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비우스 로마사 1 - 1000년 로마의 시작 리비우스 로마사 1
티투스 리비우스 지음, 이종인 옮김 / 현대지성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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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역사는 지중해 일대의 역사 전체와 그 비중이 맞먹을 만큼 장구하고, 그 위신이란 고대 서유럽사 전반의 그것을 대표한다 할 만큼 중요합니다. 셀주크 투르크가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아나톨리아 반도를 차지했을 때 스스로도 감개무량했던지 점령지의 행정 단위를 "룸(그들식 발음으로) 술탄국"으로 불렀을 정도죠. 심지어 이곳은 원래의 로마(도시)로부터 3200km 정도, 서울 부산 사이 거리의 열 배 가까이 떨어져 있는데도요. 심지어 저 전투는 서로마 제국이 이미 멸망하고도 600년 가까이가 지난 후 치러졌는데도 말이죠.

11세기 후반에조차 로마의 위신이, 그 아슬아슬한 후계자인 비잔티움 제국(동로마 제국)에 의해서 그 정도라도 유지되었다면, 전성기의 공화국, 팽창기의 제국 시절엔 과연 어땠겠습니까. 하물며 리비우스는, 아직 제정, 정확하게는 원수정 초반의 승승장구하는 로마 역사 첫물만을 잠시 구경하다 생을 마쳤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의 저술에는, 말하자면, "당대인들 보아라, 외국인 너희들 경배하라. 후손들이여 주목하라. 우리 로마의 역사, 이처럼이나 자랑스럽고 당당하며 장엄하다." 같은 긍지가 뚝뚝 묻어납니다. 그의 필치는 한 마디로 요약하여 긍지와 애국심 그 자체입니다.

대개 자긍심 가득한 역사가의 필치와 시선이 자칫 잘못하면 주관주의, 국수주의, 독단으로 치닫기 일쑤이지만, 이 책은 심지어 그런 위험이나 경솔함으로부터도 자유롭습니다. 리비우스의 <로마사>는, 신중하고, 체계적이며, 로마 비(非) 시민권자는 물론 심지어 로마에 적대적인 이의 눈으로 읽는다 가정해도 엄정하고 공정합니다. 어떤 대목은 아예 "과학적"이란 느낌마저 줍니다. 무려 2000년도 넘은 아득한 옛 시절, 이처럼이나 체계적으로 사물과 사람을 보고 판단하며 정리하는 사람이 다 있었나 싶을 만큼입니다.

역사는 대체로 "이야기"이기도 하며, 불어에서 "이스투아(historie)"는 역사란 뜻, 이야기(="레씨 recit")란 뜻을 함께 가집니다(영어에선 history와 story가 발음, 철자, 단어 엔트리 등 모든 면에서 구분되나, 직접 어원은 역시 프랑스어에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특히 근대에 들어 계몽주의 지성인들에 의해 "과학"으로 접근해갔으며, 랑케의 실증주의에 이르러서는 그 엄정성이 극치에 달했습니다. 헌데 그로부터도 천 수백 년 세월을 격한 이 리비우스의 저술은, 이미, 매우 체제가 질서 바를 뿐 아니라, 어떤 파트에서는 "행정가의 경륜"이 묻어나기까지 합니다. 한 개인이 대체 어떤 식으로 지적인 훈련을 받거나, 스스로 소양을 쌓았길래, 이렇게 생각하고 이런 책을 쓸 수 있는지, 참으로 놀랍게만 여겨졌습니다.

리비우스의 로마사는 이야기로서 망라적일(=빠진 데 없이 촘촘한 사연을 담았을) 뿐 아니라, 당대인과 외국인, 심지어 적국에 대해서조차 신뢰를 보낼 수 있는 표준적 관점을 담았습니다. 물론 역사의 초반에는 로물루스와 레무스가 늑대의 젖을 먹었다느니, 독수리 떼가 누구에게 더 많이 날아와 결국 로물루스가 창업의 정통을 더 크게 얻었다느니 하는 신이한 전기(傳奇)가 길게 서술됩니다. 허나 당대인들이 이런 식으로 자신들의 고대사를 이상화, 신비화했다는 증언, 인용으로 받아들여도 되지 않겠습니까?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서가 아니라 말입니다. 고려 후반의 승려 일연도 <삼국유사>를 저술할 때, 그 기괴한 사연들을 일일이 사실로 믿어서 기록에 남긴 게 아니라, 신화나 전설은 그것대로 후대에 전할 필요가 있다는 동기에서 비롯한 것입니다.

