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있지 말아요 - 당신의 가슴속에 영원히 기억될 특별한 연애담
정여울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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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빠진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뜨거운 반어법의 씨앗이 숨어 있다. 숨이 끊어질 듯 사랑하면서도 ‘잘 있지 말아요’라고 속삭이고, 편지를 쓰고 싶지만 차마 보내기는커녕 완성할 수조차도 없다. 절대 놓아주고 싶지 않지만 ‘그냥 지금 헤어집시다’라고 선언하고, 그녀를 결연하게 떠나보내면서도 자신의 사랑이 무거운 저울추처럼 그녀에게 평생 매달려 있을 거라는 저주를 서슴지 않는다. 사랑하기에 붙잡을 수 없고, 보낼 수 없기에 차라리 놓아버리는 마음의 정체는 무엇일까.” (14페이지 프롤로그 중에서) 

 

그래, 궁금하다. 사랑에 대해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모른다고도 할 수 없고, 모르는 것 같으면서도 잘 알게 되는 부분들이 갑자기 튀어나오기도 한다. 그러니까, 사랑은 매번 전문가도 되게 만들고 백치도 되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잘할 것 같은데도 어렵고, 만만하게 보이다가도 레벨 최상급의 문제 같고, 두려워서 다가가지 못하다가도 한 손만 내밀었을 뿐인데 쉽게 시작되는 것이기도 하고. 울고 웃는 인생사에서 사랑이란 단어가 차지하는 감정적인 비중이 참, 크다. 일상에서 만나는 사랑도 그렇지만 책 속에서 만나는 사랑 역시 마찬가지다.

 

친구처럼 시작했던 연인은 다시 친구로 돌아가지 못한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우연처럼 시작된 츠네오와 조제의 만남은 현실 속 불가능한 조건들 속에서 이런 사랑이 가능한 젊음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조제와는 다른 세상에 한 발을 걸치고 있는 츠네오의 미래는 아픈 마음을 붙잡고서라도 온전하게 조제에게만 향할 수는 없다. 깊은 바닷속 같은 마음으로 살았던 조제의 현실을 츠네오는 감당할 수 없는 부담과 함께 돌아서는 것. 언젠가 츠네오가 기억해 낼 조제의 모습에서 어떤 감정이 피어오를지는 모르겠으나, 한때 불가능해 보이는 사랑을 열정적으로 피웠다는 기억만은 선명할 거라 믿는다. 조제와 함께했던 시간, 그때만큼은 츠네오의 진심으로 조제를 사랑했을 테니.

 

그들은 왜 서로 사랑하지만 헤어질 수밖에 없을까. 그들은 왜 함께 살면서도 행복할 수 없을까. 남자들이 상대방의 ‘진실’을 찾으려 할 때, 여자들은 상대방의 ‘이해’를 원한다. 여자들이 ‘미래’를 계획하며 행복의 주문을 걸 때, 남자들은 ‘과거’에 집착하며 그녀들을 유도신문 한다. 여자들이 지금이야말로 최고의 행복한 순간이라 느낄 때, 남자들은 행복을 방해하는 갖가지 장애물을 확인하며 조바심을 느낀다. 이 영화는 감동적인 러브 스토리가 아니라 사랑에 실패할 수밖에 없는 현대인의 불안을 예민하게 포착한다. (31페이지 『클로저』)

 

작업 선수라 자처한 발몽(『위험한 관계』)은 작업 대상 트루벨 부인에게 진심과 열정을 발견하면서 진정한 사랑을 깨닫는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늦었다. 발몽은 트루벨 부인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주었을 뿐 아니라 그 자신의 목숨마저 끊어지는 상태였으니까. 시라노(『시라노』)는 연애편지를 대필하면서 사랑을 키워나간다. 항상 당당했던 자신의 큰 코가 사랑을 알게 되니 콤플렉스가 되어버린다. 그래서 크리스티앙의 편지를 대신 써주면서도 사랑하는 록산에게 얼굴을 내놓지 못한다. 하지만 진짜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되면 마음은 달라진다. 아쉽게도 너무 오랜 시간 후에 알게 된다는 것, 다시 사랑을 시작하기도 전에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진정한 연애를 시작하기도 전에 사랑에 발목 잡히고, 뭔가가 채워져 사랑에 다가가려 하니 타이밍이 발목을 잡는다.

