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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의 고치 작가 아리스 시리즈
아리스가와 아리스 지음, 최고은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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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백억 원대의 주얼리 브랜드 사장인 도죠 슈이치가 살해당하는 사건이다. 슈이치가 주말을 보내기 위해 갔던 별장에서 시체는 발견된다. 특이하게도 프로트 캡슐 안에서. 프로트 캡슐이란 현대판 고치라고 불리는데 캡슐 모양의 명상 기계다. 그 기계 안에서 알몸으로 누워 일정 시간을 보내면서 말 그대로 명상을 하는 것. 보통 40분의 시간을 그 안에서 보내면 6시간 정도의 수면을 취하는 것과 같은 효과. 그 특이한 기계를 놓고 사는 슈이치가 그 안에서 시체로 발견된 것으로 사건의 추리는 시작한다. 그가 왜 살해를 당했으며, 누가 죽였는가에 대한 추리가 시작되면서 용의선상에 오르는 인물들이 차례대로 등장한다. 슈이치의 구애를 받았던 아름다운 여비서 사기오 유코, 유코와 애인 사이였던 주얼리 디자이너 나가이케 신스케, 슈이치의 이복동생인 슈지와 요시즈미 등.

살바도르 달리는 화가로도 유명하지만 그 특이한 콧수염과 아내인 ‘갈라’와의 사랑으로도 유명했기에 말이다. 달리는 자신의 친한 친구였던 폴 에뤼아르의 아내인 갈라에게 사랑을 느끼면서 상당히 고뇌한다. 친구의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 아닐 것이기에. 결국 운명은 달리에게 갈라와의 사랑과 결혼을 허락했지만 달리는 죽은 형의 인생을 살아가는 고통이 너무 심했다. 갈라는 달리의 그런 고통을 덜어주고자 달리를 감시하면서 오직 그림만을 그리게 했다. 하루에 12시간 이상을 그림을 그리게 하면서 감시까지 하는 역할을 자처했다. 그런데 의외로 뜻밖의 결과를 얻은 셈이 된다. 강압에 가까운 환경에서 그린 달리의 그림은 명작으로 찬사를 받았고 달리는 자신이 그린 모든 그림에 갈라의 이름까지 생겨 넣는다. 하지만 그 명성도 갈라가 죽고 나서 끝이 난다. 갈라의 죽음 이후로 달리는 칩거 생활을 하다가 눈을 감는다. 갈라 이후로 누구도 달리에게 갈라의 자리를 차지 할 수 없었던 것. 그만큼 갈라에 대한 달리의 사랑은 컸던 것인가?

달리의 고치라 제목이 붙여진 이유는 읽다보면 저절로 알겠지만, 이 책에서 살해된 도죠 슈이치가 그 답이 된다. 살바도르 달리를 신봉해서 슈이치 스스로가 달리와 같은 수염을 기르고 달리의 그림을 수집하기도 한다. 우연인지 운명인지 달리와 슈이치는 생일마저 같다. 독자인 내 생각이지만 슈이치는 달리의 사랑마저 신봉했던 게 아니었나 하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애인이 있는 자신의 여비서인 유코를 사랑했고, 유코의 사랑을 얻을 수 있는 긍정적인 사고를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싶은. 슈이치가 유코를 사랑했던 또 다른 이유가 나중에 등장하기는 하지만...

프로트 캡슐과 고치.
태내의 낙원을 꿈꾸었던 두 사람이 아니었나 싶다. 달리는 자궁 안이 기막히게 쾌적한 낙원이라고 표현하고 시각적으로 생생하게 묘사할 만큼 그의 담론은 유명하다. 슈이치가 달리의 그러한 자궁 속의 낙원을 경험하고자 고치 모양의 프로트 캡슐을 별장에 들여다 놓고 즐기기까지 한 것은 어느 정도 이해가 될 것도 같은 심리다. 어린 시절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외로워했던 슈이치가 그 자궁 안의 낙원을 즐길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회사를 키우느라 치열하게 살아왔던 시간들의 휴식이 필요했기도 했고, 어지러운 마음을 내려놓을 장소가 필요하기도 했을 것이다. 슈이치는 프로트 캡슐을 그런 용도로 활용했고 충분히 즐겼다. 단지 어쩌면 자신에게 본보기라고까지 여겼을지 모를 달리의 자취를 따라가려고 했던 게 아닐까 싶은 우려가 느껴지기도 하지만……. 자신의 사랑이 당연하게 올 것이라는 그릇된 자만과 계획들이 머릿속에 그려지는 것의 예외사항을 간과한 것이 그 증거라고.

