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진중우는 왜 승아가 자신에게 그렇게 말을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은 재벌가의 자제이긴 했지만 스스로의 힘으로 해낸 것은 없었다. 자신의 이름으로 된 소속사 조차도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생긴 것이었다.
승아가 자신을 오해하는 것도 참을 수 없었지만 자신의 자존심이 거기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도 견딜 수 없었다.

형의 문상을 왔던 사람들에게 건성으로 인사하면서 그는 아버지를 처음으로 진지하게 바라보았다. 후계자로 키워오던 첫째 아들이 죽었는데, 보디가드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죽어버리고 말았는데, 살해 당했는데 어떻게 저렇게 담담할 수가 있을까 싶어서였다.

 

"전화왔다. 받거라."

 

문상받는 동안 승아에게서 수도 없이 전화가 왔다. 하지만 마음을 단호하게 먹어야 했다. 형이 죽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뒤에 길원택이 있다고 한다면, 법적으로 그를 처벌할 수 없다면 남는 방법은 한가지였다. 길원택을 몰락하게 만든다. 아버지의 도움없이 온전히 자신의 힘으로.

 

"아니오. 받지 않겠습니다."

 

"그 여자애 전화냐?"

 

"....."

 

말할 필요조차 없었다. 아버지가 조용한 미소를 지었다.

 

"무슨 뜻인지 알겠다. 하지만 아직도 넌 너무 무르다. 나같으면 휴대폰 전원을 끄고 새 전화번호로 바꾸겠다."

 

"알겠습니다."

 

길원택은 아무리 자신이 몰락해도 그녀만은 건드리지 않으리라. 그에게도 소중한 여자일테니까.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진중우는 자신의 마음이 아버지의 말만큼 무르지 않다는 걸 알았다. 단순한 아이돌 팬이 아니라 어린 시절에 만나 우정을 나누던 사이였기 떄문에 더욱 그랬다.

 

"그리고 말인데..."

 

아버지가 덧붙였다.

 

"소속사가 만들어진 후에는 우선 도미하는게 좋겠다. 네 약혼녀가 미국유학생활을 준비 중이니까...너도 미국에서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대해서 좀 배우고..."

 

"아버지..."

 

"네 마음이 굳다고는 해도 아직은 아니야. 그 여자애랑 얽혀서 좋을 거 하나 없다. 되도록 피해. 그러려면 미국행이 제일 낫지."

 

그 말을 하고 회장은 다시 침통한 상주의 얼굴로 돌아갔다. 아무렇지도 않게 아들의 인생을 확정짓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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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난 너한테 숨기는 거 없다."

 

딱잘라서 길원택이 냉정하게 대꾸했다.

 

"애인한테 숨길게 뭐가 있겠니. 이 얼굴하고 손을 봐. 난 널 위해서 조명기구를 막기도 했어. 그 정도로 사랑하는데 도대체 뭘 숨기겠어?"

 

"그래요?"

 

차분하다기보다는 겁에 질린 듯한 승아를 보면서 다소 잔인한 만족감을 느낀 길원택이었다. 그리고 그 장면을 [유령]도 거울 뒤에서 비밀문을 열고 바라보고 있었다.
길원택이 만족감을 느끼는 반면 [유령]은 다소 불안감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길원택과는 달리 마음이 보드라운 사람이었다.

 

"그 화상, 성형하면 고칠 수 있잖아요..."

 

승아는 한발짝 더 나갔다.

 

"왜 제가 뮤지컬에 데뷔했을 때 유나 언니랑, 윤선생님이랑, 권선생님이 돌아가셨죠? 그리고 2주일 전에는 중우씨 형 되시는 분이 돌아가시고..."

 

"우연의 일치야."

 

"우연이 절대로 아니에요."

 

승아는 더욱 더 가까이 그에게 다가갔다. 벽면이 전부 다 거울이어서 길원택의 당황해하는 모습이 전체적으로 비춰졌다.

 

"절 정말로 사랑한다면 진실을 말해주세요. 누가...무엇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무슨 이유로 절 지금까지 거둬주셨는지...범인이 아니라고 확실하게 말해주세요."

 

그것은 가면을 벗기는 것과도 같았다. 길원택이 바란 승아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말을 잘 듣고 노래를 잘 부르는 아이돌. 자신의 마음에 들었던 목소리를 가졌던 그 아이.
다른 걸 바란적은 한번도 없었다.

 

"너 지금 날 못 믿는다는 거냐? 그리고 날 살해범으로 몰고 있어?"

 

"전 살해범이라고 이야기 한 적 없어요."

 

승아는 진실에 한번 더 다가가기로 했다.

 

"말해주세요. 도대체 무엇때문에 지금까지 절 이 위치까지 올려주신거죠? 그리고 왜 그 사람들을 죽인 거에요?"

 

"닥쳐!"

 

쫘악! 하고 무겁고 신경질적인 소리가 났다. 길원택이 화를 참지 못하고 승아를 때린 것이었다.

 

"왜 도대체 날 못 믿는다는 거냐.이 못된 것아. 네 말대로 내가 그 위치까지 널 올려줬는데 나한테 이런 모욕을 주다니! 여우같은 계집애같으니!"

 

그리고 길원택은 그대로 방을 나가버렸다.

승아는 망연자실하게 있다가 핸드폰으로 얼마 전에 받았던 진중우의 휴대폰 번호를 눌렀다.
더 이상 희생자를 늘릴 수는 없었다.
[유령]은 지켜보던 것을 멈추고 길원택이 만들어준 비밀문을 열고 스튜디오를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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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바스락, 신문이 구겨지는 소리가 났다.
승아는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진진우? 진중우의 형.
거기다가 시체가 발견된 곳이 바로 그 묘지였다.
경찰들은 그냥 자살로 처리했다고 하지만, 자살일리가 없었다.