 

사랑을 거부하는 자에게도 기어코 사랑은 온다. 사랑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에게 찾아오는 사랑은 오히려 더욱 드라마틱 할 때가 있다. 지나친 에고 때문에, 자신을 향한 극대화된 사랑 때문에 남을 사랑하는 감성의 회로가 고장 나버린 사람들. (151 『달과 6펜스』)

 

사랑이 수반하는 또 다른 의미는 이별이다. 사랑의 완성이 다양한 모습으로 이어지고 있을 때 웃을 수 있다. 반면 어떤 식으로든 이별-그게 죽음이라 할지라도-로 갈 길을 택한다는 것은 사랑이 가지는, 피해갈 수 없는 길이다. 한눈에 반한 순수한 사랑 이면에 자신들의 눈에 보이는 것만을 확인하고 죽음을 택한 두 젊은이의 사랑(『로미오와 줄리엣』)은 죽음으로 완결되었다. 온몸으로 치러야 했던 속죄의 모습 그대로를 투영한 브리오니(『속죄』)는 치유될 수 없는 긴 이별을 불어온다. 연기에 몰입하다가, 그 주인공으로 착각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 임무의 대상인 이 선생을 바라보는 시선이 변해버린 왕지아즈(「색, 계」)에게 다가온 것 역시 죽음이다. 존재 이유와 목적이 배우처럼 타인을 살아가는 것으로 마지막을 장식한다.

 

관객들은 오셀로의 비극을 통해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진실은 분석이 아니라 진심 어린 믿음으로 완성된다는 것을. 사랑은 흠 없는 완벽이 아니라 흠조차 기꺼이 끌어안는 너른 마음으로 완성된다는 것을. (194페이지 『오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만나야만 하는 이유가 존재한다. 정여울은 이 책을 4개의 카테고리로 나누어 책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 마지막 카테고리의 이름은 ‘인연’이다. 앞에서 열정적인 사랑이나 연애 그리고 이별까지 이야기하고서 마지막에 그 인연이라 붙인 이름을 가만히 들여다보게 한다. 그 이유가 있다. 사랑에 대한 그 많고 많은 정의와 위협들이 한번 휩쓸고 지나갔다. 이 정도만 해도 사랑에 진저리쳐질 것 같다고, 미리 밀어내고 싶은 상황이 올지도 모를 것을 예상했던 것은 아닐까. 그래도 괜찮다고.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간다고 해도, 사랑 그것, 한번 해보라고 말하려는 듯이. 그래서 이야기는 다시 시작된다.

 

오만한 남자와 편견을 가진 여자가 결국에 확인하게 되는 것도 사랑이고(『오만과 편견』), 문맹의 치욕과 전범의 누명을 무릅쓰고 지키고자 했던 것 역시 사랑이다(『책 읽어주는 남자』). 사랑을 배운 적도, 그러니 당연히 해본 적도 없는 남자를 품어주던 여자는 마지막까지 그 모습을 지킨다(『제인 에어』). 눈물 한 방울의 기적처럼 얼음조각을 빠지고 부서지게 하면서 알게 해준 사랑(「눈의 여왕」)도 존재한다.

 

사랑이 진정 아름다운 이유는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의 소망을 충족시켜주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사랑을 통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희망. 그 사랑을 통해 그들 주변의 세상을 좀 더 환하게 밝혀줄 수 있다는 희망이야말로 사랑을 아름답게 만드는 보이지 않는 빛이다. 소냐의 사랑은 라스콜리니코프의 삶뿐 아니라 죄의 구렁텅이에 빠진 수많은 죄수들의 삶에, 라스콜리니코프로 인해 엄청난 충격을 받은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희망을,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는 용기를 준다. (290페이지 『죄와 벌』)

 

 

이들의 이야기가 책에서만 머무르고 있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 아니다. 적어도 내가 봤을 때는 아니라는 말이다. 소설보다 더 소설 같고,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인생들이 주변에 많이 있다. 그러니 책은 책 안에서만 존재하는 이야기로 독자를 만난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정여울이 책을 통해서 들려주는 다양한 사랑의 모습들 역시, 마찬가지다. 이 책을 통해 내가 만난 많은 이야기가 삶과 사랑에 많이 침투한다. 로미오와 줄리엣을 보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오직 사랑만을 보게 했던 한때를 기억하게 한다. 편견으로 하나의 사랑을 떠나보낸 사람은 엘리자베스가 아닌, 나였다. 록산에게 썼던 시라노의 대필편지는 철없는 어린 시절의 한 장면처럼 떠오른다. 이 책에서 등장하는 많은 책과 영화가 공감과 위로의 바람을 불러오고 있다.

