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복받은 집
줌파 라히리 지음, 서창렬 옮김 / 마음산책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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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받은 집에 수록된 대부분의 단편들은 미국으로 이주한 인도인들이 주인공이다. 그런 이유로 이민자 소설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던 것 같다. 작가 자신이 그 말은 타당하지 않다고 이야기했을 정도니까. 물론 그녀의 작품에서 인도계 미국인이라는 정체성을 떼어놓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이민이라는 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처하게 되는 보편적인 조건인지도 모른다. 다만 그것이 축복받은 집에서는 인도미국이라는 표피를 뒤집어썼을 뿐. 낯선 세계에 홀로 내던져진 상황에서 인간은 당연하게도 다른 사람과의 관계맺음을 추구하고 거기서 위안을 찾고자 하는 것이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축복받은 집은 내몰려 있는 사람들 사이 관계의 맺음과 얽힘, 어긋남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줌파 라히리의 작품을 처음 읽었는데, 읽으면서 첫 작품인데 이렇게까지 잘 쓸 수가 있나?’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부부 사이의 말 못할 관계와 상처를 풀어내는 방식(일시적인 문제, 질병 통역사, 축복받은 집), 미국이라는 공간(이 단편집에서 미국은 어떤 국가라기보다 각기 다른 이유로 모인 사람들이 고군분투하는 공간으로 기능한다)에서 겪게 되는 아픔을 어린 아이의 시선으로 포착하는 방식(피르자다 씨가 식사하러 왔을 때, 센 아주머니의 집) 등 다양한 관계에 내재된 상처를 풀어내는 문장의 힘이 차가우면서도 따뜻하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특히 차마 서로에게 말하지 못한 상처들을 밝음과 어둠의 아이러니로 풀어낸 일시적인 문제를 맨 처음 읽었을 때, 정말 훌륭하다는 감탄사를 뱉을 수밖에 없었다.

 

이 단편집에 등장하는 아이들의 모습은 굉장히 이중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아이 같으면서도 어른스러운 면모가 뒤섞여 있는 것 같다는 점에서 그렇다. 피르자다 씨가 식사하러 왔을 때도 그렇고, 섹시에 등장하는 로힌역시 이야기하는 방식이 아이 같으면서도 허를 찌르는 것 같아 성숙하다는 느낌을 강하게 준다.


결국 나는 보관함에서 하얗고 네모난 초콜릿을 하나 꺼내 포장지를 벗겼다. 그러고 나서 전에는 한 적이 없는 행동을 했다. 그 초콜릿을 입안에 넣고 다 녹았다고 생각되는 마지막 순간까지 기다렸다가 천천히 씹으면서 피르자다 씨의 가족이 안전하고 무사하기를 기도했다. 전에는 기도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었고 기도하라는 가르침을 받은 적도, 얘기를 들은 적도 없었지만 그 상황에서는 내가 해야 한다고 마음먹었다. 그날 밤에는 욕실에서 이를 닦는 시늉만 했다. 이를 닦아버리면 내 기도도 씻겨나갈 것만 같았다.

- 피르자다 씨가 식사하러 왔을 때(61-62)


그게 무슨 뜻이니?”

뭐가요?”

그 말 말이야. 섹시, 무슨 뜻이니?”

()

로힌이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보았다. 아이가 다시 매트리스를 차려고 애를 쓰자 미랜더가 아이를 꾹 눌렀다. 아이는 침대 위로 벌렁 넘어지더니 등을 반듯이 펴고 누웠다. 아이가 입가에 손나발을 만들더니 조그맣게 말했다. “그건 알지 못하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뜻이에요.”

- 섹시(172-173)


줌파 라히리의 단편들이 갖는 힘은 그녀의 섬세한 묘사에서 오기도 하지만, 작품에 내재된 꽉 짜여진 형식에서 오기도 한다. 이러한 형식미는 특히 결말 처리 방식에서 두드러지는데, 어느 부분에서 맺고 끊어야 하는지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준다. 누군가는 별다른 사건이 없는데 갑작스럽게 끝난다는 느낌을 준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이 단편들의 매력은 군더더기 없이 끝나는 결말을 다 읽은 뒤 잠시 책을 덮고 곰곰이 생각했을 때 물결처럼 다가오는 여운에 있다고 나는 말하고 싶다. 몇몇 단편을 읽으면서 레이먼드 카버를 떠올린 것은 아마 그것 때문이었으리라(특히 축복 받은 집의 결말은 굉장히 카버스럽다). 주소가 적힌 종잇조각이 바람에 날아가 버리는 것으로 끝나는 질병 통역사도 그렇고, ‘가 핼러윈 때 받은 사탕을 버리는 것으로 끝나는 피르자다 씨가 식사하러 왔을 때도 그렇지만, 특히 내가 감탄한 결말은 섹시. 마지막 부분을 읽으면서, 나는 현실에서의 관계란 이런 식으로 끝나는 것이 대부분이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실감했다. 대부분의 관계는 흔히 우리가 소설에서 보듯이 격정적인 사건이 있어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만남이 드물어지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잊게 되는 것이다.

 

책에 수록된 대부분의 단편들이 훌륭하지만, 나에게 정서적으로 큰 울림을 주었던 단편은 세 번째이자 마지막 대륙이다. 먹고살기 위해 영국으로 갔다가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이 (연애 없는) 결혼을 하고 미국으로 먼저 이주해 온 와 그가 세들어 사는 집의 노파 크로프트 부인 사이의 이야기.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이 단편은 크로프트 부인의 말을 빌려서 말하면 굉장한단편이다. 100년이 넘는 삶을 살아온 노파에게도, 지금까지 살아온 삶보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더 많은 에게도 6주라는 시간은 순간과도 같은 것이지만, ‘영원에 가까운 100년이라는 시간보다 6주라는 순간이 주는 울림이 더 크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 수록된 대부분의 단편들처럼 이 단편에도 스펙터클한 사건은 없지만, 영원과 순간의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주는 감동, 특히 마지막 대목이 주는 감동은 대단하다는 말만 하게 된다. 이 마지막 대목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사족(蛇足)이어서 군더더기 없는 완결성을 추구했던 이전 단편들과 비교되지만, 이 군더더기 때문에 이 단편이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형식적으로 가장 훌륭한 단편은 아니었지만, 누군가 나에게 어떤 단편이 제일 좋았냐고 물으면 망설임 없이 이 단편을 꼽을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다른 작품들, 특히 장편이 읽고 싶어졌다.


그 우주 비행사들은 영원한 영웅이기는 하지만, 달에 겨우 몇 시간 머물렀을 뿐이다. 나는 이 신세계에서 거의 삼십 년을 지내왔다. 내가 이룬 것이 무척이나 평범하다는 것을 안다. 성공과 출세를 위해 고향에서 멀리 떠난 사람이 나 혼자뿐인 것도 아니고 내가 최초인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내가 지나온 그 모든 행로와 내가 먹은 그 모든 음식과 내가 만난 그 모든 사람들과 내가 잠을 잔 그 모든 방들을 떠올리며 새삼 얼떨떨한 기분에 빠져들 때가 있다. 그 모든 게 평범해 보이긴 하지만, 나의 상상 이상의 것으로 여겨질 때가 있다.

