펄 벅을 좋아하나요?
안치 민 지음, 정윤희 옮김 / 밀리언하우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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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펄 벅은 중국 소작농들을 모욕했고 이는 결국 중국을 모욕한 것이다.' '펄 벅은 중국인을 혐오하므로 우리의 적이다.' 라는 문구로 '미국 문화 제국주의자' 라고 비판하던 그녀의 삶을 다시 들여다 본다는 작가 자신의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을 것이다. 그런 그녀의 작가로서의 삶이 아닌 '인간 펄 벅' 의 삶을 좀더 리얼하게 들여다 볼 수 있는 작품이었지 않나싶다. 내가 펄 벅의 <대지>를 읽은 것은 중학교때였다.도서관에 박혀 이해도 잘 하지 못하며 굵디 굵은 책을 손에 들고 소설속에 빠져 들며 읽었던 기억이 나고 그 굵은 무게감과 고전은 다이제스트가 아닌 원서 번역본으로 읽는 맛이 재밌다는 것을 알고는 여고시절 다시 한 번 읽었지만 지금 그 내용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왕릉일가의 처절하게 가난했던 삶이 얼핏 생각나기는 하지만 세세하게는 기억을 못하기도 하고 펄 벅에 대하여도 그리 많이 알지는 못하지만 한국에도 두어번 오고 펄 벅 재단이 설립됐다는 이야기도 들은듯 한데 그녀의 자세한 삶에 대하여는 알지 못하기에 소설에 좀더 집중하여 읽을 수 있었다.

원래 등잔밑이 어둡다고 <대지>를 읽어보지 않고 조국의 명령에 의해 그녀가 '미국 문화 제국주의자' 라고 세뇌를 받았던 그녀가 펄 벅 노벨문학상 작가의 삶을 어떻게 그려낼까 했는데 역사와 나름 잘 얽히게 하여 재밌게 풀어냈다. 펄을 좀더 가깝게 들여다보기 위하여 작가는 '윌로우' 라는 한 여자를 창조해 낸다.펄의 삶도 파란만장 하지만 윌로우 삶 또한 펄과 그리고 역사와 함게 얽혀 파란만장하게 펼쳐진다.미국에서 태어났지만 조국인 미국에서 산 시간보다 제2의 조국인 중국에서 산 시간이 더 많은 파란눈의 이방인 펄,그는 독실한 기독교 집안의 다섯째로 태어났다. 위로 아들이었지만 중국인들이 걸리는 병에 걸렸는지 모두 죽고 그녀와 밑으로 여동생만 살아 남는다. 그녀는 먼저 아들들과는 다르게 씩씩하게 자라난다.검은 모자속에 노란 머리를 감추고 언덕을 뛰어 다니고 윌로우와 함께 하며 검은 머리의 중국인이 되는 것이 가장 소원이었던 그녀,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선교사인 아버지의 가정에 무심함 때문에 고향인 미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엄마와는 다르게 펄은 중국이라는 나라가 좋았다. 그녀가 밟고 있는 땅이 좋고 사람이 좋고 문화가 좋고 그녀는 겉모습은 이방인이었지만 그 내면 깊숙한 뿌리는 온통 중국이었다. 

하지만 중국의 역사는 그녀를,아니 외국인을 가만두지 않았다. 유교와 불교가 강한 나라에서 기독교가 뿌리를 내린다는 것도 무리였지만 그들이 그곳에서 뿌리를 내리고 중국인으로 살아가는 것에도 무리가 있었다. 역사의 흔들림은 너무도 강했고 외모와는 다르게 속이 모두 중국인으로 변해버려 중국에서 살고 싶어했던 펄을 급기야 제2의 조국은 쫒아내듯 한다. 하지만 늘  변함없이 그곳에 뿌리를 내리고 소장농들과 함께 그들 속에서 살아가려 했던 아버지,그런 아버지와 가족의 마찰은 말없이 시작된듯 하다.펄의 옆에서 그녀의 든든한 버팀목처럼 윌로우는 그녀와 돈독한 우정을 나누며 그녀가 더욱 중국인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해준다. 윌로우 아버지 또한 펄의 아버지 압살롬와 함께 기독교가 뿌리를 내릴 수 있게 도와주다가 그 또한 그와 같은 길을 걷게 된다. 펄의 가족과 함께 윌로우의 가족 또한 역사와 함께 번성해 나간다. 

하지만 펄의 인생은 그리 순탄치만은 않아 첫번째 결혼한 로싱과의 사이도 좋지 않았지만 그 사이에 낳은 딸 또한 정상아가 아니었다. 딸 캐롤의 치료비를 위해서는 남편이 꼭 필요했지만 그와의 결혼생활은 처음부터 깨진 상태와 마찬가지인 불행한 삶이었다. 그런 삶의 돌파구를 찾듯 글쓰기를 시작하는 그녀, 하지만 남편은 극구 반대를 한다. 자신과 딸을 돌볼 시간을 글쓰기에 빼앗긴다며 반대를 한다.하지만 자신의 마지막 비상구를 찾듯 글쓰기를 포기할 수 없었던 그녀는 자신의 길을 더욱 넓혀 나가고 남편과는 급기야 헤어지게 된다. 그녀의 글값으로도 딸을 치료할 수 있을만큼 그녀의 글은 대단한 힘을 지녔던 것이다. '소설 집필은 영혼을 쫒고 포락해내려는 과정과 흡사합니다. 소설가는 아름다운 꿈속으로 초대받은 사람이죠. 운이 좋은 사람은 꿈속에 한 번 살았던 사람이고, 최고로 운이 좋은 사람은 계속 꿈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죠.' 라는 말처럼 그녀의 인생 또한 꿈속에 살고 있는 것처럼 그녀의 인생이 소설 그 자체는 아니었던가싶다.