이렇게, 우리 삶에서 사랑이란 감정이 불러오는 것은, 너무도 많다. 정여울은 마치 그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이 거침없이 사랑이란 화두를 던진다. 굳이 콕 집어서 사랑에 관한 비결이나 예외까지 포함해서 구체적으로 풀어놓는다. 우리가 시작하는 사랑이나 연애, 이별, 계속되는 인연과 결혼까지. 사랑이 뿜어내는 그 많은 감정의 의미를 풀어헤친다. 다양하게 다가올 수 있지만, 사랑은 역시 불가능한 많은 것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을 끊임없이 시험하게 하고, 우리 삶에 침투해 많은 것들을 변화시킨다. 때로는 풍요로움과 만족감을, 때로는 결핍과 외로움을 선사하기도 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이 책에서 소개해준 많은 책 중에는 고전이 많다. 언젠가 우스갯소리로, 우리가 지금 읽고 있는 로맨스소설은 고전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로맨스소설 속에서 주인공들 이름만 바꾸면 우리 이야기가 된다고 하기도 했다. 우스갯소리로 멈출 이야기는 아니었다. 비록 씁쓸함이 웃음 끝에 달렸지만, 공감하는 부분이 많았으니까. 이 책을 통해서 오래전 기억을 꺼내게 하는 책들과 조금은 다른 시선으로도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보여준다. 잊고 있었던 것들은 마음이 먼저 기억한다. 순간적으로 피어오르려 했던 그리움이나 외로움은 이들의 사랑이 덮어버린다. 한때의 우리, 불어오는 바람이 스산해질 것을 두려워하는 우리에게, 정여울이 보내는 위로처럼 들리는 이야기다. 바람이 조금, 불어도 괜찮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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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민음사입니다. ^^


순식간에 가을의 정점으로 성큼 들어간 듯

날씨가 많이 쌀쌀해졌습니다.


점점 추워지는 날씨에 독자 여러분의 마음을 녹여드리고자,

민음사에서 야심차게 준비한 서평단 이벤트!!


바로

오늘의 젊은 작가 시리즈 3번째 신간

윤고은의 <밤의 여행자들>입니다.

알라딘 상품 보러가기_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7473038

 

남색 바탕에 흐드러지는 선홍빛 은방울 꽃 일러스트가 무척 예쁩니다.
무엇보다 고급스러운 양장 커버가 돋보이는 책입니다.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읽기용으로도 그만,
소장용으로도 손색이 없습니다~

그럼 소설 내용을 살펴볼까요?



줄거리_
재난과 여행의 결합 상품을 판매하는 여행사 '정글'의 10년차 수석 프로그래머 고요나.
잘나가던 그녀에게 어느 날 위기가 닥쳐온다. 상사인 '김조광' 팀장이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녀를 노골적으로 성추행한 것. 그러나 성추행 자체보다 더 문제적인 것이 있다.

'김'이란 인간은 여태껏 자리가 위태로운 사람들만 골라 성추행을 일삼아 왔기에
그것은 일종의 옐로카드와 마찬가지인 셈이다. 퇴출위협을 느끼는 요나.
그렇다고 계속되는 김의 성추행을 참아 주고 있을 수만도 없다. 모 아니면 도다.

요나는 결국 사표를 제출한다. 뜻밖에도 김은 사표를 수리하는 대신,
요나에게 한 달간의 휴가를 제안한다. 다섯 개의 퇴출 후보 여행지 중에서
하나를 골라 소비자 입장에서 여행을 다녀온 후 보고서를 제출하면 출장으로 처리해 주겠다는 것이다.



윤고은 장편소설 <밤의 여행자들> 중_
"자네 아직 젊지 않나? 근데 왜 이렇게 말을 못 알아들어?"
요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몸을 돌려 김의 손길을 피했다. 이번에는 김이 요나의 블라우스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요나의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김의 다른 모습을 봐서가 아니었다.
상사에게 성추행을 당해서가 아니었다. 요나가 아는 바에 의하면, 김은 늘 퇴물들만 성추행 대상으로
삼았다. 옐로 카드를 받았거나, 곧 받을 예정인 사람들. 어쩌면 김의 성추행자체가 옐로카드인지도
몰랐다._18~19쪽


다음 장면이 어떻게 전개될 지 벌써부터 코끝이 간질간질한데요!
<1인용 식탁>에 이은 윤고은 작가의 신간 <밤의 여행자들>
서평을 써주실 분 들은 아래의 양식으로 해당 날짜까지 지원해주시면 됩니다.
많은 참여 부탁드리겠습니다.


 

서평단 모집 상세내용_
응모 방법 : 리뷰 페이지를 자신의 블로그에 스크랩 한 뒤 읽고 싶은 이유를
간단하고 성실하게 댓글로 작성하여 스크랩 링크와 함께 남겨주면 응모 완료.
응모 기간: 2013.10.16 - 2013.10.27 (12일간)
추첨 인원: 20명
서평단 발표: 2013.10.28 (월) 오후
서평 기간: 2013.11.01 - 2013.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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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페이지를 펼치니, 이렇게 쓰여 있다.

 

사랑이 시작되었을 때

남자는 사랑인지도 모른 채 기뻐하고 여자는 “사랑일까? 하며 묻는다.

사랑이 깊어질 때

남자는 사랑에 익숙해지고 여자는 사랑에 불안해하기 시작한다.

사랑이 끝나갈 때

남자는 그녀를 버리고 여자는 ‘사랑에 빠져 있던 나’를 버린다.