- 세 번째이자 마지막 대륙(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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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고통 이후 오퍼스 10
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 이후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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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과잉의 시대, 이미지가 범람하는 시대라는 말처럼 오늘날 우리는 수많은 이미지들에 둘러싸여 살아간다. 그 중에서도 고통을 담은 이미지들, 특히 샤를리 에브도 사건 이후 유럽과 미국의 통제에서 벗어난 이미지들은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참상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런 고통의 이미지들을 너무 쉽게 관람할 수 있게 된 현실, 타인의 고통이 전시/상연되는 현실은 기술의 진보로 인해 우리가 윤리적 감수성의 한 부분을 상실하게 되었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사실 고통이 사진에 찍히기 시작한 순간부터, 즉 고통이 대상화되기 시작하면서부터 타인(우리와 타인을 가르는 것은 얼마나 난폭한 행위인가)의 고통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것은 필연적인 귀결이었는지도 모른다.


타인의 고통의 전반부에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사진이 얼마나 많이 조작되어 왔는지가 나온다. 흔히 사진에 대해 생각할 때 사람들이 주목하는 것은 진실성이지만, 하나의 프레임을 고정시켜 한 순간을 담는다는 행위(shot) 자체가 갖는 폭력성은 진실과 거리가 멀다. 구도를 잡는다는 것은 무언가를 배제한다는 것이며, 사진은 그 안에 담긴 피사체를 미학적으로 변형시킨다. 설령 그것이 전쟁을 담고 있다고 해도.


쉴 새 없이 밀려드는 (텔레비전, 스트리밍 비디오, 영화의) 이미지가 우리의 주변을 둘러싸고는 있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사진이 가장 자극적이다. 프레임에 고정된 기억, 그것의 기본적인 단위는 단 하나의 이미지이다. 정보 과잉의 이 시대에는 사진이야말로 뭔가를 신속하게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이자 그것을 간결하게 기억할 수 있는 형태이다. 사진은 인용문, 그도 아니면 격언이나 속담 같은 것이다. (44)


전쟁 사진이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하고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베트남 전쟁 때부터였다. 우리가 베트남 전쟁 하면 떠올리는 닉 우트(Nick Ut)의 네이팜탄 폭격 사진을 비롯한 많은 사진들은 반전 운동의 기폭제가 됐다. 여기까지만 보면 포토저널리즘의 발달이 세계에 기여한 바가 크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손택은 고통을 담은 사진들에 내재된 통제와 검열의 문제를 지적한다. “우리의 정신에 깊이 각인되지 못했거나, 남아 있는 이미지가 별로 없는 잔악 행위들은우리의 집단적 기억에서 잊혀지고, 널리 알려져 있는 사진들 역시 특정 사회가 한번쯤 생각해 보자고 선택해 놓은 것(130)이라는 이야기다. 공개된 사진에서도 희생자들은 배경인 장소가 이국적일수록 모습이 선명해지며, 사망한 미군 병사들이나 9.11 테러 직후 발견된 주검 사진들은 훌륭한 감식력에 따라 공개되지 않는다. “미국의 역사를 진보의 역사로 보려는 국가적 합의(134)가 작용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세바스티앙 살가도의 사진들처럼 피사체들이 겪고 있는 상이한 고난과 그 고난을 불러온 상이한 원인을 한데 뭉그러뜨려버리는 사진들도 있다. 이런 사진들은 특정 시기에 특정한 사람들이 겪고 있는 고통을 전 세계적인 것으로 과장하고, 우리는 사진에 담긴 고통의 규모에 위축되어 연민의 늪에 빠져 허우적댈 수밖에 없다.”(122) 어떤 식으로 개입을 해도 변할 수 없다고 느끼게 되는 것, 그래서 포기하도록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정부의 통제와 언론의 자기 검열을 통해 공개되는 이미지들은 전쟁이라는 비극이 이곳이 아닌 저곳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만들고, ‘나는 안전하다라는 인식이 사람들을 무관심해지게 만든다(손택은 이를 관음증적 향락이라고 부른다). 이와 관련해서 손택이 사라예보의 한 여인에게 들은 일화는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자신이 안전한 곳(91년 당시의 사라예보)에 있다고 느끼는 한, 인간은 타인의 고통(세르비아의 크로아티아 침략)에 무관심해지기 마련이라는 것. 하지만 손택은 여기서 다른 것을 본다. 타국에서 벌어지는 전쟁의 이미지를 보고 싶어하지 않은 이유는 무력감과 공포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폭력의 이미지들이 그들을 무감각하게 만들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것을 보고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에 폭력을 외면하기도 한다고 손택은 말한다. 이는 사진에 관하여(1977)에서 그녀가 폈던 주장(이미지로 뒤덮인 세계에서 사람들은 무감각해진다)에 대한 이의제기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오늘날 사진들은 지나치게 가까이 다가가 타인의 고통을 더욱 적나라하게 포착해 보여주고, 우리는 움찔움찔하면서도 그런 사진들을 보며 관음증 환자의 위치에 놓인다.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멀리 와버린 이미지들 사이에서, 우리는 그들에게 연민을 보내는 것으로 충분한 것일까. 손택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녀가 내놓은 대답은 우리의 특권과 그들의 고통 사이의 연결고리를 숙고해보는 것이다.


어떤 이미지들을 통해서 타인이 겪고 있는 고통에 상상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텔레비전 화면에서 클로즈업되어 보여지는 사람들)과 그 사람들을 볼 수 있다는 특권을 부당하게 향유하는 사람들 사이에 일련의 연결고리가 있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비록 우리가 권력과 맺고 있는 실제 관계를 또 한번 신비화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는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 주는 셈이다. 따라서 (우리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연민은 어느 정도 뻔뻔한 (그렇지 않다면 부적절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우리가 상상하고 싶어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휘저어 놓는 고통스러운 이미지들은 최초의 자극만을 제공할 뿐이니. (154, 강조는 인용자)


다소 길지만 이렇게 인용한 것은 이 부분이야말로 손택이 말하고 싶어하는 핵심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며, 지난 몇 년간 내가 취해왔던 태도를 반성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한동안 수많은 뉴스를 일일이 찾아보면서 환멸을 느끼고 무력감을 느꼈던 나에게, 손택은 도덕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아직 성숙하지 못한 인물이라고, 나에게는 세상만사를 망각할 만큼 순수하고 천박해질 수 있을 권리가 전혀 없다(167)고 말하는 것이다. 연민이나 환멸은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무력함의 표현일 뿐,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손택은 강한 어조로 말하고 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나는 작년에도 들었지만 여전히 무력해지고 있었다.


