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달란트>

 

옛날에 한 부유하고 강한 사람이 있어, 왕자리를 얻기 위해 잠시 집을 떠나 있기로 했다.

그는 세 명의 신뢰하는 종들을 불러서 자신의 재산을 맡겼다.

필요한 경비를 제외한 돈을 3분하여 한명당 각각의 돈을 맡겼는데, 돌아와보니 한 종만이 그 돈을 그대로 가지고 돌아와 그에게 말했다.

 

-당신은 심은데서 거두지 않는 악하고 강한 사람이라서 내가 그 돈을 그대로 땅에 묻어두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달란트이옵니다.-

 

그 사람은 그 종을 당장 내쫓아버렸고, 다시는 그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왕이 된 그 사람의 땅은 아무것도 그에게 주지 않았고. 종은 그대로 슬퍼하면서 이 땅 저 땅을 떠돌아다녀야 했다.

 

 

성경책을 읽다가 나는 고개를 돌렸다. 기다린지 30분이 넘었는데도 그는 도착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카톡으로 재촉한지도 벌써 1시간이 넘었다. 도대체 어째서 이 남자는 돈을 갚으라고 재촉할때마다 이런 식으로 나오는지. 알면서도 재촉하는 내가 미웠다.

항상 이런식이다. 빌려주고, 갚지 않고, 거기다가 또 빌리고, 또 갚지 않고...

내가 잘못이다. 단지 그 외모에 혹해서 다른 친구에게 과시용으로 사귀기 시작했으니까.

나이 서른 넘은 여자가 여자들의 무대에서 뒤지지 않으려면 첫째 외모가 빼어나거가, 남편이 잘났거나, 명품을 많이 가지고 있어야 한다. 다행히도 나는 경제관념이 투철한 터라 고등학생 시절부터 상당한 돈을 모았기 때문에 남들이 지금은 손 벌벌 떨어가면서 산다는 명품을 여러개 가질 수 있었다. 빼어난 외모?

나에게 그건 없지만 여자들에게는 한가지 특징이 있다. 바로 남자. 자신의 옆에 있는 남편이 성공의 잣대인 것이다. 처음에는 열등감이 좀 들었다. 내가 나 스스로가 뛰어난 인재지만, 남편이란 존재는 없으니까 이 나이 먹도록 싱글이면 그런 면에서 모두가 다 부족한 부분을 지적하기 마련이다.

 

직업이 모델이라고 했던가.

부족한 외모와 잘난 남편을 둔 친구들이 명품 개수를 늘리는 동안에 느낀 열등감이 나를 그곳으로 이끌었던걸까.

어느날 무척 취해서 부킹을 한 나는 그 날 취기가 몽땅 다 사라지는 경험을 했다.

정말 마술이 빚어낸 것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밖에 없는 남자가 거기 있었다.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닌 듯한 외모, 갈색 피부에 옅은 금색으로 염색한 그 남자는 거기에 있는 것만으로도 여자들의 시선을 끌었다.

내 취향은 좀더 남성적인 형이지만, 사실 옆에 끼고 다니기에는 이런 외모가 적당했다.

그날 나는 빠르게 그 남자에게 접근했고, 서로 명함을 주고 받은지 2주도 안되어서 사귀기 시작했다.

 

[아직도 멀었어?]

 

카톡으로 다시 재촉한다.

 

[으응. 이제 막 일어났어. 자기야. 조금만 더 기다려줄래. , 어디라고 했더라?]

 

왜 이제와서 성경책을 읽는지 나도 모를 일이다.

공식적으로 교회를 안 다닌지 10년이 넘었고, 교회가 말하는 달콤한 진리. 영생을 포기한지도 꽤 되었는데. 물론 영생이 아니라 영원한 지옥불이 기다리고 있는 걸 알면서도.

 

[미란다 커 카페.빨리 와. 그리고 일어났단 이야기는 1시간 전에도 했잖아. 빨리 와.]

 

사채까지 하고 있는 내가 이제와서 다시 교회로 돌아간다고?

사업은 흥하고 있었다. 남자친구도 있다. 부족할 것이 없는 삶.

? 지금 이 남자에게 뿌리고 있는 돈이란 것도 사실 많은 것도 아니다.

그리고 내가 사귀고 있는 남자는 이 남자만은 아니었다.

외모가 빼어난 건 사실이지만, 인간이 빚어낸 것이 아닐 정도로 뛰어난 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같은 입장에 있는 사람에게는 또 다른 것이 필요하다.

해결사라던가, 아니면 같은 사업의 입장에 있는 남자라던가.

그래서 총 3명이었다. 물론 나머지 2명은 애인의 입장까지 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자기야, 지금 막 샤워했다. 사진 보내줄게. 기다리는 동안 보고 있어.]

 

[쓸데 없는 짓 하지 말고 빨리 오기나 해.]

 

 

사채를 하는데는 자본금이 많이 든다. 그리고 돈을 제대로 갚지 않는 사람에게는 가혹한 요구도 해야 하는 것이 이 사업이다.