한번의 결혼 실패와 자신과 뜻이 잘 맞는 남자인 시인을 만났지만 그 또한 아직 이혼이 성립되지 않아 그녀 곁에서 서성이다 이혼을 하려고 가던 길에 비행기추락사를 당하게 되고 그녀는 큰 아픔을 겪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고향처럼 여겼던 중국에서 떠나 미국으로 쫒겨가듯 해야 했던 시간, 영영 중국으로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인지도 모르고 향했던 미국에서의 그녀의 성공은 중국공산당에서는 그녀를 꼭두각시처럼 이용하고 싶어했지만 뼛속길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그녀를 속인다는 것은 가당치도 않은 일, 그녀의 비웃음 거리로 치부되었던 당은 그녀를 미국 문화 제국주의자라고 비판하기에 이르고 그녀는 다시는 고향땅을 밟을 수도 어머니인 캐리의 무덤을 한번 더 볼 수도 없었지만 친구인 윌로우를 만난다는 것도 생각할 수도 없었다. 윌로우 또한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공산당의 앞잡이가 되듯 한 남편 딕을 따라 같은 삶을 살기를 원했지만 그녀에겐 기독교가 뿌리 깊게 내래고 있어 그녀의 영혼을 지배하고 있었기에 그 값을 톡톡히 치뤄야만 했다. 펄과 비밀리에 편지왕래를 하던 것 마져 그녀에겐 죄가 되어 감옥생활을 해야만 하는 세상, 이젠 세상이 변해 버린 것이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정을 나누며 이방인이지만 중국에 깊게 뿌리를 내린 펄 곁에서 그녀 또한 소용돌이에 휘말려 파란만장한 삶을 살게 되지만 윌로우 그녀의 눈을 통해 펄의 노벨문학상 작가로서가 아닌 그저 한 인간이고 여자의 삶을 보여주지 않았나생각된다. 펄이 어떻게 하여 <대지>라는 거대한 작품을 탄생시키게 되었는지, 어떻게 중국 소작농들의 그 깊은 내면까지 속속들이 들여다보게 되었는지 너무도 세세하게 알게 해주는 작품으로 좀더 인간 펄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그녀가 작가의 길을 걷게 어쩌면 역사가 내몰지 않았나하면서 그녀의 묘비를 보고는 또 한번 감동, 영어 이름이 아닌 중국이름으로 쓰인 그녀의 묘, 그녀는 마지막까지도 중국인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 그녀의 묘에 엄마인 캐리의 묘의 흙을 뿌려줌으로 하여 어쩌면 정부가 못한 일을 윌로우 자신이 그녀의 마지막을 다독이고 있다. 

펄의 아버지인 압살롬이 미국에서 목회활동을 했다면 위대한 작품인 <대지>가 탄생하고 그녀가 작가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을까. 역사가 만들고 그녀의 인생이 당연하듯 작가의 길을 걷게 하였지만 그녀 또한 그런 작품을 쓰지 않으면 중국에서의 삶에 빚을 지는것 같았는지도 모른다. 그녀를 키워주고 그녀를 성장하게 한 중국과 중국인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담긴 작품이 <대지>라면 이 작품은 작가의 그녀를 비난한 댓가로 그녀의 인생을, 그녀의 삶을 다시 부활시키는 오마주와 같은 작품이다. 철저히 왜곡되었던 그녀의 삶이 이 작품으로 모든 것이 드러나지 않는다해도 펄 벅이라는 여인의 이방인으로서의 삶을 다시금 들여다볼 수 있음이 좋았던 작품이다. 이방인으로 왕따를 당하며 살 수도 있었던 삶인데 모든 것을 자기화시켜 그 속에 융화되고자하고 그들 속으로 깊숙히 들어갔던 펄, 그랬기에 왕릉일가도 탄생되고 했겠지만 같은 여자로서 그녀의 삶을 들여다보니 안쓰럽기도 하다. 모성을 느껴보고 싶었겠지만 자신의 맘과 다른 캐롤, 그래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감싸 안으려 한 엄마 펄은 어쩌면 신앙을 위해 가족을 무관심속에 버려두고 목회활동에만 전념한 아버지에게서 냉대를 받았던 그녀 자신이기에 더욱 캐롤을 놓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더욱 사랑을 주고 싶었했고. 그런 맘을 들여다 보면 더욱 가슴이 저미지만 그런 일들을 바탕으로 입양까지 하여 다른 인생까지 거둔것을 보면 그녀 또한 여자이고 엄마였다.중국역사와 함께 두 여자의 끈끈한 우정과 중국에 기독교가 어떻게 뿌리를 내리는지도 보여주고 중국문학까지 잠깐 들여다 볼 수 있었던 기회이기도 했다. 작가 펄 보다 한 여성 펄에 대하여 좀더 삶의 깊이를 파헤쳐 들어간 작품이지 않았나싶다. 이 기회에 펄 벅의 <대지>를 읽어봐야겠다.너무 오래되어서 잊혀져간 왕릉일가에 대하여 이참에 펄 벅의 삶과 비교하며 읽어보면 어떨까 생각을 해보며 역사가 펄 벅이라는 대단한 인물을 만들어냈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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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분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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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그래서 그래. 발을 아주 조금만 잘못 디뎌도 비극적인 결과가 생길 수 있으니까.' 자신의 인생이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지 알고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자신이 그린 밑그림처럼 되어간다면 그 누가 후회를 하고 반성을 하며 살겠는가. 연습이 없는 인생의 무대에서 하루하루가 '전진' 뿐인 삶에서 우린 때론 '만약에 그 시간으로 되돌아 간다면..' '만약에 그 일을 하지 않았다면..' 하며 '만약에..' 를 찾을 때가 있다. 하지만 그 만약의 시간으로 되돌아 간다고, 시계 바늘을 되돌려 놓는다고 해도 앞으로 후회하지 않을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문득 <벤저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가 생각이 나지만 거꾸로 가는 시간이라고 후회가 없지는 않다.언젠가 인간은 실수를 하게 되고 그렇게 하면서 진보하고 그릇이 더 커져 가는 것이지 처음부터 완성된 그릇의 인간이란 없다. 

이 소설은 특이하게 그러니까 죽은이가 엮어가는 소설이다.화자가 죽은 자의 소설로는 <딩씨마을의 꿈> 에서는 이미 죽은 어린아이가 화자였고 <그녀에 대하여>에서도 아직 자신이 죽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 이십대의 숙녀가 자신이 죽었던 나이의 어린 아이에서 시간이 흐른 후의 시간을 자연스럽게 이해해간다고 해야 하나 그런 기법으로 쓰였는데 이 소설은 그가 왜 죽게 되었는지 아니 그의 인생이 왜 무엇과 함께 꼬여 나가게 되었는지 도입부분에 나타내준다. 이 소설 또한 이미 죽은 자인 혈기왕성한 나이에 미쳐 꽃을 피워보지도 못하고 죽게 된 마커스가 화자이다. 그의 인생은 절묘하게 한반도 전쟁과 함께 엮여 들어가게 되고 그로 인해 그는 한반도에서 꽃처럼 죽어가야만 했다. 그렇다면 그가 왜 역사의 현장에 오게 되었는지 무엇때문에 죽음을 당하게 되었는지 그 속으로 들어가본다.