니체의 입장에 우리가 난감해하는 것은 그가 수치심에 대해 납득할 수 없는 주장을 펼쳐서가 아니라 고결한 자의 수치심과 선한 자의 연민을 대비시키며 후자를 집요하게 비난하기 때문이다. 고결한 자와 비교했을 때 연민의 정을 지닌 선한 자는 사실 자기 역량의 최소치만을 사용한다. 그들은 고통의 상황을 그대로 두고서 아주 소량의 도덕적 선행만을 반복한다. 니체는 이런 도덕주의자들을 마비되어 더 이상 힘을 쓸 수 없는 그런 무기력한 앞발을 갖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자신이 선하다고 믿는 그런 겁쟁이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앞발을 들어 약자를 해치지 않았다는 사실에 만족하느라 분주한 통에 수치심을 느낄 겨를이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역량, 즉 진정으로 행하고 함께 나눌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되는지를 알지 못한다.

고통받는 이들을 불쌍하게 여기는 대신 그 고통 앞에서 수치심을 느껴라. 연민이란 참으로 게으르고 뻔뻔한 감정이다.’

- 진은영, 우리의 연민은 정오의 그림자처럼 짧고, 우리의 수치심은 자정의 그림자처럼 길다(눈먼 자들의 국가, 72-73, 강조는 인용자)


작년 봄에 읽으면서 접어두기까지 했건만, 나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달라지지 않은 것은 어떻게든 고통과 마주하기를 피하려는 몸부림 때문이기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염세적 세계관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숙고하지 않으면,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행동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사진 너머에 존재하는 통제와 검열의 논리를 바라보기 위해 노력하고, 타인의 고통에 수치심을 느끼고, 나와 그들 사이의 연결고리가 무엇인지 숙고하고, 어떻게든 변화할 수 있도록 행동하는 것. 그것이 내게 주어진 과제일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명심해야 할 것은, 타인의 고통을 사진만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손택이 마지막 장에서 제시하는 사진은 제프 월(Jeff Wall)<죽은 군대는 말한다>(1992)이다. 1986년 아프가니스탄 모코르 지역의 소련 정찰군을 담은 이 사진은 사실 작가가 공개적으로 작업장에 만들어 놓고 연출한 것이다. 사진 속 피사체들 중 아무도 살아 있는 자(우리)를 쳐다보지 않는다. 그들은 우리에게 무관심하다. 무언가를 고발하는 듯한 사진 속에서 설령 그들이 우리에게 말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사진은 우리가 그 고통을 이해하고 어느 정도였을지 상상할 수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다. 타인의 고통을 관람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자의 입장에서 유념해 두어야 할 것은 두 가지다. 첫째, 이미지의 홍수 속에서 현실 감각을 잃지 말 것. 둘째, 사진만으로 그들의 고통을 전부 이해할 수 있을 거라 착각하지 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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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9-07 1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NS에 공개되는 사진은 늘 좋은 것만 보여줍니다. 그 사진을 보고 사람들은 ‘저 사람은 참 행복하고 잘 사는구나’라고 착각하죠. 그래서 저는 SNS 사진을 좋아하지 않아요.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주는 일이 과연 좋은 건지 모르겠어요.

아무 2016-09-08 00:10   좋아요 0 | URL
자기 과시의 심리죠 사실. 그런 행태의 가장 극단에 있는 것이 인스타그램일 겁니다. 다소 강박적이기까지 한 sns 사진에는 자기 과시의 욕구도 있겠지만 자신의 선택을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망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요새 합니다. 선택의 폭이 지나치게 넓어진 사회에서 내 선택이 맞다고 해줄 사람들이 필요한 거죠...
 

(* 영화 <사울의 아들>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 <사울의 아들>(2015)은 아우슈비츠에서 '화장터의 까마귀'라고 불렸던 존더코만도의 이야기를 다룬다. 죽음이 일상화된 공간에서, 사울은 자신의 아들(이라고 고안되어진)에게 적합한 장례를 치러주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다른 동료를 이용하기도 하고, 거짓말을 하기도 하고, 봉기하려는 존더코만도들의 계획을 (결과적으로) 방해하면서까지 그가 추구하는 것은 랍비를 구해 아들의 장례를 치르겠다는 것, 그것뿐이다. 이 부분 때문에 영화를 보면서 왜 저렇게까지 하나..라고 생각하기도 했는데(심지어 그의 무모한 행동 때문에 사람이 죽는다), 다 보고 나서 생각해보니 그럴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오로지 형식만으로 승부를 거는, 그래서 나에겐 독특한 경험이었던 영화다.



영화는 시작 부분부터 특이한 방식을 취하는데, 화면의 초점이 나간 상태에서 화면 앞으로 다가오는 사울의 실루엣이 점차 선명해지며 시작된다. 이후에도 사울만 선명하게 보이거나 종종 다른 인물 한두명이 보일 뿐, 대부분 초점이 나간 상태이기 때문에 가스실로 들어가는 사람들의 얼굴이나 시신들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다. 게다가 평소보다 작은 화면(4:3)에 사울의 뒷모습이 항상 걸려있어 볼 수 있는 화면도 제한적이다. 이것은 '사울이 보고 있다'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시키기 위한 영화의 형식이자, 홀로코스트를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에 대한 감독의 윤리적인 답변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이렇게 제한된 시각으로 인해 소리에 주목할 수밖에 없게 되고, 실제로 소리의 묘사가 굉장히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오히려 이것 때문에 '청각적인 포르노'라며 비판한 사람도 있었다고 하는데, 나는 홀로코스트라는 사건을 상기시키기 위해 관객의 "감정을 건드리"는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이전까지 만연했던 고통이나 잔혹함을 재현하는 방식을 거부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그것을 전달하기 위한 감독의 고민이라고 보는 것이다.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의 『어둠에서 벗어나기』는 <사울의 아들>의 감독 라슬로 네메시에게 보내는 서한의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는 이 책을 내기 전에 이미 '쇼아는 (이미지로) 상상 가능하다'는 주장을 담은 글을 발표해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고 하는데, 역주를 빼면 100쪽이 채 안 되는 이 책은 영화비평서라기보다 영화를 통해 작가의 철학을 드러내는 철학서에 가깝다. 그가 주로 이야기하는 이미지의 '잔존'은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영화에 대한 좀더 깊은 정보를 얻을 수 있어서 좋았다. 이를테면 이 영화가 1944년 존더코만도의 봉기와 그들이 찍은 사진 네 장을 바탕으로 했다는 점, 유대인들은 신에게 바치는 제물이나 희생이라는 의미를 품고 있는 '홀로코스트'라는 단어보다 '쇼아'(Shoah, 재앙 또는 파국)라는 단어를 선호한다는 점, 사울의 이야기가 오르페우스 신화와 닮아있다는 점 등등. 특히 이 책에서 내가 주목했던 것은 미래지향적 저항(봉기)과 과거지향적 저항(장례)의 개념이다.