“누에는 고치를 짓고 그 안에서 번데기가 되지. 진주조개는 껍질 속으로 침입한 이물질을 수천 겹의 진주층으로 감싸 보석을 만들어. 인간도 마찬가지야. 인간의 고치 속에서도 갖가지 것들이 변화해 다양한 무언가가 만들어지겠지.” (405페이지)
이 책에서 들려주는 이야기는 하나의 살인사건으로 시작한 추리였지만, 그 진행과정을 보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혹은 갖고 싶어 하는 그 고치와 고치의 역할에 관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내내 갖게 한다. 누구나가 다 그런 시간이 있고 그런 도구가 있다. 어머니의 뱃속에 있을 때의 그 가장 최적의 순간을 필요로 하는 시간. 그리고 그런 역할을 하는 자신만의 도구. 어쩌면 그런 장소일지도 모를 그런 곳(것). 이 책 속의 등장인물들에게도 그런 것들이 하나쯤은 있다. 죽은 슈이치가 프로트 캡슐을 즐겨했던 것처럼 말이다. 살아가면서 누구나 하나쯤은 가지게 되는 ‘고치’. 어린 자아를 방어하기 위한 껍데기 하나쯤 갖고 살아가도 되지 않을까?
나에게도 고치가 있다. 나의 고치는 아마, 아니, 문명 소설을 쓰는 행위이리라. (중략) 왼쪽 서가에 나란히 꽂힌 나의 작품을 향해 손을 뻗어 책등을 어루만진다. 나의 소설. 나의 고치여. - (380, 386페이지) (아리스가와 아리스에게도 그런 고치가 있다. 그가 쓰는 소설.)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아리스>시리즈 중의 두 번째 작품인데, 나는 이 책으로 <아리스> 시리즈를 처음 읽거니와 작가 아리스가와 아리스를 처음 만난다. 추리소설작가 아리스와 범죄학자 히무라의 활약이 그럴듯하다. 제법 흥미롭게 시작하는 이야기와 결국 드러낼 것은 드러내고야 마는 추리소설이기에 큰 거부감이 없이 읽어갈 수 있다. 사랑에 대한 질투와 집착, 어느 대상에 대한 지나친 광신, 헛된 망상 같은 것들이 가져오는 이상들. 결국은 인간이기에 그런 것들도 같이 갖고 사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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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드 세트 - 전2권 - 가난한 성자들 조드
김형수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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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가 시작되었을 때 가장 먼저 제목을 찾아봤다. 조드... 내가 접하기에는 낯선 단어였고 낯선 의미였다.
조드 : 유라시아 내륙 평원에서 일어나는 대재앙. 물이 부족한 건조지대에서 겨울철 가뭄과 추위가 겹치며 정점에 이르렀을 때, 유목민의 생명줄인 가축이 한꺼번에 수천 마리씩 죽어나가는 사태를 지칭한다. 섬나라나 해안에 인접해 있는 땅에서 맞이하는 기후적 재앙인 '쓰나미'와 정반대 개념.
안타깝게도 연재를 계속 보지는 못했다. 계속되는 이야기를 만나고픈 그 기다림은 사람 애간장을 타게 하니 빨리 종이책으로 만나보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만을 뒤로 한 채 책이 출간되는 순간을 기다렸다지. 그러다가 체험판을 먼저 만났다. 딱 100페이지. 정말 맛보기다. (웃음)

