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봐...이게...”

 

그는 칼을 얼른 집어들었다. 아직 눈치챈 건 아니겠지. 어설픈 인간을 살인범으로 자신이 몰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 것도 아냐. 아무것도 아니...”

 

아무것도 아니긴.”

 

그의 말을 끊으며 그놈은 그에게서 칼을 뺏아들었다.

 

섣부른 생각 하지마.”

 

“.......”

 

제수씨가 죽은 게 아무리 충격이어도 자살은 안돼. 알았지? 절대 안된단 말이야.”

 

고양이가 쥐 생각하고 있네. 라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친구의 말이 맞는지도 몰랐다. 자신은 지금 충격으로 인해서 1주일째 정상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여간 공격을 하려고 해도 상대방이 이미 칼을 쥐고 있으니 어떻게 할 수도 없었다.

 

, 어서 누워. 딴 생각 하지 말고.”

 

그리고 친구는 어지러워진 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내가 방을 정리할테니 그동안 내가 여기 가져온 수면안대 하고 푹 자게. 알겠지?”

 

“...용의자는...”

 

여전히 이 부근에 있겠지. 그러니까 칼종류도 안 보이는데 좀 치워놓고 그래. 내가 그 용의자면 어떡하려고 그랬어?

 

용의자면 어떡하려고 그랬어.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내가 다시 손가락을 그놈에게 향했다. 그가 자신을 죽이려고 했다고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다시 살의가 끓어올랐지만 칼을 이미 그놈이 가지고 있는 터여서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완력도 그놈쪽이 훨씬 더 세다.

하여간 그놈은 이것저것 챙기는 것 같더니 이내 집을 떠났다.

그놈이 움직일 때마다 아내도 같이 움직이더니 그놈이 사라지자 아내는 그놈의 발자국마다 고인 피를 가리키고 있었다.

 

여보, 내가 어떻게 하면 좋겠어?”

 

그의 말에 아내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을 뿐이었다. 아내의 팔안에 안긴 아기는 울고 있는 듯 뒤척거렸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칼만으로는 안 되겠어.”

 

그는 중얼거렸다. 아내의 환영이 일렁거렸다.

 

태연한 놈이야. 반성도 없고... 용서못해.”

 

그는 아내를 보았다.

 

여보, 꼭 복수할게. 저 놈이 몸서리칠 정도로 복수하고 말거야. 당신을 죽인 놈이 이 세상에 산다는 건 말도 안돼. 대낮에 저 놈의 껍데기를 벗기고 진실을 드러내고 말거야. 여보, 조금만 기다려줘.”

 

그 순간 그 놈이 틀어놓고 간 TV에서 속보가 울려퍼졌다.

 

[K3번지에서 불법무기를 소지하고 주택가에 총을 난사한...]

 

또 살인사건이었다. 용의자는 역시 정신병원에서 탈주한 인물이라고 했고, 피해자는 역시 아내의 경우와 비슷했다. 임산부를 살해하고 도망간 인물은 아직 잡히지 않았다.

 

그의 이마에 주름살이 잡혔다.

도대체 진상이 어떻게 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 시작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내는 단 한번도 거짓말을 한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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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서에 사표를 냈다. 도대체 어째서 어떻게 친구가 아내를 죽였는지 그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그는 누구란 말인가. 어디에서 온 인간인가. 본인이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그는 과연 맞는것인가?

아니 그건 인간이 아니었다. 이제부터 그가 사냥해야 할 <짐승>에 불과했다.

그는 아내가 슬픈 눈으로 자신을 보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 시선을 일부러 무시하면서 그는 천천히 침대에서 미끄러져 나왔다. 침대에는 어제 마시다 놔둔 소주병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아마 어제 6병은 족히 혼자서 마셨을 터였다. 그는 그제서야 그녀가 죽은 지 1주일이 넘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술이라고는 질색하는 아내. 그리고 그 아내가 질색하는 또 한가지.

날붙이.

그는 찬장에서 예전에 사다놓은 칼 하나를 꺼내들었다. 식칼도 질색하는 아내였지만 끝내 찬장에 이걸 숨겨놨다는 걸 아내는 몰랐다.

아내는 무심하게 그가 찬장에서 칼날을 확인하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 무표정이 더욱 슬펐다.

딩동.

 

초인종이 울렸다.

 

그놈이었다. 그는 얼른 칼을 허리춤 뒤로 감춘 채 문을 열었다. 범인이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

 

도대체 요즘 전화를 왜 안 받아?”

 

그놈은 그렇게 말을 꺼냈다. 반듯하게 잘 정리된 옷차림에 머리카락 한올 떨어지지 않게 정리된 머리는 이내 수박처럼 쪼개질 터였다. 그는 허리춤 뒤께에 숨겨놓은 칼을 든채로 부들부들 떨었다.아내의 손가락이 그놈의 머리통을 가리키고 있었다.

 

도대체 왜 전화를 안 받냐고.”