우리가 일본 중근세사를 읽으면, 이른바 요바이(夜這い) 풍습 등 참으로 미개하고 낯뜨거운 야만 습속이 많아 얼굴이 다 붉어집니다. 그런데 로마의 창업 초기로 거슬러올라가 봐도, 아직 인지가 덜 깨일 무렵이라, 젊은 남성들이 나체로 질주하며 처녀를 차지하는 경쟁을 벌였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하지만 이는 말그대로 생면부지의 남성에게 완력으로 장래와 신변을 도적질당했다기보다, 평소에 알고 지내던 동네 친구 또래 몇몇을 놓고 양해 하에 스스로 선택권을 줬다는 식으로도 선해가 가능합니다. 현대의 젊은 여성이라고 해서 "쟤 아니면 안 된다"는 식으로 어디 한 남자만 찍어 놓고 살겠습니까?(물론 그럼 좋긴 하지만) 둘 혹은 셋 중에 능력 있고 과단성 더 있는 쪽에 순간 마음이 기울 수도 있죠.

p60:10에 보면 두움비르란 직책이 나옵니다. 라틴어의 duum 등에서 보는 모음 철자 겹침은 실제로도 두 배 길이로 발음하기에 저런 표기는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어떤 건 철자가 같은데도 두 배로 길게 늘여야 할 때도 있습니다. 정격을 갖춘 라틴어 텍스트는 모음 위에 장음기호[이런 걸 마크론이라고 하죠]을 붙여 표기합니다). 참고로, 본문에 duumvirs라고, 영어식으로 복수형이 표기된 걸로 보아 이종인 선생께선 영역본을 저본으로 삼으신 듯합니다. 라틴어 복수는 duumviri로, 어미(엔딩) -i가 붙거든요.

아무래도 이 시기(제1권은 건국초부터 390 BCE까지 다룹니다. pp. 548~550의 연대기에 타임라인이 잘 정리되어 있고, 이런 점 역시 이 책만의 최고 장점 중 하나입니다)는 로마가 자신들만의 정체성과 기반을 다져 나가는 도상(途上)이다 보니, 인접 후진 지역의 주민, 종족들과 갈등하는 양상이 자주 등장합니다. 그래도, 꼭 로마 시민이 아니어도 라티움 지역인들과는 말이 통했고(왜 "로마어"가 아니라 "라틴 어'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방언의 편차는 있어도 반도 인근의 거주자들과는 의사 소통에 큰 무리는 없었을 겁니다.

허나 알프스 넘어, 갈리아 지역을 응시하면 사정이 크게 달라집니다. 이들은 육체적으로 드세고 미개하기에 막무가내이며(로마 인의 관점에서), 그들 나름대로 확고한 정체성을 지녔기에 결코 대적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로마사의 전반부는 이 골 족과의 대립상이 큰 비중을 차지하며, 마치 중화 제국이 동이, 서융, 남만, 북적을 상대로 "왕화"를 시도하거나 군사적 징치를 도모하던 족적과 유사합니다. 물론 우리는 근거도 없이 승자 위주의 세계관에 편승하여 자기기만의 우를 범해서는 안 되며, 리비우스나 로마인의 관점이 무엇이었든 간에 그 상대측의 입장까지도, 행간을 넘어 객관적으로 관찰하려 애 써야 하겠습니다.