시작...
100페이지 분량의 내용은 전설 같은 이야기의 시작이었다. 잿빛 눈을 가진 종족들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었다. 알랑고아가 달빛을 받아 낳은 아이, 강한 면을 보여주던 자무카, 그리고 칭기스칸의 토대가 된 소년 테무진을 보여주는 이야기다. 늑대 떼와 말들의 싸움에서 자무카와 테무진이 함께 하는 내용이 흥미로우면서도, 어느 역사의 시조를 이야기하듯 시작하면서 점점 상당히 거대하게 들려오는 분위기가 상당했다. 늑대 떼와의 싸움은 스케일이 큰 블록버스터 영화 같은 느낌이었고 낮은 파도 같지만 강하게 밀려올 것을 예감하는 듯한 분위기를 그려내고 있었다. 단순히 칭기스칸의 활약상만을 확대 해석하는 영웅서사시가 아니라 몽골 유목민족을 통일해 가면서 진정한 칸이 되어가는 이야기임을 예고하고 있었다. 드디어 서막이 울린 것이라고 보인다.

몽골...
더욱 이 책이 시작부터 계속되는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지는 이유는, 몽골이란 나라의 문화와 기후, 그리고 테무진이 자라서 보여줄 칭기즈칸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지기 때문이다. 어린 추위, 젊은 추위, 늙은 추위라 표현하면서 급하게 파고드는 추위를 표현하는 방식도 특이했지만 전체적으로 작가가 있는 그대로의 몽골을 보여주고자 애쓴 흔적이 보인다. 몽골이란 나라의 특징에 대한 솔직한 표현들, 단어 하나 그대로 표현하려고 하지 않았나 하는 것들, 마치 내가 몽골 그 곳에 서서 바라보는 듯한 기분이 들게 하는 분위기가 이 소설에게 좀 더 다가가게 만들고 있다. 그리고 칭기즈칸의 무대였던 몽골의 초원이나 정착민이 아닌 유목민들의 살아가는 모습들을 글로써 볼 수 있는 것은 상당히 새로운 경험이기도 했다. 더군다나 작가가 오랜 시간 몽골에 대한 관심과 10개월간의 몽골 체류로 만들어낸 이야기는 그 생생함을 더해주기도 하는 듯하다.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이미 정착민이다. 그렇게 살아왔고 지금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어딘가로 떠돌기를 원하는 삶을 역마살이 끼었다고 말하기 쉬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인지 그런 고정관념이나 생각들은 몽골의 유목민의 삶을 선뜻 쉽게 받아들이거나 이해하기는 어렵게 만들기도 했지만 그들의 살아가는 목소리가 조금씩 들려오는 듯한 것도 사실이다. 작가가 직접 몽골에서 경험한 일상이었을 수도 있고, 들은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런 것들이 바탕이 되어 그려지고 있는 이 이야기 『조드』는 조금 더 사실적으로 그곳의, 그들의 이야기가 들려올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갖게 한다.(물론 소설이 만들어낸 허구는 분명 있을 테지만.) 소설이지만 음이 있는 노래로 들려오는 듯한 느낌으로 계속 읽어가려 한다.

칭기스칸... 그리고 테무진.
그동안에도 칭기스칸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있어왔지만 실제 이렇게 그 출처를 밝혀내듯이 시작되는 이야기를 나는 처음 만난 것 같다. ‘칭기스칸’이라는 그 단어에서부터 밀려오는 과격함과 무서움이 있었는데, 이 책에서 그려지는 테무진은 굉장히 포용력 있는 지도자로 나아가지 않았을까 하는 복선들이 있다. 상당히 괜찮은 인물로 그 활약이 그려질 것만 같다. 단순히 칭기스칸의 영웅적인 이야기만을 들려주는 것이 아닌 처음 시작부터 제대로 들려주고 싶었던 게 작가의 의도와 바람은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을 갖게 한다.
12세기의 초원에 버려진 한 소년이 파란만장한 생존투쟁을 통해 당대 정착민들이 꿈꾸던 ‘가공된 유토피아’를 뒤집어버린 사실을 인류는 잊지 말아야 한다. 그 사람 테무진의 가치관이 ‘칭기스칸제국의 체제정신’과 다르다는 확신이 들어 이 소설을 썼다. - 작가의 말 중에서
'작가의 말'에서 보이는 의도대로 읽고자 한다. 그동안 보아왔던 많은 칭기스칸의 이야기가 아니라 작가 김형수가 풀어내고자 하는 의미대로 그 칭기스칸을 읽어보고자 한다.