 

문장들이 자꾸 귓가에 맴돈다. 지나간 시간을 하나하나 꺼내어 확인해보기도 한다. 그때 내 마음은 이랬나? 그때 그는 그랬던 거였나?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는다. 다만, 저 문장들을 보니 한때 나에게 지나갔던 시간들이 어땠었는지 자꾸 파고들게 된다는 것. 그래, 그랬었던 것 같다, 라고 생각하고 싶어지게 공감을 만들어내는 문장들이다.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고 싶지는 않지만, 이번만은 그러고 싶어진다. 사랑을 시작하기 전, 사랑이 진행 중일 때, 사랑이 끝나갈 때의 우리의 마음이 그랬노라고. 또한 그런 시간들은 다시 반복되기도 한다고.

 

 

 

 

사랑이 그대들을 부를 때 그를 따르라.

비록 그 길이 험하고 가파를지라도

사랑의 날개가 그대들을 감싸 안을 때 사랑에 몸을 맡겨라 비록

사랑의 날개 속에 숨은 칼이 그대들을 상하게 할지라도……

 <예언자> 중에서 - 칼릴 지브란

 

 

 

 

여자는, 남자가 자꾸만 헤어진 애인의 이야기를 하는 게 싫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그녀의 이름이 듣기 싫다. 괜히 심통이 난다. 이제껏 잘 들어줬는데 갑자기 그의 지나간 사랑이야기가 듣기 싫어진다. 괜히 뾰로통해지고 마음이 삐딱해진다. 여자는 듣는 일을 멈추고 남자는 여자의 이상한 낌새에 말하는 것을 멈춘다. ‘왜 이러지?’

 

 

 

 

한 사람이 누군가를 선택한다는 것은 ‘치명적 이끌림’이다.

<LOVE(사랑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 중에서 - 아얄라 말라크 파인스

 

 

 

 

 

남자와 여자는 친구 사이다. 두 사람 모두 헤어진 누군가와의 상처로 공감을 만들어내며 친구가 되었다. 이별의 아픔을 누구보다 잘 알 것 같은 대상끼리 만나 서로의 아픔을 들어주고 공유하고 공감하면서, 친구라는 이름으로 함께 했다. 두 사람은 그런 사이였는데, 어느 날 갑자기 여자는 남자의 지나간 사랑이 듣기 싫다. 그냥, 듣기 싫다. 듣기 싫은 것뿐만 아니라 화도 난다. 왜? 그런데 여자는 남자에게 화를 낼 수가 없다. 여자는 남자에게 화를 낼 자격(?)이 주어지지 않았다. 여자와 남자는 애인 사이가 아니었고 서로에게 간섭이라도 할 수 있는 자격이 없는 사이였으니까. 그렇게, 정의할 수 없는 공기로 서먹해진 두 사람 사이에 감정이 피어오른다. 남자는 여자의 마음을 알아채고, 여자는 남자에게 화를 낼 자격이 주어진다. 설렌다. 즐겁다. 하트 모양의 심장은 아주 진한 핑크빛으로 물든다.

 

 

 

 

처음엔 그녀가 하루에 열 번씩 전화를 했어. 그러곤 “사랑해”라고 했지.

그다음엔 하루에 한 번 전화해서는 “아주 사랑해”라고 하더군.

요새는 2주일에 한 번 꼴로 전화해서는 “아주 아주 사랑해!”라고 말해.

그래도 난 “빈도가 줄어들면 강도는 높아진다.”는 애덤스 이론을 굳게 믿으며 낙관하고 있다네. 

<겹겹의 의도> 중에서 - 장 자크 상페

 

 

 

 

 

거기서, 그대로 멈췄다면 사랑이란 이름에 나쁜 감정은 포함되지 않았을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사랑은 익숙해지고, 솔직하게 풀어냈던 마음은 자꾸 가리게 되고 침묵하게 된다. 이게 아닌데 싶으면서도 마음과 다른 말을 내뱉는다. 서로를 할퀴고 상처 내는 말들을 쏟아낸다. 한때는 상대를 먼저 배려했던 마음이 왜 나를 이해해주지 못하냐는 감정을 이기지 못한다. 함께 내일을 이야기하던 두 사람은 오늘의 이야기도 할 수 없는 사이가 된다. 먼저 한 마디만 해주면 처음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은데 두 사람 모두 주저한다. 먼저 입을 열 용기가 없었고, 지금 이 순간을 넘어가면 다시 이런 문제가 반복되지 않을 것인지에 대한 확신이 없다. 지금 싸우는 문제가 잠시 후 다시 불거질 거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한 가지 뿐인 것일까? 두 사람이 헤어지는 거?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아주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우리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하는 말을 이해하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우리는 제대로 말을 할 수 없는지도 모른다.

