으로 달리는 오징어의 체온과 마찬가지로 36도에 해당한다고 했어요. 36도는 자연에서 가장 이상적이라고 입증된 수위계, 즉 일종의 마술적 경계로, 인간의 모든 불행은 언젠가 이 규범에서 이탈한 것과 인간이 항상 빠져 있는 약간 열에 들뜬 상태와 관련된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고 알폰소는 말했지요, 라고 아우스터리츠는 말했다. (1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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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8-06-21 14: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무님의 리뷰, 정말 오랜만에 봅니다. ^^

아무 2018-06-21 17:30   좋아요 0 | URL
유령처럼 그동안 보내온 건 저의 게으름 탓입니다^^;; 변명 같지만 생업과 독서를 병행한다는 건 많은 의지를 필요로 하더라구요.. 그나마 2년째가 되니 책을 읽을 여유는 어떻게든 마련했는데 이를 정리할 짬을 내기는 정말 어려운 것 같습니다. 독서에도 체력과 근육이 필요하다는 걸 하루하루 실감하며.. 그래서 꾸준히 서재 활동을 이어가시는 cyrus님 같은 분들이 대단하시다고 느낀 날이 많았던 지난날이었습니다..ㅎㅎ..
 
모르는 사람들
이승우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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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기 전까지는 단편집이기 때문에 이 제목에 붙은 것이 아닐까 생각했었다.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Stories of Your Life and Others)처럼. 맨 앞에 실린 작품이 모르는 사람이어서 더욱 그런 확신을 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작품을 전부 다 읽은 다음에는 괜히 책의 제목을 그렇게 붙인 것이 아니었구나라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각기 다른 여덟 편의 단편들은 모두 모르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들은 안다고 생각했으나 사실 아는 것이 없었던 모르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잘 모른다는 진실에 직면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러한 관계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것이 부자 관계일 텐데, 이승우 소설에서 행적과 성격이 베일에 싸여있는 아버지의 모습은 드문 소재가 아니다. 다만 이전까지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아버지가 일반적인 시선으로 이해하기 힘든 부분에 열중하거나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다면, 이번 단편집에서 나타나는 아버지의 모습은 현실에 있을 법한 인물로 그려진다는 게 차이점이다(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앞에 실린 네 편이 모두 아버지의 숨겨진 면모를 찾아가는 이야기라는 점은 여전하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당신을 이해한다는 단정 아래 만들어진 이해는 사실은 이해가 아니라 오해하는 방법이기 때문에 이해하지 않는 것보다 위험하(21), 이 이해가 인물들을 진실이라는 이름의 잔혹한 현실로 내몰게 된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내가 당신을 잘 알지 못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거나(모르는 사람, 복숭아 향기), 끝까지 진실을 부정하며 자신이 세운 이해의 벽에 그를 가두거나(윔블던, 김태호), 부정의 끝에 이르러 그의 전철을 밟기도 한다(강의).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당신이라는 하나의 인격을 온전하게 이해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지를, “혀가 입천장에 달라붙는 기이한 일(161)이 얼마나 자주 일어나는지를 읽는 동안 종종 실감했다. 그것은 누군가가 겪었을 고통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 세상은 견디는 것이다라는 아버지의 말은 깊은 울림을 낳는다. 이해한다는 것 역시 실패라는 귀결을 낳을 것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견디며 나아가야 한다는 울림을.

 

인물들이 겪는 여정은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한 것이지만, 그 여정의 종착점에서 얻는 부분적인 이해는 이해하려고 했던 그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인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것이 모르는 사람에서의 이다. 아버지의 삶에 대한 추적에서 그가 얻은 것은 남편이 있는 동안에도 그의 부재를 겪어야 했던 의 어머니다. 생의 이면에리직톤의 초상에서 보였던 성()과 속()의 관점을 가져오면 자신의 운명을 좇은 아버지의 삶이 성()이고 어머니의 삶이 속()으로 보인다. 하지만 가 발견한 것은 평생을 속()의 풍파 속에서 살았던 어머니에게 발현되는 성()이다. 이것은 작가가 앞서 언급한 두 장편에서 일관되게 말하던 ()은 속()의 한복판에 있다는 관점과 부합하는 것이기도 하다.

 

넘어가지 않습니다에서도 마찬가지다. 두려움 속에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거부하던 그녀는 어떻게든 무료 와이파이를 통해 전화를 쓰려는 틴 카우를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마지막에 이르러서 그녀가 이해하게 되는 것은 틴 카우가 아니라 그녀 자신, 정확히 말하면 그를 마주하면서 세균처럼 퍼졌던 두려움의 정체다. “세상을 견딘다는 것은 나를 견딘다는 뜻이기도(35) 한 까닭이다. 자신의 두려움이 죄책감과 얽혀 있음을 이해하고 그를 안으로 들이려는 그녀와 절대 집안으로는 들어가지 않으려는 그의 모습은 안타까움과 슬픔을 자아낸다. 생뚱맞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이 장면을 보며 어떤 문장을 생각했다. “네 탓이라고 누군가 노려볼 때 그게 왜 내 탓이냐고 항변하고 싶은데 생각하고 보면 내 탓인 것 같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는 삶. 멀쩡하게 사는 것 같다가도 불규칙한 주기로 돌아오는 혜성 같은 그런 심정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는 삶.”(*)

 

거칠게 정리하면 소설집 안에 담긴 모든 이야기는 자신이 잘 알지 못했던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한 과정들이다. 그 과정들은 작가가 동어반복으로 직조하는 문장의 힘을 얻어 치열함과 깊이를 더한다. 누군가에겐 군더더기로 보일 문장들을 사유의 깊이로 구축할 줄 아는 그의 문장은 언제나 감탄스러운 것이지만, 그 솜씨는 단편보다 장편에서 더욱 빛을 발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읽는 동안 자주 했다. 그 생각은 밀어두었던 그의 장편소설들로 눈을 돌리며 나를 재촉한다. 그것을 읽는다는 것은 작가를, 나아가 작가의 작품을 읽는 자신을 이해하는 여정이 될 것이라는 것을 잘 안다. 그 이해는 결코 완전해질 수 없다는 것, 그것을 견디는 것도 이해의 한 과정이라는 것도.