 

그놈은 같은 말을 다시 반복했다. 그리고는 침실 한 켠에 있는 텔레비전을 틀었다.

 

[1주일전 임산부를 총을 쏘아 살해한 용의자가 모 정신병원에서 탈출한 환자로 확인되면서...]

 

그는 슬그머니 허리께에 가지고 있던 칼을 늘어뜨렸다.

범인이 이 인간이 아니란 말인가?

하지만 아내의 손가락은 그놈의 머리통을 가리키고 있는데...

 

탈출한 용의자가 이 부근에서 어슬렁 거리고 있다는 이야기가 있어. 위험하니까, 술같은 것도 적당히 마시고, 집에서 안정을 좀 취해. 문단속 잘 하고. 텔레비전도 안 볼 것 같아서 내가 그 이야기 해주러 왔지. 쯔쯔. 집안꼴이 이게 다 뭐야.”

 

위선떨지마. 이 새끼야.

그 말이 입에서 나왔지만 그는 억지로 삼켰다. 아닐 수도 있다. 아닐 수도.

복수는 냉혹하고 정밀하게 정확하게 해야 하는 것이다. 진짜 범인이 아니라면 살인은 헛발질에 불과할테니까. 그는 그놈에게 고맙다고 말한 후 따지 않은 소주를 한병 권했다.

하지만 그 놈은 고개를 훼훼 젓고는 가보겠다고 일어섰다. 그리고 그놈은 그가 내려놓은 칼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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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거 좋아해?

난 잠자는 걸 좋아해.

그리고 꿈꾸는 것도 좋아해.

근데 왜 사람들은 이해를 못 하는걸까?

가끔씩 묻고 싶어.

왜 다들 자는 걸 좋아하지 않아?

난 서늘한 나무그늘 밑에서 쭉 뻗고 자는 게 좋은데.

그 사람들은 어째서 뜨거운데서 뭔가를 하는 게 더 좋은 건지.

뜨거운데서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게 뭔가 굉장히 불쌍해.

꿈꾸는 건 다른 거 아니잖아.

좋아하는 일이라면 잠자는 대신에 웃으면 되잖아.

하지만 다들 인상 쓰고 있지.

꿈꾸는 시간이 아깝다고.

왜들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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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와. 멀리서 비구름을 몰고 온 바람 끝에 비가와.

떼구르르 첨벙. 비가 오고 있어.

개구리가 풀잎사귀 위로 살짝 고개를 들었어.

퐁퐁 샘물이 솟아나.

바삭 말라있던 샘물이 솟아나서 토끼도 물을 마셔.

빗방울이 톡톡 떨어지면 말랐던 땅도 좋아해.

뻐끔뻐끔 붕어와 송사리가 입을 열어서 즐거워해.

비가와. 기다리고 기다리던 비가 와서 예삐도 꼬리를 흔들고 기뻐해.

비가 와서 몸이 씻겨진 풀들도 좋아해.

비가왔어. 오고 다시 비구름 타고 떠난다고 해.

안녕. 안녕. 비야. 만나서 반가웠어. 다음에 또 다시 만나.

개구리도,토끼도, 붕어,송사리도, 예삐도 그렇게 인사해.

또 다시 만나.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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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를 두들기는 건 인상적인 일은 아니다. 요즘 아이들이라면 한번 정도는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니까. 하지만 그 아이가 두들기는 건 단순한 피아노 건반은 아니었다.

감정이 실리는 피아노 건반에는 하나의 묘미가 있다. 단순히 화가 나서 두들기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이 치는 곡에 도취되어서 치는 것인지, 혹은 그저 감흥없이 빠르게만 두들기는 것인지.

나는 피아노를 별로 좋아해 본적은 없지만, 사람들이 치는 피아노 소리를 듣는 건 좋아한다.

피아노를 치는 손끝에서 물고기가 튀어나온다는 말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때로는 그것이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짜라짜라라라라라 쨘쨘.

행진곡 끝을 살짝 뭉개버리는 중학생, 혹은 아라베스크의 미묘함을 마치 이제 풋풋한 여성의 골격을 갖춘 것처럼 그 등을 살짝 보이는 것으로 해결하는 초등생.

, 나는 어째서 어린 시절에 그 피아노의 속살을 깨끗이 바라보지 못했던가.

이제 와서 피아노를 치면 무엇이 튀어나올까 두렵다.

어린 시절의 순수함과 어린 시절의 그 서투름 혹은 피아노에 대한 미움과 사랑을 과연 표현할 수 있을까?

그 아이가 치는 젓가락 행진곡을 건너방에서 들으면서 나도 어설프게나마 피아노 건반에 손을 대어본다.

딴딴딴딴 딴딴 딴딴 딴딴따...

누군가가 이 피아노를 듣고 무언가를 느낄 수 있을까.

설사 어설프다 느끼더라도 나는 피아노를 칠 것이다. 마치  황량한 땅에 꽃씨를 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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