사랑을 받기 전까지 우리는 온전하게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중에서 - 알랭 드 보통

 

 

 

 

내 마음을 알아주는 한 사람을 지킨다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다. 처음 먼저 손을 잡았던 그 마음은 어디로 도망간 것일까. 네가 이해해주고 알아주던 그 한마디는 언제부터 사라진 것일까. 여자와 남자 모두 그 시간을 그리워하겠지만 다시 돌아갈 수 있을 거란 기대는 그리 크지 않다. 이만큼 와버린 마음들이 다시 뒤로 돌아가기에는 많은 것들이 변했다. 나의 존재감을 부여했던 감정이 다쳤고, 상대의 아름다움을 보게 했던 시력이 나빠졌다. 상대를 한 가지씩 알아갈 때마다 흐뭇했던 마음은 닫혀버렸다. 이젠 너를 배려하거나 너의 마음을 굳이 몰라도 되는 편안함이 자리했다.

 

 

 

 

내 안에 있는 이여.

내 안에서 나를 흔드는 이여.

물처럼 하늘처럼 내 깊은 곳 흘러서 은밀한 내 꿈과 만나는 이여.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중에서 - 류시화

 

 

 

 

 

그렇다. 많은 것들이 변했다. 사람이 변한 것인지, 사람이 했던 사랑이 변한 것인지. 아마도 둘 다 변한 것일 수도 있겠다. 피할 수 없는 게 운명이 아니라 정녕 피할 수 있는데 피하지 않은 것이 운명이라던 생각마저 변한 것이겠지. 서로 다른 언어로 말하는 시간이 계속되고 많아지면서 이제 상대가 하는 말은 외계어로 들리는 순간이 온 것 같다. 한발 물러서서 먼저 듣고 있던 태도는 사라졌고 눈을 감고 귀를 닫는다. 언제부터 그랬을까. 왜 감지하지 못했을까. 아니다. 거의 대부분의 일에는 전조가 있다. 그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예감과 조짐이 있다. 애써 그런 감정과 생각을 무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직은 아니라고, 보여도 못 본 척 들려도 안 들리는 척, 조금 더 유예의 시간을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 끝이 오고 있음을 알면서 절망 반 기대 반으로 마음을 채운다. 이게 끝일 거야, 혹은 괜찮아지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언제쯤 눈과 귀는 다시 열릴까. 눈과 귀가 다시 열리는 순간, 같은 상대가 앞에 있을까?

 

 

 

그들이 잃어버린 것은 사랑이 아니다.

그들이 잃어버린 것은 처음 사랑했을 때의 마음일 뿐이다.

그들은 용서를 할 것도 용서를 구할 것도 없다.

단지 다시 만나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다시 시작해야 한다. 

<19초> 중에서 - 피에르 샤라스

 

 

 

 

시간은 흐른다. 여자와 남자는 심장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던 만남부터, 너무 좋아서 헤어지고 나서도 바로 보고 싶었던 감정까지 경험했다. 많은 것을 말했던 서로에게 부담과 짜증이 생기기도 하고 나를 이해해달라는 바람마저 무색한 순간을 보기도 했다. 그렇게 헤어졌다. 우연처럼 운명처럼 서로 다른 상대를 만나기도 한다. 여자에게는 자신을 필요로 하는 남자가 나타났다. 남자에게는 자신을 믿고 기다려달라는, 내일을 말할 수 있는 여자가 옆에 있다. 연인이었던 두 사람에게는, 의외의 장소에서 우연처럼 만나도 모른 척 지나쳐야 하는 관계가 머물러 있을 뿐이다. 한때, 우리의 사랑은 이랬다. 그 사랑이 만들어낸 목적지가 각각 달랐을 뿐이다. 이별 후 다른 사랑을 만나거나, 결혼 혹은 계속 진행중인 연애로 이어지거나...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빈집> 중에서 - 기형도

 

 

 

저자는, 사랑은 두 개의 심장이 잠시 하나가 되는 기적이라고 했다. 두 개의 심장이 만나 외로움이 아닌 사랑을 만들어 내거나, 하나의 심장이 다시 두 개로 나뉘는 경험을 하거나. 한 번의 사랑이 끝났다고 겁내거나 연연해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들린다. “사랑이 다시 올까?” 묻지 말고, “사랑은 다시 또 온다.”라고 말할 수 있다고 했다. 피식 웃음도 난다. 저자의 말이 맞을 수도 있겠다 싶다. 한 번의 사랑이 끝났다고 세상이 끝난 것은 아니니까. 기억을 더듬어보자. 그 한 번의 사랑이 지나갈 때마다 모든 것이 나쁜 것만도 아니었지 않는가. 알게 모르게 변하고 배우게 된 많은 것들이, 하나였다가 떨어져나간 심장의 한쪽을 채웠을 거라 믿는다. 나 같은 경우, 사람과 세상에 대해 많이 배웠던 것 같다. 감정적이던 성격은 조금 더 이성적으로, 화가 나면 큰 소리가 아닌 저음의 목소리가 되고, 사람들을 볼 때 어떤 설렘이 아닌 인간미를 먼저 보고는 했다. 그건 어떤 시간이 지나갔기 때문일 수도 있고,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어가면서 쌓여가는 세상의 때 묻음의 도움일 수도 있다. 어쨌든, ‘사랑>인생’이 아니라 ‘사랑<인생’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어린 시절 한쪽으로 기울었던 부등호는 점점 그 방향을 바꾼다. 많은 감정들이 극으로 치닫는 것을 붙잡아준다. 천천히 가도 되니까 앞, 뒤, 옆, 눈 크게 뜨고 사방을 보고 가라고. 어떤 결말을 만나더라도 괜찮아지게 말이다.