 

 

(*) 황정은, 작가노트, 2014 5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3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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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정의 사랑 아름다움 - 종교, 철학, 사랑, 예술에 관한 낭시의 쉽고 친절한 네 개의 강의 카이로스총서 23
장 뤽 낭시 지음, 이영선 옮김 / 갈무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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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Dieu : 열림의 가능성

 

낭시는 신에 대한 강의를 하늘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회화에서 말하는 하늘les ciels와 종교에서 말하는 하늘les cieux 중 낭시가 주목하는 것은 종교적 개념의 하늘이다. 그는 장소 아닌 장소라고 부르는데, 이는 세계 전체와 다른 장소를 말한다. 결국 신은 존재 방식 자체가 다르다는 것, 그러므로 어디에도 없으면서 도처에 있는 것이다. “결국 그것을 말할 수 있는 방법이란 없습니다.”(21) 이후에 낭시가 말하는 신에 대한 정의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열림l'ouverture인 듯하다.


이런 상태에서, 그러니까 거대하고 끝없는 무언가를 느끼고 더 이상 어딘가에 그저 안주할 수 없다고 느끼는 상태에서, 그래서 기쁨 혹은 고통, 사랑이나 증오, 어떤 힘이나 나약함을 느낄 때, 이런 모든 상황에는 내가 존재하는 것을 끊임없이 초월하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그것은 동시에 나의 자아, 인격, 자질, 지위, 그러니까 세계의 어딘가에 정착하고 있는 내 존재 방식과 더불어서 나타납니다. 이런 모든 것에 열림이 있는 것입니다. 유일신을 섬기는 세 종교에서의 신과, 다른 모든 신들 역시 이런 것 외에 다른 무언가를 제시하지는 않습니다. (29, 강조는 인용자)


세 개의 일신교에서 말하는 신은 정의(유태교), 사랑(기독교), 자비(이슬람)이다. 낭시는 이 세 가지가 우리에게 하늘의 이미지를 만들어 준다고 말한다. 이때의 하늘은 거대하게 열려 있지만 실체 없는, 그런 가능성의 공간(31)이다. 아마 낭시는 열림을 통해 존재의 무한한 가능성을 이야기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파스칼의 말을 빌려 인간은 끊임없이 인간을 초월한다(33)고 말했으리라.

 

나는 어린 시절 교회를 다닌 것 외에는 종교생활을 한 적이 없다. 스스로 어설픈 무신론자를 자청하는 내게 신에 대한 강의는 선승의 문답 같았다. 뜬구름처럼 붙잡으려 해도 보이지 않는 말들. 강의 말미에 등장하는 믿음과 충실성의 상관관계에 대한 부분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강의 뒤에 나오는 질의응답이 나에게 더욱 흥미로웠는데, 그 중에서 주목했던 부분은 기계의 창조와 신의 창조를 비교하는 내용이었다.


세 개의 일신교에서의 창조에 대한 질문은 가장 열정적인 문제들 중 하나이면서, 동시에 무(, le rien)에서 세상을 창조했다는 것과도 같습니다. 라틴어의 표현으로 엑스 니힐로(Ex nihilo)의 창조라고 말합니다. , 무로부터의 창조를 말하지요. 이 말은 신이 무에서 물질적인 세계를 만든 거대한 기계라는 뜻이 아니라, 바로 그 이면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세계가 거기에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47)


이 다음의 질문에서 낭시는 무()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나가는데, 인상적인 부분은 트심트섬에 관한 내용이었다. 유태교의 신비 철학인 카발에서 말하는 것으로, “신이 무언가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니고, () 움푹 파인 곳에 세계가 자리 잡을 수 있는 공()을 열었다(52-53)는 이야기다. 이때의 무와 공 역시 어디에도 없으나 도처에 있는 것을 말한다. 낭시는 트심트섬의 이야기를 통해 신이 스스로 열리는 공이었(58)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신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였는데 그 공을 어떻게 세상으로 열리게 할 수 있었느냐는 학생의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저도 제가 열렸으면 좋겠네요…….”(58)(*) 세계의 존재 방식과 전혀 다른 존재 방식을 갖고 있다고 이야기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증명할 수는 없다는 게 낭시의 결론이다.



2. 정의la justice : 나와 너의 관계에서부터

 

정의에 대한 낭시의 정의(定議)는 신에 대한 강의에서 언급됐던 유태교에서의 신의 의미(정의)와 거의 같다. “자신을 다른 모두와 구별되게 하지만 타인들과의 관계에서만 비로소 현실로 드러나게 되는 그 방식(30). 일차적으로 정당하다는 것은 각자가 당연히 받아야 할 몫을 준다(79)는 낡아 빠진 방식을 따르지만(낭시도 낡아 빠진 결론이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타인들과의 관계라는 말이다. 각자에 포함되어 있는 개념은 평등함l'égalité과 단수성la singularité이다.

 

la singularité는 본래 특이성, 독특성이란 의미이며, 들뢰즈 철학에서 주로 등장하는 단어다. 하지만 무위의 공동체에서는 단수성(單數性)으로 번역되었고 이 책도 그 번역을 따랐다. 낭시에게 단수성복수성(複數性)과 항상 쌍으로 따라다니는 개념이고(단수성 또는 복수성이 아니라 단수성이자 복수성), 이는 특이하지도 독특하지도 않은 와 타인()우리의 관계에 자리한다는 낭시의 사유다.(**) 약간 돌아왔지만 결국 정당/부당한 것은 나와 타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결정된다는 것이며, 이때의 항상 남들과 관계된 나(81)라는 의미다. 짐작컨대 공동--존재être-en-commun라는 개념 역시 관련이 있는 게 아닌가 싶다.(***)

 

