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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도 명작 삘이 든다.


비록 어둠과 그 무한한 방들과 모양이 바뀌는 그림자들이 두렵긴 하지만, 나는 무미건조한 낮이면 밤을 열망한다. 때로는 허물어지는 집의 잔해와 혼돈 속에 사는 게 나의 운명이라는 생각이 든다. - P12

내가 전하고 싶어 안달할 만큼 위대한 진실을 깨달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우리가 처한 상황과 시대에 빛을 드리울 만큼 모범적인 삶을 살지도 않았다는 거다. 나는 살아왔지만, 살아버린 것이기도 하다. 이곳에서의 삶은 너무나도 달라서, 마치 하나의 삶을 끝내고 이제 또다른 삶을 살고 있는 것만 같다. 그러니 어쩌면 나는 나 자신이 한때 다른 곳에서 또다른 삶을 살았지만 이제 그 삶은 끝나버렸다고 말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 P13

"난민." 나는 말했다. "망명."‘그가 고개를 들었고 나는 눈길을 떨구었다. 그는 화가 난 눈빛이었다. "아, 영어를 하시는군요." 그가 말했다. "샤반 씨, 그동안 저를 줄곧 놀린 거로군요." - P23

대체 얼마나 나이를 먹어야 목숨이 아깝지 않게 되는 거지? 혹은 언제가 돼야 두려움 없이 살기를 바라지 않게 되는 거지? 내 목숨이 자신들이 들여보내주는 젊은이들의 목숨보다 덜 위협받는지는 어떻게 아는가? 그리고 더 안전하고 나은 삶을 살고 싶은 것의 어디가 부도덕하단 말인가? 왜 그게 탐욕이나 게임일 뿐이란 말인가? - P27

그녀는 오지 않았다. 가끔은 오겠다고 말하고서도 오지 않는다. 그녀는 마음 내킬 때 나에게 오는 것이거나, 혹은 그런 것처럼 보이는데, 그것은 내가 늘 선호하기는 어려운 방식이다. 그럼 전화를 들이라고 그녀는 내게 말하지만, 나는 그렇게 안 하는 편을 택한다. 나는 집에 전화를 들였던 적이 한 번도 없고, 이제 와서 번거롭게 전화를 들일 마음도 없다. - P72

반면에 나는, 나에게 티켓을 팔았던 사람이 왜 영어를 못하는 척하라고 조언한 것인지, 혹은 언제쯤 영어를 할 줄 안다고 말하는 게 현명것인지 여전히 아리송했다. 그리고 나는 내 동료 캠프 거주자들이를 모르는 게 나와 마찬가지로 전략적인 것은 아닌지, 그들이 영어를 모르는 척해야 하는 이유를 알고 있거나 혹은 그들 또한 다른 곳의 또다른 티켓 판매인에게서 들은 약삭빠른 조언에 따라 행동하고 있는것은 아닌지에 대해서도 분간할 수 없었다. - P79

"저는 오랫동안 생명의 위협을 느껴왔습니다." 내가 말했다. 지금에야 비로소 영국 여왕 폐하의 정부가 그 사실을 인지하고 제게 피난처를 제공했을 뿐이죠. 이제는 쓸모없는 목숨일 뿐이지만, 그래도 제게는 아직 소중하거든요. 어쩌면 지금보다 훨씬 더 소중했던 옛날에도 똑같이 쓸모없는 목숨이었을지 모르지만." - P115

나는 내가 또다른 존재의 계획 아래 내 뜻과는 무관하게 사용되는 도구, 다른 누군가가 들려주는 이야기의 등장인물이라고 느낀다. ‘나‘가 아니라 ‘나‘라는 존재가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며 자신을 영웅적으로 만드는 일 없이, 자신을 포위당한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일 없이, 논박할 수 없는 것을 논박하고 바꿀 수 없는 것에 앙심을 품는 존재로 그린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 아니겠는가? - P117

나는 내 고국에서 온 누군가를 만나야 할 때면 늘 느끼던 두려움을 억눌렀다. 그들은 내가 정말 영국인이 되었다고, 정말 다르다고 자신들과 정말 동떨어져 있다고 말하거나 속으로 그렇게 생각할까? 마치 내가 변했건 변하지 않았건 세상에는 이곳과 그곳밖에 없다는 듯이, 마치 그것이 소외에 관한 무언가 단순한 사실을 입증하기라도 한다는 듯이, 마치 내가 더이상 나 자신이 아니라 스스로를 속이는 가식적인 존재, 가공된 꼭두각시라도 된다는 듯이. - P125