 

 

 

 

운명이 호의를 가지고 우리에게 가져다준 영혼을 우리는 놓쳐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를 위하여 존재하기 때문이다. 

<독일인의 사랑> 중에서 - 막스 뮐러

 

 

 

 

 

 

 

 

남자와 여자에 대한 심리를 짧은 소설 형식으로 풀어낸 책이다. 끄덕끄덕 하면서 공감을 하거나, 이건 아닌데 하면서 반대의 생각을 펼칠 수도 있다. 새겨듣고 싶은 말은 새겨듣고, 버릴 말은 버리면서 각자의 취향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전문적인 용어보다는 상황이나 시간의 흐름에 대해 사랑을 차분히 정리한 것처럼 보인다. 그 과정에서 서로에게 미처 표현하지 못했던 두근거림이나 고민, 생각을 들려준다. 소리 내어 말하지 않으면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대신 말해주는 역할이다. 이런 방식-상대의 마음을 대신 들려주는-이 새롭거나 신선하지는 않다. 이미 읽어본 몇 권에서도 이런 방식의 마음 알아가기는 충분히 경험했다. 그런데도 싫지 않은 느낌으로 다가오는 건 편안함 때문일 것이다. 저자가 풀어가는 방식 때문인 것 같다. 서로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다르게 나타나는 그 상황이 왜 그렇게 되는지를,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일들이 어떻게 펼쳐질지를 뻔한 복선처럼 보이게 하면서 납득하게 한다. 왜? 우리가 그랬으니까. 같은 상황을 두고 서로 생각하는 것, 서로 하고 싶은 말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는 있다. 심하면 전쟁 같은 상황도 일어나겠지. 하지만 그 이후로 다가오는 일들에 대한 대처가 간혹 이성보다 감성이 앞선 경우 뒤따르는 것은 후회다. 어떤 식으로든 후회를 해야 하는 경우라면, 그 후회를 조금이라도 덜 해야 하지 않겠는가. 적어도 내가 하는 말이 상대에게까지 가 닿기를 바라는 마음이 남아 있다면, 사랑이 끝난 후에 보이게 되는 우려를 범하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지금, 그 사랑의 본질을 제대로 보라고 말하는 듯하다. 처음 두 개였다가 하나가 된 심장이 다시 두 개로 나뉘지 않게, 다음에 하나가 될 심장을 위해서라도...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내 가슴이 말하는 것에 더 자주 귀 기울였으리라

사랑에 더 열중하고 그 결말에 대해선 덜 걱정했으리라

설령 그것이 실패로 끝난다 해도 더 좋은 어떤 것이 기다리고 있음을 믿었으리라

분명코 더 감사하고 더 많이 행복해 했으리라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중에서 - 킴벌리 커버거

 

 

 

 

** 함께 소개된 책들은 이 책 속에서 저자가 소개해준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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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이 많이 나오고 있다.

가을이니까, 살랑살랑 바람이 제법 차가운 바람으로 변했으니까...

읽어보고 싶은 책이 많은데, 늘 그렇듯 더디다.

타이밍을 놓친 책들도 많고...

그래도 기억해두고 싶은 마음에 고르고 또 골라본다.

읽어보고 싶은 책들이 많은 건, 좋은 일...

 

 

 

 

 

 

 

 

 

 

 

 

 

 

가을이라 그런지, 하니면

10월의 한가운데로 들어와서 그런지...

책이 많이 나오긴 하는구나...

