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을 좀체 드러내지 않는 사람을 밀쳐내기는 쉽다. 그러나 내면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정신마저 살아 있지 않다고 여겨 밀쳐내는 대신 인간적인 호기심으로 이 미지의 세계를 궁금해한다면, 어쩌면 전혀 짐작하지 못했던 것을 보고 기대하지 않았던 것들을 풍부하게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 P8
"요즘 어떻게 지내?"라고 그들이 물으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그럭저럭... 가끔 여기저기서 임시직으로 일해"라고 답하고는 서둘러 도망쳤다. 주위에 사람이 절실했지만 그럴수록 그들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마음도 커졌다. - P10
왜 그런지 모르지만, 우리는 살아가면서 한동안 함께 지내던 사람에게 재앙이 닥치고 그들이 난관에 빠진 걸 보면 마치 그런 재앙을 이미 물리친 것 같은 안도감이 들고, 어쩌면 나에게도 닥칠 뻔한 재앙을 그들이 감당하고 있다는 생각에 가련한 그들을 동정하고 싶어진다. 함디도 나에게 이런 느낌으로 말하는 것 같았다. - P14
주변을 이렇게 잘 꿰뚫고, 상대방의 깊은 내면을 이렇게 예리하고 명료하게 관찰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에게 화를 내고 흥분할 턱이 있단 말인가? 이런 사람이 옹졸함으로 몸부림치는 누군가의 앞에서 돌처럼 서 있는 것 외에 달리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의 모든 슬픔, 실망, 분노는 눈앞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이해할 수 없고 예기치 않은 부분들에서 비롯된다. 모든 것에 준비되고 누구에게서 어떤반응이 올지 아는 사람을 동요시키는 게 가능한가 말이다. - P30
사람들은 서로를 얼마나 이해할 수 있는 걸까…. 나는 다른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가 그가 감춰둔 영혼, 질서정연하든 뒤죽박죽이든 그 내면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세상에서 가장 형편없고 가장 단순해 보이는 사람도 경이로운 내면을 품고 있을 수 있고, 가장 어리석은 사람도 고뇌에 찬 영혼의 소유자일 수 있다. 왜 우리는 이 사실을 직시하지 않고 미적거리며, 세상에서 제일 쉬운 일이라는 듯 사람이라는 피조물을 이해하고 판단 내리는 걸까? - P57
아무것도 남기고 싶어하지 않고, 죽음을 향해 외로움조차 함께 끌어안고 가는 이 남자를 나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마음속에 끝없는 연민과 함께 그의 운명에 대해 한없이‘관심이 일었다. - P70
이 거대한 세상에 나처럼 철저하게 외로운 누군가가 또 있을까? 누가 내 얘길 끝까지 들어준단 말인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나? 지난 10년 동안 누구에게 뭔가를 말한 기억이 없다. 부질없이 사람들에게서 도망치고, 부질없이 사람들을 쫓아냈다. 이제 뭘 할 수 있을까? 돌아갈 수도 없고 그래봐야 아무 소용도 없다. - P76
말할 수만 있다면.… 한 사람에게라도 속을 털어놓을 수 있다면…. 아무리 진심으로 원한다 해도 이제 그런 사람을 찾는 건 불가능하다. 찾을 힘도 남지 않았다. 남아 있다 하더라도 찾지 않을 것이다. - P76
항상 그렇듯 바로 그 두려움 때문에... - P83
조금이라도 나의 내면을 표현했거나 나의 어떤 특성을 드러내는 그림들은 꽁꽁 숨겼으며, 꺼내기가 부끄러웠다. 이런 그림들이 우연히 누군가의 손에 들어가면 발가벗겨진 여인처럼 숨이 턱 막히고 새빨갛게 달아올라 도망쳤다. - P83
"그래요, 내가 찾으려는 걸 끝내 못 찾을 수도 있을 거예요…. 그래서, 그게 뭐 어떻단 말인가요?" - P93
어릴 때부터 내게 찾아든 행복을 낭비하는 게 두려웠고, 나중을 위해 행복을 아껴두고 싶어했다. 그래서 기회를 놓친적도 많았다. 하지만 너무 많은 걸 탐내고 욕심부리면 그나마 찾아온 행운도 겁먹고 도망치지 않을까 싶어 항상 망설이곤 했다. - P127
"난 이런 사람이에요! 이상한 여자예요. 나와 친구로 지낼 거라면 여러 가지에 익숙해져야 할 거예요. 변덕이 심하고, 앞뒤가 맞지 않는 행동을 할 때도 있어요…. 미리 일러두는데, 친구들은 그래, 나 때문에 불안하고 짜증난다고요." - P141
지금까지 존재조차 몰랐던 사람을 어느 날 갑자기 갈망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지만 항상 이렇지 않은가? 사람은 무언가를 발견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것이 필요했다는 걸 알게된다. 나 역시 그때까지 내 삶이 공허하고 아무 쓸모없어 보이던 이유가 바로 그녀가 내 삶에 들어오지 않았었기 때문이라고 여기기 시작했다. - P151