세 살배기 수컷들도 미끄러지는 고개 위에
세 마리의 노루가 끄는 짐을 버렸네
등자 소리가 나는 높은 고개 위에
네 마리의 노루가 끄는 짐을 버렸네
서리 낀 동굴을 집 삼고, 눈 더미를 이불 삼아
가죽신에 구멍이 나도록, 땀이 다 마르도록
(100페이지)

체험판은 이 노래로 100페이지가 끝이었다.
사람의 입맛을 들인 체험판을 기회로 결국은 종이책 세트를 구매해버렸다. 100페이지 그 이후가 너무 궁금해서 어쩔 수 없었다지. 이제 그 다음 이야기, 101페이지를 시작하려 한다.



진짜 이야기는 이제부터 시작인 듯하다. 그 초원에서의 일상들은 어떻게 계속 이어질 것인지를 지켜봐야할 것이겠지. 테무진은 어떤 삶을 거쳐 칸이 된 것인지, 책의 소제목인 ‘가난한 성자들’이란 문구는 왜 나온 것인지를 이제부터 제대로 확인해야 할 시간이다.

테무진은 천지사방에서 엄습하는 초원의 위험 앞에 전면 노출되어 하루하루를 연명했지만 도망자 신세를 벗어날 수 없었다. 그래도 딱히 방법이 없으니, 언제나 침묵했고 날마다 고독했다. 제길, 운명은 하늘의 것, 간밤에도 그가 볼 수 없고 확인되지 않는 세상 밖에서 천 개의 별이 태어나고 천 개의 별이 죽는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79페이지)
아버지인 예수게이의 죽음 이후로 위태로운 삶을 살아가는 테무진이 그 유목민들을 통합하고 이끌어나갈 그 활약을 저절로 기대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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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옷을 입으렴
이도우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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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여덟의 둘령, 그녀. 추운 겨울. 한밤중에. 잠옷 차림으로. 맨 발로. 살아있는 누군가의 부름처럼 들리는 소리에. 차가운 땅바닥을 걸어서. 어딘가로 향하는. 그 길. 차마 놓을 수 없어서. 다 풀어진 끈의 끝이라도. 붙잡고 싶어서. 슬픔으로 애가 타는. 그 손끝. 뒷방 할머니와 향이의 소리마저 그리워. 그 목소리를. 찾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둘령의 발걸음. 그 이름 몽유병. 가서 붙잡아주고 싶은 마음에. 내 마음이 애가 타서. 감히. 이해하겠노라. 말할 수 없어서. 그저. 지켜봐주고 있겠다고. 둘령, 너를……. 그리고, 나를…….

아련한 기억.
둘령과 수안, 두 아이의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한다. 그 나이대의 소녀들이 충분히 그러할 수 있는 일들과 생각으로 자라나는 모습 그대로를 보여준다. 한 집에 같이 사는 사촌이지만 단짝이기도 하고 마음을 의지하는 대상이기도 하고 무언가 비밀 하나쯤 나누어 친밀감을 더해가기도 하는 사이. 둘이 함께 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 깊이도 저절로 더해간다. 십년이 넘는 시간동안 같은 시기를 같이 겪어온 사람으로 충분한 공감과 서로에 대한 애틋함을 키워온 두 사람이다. 그리고 책이라는 매개체로 더 아름다운 시간을 만들어가는 두 사람이기도 하다. 아마도 40세 전후의 사람이라면 이 책 속에 등장하는 여러 가지 책들-문고판이나 명작전집류 같은-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것들이 읽는 이로 하여금 동시에 추억에 잠기게 한다. 이젠 기억에서조차 희미해져 그 이름도 떠올리기 어려운 것들을 끄집어내주면서 그들의 추억 속에 동참시킨다.