 

 

 

 

 

 

 

미주부동산이 많이 궁금하다. 저자에 대한 입소문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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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편지 - 내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보게 하는 손거울 같은 책
윤석미 지음 / 포북(for book) / 2011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연필을 깎았다. 온 정신을 집중해서, 손이 다치지 않게, 커터칼로 조심스럽게 앞으로 밀면서 깎아냈다. 생각하고 싶은데 생각이 막히고 멈춰버렸을 때, 이게 아닌데 싶으면서도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주춤거리고 있을 때, 집중할 게 필요하다. 다양한 방법으로 그 순간을 흘려보낼 수 있겠지만, 가끔 나는 그 순간을 연필을 깎으면서 흘려보낸다. 오직 이 연필을 깔끔하고 예쁘게 깎아내는 일만 생각한다. 다 깎고 나면 쓰던 메모지에 뭔가를 끼적이기도 한다. 펜으로 마구 휘갈겨 쓰는 촉감과는 사뭇 다르다. 연필 특유의 사각거리는 소리, 종이에 잉크가 번지는 것이 아닌 연필심이 만들어내는 미세한 가루들, 펜을 사용했을 때 보다는 연하게 써지는 글씨들이 눈에 들어온다. 뭔가가 맘에 안 들면 지우개로 지우고 다시 쓴다. 어렸을 때 처음 글씨를 배울 때의 마음 같다. 네모 칸 반듯한 노트에 연필로 꾹꾹 눌러 쓰고, 틀린 글자를 지우고 다시 쓰고... 그러다보면 어느새 글씨를 다 익히게 된다. 가끔 맞춤법이 틀리기도 하지만, 그러면 또 어떤가. 지우고 다시 쓰고, 틀린 것을 또 배우면서 쓰면 되겠지.

 

뭐든 거기에 맞는 게 있다. 틀릴 수도 있고 지워야 할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 연필을 사용해야만 하는 것처럼, 처음부터 거기에 맞는 사람이었던 게 아니라면 맞춰가야 한다. 그것도 아니라면, 인정해야 한다. ‘다름’을... 손이 예쁜 사람 발이 예쁜 사람, 글을 잘 쓰는 사람 노래를 잘하는 사람, 공부를 잘하는 사람 잡다한 지식이 많은 사람. 다양한 가능성과 다른 점으로 살아가는 세상인데 유독 내가 가지지 못한 것만 눈에 더 들어올 때는 생각이 나아가질 못한다. 일시정지 같은데 영원히 정지가 될까봐 가슴이 막혀온다. ‘이렇게까지 하는데 나는 왜 안 되지? 왜 느리지? 왜?’ 하는 마음들이 벅차서 터질 것만 같을 때, 알면서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 힘들어 숨이 가빠져 올 때, 나에게만 적용되는 법칙들이 따로 있는 것만 같아서 혼란스러울 때, 느려터진 내가 한심스러워 보이던 그런 때... 저자 윤석미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괜찮아...’

 

왜 이런 문장은 띠지에 떡 하니 버티고 서서 내 눈길을 잡아끌고 있나?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괜찮단다. 달팽이걸음이라도 느려도 갈 길 다 가니까, 각자에게 맞는 옷이 있으니까, 인생은 오래달리기니까... 참 적절하게 들려준 이야기에 눈물 한 방울이 핑 돈다. 겉으로 보기에 똑같아 보이는 지게도 산길을 오르기 위한 지게와 들판을 다니기 위한 지게의 길이가 다르단다. 평지를 다니기 위한 지게는 다리가 좀 긴 편이고 산길을 다니기 위한 지게는 다리가 좀 짧은 편이라고, 수풀을 헤치고 다니는 그 길에 걸리지 말라고 지게의 다리가 좀 짧단다. 똑같은 지게가 아니었다는 것을 나는 이제야 알게 된다. 아마도, 맨 처음에 그 지게는 길이가 똑같지 않았을까. 사용하다 보니 산길을 다닐 때 거치적거려서 다리를 조금 잘라낸 것은 아닐까. 그러다 보니 산길에 딱 적당한 지게로 맞춤형이 된 것이겠지. 사람도, 그 사람을 둘러싼 많은 것들도 그렇게 적응하고 맞춰가는 거겠지 싶은 마음에, 점점 저자의 이야기에 동화된다. 지금 뭔가가 좀 안 맞아도 괜찮을 것 같고, 느리고 또 느려도 괜찮을 것 같고, 무엇 하나 옆에 붙어지거나 나가떨어진다고 해도 괜찮을 것 같고... 무조건 다 괜찮은 거라고 말해주는 것만 같다.

 

가는 데 이삼일, 오는 데 또 이삼일. 우체통에 넣은 편지가 서로에게 오가는 데는 보통, 일주일이 걸립니다.

그것도 편지를 받자마자 답장을 써서 그 길로 우체통에 넣었을 때만 그렇습니다.