그래서 나는 철없는 동기들 몇 명을 그대로 절망에 빠뜨리기도 했다. 사감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그 아이들은 모두 남편 자랑을 하면서 은근히 날 조롱했던 아이들이었다.

물론 나는 그에 대한 철저한 복수를 시행했고, 그 아이들은 내가 주는 돈으로 명품에 명품을 사모으거나 남편에게 뒤지지 않기 위해서 주식투자를 하다가 집안이 망해버리거나 했다.

 

[자기야, 난 지금 가방 들었다. 카페까지 가는데 한 30분쯤 걸릴 거야.]

 

[그래.]

 

문제는 지금 이 상황이 그렇게 좋지 않다는데 있다. 정부는 사채에 대해서 강경하게 나오고 있고, 어느 단체에서는 사채를 막자는 운동까지 벌이고 있었다.

사채는 은밀한 곳에 숨어 있다. 그렇기에 이렇게 양지에서 운동까지 벌어지면 목이 좁아지고 강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조직적인 사채를 막자는 운동이 오히려 어둠에서 작은힘을 행사하고 있는 자들을 옥죄고 있다는 것이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다.

 

30분 정도라면 기다릴 수 있다.

나는 다시 성경책으로 눈을 돌렸다. 사채를 쓰던 사람 중 한 사람에게 받아낸 채색본 성경책이다. 고상한 취향이었던 듯, 목판화로 아름답게 장식이 되어 있다.

한구절이 계속 눈에 밟혔다.

나는 이 남자친구에게 다른 사람들에게 하는 것과는 달리 저리로 돈을 빌려주었다. 하지만 사채의 특징상 어차피 은행이자보다는 비싸기 마련이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이 남자는 그게 농담이라고 생각했는지 갚지 않고 있었다.

정부가 계속 사채에 대해서 강경세를 보인다면 이 정도 금액이 비는 것도 치명적일 수 있었다.

나도 다른 사채업자에게 최근 빚을 지고 있어서, 더 이상 여유를 부릴 수가 없었다. 소액일수록 빨리 빨리 거둬들이고 이 사업을 접는 게 상수였다.

 

아쉽지만 여기서 끝이었다. 그 예쁜 인형같은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이 안타깝긴 했지만.

 

도착했어. 어디야?”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얼른 펼쳐놨던 핸드폰을 들었다. 멍청하게도 핸드폰을 열어놓고 있었던 것이다.

 

창가자리야. 어서와.”

 

밖에는 해결사 남자친구가 대기하고 있었다. 내가 핸드폰을 들면 바로 들어올 수 있도록.

 

, 1주일만이네.”

 

해맑게 웃는 남자친구의 얼굴이 오늘따라 굉장히 아름답게 보였다.

 

그러게. 돈은 갖고 왔어?”

 

, ? 인간 유혜림이 변했네. 애인끼리 만났는데 대화가 고작 그거야?”

 

그는 말을 빙빙 돌렸다.

그렇게 말을 돌리고 돌리는데 재주꾼이지. 항상 그래왔다.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원금이라도 갚아야지?”

 

, ?”

 

그는 천천히 어깨에 매고 온 가방을 내쪽으로 밀었다.

 

, 원금.”

 

이자는?”

 

원금만이라도 갚으라며.”

 

그는 되려 큰소리를 쳤다.

 

원금이야.”

 

.”

 

.”

 

그의 눈매가 살짝 가늘어졌다.

 

이자는 왜 안 갚느냐고? 그거야, 너는 법정 이자율대로 안 받는 악독 고리대금업자니까 그렇지. 얼마 전에 내가 문의했더니 그런 돈은 원금만 갚아도 된다고 하더라. 그래서 그 말 듣자마자 안 쓰고 모아놓았지. 우리 기왕 헤어지는데 좋게 좋게 헤어지자고.”

 

나는 휴대폰을 들었다. 그리고 해결사 남자친구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리고 그때였다.

 

서로 동행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 남자친구를 향해서 카페에 앉아있던 한 남자가 말했다. 해결사 남자친구는 도망치려고 했지만 그 뒤에 또 앉아있던 체격 건장한 남자에게 붙들렸다.

 

유혜림씨 되십니까? 서로 동행해주지요.”

 

나는 성경책을 떨어뜨렸다.

마지막 구절이 생각났다.

 

[당신은 심지 않는 데서 거두는 악하고 강한 주인이기에, 나는 당신의 달란트를 묻어놓았습니다. 보소서 당신의 달란트이옵니다.]

 

그 말이 맞았다. 원금만 남기고 그 종은 사라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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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보다는 호기심뿐>

 

어떤 남자가 있었어. 혹시 그 남자를 당신도 알지 모르니까 우선은 u라고 부를게.

, 전 남친 이야기 나온다고 기분 상해할 건 없어. 난 당신하고 사귈 생각은 없으니까. 그냥 이야기하는 거야.

내 나이가 몇인 것 같아? 아니, 뭐 억지로 호감 살 생각으로 젊어보인다고 하지는 마.