나는 앞을 바라보고 싶지만 늘 뒤를 바라보고 있고, 이후로 일어났던 다른 사건들, 내게 커다랗게 다가와서 모든 일상적 행동들을 지시하는 폭군 같은 사건들에 의해 아주 미미해진 아주 오래된 시간을 뒤적이고 있다. 그래도 뒤를 돌아보면, 어떤 대상들은 여전히 눈부신 악의로 빛나고 모든 기억이 피를 흘리게 한다. - P145

하지만 후세인 삼촌이 떠난 일이 아버지에게 일종의 상실이었다면, 하산에게는 버려짐이고 사별이었다. 그는 거의 누구와도 말을 하지 않았고, 집에 있을 때면 얼굴을 벽 쪽으로 돌린 채 침대에 누워 있거나 앉아서 후세인 삼촌이 준 공책에 글을 쓰거나 항공우편으로 보낼 편지를 썼다. - P158

"너를 만나게 될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게 너일 줄은 몰랐구나" 그녀가 말했다. - P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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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도 올해 읽은 좋은 책 베스트중 하나가 될 것 같다. 단순한 사랑이야기가 아니어서 더 좋았고, 더 서늘했다. 마틴에덴=잭런던은 미쳤다 ㅋ


마틴은 열렬히 그녀를 그리워했다. 그는 타고나기를 사랑이 많았고, 보통 사람보다 더욱 공감을 필요로 했다. 그는 공감에 굶주렸으며, 그에게 공감이란 지적인 이해를 의미했다. 루스의 공감이 대개 감상적이고 의례적이라는 것을 그는 아직 알지 못했다. 그녀의 공감은 대상에 대한 이해보다는 온화한 성품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마틴이 그녀의 손을 잡고 반갑게 얘기하는 동안 그녀는 사랑에 촉발되어 그의 손을 마주 잡았고, 그가 무력하게 누워 있는 모습과 병고가 그의 얼굴에 새겨 놓은 흔적을 보고 그녀의 눈은 눈물로 반짝거렸다. - P14

처음으로 루스는 가난의 추악한 얼굴을 똑똑히 보았다. 굶주리는 연인들은 그녀에게는 늘 낭만적으로 느껴졌다. 그러나 굶주리는 연인들이 어떻게 사는지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이럴 줄은 꿈에도 몰랐다. - P15

그 저녁 루스의 집에서 마틴은 기이한 혼란과 모순된 감정을 갖고 돌아왔다. 그는 목표로 삼았던, 아득바득 기어올라 함께 하고자 했던 사람들에게 실망했다. 한편으로는 자신의 성공에 고무되기도 했다. 그 세계로 올라가기는 생각보다는 쉬웠다. 그는 그리로 올라가는 것보다 우월한 일을 해냈으며, (그는 가식적인 겸손함으로 그 사실을 자신에게 숨기려 하지 않았다.) 그가 올라가서 끼게 된 사람들보다 그 자신이 우월하다고 - 물론 칼드웰 교수는 제외하고 - 느꼈다. - P12

"내가 단언하건대, 편집자들 중 99퍼센트의 주된 자격은 실패한 경력이야." 그가 그녀의 말을 가로챘다. "그들은 작가로서 실패한 사람들이야. 그들이 글쓰기의 즐거움보다 고역스럽게 사무를 보고 발행 부수와 사장에게 얽매여 살기를 더 좋아한다고 생각하지는 마. 그들은 글을 써 보려고 했으나 안 됐던 거야. 바로 거기에 저주받은 역설이 있지. 문학에 있어 성공으로 가는 길목을 문학에 실패한 그들 경비견이 지키고 있으니. 편집장, 편집 차장, 편집부원들 대부분, 그리고 잡지와 출판사들에 고용되어 원고를 사전 검토하는 독자들 대부분, 그들 거의 모두가 글을 쓰려 했으나 실패한 자들이야." - P68

"그런데 그들이, 세상의 인간들 중에서 하필 가장 부적합한 자들이 무엇이 출판될 것이고 무엇은 출판되지 않을 것인지 결정해. 독창적이지 않음이 검증된 자들이, 천부적 재능이 없음이 드러난 자들이 독창성과 천재성을 심판하는 자리에 앉아 있어. 그리고 그들 뒤에는 서평가들, 더 많은 실패자들이 있거든. 그들이 시나 소설을 쓰기를 꿈꾸고 시도해 보지 않았다고? 해 봤는데 안 된 거야. 웬만한 서평은 대구 간유보다 메스껍다고. 서평가와 자칭 비평가들에 대해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자기도 알 거야. 위대한 비평가도 있긴 하지만 혜성처럼 드물지. 내가 만약 작가로서 실패하면 편집자가 될 자격을 얻는 셈이야. 편집자는 어쨌거나 먹고 살 수는 있지." - P69