타인들과의 관계가 정의에서 중요해질 경우, 정의가 고정된 것이 아닌 진행형의 개념, 여전히 더 찾아내고 납득할 수 있는 정당함이 있다는 사실을 유념하는(88) 개념으로 인식될 수 있다. 고개가 끄덕여질 법한 견해이지만, 이것이 누군가에게는 면죄부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자꾸 걸렸다. 그래서 네 개의 강의 중 정의에 대한 강의가 제일 별로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정당하다는 입장에서 각자에게 주어져야 하는 것조차 모르고 있던 몫까지 주는 것(90)이 정의라는 주장까지 나아가므로 문제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결국 정의에서 타인과의 관계가 중요하다는 것은 정의를 독점할 수 있는 사람(또는 세력)은 없다는 이야기이며, 이를 독점할 수 있다고 믿는 자는 정의는 절대로 충분히 정당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함에서 시작(110)된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자다. 이 강연에서 더욱 주목할 만한 부분은 아이들의 질문(“우익과 좌익 중 무엇이 더 정당한가요?”, “우리는 어떻게 정의에 대한 개념을 갖게 되었나요?”, “정당한 전쟁도 있나요?”)과 낭시의 대답이다. 특히 두 번째 질문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까지 나아가는 낭시의 답변은 놀랍다. 어른도 쉽게 설명할 수 없는 개념을 아이들에게 풀어내는 자도 그렇고, 이에 대한 강의를 듣고 나오는 질문의 수준도 그렇다(누가 이 아이들을 미숙하다고 하는가).



3. 사랑l'amour : ‘자기chérie를 어루만지다

 

사실 이 강의는 한 줄로 요약할 수 있다. “난 널 사랑해라는 말에 사랑의 모든 것이 있고 그것으로 완전하다, . 이 말은 난 널 무척 많이 사랑해와 전혀 다른 말이다. 사랑은 모든 비교, 그러니까 무척이나 많이와 같은 비교로부터 분리된 의미이기 때문이다. “난 널 사랑해라는 말은 내 마음 속 가장 깊은 내면을 보여주는 행위이고, 그 사람의 유일성을 토대로 한 열정적인 행위다. 그리고 사랑은 영원하다. ‘영원함l'éternel이란 끝이 없음’, ‘변함없음이 아니라 시간을 벗어난 것(153)을 의미하므로.

 

자기chérie자기야할 때의 자기. 이 말은 라틴어의 carus에 어원을 두고 있는데, 이와 같은 어원을 두고 있는 단어가 어루만지다caresse이다. 그래서 낭시는 사랑의 제스처는 당연히 어루만짐이라고, 그것은 타인이라는 현존에 고백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133) 행위라고 말한다. 이를 볼 때 낭시의 철학에서 접촉이 핵심을 이루고 있다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데리다가 낭시에 대해 쓴 책 제목도 접촉, -뤽 낭시).


어루만짐은 사랑에서 중요한 것이 상대의 현존임을, 그의 감촉임을, 그리고 어떻게 보면 그것 외에 아무것도 아님을 보여 주는 행위입니다.

그것 외엔 아무것도 아닌 그 순수한 현존이란 무엇일까요? 그 현존은 가치 있는 유일한 한 가지 사실이, 타인의 존재가 내 마음에 있음을, 나와 분리할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134)


낭시의 예술론에서도 접촉은 중요하게 다루어지는데, 오감 중 촉각을 가장 중요시한 것에서도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촉각은 몸 전체의 감각이라고 말했던 루크레티우스처럼, 그는 촉각을 감각들의 접촉, 감각들을 초월하는 감각이라고 말한다. 접촉은 상대와 완전히 떨어져 있을 때도, 간격이 완전히 제거되었을 때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닿을락 말락한 상태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기에 사랑은 매우 어렵고, 아름다움, , 열정만큼이나 위험과 고난으로 가득 차 있는 것(170)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랑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기에 언젠가 찾아오기 마련이고, 우리를 그토록 미스터리하고 격렬한 그 핵심의 주변을 서성거리(161)도록 만든다. 어루만짐이라는 테마로 주어진 이 강의는 내가 여태껏 보고 들었던 사랑 이야기 중 가장 아름다웠다. 사랑의 단상을 읽은 후에는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강의 중에도 이 책이 언급된다).


그렇지만 사랑이라는 단어의 위대함은 그 충직함 속에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말하자면 사랑이 끝나 버리거나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배신했다고 해서, 누구의 잘못이라고 단정 지을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사랑이라는 단어가, 신뢰la confiance, 약혼들les fiançaillages, 이란 단어들과 동일한 어원을 갖는 충직함이란 사실을 막지 못합니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예전보다 결혼하지 않는 추세이기 때문에, 약혼도 덜 하게 되죠. 약혼자le fiancé 혹은 약혼녀la fiancée란 자신의 신뢰la fiance, 믿음la foi에 속하는 충직성을 약속하고 부여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예전에는 사랑에 자신을 건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자신의 믿음을 주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는 이런저런 것을 하는 데에 있어서 자신을 거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가 존재한다는 것과 그가 존재한다는 사실과 더불어 유일한 관계 속에서 상대와 함께 상대를 위해 자신을 거는 것입니다. (140-141, 강조는 원문)



4. 아름다움la beauté : 알고 있지만 말로 할 순 없는

 

예쁨joliesse아름다움la beauté은 다르다. 예쁘다는 것은 상대성을 내포한 개념이기에 매 순간, 사람마다 다른 것이다. 우리는 흔히 아름다움도 상대적이라고 생각하지만 낭시의 입장은 다르다. 그는 아름다움은 주관적이지 않고 보편적이지만, 그것을 자신이 제시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그것은 어떤 신호나 기호를 통해 우리의 마음이 이끌리도록, 욕망이 일어나도록 만든다. 아름다움의 보편성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요구되고 제안되고 기대되는 것이며 우리를 긴장하게 만드는 것(189)이다. 음악에서는 반향résonner이고, 그림에서는 그것에 밀착되기를, 포함되기를 요구(187)하는 시선 너머의 무엇이다. 낭시는 이러한 관점에 따라 나르시스 신화도 다르게 해석한다.



