팡쓰치의 첫사랑 낙원
린이한 지음, 허유영 옮김 / 비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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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의 '첫사랑'과 '낙원'이라는 단어, 살구빛 표지만 보면 풋풋한 첫사랑을 그린 소설 같다. 하지만 이 책에서 말하는 '첫사랑'과 '낙원'은 지독한 반어법이다. 이 소설은 첫사랑뿐 아니라 앞으로 할 수 있었던 모든 사랑을 빼앗겨 버린 이야기이다. 낙원이 아니라 낙원을 빼앗긴 이야기다. 무엇보다 성폭력을 겪었던 작가의 마지막 기록이다. 작가는 자신이 겪은 성폭력을 바탕으로 한 이 소설을 출간한 뒤 2개월 뒤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바로 작년(2017년) 4월에 일어난 일이었고, 그때 작가의 나이는 우리 나이로 스물일곱 살이었다. 


 주인공 팡쓰치와 류이팅은 어린 시절부터 단짝친구였다. 섬세한 문학적 감수성과 총명한 머리, 뛰어난 글재주라는 공통점 덕분에 둘은 더 깊이 교감할 수 있었다. 두 아이가 열세 살이었을 때, 쉰 살인 문학 선생 리궈화가 작문 과외를 해 주겠다며 접근했다. 두 아이의 부모는 아무 의심 없이 리궈화에게 아이들을 맡겼다. 리궈화는 평범한 외모인 이팅에게는 작문 수업만 했다. 그러나 예쁜 외모를 지닌 쓰치는 5년 동안 리궈화에게 지속적으로 성폭행당했다. 쓰치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였다. "나도 선생님을 사랑해야 한다. 안 그러면 내가 너무 고통스러우니까." 


 가족에게도, 단짝친구인 이팅에게도, 어린 시절부터 의지했던 이웃사촌 이원 언니에게도 사실을 털어놓지 못했던 쓰치는 5년이나 지나서야 이팅에게 사실을 털어놓는다. 하지만 리궈화를 존경하며 따랐고, 리궈화가 쓰치만 편애하는 것을 질투했던 이팅은 쓰치가 리궈화와 불륜 관계를 맺었다고 오해하고 "역겹다"는 말까지 한다.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한 쓰치는 결국 미쳐버려서 요양원으로 보내진다. 뒤늦게 쓰치의 일기장을 보고 진실을 알게 된 이팅. 그리고 남편에게 가정폭력을 당하고 있어 쓰치를 돌아볼 여력도 없었던 이원 언니. 둘은 분노하지만 근거가 불충분하다는 이유로 리궈화를 처벌할 수도 없다. 쓰치의 삶도 다른 사람들의 삶도 그저 조용히 흘러간다. 


 참혹한 이야기이지만 문장은 유려하고, 감수성은 섬세하다. 5년 동안 위태롭게 하루하루를 버텨온 쓰치의 심리도, 어린 여자아이들에 대한 성적 욕망에 푹 빠져 있으면서도 자기합리화를 하는 리궈화의 심리도 세밀하게 포착한다. 하지만 쓰치를 성적으로 대상화하거나 리궈화의 욕망을 미화하지 않는다. 쓰치는 온갖 지식과 미사여구를 늘어놓는 리궈화가 얼마나 얄팍하고 더러운 인간인지를 간파할 만큼 총명하다. 쓰치는 리궈화에게 짓밟히면서도 그의 위선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러나 쓰치의 문학적 재능과 지식은 그녀를 지켜주지 못했다. 대만 작가 장이쉬안이 서평에서 말했듯이. "쓰치에게는 폭력에 저항하는 문명이 있었지만 문명은 야만을 당해내지 못했다."(p. 351.) 고상한 척 하던 리궈화가 자신을 비난하는 이팅을 "곰보 얼굴의 미친 암캐년"이라고 부르면서 폭행하는 장면과, 자신을 고발한 또 다른 피해자 궈샤오치에게 무참하게 폭행당한 쓰치의 사진을 보내며 협박하는 장면은 문명의 탈을 뒤집어쓴 야만의 추악함을 보여준다.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원은 이팅에게 이렇게 말한다. 