바다는 잠잠하고 깊다.
그 가슴에 안겨 만물이 잠든다.
한 발짝이면 만사는 끝.
한 번의 추락, 한 방울의 거품, 그것뿐 - P75

"자기는 나를 사랑하지. 그런데 왜 사랑할까? 내 안에서 나로 하여금 글을 쓰지 않으면 견딜수 없게끔 하는 것이, 자기의 사랑을 내게로 끄는 바로 그것이야. 자기가 만났고 사랑할 수도 있었던 다른 남자들과 내가 다르기 때문에, 자기는 나를 사랑하는 거야." - P76

"다른 남자들처럼 만들어서 그들이 하는 일을 하게 하고, 그들이 숨 쉬는 공기를 숨 쉬게 하고, 그들이 세상을 보는 방식으로 세상을 보게 해 보라고. 그러면 자기는 다른 남자들과 나의 차이를, 나 자신을, 자기가 사랑하는 바로 그것을 파괴해 버리는 거야. 글을 쓰고자 하는 욕망이 나를 살아 있게 해. 내가 단순한 사람이었다면 글을 쓰려고 하지 않았을 거고, 자기가 나를 남편으로 삼으려고 하지도 않았을 거야." - P76

"나는 자기의 사랑을 믿기 때문에, 자기 부모님의 적개심이 두렵지 않아 세상 모든 것이 길을 잃고 헤맬지라도, 사랑만은 그렇지 않아. 가다가 나약해져서 맥없이 머뭇대지 않는 한, 사랑은 잘못 갈 수가 없어." - P78

"사람은 자기가 읽은 책들과 일치하는 결론을 내리기 마련이죠." - P85

니체가 옳았습니다. 니체가 누구인지 당신에게 설명하느라고 시간을 끌지는 않겠지만, 그가 옳았습니다. - P140

마틴의 반동적인 개인주의를 가장 극렬한 사회주의 행동대원의 발언으로 변형시켰다. 그 풋내기 기자는 예술가라도 된 듯, 커다란 붓으로 노동조합 지부에 색을 입혀 놓았다. 눈이 야성적이고 머리카락이 치렁치렁한 남자들, 신경쇠약에 걸린 퇴폐적인‘유형의 남자들, 정열적으로 떨리는 목소리들, 높이 치켜든 불끈 쥔 주먹들, 그리고 배경에는 악담과 고함과 성난 사람들의 걸걸한 불평이 깔려 있었다. - P151

이 점을 기억해 줘. 우리의 관계는 단순히 실수였어. 부모님은 우리가 서로에게 맞지 않고, 너무 늦지 않게 알게 된 걸 둘 다 다행스럽게 여겨야 한다고 말씀하셨어. 나를 만나려고 해 봐야 소용없어. - P155

마틴이 돌아와서 모두들 기뻐했다. 그의 책은 아직 어느 것도 출판되지 않았다. 그들이 그를 과장해서 볼 여지가 없었다. 그들은 그를 그 자체로 좋아했다. 그는 망명에서 돌아온 왕자 같은 기분이‘들었으며, 외로운 심장은 온정에 흠뻑 잠겨 움텄다. 그는 그날을 만끽하고 최선을 다해 놀았다. 호주머니도 두둑했으므로, 예전에 항해에서 봉급을 받고 돌아왔을 때 그랬듯이, 돈을 물 쓰듯 썼다. - P183

그는 너무 멀리 떨어져 나왔다. 수천 권의 책들이 그들과 그 사이에서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그가 그자신을 추방했던 것이다. 지식의 광대한 영토로 너무 깊숙이 들어온 나머지 이제는 집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한편으로 그는 인간적이었기 때문에 친구들과 어울리고 싶은 욕구가 충족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다. 그는 어디에서도 새로운 고향을 찾을 수 없었다. - P191