사울은 미래를 향한 전투-저항résistance-combat(봉기 및 소각장 폭파 계획)을 과거로 향하는 존중-저항résistance-respect(아이의 시신을 전통에 따라 장례하는 일)으로 치환합니다. 그는 현재와 미래의 산 자vivants들의 사회société보다 현재와 과거의 망자morts들의 계보학généalogie을 선호합니다. 그는 힘의 관계(모든 이들이 "조난당한 자"인 공동체임에도 존재하는 승자와 패자, 권력과 전략의 게임)보다 의례의 권위(랍비와 유대 기도문, 규칙을 준수하는 장례)를 선호합니다. (63쪽) (강조는 저자)


영화를 보면서 우리는 봉기를 꾸미는 전투-저항을 지지하고 계획에 수시로 훼방을 놓는 사울을 걸림돌처럼 여기게 되는데, 사실 영화에서 더욱 근본적인 저항을 하는 사람은 사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우리는 이미 죽어 있어."라는 사울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이미 그들은 존재 자체가 부정된 망자이며, 그 안에서 또다른 망자(아들)에 대한 경건한 매장에의 요구는 "망자의 비-존재함"에 저항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장례를 치러줌으로써 망자가 존재를 인정받게 되는 것이며, 이를 통해 쇼아라는 어둠에서 벗어나는 이미지가 솟아오르는 것이다.


망자의 존재를 증거/증언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가? 위베르만이 인용하는 벤야민의 말에 따르면, "죽어 가는 자의 권위"가 이야기의 기원이기 때문에 그렇다. 여기에서 이야기라고 함은, 사울이 장례라는 "고독하고 절망적인 계보학적 탐색을 수단 삼아" 전달하려는 하나의 경험이라는 것이다. 죽음은 흔적을 남기게 되고, 그 흔적(잔존하는 이미지)을 전달하는 것이 바로 죽어가는 자의 권위라고 위베르만은 말한다.
















마치 삶이 다하면 인간의 내면에서 일련의 이미지(이때 이 이미지 속에는 평소에는 스스로 의식하지 못한 채 마주쳤던 자신의 생각이 펼쳐진다)가 활발히 움직이는 것처럼, 임종의 순간에는 갑자기 그의 표정과 시선에 잊혀질 수 없는 일들이 떠오르고 또 이 잊을 수 없는 일은 그와 관계했던 모든 사람에게 권위를 부여한다.

- 「얘기꾼과 소설가」 (178쪽)






영화로 돌아와서, 사울은 전투 중에 아들의 시체를 메고 랍비와 도망쳐 장례를 치르려 하지만, 랍비는 기도문도 외울 줄 모르는 가짜였다. 결국 그는 강을 건너다가 아들의 시체를 놓치고, 다른 동료들의 손에 붙들려 강 건너 오두막으로 피신한다. 이때 그는 문틈으로 자신을 발견한 폴란드 소년(영화에는 폴란드 소년이라고 나오지 않는데, 위베르만은 폴란드 소년이라고 썼다. 서양인은 얼굴만 보고 국적을 구별할 수 있는 걸까?)을 보고 처음으로 미소를 짓는다. 그는 왜 미소를 지은 것일까? 추측이지만, 이미 죽어 있는 망자로서의 자신의 흔적, 즉 잔존하는 이미지를 전달할 수 있는 존재로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죽은 아들의 비-존재에 저항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자신의 비-존재에 저항할 수 있는 다른 '아들'이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엔딩 크레딧에서 사울의 아들(Saul Fia)은 두 명이다). 영화는 의도치 않게 나치를 사울과 그 일행의 피난처로 인도하게 된 아이가 도망가는 모습으로 끝을 맺는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를 읽어야 될 때구나..'였다. 『이것이 인간인가』를 작년에 읽고, 올해 『주기율표』를 읽다가 잠시 접어둔 상태라 구입을 미루고 있었는데, 영화를 보고 나니 더이상 미룰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존더코만도나 카포에 대한 이야기는 2장 '회색지대'에 나오는데, 여기에 등장하는 나치 친위대와 존더코만도 사이의 축구 이야기는 섬뜩하다.


그런데 특수부대의 베테랑들을 대하는 SS의 태도는 달랐다. 그들은 이 베테랑들을 확장된 동료로 인식했다. 곧, 이제는 자신들만큼이나 비인간적인 존재, 어쩔 수 없이 부과된 공범성이라는 추악한 굴레에 묶인 한 배에 탄 동료로서 말이다. 니즐리는 '작업' 중 휴식 시간 동안에 SS 대 SK(존더코만도)의 축구 시합에 참관한 이야기를 한다. (...) 이러한 휴전의 이면에 있는 악마적인 웃음을 읽을 수 있다. 그것은 이런 의미이다. '일은 완료되었다. 우리는 해냈다. 너희는 더 이상 다른 인종도 아니고, 반(反)인종도 아니고 라이히 천년왕국의 주된 적도 아니다. 너희들은 더 이상 우상을 거부하는 민족도 아니다. 우리는 너희를 끌어안았고 타락시켰으며 우리와 함께 바닥으로 끌고 내려갔다. 자부심 가득한 너희들은 이제 우리와 같다. 우리처럼 너희는 너희 자신의 피로 물들었다. 너희도 우리와 같이, 카인과 같이 형제를 죽였다. 어서와, 우린 함께 경기할 수 있어.' (62-63쪽)


물론 레비는 수용소에서 특수계층이었던 카포나 존더코만도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비판하지 않는다. 그것이 개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라거라는 시스템의 문제까지 성찰해야 하는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체험자로서, 가라앉지 않고 구조된 자로서, 증언자로서의 의무를 가지고 레비는 라거라는 20세기 가장 잔혹한 시스템을 해부하고자 노력한다. 이 책에 『이것이 인간인가』에서 언뜻 나타나던 인간성에 대한 신뢰나 따뜻함은 없다. '홀로코스트는 다시 실현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레비는 '그럴 수 있다.'고 답하는 것이다. 여전히 현실에는 『나의 투쟁』에서 이름만 조금 바꾸어 교본으로 삼으려는 세력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영화와 관련해서 주목할 만한 이야기가 7장 '고정관념들'에 나오는데, 레비가 초등학교 5학년들에게 자신의 경험을 해주러 갔던 이야기다. 한 학생이 왜 도망치지 않았느냐고 묻고, 레비가 이유를 설명하자 그 학생은 수용소의 약도를 칠판에 그려달라고 하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밤중에 보초의 목을 친 다음, 그의 옷을 입고, 곧바로 발전소로 달려가서 전기를 차단"하면 된다고. 그리고 덧붙인다.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기면 제가 말씀드린 대로 하세요. 꼭 성공하실 거예요."


