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주아 생리학 인간 생리학
앙리 모니에 지음, 김지현 옮김 / 페이퍼로드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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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들의 오해가 없도록, 우선 '부르주아 생리학'이라는 제목의 의미부터 풀어보자. '부르주아bourgeois'는 '도시'를 뜻하는 프랑스어 '부르bourg'에서 유래한 말로 '성 안 사람'이라는 뜻이다. 영주에게 귀속된 시골의 농노들과 달리 성 안의 자유 시민인 부르주아들은 성 안의 온갖 산업, 상업의 주체로 활동하면서 세력을 키워갔고, 결국 프랑스 대혁명을 주도하는 세력이 되었다. 그러나 프랑스 대혁명 이후 가장 유력한 사회적 계급이 되면서, 부르주아는 이전 체제의 귀족들을 흉내 내는 기득권 세력이 되고 말았다. '생리학'은 생물 유기체의 구성과 조직, 기능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18세기 말 유럽의 지성인들은 인간의 육체적인 구조나 생리적 변화가 인간의 감정이나 지성, 성격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점에서 인간의 정신까지 생리학의 연구 대상이 되었고, 1840년대에는 다양한 인간 유형을 제시하고 그 유형의 속성을 관찰하고 풍자하는 '생리학'이라는 장르가 프랑스 문학에서 유행하게 되었다. 19세기 프랑스의 풍자화가이자 희극 작가 앙리 모니에Henry Monnier가 부르주아를 파헤친 책 『부르주아 생리학』도 그러한 '생리학' 문학 중 하나이다.



『부르주아 생리학』의 한 대목과 그가 직접 그린 삽화

풍자랍시고 자신보다 약한 사람들의 약점을 가지고 조롱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앙리 모니에는 자신과 같은 계층인 부르주아를 풍자한다. 그 자신이 부르주아였기 때문에 부르주아 사회 안에서 그들의 생태를 관찰하고 그 속에 숨은 허영과 모순을 포착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예술가들)에게 부르주아라는 단어는... 하나의 욕지거리이다. ... 어떠한 신통찮은 화가라도 부르주아로 취급되기보다 차라리 가장 끔찍한 흉악범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 천 배는 낫다고 생각할 것이다.' 모니에는 이렇게 자기가 속한 계층을 멸시하는 시선도 유쾌하게 받아들이며 자녀 교육, 사업, 사교 생활, 가정 생활, 문화 생활, 은퇴 후의 생활까지 부르주아의 삶 구석구석의 단면들을 꺼내놓고 풍자한다. 책 속의 부르주아들이 자신들끼리, 다른 계층의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는 지금의 한국 독자들도 웃길 수 있을 정도로 신랄하고 코믹하다. 희극 작가로서의 장점을 이 풍자 에세이에서도 발휘했나 보다. 그가 직접 그린 삽화는 본문에서 그려지는 부르주아들의 캐리커처로 등장하며, 당시 부르주아들의 모습을 한결 더 생생하게 느껴지게 한다.

그런데 그가 보여주는 부르주아들의 모습은 낯설지 않다. '기분 나쁘게 듣지 않았으면 해요'라고 하고 나서는 꼭 상대방이 기분 나쁠 말을 하는 이상한 버릇부터 자신은 누구보다 선량하고 현명하고 안목이 높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 웃는 얼굴로 서로에게 비수를 날리는 독설가 기질에 자질구레한 허례허식에 집착하는 허영까지. 무슨 질문을 해도 자신의 집 주소만 대답하는 부르주아 소년의 모습에서는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을 말해줍니다."라는 아파트 광고 문구와, 초등학생들도 거주하는 집 형태를 두고 상대방을 놀리거나 따돌리는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런 행태가 왜 잘못된 것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보면, '과거의 부르주아들에게서 우리는 적어도 스스로를 풍자할 줄 아는 그 동력을 부러워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역자 서문의 마지막 문장에 동감하게 된다.

백수십 년 전을 살아갔던 사람의 풍자가 전혀 낡게 느껴지지 않았다는 것은 그의 풍자가 그만큼 생명력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풍자가 백 년이 넘은 지금에도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이니 슬픈 일이다. 세상이 아주 조금씩이라도 변해서 그의 풍자가 아주 먼 옛날의 먼지 쌓인 유산으로 느껴질 날이 왔으면 좋겠다.