이 소설을 읽으며 '만약에..' 라는 가장을 참 많이 해 보게 된다. '만약에..' 마커스의 인생에서 만약에 한반도 전쟁도 없었다면 그가 죽었을까.아니 그가 만약에 와인스버그 대학으로 옮기지 않고 그냥 시골 대학에 남아 있었다면 그가 죽게 되었을까. 아니 코틀러와 사귀지만 않았더라면, 채플시간에 지글러에게 대리출석을 하지 않고 그가 꾹 '울분' 을 참고 참석했더라면 그는 죽음에 이르렀을까.그의 가족의 비극은 일어났을까. 인생에 만약이란 단어를 뺀다면 우린 모두 희극속에서 자신이 그리는 그림대로 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연습이 없는 삶이기에 길고 짧은 인생에 희극과 비극을 오가며 사는 것 아닐까.길고 짧은 것은 어찌보면 운일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어찌 사람의 맘처럼 의지대로 될 수 있는 문제인가.

원리원칙대로 살아가는 마커스의 아버지, 그는 유대인 대대로 가업처럼 해 온 정육점을 운영한다. 하지만 세상밖은 한참 시끄러워 그의 조카들이 하나 둘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게 되고 혹시나 그도 하나뿐인 자랑거리인 마커스에게 죽음의 그림자가 다가오는 것은 아닌가 하고 늘 노심초사한다. 자신의 곁에서 하기 싫은 닭똥구멍으로 손가락을 집어 넣어 내장을 빼내는 일도 서슴치 않고 잘해내는 아들이 자신의 곁을 떠나면 무언가 일이 벌어질것 같아 안절부절 노심초사하는 그의 아버지는 그를 집안에 가두어 두듯 하려고 한다. 하지만 혈기왕성한 십팔세 청년이 갇혀 지내기엔 세상은 너무 호기심이 많고 그 또한 피가 끓는다. 아버지의 정육점에서 가업을 이어받아 닭내장이 빼내면 살고 싶지는 않다. 아버지의 관심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살고 싶지만 그의 가슴 속에서는 부모님에 대한 생각으로 늘 복잡하다. 아버지 곁에서 함께 일을 하며 돈을 벌던 시간이 무척 행복했던 시간이었음을 그는 안다. 그리고 그 시간이 부모님에게도 행복했던 때었음을 안다.하지만 이제 그는 세상밖 소식에 민감하고 그도 자신의 세상을 만들어 가며 살고 싶지만 자신이 고집하여 아버지에게서 벗어나기 위하여 집에서 멀리 떨어져 왔기에 부모님을 돕기 위하여 아르바이트를 힘들게 해야 하고 공부 또한 열심히 해야만 한다. 하지만 룸메이트들나 학장은 그런 자신의 맘을 몰라주고 그를 괴롭히듯 한다. 그렇다면 그가 참을 수 없는 '울분' 으로 가슴의 피가 들끓게 된 것은 무엇일까.

'울분' , 먼저 아버지의 관심이다. 너무 지나친 관심은 자식의 길을 다른 길로 가게 만들기도 한다. 그냥 지켜보고만 있으면 바라보고만 있으면 바른길로 잘 갈텐데 너무 관심을 기울이다보니 '울분' 에 삐딱하게 가고 싶어진다. 그게 사람맘인것 같다. 아버지의 관심이 그렇다면 학교에서는 룸메이트들이다. 잠잘 시간도 부족하게 열심히 뛰고 있는데 그런 자신의 잠잘 시간을 빼앗는 룸메이트에게서 벗어나기 위하여 방을 바꾸어 보지만 역시나 그곳에도 자신의 맘과 통하지 않는 사람 뿐이다. 그렇다면 그가 갈 수 있는 곳은 남들이 가지 않는 지저분하고 불편한 혼자쓸 수 있는 방이다. 조금 불편하긴 하지만 누구에게 방해받지 않고 그만의 공간에서 그만의 방식대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이번에는 학생과장이 그를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 곱지 않은 시선으로 그의 방바꿈에 대하여 발을 거는 그를 향해 거침없이 구토를 해주는 마커스, 하지만 그것조차 그의 몸이 아픈 상황이었다. 충수제거수술을 하고 그의 음경을 빨아준 손목을 그어 자살 시도를 했던 올리비아를 만남으로 인하여 그는 또다른 세계를 맛보려 하고 있는 순간, 어머니는 이혼을 들먹이며 그의 그런 연애를 막으려 한다. 그렇다면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인생이란 무엇이란 말인가.보잘것 없는 정육점집 아들이지만 그래도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하여 전과목 A의 성적에 누구보다 모든 일에 열성적이고 거기에 아르바이트까지 하여 학비보충을 하고 있다면 최고라고 할터인데 그의 생각만큼 세상은 그의 편이 아니다. 조력자가 되지는 못할망정 그의 발목을 자꾸만 거는, 가슴속에서 밀어 올라오는 '울분' 을 참지 못하게 하는 일들이 자꾸만 족쇄처럼 발목을 잡는다. 

'나는 그애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나는 그애가 두려웠다. 나는 아버지만큼이나 나빴다. 내가 바로 아버지였다. 나는 아버지를 뉴저지에 두고 온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불안에 나도 둘러싸이고, 불길한 예감에 나도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오하이오에서 나는 아버지가 된 것이다.' 아버지에게서 벗아나려고 하면 할수록 불안감에 휩싸인 아버지처럼 되어가는 자신을 깨닫게 되는 마커스, 어찌보면 뭉크의 <절규>를 보는 것 같다. 뭉크는 자신의 가족이 한 명씩 죽게 되는 불안에 자신 또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에 늘 시달려 정신질환을 알았다고 하는데 이 소설은 어쩌면 그와 흡사하다. 아니라고 부정하면서 점점 불안에 빠져드는 아버지와 아들을 볼 수 있다. 그들의 불안감은 비극을 예고하듯 '모르핀을 맞고' 라며 과거를 회상하면서 소설이 시작된다는 것은 뭔가 일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이미 지나간 일을 되집어 보는 것이다. 만약에 그는 어느 한순간, 그의 인생에서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한사람을 만나지 않았다면 아니 어느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의 인생은 바뀌었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가 한국전쟁에 참전하게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만약에 그 모든 시간들을 잘 이겨냈다면 그는 학업을 마치고 변호사가 되어 있을 수도 있고 결혼을 하고 잘 살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인생에는 스무살 그 후의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아버지의 불안처럼 아버지 또한 아들의 비극적 죽음으로안해 자신 또한 비극적 최후를 맞게 되고 어머니는 문을 걸어 잠그고 열어주지 않았던 자신의 남편을 이겨내지 못하여 모든 것이 비극적으로 끝났다고 자책하며 살게 된다. 혼자서.그렇다면 그들의 인생에서 무엇이 그토록 꼬이게 만든 것이고 무엇이 그토록 참기 힘든 '울분' 이었을까.