선택할 수 있어. 이 세상에 소녀를 강간하며 즐거워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모르는 척 살 수 있어. 강간당한 소녀가 있다는 걸 모르는 척 살 수 있어. ... 이 세상에 마카롱과 핸드드립 커피, 수입산 문구만 있는 척 살 수 있어. 하지만 넌 쓰치가 경험했던 모든 고통을 겪고, 스치가 그 고통에 저항하기 위해 쥐어짜낸 모든 노력을 따라할 수도 있어. ... 넌 쓰치의 생각, 감정, 느낌, 기억, 환상, 사랑, 미움, 공포, 방황, 불안, 따뜻한 정, 욕망을 모두 경험하고 기억해야 해. 쓰치의 고통을 단단히 끌어안으면 쓰치가 될 수 있어. 그런 다음에 쓰치를 대신해서 쓰치의 몫까지 사는 거야.


인내는 미덕이 아니야. 인내를 미덕으로 규정하는 건 위선으로 가득 찬 이 세상이 비틀어진 질서를 유지하는 방식이야. 분노를 표출하는 것이 미덕이야. 이팅, 분노를 표출하는 책을 써.


이 책을 읽기 괴로울 때마다 책장을 덮고 내가 좋아하는 가수가 노래하는 영상을 봤다. 그의 해맑은 목소리를 듣고 웃으며 노래하는 표정을 보고 있으면 세상에 나쁜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 이원의 표현처럼 '마카롱과 핸드드립 커피, 수입산 문구만 있는'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나 또한 기억하고 분노하려고 한다. 

 슬프게도 이 소설은 이런 이원과 이팅의 다짐이 아닌, 가해자들과 이웃들이 나누는 무심한 대화로 끝난다. 쓰치에게 아무 일도 없었던 양. 지극히 평범해서 더 잔인하다. 작가는 하루에 여덟 시간씩 집필에 매달려 이 소설을 완성했고,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했다. 그는 이 소설 속 '마오마오' 같은 사람이었을 것이다. 남편에게 폭행당하는 이원을 곁에서 지켜주다 그녀를 사랑하게 되고, 결국 이혼한 이원과 맺어지는 남자 마오마오. 그는 이 소설에서 유일하게 누군가를 순수하게 사랑하는 남자고, 사회학자 차이이원의 표현대로 "너무 아름다워서 현실감을 느낄 수 없는 존재"다. 그러나 이원이 쓰치에 대한 기억 때문에 마오마오와 행복해질 수 없다고 말했듯이, 작가도 사랑하는 사람을 남겨두고 목숨을 끊었다. 쓰치가 말했듯이 세상에는 아물 수 없는 고통이 있다. 

 그래도 우리가 앞으로 이어갈 이야기의 결말이 절망이 아니기를 바란다. 나는 아물 수 없는 고통을 안고 사는 사람의 곁을 지키고, 아물 수 없는 고통을 겪는 사람이 더 이상 없도록 더 예민하게 귀를 기울이고 싶다. "산삼보다 고3"이라는 말을 미성년자에 대한 성적인 농담으로 사용하는 사람도 있고, 여고생과 연애하는 것도 좋지, 라고 농담을 섞어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자기 나이의 절반밖에 되지 않거나 그보다 더 어린 아이들인데. 이런 이야기들이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 나는 계속 기억하고 분노하고 기록할 것이다. 누구보다 용기 있게 고통을 직시하고 기록했던 작가를 위해서, 그리고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고 지나쳐 버렸을 쓰치들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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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남 오빠에게 - 페미니즘 소설 다산책방 테마소설
조남주 외 지음 / 다산책방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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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저씨께


오랜만에 편지를 쓰네요. 시골에서 농사는 잘 되고 있나요? 저는 제가 읽은 책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요. 이제 막 읽은 책은 『현남 오빠에게』라는 페미니즘에 대한 소설이에요. 요즘 페미니즘에 대해 논란이 너무 많고 저는 아는 게 정말 없어서 뭐라고 말하기 무서웠어요. 하지만 아저씨께는 뭐든 편하게 얘기할 수 있으니 책 얘기를 좀 해볼게요. 