그냥 게임한다고 생각하고, 그 이야기도 나중에 하지 뭐.

내 애인으로 장장 10개월을 있었던 남자인데 결국은 헤어졌어.

그래도 기억에는 남더라고. 하도 어처구니 없는 이유로 차였으니까 기억에 안 남을 수가 없잖아.

 

이거 좀 써주지 않을래?”

 

그 남자는 고양이 귀를 양손에 들고 있었어. 왜 알지? 코스프레 카페같은데 가면 달고 있는 거 말야.

 

싫은데.”

 

좀 써봐.”

 

설마하니 그런 쪽으로 변태 끼가 있을 거라고 생각도 못했지 뭐야. 하긴 쑥맥으로 굴때부터 알아봤지. 좀 신선해서 데리고 있었더니 별 희한한 성격이더라고.

뭐라더라. 네코미미 뭐라나?

 

써주지 않으면 너랑 헤어지겠어.”

 

그래. 솔직히 고백할게. 신선해서 데리고 있었던 게 아니라 쑥맥이어서 나랑 결혼해줄줄 알았으니 그게 문제였지. 내가 한 3초 정도 고민하고 있으니까 이내 저런 말을 하더라고. 말이나 되는 이야기야?

 

너 그런 것 때문에 나랑 사귄 거야?”

 

“......”

 

말도 안하고 나가버리더라. 정말 어처구니가 없어서.

나중에 문자 온 걸 보니까 그게 딱 어울리는 여자같아서 일부러 접근했다잖아. 세상에!

사랑보다는 호기심이었다나.

내가 벽에 머리를 얼마나 박았던지! 내 눈이 삐었던거야.

 

하여간 그 유 뭐시기는 얼마 뒤에 나보다 나이도 어리고 결혼식장에 네코미민지 뭔지를 달고 결혼식을 하겠다는 여자를 만나서 결혼했어. 그 변태. 청첩장에도 고양이 귀를 붙여놨더라. 세상에.

그래서 내 연애시대 중 가장 긴 시간을 차지했던 연애는 끝났어.

그 뒤에는 뭐, 나도 나이가 있으니까 신중해지려고 했지만...

처음에는 8개월, 6개월, 3개월...그러다가 한달, 그리고 이틀에 끝나는 일도 생겼지.

너무 자세히 쳐다보진 마. 잔주름까지 보이려니 부끄럽잖아.

뭐 때문에 그런 건진 잘 모르겠지만, 굳이 정리한다면 요즘 세상에 나같은 여자가 점점 나이가 들어가는-연애시장에서 승리하는 게 그렇게 쉽진 않다는 결론이 나왔지.

별론 건실한 남자들은 아니었어. 당신도 아마 마찬가지일걸?

나도 반성할 점은 있었지. 가볍게 보였던 거야. 아마도.

근데 왜 연애시장을 떠나질 못할까? 내 나이가 서른이 넘도록.

sm플레이를 즐기는 남자와 네코미미를 즐기는 남자나 그밖의 성취향이 특이한 남자들이 가끔 뽑기처럼 튀어나오는 그런 연애시장을?

글쎄. 그걸 뽑는 건 운이라지만 난 이렇게도 생각해.

사랑보다는 호기심뿐이라고.

호기심. 그게 오늘도 서로를 간택하는 연애시장의 진리인거지. 잘 들었지?

이젠 그만 자기 자리로 돌아가자구. 뱀파이어씨. 나도 꼬리를 말고 돌아갈테니 말이야.

평범한 이야기라고 항의하진 마. 어쩌겠어. 이게 다 연애인 것을.

사람이라는 걸 사랑하게 되면 당신같은 수컷이나 나같은 암컷이나 같은 거 아니겠어?

, 내 나이? 천백오십세. 그것도 20살 깎은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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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보다는 호기심뿐. 은 소녀시대의 런 데빌 런 의 가사에서 따왔습니다.

사랑해요

~소녀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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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독.

 

아이돌이 되겠어요.

 

 

 

아이독은 본래 아이돌에 대한 꿈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세상의 사람들은 항상 두 부류로 나뉜다. 아이돌을 좋아하는 사람과 좋아하지 않는 사람. 그리고 거기서 더 나가면 아이돌이 되고 싶은 사람과 되지 않고 싶은 사람으로 나뉘는데...

아이독은 그러니까 아이돌을 좋아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아이돌이 되고 싶지도 않은 그런 평범한 아이였다.

 

그 아이가 나의 교생시절을 기억하고 찾아온 건 그러니까 1년전 이야기다. 나는 잘 팔리지 않는 가수였고, 그래서 안전을 담보하기 위해서 선생의 길을 걷고 있을 때였다,

물론 나는 지금도 잘 안팔리기 때문에 학교 선생 노릇을 계속하고 있다.

수업시간에 아이독 이야기를 하면 아이들은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어요! 하면서 놀래거나 아이독의 사인을 받아달라며 내 책상위에 수북히 쌓아두기도 한다.

