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큰 길로 나오자 우선 마스크로 얼굴을 가렸다. 성경책안에 든 총은 거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았다.

쫓아오는 사람이 없는지 살펴보았지만 아직까지는 없는 듯 했다.

병원에서 그 사고를 치고 나왔는데 이렇게 조용할 리가 없건만...

아니면 노인의 말이 맞는지도 몰랐다.

뒤가 구린 것이 있어서 이때껏 그들을 가두어두고 있었고, 누군가 두 사람을 감금함으로써 얻는 것이 있었다...는 것.

 

적선합쇼...”

 

그의 앞에 무릎을 꿇은 거지가 머리를 연거푸 조아렸다. 그는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몇 년의 시간동안 병률에 의해서 가둬져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그 정도의 인간미가 남아있는 건 기적이나 다를 바 없었다.

 

미안합니다.”

 

그는 억지로 목을 긁어내는 듯한 어색한 목소리로 말했다.

 

“5만원 지폐밖에 없군요. 가진 게 이것밖에 없어서요. 미안합니다.”

 

본래 그는 선량한 인간이었다. 자신의 몫으로 주어진 것을 성실하게 살아가는, 그리고 아내만을 사랑해온.

그러니 거짓말을 하는 것이 껄끄러울 수 밖에 없었다. 그의 수중에는 두둑한 현금이 있었으니까. 거지에게 주는 것은 그 중 백분지 일 정도도 안되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가 그릇에 둔 5만원에 거지는 허리를 굽실거렸다. 하지만 잠시 거지의 눈이 번득였다.

단순한 거지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이내 후회했다. 기분 탓일까? 그 거지는 어쩌면 병률이나 노인이 과대망상적으로 말한 병률의 상사일지도 모른다.

직관은 말하고 있었다. 복수가 끝나고 인간의 법이 정당하게 그의 범죄를 심판할때까지 그는 계속 쫓겨다녀야 할 것이다. 큰 대상과 결탁한 그곳이 그냥 그를 내버려두지는 않을 것이다.

노인의 희생으로 겨우 풀려나게 되었는데 단 한번에 붙잡힐 수는 없었다.

그는 자신의 앞을 인도하듯 걸어가는 아내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그녀에게 답을 구하듯 그녀의 손을 잡으려했다. 하지만 잡히지 않았다. 다만 아내가 뒤를 돌아보았을 뿐이었다.

아내의 손가락이 거지를 가리켰다.

그는 잠시 정신을 잃은 채 미친 듯이 성경책에서 총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뭔가 더 얻을 게 없을까 싶어서 쫓아온 거지를 향해서 총을 발사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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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후 길준은 천천히 그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노인은 퉁명스럽게 그 거리 좁히기를 거부했으나 애초에 방을 옮겨온 건 노인이었다. 길준을 거부해야 할 이유는 없어보였다. 어차피 노인은 길준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옮겨온 것이다. 느긋하게 기다려야 했다,

 

자넨 내가 궁금하겠지. 어떻게 돈의 힘을 빌리고해서 빠져나갔었는지. 그리고 지금은 감시하는 놈들처럼 이젠 더 이상 나갈 수 없다고 생각하겠지.”

 

어느날 시멘트 바닥을 못으로 긁고 있던 노인이 말했다,

 

“...글쎄요.”

 

아니, 그 사람은 돈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어떻게든 나갈 수 있을 것이었다.

 

저번에 자네 아내에 대해서 함부로 말한 거 미안하네.”

 

“......”

 

사실이 어쨌든 말하지 말았어야 했어. 자넨 버틸 준비가 안되어있었으니까.”

 

“......”

 

한번 더 화를 내면 아예 못 나갈 일이 생길지도 몰랐다.

 

나는 아직도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네. 내 머리는 멀쩡하고 자네 몸은 아직도 제법 쓸만하지. 건강하단 이야기야. 나도 물론 노인치고는 건강한 편이지만 말이지.”

 

“...제가 필요하단 말씀이군요.”

 

...자네 경우에는 돈이 통하진 않을 것 같고...이거 어떤가. 내가 자네 일을 좀 도와주는거야.”

 

“...어떤건지 아십니까.”

 

복수지. 자넬 가둔 사람에 대한, 그리고 아내의 유령이 눈에 보이게 한.”

 

“......”

 

여자를 너무 믿지 마. 여자는 너무 위험하니까.”

 

여자...”