그는 정신을 잃고 자신이 원하던 그대로의 아름다움, 그리고 넋을 잃을 만한 그런 아름다움을 발견한 얼굴을 본 것입니다. 그는 그저 모르는 사람을 보았을 뿐이고, 따라서 나르시스 신화는 자기만족과는 전혀 관계없습니다. () 나르시시즘의 방식으로 자신의 응시하고 있는 어떤 사람이 아니라, 아름다움으로 열려 있는 시선을 본 것입니다. 그 시선은 자신을 보고, 그러면서 아름다움에 상응하는 무언가를 보았고, 아름다운 꽃의 형상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 그 아름다움 속으로 빠져들지요. 시선은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것을 바라보고는 넋을 잃을 때까지 빠져들었던 것입니다. (186-187쪽, 강조는 인용자)


아름다움은 한 사회나 시대에 부합하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아름다움의 보편성은 합치나 조화와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아름다움을 찾았다고 해서 만족스럽다고 결론지을 수가 없(199)는 것이다. 시대를 넘어 지금까지 우리가 찾게 되는 예술은 분명히 존재하고, 그 예술은 오늘날 사람들이 흔히 아름답다고 말하는 기준에 전혀 부합하지 않기도 한다. 우리가 끊임없이 미술관, 음악회, 극장을 찾고, 아름답다고 여겨지는 작품들을 감상하는 것은 아름다움 없이 사는 삶, “직접적인 요구들과 필요의 역할로서만(209) 사는 삶이 불가능하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시작은 상업주의와 허영심일 수 있겠지만, 그런 과정을 통해 한 시대와 조화를 이룬 아름다움을 해체하고 떨쳐버림으로써 아름다움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될 것이다. 랭보의 지옥에서 보낸 한 철처럼.

 

질의응답의 말미에는 당신이 말하는 신, 사랑, 아름다움은 다 환상이 아니냐고 질문하는 학생이 있었다. 낭시는 그것들에는 환상이란 아무것도 없다고 대답했으나 학생은 끈질기게 의문을 제기했는데, 이에 대한 낭시의 답변 역시 구체적이지는 않았다. 시간 부족의 문제가 가장 크게 작용한 듯하지만, 좀더 상세히 답변을 해주었다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번 질의응답 중에서 가장 아름다웠던대답은 사랑과 아름다움의 유사성에 관한 이야기였다.


사실 사랑과 아름다움에는 언제나 유사성이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사랑의 관계는 단순한 호감 이상이기 때문이지요.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즐거움을 느낀다는 것이 그 까닭임은 모두가 공감할 것입니다. 또한 매력과 재치를 겸비한 예쁜 사람들을 선호하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사랑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사랑은 그 이상의 것이고, 게다가 더 까다롭고 위험합니다. 사랑에 관한 강연에서 18세기 영국의 철학자 흄을 인용했던 것이 생각납니다. 그는 아주 놀라운 사실을 말합니다. 한 사람의 아름다움은 겉모습과 관계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을 욕망한다는 감정의 결과입니다. 그 사람에게 그 자체로 말을 걸어오는 그 욕망 속에서는, 즉 그 사람은 완전히 신비롭고 대체불가능하다는 그 욕망 속에서는 내가 무엇을 사랑하는지 누구를 사랑하고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언제나 전적으로 미결 처분되어 남겨질 그 사람에게 나를 바치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러나 그 마음의 동요로 인해, 그 사람도 나의 그런 마음을 받아들이고 느끼고 있기 때문에, 그녀 혹은 그를 초월하는 사람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아름다운 법입니다. (207-208)



5. 연결들

 

네 가지 주제의 공통점을 낭시의 말을 빌려서 말하면 이렇다. ‘어디에도 없지만 도처에 있는 것.’ 네 가지 주제에 대한 낭시의 설명은 다른 듯하면서도 비슷한 부분이 많다. 절대적 존재를 열망한다는 점에서 사랑과 종교가 엮이고, 타인과의 관계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정의와 사랑이 엮이고, 시선 너머의 무언가에 사로잡힌다는 점에서 사랑과 아름다움이 엮인다. 완전히 겹치지 않는 이 네 가지는 서로 접촉하고 있다고, 그러면서 불안정을 유지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낭시의 강의에서 유별난 점은 이것은 A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A가 아닌 것은 아니다라는 식의 설명이 많다는 것이다. 제가 누군가에게 난 널 사랑해라고 말한다면, 그 때 사랑의 의미는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바로 그 안에 전부가 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117)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듯이 정의는 절대로 충분히 정당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함에서 시작됩니다.”(110) 등등. 이렇게밖에 말할 수 없는 건 그에게 세계는 닫힌 공간이 아닌 열림의 공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태도는 수많은 공격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태도다. 하지만 여지가 너무나 많은 이 설명을 통해 얻은 것이 있다. 종교, 정의, 사랑, 예술이 지금 눈 앞에 보이지 않더라도 그것은 도처에 존재하고 있으며, 그러니 우리는 끊임없이 그것에 대해 말해야 한다는 것, 말로 다 할 수 없겠지만 끊임없이 말로 하려 시도하면서 접촉해야 한다는 것이다.



Si moi je veux m'ouvrir : ‘나 역시 그것을 증명할 방법이 없다는 의미로, 신이 어떻게 공을 세계로 열었는지, 그리고 그러한 공이 스스로 열리게 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기는커녕 필자 역시 증명할 수가 없음을 완강하게 표현하고 있다. 58쪽의 역주 28 참고.


** 낭시가 말하는 singularité는 아무 특이할 것도 독특할 것도 없는 와 타인()이 어떤 창조적인 우리로서 관계 내에 자리 잡는다는서로가 서로를 향해 있다는편위된 탈자태의 사건을 따라서 공동의 우리, 어떤 공동성, 그렇기에 필연적으로 복수성을 함의한다.” 무위의 공동체, 2010, 273.