 

아이독이 어쩌다가 아이돌이 되었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안 난다.

아이독은 시를 랩처럼 읽는 아이도 아니었고, 춤을 그렇다고 멋들어지게 추는 아이도 아니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눈에 띄는 짓을 하는 대신 묘한 열정을 가지고 하나의 동작이 언어가 되게끔 하는 것, 그 점이 달랐다.

그래서 가끔 난 그 아이가 연필 깎는 것조차도 힘겨워한다고 생각했다.

 

아이독이 어느 날 내게 춤을 보여주겠다고 했을 때 나는 막춤이나 추겠지 싶었다.

그 아이는 무용과도 아니었고, 어떤 예술적 끼도 내게 보여준 적이 없었다.

아이독의 하얀 팔이 교실 절반을 가로질러 내게 향했다. 실내화 대신 토슈즈를 신고 아이독은 하얀 공기를 갈랐다. 발끝이 빙글빙글 도는 동안 그 눈동장에는 안개 비슷한 것이 끼었다.

그 색소옅은 눈동자가 이채를 발했다 생각하는 순간, 아이독은 내 팔을 붙잡고 한발은 서고 한 발은 공중에 띄웠다. 마지막. 마지막이에요. 선생님. 좋아해요.

그 아이는 그렇게 말했다.

나는 그 날의 일을 비밀에 붙였다.

 

 

그러다가 나는 그 학교를 떠났고 나이들어 같은 여교사와 결혼식을 올렸다.

그녀는 내가 가끔 기타를 치거나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을 좋아하던 순진한 여자였다.

하지만 아내는 아이독과는 달랐다. 아이독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정, 그것이 그녀에게는 없었다. 그야말로 안전, 평균에 상응하는 여인이랄까.

 

요즘 아이독의 기사를 자주 본다. 아이독은 아름답다기보다는 사랑스럽고, 사랑스럽다기보다는 한 시절의 아기처럼 달콤했다. 이 아이가 내가 그때 본 아이가 맞았을까?

토슈즈를 신고 마지막 피날레를 내 손을 잡고 하던 그 아이일까?

아이돌은 아이들에게 사랑받는다 혹은 그 시대의 아이들에게 잃어버린 뭔가를 찾는 사람들에게도. 아이독의 눈동자에서도 과거의 그 점은 깨끗하게 씻겨나가고 없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이젠 아이독도 대학생이 되어간다.

그녀가 아이돌이 되는데에는 가족들의 경제사정이 컸었다고 하는데 괜찮아지면 그만둘 생각이었을까? 그 눈빛이 되살아나는 건 언제쯤일까.

잠시나마 내 가슴을 떨리게 했던 아이독의 그 열정은...

아이돌이 물론 열정이 없어서 하는 길은 아닐 거다.

오히려 끼만큼이나 세상에 대해서 더 잘 알아가야 하는 길일수도 있다.

아이독을 언젠가 길에서 만난 적이 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아무 표정도 없었다.

나는 만나면 늘 그래야겠다고 생각한 것처럼 반가워하면서 사인을 요청했고, 그 무덤덤한 아이는 선글라스를 낀채로 팔에 진부할 정도로 다양한 팔찌를 흔들며 사인했다.

그리고 위악스럽게도 거기에 입맞춤을 했다. 진한 루즈가 도화지 가득 묻었다.

기자들이 와 소리를 내면서 요란스럽게 사진을 찍었고, 아이들은 아이독과 내가 같이 서 있는 잡지를 사들고 와서 인증샷이라고 외치기도 했다.

 

나는 아이돌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이돌 비슷한 무언가는 항상 되고 싶었다.

아이독의 모습을 좋아하게 된 것도 아마 그래서일 것이다.

사랑한다. 나의 아이돌. 진정한 세계의 너로 언젠가 돌아오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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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손이 그립소. 당신의 팔이 그립소. 그리고 당신의 손가락이 매만지던 당신의 목이 그립소. 왜 당신은...

 

복고당과 혁명당의 로맨스라고나 할까. 처음 이 편지를 읽고서 지오는 할 말을 잃었다.

복고당의 그 깐깐하기 그지 없던 남자가 이렇게 무드 있는 편지를 남길 줄 이야.

 

 

“저보고 설마 이걸 다 읽으라고 하시는 건 아니겠죠?”

 

 

그녀는 당수를 향해서 편지를 흔들어보였다.

 

 

“저자는 반동이라고요. 미쳤어요!”

 

 

“...반동이긴 하지만 위대한 예술가네. 동지. 그런 발언은 삼가게.”

 

 

“몸 반이 날아갔는데 위대한 예술가는 얼어죽었답니까? 위대한 예술가니까 어쩌구저쩌구해서 살아남은 반동이 얼마나 많은데요!”

 

 

“그건 당수인 나에 대한 도전으로 봐도 되겠나? 부관?”