이 느림보 편지를 두고 ‘달팽이 편지(Snail Letter)’라고 부릅니다. (110페이지)

 

손쉽게 문자 한통, 전화 한통, 실시간 이메일 전송, 더 빠르고 간편하게 사용할 수 있는 SNS. 세상이 점점 빨라지고 간편해진다. 내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두통일 생길 지경이지만, 지금이 그런 세상이라는데 부정할 수가 없다. 다만, 내가 그 속도에 맞추지 못할 뿐이다. 그렇게 빠른 세상에서 손으로 편지를 써서 우표를 붙여 우체통에 넣고, 상대방에게 배달되기를 기다리고, 또 상대방이 답장을 줄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 상대가 내 편지를 받고 바로 답장을 썼다고 했을 경우의 시간을 계산한 것이 일주일이다. 물론 바로 답장이 오지 않을 경우, 더 많은 시간이 걸리겠지. 기다림의 시간이 더 길어지겠지. 그리고 마냥 기다리겠지. 답장이 올 때까지...

 

그런 달팽이 편지의 마음으로, 천천히, 조금은 느리게, 저자가 한 문장 한 문장 들려준다. 가만히 듣고 있다 보면 누군가가 한 말이기도 하고, 어디선가 한번쯤을 들어봤음직한 말이기도 하고, 대책 없이 긍정적인 말이기도 하다. 지금을 살아가는데 어떻게 그렇게 할 수가 있냐고, 여기에 맞춰야만 제대로 가는 길이 아니겠냐고, 이대로 가도 정말 괜찮은 거냐고 물어야 했을까. 그러면서도 수도 없이 묻고 싶었던 순간들을 뒤로 하고 자꾸만, 자꾸만 그 자리에서 듣고 있게 된다. 듣고 있으면서 나도 모르게 혼자 질문을 하고 대답을 하고 있다. 그래서요? 이렇게 하면 될까요? 그건 아니지 않나요? 쉽지가 않아요. 틀린 것 같아요. 다른 것은 안 될까요? 그래요, 어쩌면 그것도 괜찮을 것 같아요... 시작도 끝도 내가 해야 한다는, 채우기 위해 먼저 해야 할 일이 비우는 것이라는, 내 발끝이 향하고 싶은 곳이 어디인지 가슴 속을 들여다보라는, 내 마음을 설레게 하는 것을 담아두라는 것도.

 

조금만 앉아서 쉬었다가 가더라도, 잠시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고 있더라도, 계절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더라도 괜찮을 것 같은, 그런 안식... 저자가 조근조근 들려주는 한마디에 조금씩 마음을 내려놓는다. 편지를 보내고 다시 받기까지의 시간이 그렇게 느릿느릿 흘러가니, 덩달아 기다림의 시간도 길어지고, 진심을 가득 담은 한 마디가 더 값지게 담겨 있을 것만 같아서, 답장을 기다리는 그 시간이 그리 지루하지는 않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이 순간을 감당하게 만든다.

 

고인 눈물은 다 쏟아내야 합니다.

쏟아 내지 못한 눈물은 저 혼자 마르지 못하고,

마음 안에 고여 또 다른 상처를 만듭니다. (175페이지)

 

이상하게, 뭔가를 계속 끼적이면서 읽었던 책이다. 책의 문장을 필사한 것이 아닌, 읽으면서 자꾸만 다른 생각을 하기에 그랬다. 한 문장 읽고 이 생각, 다른 한 문장 읽고 저 생각, 그러다가 뭔가를 적어가고 있는 내 손가락. 어느 순간 보니 메모지에는 형체와 내용을 알 수 없는 글자들이 빼곡하다. 무슨 생각인가를 열심히 적었던 것 같은데, 알아볼 수 있는 글씨는 거의 없었다. 저자가 들려주는 문장에 빠져 나만의 생각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던가 보다. 세상에 좋은 말, 좋은 얘기, 참 많다. 그런 긍정적인 얘기를 듣고 있는 그 순간의 내 마음까지 긍정적이 된다면 더 없이 좋겠지. 하지만 같은 말이라도 언제 듣느냐에 따라 다르게 들린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어제는 응원이 되었던 말이 오늘은 거추장스럽게 들릴 때가 있고, 아무렇지도 않게 들을 수 있는 말이 유독 거슬릴 때도 있다. 이 책 속에서 저자가 하고 있는 말들도 마찬가지일 테다. 이렇게 좋은 말들도 딱 적용할 수 있는 타이밍에 들려와야만 긍정적인 시너지 효과가 있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천천히 흐르는 저자의 목소리를 제법 좋은 순간에 만난 듯하다. 늘어지고 싶고, 아무 것도 손에 잡기 싫고, 두통이 머리 한 구석을 갉아먹고 있을 때, 저자가 나에게 달팽이 편지를 보내주었다. 천천히 써져 느리게 배달된 이 편지처럼, 나도 천천히 읽고 또 읽고 곱씹어보면서, 연필로 느리게 답장을 써야겠다. 쓰다가, 이게 아닌 것 같다는 마음이 들면 지우고 다시 쓰면서, 느리더라도 하고 싶은 말로 다시 채워 넣으면서. ‘내 마음, 잘 들여다볼게요.’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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