P. S. 지금의 한국 독자도 배경 지식 없이 웃을 수 있을 만큼 모니에의 풍자는 이해하기 쉽고 유쾌하지만, 당시의 프랑스 사회와 정치 상황, 문화를 알아야 이해할 수 있는 부분들도 분명히 있다. 번역가가 서문(본문의 첫 문장을 패러디한 첫 문장에서 번역가의 유머 감각을 느낄 수 있다)과 각주로 수능 강사만큼이나 친절하고 자세하게 '부르주아'와 '생리학'이 어떤 것인지, '생리학'이라는 문학 장르가 생겨난 배경과 작품 속에서 드러나는 프랑스의 정치, 사회 상황을 설명해 작품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한 문장 한 문장을 맛깔나게 번역해 작가의 신랄하고 유쾌한 풍자를 더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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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의 세계
고정기 지음 / 페이퍼로드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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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지니어스>에서 콜린 퍼스가 연기한 주인공은 20세기 초 미국의 편집자 맥스웰 퍼킨스다그는 뉴욕의 유명 출판사 스크리브너스의 전설적인 편집자로스콧 피츠제럴드어니스트 헤밍웨이토머스 울프 등 미국 문학계의 쟁쟁한 작가들을 발굴하고 그들이 걸작을 써내는 데 큰 역할을 했다편집자의 세계는 그를 비롯한 15명의 미국 편집자들의 이야기를 모은 책이다이들의 활동 시기는 191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로, 20세기 전반의 미국 문화는 그들의 노력으로 찬란하게 빛나게 되었다위대한 개츠비분노의 포도』 등 문학사에 길이 남을 걸작들과 에스콰이어코스모폴리탄리더스 다이제스트』 등 미국인의 패션과 라이프 스타일문화를 선도했던 잡지들의 뒤에 그들이 있었다.


  20세기 전반에 활동했던 미국 편집자는 21세기를 살아가는 한국 독자에게 멀게 느껴질 수 있다하지만 편집자라는 직업의 큰 틀은 21세기가 된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덕분에 100여 년 전에서 수십 년 전에 활동했던 이들 미국 편집자들의 이야기를 통해서도편집자에 대해 잘 몰랐던 독자들은 편집자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 알게 된다편집자가 단순히 원고의 오탈자만 잡는 사람이 아니라 저자와 함께 책을 만들어가는 사람이라는 것을편집자는 원고를 읽으면서 그 원고가 작품성과 시장성을 얼마나 갖추었는지 판단하고 그 원고의 출판 여부를 결정한다편집자는 저자와 논의하면서 초고를 더 완성도 있게트렌드에 맞게 재구성하고 다듬어간다책의 제본 방식표지 디자인에도 관여하며 책 제작 전반을 지휘한다출판사 판매 회의에서 자신이 편집한 책의 판매 전망을 설명하고책이 출간된 이후에는 그 책이 벌어들인 수입과 그 책에 대한 서평들을 살펴보며 그 책의 성과를 점검한다다른 출판사들과의 경쟁에서도 살아남아야 한다이렇게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지만 속으로는 치열하고 분주한 편집자의 세계를 책 한 권으로 엿볼 수 있게 된다.


  편집자인 사람들은 지금 자신들이 하는 일과 고민을 백 년 전수십 년 전의 편집자들도 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깊이 공감할 것이다출판사에 들어오는 수많은 원고들 중에서 옥석을 가려내야 한다이 책을 출간할지 말지출간한다면 어떤 방향으로 만들어갈지어떻게 홍보할지를 놓고 저자동료상사와 끊임없이 의논하고 갈등도 겪는다유명 작가의 원고를 출판하기 위해 다른 출판사들과 경쟁하고 선인세인세 등 저자와의 돈 문제도 처리해야 하며 때로는 출판사의 처사에 불만스러워하는 저자의 항의를 받는다편집자의 세계는 그런 문제들을 척척 해결하고 만드는 책마다 베스트셀러로 만들어내는 왕도는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전설적인 편집자들이라고 해도 출판 트렌드를 따라가는 것독자가 원하는 것을 포착하는 것을 평생 동안 어려워했다편집하는 책들을 모두 베스트셀러로 만들지는 못했고 출판 시장에서 실패하기도 했다좋은 원고를 알아보지 못하고 놓치기도 했다윌리엄 포크너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는 작가로 성장하도록 든든하게 지원해 줬던 편집자 삭스 코민스도존 오하라라는 다른 작가와는 원고 수정 문제로 갈등을 겪다 아예 그와 함께 작업하지 않게 됐다그들은 그저 그러한 실패와 시행착오를 겪어도 계속 자기 일을 사랑하며 그 일에 열정을 쏟았을 뿐이다그들이 넘어설 수 없는 전설이 아니라자신처럼 늘 고민하고 노력했던 한 편집자였을 뿐이라는 것이 지금의 편집자들에게는 용기와 위안을 줄 것이다.