추억, 그 쓸쓸함.
늘 그렇듯 추억이, 추억이 아닌 기억으로만 남기 원하는 시간도 있다. 기억으로조차 머물지 않기를 바라는 시간이 있다. 둘령에게 수안의 마지막 모습이 그랬다. 마치 그 시간을 기억에서 지워내려는 것처럼 애써 떠올리고 싶지 않은 것처럼 살아가는 둘령에게 뜻밖의 누군가의 등장은 지워내려 애쓰던 그 기억의 끝을 보게 해준다. 그게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는 오직 둘령만이 알겠지만 어떤 식으로든 그 끝을 본다면 더 이상 둘령에게는 맨발로 밤길을 헤매게 만들지 않고 재개발로 어수선한 그 동네를 떠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줄 것만 같았다. 쓸쓸한 기억이 아닌 이제는 편안하게 떠올려도 되는 추억으로 가슴 속에 켜켜이 담아두는 것으로도 괜찮을 것 같은 의미로 남아줄 수 있을 것만 같다.

“나의 마음을 나 아닌 어느 누가 구원할 수 있을까. 사랑도, 타인도 나를 바꿔놓지는 못한다. - 남의 사랑 이야기 (김신회 / 북노마드 2012)”
결국 각자의 상처는 각자의 치유만을 필요로 한다. 수안이 둘령에게 손 내밀었지만 둘령이 차마 해줄 수 없었던 것처럼, 산호가 둘령에게 다가가 기억의 봉인을 풀어내버렸지만 역시 그것을 꺼내는 것은 둘령의 몫인 것처럼 어떤 식으로 풀어내려 해도 각자가 감당해야 할 부분이 분명 있다. 그 시기의 그 기억을 가진 둘령이 마무리 지어야만 하는 문제이기도 한 것들이 그렇게 드러나는 모습을 보면서 역시 그런 것이 원칙인가 싶었다. 그 누가 대신해줄 수 없는 것들이 말이다. 가끔 우리는 그것을 성장통이라는 이름으로 이해해야만 할 때도 있다. 그때의 그 나이에 겪어가면서 지독한 ‘앓이’를 감당해야 하는 것은 분명 자신이 지나오는 그 시간을 겪어가는 흔적일 수 있기에 눈 감지 말고 그대로 지켜봐주어야 한다. 한번으로 끝나지 않을, 이미 어른이 된 우리도 겪을 수 있는 제2의 성장통이 올 수도 있기에 제대로 겪어야 한다. 지독한 슬픔과 아픔이라는 흉터를 남겨주더라도 겪어내야 한다고.

둘령이 만드는 잠옷. “이제, 잠옷을 입으렴.”
자신이 입을 것도 아닌 잠옷을 만드는 둘령. 그 잠옷은 이제 둘령과 수안 두 사람 모두 편히 잠들 수 있도록 허락하는 자장가가 되어준다. 다 괜찮아졌으니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이제는 편한 잠 속으로 빠져들어도 된다고 편하게 가슴을 손바닥으로 다독여주는 외할머니의 손으로 다가온다.

 

 

 

 

 

 

이 책을 기다려온 애가 타던 시간과는 반대로 이 책을 읽어가는 게 힘이 드는 시간의 연속이었다.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 방향이었던 이야기의 흐름도 그랬지만 순간순간 가슴을 아릿하게 하는 둘령과 수안의 이야기와 기억에도 없는 외가를 떠올리게 하는 배경들이 이 책을 읽는데 일주일이 넘는 시간을 흐르게 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셨다는 외할머니와 어떤 장소에 대한 그림을 그려보느라 머릿속이 바빴다. 그리고 울고 웃으면서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기꺼이 동참했다. 공감을 만들어내는 추억들과 알지 못했던 것들에 대한 호기심과 이미 한참 전에 그 시간을 지나왔던 기억들을 새삼 떠올리면서 행복해했다. 힘들게 읽어가던 이 책의 느낌은 그래서 행복한 미소로 마무리 지어졌다. 그래서 참, 다행이다.