채플시간에 참을 수 없는 중국의 국사를 몇 번씩 반복하여 부르듯이 그가 좀더 한반짝 뒤로 물러나 자신의 삶을 관조하였다면, 정말 가슴에 참을 인을 세번 정도 생각하며 행동하고 말을 했다면 그는 울분을 참지 못하여 짧은 생을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네 삶에 만약에라는 말이 통하지 않는 연습없는 단막극이기에, 어느 순간 삶은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누구에게라도 그런 순간은 있다. 그렇다고 모두 '울분' 의 시간을 참고 군자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비극적인 삶은 사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마커스가 울분을 참지 못하고 격한 시간은 바로 '청춘' 의 시간이다 한참 청춘의 피가 끓는 시간이니 무엇인들 참을 수가 있었을까. 격정과 분노속에 자신이 세상의 중심으로 보이는 그런 시간이다. 그 시간을 어떻게 헤쳐나가느냐에 따라 인생이 희극이 될 수도 비극이 될 수도 있다는 선택의 갈릴길을 잘 표현해 냈다. 그 또한 그 시기에 쓴 소설이라니 얼마나 잘 표현해냈겠는가.격정적인 시간을 비극으로 갈무리하여 안타깝지만 청춘의 그 길목을 다시 들여다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이런것을 보면 참을 인을 세 번은 아니어도 한 번을 새기며 한번 참아보는 것도 어찌보면 삶의 한 방법인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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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에게 날개 달아주기 - 이외수의 감성산책
이외수 지음, 박경진 그림 / 해냄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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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만나기전에 먼저 읽은 황경신의 단편소설중에 ’스케이트를 타고 싶은 코끼리 소원들어주기’ 라는 그런 소설이 있었다.작은 동물도 아닌 거대한 코끼리가 다른 것도 아닌 스케이트를 타려면 스케이트장은 얼마나 커야 하고 코끼리에게 맞는 스케이트는 대체 어디에서 구한단 말인가. 하지만 숲 속 동물친구들은 코끼리가 낙심하지 않게 한가지 한가지 방법을 찾아내어 그 소원에 근접해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다. 스케이트장은 그렇다면 남극 아니면 북극, 거대한 얼음을 힘들여 얼리지 않아도 그 자체가 스케이트장이다. 그리고 거기까지 코끼리와 그외 다른 동물들이 갈 수 있는 것은 뱃길이 제일 편할것이라는...이렇게 한가지씩 의견을 내고 제일 타당성이 있는 것들을 찾아가다보니 정말 코끼리라고 스케이트를 타지 말라는 법이 없다. 하지만 코끼리에게 날개를 달아준다는 것은 어떨까, 가당치 않은 일지만 누군가 내게 날개를 달아주길 바라기 전에 내가 먼저 그 날개를 찾아 달 방법을 찾아보라는 이야기다.

<아불류 시불류>에서는 그가 트위터에 올린 짧은 글에서 촌철살인을 느낄 수 있었듯이 이 책에도 그의 그런 글들이 나오긴 하지만 ’아불류 시불류’는 좀더 감성적인 이야기였다면 이 책은 제목처럼 좀더 진리적이고 무언가 이성적인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동서고금을 통하여 잠언,명언, 그외 깨달음을 주는 이야기들과 함께 그의 허를 찌르는 날카로움이 담긴 글이 담겨 있고 그 모든 것을 아우르듯 장의 마지막에는 그이 감성적인 ’시’ 가 마지막 입가심을 하듯 담겨 있어 한 장을 끝내고 나면 감성충전을 할 수 있으니 다음 장으로 넘어갈때는 다시 이성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 고양이그림처럼 제목을 바라보고 있는 고양이의 몸에는 밤하늘의 달과 별이 함께 담겨 있다. 느릿느릿 고양이걸음으로 읽으며 감성충전까지 하라는 그림으로 해석을 해 본다. 너무 빨리 읽다보면 체할것 같아 짧은 글은 한번더 읽어보기도 하면 쉼표를 찍는것처럼 좋다.

’뛰어난 미모는 나이 들면 시들어 버리지만 뛰어난 매력은  나이 들어도 시들지 않습니다. 미모는 외면에서 형성된 것이어서 시간의 제약을 받지만 매력은 내면에서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습니다. 하지만 매력은 어떤 경우에도 성형불가입니다.’ 

당신은 외면의 미로를 가꾸고 있나요 아님 성형이 자유자재로 마음대로 되는 내면의 매력을 가꾸고 있나요. 사람들을 가만히 보면 멀리 볼 것도 없이 가까이 있는 친구들만 봐도 외면에 치중하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내면에 치중하는 향기나는 친구가 있다. 외면에 치중하는 친구는 늘 힘들다. 나보다 더 잘나고 더 많이 가진 사람을 따라가기 위하여 늘 허덕인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매력을 보지 못하여 자신은 늘 가난하고 못생기고 부족한듯 하여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다. 하지만 내면을 가꾸는 친구들은 늘 얼굴에 웃음이 피어난다. 비록 많이 가지지 못했어도 아무도 훔쳐가지 않는 내면이 가득차 있기에 늘 당당하고 자신감이 넘치며 어디에서도 자신으로 우뚝 설 수 있다. 그에겐 삶이란 희망이고 날마다 새로운 일상이다. 타인이 도둑질해가지 못하는 내면이 가득차 있어 퍼내고 퍼내며 다른 이들에게 자신감을 심어 주기도 하지만  그 내면을 들여다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무슨 치기 정도로 본다. 하지만 그 사람은 정말 삶이 희망이다. 스스로 자신에게 날개를 달았기 때문이다. 남이 자신에게 날개를 달아줄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날개를 다는 방법을 찾은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내면이 아닌 ’외모지상주의’ 를 만들어가서인지 그런 사람들의 날개를 타의에 의해 부러뜨리고 있다. 그럴때 꼭 필요한 말들이 담겨져 있다. 무언가 쉼표와 같은 여유와 깨우침 진리와 번득이는 재치가 필요할 때 한꼭지씩 챙겨 읽어본다면 삶의 지침서가 될 그런 글들이 담겨져 있어 윤활유가 될 수 있다.