 

 

그제서야 부관 지오는 입을 다물었다. 혁명당의 당수인 로인은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자네가 격분하는 건 이해하네. 자넨 여성 동지 중 최초로 내 부관까지 오른 인물이지. 그러니 여성성에 대해서 과도하게 반응하는 것도 무리는 아냐.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의 하반신을 잘라낸 테러가 바로 당수에 의해서라는 것을.

 

 

“스스로의 행동에 반성이라도 하시는건가요. 당수님?”

 

 

“반성은 안 하네. 나도 이 나이가 되다보니 조금은 편안한 임종을 맞게 해주고 싶어서.”

 

 

지오는 과거의 모습을 떠올렸다. 인텔리라는 이유로 하방을 지시받은 그녀의 부모들은 연줄이 있어서 살아난 다른 인텔리들과는 달리 운이 없었다.

결국 돼지감자만 캐어먹다가 죽고 말았는데, 그 이후 그녀는 이중인격적으로 무사히 살아난 인텔리를 반동이라고 규정했다. 지금 당수가 편지를 읽으라고 건네준 편지의 주인공인 인텔리 루카도 그와 비슷한 길을 걸었다. 아니, 다른 인텔리들의 우두머리로 혁명당과 한판 붙기도 했다.

 

그 전쟁은 숫적으로 적은 복고당의 대실패로 끝났고 우두머리인 루카는 폭탄과 총탄에 누더기가 되었지만 놀라운 과학기술의 힘으로 살아남았다. 어째서 혁명당이 그를 죽이지 않았는지 그녀는 늘 생각해보곤 했지만 아무도 그 이유에 대해서는 설명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복고당의 또 다른 반동 피라 모욥을 찾아내서 이어주자는 건가요? 저 백발이 성성하고 몸뚱이 절반만 남은 저 반동한테! 그 아줌마도 테러당했다면서요? 그리고 피라가 다른 일도 아니고 복고당의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서 지원군을 찾아다녔다는 것도 뻔히 아시면서 도대체 왜 이러시는 거에요? 미치셨어요? 당수?”

 

 

루카 치온 그는 전세기의 유명한 예술가였다. 디자인과 글의 영역을 넘어선 거장이었기에 사람들은 그가 그렇게까지 강성 정치인이 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핀들래인 왕국이 멸망하자, 그 자리에는 핀들래인 총리의 편을 드는 복고당과 그 반대편인 혁명당이 들어섰다. 벌써 실패한 사회주의와 마르크시즘은 등장하지 않았지만 어디서나 정치는 비슷한 법인 모양이었다. 서로간의 격돌이 심해졌고, 그 와중에 문화부 장관자리를 차지한 루카는 혁명당을 쫓아내기 위해서 안달이었다.

이 와중에 혁명당의 당수인 로인은 한가지 꾀를 냈다.

바로 예술가인 루카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방법은?

세상이 몇백번 바뀌어도 변함이 없었던 한가지 방법. 미인계.

 

“그러니까 가서 그 편지를 읽게나. 지오 동지.”

 

 

“...왜 꼭 저죠?”

 

 

지오는 모르는 일이었지만 피라 모욥은 애초에 루카를 끌어들이기 위한 미끼였다.

 

 

“임종이 며칠 뒤라더군. 임종학 박사가 그렇게 말한 걸 보니 정말 얼마 안 남은 것 같아. 어차피 죽을텐데 희망은 남겨둬야지.”

 

 

지온은 툴툴거리면서 편지를 당수앞에서 예습하기 시작했다.

 

 

[나의 사랑하는 루카. 나는 당신을 만나기 위해서 오렉 산맥을 넘고 있습니다. 당신의 마음이 아플지도 모르지만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야겠습니다. 구원군 모집은 실패했습니다.

복고당은 남부와 서부에서 궤멸당했고, 조만간 동부도 함락될 것 같습니다. 나는 혁명당의 온건파에게 포위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붉은 방>으로 날 데려갈 생각인 듯 합니다.]

 

 

그 중간에 지온이 로인에게 눈을 돌렸다.

 

 

“당수. 붉은 방이 뭐죠?”

 

 

“그냥 예습할 필요도 없겠군. 그렇게 곤란한 질문을 하면 질문할 때마다 대답해줘야 할테니. 자넨 몰라도 돼. 어서 루카한테 가서 읽어줘.”

 

 

지오는 툴툴거리면서도 당수의 방을 나와 침대에 누워 반쯤 눈을 감고 있는 루카에게 그 편지를 읽어주었다. 루카는 눈만 살짝 떴을 뿐,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붉은 방이 도대체 뭐야. 늙은 동지?”

 

 

지오가 빈정거리듯 루카에게 말을 걸었다. 루카는 희미한 미소를 지어보이고는 이내 돌아누웠다.

 

 

“붉은 방이라...”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기에 루카의 희미한 이 반응은 지오에게 놀라움을 불러일으켰다.

고문과 테러에도 무반응으로 일관하며 심지어 마취없이 다리를 잘라낼 때도 고통스러워하지 않았던 인물이 아니던가?

 

 

“피라가 성공했군.”

 

 

뭔놈의 일이 이리 복잡해? 라고 생각한 지오는 당수에게 가서 사실대로 말했다.