한때 내 것이었다가 나를 떠난 것도 있고, 내가 버리고 외면한 것도, 한 번도 내 것이 아니었던 것도 있다. 다만 한때 몹시 아름다웠던 것들을 나는 기억한다. 그것들은 지금 어디로 달아나서 금빛 먼지처럼 카를거리며 웃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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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보포칼립스]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로보포칼립스
대니얼 H. 윌슨 지음, 안재권 옮김 / 문학수첩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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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를 즐겨하지는 않지만, 가끔 내가 봤던 SF영화들을 떠올려보면 한 가지 공통된 기억들이 있다. 인간은 여러 가지의 편리를 위해 기술을 개발하고 로봇을 발명하고 자동화 시스템이나 로봇이 해주는 역할들이 익숙해질 무렵, 로봇들은 반란을 일으킨다. 인간이 설정해놓은 것보다 지능이 높아지기도 하고 그 이상의 능력을 발휘하기도 하는, 어떻게 보면 오작동일 수 있으나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 명쾌한 해답을 찾을 수도 없는 상황이 보이기도 한다. 어찌되었든 인가의 입장에서 보면 그건 로봇들의 배신이나 반란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왜? 뭣 때문에? 하는 의문만을 가득 담고서.

이 책 역시 크게 다르지는 않다. 인간이 만들어낸 기똥찬 기술들이 인간을 배반하면서 시작된 전쟁을 그려주고 있다. 늘 그렇듯 기술의 발전을 만들어낸 인간과 로봇의 대결 구도를 그리면서 인간이 만들어낸 것들이 가져오는 장점이 있었던 반면, 의도치 않게 같이 오는 어두운 면을 보여준다. 그 모든 것들은 결국 인간이 창조해냈으니 당연히 인간이 감당해야할 대가일 뿐이고. 그 안에서 우리는 발견해야 한다. 그렇게 발전시키고 원했던 것들 안에서 인간이 마지막까지 보호하고 가져야할 것들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추수감사절 기간인, ‘제로아워’의 순간에 모든 기계들이 변화를 일으킨다. 가정용 로봇, 전투용 로봇, 그리고 컴퓨터들까지 인간을 해치는 행동을 시작한 것. 그 기계들은 사실 오랜 시간을 인간과 함께 해온 것들인데 무차별한 행동들로 인간과 맞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로봇에게 잔인하게 살해당하거나 시설들을 파괴되고 로봇에게 저당 잡힌 목숨으로 코너에 몰린다. 모든 것의 결과는 지켜봐야 하겠지만, 역시 로봇의 반란은 그것들을 만들어내고 이용해왔던 인간들에게 상당한 충격이었다. 이제 인간들은 오직 살아남는 것만을 위한 행동을 한다. 그 무엇이라도 살아남은 다음에야 할 수 있는 것.
이 책 속에서 인간과 로봇과의 전쟁에서 두뇌 역할을 하는 것은 소심한 듯 보이는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는 로봇 아코스다. 인간들의 모든 것을 주관하는 시스템을 조종하는 역할이다. 소년의 모습을 하고, 아주 조용하게, 그렇지만 확실하게 인간의 중심부를 향해 서서히 그 모든 것을 장악해가고 있었다. 그리고 진짜 전쟁이 이어졌고…….

사실 로봇의 이런 반란은 어쩌면 예정되어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오직 인간의 입장에서 인간의 필요에 의해서만 만들어내고 적용하는 것들에 대해 넘치는 것들을 미처 보지 못했기에 그렇게 되었는지도. 휴대폰과 컴퓨터의 노예가 된지 오래인 지금도, 그것들을 손에서 놓지 못하고 그 편리함과 익숙함을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기는 것부터가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인간이 편리하고자 만들어낸 많은 것들이 지금은 인간을 지배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이 책에서도 그렇지만, 인간은 이러한 기계들의 반란이 오류라고 생각하다가 크게 당한다.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을 아예 간과하고 모든 것들을 인간의 손끝 하나에서 조종하고 관리하는 게 당연한 것처럼 여겨진다. 익숙하게 그렇게 해왔던 것처럼. 그 과정이나 결과에 치명적 오류나 실패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여기서도 인간의 이기심이 그대로 드러난다. 오직 자신들을 위해서 만들었고, 자신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기에 그 외의 것들을 잘 들여다보려 하지 않으려는 것이 말이다. 더군다나 그 이기심의 끝을 보여주는 이 한 문장. “로봇과의 전쟁 앞에서 인류는 최초로 단결한다.” 웃기지 않은가. 개개인이 이기적으로 살아가다가 오직 한 순간, 바로 그때. 로봇과의 전쟁이 진짜로 시작되자 최초로 단결한다니. 풋~ 오직 자신만을 위해 살아온 인간 본연의 모습을 그대로 표현해준 말이 아닐까 싶다.