 

총을 빵하고 쏘고 싶지? 아내를 건드린, 그리고 아내를 죽인 그 놈한테. 근데 총기 소지는 안되니까 총부터 구해야 되지 않겠나. 그리고...또 그 위의 다른 놈에게도 복수해야지. 자네는 내 복수까지 해주는 거야,”

 

여자는 무슨 말입니까?”

 

자네 부인. 자넨 돌아가는 일이 판단이 안되는 것 같지만.”

 

?”

 

그러니까 여자를 믿지 말라고 미리 이야기하는거야. 자넨 아내를 사랑하는 애처가라기보다는 모든 여자를 다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니까. 호색과는 개념이 좀 다르지만 말이야. 솔직히 말하자면 좀 바보같지.”

 

순간적으로 또다시 욱해서 노인의 목덜미를 잡아챘지만, 길준은 이내 노인을 풀어주었다.

호락호락 이길 수 있는 상대도 아니었고, 우선 나가야했다.

이젠 그는 아내에 대해서 어떤 모욕을 가해도 참을 수 있었다.

중요한 건 복수였다. 어머니가 자신을 가뒀다고는 하지만, 그 뒤에는 병률이 있었다.

그리고 아내의 모습이...

 

그런 식으로 두 사람은 하루하루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노인이 복수해달라는 말을 했지만,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인지 그는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시간동안 두 사람은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리고 길준은 노인이 자신처럼 세상에 긍정적이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정상인이라기엔 세상에 대한 복수심으로 타오르고 있었고, 그렇다고 해서 냉정한 계산력이 떨어지는 건 아니였다.

노인은 계속 어떤 건물의 어떤 사람에 대한 이야기만 들려주었는데, 이야기만 들어서는 동화같기도 하고, 추리소설같기도 했다.

 

도대체 그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긴 뭡니까?”

 

뭐긴.”

 

노인은 천천히 복기를 했다.

 

그 남자는 레테르가 덜 떨어진 새옷을 입고, 길함동에 있는 성당으로 가는 거야. 가면 거기에는 젊은 신부가 기다렸다가 성경을 건네주지. 새로운 시작에 대한 의미로 말이야.

그리고 그 성경을 펼치면 복수가 시작되지.“

 

“...동화같은 이야기군요.”

 

나갈 수 있을 때 이야기겠지만 내가 돈을 먹인 감시원이 그 둘만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지. 꼭 그 인간들 아니라도 나갈 수 있어. 단지 내가 체력이 달린다는 게 문제지. 자넨 여기 들어와서 나가본 적이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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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말썽을 피우고 그러세요. 나이도 드신 분들이...”

 

관리사가 와서 두 사람의 눈에 든 멍을 보고는 혀를 찼다. 그리고 두 사람에게 팔을 걷으라고 말했다.

 

왜 주사를 맞아야 하노?나는 멀쩡한데.”

 

그 사람의 말에 관리사가 피식 웃었다.

 

항상 멀쩡하다고 그러시잖아요. 그걸 누가 믿는다고.”

 

니네들이 그렇다고 의사는 아니잖야. 내가 나가는 걸 막는다면 너희들도 콩밥을 먹어야 할걸.”

 

그의 협박에 관리사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불쌍한 영감님. 벌써 몇 번째 그 말 반복하는지는 아시나요? 그래봤자 안되잖아요. 아무리 멀쩡하면 뭘해요. 영감님 자식들이 퇴원에 동의하지 않는데...”

 

“.....”

그 사람은 한숨을 푹 쉬고는 자리에 드러누워버렸다.

 

, 원장님이 그러시던데요. 한번만 더 말썽을 피우시면 독방으로 보내드릴 거랍니다. 선생님 약도 돌려주시지 않을거래요. 왜 심장약 있잖아요...선생님이 매수하신 감시원들은 다 내보냈어요. 그러니까 아시겠죠? 최대한 아주 최대한 조용히 계셔야 한다는 거.”

 

호로새끼!”

 

그 남자는 그렇게 말한 후 이불을 뒤집어썼다. 관리사는 안됐다는 듯이 보더니 이내 길준에게 고개를 돌렸다.

 

선생님도 여기 계실려면 조용히 계셔야지요. 저분 자극해봤자 좋을 거 하나 없답니다. 저분은 원래 저렇게 생겨먹었는걸요. 20년이 넘게 갇혀 있으면서 혼자서 별의 별 망상을 다 하죠. 그래도 재산은 많은지 20년 넘게 가족들에 의해서 갇혀 있으니...”