 

 

“붉은 방이 뭔진 모르겠지만, 반동이 기뻐하는 일을 하는게 당수가 하는 일인가요? 다음 즉결재판때 당수를 피고로 세워도 아무도 말 안 할걸요?”

 

 

로인에게 딸처럼 키워진 지온이기에 로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웃을 뿐이었다.

 

 

“기뻐하더란 말이지?”

 

 

“네.”

 

 

“그럼 잘됐군. 피라의 행방이 중요해졌군. 계속해서 편지를 읽도록 해.”

 

 

지온은 인텔리의 자식이었지만 사회적 지식이 일천했다. 그래서 종종 인텔리들을 비하하면서도 그들이 남긴 유산을 읽어보곤 했는데, 그날의 당첨은 세계사와 과학사였다.

커리큘럼은 항상 로인이 짜주곤 했는데, 당수의 딸처럼 크다보니 지온은 모든 지침을 로인에 맞춰서 따라갔다.

 

 

[오렉지방에서 피라 모옙은 당과 모든 연결이 끊어진 채로 붉은 방에 끌려갔다. 그리고 그 이후 그녀의 연락을 받은 지원군이 갑자기 실종되는 일이 일어났다. 동부 지구에서 가장 최극단에 있던...]

 

 

“지오동지?”

 

 

그녀가 책을 다 읽기도 전에 이재민이 그녀를 부르러 왔다.

 

 

“왜 그러시죠? 재민 동지?”

 

 

그녀의 말에 갈색 머리카락의 훤칠한 청년인 그가 얼굴을 붉혔다.

 

 

“루카가 당신을 찾고 있습니다.”

 

 

“빌어먹을 변태 노친네 같으니!”

 

 

낯뜨거운 피라와 루카의 편지를 읽느라 짜증난 지오는 그렇게 내뱉고는 루카의 호출에 응했다. 물론 당수가 감시하지 않으니 그 와중에 루카에게 욕설섞인 폭언을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늘 그렇듯 눈을 반쯤 감은 루카는 그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그 다음 편지를 읽을 것을 주문했다. 로인이 준비해준 편지는 약 몇 십통은 남아있었다. 언제까지 그에게 편지를 읽어줘야 할지 막막할 따름이었다.

그렇게 그날의 막막한 일정을 마치고 나가려는 지오에게 루카가 말했다.

 

 

 

“이름이 뭔가? 신병.”

 

 

“...난 신병이 아냐. 당수님 부관이라고.”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반말을 하고 말았다. 그러자 루카가 처음으로 소리를 내서 웃었다.

 

 

“그랬겠지. 하긴 그녀도 처음엔 부관이라고 하더군.”

 

 

<그녀>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오는 더 이상 들척치근한 편지를 읽는게 지긋지긋해지고 있었다. 이제 겨우 2통 읽었는데!

 

 

“개미 좋아하나? 혁명당의 모토가 그거지? 개미를 닮아라.”

 

 

“그래서 뭐.”

 

 

“개미는 개미다워야 해. 개미는 2차원밖에 모르지. 그 개미를 성층권에서 떨어뜨린다고 개미가 3차원을 이해하겠나? 하지만 이럴 수는 있겠지. 2차원의 자신도 잊어버릴 수도..."

 

 

지오는 문을 쾅 닫고 나왔다.

개미타령까지 하는 그에게 진력이 나버린 탓이었다.

피라도 처음에 그랬다는 것을 지오는 알 수 없었다.

 

 

“땡감 씹어먹은 표정 하지 말고 악수나 합시다.”

 

 

루카는 자신의 비서로 온 피라 모욥에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모욥은 그의 악수를 피했다.

피라는 가볍게 목례를 함으로서 우선 곤란함을 지나쳤다.

 

 

“아쉽군.”

 

루카는 혀를 끌끌차면서 모욥에게 무엇인가를 던져주었다. 모욥은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잡았고, 그것이 반지라는 것도 이내 알아차렸다.

 

 

"장관님!“

 

 

의아함과 경멸의 반응에 루카는 고개만 저었다.

 

 

“내가 그토록 바보로 보이오? 피라 모욥? 당신네 당수도 마찬가지지. 당신은 내 취향에 너무 잘 맞는 여자야. 그래서 유혹 좀 해보라고 밀어넣었겠지. 당신은 내가 마음에 안 들어도 억지로 온 거고. 나는 솔직합니다. 당신을 좋아하고 있소. 처음 부터. 그러니까 나중에 내가 마음에 들면 그 반지를 껴주면 좋겠소. 자세한 사이즈를 알고 싶었는데 그렇게 거부를 하니 알 수가 없군. 사이즈가 안 맞

아도 억지로 껴주길 바라오. 날 좋아한다면.”

 

 

그 이후부터 피라 모욥은 그를 의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년 뒤에는 그 반지의 사이즈를 고쳐서 끼고 다니는 것을 본 당인 혁명당에서도 알게 되었다.