  편집자가 아닌 사람들에게는 편집자의 세계를 알게 하고편집자인 사람들에게는 수십 년 전 먼 나라의 선배들이 자신과 같은 고민을 하며 분투했다는 것을 알게 한다는 것이 이 책의 의의일 것이다그런데 2020년대에 나온 책이라기에는 좀 오래됐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문체도 그렇고지금의 외래어 표기법에 맞지 않거나 표기법이 일관되지 않은 고유 명사들이 자주 보인다. ‘처녀작’, ‘여류’ 등 최근의 성 중립적 단어를 사용하는 추세에는 맞지 않는 단어들도 자주 쓰이고, ‘여성 편집자들은 지나치게 감상적이고 원고에 너무 안이하게 공감한다남성 편집자만이 목적의식과 특수한 시장 감각을 가지고 평가할 수 있는 책들이 있다는 윌리엄 타그의 편견 어린 발언을 별다른 비판 없이 그대로 싣고 있다. 2001년에 이미 폐간된 잡지 마드무아젤이 지금도 계속 간행되고 있는 것처럼 서술되고휴 헤프너가 올해’ 32세가 되는 딸 크리스티 헤프너에게 플레이보이의 회장직을 물려줬다고 서술하고 있다크리스티 헤프너가 플레이보이의 회장이 된 것은 1984년의 일이고, 2009년에 이미 회장직에서 물러났다.


  이렇게 시대에 맞지 않는 모습이 보이는 이유가 있다이 책이 1986(인터넷 서점에서는 1991년에 출간된 것으로 나와 있지만 본문 뒤의 해설에서는 1986년 출간되었다고 하므로 후자를 따랐다)에 출간된 책을 재출간한 책이기 때문이다게다가 저자분은 이미 고인이 되었기 때문에 저자의 원고에 손을 대기 어려웠을 것이다하지만 오탈자나 비문(오탈자와 비문이 눈에 많이 띈다)최근의 외래어 표기법에 맞지 않는 표기는 바로잡고현재 변화한 상황은 주석이나 보충 설명 페이지로 보충했다면 이러한 단점이 보완됐을 것이다저자분이 인터넷도 없는 시절에 미국 대학 도서관의 자료까지 찾아가며 이 책을 완성했는데지금 어떻게 상황이 변화했는지 인터넷으로 찾아보고 덧붙이는 수고를 더했다면 2020년대에 읽기 더 좋은 책이 되지 않았을까이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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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 없는 판타지 - 페미니스트 시각으로 읽는 한국 현대문화사
오혜진 외 지음, 오혜진 기획 / 후마니타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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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 없는 판타지’. 이 제목만으로는 이 책이 어떤 책인지 감이 잘 잡히지 않는다. 그럼 부제를 보자. ‘페미니스트 시각으로 읽는 한국 현대문화사’. 이제야 어떤 책인지 알 것 같다. 그런데 ‘페미니스트 시각으로 읽는 한국 현대문화사’가 어떻게 ‘원본 없는 판타지’와 연결이 되는 걸까. 이 둘의 관계를 알려면 이 책에서 말하는 ‘원본’과 ‘판타지’의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

이 책의 저자 중 한 명이자 엮은이인 오혜진은 ‘판타지’, 즉 환상이 현실을 반영하며 현실로 인해 만들어지지만, 한편으로는 현실을 만들어내는 힘을 지닌 것으로 본다. 여성이 남성과 동등하게 교육을 받고 자신이 원하는 분야에서 일하는 것은 과거에는 환상이었겠지만 그 환상을 새로운 현실을 만들 동력으로 삼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해 온 사람들이 있었기에 지금은 현실이 되지 않았는가. 오혜진은 문학이든 미술이든 영화든, 그 어떤 것으로든 그런 환상을 만들고자 하는 모든 의지와 실천을 문화로 본다.