 

길준은 처음으로 그 남자에게 연민을 느꼈다. 그리고 안정제를 맞고 난 후 천천히 그 남자에게 질문할 것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눈앞에 있는 것은 단순한 졸부도 아니고, 정신 병자도 아니며, 그저 날카로운 관찰력을 지닌 ,가족에 의해서 버림 받은 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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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여 오시게

어여 오시게

흰 옷에 꽃달고 어여 오시게

마냥 아이인 듯 웃으며 그리 오시게

 

흐린 날씨에 갈모를 쓰고

맑은 날씨에 깔깔한 모시옷 깔끔히 다려 입고

그리 오시게

손님인 양 웃으며 문 열고 오시게

 

언제나 오려나

문열고 기다리는 내 심정 그대 아는가.

오래 전 남남지간이 되었건만

그래도 나는 문 열고 그대를 기다리네.

 

낮이든 밤이든

혹독한 여름이건 얼어붙는 겨울이건

나는 문열고 그대를 기다리네

 

첫째가 불평하네

어찌 그리 기다리십니까.

제가 안 보이시는가요.

 

그 불평을 왜 난들 모르겠는가.

부모자식간 인연을 끊고 나간

그대가 그래도 보고 싶어

문열고 밖을 내다보네

 

그대 재산을 탕진했다 이야기 들었지.

그래도 언젠가 집에 돌아오고 싶어서

갈모 따로 챙겨놓고

모시옷 따로 챙겨놓았다는 이야기 들었지.

 

짐꾸러미 한켠에 놓인 그 갈모, 모시옷

깨끗이 입고 오는 날.

나는 소를 잡고 잔치를 벌리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돌아오거라.

흰 옷에 흰 민들레를 달고 그리 오거라.

 

불평하는 이 있으면

내 이렇게 말하리.

내게는 죽은 사람이었던 아들이

돌아왔는데 어찌 소를 아끼리.

 

어여 오시게 어여 오시게

아드님 어서 오시게

그동안 고생해서 마른 몸에

기름진 것을 먹여 살을 찌우고

거친 머리에는 아주까리 기름을 발라

다시 보지 못한 내 아들의 얼굴을 보겠네.

 

어여 오시게 어여 오시게

집 문 앞을 서성거리는 마음 붙잡고

어여 오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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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는 평야의 소녀.

귀걸이가 달랑달랑거리고, 웃음을 매단채 술달린 옷을 나풀거리네.

아버지 태양을 향해 손을 내밀고

어머니 달을 향해 뛰어오른다.

술달린 옷 끝에 희망을 달고

손가락 마디마디에는 강한 힘을 반지마냥 조롱조롱 끼웠네

 

소식을 전하는 까막새야

소녀에게 내 연가를 전해다오

그의 아리따운 연인은 저 먼 전쟁터에서

소녀의 춤을 그리워하고 있다고.

연인마냥 잘 뛰어오르던 청년은

잘생긴 해골이 되어서

강가에서 쉬고 있다네

 

까막새야 까막새야

전해다오.

해골의 이야기가 아니라

한 평야를 지배하던 청년의 이야기를.

잘생긴 해골이 아니라 청년의 이야기를.

 

아무리 잘 생겨봐도

해골은 해골인 것을

희망은 없고 절망만이 남은 이 골짜기의 이야기를

싹 다 빼버리고

연인의 이야기를 전해다오.

 

그 잘생긴 젊은이는 또 다른 골짜기를 향해서

가다가다 하다보니 그냥 까맣게

돌아오는 길을 잊었다고

그렇게 전해다오.

 

소녀여

눈물 짓지 말아다오.

나는 죽은 것이 아니라

새로운 땅에 반해

널 잊은 것이라고.

 

청년은 언젠가 돌아오리라.

사랑하는 소녀가 늙어 죽어

역시 예쁜 해골되면

그 해골 옆에 묻히기 위해서

달그락 달그락 뼈 울리는 소리를 내며

소녀의 뼈옆에 묻힐 것이라고.

 

지극하신 달 어머님이 지켜봐주시겠지.

그러니 소녀야, 울지 말고

오늘도 평야에서 하늘을 향해 뜀뛰기를 해다오.

전쟁은 마냥 없는 이야기.

연인은 언젠가 돌아올 것이고, 그때까지 너는

반지를 조롱조롱 낀채로 하늘을 향해 뛰어다오.

 

나의 사랑.

소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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