  『현남 오빠에게』는 단편소설집인데, 그 중에서도 이 책이랑 제목이 같은 단편소설은 주인공이 전 남자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예요. 주인공은 남자친구와의 연애가 어땠는지 되돌아봐요. 처음에 주인공은 남자친구가 모든 걸 챙겨주는 게 편했어요. 하지만 남자친구는 주인공이 듣는 수업도, 만나는 친구들도, 진로까지도 간섭하고 자기가 결정하려고 들었어요. 주인공이 남자친구에게 싫다고 충분히 말할 수 있었는데 이제 와서 남자친구 탓만 할 수 있냐, 그런 남자를 10년이나 만난 게 잘못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하지만 저는 주인공이 가스라이팅을 당해 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가스라이팅'이 무슨 말인지 아세요? '가스등'이라는 연극에서 유래한 말인데 그 연극 내용은 이렇대요. 남편이 아내를 미친 사람으로 몰려고 일부러 가스등을 어둡게 해 놓고, 부인이 '이거 좀 어둡지 않아?'하면 계속 그렇지 않다고 대답해요. 이런 일이 계속되자 아내는 자기 자신의 판단력을 믿지 못하게 되죠. 이렇게 상황을 조작해서 상대방이 스스로를 의심하고 판단력을 잃게 만든 다음, 상대방을 자기 뜻대로 움직이게 하는 게 가스라이팅이래요. 소설에서 남자친구는 끊임없이 주인공이 자기 판단력을 의심하게 만들어요. 처음 만났을 때 오빠가 이랬다, 고 하면 아냐, 그러지 않았어. 네가 잘못 기억하고 있는 거야. 이런 식으로요. 그렇게 사소한 것에서도 자기 의견이 부인되는 상황이 계속 반복되다 보니, 이제는 취업, 결혼, 출산 같은 중요한 문제를 남자친구가 좌지우지하려고 들어도 자기 의견을 말하기 어려워진 거예요. 그렇게 자기 자신을 묶어버리게 되는 것도 무서운 일인 것 같아요. 


그런데 슬픈 건 10년이 아니라 평생 동안 자기 생각이 아니라 남의 생각에 묶여 있는 사람도 많다는 거예요. 「당신의 평화」라는 소설에서 주인공의 어머니는 평생동안 남편과 시어머니의 뒷바라지만 하면서 살아왔어요. 그러면서 예비 며느리가 집안 행사에 오자 집안일을 시키려고 하고, 예비 며느리가 자기를 시어머니 대우해 주지 않는다고 하소연해요. 예비 며느리가 집을 장만해 왔는데도 예단을 준비 안 했으니 자기를 무시하는 거라고 하고, 유학을 갔다 왔으니 문란했을 거라고 해요. 어머니 본인이 여자인데도 여자를 억압하는 말과 행동을 계속하고 있어요. 아주 오래 전부터 이어져 왔던 가부장적인 생각과 행동에 희생돼 왔으면서도, 그게 너무나 당연한 거라고 생각이 굳어져 버린 거죠.


이 단편소설의 작가는 작가 후기에서 이렇게 말해요.

 

"여성주의가 남녀의 불필요한 갈등을 유발하고 사랑을 반대하는 이데올로기라는 생각은 틀렸다. 나는 여성주의야말로 사랑을 향한 투쟁이며, 사랑을 죽이는 가부장제의 해독제라고 생각한다. 한쪽의 일방적인 굴종을 요구하고 오만 가지 방법으로 인간 존엄성을 훼손시키는 방식으로는 어떤 인간도 해방될 수 없다. 다른 인간에게 굴종을 요구하는 인간마저도 말이다. 며느리라는 이유로, 엄마라는 이유로, 딸이라는 이유로 받아 마땅한 고통은 없다.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괴롭힘 당할 이유 같은 건 없다.