"인생은, 내 생각에, 실수와 수치뿐." 그래..… 실수와 수치뿐이었다. - P193

"하지만 나는 지금 당신 어머니가 우리의 약혼을 파기시켰을 때보다 사윗감으로 조금도 나아진 게 없어." 그는 곰곰이 생각하며 말했다.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거든. 나는 그때랑 똑같은 마틴 에덴이야. 사실 그때보다 좀 나빠졌지… 이제 담배를 피워. 나한테서 담배 냄새가 나지 않아?" - P228

"가장 나쁜 건, 사랑을, 성스러운 사랑을 내가 의심하게 되었다는 거야. 사랑이 출판과 대중의 주목을 먹여서 살려 내야 할 만큼 천한 것인가? 나는 앉아서 머리가 빙빙 돌 때까지 그 생각을 하곤 했어." - P228

그는 알았다, 자기가 정말로 그녀를 사랑한 것이 아니었음을. 그가 사랑한 사람은 이상화된 루스, 자기 자신이 창조한 천상의 존재, 자기가 쓴 연애시의 환하게 빛나는 정신이었다. 부르주아인 실제의 루스, 부르주아들의 모든 결점과 가망 없이 왜곡된 부르주아 심리를 가진 그녀를, 그는 사랑한 적이 없었다 - P231

삶을 너무나 사랑해서
희망도 공포도 놓고
우리는 짧은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어떤 신이시든
어느 생명도 영원히 살지 않게 하심을,
죽은 자들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하심을,
아무리 느리게 흐르는 강도
구불구불 바다에 꼭 닿게 하심을. - P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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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서 시집을 읽는구나 라는 생각을 해봤다.












소년

여기저기서 단풍잎 같은 슬픈 가을이 뚝뚝 떨어진다. 단풍잎 떨어져 나온 자리마다 봄을 마련해 놓고 나뭇가지 위에 하늘이 펼쳐 있다. 가만히 하늘을 들여다보려면 눈썹에 파란 물감이 든다. 두 손으로 따뜻한 볼을 쓸어 보면 손바닥에도 파란 물감이 묻어난다. 다시 손바닥을 들여다본다. 손금에는 맑은 강물이 흐르고, 맑은 강물이 흐르고, 강물속에는 사랑처럼 슬픈 얼굴-아름다운 순이의 얼굴이 어린다. 소년은 황홀히 눈을 감아 본다. 그래도 맑은 강물은 흘러 사랑처럼 슬픈 얼굴 - 아름다운 순이의 얼굴은 어린다. - P19

병원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된다. - P22

새로운길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 P23

바람이 불어

바람이 어디로부터 불어와
어디로 불려 가는 것일까,

바람이 부는데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다.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을까.

단한여자를사랑한 일도 없다.
시대를 슬퍼한 일도 없다.

바람이 자꾸 부는데
내 발이 반석 위에 섰다.

강물이 자꾸 흐르는데
내 발이 언덕 위에 섰다. - P32

참회록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 만이십사년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살아왔는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써야 한다.
- 그때 그 젊은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 P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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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2-09-17 15: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단한 여자˝로 착각하고...아. 시인은 역시 내가 모르는 형용사도 많이 알아...^^:;;;
부끄럽습니다.

새파랑 2022-09-17 17:17   좋아요 0 | URL
제가 띄어쓰기를 잘 못했군요 😅
그런데 ˝단한 여자˝ 도 괘안우거 같아요~!!
 

올해 읽은 책 중 다섯손가락안에 들 작품이다. 뻔한 이야기지만 뻔하게 느껴지지 않도록 글을 잘쓴것 같다. 감동!


내면을 좀체 드러내지 않는 사람을 밀쳐내기는 쉽다. 그러나 내면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정신마저 살아 있지 않다고 여겨 밀쳐내는 대신 인간적인 호기심으로 이 미지의 세계를 궁금해한다면, 어쩌면 전혀 짐작하지 못했던 것을 보고 기대하지 않았던 것들을 풍부하게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 P8

"요즘 어떻게 지내?"라고 그들이 물으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그럭저럭... 가끔 여기저기서 임시직으로 일해"라고 답하고는 서둘러 도망쳤다. 주위에 사람이 절실했지만 그럴수록 그들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마음도 커졌다. - P10

왜 그런지 모르지만, 우리는 살아가면서 한동안 함께 지내던 사람에게 재앙이 닥치고 그들이 난관에 빠진 걸 보면 마치 그런 재앙을 이미 물리친 것 같은 안도감이 들고, 어쩌면 나에게도 닥칠 뻔한 재앙을 그들이 감당하고 있다는 생각에 가련한 그들을 동정하고 싶어진다. 함디도 나에게 이런 느낌으로 말하는 것 같았다. - P14