한계는 있지만 이 일화는 내가 보기에, 분명히 존재하며 해가 갈수록 점점 더 벌어지고 있는 간극을, 그러니까 '그곳'에서의 실제 상황과 개략적으로 책이나 영화, 신화들이 키워낸 현재의 상상력에 의해 표현되는 상황 사이의 간극을 잘 보여주는 것 같다. 이러한 상상력은 치명적인 단순화와 고정관념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 이는 훨씬 더 일반적이고, 타인의 경험을 인지하는 데 있어 우리가 가진 어려움이나 무능력의 일부를 보여준다. 타인의 경험이 시간적·공간적으로, 또 질적으로 우리의 경험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이러한 어려움이나 무능력은 더 심해진다. 우리는 타인의 경험을 '주변'의 경험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192쪽)


이것은 어쩌면 영화라는 매체가 갖는 한계일지도 모르겠다. 점점 타인의 고통을 일종의 스펙터클로 소비하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 재현이라는 이름으로 전달되는 관음증적 쾌감을 문제삼지 않을 수 있을까. 그렇기 때문에 쇼아를 "사유 가능성 바깥에 존재하는 사건, 이미지로 드러낼 수 없는 상상 불가능한 사건"이자 "절대적이고 숭고한 부정성으로만 접근할 수 있는 무엇"으로 규정했던 지식인들의 태도 역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고통의 이미지를 떠올리니 수전 손택의 『타인의 고통』이 생각나지만, 아직 읽고 있는 중이라 여기서 쓰기는 어려울 듯하다) 하지만 들여다보기에 너무 끔찍한 지옥이라는 이유로 어둠을 있는 그대로 두는 것보다는, 반딧불처럼 미미하더라도 그 어둠을 밝히기 위한 증언들이 끊임없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더욱이 8장 '독일인들의 편지'를 보면 여전히 증언의 반딧불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굳어진다. 증언/재현의 방식을 고민해야지, 아예 증언/재현하지 않는 것은 어둠을 어둠으로 두겠다는 선택을 넘어 더 이상 기억하고 싶지 않다는 의지의 발현이다. 그 일이 있은 지 70년이 지난 지금도 레비의 책들이 끊임없이 소환되고 읽혀져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 마지막 문단의 '반딧불'의 비유는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의 『반딧불의 잔존』이라는 책 제목에서 가져왔다. 『어둠에서 벗어나기』를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해서 내가 어느 정도 이해한 부분만 적었는데, 이미지-몽타주의 개념이나 잔존의 의미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반딧불의 잔존』을 읽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책에 보면 위베르만은 이미 서른 권이 넘는 저서를 냈다고 하는데, 국내에 나와있는 책은 이 두 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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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래하는 페미니즘 - 여자의 삶 속에서 다시 만난 페미니즘 고전
스테퍼니 스탈 지음, 고빛샘 옮김, 정희진 서문 / 민음사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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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애 첫 번째 페미니즘"이라는 제목은 정희진의 추천사에서 가져온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 책이 첫 번째 페미니즘 도서는 아니었지만, 이 책을 첫 번째로 읽었어도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400쪽이 조금 넘는 분량이라 얇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분량이 무색하게 술술 읽히는 문체와 사실적인 경험이 주는 흡입력이 이 책을 읽는 원동력이 된다. 정리하자면 이 책은 저자의 경험이 잘 녹아 있는 에세이이자, 페미니즘 고전에 대한 한 권의 서평집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저자는 한때 자유로운 대학 생활을 누리던 여성이었으나, 결혼과 육아를 겪으면서 아내와 엄마의 역할 사이에서 고뇌하며 힘겨운 나날을 보낸다. 그러던 중 그녀는 자신의 삶에 대해 자문하게 되고, 그 답을 찾기 위해 모교로 돌아가 페미니즘 고전 강의를 듣기로 결심한다. 이후 대학 강의에서 페미니즘 고전을 읽으며 토론 수업에 참여하는 과정이 그려지는데, 고전의 내용과 자신의 삶을 결부시키며 서술하는 능력이 탁월해서 저자의 삶에 몰입하게 된다. 그리고 토론 수업이라는 형식이 한 권의 고전에 대한 다양한 시각 차이를 드러내준다는 점에서 적절한 형식을 취했다는 생각도 든다.


저자가 다루고 있는 페미니즘 고전은 워낙 다양해서 이를 일일이 거론하면 어마어마한 분량이 될 듯하다. 그녀가 다루고 있는 책은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여성의 권리 옹호』부터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까지 매우 다양하며, 1세대 페미니즘부터 포스트모던 페미니즘까지 고루 분배되어 있다(원래 네 번이었던 강의를 세 번으로 나눈 것도 페미니즘의 시기 구분 때문이었을까?). 페미니즘의 역사가 궁금한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으면서 개관을 조망해볼 수도 있겠다. 이 책이 훌륭한 서평집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다양한 고전을 쉽게 정리해주는 선에서 그치지 않고, 토론의 방식으로 고전의 한계를 지적함과 동시에 저자의 적극적인 해석이 가미되기 때문이다. 저자는 강의를 들으면서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작품에 담긴 행간의 의미를 추적하기도 하고, 젊은 시절의 우상이었던 보부아르에 대해 비판적인 시선을 보내기도 한다. 이러한 성장 과정이 페미니즘 고전 읽기와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저자가 읽는 다양한 페미니즘 고전을 함께 읽는 기분으로 이 책을 만날 수 있다. 물론 그 밑바탕에는 저자의 훌륭한 정리가 있었겠지만.


그럼에도 이 책에 보이는 몇 가지 한계점들이 있는데, 하나는 정희진이 해제에서 지적한 '백인 중산층 여성'이라는 저자의 위치다. 처음에 정희진의 해제를 읽을 때는 이런 한계가 그렇게 크게 드러날까.. 하고 반신반의했었는데, 읽다보니 정희진의 지적이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부분이 있었다. 바로 가사 노동자의 등장.