’보편적 슬픔’ 이란 이야기도 익기 알고 있는 이야기였지만 지난 겨울엔 그런 ’보편적 슬픔’ 의 일을 당했다. 남에게 일어난 일은 그리 슬퍼보이지 않지만 내가 당하면 슬픔은 정말 크다. 나와 너의 차이에서 그렇게 슬픔도 기쁨도 차이가 나는 것이다. ’슬픔이 없는 집에서 겨자씨를 구해오거라’ 한다면 정말 슬픔이 없는 집이 있을까.전국을 돌아도 아니 세계를 돌아도 과연 슬픔이 없고 그런 곡절 한가지 없는 집이 존재는 할까.아무리 날마다 웃는 삐에로에게도 말 못할 슬픔이 있고 고민이 있는 것이다. 그가 날마다 웃는 모습을 하고 있다고 그에게 기쁨만 있으란 법은 없듯이 슬픔 한꼭지 간직하지 않고 살아가기란 힘든 것이다. ’ 슬픔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을’ 당연한 것이다. 슬픔도 기쁨도 누구에게나 있는데 그것이 ’나’ 냐 아님 ’너’ 인가 하는데도 그 크기가 다를 뿐이다. 그것을 보편적으로 받아 들이라는 이야기 친정아버지를 보내 드리고 깊게 느꼈다. 아버지를 보내 드리기 전에는 그런 슬픔이 닥쳐 온다면 어떻게 해야할지 아님 그런 슬픔이 내게도 올까 라고 막연하게 생각을 했는데 내게 닥치니 정말 하늘이 무너진듯한 너무 큰 슬픔이란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도 또한 지나고 나면 망각의 동물이라 서서히 빛이 바래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다른 이가 그와 같은 슬픔을 당하면 슬픔을 더 깊게 나눌 마음의 자세를 가지고 있다는 것 뿐이다. 

그의 글들에게는 경험이 담겨 있어 더 마음이 간다. ' 진실로 글을 쓰고 싶다면 놀부처럼 살지 말고 흥부처럼 살아라. 다리가 부러진 제비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느껴라. 글을 쓰는 일이 도를 닦는 일과 무엇이 다르랴. 내 마음 밖에 있는 것들을 모두 내 마음 안으로 불러들여 같이 슬퍼하고 같이 기뻐하라.' 글을 쓴다는 것은 어느 순간에는 술술 실타래가 풀리듯 잘 풀리는 날이 있는가 하면 엉킨 실타래처럼 절대로 풀리지 않을 것처럼 잘 안되는 날이 있다. 그런 속을 들여다 보면 그 글에 내가 얼마나 공감하고 있는가에 따라 느낌에서 오는 차이가 그렇게 크게 나타난다는 것을 느낄때가 있는데 같이 슬퍼하고 같이 기뻐한 작품은 좀더 쉽게 풀어 쓸 수 있었는데 읽으면서 겉돌기를 한 책들은 리뷰를 쓸때도 무척이나 힘들었던 것을 느낀다. 억지로 날개를 달아보려 했다가는 큰 탈만 나게 된다.그럴때는 과감하게 안되면 안되는 방향으로 그냥 밀고 나가는 것이다.'아이야 뽑지 않아도 된다/ 내 인생도 때로는/ 눈물이었노라고/ 반짝이며 자라나는/ 은빛 실뿌리//' - 새치의 시 전문이다. 그냥 모든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 들이는 것이 어찌보면 제일 편할때가 있다. 일부러 물길을 만들기 보다는 물이 흘러가는 대로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순리이고 스스로 길을 찾는 방법이 될 때가 있다. 한페이지 한페이지 읽어나갈수록 공감하는 부분들이 많다. 한꺼번에 몽땅 털어 넣어 버리기에는 뭔가 아쉬움이 있다. 지치고 내 실타래가 엉켰다고 생각될때 꺼내어 어느 페이지를 펴고 읽어도 마음의 매듭을 풀 수 있는 글들이 있어 좋다.

얼마전에 읽은 <기계공 시모다> 라는 책에 보면 시모다가 읽었다는 '메시아 핸드북'이라는 책이 소설속에 나온다. 그 책에는 짧은 글들이 있어 마음을 다스릴 수 있다. 그렇게 아무렇게나 펼쳐진 부분을 읽다보면 스스로 메시아에 이를 수 있는 '메시아 핸드북' 그 책은 다름아닌 <갈매기의 꿈>으로 유명했던 리터드 바크의 소설이다. 이 책은 그 책을 읽는 느낌이다. 어느 페이지를 펼치고 읽어도 길을 찾을 수 있다. 지금 당장 내 길이 보이지 않는다고 서두를 필요는 없다. 내가 길을 정하기 전에는 모든 곳이 길이었다는 말처럼 길이라고 정의해 놓기 전에는 어디에나 길이 있었다. 보다 나은 지름길을 찾다보니 시행착오도 거치고 코끼리에게 꼭 필요한 코가 아닌 날개를 찾고 있지만 한박자 물러서서 있다보면 길이 보이고 길은 내 앞에 있다. 잠시 바라보지 못하고 찾지 못했을 뿐이지 길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런 잠깐의 여유를 찾아 주는 책이다. 맘에 드는 부분들은 윗부분을 살짝 접어 놓고 다음에 다시 펼쳐볼때 기억하기 좋게 해 놓는데 이 책에도 접어 놓은 부분들이 정말 많다. 그만큼 공감하는 부분들이 많다. 그의 글에서 좋은 부분들도 많지만 동서고금의 이야기만 따로 보아도 좋은 이야들이 많다. 알고 있었지만 다시 읽어본다고 내 날개의 깃털에 흠이 되지 않는다. 더욱 빛나고 화려하게 펼치고 비상할 수 있게 만들지 결코 방해가 되지 않는 이야기들은 읽는 것만으로도 숲 속을 천천히 걸어 피톤치드로 맑고 깨끗하게 샤워한 기분이 들게 한다. 그 감성충전을 봄이 되기 전에 한번 해보면 어떨지,코끼리가 아닌 내게 날개가 돋아 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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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러브 - Glove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야구속에 숨은 ’사랑’을 보다,글러브 2011
 



 감독/ 강우석
출연/ 정재영(김상남), 유선(나주원), 강신일(교감선생님), ...