그런데 단순히 남자와 여자, 이성애자와 성소수자의 위치를 바꾸는 것으로 젠더 간의 모든 불평등과 차별을 사라지게 할 수 있을까? 남성 권력자의 시선으로 기록되었다는 이유로 지금의 역사를 모두 부정하고 그것과는 아예 무관한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내야 할까? 그것이 페미니스트로서 오랜 성차별과 억압을 이길 수 있는 새로운 판타지,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가는 최선의 방법인지, 오혜진은 의문을 제기한다. 남성 중심적, 이성애 중심적, 가부장적 질서 등 기존의 지배 질서와 전통을 ‘원본’으로 삼고 단순히 그것을 정반대로 뒤집는 것에도, 지금까지의 역사와 문화적 흐름에서 아예 벗어나 아무 맥락 없는 ‘원본’을 만드는 것도 진정한 해결책은 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단순히 기존의 지배 질서를 반대하는 것도 아니고 지금까지의 역사와 문화라는 맥락과 무관한 것도 아니지만, 지금까지 정상적인 것으로 규정되어 온 것들을 이탈하려는 시도들. 그것이 이 책에서 말하는 ‘원본 없는 판타지’, 현실과 무관하지 않고 현실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지만,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낼 힘을 품고 있는 판타지를 만들어내려는 시도일 것이다.

이 책에서 다루는 것은 그러한 시도들과 존재 자체로 그러한 시도였던 사람들, 그들이 만들어낸 사건들이다. 가수 이선희가 데뷔하던 1980년대에는 여성 가수가 긴 머리에 치마를 입고 화장을 하는 것이 정상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이선희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끊임없이 ‘왜 치마를 입지 않느냐’고 묻고 ‘여자답게’ 차려입을 것을 권해도 짧은 머리와 안경, 바지를 고수했다. 남성은 ‘남성답게’, 여성은 ‘여성답게’ 살아야 한다는 이분법적 사고가 만연한 사회에서 그저 ‘자기다움’을 지키면서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페미니즘적 실천일 것이다. 1980년대 당시에는 ‘보이시한’ 여성 가수의 옷차림이 성별 규범에 대한 저항이라기보다는 ‘남자를 모르는 건전한 소녀’로 비춰졌고,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중성적인 패션과 외모를 고수하는 여성 가수들에게 성별이나 성 정체성 논란이 일어날 정도로 우리 사회의 이분법적 성별 규범은 집요하지만. 한편 1980년대까지도 여성들은 책을 읽지 않거나, 가볍고 감상적인 책만 읽는다는 편견이 뿌리깊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여성들이 읽어 온 책들의 목록을 조사하면 남성들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사회과학 서적, 철학, 과학 이론서도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언론들이 ‘후진적인’ 독서라고 말했던 여성 수필, 로맨스 소설, 여성 잡지 읽기를 통해 여성들은 나름대로의 독서 문화를 형성했고 문학적 소양을 키웠다. 순문학 작품뿐만 아니라 당대의 여성지, TV 드라마까지 온갖 장르의 문화 예술을 섭렵했던 박완서는 문학적으로나 사상적으로나 성장하며 한국 현대 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가 될 수 있었다. 정상적이고 모범적인 여성은 이러이러해야 한다고 규정하거나 여성은 남성 같은 역량을 갖추고 문화를 창조해 낼 수 없을 거라고 한계를 짓는 사회의 억압 속에서도 이런 실천과 시도는 계속되어 왔다.

