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희의 수다를 들으면서 저녁식사가 시작되었다. 여전히 빠짐없는 식사기도.
길준도 대충 웅얼거리면서 시간을 떼웠다.
밥을 먹는 둥 마는 둥했으니 윤희의 눈에 안 띌 수가 없었다. 윤희는 푸짐히 먹으라면서 길준에게 신경을 썼다,
그리고 식사를 마친 후 길준은 예전과는 다르게 병률과 윤희와 시간을 좀 보내고 싶다고 말했다.
“그래, 이젠 뭐하려고?”
병률이 마치 형님이라도 되는 것처럼 물어왔다. 하긴 그럴만도 할 것이다. 병률이 적어도 그보다는 몇 개월 정도 빨리 태어났으니까. 동생이 없는 병률로서는 그럴 기분이 들지도.
하지만 그 짓을 저질러놓고서도 아직까지 태연하게 형님노릇을 하려고 들다니.
“그냥 술이나 먹고 살지 뭐.”
피해가고 싶은 주제라 적당히 넘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 태도가 문제였을까.
병률이 반대하고 나섰다.
“그럼 안돼! 죽은 제수씨가 얼마나...”
네녀석이 뭘 안다고 제수씨 타령이냐.
더 이상 할 말도 없었고, 화염같은 분노가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그는 참았다.
“그러면 넌 내가 뭘하면 좋을 것 같냐. 응? 안정적인걸로만 따지면 지금까지 다녔던 직장이 제일이잖아. 내가 뭘 할 것 같아?”
“그건 욱해서 한거잖아. 솔직히 나는 네가 왜 네 인생을 이렇게 함부로 다루는지 모르겠다.”
“......”
그건 사실이었다. 지나치게 감정적인 걸 인정하는 수 밖에 없었다.
어째서, 어째서 조금 더 마음을 다잡지 않았을까.
심장이라도 뽑아내는 독한 마음으로, 같은 직장에서 이놈을 감시하지 않았을까.
잡을 때까지 조금 더 기다리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건 길준의 천성탓이었다. 기다릴래야 기다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자신의 머리맡에서, 자신의 왼쪽에서, 혹은 오른쪽에서, 혹은 천장에서 계속 손가락으로 병률을 가리키는 아내의 환영을 견딜 수가 없었다. 적어도 술이라도 마시지 않으면 맨정신으로는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 그럼 이제 뭐하고 살지 이야기해주지. 난 앞으로 지혜를 죽인 놈을 찾아서 갈갈이 찢어죽여버릴거야.”
갈갈이. 에 방점을 강하게 찍었다. 옆에서 과일을 깎고 있던 윤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약간 새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안돼요. 길준씨!”
“왜요. 갈갈이가 안되는 겁니까? 아니면 찢어죽여버리는 게 안되는 겁니까? 그것도 아니라면 찾으면 안된다는 건가요?”
“그건 경찰에게 맡겨야죠!”
그말을 했다고 윤희는 자기 입을 손으로 살짝 막았다.
“죄송해요. 길준씨. 미안해요.여보.”
“아니야. 괜찮아. 당신은 잠깐 자리 좀 피해줄래?”
“난 경찰이었어. 너도 경찰이지. 근데 아직까지 의심되는 용의자만- 그것도 잡지도 못한 채로, 그냥 그런 놈이었을 거다.- 추정만 하고 있잖아. 사건 당시 사용되었던 총탄도 발견 못했어. 총은 당연히 발견못했지.”
“그건 심장을 관통한 탄환이었기 때문에...”
그때 아내의 환영이 병률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지혜의 손가락이 정확하게 병률의 옷가지들이 있는 것을 가리켰다. 그 중에서 반팔 옷가지를 가리켰다.
반팔이라서 화약이 묻지 않을 터였다. 그렇다면 그 당시 옷을 갈아입었으면 조사를 했다 하더라도 용의자 망에서 벗어났으리라.
길준의 머리에 그 당시 상황이 그려졌다.
[왜 그러는거에요. 병률씨.]
[.....]
병률이 몇 달동안 뒤를 밟다가 어느 날 지혜가 정체를 알아차리는 날이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작가랍시고 글을 쓰던 날, 오전. 오전이었을 것이다.
시반이 나타나는 시각을 최대한 조작했었을 것이고, 오후에 발견되는 시간에는 자신과 함께 있었을 것이다.
병률은 다잉 메시지라도 남길 수 없도록 신속하게 지혜의 심장을 쏘아맞혔다. 그리고 두 번째 탄환은 아이가 있던 배를 향해 쏘았다.
그렇게 해서 길준의 아이와 지혜가 같이 죽은 것이다.
애초의 목적은 아마도 아이였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애초에 죽일 생각은 없었는데 생각이 바뀌었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띠리리리!
병률의 휴대폰이 날카롭게 울렸다. 병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전화받고 올게.”
“아냐, 난 이제 가려고...”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섭섭한 말 했다고 그러는 거 아니지? 좀 더 있다 가라.”
길준은, 화장실에서 전화를 받는 병률이 킥킥 웃는 소리를 들었다.
누이동생이 곧 결혼할 예정이라고 하더니 그 문제로 대화를 나누는 듯 했다.
그 모습조차도 섬찟할 정도로 싫었다.
아내의 환영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와 병률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 아내의 손가락이 병률을 가리켰다.
[하나님께 기도드리자. 잘 될 수 있도록 알았지?]
뭉쳐있던 살의가 폭발했다. 그는 부엌에서 날이 잘 드는 부엌칼을 집어들었다. 윤희의 비명소리가 들렸지만 그는 더 이상 자제할 수가 없었다. 화장실에서 병률이 걸어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를 향해서 칼을 휘둘렀다.
“야! 이 새끼야! 죽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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