자연스러운 걸 받아들이면 절망에 고통받는 이도, 운명을 저주하는 이도 없을 테지요. 우리가 처한 환경을 가여워할 권리는 있지만 동정할 수 있는 건 자기 자신뿐이에요. 누군가를 동정한다는 건 그 사람보다 강하다고 여기는 건데, 사실 우리는 그렇게 대단하지도 않고 다른사람을 나보다 가련하다고 여길 권한도 없어요. - P164
누군가의 진짜 모습을 보게되면, 그러니까 어떤 사람의 발가벗은 실체를 받아들이고나면 그 사람이 누구든 매력은 사라져버리게 마련이다. - P165
현기증이 났다. 그녀에 대해 마지막 판단을 내리는 일은 결코 없으면 좋겠고, 내가 어떤 판단을 내리든 정확하지 않을 거라고 직감했다. 오직 한 가지 욕심뿐이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녀 가까이에 있는 것, 그녀와 헤어지지 않는 것…. 다른 건 상관없었다…. 난 어느 누구에게도 그가 주려는 것보다 더 많은 걸 달라고 하지 않는 편이다. 그런 것에는 익숙하지 않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울적했다. - P175
내가 느끼는것을 그대로 전할 만한 언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기껏 찾아낸 모든 단어와 내가 뱉어내는 모든말이 감정을 빛바래게 만들고 이 행복을 앗아가지 않을까 두려웠다. - P186
"내가 기대하는 사랑은 완전히 다른 거야. 모든 논리 밖에 있어서 설명할 수 없고 본질을 알 수 없는 것이지. 어떤 사람을 사랑하고 좋아하는 것과 그 사람을 온 영혼과 몸으로, 모든 것을 바쳐 원하는 건 다른 거잖아? 사랑은 온 영혼과 온 몸으로 모든 걸 다 바쳐 강렬히 원하는 거야. 저항할수없는 욕망!" - P191
"그러니까 사람들은 서로 어느 정도까지만 가까워질 수 있고, 그다음에는 더 가까워지려고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오히려 멀어지는 것 같아. 너와 나만큼은 가까워지는 데 한계나 끝이 없기를 얼마나 바랐는지 몰라. 진심으로 슬픈 건 바로 이 희망이 헛되다는 게 드러나버렸다는 거야." - P214
어떤 여자가 모든 것을 줬다고 여기는 순간 사실은 아무것도 주지 않았음을 깨닫는 것, 가장 가깝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까마득하게 멀리 있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건 정말 고통스러운 일이다. - P219
그리고 어느 날 모든 것이 끝났다…. 얼마나 단순하고 급작스럽게 끝이 났는지, 처음에는 그 무지막지함을 알아채지도 못했다. 그저 놀랍고 무척 슬픔 뿐이었다. 그 일이 내 인생에 이렇게까지 깊고 이렇게까지 오래도록 영향을 미칠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 P247
나의 시간은 마리아 푸데르와 만나기 전으로 되돌아갔다. 그때처럼 공허하고 무의미한 나날이 되풀이됐다. 하나 다른 점은 여기에 지독한 고통이 덧씌워졌다는 것뿐이다. 과거의 내가 삶이 별거 아니라는 무지에 갇혀 있었다면, 지금의 나는 다르게 사는 길도 있다는 걸 알게 되어 고통에 사로잡힌 것, 이것이 달라진 점이었다. 나는 더 이상 세상과 교감할 수 없었다. 이제 세상 어떤 기쁨도 나의 것이 될 수 없었다. - P266
마치 어제 그녀와 헤어진 것처럼 생생하게 날선 그리움이 몰려왔다. 세속적인 행복이든 물질적인 재산이든,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고통은 시간이 지나면 잊힌다. 하지만 놓쳐버린 기회들은 뇌리에서 절대 떠나지 않고 불쑥불쑥 떠올라 쓰라리게 마음을 헤집는다. 어쩌면 우리가 놓지 못하는 건 떠나간 기회가 아니라 ‘이렇게 되지 않을 수 있었는데!‘라고 끊임없이 잔소리를 해대는 미련일 것이다. 미련만 벗어던진다면 우리는 모든걸 운명이라고 돌리고 받아들일 테니까. - P273
더 이상 사람을 사랑할 수도, 용기를 내어 가까이 다가갈 수도 없었다. 전적으로 믿던 사람에게 배신당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다른 사람을 다시 믿을 수 있겠는가? - P275
미래가 눈앞에 그려졌다. 세월은 지루하게 흐를 것이고 마침내 기다리던 날이 다가와 모든 것이 끝날 것이다. 다른 건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다. 삶은 나를 상대로 사악하게 운명의 패를 돌린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나 자신에게도, 다른 사람에게도 책임을 돌리지 않았다. 그러려니 하고 운명을 받아들인 채 무의미한 나날을 이어갔고 견뎌낼 방법을 찾았다. 나는 지루했다. 단지 지루했다. 다른 불만은 없었다. - P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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