어찌되었든 이 이야기는 인간이 만들어낸 기계들이 그 반란을 시작으로 걷잡을 수 없는 살상과 피해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지금 이렇게 평온하게 보내고 있는 시간 중에도 조심히 소리 없이 그 반란들은 시작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이렇게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컴퓨터도 어느 순간 나에게 달려들지도... 그리고 가만히 손에 든 휴대폰을 들여다보게 된다. 이게 없었던 그 시간은 어떻게 살아왔을지 마치 기억도 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고서.

결말을 처음부터 보여주고, 누군가가 기록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새로운 형식은 아니지만 상당히 흥미롭게 읽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나에게 그 이상의 재미나 감동을 크게 주지는 못하더라. 역시나 취향의 한계인가 싶지만. 거장 감독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진다는 그 순간이 오히려 더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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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는 동안
윤성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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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너무나도 쓸쓸해 보였는데, 너무나도 웃겼어.
쓸쓸한데 웃기다니 모순처럼 들리지만 실제로 이 책이 나에게는 그랬다. 모두 열편의 단편이 담겨 있는 이 책은 주인공들이 들려주는 참으로 이상한 우연 속에서 시작되는 이야기들이 웃음을 만들어낸다. 그들의 이야기는 모두 어이없이 일어나는 우연한 사건들이었고, 소설 속의 인물들이 만나는 일상의 모습들이 웃음이 나게 하고 있다. 코미디 프로그램을 보고 박장대소하는 것이 아니라,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고, 씁쓸한 기억들이 떠오르게 해서 싸늘한 웃음이 나고, ‘인생 다 그런 거지, 뭐.’라는 말이 나오게 체념하는 듯한 생각을 갖게 해서 웃음이 난다.

‘우연’으로 시작한 그들의 기억을 꺼내어본다. ‘어느 날, 문득’ 사소한 일 하나가 오래 전의 기억들을 꺼내게 만들어 회상의 시간을 갖게 한다. 그런데 그 회상의 시간이란 것이 그리 유쾌한 기억이 아니다. 마음속의 상처와 아픔이 되는 일들이었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도 반갑지 않다. 자신이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누군가의 삶을 일그러뜨렸던 기억들이다. 당연히 떠올리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 책 속의 인물들은 우연한 기회에 그 기억들을 떠올리고 더듬어보면서 반성 아닌 반성을 한다.(사실은 그냥 기억만 한 것에 가까울지 모르지만 그들에게는 그게 최선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누군가에게 모진 말을 해서 상처를 입히고도 사과를 하지 못해 늘 마음 한 구석 미안한 기억(‘부메랑’), 같이 여행을 가기로 한 친구와의 약속을 못 지키고 친구 혼자 여행을 떠나게 해서 그 여행길에 사고가 난 일(‘5초 후에’), 원숭이 그림의 티셔츠를 입었다고 놀렸던 아이가 죽었다는 소식(‘느린 공, 더 느린 공, 아주 느린 공’) 같은 그들의 기억들 대부분은 마치 자신이 그들의 슬픔을 만들어낸 원인 제공자인 것처럼 그려진다. 그저 우연의 일치일지 모를 일들이 갑자기 수면 위로 드러나면서 그들이 만들어낸 것만 같은 타인의 불행을 곱씹어보게 한다. 그때 왜 그랬는지, 뒤늦은 후회를 하면서 말이다.(늘 그렇듯 뒤늦은 후회는 소용없는 일이지만 말이다.)