 

서로에게 자유를 부여함으로써 스스로 해방될 수 있는 사랑, 그런 사랑이 가능한 세상을 꿈꾼다. 흘릴 필요가 없는 눈물을 흘리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꿈꾼다."

 

아저씨, 저도 어느 한 쪽이 자기 성별 때문에 일방적으로 굴종해야 하고, 자기 존엄성이나 목숨을 위협받고 자기 생각이 틀린 건 아닌지 끊임없이 의심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어느 한 쪽이 계속 참고 견디면서 유지되는 평화는 가짜 평화라고 생각해요. 고등학생 때 저를 가르치셨던 전도사님이 평화는 단순히 싸움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고 하셨어요. 겉으로 보기엔 싸움이 없더라도, 어느 한 쪽만 행복하고 다른 한 쪽은 그렇지 못하다면 갈등이 일어날 여지는 항상 있는 거라구요. 제가 생각하는 페미니즘은, 성별 때문에 다른 사람의 존엄성과 자유를 억압하는 것들에서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거예요. 누군가의 희생과 인내를 강요하지 않고 서로를 존중하고 돕고 사랑하는 거죠. 서로 혐오하는 게 아니라요.


  사실 이 책에 실린 모든 단편이 만족스러웠던 건 아니에요. 하지만 이렇게 생각하고 말할 거리를 준다는 것 자체가 의미 있다고 생각해요. 발문에서 얘기하는 것처럼 이런 글들이 쌓이고 다져지면 새로운 땅이 만들어지겠죠. 모두가 누군가에게 종속되지 않고 자기 목소리와 자기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땅이요. 이 책이 그 땅을 향한 발걸음이라고 생각해요.


앞으로도 열심히 읽고 제 생각을 얘기할게요. 늘 얘기 들어주셔서 감사해요. 다음에 뵐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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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1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홍대화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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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부터 10년도 넘게 『죄와 벌』을 읽어야지, 라고 마음만 먹다 드디어 죄와 벌을 읽었다. 막상 읽어보니 내가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무거운 책이라는 선입견은 깨졌다. 올해 상반기 내내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 푹 빠져 있었는데, 죄와 벌을 읽으면서 톨스토이와는 다른, 도스토예프스키의 더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은 듯한 매력을 느낄 수 있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은 아직 이 책 하나만 읽었지만. 


작가 최악의 조합 중 일부. 도스토예프스키의 장광설이 그 중 한 요소로 끼어 있을 만큼 도스토예프스키 특유의 장광설은 대단하다. 출처: 디시인사이드 도서 갤러리


이 책을 읽기 전 작가들의 단점들을 모아 놓은 '작가 최악의 조합' 이라는 사진을 본 적이 있는데, '도스토예프스키의 장광설'이 그 중에 끼어있었다. 읽으면서 그럴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뿐만 아니라 그에게 맞서는 조사관 포르피리, 그를 유혹하는 스비드리가일로프, 친구 라주미힌, 심지어 단역에 가까운 인물인 레베자트니코프까지 각자 장광설을 늘어놓고 있었다. 이야기 전개 위주로 소설을 읽는 편이라, 처음에는 엄청난 양의 장광설에 숨이 막혔다. 하지만 읽으면서 각자의 생각과 개성이 생생히 드러나는 장광설에 빠져들게 되었다.

장광설 중에서도 압도적으로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의 생각과 심리 묘사이다. 거기에 이 책을 관통하는 질문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자기 신념을 위해서라면 어떤 행동을 해도 정당화될 수 있을까? 

소설 초반에 라스콜리니코프는 우연히 술집에서 한 대학생과 장교의 대화를 듣는다. 대학생은 이런 질문을 던진다. "모든 사람에게 해만 끼치고, 얼마 있지 않으면 저절로 죽을 노파와 그 노파의 돈으로 할 수 있는 수백, 수천 가지의 선한 일들이 있다. 노파를 죽이고 노파에게서 빼앗은 돈으로 선한 일들을 한다면, 그 선한 일들로 노파를 죽인 죄가 보상될 수 있지 않을까?"