*** 아, 물론 낭시가 이 책에서 단수성에 대해 깊게 이야기한 것은 아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강의였으니까(당연히 공동-내-존재라는 개념도 안 나온다). 이 책에서 단수성은 "저마다 하나뿐이고 유일한 존재인 만큼 각자가 고유하다는 사실을 함의"(80쪽)하는 개념으로 설명된다. 낭시는 정의라는 개념 안에서 평등과 단수성이 분리될 수 없음을, 그리고 정의란 "타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결정된다는 것을 일관되게 강조한다.



p.s) 책 말미에 실린 역자의 발문을 통해서 낭시의 예술론이 어떤 것인지, 낭시의 철학은 무엇인지 대략적으로나마 엿볼 수 있다. 낭시의 예술론은 국내에 출간되지 않았기 때문에(『뮤즈들』), 발문을 읽으며 낭시의 사상과 이 강의들 사이의 연관성을 추적해보는 작업도 의미가 있었다. 다만 발문에서 이 책을 인용할 때 페이지 수가 하나도 맞지 않았다는 점은 지적해야겠다. 내가 갖고 있는 건 초판 3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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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2-08 11: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솔직하게 말하면, 이 글을 처음부터 끝까지 안 읽었어요. 일단 책의 분야가 어렵게 느꼈고요, 어설프게 읽어서 제 생각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도 잘 쓰든 못 쓰든 것에 떠나서 정성이 들어간 글은 개인적으로 좋아합니다.

아무 2017-02-08 11:33   좋아요 0 | URL
제 글보다 책의 내용이 훨씬 쉽습니다 ㅎㅎ 읽으면서 강의자의 실력이 정말 중요하다는 걸 느꼈어요. 오히려 역자의 글을 읽으면 어려워지고 혼란스러워지는 느낌이..^^;; 네 개를 다 다루려니 글의 분량도 평소의 두 배가 되더군요. 인용 몇 개를 뺄까 생각도 했지만 차마 뺄수가 없었습니다..ㅎㅎ..

AgalmA 2017-02-08 20: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낭시가 <나를 만지지 마라> 책을...접촉 관련한 농담ㅎ;
<사피엔스> 읽다보니 흥미로운 게 많더군요. 보이지 않는 것도 숭배하는 애니미즘과 천사, 악마 같은 것의 연결이라던가, 농업 혁명 이후 종교가 발달한 게 아니라 종교적인 건축물을 짓기 위해 사람들을 장기적으로 먹일 농업을 시작한 것일 수도 있다는 추정 등등...
종교는 참 언제나 무궁무진한 대화거리ㅎ

아무 2017-02-08 20:43   좋아요 1 | URL
그래서 정지돈 작가가 그 책 서평 쓸 때 ˝나 만지지 마˝하는 금정연 서평가의 사진을..^^;
<나를 만지지 마라>도 이 책이랑 같이 읽기 시작했었는데, 프롤로그까지만 읽고 덮어놓았어요. 이해 없이 글자만 따라 읽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반납기한도 다 돼서 반납해야 되는데, 언제 다시 읽게 될지는 모르겠네요.. 신자가 아니어도 종교에 대해 공부해야 될 필요성을 느꼈다고나 할까..ㅎㅎ...
종교 때문에 농업 혁명이 일어났다는 추정은 보기만 해도 흥미로운데요? 저에게 가장 미스터리한 영역 중 하나가 종교여서(그만큼 잘 모른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런지는 몰라도.. <사피엔스>가 다루는 범위가 생각보다 넓네요. 얼른 짬을 내서 읽기 시작해야 될 것 같은ㅎㅎ
 
희망, 살아 있는 자의 의무 - 지그문트 바우만 인터뷰 궁리 공동선 총서 2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인디고 연구소 기획 / 궁리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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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독서 모임에서 다루기로 했던 책은 바우만의 사회학의 쓸모였다(내가 하자고 했다..). 바우만의 책을 바로 읽자고 하기에는 읽기 난감한 문장들이 마음에 걸려서 보다 쉬울 거라 생각되는 대담집을 제안한 것이었다. 그렇게 모임을 준비하다가 설 연휴에 사회학의 쓸모를 다 읽고, 내용을 보충해야겠다 싶어서 집어든 책이 이 책이었는데, 책을 반 정도 읽고 나서 이 책을 같이 읽자고 했어야 했는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이 바우만을 모르는 독자들에게 좀더 쉬운 접근통로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사상가의 사상에 접근할 때 가장 좋은(혹은 쉬운) 입문서는 사상가의 인터뷰라고 흔히 말한다. 인터뷰어의 자질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사상가가 정립한 자신의 사상을 말로 풀어내는 방식이기 때문에 접근이 용이하다고 말하는 것일 테다. 희망, 살아 있는 자의 의무는 바우만이 접근하고 있는 광범위한 문제들을 두루 질문하고, 바우만의 답변이 그의 책 중 무엇에 기반하고 있는지도 역주로 언급해준다는 측면에서 좋은 입문서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다. 워낙 자주 대담을 가졌던 학자여서 사회학의 쓸모와 많이 겹치는 부분도 있으나, 이 경우에도 이쪽의 답변이 훨씬 자세하다. 바우만의 책을 몇 권 읽어본 독자에게는 바우만 사상의 지도를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게 해주는 책이자, 바우만 사상의 중핵을 이루는 책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책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런 맥락에서 바우만의 유토피아는 빅터 터너의 의례의 과정에 쓰인 제약 없는 무차별적 공동체 코뮤니타스communitas를 닮았다. 코뮤니타스는 구조와 질서를 요구하는 소시에타스societas에 상반되는 것으로서, 인간의 자유, 자주성, 실험 정신, 변신 등을 가져오는 친밀한 공존의 원천을 뜻한다. 바우만은 스스로 적극적 유토피아라고 명명한 이 개념에 대한 이해를 위해, 몇 년간 사회주의의 비호 아래에서 그러한 유토피아를 향한 희망을 모색했다.