 

 

“출당하겠습니다. 로인.”

 

 

혁명당은 과격파의 집단이었다. 군주가 지배하던 시절, 비행기를 납치해 극동지역까지 끌고 간 자들이 있던 집단인 만큼 출당은 반역이며 사형집행까지 가능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당신은 날 이해못합니다. 루카 치온. 내가 근 20년을 몸담아온 곳이 혁명당입니다. 거길 버리고 당신의 부관이 된다는 것은 내게 사랑과 일을 함께 하라는 것과 같습니다. 내 마음은 항상 당신 곁에 있겠지만, 과연 출당이 옳은 행동인지 의문입니다.

루카. 당신은 문화 혁명당원을 모조리 현직에서 쫓아냈는데 그들은 당신의 원수이기 이전에 당신이 사랑하는 나의 친구들입니다.>

 

 

이 편지가 실제로 효력을 발휘했는지는 알기 어려웠다.

 

 

“아, 그랬지. 피라가 그렇게 말했었지.”

 

 

반신불수의 노인 치고는 입성이 깔끔한 루카는 과거를 떠올리면서 눈물을 흘렸다.

 

 

“루카...”

 

 

지온의 말에 루카는 처음으로 눈을 크게 떴다.

 

 

“내 머리에 손을 얹어주게. 부관.”

 

 

<당신은 내게 늘 말했죠. 내 머리에 손을 얹어주겠소? 하고. 혁명당을 제거하는 일만 빼면 당신이 하는 일에서 내가 불만을 가지는 일은 하나도 없을 정도로 당신은 내게 완벽한 사람이었답니다. 당신은 항상 내게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했고, 인민들을 위해서도 그랬어요. 단지 방법이 글렀을 뿐.>

 

 

“내 머리에 손을 얹어주시죠. 부관님.”

 

 

장난스럽게 루카가 말하자 피라는 고개를 흔들었다.

 

 

“안돼요. 아까전에도 머리를 만져줬잖아요. 루카. 계속 그러면 습관된다고요.”

 

 

“붉은 방으로 당신이 떠나면 만져줄 사람도 없다오. 붉은 방에 대해서 내가 이야기했었나?”

 

 

“아니오. 루카.”

 

 

거기까지 듣고 지오는 돌아왔다. 로인은 그날따라 일이 안 풀렸는지 인상을 쓰고 있었다.

 

 

“상황이 안 좋네. 지오.”

 

 

“...뭐가요? 저 노인네한테 로맨스 소설 읽어주는 것 말인가요? 나름 재미있긴 하던데요. 단지 저 노인이 자기 감상에서 못 빠져나와서 그렇지,”

 

 

“단순한 감상이 아냐.”

 

 

로인이 천천히 말했다.

 

 

“붉은 방은 우리에게 남은 단 하나의 탈출구네. 인민들이 반동을 일으키기 전에 알아내야 해. 피라의 생존도 확인해야 하고. 저 친구가 죽기 전에 말이야. 자백제까지 써봤는데 전혀 알 수가 없으니...”

 

 

온화한 로인의 얼굴에서 자백제 이야기가 나오자 지온의 얼굴이 잠시 굳어졌다.

임종을 맞이하는 노인에게 기쁜 이야기를 전달하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니...

 

 

“당수님. 그럼 그 편지들은?”

 

 

“전부 진본이네. 문제는 저게 <붉은 방>에서 발견되지 않았다는 거야. <붉은 방>은...”

 

 

그 말이 다 이어지기도 전에 통신 병사의 비명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복고당으로 추정되는 집단 접근! 비상사태입니다!”

 

 

그리고 메인 태블릿에 한 여자로 보이는 인물의 영상이 잡혔다.

그 사람은 놀라울 정도로 지오와 닮아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바로 피라 모욥이었다.

 

 

“복고당은 이미 20년전에 슬로인에서 얼어죽었어. 나타날 리가 없는데! 지오!”

 

 

그말 그대로였다. 화면에 잡힌 피라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전설의 괴물인 스켈레톤이나 골렘을 닮아보였으니까.

 

 

“네. 당수님!”

 

 

뭔가 미심쩍기는 했지만 지오가 빠르게 대답했다.

 

 

“루카에게 가봐!”

 

 

<당신과 헤어지기 전 나는 당신의 목을 깨물어서 피를 맛봤소. 피맛은 어느 누구나 비슷하지. 당신의 피는 좀 더 달줄 알았던 내가 잘못이었소. 사랑하는 , 나의 사랑하는 피라.

오렉 산맥 너머, 내가 복고당을 창당하게 되었던 원인인 곳이 하나 있소. 사람들은 때에 맞춘 정치를 하는 천리안이라고도 하지만, 잔혹한 술수를 쓰는 마키아벨리적 인간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오. 그래서 복고당의 상징물은 독수리지. 멀리 보니까. 개미가 아닌 독수리는 3차원을 바라보니까...그래서 난 당신이 사랑스러우면서도 당신의 눈을 항상 키워주고 싶다는 생각을 항상 했었소...>

 

 

지오가 루카에게 도착했을 때 루카는 소형 태블릿으로 신문을 보고 있었다.