이런 시도는 기존의 문화사의 언어나 방법론으로는 포착되거나 해석되기 어렵기에이 책의 저자들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자료를 수집하고 그것을 재구성하고 해석한다이 책의 대표 저자이자 엮은이인 오혜진은 스스로 이 책이 정연한 문화사라기보다는 문화사의 언어와 규범으로 쉽게 포착해석되지 않는 존재사건실천들의 흔적이 보관된 작은 서랍장에 가깝다고 말한다그 말대로 이 책에 실린 14편의 글은 소재도 스타일도 글의 난이도도 제각각이다하지만 그 14편의 글 전체를 관통하는 공통점이었다기존의 남성이성애 중심적가부장적 역사가 들여다보지 않은 곳을 들여다보고보이지 않는 곳에서 치열하게 시도하고 실천했던 사람들을 조명하며 그들의 존재를 지우는 기존의 질서를 비판한다는 것그럼으로써 저자들은 페미니스트의 관점으로 문화사를 보는 것을 넘어서 페미니스트가 되는 것을 실천하고 있다독자들은 이들이 서랍장에 모아놓은 이야기들을 보며 기존의 역사문화사에서 걸러졌던 존재들실천들사건들을 발견하고 그들에게서 새로운 판타지새로운 문화문화사의 가능성을 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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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이어 말한다 - 잃어버린 말을 되찾고 새로운 물결을 만드는 글쓰기, 말하기, 연대하기
이길보라 지음 / 동아시아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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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다(CODA, Children of Deaf Adults, 청각장애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자녀)’라는 단어 자체를 올해 개봉한 영화 <코다>를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이 영화는 프랑스 영화 <미라클 벨리에>(2014)를 할리우드에서 리메이크한 것인데, 청각장애인 가족들을 돌봐야 한다는 의무감과 꿈을 좇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갈등하는 코다 소녀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이 책의 저자 이길보라 감독도 코다이다. 저자는 청각장애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비장애인 자녀로서 장애인이 경험하는 세계와 비장애인이 경험하는 세계의 사이에서 살아왔다. 하지만 저자는 이 책에서 장애라는 주제만 이야기하지 않는다. 한 사람의 성별, 젠더, 성정체성, 장애 유무, 인종, 민족, 계급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서로 연관되며 그 사람의 삶과 경험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한 가지 정체성만으로 그 사람의 삶과 그 사람만의 고유한 세계를 다 이야기할 수는 없다. 저자는 코다이면서 여성으로서, 지금 우리 사회를 살아가는 30대 청년으로서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고, 그 경험을 토대로 질문을 던지고 목소리를 낸다.

나와 다른 정체성을 지니고 그로 인해 다른 경험을 쌓아온 사람을 통해 내가 몰랐던 세계를 알게 된다. 비장애인 가족들과 살아온 비장애인인 나는 코다인 저자의 이야기를 통해 청각장애인의 세계를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을 ‘청인(聽人)’이라고 하고 소리를 듣지 못하는 대신 자신들만의 고유한 언어(수어)와 문화(농(聾)문화)를 지닌 사람을 ‘농인(聾人)’이라고 한다(저자는 이렇게 ‘농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스스로 인식하는 사람들을 ‘청각장애인’ 대신 ‘농인’으로 지칭한다. 이런 용어 사용에서부터 그들을 ‘장애’를 가진 결핍된 존재로 정의하지 않으려는 저자의 의도가 보인다). 청인들은 모든 농인들이 간절히 소리를 듣고 싶어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저자의 농인 부모는 이런 고정관념을 깬다. 그들은 아름다운 음악 소리, 새 소리, 물소리가 궁금하긴 하지만 자신이 농인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다시 태어나도 농인으로 태어날 것이라고 말한다. 오만하게도 나도 청인으로서 농인들이 소리를 듣고 싶어 하지 않을 수 있고, 그들만의 문화를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내 머릿속의 편견 하나가 깨지는 순간이었다.