- 미켈 야콥슨, 유토피아를 찾아서(257, 강조는 원문)

 

야콥슨은 코뮤니타스라고 말했지만, 바우만은 자신이 지향하는 공동체를 정서의 공동체(39)라고 말한다. 이는 정치와 권력이 분리된 공위의 시대에 우리가 모색할 수 있는 연대의 방안이자, “인간 유대의 연약화를 막기 위한 대안이다. ‘유토피아주의라는 말이 특정한 절대적 공간을 상정하는 것이 아니라 대안은 없다TINA는 비관을 배격하고 유토피아를 상상하는 인간의 상상력을 긍정하는 것이라면, 바우만은 유토피아주의자다. 그는 유토피아를 상상하고 이를 실현하려는 인간의 창조성을 적극적으로 긍정한다. 아랍의 봄, 이스라엘의 여름에서 그가 본 것은 변화에 대한 인간의 열망이요, 이를 실천하는 과정에서 연대의 힘에 중독된 사람들이다.

 

사람들은 함께 있음의 경험에 순식간에 중독된 것입니다. 그렇죠. 바로 연대의 힘에 말입니다. 이미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러한 변화의 의미는 곧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는 것이겠죠. 이를 달성하는 데는 큰 노력이 들지 않았습니다. ‘혼자solitary를 뜻하는 이 고약한 단어에서 철자 하나를 바꾸어 연대solidary로 변화를 꾀하는 정도의 노력 정도라고 할까요? 이 연대는 요구가 관철되는 그 순간까지 지속되는 것입니다. 또한 이 연대는 특정한 대의를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대의를 갖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입니다. 나와 너와 광장에 있는 우리 모두가 목적을 갖는 것이고, 곧 삶이 의미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137, 강조는 원문)

 

바우만의 사상 중에 가장 중요한 키워드를 찾는다면 액체 또는 유동성(liquidity)일 텐데, 이때 중요한 점은 현대 사회의 유동성을 바라보는 그의 관점이 양가적(ambivalent)이라는 점이다. ‘액체근대가 도래한 현대 사회를 분석하는 그의 눈은 냉철하고 비판적이지만, 그렇다고 그의 주장이 과거의 고체 근대로 돌아가자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한때 나는 이렇게 오해했었다). 키스 테스터는 바우만 사상의 핵심을 아이러니라고 규정했는데, 이는 바우만이 인간을 예측 불가능성의 관점에서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는 기계론적 인간관에 대항하는 아이러니의 인간관을 내세웠고, 이러한 관점은 자유로 이어진다. 액체성이 고체성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산물(187)이라고 말하는 이유 역시 마찬가지다. 현대 사회의 유동성과 불확실성, 소비주의를 분석하는 작업은 우리가 사회를 바라보는 통념을 깨고 세계의 양가성을 바라보게 하려는 작업의 산물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전 지구적으로 혼란스러운 공위의 시대에서 새로운 전환을 꿈꾸는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닐까.

 

해체될 틈을 허용하지 않는 견고한 사물에 대한 두려움, 허락된 시간보다 오래 머무르려는 것들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손과 발을 꽁꽁 묶어버리는 것들, 혹은 아름다운 순간을 붙잡아 그 속에 영원히 머무르려는 욕망의 과오를 저지른 포스터스 박사와 같이 지옥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 등을 사르트르는 우리가 끈적끈적한 점성의 물건을 만지는 것에 대한 본능적이고 즉각적인 거부감으로 설명합니다. 하지만 이를 사회적 징후로 볼 경우, 그러한 두려움은 액체 근대의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 인간 역사의 주요한 동력이 된다고 지적합니다. 사실 그러한 공포의 징후들은 임박한 근대의 도래를 알리는 신호이자, 완전히 새로운 역사적 국면을 알리는 분수령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189-190)

 

그는 어떤 통계적인 수치를 가지고 현대 사회를 분석하지 않는다. 소비주의를 분석할 때에도 그가 주목하는 것은 소비주의가 끼치는 경제적 영향이 아니라 이를 통해 벌어지는 윤리의 붕괴다. 사회학의 쓸모에서 자신의 작업을 사회학적 해석학이라고 명명한 것처럼, 바우만은 연구 대상을 알고리즘 법칙을 구성하는 유한수finite number로 환원하는 것을 거부(사회학의 쓸모, 100)한다. 그가 인간의 윤리성을 끊임없이 강조하는 이유, 반복적으로 레비나스의 논의를 언급하는 이유, “오직 윤리적 주체로 설 때에만 인간성은 완성될 수 있(198)다고 말하는 이유다. 접촉보다 접속이 압도적인 현대 사회에서 그가 프랜즌을 인용하며 SNS를 비판적으로 이야기하는 것도 이러한 장치들이 인간 사이의 관계를 소멸시키고 윤리마저 실종시키는 역할을 하는 까닭이다.

 

인터뷰 말미에서 바우만은 좋은 사회란 자신이 속한 사회가 결코 현재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곳(201)이라고 정의한다. 현대 사회를 비관적으로 분석한 수많은 저서를 냈음에도 자신은 비관주의자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대안적인 세계가 가능하다는 자신의 믿음 때문이다. 때 이른 죽음이 아님에도 그의 부재를 슬퍼하는 것은, 오늘날 이토록 희망을 소리 높여 말하는 사람이 그 말고는 보이지 않아서다. 여전히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어진 몫은 남겨진 그의 저서를, 그가 남긴 병 속의 메시지를 건져서 세계를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고, 이면에 숨겨진 폭력에 항의하며 정서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일 거라고 믿는다.

 

+) 지금까지 읽은 바우만의 책은 대여섯 권 정도인데, 이중에서 바우만 사상의 핵심은 『액체근대』라고 생각한다. 현대 사회를 '유동성'이라는 비유를 통해 바라본 바우만의 분석은 이 책에서 가장 빛난다. 이 대담을 읽으면서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한 책은 『사회주의, 생동하는 유토피아』(1976→2010)였다. 2부에 글과 인터뷰를 실은 많은 사람들이 중요한 책으로 지목한 까닭이다. 이렇게 읽어야 할 바우만의 책도 하나씩 늘어난다..