청각장애를 가졌다고 야구를 못한다는 고정관념을 버려라, 그들이 주는 감동을 진하게 느낄 수 있다

야구배트를 운동장에서 휘둘러야 하는데 술을 먹고 휘둘렀다면, 그런 일을 저지르고 지금 파출소에 가 있는 야구선수가 있다. 그는 이런 일이 한두번이 아닌듯 하다. 그것도 전혀 반성의 자세가 없다는 것. 그와 함께 야구를 한 친구인 매니저인 철수는 그를 위해 무엇이든 해결하려고 애를 써 보지만 이번에는 자신이 만든 올가미에서 벗어날 수 없다. 어딘가 좌천하듯 내려가서 반성의 자세를 취하고 있어야만 겨우 여기저기 눈치를 볼 수 있는데 그렇게 그들에게 온 자리는 충주성심학교인 청각장애자 야구부의 코치로 내려가는 것이다. 잘나가던 김상남선수, 그 일을 달갑게 받아 들이기엔 아직 그릇이 작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얼마간 구겨져 있어야 하는데... 하지만 청각장애야구부는 지금 절박한 상황이다. 그들에겐 전국대회에서 꼭 1승을 거두고 싶은데 자신들을 이끌어준 사람이 없다. 그런 사람이 필요한데 거기에 김상남 선수가 내려온 것이다.그들에게는 행운이지만 그도 그럴까.

청각장애아들이 모인 야구부,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들을 불쌍하다고 본다. 그리고 그들을 정식으로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기에 아직 실력은 그리 좋지 못하지만 그래도 야구에 대한 생각만큼은 남들 못지 않다. 그리고 한사람, 후천적 청각장애를 가지게 된 전국중학야구 최고 유망주였던 차명재라는 친구는 후천적 장애를 가져서 겉돌고 있는데 그러다 아이들과 마찰을 빗게 되고 처음 부임한 김상남과 파출소에서 만나게 되고 그의 유명세로 잘 빠져 나오게 되었지만 그는 야구부에 들어오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다 예선전을 치루듯 나간 경기에서 야구부의 투수가 다치게 되고 그는 야구부를 나가게 되어 명재에게 투수가 되어 달라고 한다. 명재는 그들의 경기를 몰래 바라보다가 야구부에 들어오게 되고 혼자의 실력으로도 야구를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을 가기도 있다. 그 생각을 여지없이 뒤집어 주는 김코치, 야구부와 그외 사람들과 삐걱거리면서 그곳에서 뭔가 다른 감동을 찾아내고 자신이 고교시절 그렇게 좋아하던 야구를 다시금 보게 되는 김코치.

한편 매니저 철수는 그의 구원을 위해 여기저기 뛰어 다니다 물의를 일으키게 되고 그가 다시 복귀한다는 것은 이제 힘든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김코치와 어긋나면서도 그가 하는 일에 더욱 빠져 들어가는 야구부아이들과 교감선생님 그리고 나선생님은 그가 하는 방법이 아이들을 다치게 할 수 있다고도 생각을 하게 되지만 그가 하는 방법에 점점 적응을 해 가고 학교 또한 야구부로 인하여 활기를 되찾고 아이들도 활기를 찾게 된다. 그렇다면 야구부를 전국대회에도 나가게 하고 야구부를 그대로 두어야만 할까.어른들은 어른들의 잣대로 아이들의 의지가 아닌 자신들의 관념에 아이들을 의지를 결정지으려 한다. 어른들의 생각이 옳을까.야구를 원하는 아이들의 생각이 옳을까. 또한 김코치는 계속 이곳에서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을까.

생각도 할 수 없는 점수로 예선전을 치루었던 충주성심학교 야구부는 전국대회에서 예선전에서 맞붙었던 군산상고와 붙어 재경기를 하게된다. 하지만 예전의 그들이 아니다. 김코치와 함께 그의 눈빛과 격한 언어에 단련되고 그와 함께 힘든 체력단련을 이겨낸 아이들이다. 자신들이 비록 남들보다 뒤쳐지기는 해도 자신들도 야구를 할 수 있다.GLOVE속에 숨은 LOVE를 보여주었던 김코치와 함께 그들은 하나가 될 수 있다. 아니 하나가 되어 왔다. 비록 그들에겐 ’소리’ 는 없지만 그들은 가슴으로 느끼고 가슴으로 말을 할 수 있고 전할 수 있다. 모든 일들의 생각을 뒤엎듯 충주성심학교 야구부는 정말 눈부신 발전을 하여 놀라운 경기를 보여준다. 하지만 마지막 포수와 투수의 작은 실수로 인해 연장전 지고 만다. 너무 서럽게 가슴으로 우는 아이들, 하지만 우린 그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비장애인보다 더한 감동과 그들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준 아이들의 감동은 가슴을 모든이의 가슴을 울린다.

성심학교 야구부 아이들에게 희망을 심어주었던 김상남, 그는 예전과는 다른 무언가를 얻게 되고 깊은 울림을 받아 이젠 낮은 자세로 무엇이든 받아 들일 자세가 되었다. 2군이라도 오케이라는 그의 말처럼 그는 이젠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 감동도 있고 유머도 있고 정말 꼭 봐야 할 휴먼영화라 딸들에게도 보여줘야겠다. 사람이란 언제나 정상의 자리에 있으란 법은 없다. 정상에 올라갔으면 내려오는 날도 있는 것이다. 그것을 담담히 받아 들일줄도 알아야 하는데 언제나 정상에 있는것처럼 고자세를 취하다 보면 자신에게 마이너스가 난다. 그런 자신의 내리막길을 믿지 못하고 아무곳에서나 방망이를 휘둘렀던 예전의 김상남은 이제 잊어라. 그는 청각장애야구부를 통하여 새로운 야구를 보게 되었고 그들에게는 희망을 심어준 사람이 되었다.비록 그들이 사회에서 받아줄 실업팀은 없을지라도 그들에게는 지금 야구는 인생의 전부이고 자신감이다. 그리고 이곳에 내려올때는 여자도 가리는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겉모습이 아닌 내면을 볼 줄 알게 된 것이다. 겉모습에 현혹되고 자신의 내리막길을 믿지 못하던 그였지만 이젠 완전히 작은것도 감사히 받아 들이며 자신에게 맞출 자세가 된 김상남, 그에게 성심야구부란 인생의 터닝포인트 같은 것이었다. 