 

"우리 데이트하자."

 

"네?...아, 네..."

 

"신문 보고 있었네?"

 

"아..."

 

"편지 왔더군."


겉표지에 적힌 이름. 진. 중. 우.
지금까지 길원택이 중간에 편지를 가로챘다는 걸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이번에는 손수 길원택이 편지를 가지고 왔다.

 

"그 도련님이 직접 오지 않는 걸 보니 뭔가 급한 일이 있는건가..."

 

"....."

 

떨리는 손으로 승아는 편지 겉봉을 뜯었다. 길원택은 예의상 그녀에게 등을 돌린 채 그녀가 그 편지를 다 읽는 것을 기다렸다.

 

<난 약혼합니다.당신도 행복하면 좋겠습니다.>

 

휘갈겨쓴 글씨로 적힌 그 내용.
뜬금없는 그 내용은 승아에게 1주일전의 그 사건과 연관되어있음을 깨닫게 해주었다.
그 살인사건. 자살이라고 보기에는 미심쩍은 그 사건.
그 것의 중심에 자신이 서 있었던 것이다.

 

"다 읽었어?"

 

그리고 길원택도 뭔가 알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차분한 태도로 길원택쪽으로 돌아 섰다.

 

"도대체 뭘 숨기고 계시는 거죠? 대표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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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1주일 후  야산에서 진진우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실종되어있던 기간동안 별의별 루머가 떠돌았다. 본래 가정적이지 않은 남자였고,마초적이기까지 한 남자였기에 주로 여자와 관련된 루머였다. 하지만 시체가 발견되었을떄 경찰은 기존의 이야기들을 모두 부정할 수 밖에 없었다.

 

"진우가 죽은 건 그냥 자살이라고 해라."

 

진진우의 아버지, 진성환 전 회장은  침통한 얼굴로 진중우에게 말했다.

 

"아버지! 이건 살인 사건..."

 

"경찰한테는 내가 이야기해놓았다. 살인이라는 증거도 없고...목이 졸렸는데, 지문도 남아있지 않았어. 나무위에 매달려 있었다고 하니까. 그냥 자살로 넘기는 수 밖에 없다."

 

"아버지!"

 

"중우야. 때로는 부딪히지 않는 편이 나은 부분도 있는 거다. 그냥 입다물고 가만히 있거라."

 

진중우로서는 감이 잡히는 부분이 있었다. 형의 시신이 발견된 묘지는 그날 윤승아와 자신이 갔던 묘지였다.  형이 자신의 뒤를 밟았다고 생각한다면 당연히 그 반대의 경우도 가능한 것이었다. 즉, 길원택이 몰래 자신의 뒤를 밟았고, 살인용의자가 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 좋은 증거로 아버지와 형의 말의 부분이 일치되었던 것이다.

 

"아버지. 길원택..."

 

"됐다. 그 놈 이야기는 입에 올리지도 마.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겠다. 하지만 이 사건은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킬 수 있으니까 그냥 모른 척 해라."

 

진성환 회장은 그렇게 말한 후 끙하고 신음을 흘렸다.

 

"이제부턴 네가 어깨가 무거워질게다. 그리고..."

 

그 말에 진중우는 뭔가 스윽하고 냉기가 도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되도록 빨리 결혼해서 흔들리는 집안을 잡아라. 진우 자살건으로 기자들이 먹을 거리 찾아 덤비기 전에. 대상자는 내가 미리 찾아놓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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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재벌이라고 하면 무척 깨끗해보이던 시절이 있었다. 엘리트, 상위 계층, 이슬만 먹고 살것 같은 그런 고고한 이미지.
진진우도 그런 놀음을 즐겨했다. 아니, 그 윗대윗대부터...
하지만 뒤에는 작은 기업을 하던 시절부터 알게모르게 조폭들과 손을 잡아 이권을 취한 일이 여러번 있었다.

길원택과 [유령]은 그 일에 끼인 다수의 인물들 중 하나였다.

 

"오래간만입니다. 사장님."

 

분에 못 이겨 부들부들 떠는 [유령]에 비해 길원택의 목소리는 유들유들하기 짝이 없었다.

 

"그동안 절 피해다니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습니까."

 

"흥, ...내가 깡패에 불과한 네놈들을 피하긴 뭘 피했단 말이야."

 

공식석상이라면 진진우가 이들을 두려워해야 할 이유는 하등 없었다.

 

"깡패라뇨...."

 

[유령]이 분기를 못 이겨서 주먹을 꽉 쥐고 있는 동안 길원택은 어디까지나 냉정하게, 그리고 부드럽게 대꾸했다.

 

"저흰 그냥 일반인일뿐입니다. 조금 험상궂게 생긴. 반질한 얼굴로 뒤에서 아리랑치기를 하는 누구들이랑은 차이가 있죠, 그 조직폭력배를 고용한 게 대체 누굽니까?"

 

"이놈들이!"

 

진진우는 감시하려고 왔던 본래의 목적을 잊어버리고 큰 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분노한 [유령]의 손이 진진우의 목을 졸랐다.
그리고 두 사람은 바둥거리는 진진우의 몸을 질질 끌고 공동묘지 저 한적한 곳까지 천천히 걸어내려갔다. 그러는 동안 여전히 진중우와 윤승아의 싸움은 계속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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