희망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조상들이 훌륭한 라틴어 격언으로 대답을 마련해 놓았습니다. "숨 쉬는 한, 나는 희망한다Dum spiro spero."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이 문장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말할 수 있을 텐데, 이것이 바로 제가 미래에 대해 갖는 입장입니다. 저는 강연에서 "당신은 왜 그렇게 비관적인가?"라는 질문을 자주 받는데요. 이 라틴어 격언이 저의 대답입니다. 키케로도 이 말을 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만, 저는 낙관주의자도 비관주의자도 아닙니다. 제 스스로가 정의하길, 낙관주의자는 지금 이곳의 세계가 도달 가능한 최선의 세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반면 비관주의자는 ‘누가 정답을 알겠어. 그래도 아마 저 사람 말이 맞겠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죠. 그러나 이러한 구분은 불완전한 것이죠. 저는 여기에 제3의 부류가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희망하는 자들’이 그것입니다. 지금과는 다른 대안적인 세계가 가능하다고 희망하는 자들이죠. 저는 새로운 세계가 불가능해지는 지점은 오직 우리가 희망하기를 멈출 때뿐이라고 생각합니다. (20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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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의 거래에 대하여 - 책과 서점에 대한 단상
장 뤽 낭시 지음, 이선희 옮김 / 길(도서출판)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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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는 것, 나아가 독서(讀書)라는 행위가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서점에서 책을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마지막 페이지를 넘겨 책장을 닫는 순간까지, 우리는 책이라는 이름이 주는 배음(背音)에 싸여 있다. 그 배음 안에서 우리는 책에 질문하고, 말하고, 책의 말을 듣는다. 그것을 엄선된 언어로 형언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뿐. 낭시의 사유의 거래에 대하여는 그 배음에 대한 짧은 기록이다. ‘책과 서점에 대한 단상이라는 부제가 붙었으나, ‘책과 서점에 대한 찬가라고 바꿔 불러도 무방하다. 낭시처럼 말라르메의 말을 빌리자면, 이 책은 낭시가 책이라는 순수하고 투명한 덩어리에 대해 말하기 위해 빚어낸 또 하나의 덩어리이다.


책은 단순히 소통의 수단도, 소통을 표현하는 매체도 아니다. 절대 그렇지 않다. 책은 중간매체가 아니다. 그 자체로 즉각적으로 그리고 우선적으로 자기 자신과의 소통이자 거래[교제]commerce이다. 실제로 책을 읽는 사람은 거래 속으로 들어갈 뿐, 다른 어떤 일도 하지 않는다. 바로 이런 점에서 책은 메시지 전달을 목적으로 하는 풍자문이나 논문과 확연히 구분된다. 감히 말하자면 책은 스스로 직접 나서서 자신과의 소통에 가담하기 때문이다. (24-25, 강조는 원문, []는 옮긴이)


낭시가 책을 말하면서 먼저 꺼내는 이야기는 플라톤의 이데아다. 그는 책의 이데아를 이데아의 전달로 정의하고, 플라톤의 책들이 그러했듯이 책은 대화의 특징을 이데아에다 부여한다(21)고 말한다. 그러나 책은 무엇에 대해말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라는 이름의 누구에게말을 건다. 이는 책이 수단을 설정하지 않고, 그렇기에 목표로 환원되지 않는 까닭이다. 그래서 활자caractére라는 흔적을 통한 말걸기야말로 책이 갖는 가장 강력한 특성caractére이다. 그리고 우리는 사유라는 약속을 지닌 재료의 단위(64)와 거래 또는 교제(commerce)한다. 다 카포Da capo.


책이 언제나 우리 앞에 열려 있는 것은 아니다. “열림과 닫힘 사이를 오가는 것이 책이고, “둘 사이의 긴장감 속에 놓여 있는 것(12)이 책이다. 조재룡 평론가의 말처럼 책이 단단하게 묶어둔 이 이데아가 독서를 통해 이 세계에 풀려나오(88)도록 하는 일은 어렵다. 낭시도 원칙적으로 책은 읽기 어렵다(39)고 말하지 않는가. 그것은 책읽기가 불가독성에서 출발하는 까닭이다. 하지만 그 열림의 시도들이 무한히 이어지고, 열림의 순간을 만날 때 우리는 수천 개의 방식으로 책을 다시 쓰(29)게 된다.


서적상의 독서는 모든 책의 모든 페이지를 오롯이 해독해내는 것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의 독서는 읽기lectio’이면서 동시에 선택하기electio’이다. 선택한다. 책에 나온 생각들을, 책이 본래 지니고 있는 이데아에 따라서, 책에 따라서, 독서에 따라서, 독자들에 따라서, 그리고 편집자들에 따라서 제안해야 할 생각들을 선별하거나 수집한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내가 상품에 대해 환기했던 것을 잊지 않는다면, 서적상은 단순히 책을 파는 상인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정당하다. 추호의 모호함도 없이 말해보자면, 서적상은 서적 전달자livreur des livres이다. 서적을 가져오고 전시하고, 서적이 주체적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적절한 상황을 만들어주는 사람이다. (50-51)