정재영의 카리스마 있는 연기가 있다면 그들과 함께 해 준 야구부의 감동어린 연기가 있었고 그외 감초처럼 작은 감동을 옆에서 도와준 조력자인 나선생님과 교감선생님 그리고 원장수녀님외 아이들이 있어 더욱 잔잔하면서도 큰 파문을 이는 감동을 던져 줄 수 있었던 영화다. 갑자기 유치환의 시 '깃발' 중에 '그것은 소리없는 아우성' 이라는 글귀가 생각나는 영화다. 그들은 정말 소리없는 감동의 아우성을 내고 있다. 모두가 자신들을 부족한 청각장애인으로 보지만 그런 고정관념을 깨뜨려주는 야구부, 그런 야구부에게 희망과 자신감을 심어 준 김상남선수의 멋진 콤비플레이가 빚어낸 감동의 하모니이다. 감독의 말처럼 ' 영화 <글러브>는 나에게도 또 다른 도전이어다. 내가 만든 어떤 영화보다 큰 울림을 전할 영화가 될 것이다.' 그렇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가슴에 울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감동으로 '쿵쾅쿵쾅' 울부짖는 가슴을 가진 사람들이 영화관 문을 나설때는 모두가 미소를 지으며 눈이 벌겋게 충혈이 되어 있다. 소리없는 아우성으로 우리에게 큰 감동의 울림을 준 성심학교 야구부, 그들에게 누가 장애인이라고 비웃을 것인가. 나선생의 '우리 애들 실력 한번 보실래요?' 처럼 제대로 성심야구부의 실력을 보여준 영화다. 그만큼 자신있게 말해서일까 모두를 울리 수 있다는 말에 울지 않으려다 눈물을 자꾸 훔치고 말았다. 이끼에서 강한 카리스마를 보여 주었던 정재영은 또다시 <글러브>에서 진한 감동으로 2011년을 흔들어 놓은 듯 하다. 모두가 함께 흔들었지만 말이다. 그들이 서로를 향하여 '쾅쾅' 하며 두드렸던 가슴이 내게도 울려온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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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홍
노자와 히사시 지음, 신유희 옮김 / 예담 / 2010년 7월
평점 :
절판


노자와 히사시라는 작가는 <연애시대>를 너무 재밌게 읽고 주목하고 있다가 이 작품을 읽어봐야지 했는데 자꾸만 뒤로 미루게 되었다. 더 미루면 잊을것 같아 얼른 잡아든 작가의 미스터리 추리물이다.그는 연애물이든 추리소설이든 장르를 가리지 않고 모두 다 잘쓰는 작가인데 그의 비극적 결말이 참으로 아쉽기만 하다. 이런 작가의 더 많은 작품을 만날 수 없다는 것이. <연애시대>에서도 작가는 인물들에 대한 심리묘사가 뛰어났었다. 여자가 아니면서도 여자에 대한 심리묘사가 정말 탁월했는데 이 작품에서도 살인사건이후 남져니 피해자의 딸 가나코와 가해자의 딸인 동갑네기인 스무살 두 여자에 대한 심리묘사가 탁월하다. 

초등학교 6학년인 가나코가 수학여행을 간 사이 네명의 가족이 한사람에게 잔인하게 살해를 당했다. 왜 일까? 왜 가족이 몰살되는 그런 최후를 맞아야만 했을까.친구들과 재밌게 놀고 포크댄스도 추고 싶었던 가나코는 수학여행지에서 친구들과 떠드느라 잠도 이루지 못하고 설레이며 늦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갑자기 선생님의 다급한 부름에 자신에게 뭔가 않좋은 일이 닥쳤음을 직감하게 된다. 자신만 가방을 싸서 집에 가야 한다고 운동화마져 발에 잘 들어가지 않는다. 끈을 너무 조여놓은 것인지 톡톡 발을 땅에 두드르며 겨우 발을 집어 놓고 담임선생님과 함께 택시를 타고 가족이 있다는 병원으로 향하게 되는데 그게 무료 네시간이나 걸렸다. 가는 잠깐 휴게실에 들리게 되고 그녀는 배설을 하지 못한다. 그녀가 휴게실에 들린 와중에 병원으로 전화를 했던 선생님은 병원이 아닌 감찰의무원으로 가야한다는 말에 끝까지 한사람이라도 살아 있길 바라던 소망이 무너졌음을 직감하게 되고 그녀에게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공포의 시간이 된다.

그렇게 담임과 택시기사의 옥신각신 하면서 네시간여만에 도착한 병원에서 가족이 모두 죽었음을 알게 되고 마지막 부검을 위하여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네구의 시신들의 머리가 이상하다는 알게 되고 그녀는 전에 나들이를 갔을때 가족 몰래 장난을 쳤던 그들의 발가락을 만져본다. 그리곤 아버지의 하나밖에 없는 고모와 함께 장례를 치르게 되는데 그들 가족의 죽음은 크게 보도 되고 그녀는 이슈가 되고 있다. 그렇담 누가 가족을 살해했다는 것일까? 살인자 쓰즈키 노리오는 네 명의 사람을 살해한 '심홍의 한가운데' 망연자실 앉아 있다가 현장에서 검거 되었다.그는 왜 아버지와 엄마 그리고 아무 이유없이 죽어야만 했던 어린 다섯살 네살의 동생 둘까지 죽인 것일까.