경제적 능력이 있고 그럴 의향이 있는 사람들은 프리단의 조언에 따라 전통적으로 여자들에게 떠넘겨졌던 가사와 육아를 수행할 다른 여성들을 고용한다. 하지만 그런 방식은 불운한 계층의 여자들에게 의존해야만 한다는 점에서 소수만을 위한 페미니즘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지난 20년 동안 가사 노동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면서 제3세계 여성들의 유입도 점진적으로 증가해 왔으며 이는 세계화 추세와도 꼭 들어맞았다. (...) 「메리 포핀스」(1964)나 「내니 다이어리」(2007) 같은 인기 영화들은 유모 산업에 얽혀 있는 인종과 계급 문제를 전혀 다루지 않는다. 이 관계에 내재된 권력 구조는 미국에 온 많은 여성을 열악하거나 심지어 폭력적인 환경에 밀어 넣는다. 그들은 법적인 배우자의 권리를 부여받지 못하며 많은 경우 정당한 피고용자의 혜택도 받지 못한 채 고용주의 사적인 생활에 상당 부분 관여하는 일을 한다. (298-299쪽)


이후 책에서는 바버라 에런라이크와 앨리 혹실드의 『글로벌 우먼』에 대한 논의로 이어지지만 "L교수는 토론 주제를 국소적인 방향으로 유도"한다. 이 토론에서 나오는 학생들의 발언 역시 국소적인 차원에 머문다(L교수가 스웨덴의 예를 들자 어떤 학생은 "스웨덴과 비교하다니 말도 안 돼!"라고 말했다). 게다가 저자는 이례적으로 토론 장면만 제시할 뿐 자신의 생각을 적지 않았다. 「3기니」에서 '교육받은 남성의 딸'이라는 계층이었기에 노동 계급에 속하는 체하는 것을 경계했던 버지니아 울프의 입장과 비슷한 것일까? 육아와 가사 노동의 전가에 대한 문제는 이후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어쩌면 저자는 자신이 속한 계층이 한계라는 것을 인식하고 깊은 접근을 생략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수강생의 대부분이 백인 중산층이어서 그랬는지도.


그리고 후반부로 갈수록 글이 품고 있던 저자의 열정이 점점 힘을 잃는데, 이는 3세대 페미니즘에 대한 저자의 관점과 부합하는 것처럼 보인다. 포스트모던 페미니즘을 의심스럽게 바라보는 저자의 관점이 문장에도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성 역할, 또는 남성/여성의 이분법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주장이 이해되지 않았던 것은 아니나, 그런 주장이 현실성이 없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아마 저자의 눈으로 그들을 읽었기 때문이겠지만. 저자-나의 이런 생각을 구체화시키는 부분은 서아프리카 유학생인 프리실라의 발언이다.


학기가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면서 수업에서 페미니스트들의 심리 분석이나 급진적 여성 동성애 등을 다루기 시작했다. 프리실라에게는 곤혹스러운 주제였을 것이다. 프리실라와 대화를 나누며 서양의 페미니즘을 사치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는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제게는 이 이론이 낯설게 느껴져요." '여성성의 신화'에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모든 여자가 '이진법'에서 탈출해 성적인 면에서뿐만 아니라 모든 면에서 레즈비언이 되는 것이라는 프랑스 페미니스트 모니크 위티그(Mnique Wittig)의 주장에 대한 프리실라의 의견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주제에 대해 논의할 일이 없을 거예요." (392쪽)


현실은 여전히 "어머니 세대가 해결하려 했던 것과 똑같은 문제"가 남아있는데, 이론만 홀로 나아가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성도 성별도 없으며 정체성의 허구만 존재한다는 주장에는 '나는 여성이기 전에 나 자신이다'라는 말이 담겨있는 것이다. 주디스 버틀러나 식수와 같은 페미니스트들의 이론들은 단순하면서도 근본적인 이야기를 하기 위해 저 멀리까지 간 것이 아닐까. 저자도 그런 식으로 글을 마무리하긴 하지만 포스트모던 페미니즘이 이론만 제시할 뿐이라는 관점을 바꾼 것 같지는 않다.


그 외에도 한계는 아니지만, 종종 저자가 학생들과 세대 차이를 느끼는 부분이 등장한다. 특히 내가 주목한 부분은 포르노에 관한 내용이었는데, 미국이라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강의를 듣는 학생들은 포르노의 긍정적 측면에 지나치게 주목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기야 스스로를 대상화하고 공개하는 시대, 아무런 체에도 걸러지지 않는 발언들이 넘치는 시대에 무엇을 바라겠냐마는, 포르노그래피가 아무리 좋아진들, 심지어 페미니즘 포르노가 만들어진들, '창녀에 대해 쓴 글'이라는 포르노그라피의 어원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식의 성 해방, 또는 욕망의 해방은 전혀 쿨하지도 힙하지도 않다. 로빈 모건을 인용하자면, "포르노물이 이론이라면 강간은 실제다." 저자는 캐서린 매키넌을 인용한다.


매키넌은 포르노그래피에 나오는 행위가 여자를 신체로부터 소외시킨다고 맹렬히 비난했다. 포르노그래피가 자신의 행위를 텔레비전에 나오는 장면처럼 멀찍이 떨어져 경험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 방정식이 뒤집혀 사람들은 자신의 섹스가 텔레비전에 나오는 장면과 비슷하게 보이지 않으면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330쪽)


이런저런 한계점이 있지만, 그럼에도 이 책이 '첫 번째 페미니즘' 책이 될 자격이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책을 읽으면서 한 여성으로 살아가는 그녀의 삶에 공감하기도 하고, 언제나 알고 싶었지만 아무도 풀어서 이야기해주지 않았던 페미니즘 이야기를 접하게 될 것이다. 또는 페미니즘을 알기 위해 어떤 책을 찾아보아야 할지 고민하는 이에게 길잡이가 될 것이다. 읽으면서 정말 많은 부분에 밑줄을 쳤기 때문에 어느 한 부분을 콕 집어서 인상깊었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누군가 내게 책장을 다 접을 거면 왜 접냐...고 물었다), 특히 급진적 페미니즘에 대한 이야기들이 인상적이어서 이 부분을 인용하며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오늘날의 한국 사회의 모습과 닮아있다고 생각해서이기도 하고, 70년대와 90년대 미국에서 벌어진 일이 한국에서 재현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씁쓸함의 표현이기도 하다... 미국도 마찬가지인지는 모르겠지만.

좌파에 속하던 메릴린 살즈먼 웹은 다음 선언으로 연설을 시작했다. "우리 여자들은 억압받고 있습니다. 이 사회에서 가장 대우받아야 마땅한 우리 여자들은 팔과 다리가 잘린 채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한 인간으로서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갑자기 단상 아래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하지만 웹은 소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자들을 물건 취급하는 체제를 맹렬히 비난했다. 남자들은 주먹으로 위협하는 동작을 하며 오싹한 말들을 내뱉었다. "미친년!", "저년 끌어내!", "뒷골목으로 끌려가 강간당하고 싶냐!", "벗겨 버려!" 이미 좌파 운동가들에게 정나미가 떨어진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은 자본주의와 더불어 남자들을 규탄하기 위해 단상 위로 성큼성큼 걸어 올라가 소리쳤다. "여러분,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 이야기해 봅시다. 우리 여자들은 여러분들이 무슨 뜻으로 혁명을 외치는지, 그저 권력을 더 얻으려는 목적으로 그러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게 됩니다." 남자가 대부분이었던 청중은 욕설과 야유를 퍼부었다. (269-270쪽)