보통은 후회라는 것은 슬픔과 아쉬움을 동반한 기억으로 함께 올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유쾌하게 혹은 썩 괜찮게 이들의 기억 속의 일들을 같이 바라보게 된다. 알게 모르게 행했던 잘못들과 실수들을 이 책 속의 인물들은 부끄러움을 담은 마음으로 말을 꺼낸다. 쑥스럽지만 천천히, 민망하지만 용기 내어, 그 자책의 시간들이 조금은 가벼워지게. 그들은 때늦은 후회와 용서와 이해를 만들어내고 있다. 실제 이 책 속의 인물들은 드러내놓고 화해를 하거나 사과를 하거나 않는다. 그저, 자신만의 방식으로 기억하고 더듬어가면서 생각의 시간을 보낸다. 전화를 해놓고도 결국은 한 마디도 하지 못하고 끊을지언정 시도는 한다(‘부메랑’). 그게 그들만의 방식일지도 모르고, 아직 완전한 이해를 가져오지 못했기에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줄기 진실함의 빛은 보여준다. 기억을 꺼내어 잘못되었던 순간을 생각하고, 그게 자신의 잘못인 걸 인정하고, 화해의 손을 내미는 모습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으니까. 마치 그들이 모든 이해와 용서의 시간들을 그렇게 보여주려는 듯이.

‘우연’이 만들어낸 우습지만 불행해 보이는, 하지만 그들이 들려주고 보여주는 이야기들 속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그 무언가가 있다. 그들을 통해서 우리를 바라볼 수 있는……. 내 안에 깊이 잠들어 있는 그 비슷한 기억들이 떠오르고, 기억조차 하지 못할 무수히 많은, 타인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었던 시간들을 기억해내게 한다. 이 책 속의 인물들의 삶과 기억들과 행동들을 통해서, 미처 알지 못하고 기억하지 못하는 나의 시간들을 보게 만든다. 나 역시 어떤 우연으로 그들과 같은 그런 시간을 갖게 될지 모르니.
자신의 삶을 똑바로 바라보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일은 없을 테니까. 뒤돌아보면, 그토록 벗어나고 싶은 자신의 삶이, 등 뒤에 있을 테니까. 마치 거울을 보는 것처럼. (101페이지)
언제 어디서 다가올지 모를 삶의 한 순간이 나에게 이런 시간을 가져다줄지 모른다. 무의식중에 기억 깊숙하게 봉인해 놓았던 어떤 시간을 열게 해줄지도 모른다. 그런 시간들 대부분은 그리 좋은 기억은 아닐 것이다. 이 책의 인물들처럼 후회하고 이해할 수 없고, 때로는 용서 받아야만 하는 시간들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시라도 그런 우연이 나에게 나가온다면 열어보리라. 뒤늦은 후회와 민망함과 쓸쓸한 웃음을 가져다줄지라도 내가 기억해내고 풀어야할 이야기라면 그 시간의 주인공은 ‘나’일 테니까.

첫 페이지를 넘기기 힘들어했던 기억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 사라지고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까지 내내 입가에 미소가 돌게 했다. 인물들의 어이없는 우연에, 쓸쓸한 현재에, 작은 빛이 되어줄 그들의 과거의 기억 때문에. 그들에게 있어 그런 기억의 떠올림은 어쩌면 ‘우연’이 가져다준 커다란 기회일지도 모른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자신들이 일그러뜨렸다고 생각하는 타인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면서 고민과 함께 더 괜찮아진 자신으로 거듭날 수 있는 시간들을 만들어주었으니까 말이다.

윤성희의 단편집을 두 번째로 만났다. 처음 읽었던 것은 기억이 가물거릴 정도로 잘 생각이 안 나고, 그 다음 만난 작품은 장편 『구경꾼들』이다. 그리고 세 번째로 만난 작품이 그녀의 단편집 『웃는 동안』이다. 나는 단편집과 늘 싸움을 한다. 어렵게 읽어질 것만 같고, 어떻게 읽어야 할지 막막함부터 갖게 되는 고민에 빠지게 하는, 어쩌면 일종의 시험대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너를 끝까지 읽어 주리라.’하는 다짐 같은 욕심이 생기게 하기도 하고, ‘미치겠다.’를 연발하게 하는 거슬림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래서 늘 도전의식 같은 것을 갖게 한다.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한번 해보자 싶은. (웃기지도 않은 싸움이지만. 풋~) 윤성희라는 이름을 다시 보게 만들고, 읽는 재미를 주었고, 조금은 더 진실해지는 삶을 살게 하는 마음을 가져다 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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