2002년 BBC 드라마 버전 속 라스콜리니코프(존 심)의 모습. 그는 고리대금업자 노파와 그녀의 여동생을 살해하고 나서 작품 내내 죄의식을 느끼다, 자기 합리화하기를 되풀이하면서 괴로워한다.


또 라스콜리니코프는 예전에 썼던 논문에서 사람들은 비범한 사람과 평범한 사람의 두 가지 부류로 나뉜다고 주장했다. 그 논문에서 그는 그저 인류의 존속을 위해 태어나고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과 달리, 비범한 사람은 자기 신념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어떤 장애든 제거할 수 있다고 말한다. 즉, 나폴레옹이 그랬던 것처럼 자기 신념을 실행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의 피를 흘리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선과 악이 아닌 자신의 양심에 의거해서. 그는 자신이 그런 비범한 사람인지를 확인하고 싶어서 노파를 죽인다. 하지만 그는 노파를 죽인 것에 대한 죄의식으로 작품 내내 괴로워하면서,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는 죄의식과 자기합리화 사이에서 갈등하며,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는 친구와 가족들로부터도 스스로 멀어져간다. 그리고 자신을 의심하는 경찰 조사관 포르피리에게는 자신이 범인이라는 것을 암시하면서 도발한다. (얼마나 대놓고 자신이 범인이라는 것을 보여주는지 그를 철석같이 믿는 친구 라주미힌이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다.) 그러면서도 주변 사람들에게 살인을 들킨 것은 아닐까, 신경을 곤두세우는 모순적인 모습을 보이면서 서서히 피폐해져 간다. 그가 이렇게 괴로워한 기간이 불과 2주일이라는 게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피폐해져 가는 그의 심리는 거의 800여 페이지에 걸쳐 세밀하게 묘사된다. 읽는 사람까지 라스콜리니코프의 좁고 어두컴컴한 하숙방에 갇혀 함께 미쳐가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BBC 2002년 드라마 버전에서 라스콜리니코프에게 회개하고 자수할 것을 권하는 소냐(라라 벨몬트).


결국 그는 죄의식으로 인한 괴로움과 자수하라는 소냐의 설득으로 인해 자수하게 된다. 그리고 그가 시베리아에 유형을 간 뒤, 그곳까지 자신을 따라온 소냐의 무한한 사랑에 감화돼 새로운 삶을 살아갈 것을 암시하면서 소설은 끝난다. 하지만 이 결말에 대해서는 독자들마다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열린책들판 『죄와 벌』 부록에는 번역자와 러시아 학자 콘스탄틴 모출스키가 각각 쓴 해설이 실려 있는데, 두 사람도 결말에 대해 서로 다른 견해를 보인다. 

모출스키는 그가 진정으로 회개할 리 없다는 의견이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자수를 할 때 자신의 손익을 분명히 따진다. 그는 자수하면 정상참작을 해주겠다는 포르피리의 약속을 분명히 고려했다. 또한 자신이 죽인 사람들에 대한 죄책감보다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처럼 자신이 비범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 자신이 한심할 정도로 평범하고 무력하다는 것에 대한 절망감이 더 커 보인다. 그는 감옥에 들어가서도 반성하지 않고 "나의 양심은 편안하다"고 생각한다. 라스콜리니코프는 비범한 사람으로서 선과 악이라는 도덕률이 자신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려 했지만, 다만 운명과의 싸움에서 패배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모출스키는 19세기라는 시대적 배경, 당시 『죄와 벌』이 연재되던 잡지의 온건한 성향 때문에 도스토예프스키가 비범한 사람에 대한 진실을 보여주지 못했다고 말한다. 라스콜리니코프가 소냐와의 사랑, 신과의 화해를 통해 갱생할 것을 암시하는 결말은 '경건한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두냐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절망하는 스비드리가일로프(나이젤 테리)