 

 

“루카!”

 

 

반신불수로 항상 눈만 깜박거리던 그 루카가 아닌 듯 했다.

 

 

“오, 지오...라고 했나. 웬일인가?”

 

 

“피라가...”

 

 

“아. 그거.”

 

 

루카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온몸에 묶어놓았던 장치들은 다 벗겨진 상태였다.

 

 

“임종학 박사가 예측한 임종일은 이제 하루 남았어. 로인이 알고 싶은 것도 더 많았을 텐데. 초조해했겠군.”

 

 

“복고당이!”

 

 

“유령이야.”

 

 

루카는 자신의 힘으로 자동 휠체어에 타 움직였다.

 

 

“그래도 죽기 전에 피라의 모습을 한번이라도 더 보게 되는군.”

 

 

그리고 지오는 그때 보았다. 휠체어에 탄 루카의 머리위로 한 여자의 손길이 머무르는 것을. 그리고 루카의 몸이 공중에서 뜬 채로 다시 침상으로 옮겨지는 것을.

화면에서 튀어나온 듯한 피라의 손가락이 지오의 손가락안으로 마치 물이 스며들듯이 스며들고 있었다.

 

 

“아악!”

 

 

고통은 아니었다. 하지만 희열도 아니었다. 그것은...과거였다.

 

 

[루카는 뻥쟁이래요!뻥쟁이래요~!엄마도 가짜래요~!]

 

 

루카 치온은 유치원에서 튀는 아이였다. 부모가 없었기 때문에 그는 항상 외롭고 따돌림을 당하는 학생이었다. 보모들도 그에게는 애정이 없었다. 어느날 루카는 소풍을 갔다가 아이들과 싸웠다는 이유로 창고에 갖혔다.

그리고 루카는 그 방에 갇힌 지 3시간만에 풀려났지만, 기실은 2시간반동안 행방불명이었다고 했다.

보모들은 자신들이 본 것을 믿을 수 없었기에 저절로 입을 다물었고, 루카는 그날부터 무언가에게 계시를 받은 것처럼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루카는 그방에서 한 여자천사를 보았다고 했다. 그 천사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고.

그 이후부터 루카는 신들린듯이 출세를 해나갔다.

그날 루카는 무엇을 보았던 것일까.

 

 

“피라. 시간의 흐름이 당신을 이렇게 만들었군. 당신을 괜히 그 방으로 보낸 것이었을까.”

 

 

루카에게 언젠가부터 진짜 다리가 생겼다. 루카는 지오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렇군. 항상 옆에 있었군. 20년을 거슬러서. 로인은 알고 있었어.”

 

 

“붉은 방은...”

 

 

“그 방은 미래와 연결된 구멍이지. 그 구멍을 통해서 미래를 알게 되면 강력한 힘을 가지게 되는 걸세. 부관. 아니. 피라. 난 구원군보다도 당신이 미래를 봄으로써 날 이해하게 되길 바랬지. 물론 구원군도 그 구멍을 통해서 빠져나오면 강력해지리라 믿었지. 하지만 그건 인간이 통제할 수 있는게 아니었어. 나도 통제할 수 없고, 로인도 마찬가지고. 난 순진하게도 로인이 꺼낸 미인계에 빠져든 것 같아.”

 

 

헛헛한 웃음을 지으면서 루카가 선반위의 무언가를 집어들었다.

 

 

탕!

 

 

그리고 그 소리와 동시에 피라와 구원군도 대형 태블릿 화면에서 사라졌다.

지오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혁명당원부대 대부분이 정신적인 충격을 받고 쓰러져 있었다.

지오는 들었다.

루카의 마지막 말소리를.

 

 

“피라. 마지막으로 내 머리에 손을 얹어줘.”

 

 

지오는 루카를 끌어안고 그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시원한 기운이 그녀에게서 그에게로 빠져들었고, 루카는 그렇게 임종학 박사가 정해준 시간에 맞춰 숨을 거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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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사정으로 좀 길게 쉬게 되었습니다. 보시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현재 12월까지 휴재, 조금 더 길게 쉬면 내년 2월이나 3월쯤 복귀할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회의감이 드는 부분도 있었고-제 자신의 역량에 대해서.-이모저모 건강도 안 따라주고 해서 그 기간동안은 그냥 열심히 책을 읽고, 운동도 열심히 하려고 합니다.

운동 중요하더군요. 다들 건강 조심하시길.

글쓰는 사람한테 그 분야가 맞나 안 맞나는 중요한 문제인것 같더라고요.

막상 뛰어들 때는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그 뒤부터가 중요한 듯.

쉬는 기간동안 잠시 서평블로그로 바뀝니다.

남들이 어린 시절에 다 보던 책들을 이제사 보고 서평쓰자니 부끄럽지만(알라딘은 서평들이 하나같이 훌륭하더라고요.)그래도 독후감도 필요한 것 같아서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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