TV 뉴스나 정부의 코로나 관련 정책 브리핑에 수어 통역사가 나올 때는 그저 ‘청각장애인들에게도 보도 내용이 잘 전달되겠거니’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수어 통역사가 나오는 삽입 화면이 너무 작거나, 수어 통역의 질이 좋지 못해 정작 농인들은 뉴스 내용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을 이 책을 읽고 처음 알았다. 수어에서는 손동작뿐만 아니라 얼굴 표정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에 손동작과 얼굴 표정이 모두 잘 보이도록 해야 하는데, 뉴스에 삽입되는 수어 통역 화면은 그 둘을 알아보기에 너무 작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사용되는 수어에는 음성 언어의 문법과 어순을 그대로 따르는 ‘수지한국어’와 농인들만의 문법으로 구성된 ‘한국수어’가 있는데(예를 들어 ‘짧게 수어 얼굴 표정 사용 좋아’라는 한국수어는 음성 언어로 옮기면 ‘수어와 얼굴 표정을 사용하면 짧게 말할 수 있어 좋아’라는 뜻이다.) 수어를 늦게 배웠거나 평소에 음성 언어로 말하는 농인들에게는 수지한국어가 내용 전달에 유리하지만 그렇지 않은 농인들은 수지한국어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 지금 진행되고 있는 뉴스 보도의 수어 통역에서는 둘 중 어느 것을 사용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없다. 게다가 수어를 모르는 사람은 알아채지 못하지만 수어를 아는 저자의 눈에는 수어 통역의 질이 들쭉날쭉한 것이 보인다. 저자는 청인들이 ‘장애인을 배려하는 우리 자신’의 모습에 도취되어 수어 통역을 농인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가 아니라 청인이 베푸는 ‘혜택’으로 생각하고, 정작 그들에게 필요하고 마땅히 누려야 할, 국민으로서의 알 권리는 외면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저자의 이런 문제 제기를 통해 세상에는 내가 당연히 누리고 있기에 그것을 누릴 수 없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조차 알지 못하는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와 다른 정체성을 지닌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내가 몰랐던 다른 세계를 알게 된다면, 나와 같은 정체성을 지닌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서는 내 정체성으로 인해 직면하는 문제에 함께 공감하고 더 깊이 생각해 보게 된다. 이 책에서 저자가 자신의 경험과 그에 관련된 사회 문제를 이야기하는 주요 키워드 중 하나는 페미니즘인데, 같은 여성으로서 깊이 공감할 수 있는 주제이다. 저자가 성인이 되기도 전부터 겪은 성추행과 성희롱은 나도 오래전부터 겪어온 것이다. 저자는 딸이라는 이유로 할머니가 지우라고 한 아이였다는데, 내 할머니는 지우라고까지 하지는 않았지만 내가 딸이라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낙태를 해본 경험도 없고 처음에는 낙태를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원하지 않는 임신을 했을지도 몰라 두려워하다 임신이 아닌 것을 알고 안도하는 친구를 보면서 낙태를 반대했던 신념을 버리게 되었다. 나는 저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나의 경험을 저자의 경험과 겹쳐 보고 저자에게 공감한다. 누군가가 저자에게 “임신중지나 몰카, 페미니즘 말고 가벼운 글을 쓰면 좋겠다.”고 했다지만, 계속해서 말하고 쓰고 투쟁하겠다는 저자의 결심을 응원하고 동참하려 한다.