쓰즈키 노리오는 '상신서' 에는 그가 왜 범행을 저질러야 했는지 그간의 이야기가 적혀 있다.가나코의 아버지와 함께 협력일을 했던 그를 가나코의 아버지가 이용을 하여 그가 죽은 아내가 남기고 간 보험금으로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보증을 서게 되고 그 돈을 자신의 돈으로 갚아야만 했다. 그런데 가나코의 집에 왔던 쓰즈키는 가나코의 아버지가 보증을 서게 했던 인물이 다름아닌 가나코 아버지의 장인이라는 이유로 엄마까지 죽이고 아이들을 죽인후 귀가를 한 가나코의 아버지를 죽인 것이다. 그것도 무참하게 해머로 때려서...수학여행으로 인해 다행인지 불행인지 화를 면하게 된 가나코, 그녀는 고모에게 맡겨지게 되지만 가족에게 달려가던 '네시간' 의 공포에서 그녀는 벗어날 수가 없다. 대학에 들어가고 독립을 하게 되었지만 그녀는 죽은 가족에 대한 죄책감이나 죄악감에 빠진다. '남겨진 자신만 행복하게 지내고 있다는 죄악감을 자각하자, 뒤이어 가나코는 자기 자신을 망가뜨리고 싶어졌다.' 철저하게 자신을 부서뜨리고 싶어진 가나코는 느낌도 없이 남자친구와 섹스도 하게 되고 얼마되지 않는 아르바이트로 바쁜 나날을 보낸다. 가족의 죽음으로 인해 받게 된 많은 돈의 보험금이 있지만 그래도 아라바이트를 하고 철저하게 자신을 '살인사건' 에서 벗어나도록 하고 싶지만 늘 원점처럼 그 시간과 사건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알게 된 가해자의 딸 미호, 그렇다면 그녀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자신이 빠지는 안식처에 그녀도 갇혀서 살고 있을까 점점 궁금해지게 되고 급기야 그 사건을 담당했던 전직경찰과 기자를 찾아 미호를 찾아내게 된다.

살인사건 후, 피해자만 피해자일까. 가해자는 그렇다면 법의 심판을 받으면 끝나는 것일까. 가해자인 쓰즈키는 법의 심판을 받아 '사형판결' 을 받게 되지만 그렇다면 살해당한 가족,아니 가나코의 아버지의 죄는 어떻게 된다는 것일까.만약에 가나코의 아버지가 쓰즈키의 부인이 죽으면서 남긴 보험금이 있다는 말을 듣고도 그냥 넘겼다면 자신이 응당 해야할 장인의 빚보증을 섰더라면 쓰즈키에게 살해를 당했을까. 가나코의 아버지가 죽은 후에 그의 부정행위가 점점 들어나고 그는 죽었지만 죄는 큰 이휴가 되었다. 거기에 아내가 아닌 애인까지 두고 있었다니, 그의 부정한 짓이 시초가 되어 모든 일이 일어나게 되었지만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을 그렇담 이 시건에 적용시켜야 하나. 아무튼 가나코는 가해자의 딸인 미호가 일하는 술집에 찾아간다. 그녀는 그곳에서 바텐더로 힘들게 살고 있다. 늘 누가 먼저 다가오기 전에 살인자의 딸이라고 당당히 밝히었기에 그녀에겐 친구가 없다. 그런말에도 그녀를 따듯하게 안아주었던 한남자와 동거를 하고 있지만 그녀는 늘 그와 다툼의 연속이고 아버지가 사형판결을 받았지만 그렇다고 딱히 다른 감정을 품고 있는것 같지는 않다.

미호에게 쉽게 접근을 했지만 자신의 신분을 속이고 그녀의 친구가 되는 가나코는 그녀를 알기에 그녀의 위에서 그녀를 내려다보듯 그녀를 조종한다. 하지만 가해자의 딸 역시나 그녀와 똑같은 힘든 터널을 지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녀가 몰래 혼인신고를 하고 살고 있는 남자에게 구타를 당하며 아이까지 잃게 되자 그녀에게 살인을 하라고 부추긴다. 가나코의 한마디에 급동조를 하며 그를 살해하겠다며 계획을 세우는 그녀 곁에서 빠져나오지도 못하고 점점 휘말려 들어가듯 자신도 똑같은 범죄자가 되려 하는 가나코,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공호의 네시간' 이 닥쳐 오게 되고 살인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그녀는 미호를 구하고 애인도 구하지만 자신과 똑같은 미호와 어울려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새로운 삶을 계획하고 조부모에게로 떠나는 미호를 배웅하고 그녀 또한 이제 다시 과거를 되돌아보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희망의 앞으로 향한다.

어쩌면 이 소설은 살인사건보다 무서운 그 후에 공포와 고통의 시간을 벗어나기 위하여 몸부림 치는 두 동갑네기 여성의 심리에 더 주목이 되어 있다. 전반부의 잔인한 살인사건에 비하여 후반후는 가나코와 미호의 만남과 이별로 인한 심리적 묘사로 과거와 공포의 시간에서 어떻게 벗어나고 그들을 어떻게 용서하고 받아들여야 하며 자신이 먼저 간 이들을 위하여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방황을 하지만 그렇다고 먼저 간 가족들이 과거에 매달려 연연하길 바라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부디 잊을건 잊고 자신의 삶을 개척하길 바라지 과거에 매달려 살인자의 딸로 피해자의 딸로 암흑의 터널에서 헤매이는 것과 네 가족의 살해현장인 심홍의 비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망연자실해 있던 살인자나 무엇이 다를까. 그렇다고 죄가 밉다고 사람까지 미워해야 할까. 법은 그를 용서하지 못했다고 해도 그 죄의 원인을 파헤치고 들어가면 그 또한 그를 용서해야만 할까. 라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살인사건이나 교통사고나 보면 모두가 나중에는 피해자이다. 한쪽만 상처를 입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상처를 입게 되고 그 상처는 오래도록 아물지 않는다. 서서히 잊혀져가는 과거 상흔에서 그렇다고 두 가족이 만나야 할까.어쩜 서로 보지 않는 것이 더 이로울지 모른다. 자신의 거울인양 보게되는 살해자의 딸 미호의 모습은 심홍의 바다에서 허우적 거리고 있는 듯 하다. 사회의 곱지 않은 시선속에서 그것을 혼자의 힘으로 이겨보려 하지만 결코 그 깊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연좌제처럼 죄의 얼가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남겨진 가족들, 그 가족들에게 바치는 소설같다. 선과 악 두 마음을 동일하게 가진고 살아가고 있는 인간의 마음에서 우린 어느 편이 손을 들어주며 살고 있나. 가끔 악의 손을 들게 하는 그런 일들이 내가 아닌 타인에 의해서 일어나는 경우가 있다. 그 순간을 참지 못하다면 누구나 죄인이 될 수 있다. 그렇다고 죄를 미워해도 사람까지 미워하진 말라는 말차럼 그 속을 들여다 보면 그 또한 선한 인간이었음을 그 또한 누군가의 아버지였고 딸이었슴을 알게 하는 우리 마음의 원점을 들여다보게 하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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