반면 번역자는 결말이 보여주는 그대로 라스콜리니코프가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고 보고 있다. 나는 번역자 쪽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모출스키는 선과 악이라는 도덕률을 뛰어넘어서 무제한의 자유를 추구했던 인물 스비드리가일로프가 자살한 것은, 이 세상에서 더 이상 할 일을 찾지 못하고 권태를 느껴서라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스비드리가일로프가 자신의 생각과 달리 그 자신조차 무제한의 자유를 누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생각한다. 그가 무제한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인물이었다면 그는 두냐가 자신을 사랑하든 사랑하지 않든 두냐와 강제로 관계를 가지고, 꿈 속에서 다섯 살짜리 창녀가 자신을 유혹해도 아무렇지도 않게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두냐에게 그럴 수 없었고, 다섯 살짜리 창녀가 자신을 유혹하는 모습에 역겨움을 느꼈다. 자신을 구해준 아내를 독살하고 어린 소녀를 강간하는 반면, 소냐와 그녀의 어린 동생들에게는 거액을 기부하는 등 선과 악을 넘나들며 자유롭게 행동하던 그도, 정작 자신이 선과 악의 도덕률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고 허탈감을 느꼈을 것이다. 

또 선과 악을 넘어서서 그저 자신의 생각을 따라 무제한의 자유를 추구하며 살아간 결과가 어떤 것인지 라스콜리니코프의 악몽 속에서 나타난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유형지에서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신념만이 옳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전염병에 걸리는 꿈을 꾼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신념이 자신의 신념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서로를 죽이고 세상은 멸망한다. 사람에게는 자기 신념을 가지고 행동할 자유가 있지만, 그 자유는 다른 사람의 신념과 자유, 생명을 침해하지 않는 선 안으로 제한되어 있다. 이 선을 지키지 않는다면 이 세상은 라스콜리니코프의 악몽 속 세상과 같은 모습이 될 것이다. 아무리 올곧고 강한 신념도 다른 사람을 존중하지 않는 무제한의 자유 속에서는 변질되기 마련이다. 

라스콜리니코프가 소냐의 아가페적이라고까지 할 만한 무한한 사랑을 받아들이고, 신과 화해할 것을 암시하는 결말이 지나치게 기독교적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소냐는 신을 믿으라고 그에게 강요한 적이 없고, 그가 머리맡에 성경책을 둔다고 해서 그가 기독교인이 될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그는 기독교 신앙에 감화되었다기보다는, 어떤 사상보다 인간의 삶 자체가 소중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비범한 사람은 자신의 양심에 따라, 그리고 자신의 신념을 위해 선과 악도 뛰어넘을 수 있고 다른 사람도 희생시킬 수 있다는 자신의 이론이 얼마나 허점투성이였는지 깨닫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소냐, 친구 라주미힌, 여동생 두냐)이 그를 놓지 않았고, 그도 그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는 인간 본연의 감정, 사랑과 선의를 버리고 외면하기에는 너무 인간적이고 연약했다. 그는 자신의 허점과 연약함을 인정하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을 것이다. 


유형지에서 새로운 삶이 찾아왔다는 것을 느끼는 소냐와 라스콜리니코프.


이런 결말이 도덕적인 설교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라스콜리니코프가 도덕률과 기독교 신앙에 얽매였다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을 끊임없이 괴롭히던 삶과 이론 사이의 모순에서 자유로워졌다고 생각한다. 이제 그는 죄의식과 자기합리화 사이에서 고민하기를 멈추고, 자신이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나약하다는 것,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됐을 것이다. 자신이 자신을 제약하는 것들과의 싸움에서 패배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그렇게 패배함으로써 그는 자유를 얻었다. 그래서 "변증법 대신에 삶이 도래했다."는 문장은 새로운 희망의 메시지라고 생각한다. 좁은 골방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가뒀던 마음의 감옥에서 나온 그에게, 이 말은 진정한 삶이 시작될 것을 알리는 희망의 메시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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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아 2018-04-28 0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모출스키의 ‘경건한 거짓말‘에 공감이요^^
멋진 리뷰 보고 갑니다~~

바스티안 2018-04-28 13:11   좋아요 0 | URL
각자의 해석이 다르니까요.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