후일담에 따르면 1970년대의 급진적인 페미니즘을 주도했던 행동가들은 대부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거나 미쳐 버린다. (...) 몇몇 페미니스트는 영혼과 정치를 맞바꾸어 남성에 대한 여성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문화적 페미니즘으로 전향한다. 작가이자 행동가였던 글로리아 스타이넘과 《미즈(MS.)》의 전 수석 편집자였던 로빈 모건 같은 사람들은 끝까지 남아 잘 싸웠다. 그들을 제외한 많은 사람은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 부르기를 포기했다. 저널리스트 수전 팔루디가 『역풍(Backlash)』이라는 제목의 책에 기록했듯, 1980년대에 불어닥친 역풍은 가공할 수준이었으며(여자들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정의할 수 있어야 한다는 관념을 기본으로 하는) 페미니즘은 다시 한 번 욕설 비슷한 단어가 되었다. (271-272쪽)

하지만 새로운 시대는 낯설었다. 분노에 차서 클래런스 토머스의 인준 청문회를 지켜보던 내가 어느새 모순으로 가득한 「앨리 맥빌」을 시청하고 있는 짝이었다. 대학 졸업 무렵 페미니즘은 힘을 잃어 가고 있었다. 권위자들은 종말을 알리는 종소리를 울리며 우리가 이제 후기 페미니즘(혹은 후후기 페미니즘)에 해당하는 립스틱 페미니즘 시대에 접어들었다고 말했다. "저는 페미니스트는 아닙니다만......"으로 시작하는 학생들의 발언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나는 다른 곳에 신경 쓰느라 이런 변화를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일하고, 데이트하고, 결혼을 준비하느라 정신없었다. 어깨 위에 책임이 하나둘 쌓여 가면서 페미니즘은 나보다 어린 여자들, 《비치 오어 컨트(Bitch of Cunt)》 같은 파격적인 잡지를 구독하며 몸 여기저기에 문신을 한 젊은 여자들에게나 어울리는 것이라 여기기 시작했다. 나 자신을 여전히 페미니스트라 부르기는 했지만 그 의미에 대해서는 더 이상 확신하지 못했다. (2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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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6-08-18 01: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스켑틱 4호 커버 스토리에서도 남녀에 대한 진화심리학 내용이 많은데, 리뷰를 정리하자니 머리가 아프더군요. 남녀를 가르며 결정짓는 잣대와 구분들이 너무도 넘쳐나서.
분명한 건 성sex자체의 다름이 문제가 되는 게 아니라 각자가 젠더gender(사회적, 문화적, 심리적 요인에 의해 결정되는 성)로서 상대를 구분짓는 게 문제인 거죠. 저도 리뷰 마저 정리하게 되면 이 문제에 대해 더 자세히 얘기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아무 2016-08-18 00:50   좋아요 2 | URL
스켑틱에서 진화심리학을 다뤘다는 얘기는 들었었는데, 어떻게 정리하실지 궁금하네요^^ 듣기로는 진화심리학을 둘러싼 논쟁들(과학이다 원형과학이다 등등)에 대해서도 다뤘다는데.. 개인적으로는 자연주의적 오류에 가장 빠지기 쉬운 학문 중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디까지가 인간의 생물학적 특성이냐에 대한 문제도 얽혀있으니... 사실 그래서 진화심리학이 미덥게 보이진 않아요..
아 그러고 보니 이 책에서 젠더(gender)를 `성별`이라고 번역해서 초반에 좀 많이 헷갈렸습니다. 영어 병기라도 해주지.. 개인적으로는 이런 책이 필요했거든요. 일종의 개론서 같은 책... 아마 제가 나중에 더 찾아볼 저자는 주디스 버틀러 정도가 아닐까 싶네요ㅎㅎ

AgalmA 2016-08-18 02:07   좋아요 2 | URL
차이에 집중하는 진화생물학은 진화심리학에 비해 결과 도출이 쉬운 건지도 모릅니다. 모호한 본성의 보편성을 좇는 진화심리학은 잘못하면 코에 붙이면 코걸이 귀에 붙이면 귀걸이가 되기 쉬우니 신빙성을 얻기가 참 힘들죠. 최근엔 데이타가 많아지고 뇌과학 등 연구방법들도 늘면서 인간의 심리 네트웍을 들여다보기 쉬워진 데다 스티븐 핑거 같은 거물이 진화심리학에 힘을 실으니 세력이 커졌죠. 두 학계 간의 문제 역시 ˝패러다임˝ 싸움. 사람 사는 데가 어디든 그렇죠;
암튼 그런 논쟁들을 정리하자니 한숨이;
주디 버틀러, 저도 주시하고 있던 저자입니다. 예전 책은 번역 문제가 많다 들어서 주저주저 하고 있었는데, 최근 주디스 버틀러 책이 속속 나오고 있어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yamoo 2016-08-27 2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페미니즘 책은 기피도서인데, 리뷰를 보니 이거 한번 책장을 넘겨보고는 싶네요~
잘 읽었어요!^^

2018-07-01 21: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행운
김애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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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아비』를 읽은 게 벌써 6년 전이다. 내용은 거의 다 잊어버렸지만 그때도 단편집을 읽으며 느꼈던 건 이야기가 아프면서 명랑하다는 것이었다. 웃프다고 해야할까. 그리고 6년 만에 다시 단행본으로 『비행운』을 읽으며 난 생각했다. '아, 김애란이 돌아왔다.' 『달려라 아비』에서 느꼈던 김애란 소설의 특징들─뒤집기, 결말 처리 방식, 명랑한 슬픔 등등─은 더욱 강해졌고, 길이는 더 길어졌고, 내용은 더 깊어졌다. 그리고 그녀는 이제 '웃픈 이야기'에서 '웃'보다 '픈'에 비중을 두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는 분노가 아닌 체념과 견딤의 모습으로 현실을 보여준다. 그런 장면들을 읽다보면 어느새 마음은 처연해진다.


여전히 그녀의 소설 속 인물들은 혼자다. 생존하기도 힘든 세상에서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발버둥치는, 하지만 그 노력을 격렬한 감정으로 표출하지 않는 도도한 인물들. 하지만 이전 작품집보다 삶의 모습은 더 독하다. 그만큼 세상은 더 잔인해지고 냉혹해졌기 때문에, "어떤 책임도 물을 수 없는 거대한 금치산자"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한쪽 편만 드는 십자가" 같은 세상에서 그들은 그들 나름의 비행(飛行)을 꿈꾸지만, 세상은 그들에게 비행을 허락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는 그들의 추락을 마냥 슬프게만 다루지 않는다. 인물들은 김애란 특유의 뒤집기 방식을 통해 추락한다. 교도소에 있는 아들이 처음 보낸 편지에 '엄마, 사식 좀.'이라는 다섯 글자만 담겨 있을 때(「하루의 축」), 그들의 소비를 따라잡고자 손톱케어를 받았지만 정작 사람들은 그녀의 축축한 겨드랑이만을 기억할 때(「큐티클」) 등등. 이런 방식이 웃음을 안겨주기도 하지만, 그 웃음이 씁쓸한 웃음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안타까움, 분노 같은 것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고개 좀 들고 다녀라, 이 녀석아.'