아무리 사회가 발전한다 해도 책의 배음을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공간은 서점일 것이다. 일차적으로 서점은 책을 읽을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는 공간이고(*), “서적이 주체적인 역할을 할 수 있도록해주는 공간이며, “은밀한 시선, 강렬한 조명, 탐문, 조사, 선별, 추출이나 발췌 등 모든 종류의 열림이 있는 보편적 장소(54)이다. 그리고 이 공간의 주인인 서적상은 인용문에 언급된 것처럼 읽는 자이자 선택하는 자이고, “서점의 천부적 영혼(51)이다. 더 나아가 나는 서점이 책읽기가 타자와 접촉하는 행위라는 걸 가장 두드러지게 보여주는 공간이라고 말하고 싶다. 독서를 통해 거래·교제되는 사유는 본질적으로 타자를 위해서만 셈을 하며, 타자를 위해서만, 타자에 의해서만 그리고 타자의 안에서만 계산이(42)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재룡 평론가가 글 말미에 독립서점을 언급한 것이 반가웠다. 독립서점이 추구하는 바가 무한한 열림과 닫힘 사이에서 수천 개의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고, 각각의 독립서점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사유의 거래에 들어서는 첫 걸음을 만들어내려 하는 까닭이다. 방식은 서로 다르지만, 말걸기의 방식도 원래 다 다른 것이 아니었던가. 접촉보다 접속이 앞서는 시대에 독립서점들이 타자와 접촉하고 말을 거는 공간으로 은은하게 빛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낭시는 글 말미에서 책의 이중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무거우면서도 가벼운 것, 불에 타기 쉽지만 소진되기 어려운 것, 대중적이면서 난해한 것. 이러한 이중성은 commerce라는 단어의 이중적 의미와도, 열림과 닫힘이라는 행위와도 잘 어울린다. 글은 이렇게 끝난다. 물질로 표현하자면 책은 우리의 사유이다. 진지하면서도 덧없는 사유, 손 닿는 곳에 있으면서도 비밀에 가린 사유, 우리가 끈질기게 공유하는 사유가 바로 거래 자체이자 약속이다.”(64-65) 책은 또 다른 책을 부른다고 흔히 말하지만, 사유의 교제가, 거래가 진정 이루어졌다면, 그리고 읽어내기 어려운 현실 세계와 몸을 비비며 접촉(57)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책의 이데아가 갖는 변형성, 유연성, 유동성(56)이 만들어내는 의미엔 종결점이 없다. 다만 나도 누군가에게 사유의 거래의 단위로, 한 권의 책이 되어 대화하고 접촉할 수 있었으면 싶다. 책이라는 이름의 타자가 되어 대화할 수 있었으면 싶다. 그리고 책이라는 이름의 타자와 끊임없이 사유를 교제했으면 싶다.



도서관(bibliothéque)과 서점(librairie)은 본래 서재를 의미하는 용어로 혼용되었다. 48쪽의 역주 참고.

결론적으로 말해 책의 이데아는 이미 최초로 그것이 만들어졌을 때부터 독서의 이데아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독서를 통해서 다른 어떤 책의 이데아는, 처음부터 연이어 나오는 다른 어떤 글쓰기의 이데아가 되었을 것이다. 꼭 다른 어떤 책의 기록이 아니라 적어도 사유의 또 다른 단면의 글쓰기, 표현의, 매개의, 모방과 창조의 다른 굽이, 다른 돌기 혹은 다른 굴곡의 기록이 되었을 것이다. 책의 이데아는 어떠한 종결점도 이데아 자체에는 존재하지 않는 그런 이데아이다. 이데아가 품고 있는 것이라고는 자기 자신을 증식하기, 번식하기, 분산하기뿐이다. 그리고 언제나, 어떤 순간에, 어떤 관점에서, 책이 건네는 묵언의 조언 혹은 달변의 조언은 책을 내던지게 혹은 그만 읽게 한다. 책읽기, 그것은 이어서 또 다른 책을 읽어야 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때로 우리가 행동이라고 부르는 것, 때로 경험이라고 부르는 것, 읽어내기 어려운 현실 세계와 몸을 비비며 접촉하는 것이다. (56-57쪽)

책은 무거우면서도 가볍다. 책은 엄숙한 분위기의 도서관 서가에 붙박이처럼 고정되어 있기도 하지만 서로의 뒤를 잇기도 하고 자리를 바꾸기도 한다. 책은 인쇄 1세대의 고서 초판본이기도 하지만 대중적인 책이기도 하며 또 난해한 것이기도 하다. 책은 불에 타기 쉽지만 동시에 소진되기 어렵다. 물질로 표현하자면 책은 우리의 사유이다. 진지하면서도 덧없는 사유, 손 닿는 곳에 있으면서도 비밀에 가린 사유, 우리가 끈질기게 공유하는 사유가 바로 거래 자체이자 약속이다. (64-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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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1-22 15: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도서관에 이 책과 <개소리에 대하여>를 같이 빌렸는데, 두 권의 분량이 책 한 권의 절반 분량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생각보다 분량이 얇아서 기분이 좋았습니다... 제 말이 무슨 의미인지 잘 아실 겁니다. ㅎㅎㅎ

아무 2017-01-22 15:28   좋아요 0 | URL
잘 알죠..ㅎㅎ.. 전 너무 얇아서 처음에 못 찾았었어요 제가 신청한 책인데도^^;; <나를 만지지 마라>도 같이 빌렸는데, 이 책도 <사유의 거래에 대하여>만큼 얇습니다. <사유의 거래에 대하여>는 얇은 만큼 만만한 책은 아니었는데, 이 책도 만만치는 않을 것 같네요..

AgalmA 2017-01-22 22: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얇아서 안 사고 도서관에 신청할까 싶었는데 읽고 싶은 책이 많으니 계속 밀려요ㅋ 장켈레비치 <죽음에 대하여>, 아감벤 <불과 글>도 얇아서 좋더라는ㅎ 그런데 아감벤 <불과 글> 생각할 게 많아 진도 잘 안나가서 오늘 500페이지짜리 <마담 보바리> 읽음ㅋㅋ! 앜, 이게 뭐야ㅋㅋ

아무 2017-01-22 23:17   좋아요 1 | URL
얇음이 얕음을 담보하는 건 아니니까요 ㅎㅎ 아 물론 <마담 보바리>가 얕다는 뜻은 아닙니다. 고등학교 때 읽다 포기했던 기억이 떠오르네요^^;; 조만간 꼭 다시 도전을!!ㅋㅋ
이 책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쓰게 된 기획을 보면 그냥 축사 같은 글이었을 텐데 이 사람은 이런 글도 허투루 쓰지 않는구나 하는.. 낭시의 글도 좋았고, 뒤에 붙은 조재룡 평론가의 글도 좋았습니다^^ 리뷰 다 쓰고 나서부터 <신 정의 사랑 아름다움>을 펼쳤는데, ‘이렇게 말해도 초등학생들이 알아 듣는단 말야?‘라는 생각을 했어요 ㅋㅋ
<불과 글>도 처음 나왔을 때부터 제가 노리고 있던 책인데요.. 저의 아감벤 읽기는 언제쯤..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