저자가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주제 중 마음 깊이 공감한 또 한 가지는 청년들의 불안정한 삶이었다. 버지니아 울프는 여성이 글을 쓰기 위해서는 돈과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청년들은 자기 집을 마련하기는커녕 고시원과 고시원만큼이나 좁은 집을 전전하며 소득의 상당 부분을 월세로 써야 한다. 청년을 위한 공공주택들이 지어지고 있지만, 저자는 공공주택의 입주자 자격을 얻기 위해 가난을 증명하고 경쟁해야 하는 현실에 분노한다. 자기 몸 하나 뉠 집이 없어 불안한데, 자기 몸은 자기가 책임져야 한다. 한국에서는 개인이 보험설계사와 논의하면서 보험을 직접 설계하는데, 네덜란드에서는 국가에서 의료 시스템의 품질을 책임지고 개인의 소득에 따라 보험 보조금을 지급한다고 한다. 네덜란드에서 의사로 일하고 있는 저자의 친구는 “왜 개인이 보험을 들고 그 세부 내용을 선택해야 하느냐. 그건 국가와 사회가 보장해야 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저축과 연금만으로는 노후를 대비하기 어려운 세상이기에 시세 차익으로 돈을 버는 투자가 열풍을 일으키고 있지만, 그러면서 집값과 전세 가격은 올라가고, 실제로 살기 위해 집을 사려는 사람, 전세 집을 구하려는 사람의 형편은 더 어려워진다. 또한 저자는 부동산과 주식 투자에 대한 정보에 접근할 수 없거나 투자를 할 종잣돈조차 없는 사람들이 이러한 투자 열풍 속에서 소외될 것을 우려한다. 모두 국가가 개인이 기본적인 삶의 조건을 안정적으로 누리고 살 수 있도록 보호해 주지 못하기에 생겨난 풍경들이다. 이러한 현실에 저자는 질문을 던진다. 안정적으로 창작 활동을 할 수 있는 자기만의 방과 기본 소득은 어떻게 가능할까? 내 몸은 국가와 사회가 지켜주어야 하지 않을까? 주식을 하지 않고 살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정치권력이 없는 평범한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이렇게 질문을 던지는 것, 작게나마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헌법에서 보장한 기본권 보장에 어긋나는 법안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국민 청원을 올리는 것, 성범죄에 부당한 판결을 내린 판사의 대법관 후보 자격을 박탈하라는 국민 청원에 동의하는 것, 성 평등을 위한 법안을 추진하는 국회의원에게 응원 문자를 보내는 것, 블로그나 다른 SNS를 통해서 성 불평등과 성범죄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글로 적는 것. ‘나보다 앞서 간 사람들이 해온 말과 행동 위에 내가 있고, 내가 하는 말과 행동 위에 나보다 나중에 오는 이가 서게 될 것이기에’, 저자는 먼저 용기 있게 말했던 사람, 당신을 이어 말한다고 선언한다. 나는 이 서평을 씀으로써 짧게나마 저자를 이어 말한다. 누군가가 이 책을 읽거나 이 서평을 읽고 이어 말하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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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현 외 지음 / 휴머니스트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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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에 청소년을 위한이라는 말이 들어간 책을 읽기에는 쑥스러운 나이가 되었지만, 청소년 책들을 살펴보면 어른이 읽어도 좋은 책들이 보인다. ‘이런 책이 내가 청소년일 때 나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하고 한탄이 나올 정도다. 잠깐! 이게 다 인권 문제라고요?도 그런 책이다. 청소년의 눈높이에 맞춰 집필되고 편집되었지만, 어른들에게도 생각할 거리를 남겨주는 책. 인권 문제에 나름대로 관심이 많다고 생각했는데도 살아가면서 지나쳤던 인권 관련 이슈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첫 챕터인 청소년 인권 문제부터 내가 평소에 의식하지 않고 있는 부분이었다. 이 챕터를 읽으면서 내가 청소년 시절에 겪어온 것들이 인권 침해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야간 자율학습이라고 했지만 예체능계가 아니면 무조건 밤 열 시까지 학교에 남아 공부를 해야 했고, 점심시간에도 자율 학습을 해야 했다. 성인 노동자에게는 식사 시간을 포함한 휴식 시간을 보장해야 한다고 법으로 정해져 있는데, 미성년자인 학생은 휴식할 권리도 없단 말인가. ‘생활 지도라는 명목으로 교사가 학생에게 감정을 실어 체벌을 할 때가 많았고, 수업 시간에 학생에게 네 가슴 사이즈는 A컵쯤 되겠네하고 성희롱을 하는 교사도 있었다. 이렇게 자기 권리가 침해되는데도 좋은 대학에 가야 한다는 이유로 교사의 통제를 따르며 입시 준비에 전념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학교 풍경을 바꾸기 위해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되었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학생 인권조례에는 나와 내 또래 사람들이 학창 시절에 겪었던 인권 침해들을 방지할 수 있는 조항들이 있었다. 학생의 쉴 권리와 모든 종류의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 이렇게 다른 사람에게 침해당하지 않을 권리뿐만 아니라,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표현하고 개성을 추구할 권리도 보장하고 있었다. 저자는 학생인권조례를 제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학생들 스스로가 문제 제기를 하고 자신의 권리와 평등을 위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대화의 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 부분을 읽으면서 나도 청소년이었던 사람이고 지금의 청소년들이 겪었던 억압과 인권 침해를 경험했으면서 그 모든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청소년 자신이 자신의 인권을 놓고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것도 생각지 못한 부분이었다. 그저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되면 청소년들의 인권이 좀 더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을 뿐. 청소년들을 학생인권조례의 시혜 대상으로만 생각했을 뿐 그들을 그들 자신의 인권을 스스로 지키는 주체로 생각하지 못했다.