이 녀석아, 이 녀석아...... 친근한 표현인지, 애써 상대의 성(性)을 지워버리려는 노력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선배는 곧잘 나를 '녀석'이라고 불렀다. 그런 뒤 그가 커다란 손바닥으로 머리칼을 마구 헝클어줄 때면, 뭉클하니 아늑해져 까치발을 든 채 '더요! 더요!'라고 외치고 싶어지곤 했다. 어쨌든 1분도 안 되는 시시한 순간이었지만, 준이 선배는 그날 자기도 모르는 새 중요한 일을 하나 해내고 있었다. 내 머리에 붉은 동그라미를 그려준 거였다.

- 「너의 여름은 어떠니」(15쪽)


나는 테이블에 고개를 처박고 열심히 핫도그만 먹었다. 되도록 카메라에 얼굴을 비추고 싶지 않아서였다. 선배는 스케치북을 가져와 뭐라 급히 갈겨썼다. 그러고는 내 쪽으로 와 종이를 들고 흔들었다. 나는 선배에게 과식하는 모습을 보이는 게 창피해 머리를 더욱 수그렸다. 선배는 안절부절못하는 눈치였다. 얼마 뒤 물을 마시려 시선을 돌리는 순간, 선배가 들고 있는 도화지 속 글씨가 눈에 확 들어왔다.

─고개 좀 들어, 이 녀석아.

'......'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나는 핫도그를 든 채 그대로 멈춰 있었다. 양손 아래로 끈적끈적한 케첩과 겨자 소스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제작진에서는 난리가 났다. 피디가 어떤 신호를 보내는 듯했고, 선배는 창백해진 얼굴로 다시 도화지에 뭐라 열심히 썼다. 그러곤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구조 신호를 보내듯 종이를 번쩍 들어올렸다.

─고개 좀 들어, 미영아. 고개 좀 들어, 제발.

「너의 여름은 어떠니」(36-37쪽)


한때 흠모했던 선배가 순식간에 추락하는 모습은 선배가 움켜잡은 팔에 생긴 상처와 어린 시절 물에 빠진 화자가 움켜잡은 병만의 팔의 상처가 겹쳐지면서 더욱 비극적인 색채를 띤다. 하지만 더 슬픈 것은 작품 속 누구도 손가락질할 만한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너의 여름은 어떠니」의 준이 선배도 그렇고, 「벌레들」에서 자기 일에 몰두하느라 아내 이야기를 듣지 않는 남편도 그렇다. 『비행운』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이 땅에선 도저히 살 수 없어 비행(飛行)을 시도하다 추락하거나, 비행 마저 포기하고 어떻게든 지상에서 견뎌내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벌레들처럼 보이지 않는 것 같지만(애써 보려고 하지 않는다는 말이 더 맞을까) 어디에나 있으며, 사실 우리도 이 세상에선 그들과 다를 바가 없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는 "죽어서도 박스를 줍고" 있어야 한다. 한쪽 다리를 절름거리면서.


서윤의 양볼 위로 뜨거운 눈물이 사정없이 흘러내렸다. 생전에 폐지를 모아 자신을 키운 할머니 생각이 나 그런 건 아니었다. 할머니가 자기를 못 알아보는 게 서운해 그러는 것도 아니었다. 서윤이 그토록 서럽게 우는 건 할머니가 죽어서도 박스를 줍고 계시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 「호텔 니약 따」(280-281쪽)


대부분의 작품들이 모두 좋았지만 그 중에서도 내 마음에 선명하게 각인된 작품은 「서른」이다. "너는 자라 내가 되겠지...... 겨우 내가 되겠지."라는 문장을 만날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짠해지게 만드는 작품. 서간문의 형식으로 아는 언니에게 심경을 토로하는 이 작품은 현대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의 자화상이자 풍속도다. "하부 판매원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모든 판매원들에게 득이" 된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다단계의 구조야말로 개미지옥 같은 현대 사회의 본질이요,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느새 물건이 아닌 사람을 팔며 윤리성마저 상실한다. 한때 신뢰했던 전 남자 친구에게 이끌려 들어간 지옥에 자신을 신뢰했던 제자를 밀어넣으며 빠져나가는 소설의 구조가 내 마음을 계속 아프게 한다. 적어도 이 작품에서, 김애란은 명랑하지 않다. 애잔하고 처연한 슬픔을 천천히 끝으로 밀고갈 뿐.


문체에 대해 한 마디만 보태면, 명사구나 부사구로 문장을 끝맺는 방식이 빈번하게 사용된다. 첫 작품집에서는 자주 사용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왜 이런 방식으로 문장을 썼을까를 곰곰히 생각해봤다. 첫째, 한국어의 특성상 대부분의 문장이 '-다'로 끝나기 때문에 이로 인한 단조로움을 깨기 위해 사용했을 가능성. 둘째, 도치를 통해 작가가 강조하고 싶은 부분, 특히 어떤 이미지를 두드리지게 하려고 사용했을 가능성. 쉼표가 나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마침표가 나와 흠칫 놀라면서 읽었다. 이런 문장의 활용이 문장의 단조로움을 깨고 신선함을 주기도 하며, 특정한 이미지를 강조하기도 한다. 특히 결말을 하나의 풍경이나 이미지로 제시해 끝내는 방식은 볼 때마다 놀랍지만, 과유불급이라고 했던가. 이런 것도 너무 자주 나오면 그 신선함을 잃기도 하고 흐름이 끊어진다는 느낌도 받게 된다. 작가가 의식적으로 사용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너무 자주 돌출되는 문장은 그 신선함을 잃기 쉬워진다.


한때 내 기억속의 김애란은 세대를 다루는 작가였지만, '비행운'이라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단편집에서 주목해야 할 키워드 중 하나는 계급이다. 작가는 다양한 방식을 통해 한국 사회가 당면한 계급적 풍경을 김애란식으로 보여준다. 한동안 잊고 지냈던 그녀의 소설을 생각하면서, 나는 다음 작품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을 날카롭게 보여줄 그녀의 소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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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6-08-10 1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첫 번째 가능성에 한 표. 김애란은 아마도 - 다로 끝나게 될 때의 지루한 느낌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듯합니다. 그래서 유독 명사구와 부사구가 많은 듯합니다..좋은 작가입니다..

아무 2016-08-10 13:34   좋아요 0 | URL
저도 첫번째 가능성이 더 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예전 작품 중에 「누가 해변에서 함부로 불꽃놀이를 하는가」를 다시 읽어봤는데 그때는 자주 쓰지 않았더라구요. 이상문학상 받은 「침묵의 미래」도 전 나름 좋았습니다. 다음에 나올 작품이 참 기대되는 작가죠..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