주변을 이렇게 잘 꿰뚫고, 상대방의 깊은 내면을 이렇게 예리하고 명료하게 관찰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에게 화를 내고 흥분할 턱이 있단 말인가? 이런 사람이 옹졸함으로 몸부림치는 누군가의 앞에서 돌처럼 서 있는 것 외에 달리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의 모든 슬픔, 실망, 분노는 눈앞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이해할 수 없고 예기치 않은 부분들에서 비롯된다. 모든 것에 준비되고 누구에게서 어떤반응이 올지 아는 사람을 동요시키는 게 가능한가 말이다. - P30

사람들은 서로를 얼마나 이해할 수 있는 걸까…. 나는 다른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가 그가 감춰둔 영혼, 질서정연하든 뒤죽박죽이든 그 내면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세상에서 가장 형편없고 가장 단순해 보이는 사람도 경이로운 내면을 품고 있을 수 있고, 가장 어리석은 사람도 고뇌에 찬 영혼의 소유자일 수 있다. 왜 우리는 이 사실을 직시하지 않고 미적거리며, 세상에서 제일 쉬운 일이라는 듯 사람이라는 피조물을 이해하고 판단 내리는 걸까? - P57

아무것도 남기고 싶어하지 않고, 죽음을 향해 외로움조차 함께 끌어안고 가는 이 남자를 나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마음속에 끝없는 연민과 함께 그의 운명에 대해 한없이‘관심이 일었다. - P70

이 거대한 세상에 나처럼 철저하게 외로운 누군가가 또 있을까? 누가 내 얘길 끝까지 들어준단 말인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나? 지난 10년 동안 누구에게 뭔가를 말한 기억이 없다. 부질없이 사람들에게서 도망치고, 부질없이 사람들을 쫓아냈다. 이제 뭘 할 수 있을까? 돌아갈 수도 없고 그래봐야 아무 소용도 없다. - P76

말할 수만 있다면.… 한 사람에게라도 속을 털어놓을 수 있다면…. 아무리 진심으로 원한다 해도 이제 그런 사람을 찾는 건 불가능하다. 찾을 힘도 남지 않았다. 남아 있다 하더라도 찾지 않을 것이다. - P76

항상 그렇듯 바로 그 두려움 때문에... - P83

조금이라도 나의 내면을 표현했거나 나의 어떤 특성을 드러내는 그림들은 꽁꽁 숨겼으며, 꺼내기가 부끄러웠다. 이런 그림들이 우연히 누군가의 손에 들어가면 발가벗겨진 여인처럼 숨이 턱 막히고 새빨갛게 달아올라 도망쳤다. - P83

"그래요, 내가 찾으려는 걸 끝내 못 찾을 수도 있을 거예요…. 그래서, 그게 뭐 어떻단 말인가요?" - P93

어릴 때부터 내게 찾아든 행복을 낭비하는 게 두려웠고, 나중을 위해 행복을 아껴두고 싶어했다. 그래서 기회를 놓친적도 많았다. 하지만 너무 많은 걸 탐내고 욕심부리면 그나마 찾아온 행운도 겁먹고 도망치지 않을까 싶어 항상 망설이곤 했다. - P127

"난 이런 사람이에요! 이상한 여자예요. 나와 친구로 지낼 거라면 여러 가지에 익숙해져야 할 거예요. 변덕이 심하고, 앞뒤가 맞지 않는 행동을 할 때도 있어요…. 미리 일러두는데, 친구들은 그래, 나 때문에 불안하고 짜증난다고요." - P141

지금까지 존재조차 몰랐던 사람을 어느 날 갑자기 갈망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지만 항상 이렇지 않은가? 사람은 무언가를 발견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것이 필요했다는 걸 알게된다. 나 역시 그때까지 내 삶이 공허하고 아무 쓸모없어 보이던 이유가 바로 그녀가 내 삶에 들어오지 않았었기 때문이라고 여기기 시작했다. - P151

자연스러운 걸 받아들이면 절망에 고통받는 이도, 운명을 저주하는 이도 없을 테지요. 우리가 처한 환경을 가여워할 권리는 있지만 동정할 수 있는 건 자기 자신뿐이에요. 누군가를 동정한다는 건 그 사람보다 강하다고 여기는 건데, 사실 우리는 그렇게 대단하지도 않고 다른사람을 나보다 가련하다고 여길 권한도 없어요. - P164