  지금 내가 겪고 있지 않은 인권 문제에 무심했을 뿐 아니라 나 자신이 다른 사람의 인권을 침해하기도 했다는 것도 깨달았다. 인터넷을 하다 좋아하는 연예인의 고등학교 동창이라는 사람이 그 연예인의 고등학교 졸업 사진을 올린 것을 우연히 발견했다. 같은 팬들이 보면 좋아하겠다 싶어 그 졸업 사진을 팬 사이트에 올리고 고등학교 때는 이랬네하고 웃고 떠들었다. 내 행동은 명백히 그 연예인의 초상권과 사생활을 침해하는 행동이었다. 이 책에서는 너무 많은 사람이 사생활을 침해하면 그 행위가 대수롭지 않게 여겨진다고 지적했는데, 내가 바로 그런 경우였다. 인터넷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정보가 올라와 있기 때문에 누구나 검색해서 볼 수 있는 것누구나 마음대로 사용해도 되는 것이라고 착각한다는데, 나도 그런 착각에 빠져 있었다. 인권 문제에 관심이 많고 다른 사람의 인권을 침해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얼마나 안일하고 오만한 생각이었는지. 나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내가 무심히 지나쳤던 인권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을 뿐 아니라, 인권 관련 이슈에 대해 대답하기 난감했던 질문에 어떻게 답할지 힌트도 얻게 되었다. 우선 남자만 군대에 가는 것은 역차별이 아니냐는 질문. 이 책에서는 남자만 군대에 가는 것이 역차별이 아닌 이유를 조목조목 밝힌다. 역차별은 부당한 차별을 받는 쪽을 보호하기 위해 마련한 제도나 장치가 너무 강해 오히려 반대편이 차별을 받음을 뜻한다. 그렇다면 남성만 군인으로 징집하는 제도가 여성을 보호하고 우대하기 위한 것일까? 이 책은 국방부에서는 남성만 징집하는 것이 여성을 위한 것이 아니라, 특정 연령대의 남성만으로도 필요한 군인 수를 채울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또한 국방의 의무에는 병역뿐만 아니라 군 작전에 협조하거나 전시 근로 동원에 응하는 의무도 있기에 군대를 가지 않는다고 해서 국방의 의무를 지키지 않는 건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헌법재판소에서는 여러 차례 병역 부과 대상을 남성으로 한정한 병역법이 합헌이라고 판결했고, 징병제가 있는 70여 개 국가들 중에 여성에게 병역 의무를 부과하는 국가는 극히 일부이며 남성 중심의 현 군 조직에서 여성에게 병역 의무를 부과했을 때 상명하복과 권력관계를 이용한 성희롱 등의 범죄가 일어날 우려가 있다고, 남성의 병역 의무는 역차별, 평등권 침해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물론 여성이든 남성이든 모든 국민이 군 복무를 하는 것으로 병역법이 바뀔 수 있지만 그 전에 여성이 평등하고 안전하게 군 복무를 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추어져야 한다고 이 책은 이야기한다. 남성만 징집하는 한국 병역법이 역차별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이야기할 근거를 정확히 알지 못했는데, 이렇게 근거를 조목조목 설명해 주니 막혔던 가슴이 트이는 것 같았다.


  또 한 가지 나를 난감하게 만드는 질문은 혐오 표현도 표현이니 표현의 자유를 인정해야 되지 않느냐는 것.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에 반대하는 이들 중에서는 교회에서 동성애를 반대하는 설교를 해도 처벌받는 것이 아니냐며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 책에서는 동성애가 싫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자체로 자신이 이성애자임을 과시하는 효과가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동성애가 싫다는 말은 이성애자로서 차별당하지 않는 안전한 위치에 있으면서 동성애자라는 소수자는 불안에 떨게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리고 혐오 표현은 특정한 조건을 지닌 사람들을 무시하고 비하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런 표현을 계속 쓰다 보면 그 말에 담긴 증오에 물들어, 그 대상을 진심으로 증오하게 되고 폭력도 서슴없이 가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혐오 표현에 대해서는 표현의 자유를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근거를 들어도 이해가 안 된다면 역지사지를 하게 하면 된다. 외국에 나갔을 때 동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백인 우월주의자에게 코로나 바이러스를 옮기는 동양인은 싫어라는 소리를 듣는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어떤 논리적 근거를 들어도 이해하지 못한다면 역지사지의 태도를 취하게 하는 것도 방법이다.


  이 책을 읽고 나서 한 신문 기사를 보고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 시내 지하철역 엘리베이터 설치 예산이 삭감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장애인들이 이동권을 보장해 달라며 시위를 했는데, 시민들은 그들을 조롱하고 경찰이 그들을 끌어내자 환호했다는 것이다. 더 슬프고 답답했던 것은 그 기사에서조차 장애인들을 조롱한 시민들을 비판하기는커녕, ‘자기 권리를 찾겠다고 다른 사람의 이동까지 방해해서야 되겠냐며 장애인들을 비난하는 댓글들이 달린 것이었다. 청소년들이 지금 당장 내가 불편하더라도 다른 사람의 인권을 생각하는 어른이 되기 위해서, 그리고 사는 게 벅차다며 다른 사람의 인권까지 챙기기는 힘들다는 어른이 조금씩이라도 마음을 바꾸기 위해 이런 책이 필요하다. 나와 다른 조건, 사회적 위치 때문에 인권 문제를 겪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외면한다면, 우리의 인권을 위해 목소리를 내야 할 때 우리의 목소리를 들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런 것도 인권 문제였구나하고 다시 한 번 돌아보고 그런 문제를 겪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데 이 책이 좋은 출발점이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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