누군가의 진짜 모습을 보게되면, 그러니까 어떤 사람의 발가벗은 실체를 받아들이고나면 그 사람이 누구든 매력은 사라져버리게 마련이다. - P165

현기증이 났다. 그녀에 대해 마지막 판단을 내리는 일은 결코 없으면 좋겠고, 내가 어떤 판단을 내리든 정확하지 않을 거라고 직감했다. 오직 한 가지 욕심뿐이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녀 가까이에 있는 것, 그녀와 헤어지지 않는 것…. 다른 건 상관없었다…. 난 어느 누구에게도 그가 주려는 것보다 더 많은 걸 달라고 하지 않는 편이다. 그런 것에는 익숙하지 않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울적했다. - P175

내가 느끼는것을 그대로 전할 만한 언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기껏 찾아낸 모든 단어와 내가 뱉어내는 모든말이 감정을 빛바래게 만들고 이 행복을 앗아가지 않을까 두려웠다. - P186

"내가 기대하는 사랑은 완전히 다른 거야. 모든 논리 밖에 있어서 설명할 수 없고 본질을 알 수 없는 것이지. 어떤 사람을 사랑하고 좋아하는 것과 그 사람을 온 영혼과 몸으로, 모든 것을 바쳐 원하는 건 다른 거잖아? 사랑은 온 영혼과 온 몸으로 모든 걸 다 바쳐 강렬히 원하는 거야. 저항할수없는 욕망!" - P191

"그러니까 사람들은 서로 어느 정도까지만 가까워질 수 있고, 그다음에는 더 가까워지려고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오히려 멀어지는 것 같아. 너와 나만큼은 가까워지는 데 한계나 끝이 없기를 얼마나 바랐는지 몰라. 진심으로 슬픈 건 바로 이 희망이 헛되다는 게 드러나버렸다는 거야." - P214

어떤 여자가 모든 것을 줬다고 여기는 순간 사실은 아무것도 주지 않았음을 깨닫는 것, 가장 가깝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까마득하게 멀리 있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건 정말 고통스러운 일이다. - P219

그리고 어느 날 모든 것이 끝났다…. 얼마나 단순하고 급작스럽게 끝이 났는지, 처음에는 그 무지막지함을 알아채지도 못했다. 그저 놀랍고 무척 슬픔 뿐이었다. 그 일이 내 인생에 이렇게까지 깊고 이렇게까지 오래도록 영향을 미칠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 P247

나의 시간은 마리아 푸데르와 만나기 전으로 되돌아갔다. 그때처럼 공허하고 무의미한 나날이 되풀이됐다. 하나 다른 점은 여기에 지독한 고통이 덧씌워졌다는 것뿐이다. 과거의 내가 삶이 별거 아니라는 무지에 갇혀 있었다면, 지금의 나는 다르게 사는 길도 있다는 걸 알게 되어 고통에 사로잡힌 것, 이것이 달라진 점이었다. 나는 더 이상 세상과 교감할 수 없었다. 이제 세상 어떤 기쁨도 나의 것이 될 수 없었다. - P266

마치 어제 그녀와 헤어진 것처럼 생생하게 날선 그리움이 몰려왔다. 세속적인 행복이든 물질적인 재산이든,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고통은 시간이 지나면 잊힌다. 하지만 놓쳐버린 기회들은 뇌리에서 절대 떠나지 않고 불쑥불쑥 떠올라 쓰라리게 마음을 헤집는다. 어쩌면 우리가 놓지 못하는 건 떠나간 기회가 아니라 ‘이렇게 되지 않을 수 있었는데!‘라고 끊임없이 잔소리를 해대는 미련일 것이다. 미련만 벗어던진다면 우리는 모든걸 운명이라고 돌리고 받아들일 테니까. - P273

더 이상 사람을 사랑할 수도, 용기를 내어 가까이 다가갈 수도 없었다. 전적으로 믿던 사람에게 배신당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다른 사람을 다시 믿을 수 있겠는가? - P275

미래가 눈앞에 그려졌다. 세월은 지루하게 흐를 것이고 마침내 기다리던 날이 다가와 모든 것이 끝날 것이다. 다른 건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다. 삶은 나를 상대로 사악하게 운명의 패를 돌린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나 자신에게도, 다른 사람에게도 책임을 돌리지 않았다. 그러려니 하고 운명을 받아들인 채 무의미한 나날을 이어갔고 견뎌낼 방법을 찾았다. 나는 지루했다. 단지 지루했다. 다른 불만은 없었다. - P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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