갈리아 인들이 얼마나 로마인들의 골치를 썩였나 하면, 우리가 잘 아는 불세출의 정치인, 군인이었던 줄리어스 시저도 그의 대표 저술 중 하나가 <갈리아 전기(戰記)>일 정도입니다. 골 족 상대로의 대 승전이 그의 커리어 정점을 찍을 만큼 중요한 사건이고, 물론 로마가 생존의 기로에 서서 기사회생한 모멘텀이기도 합니다. 헌데 이 1권에서 다뤄지는 전쟁 기록은 그보다도 300년이나 더 앞선 시기의 것들입니다. 로마인들에게 골 족이 차지하는 위상이랄까 하중은, 마치 중화 제국이 흉노 족을 상대로 느꼈던 부담과 공포감과도 유사합니다. 수백 년 동안이나 말입니다.

역시 300년이나 앞선 시기이지만, 이 책에도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라는 이름이 또 등장합니다. 줄리어스 시저(동명의 조상들은 또 왜 그리 많은지요 원)의 가문이 얼마나 유서 깊었는지 또다시 확인 가능하며, 예컨대 현대 작가 칼린(Coleen) 매컬로 여사의 대작 픽션에서, 재산은 막대하지만 위신이 전무했던 마리우스 장군에게 그처럼이나 비싼 대가를 받고 혼사를 치를 수 있었던 저력의 먼 연원이 대체 어디서부터인지도 새삼 짐작 가능합니다.

르네상스 역사를 공부할 때 중요한 지리적 기준 중 하나가 알프스 이남이냐 이북이냐 하는 겁니다. 정확하게는 "알프스 이편/저편"인데, 그야말로 자신과 타인을 대단히 주관적으로 편가름하는 범주라서 어리둥절할 때가 많았죠. 이런 이상한 명칭의 근원이 무엇이었는지 정확히 알려면 바로 이런 로마 시대의 사료를 들여다 봐야 합니다. 고전 중의 고전을 읽는 보람과 재미는 이런 데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책에는 "키살피나"라는 개념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게 cis+alpina입니다. cis는 말하는 사람, 혹은 어느 기준점을 상정했을 때 "이쪽, 같은 편'이란 뜻입니다. 이게 천 수백 년이 지나 나폴레옹의 시대에 이르면 이 사람이 반도를 정복하고 인위적으로 편성한 "치살피나 공화국"이란 이름도 등장하는데. 완전히 같은 어원이고 단 그로부터 수백 년 전 이탈리아어에 폭 넓게 구개음화 현상이 일어나 "키"가 "치"로 바뀌었을 뿐입니다(우리말에서도 종종 발견되죠). 왜 저기 시스 AB형이라든가, 유전자 발현 메커니즘 용어에서도 이 접두어 cis-(반대어근은 trans-)는 너무너무 자주 쓰이죠.

이 1권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핵심 서사는 혹 단 둘만 꼽으라면,


1) 현대 영어권, 아니 서유럽 문화권에서 두루 "폭군의 대명사"로 꼽히는 타르퀸 더 프라우드(오만왕 타르퀸)이 과연 누구였는지, 어쩌다 그런 유취만년의 신세가 되었는지. 정통 역사가의 서술을 읽어 나가며 머리 속에 정리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 타르퀸 왕은 서유럽에서야 거의 네로만큼이나 유명한데 한국인들에게는 비교적 덜 알려진 편이죠. 이 폭군이 왜 중요하냐면, 이후 로마가 공화정을 이어나가며 혹 대중에게 인기를 끄는 실력자가 등장할 때마다, "너, 타르퀴니우스처럼 되고 싶냐? 여러분들, 기분에 끌려 또 독재자 밑에서 신음하시렵니까?" 같은, 일종의 건국이념 반면교사나 안티테제 처럼 기능하게 되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멀게는 브루투스가 시저를 암살한 것도, 대외적 정당화의 기반은 이 고사에서 마련한 행위입니다.

2) 역시 유명한 "정결한 루크레티아" 이야기가 대체 무엇이 원전인지, 이 1권에서 또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현대 젠더 담론으로 보면 여성에게 자신이 책임 질 수 없는 사유로 무슨 정절(을 위한 죽음)을 강요하느니 비판이 제기될 수 있지만, 사실 이 책에서도 확인되지만 본디는 그런 가부장적 도그마와는 무관한, 한 자부심 높은 여인의 결연한 처신(무슨 남존여비 사상의 희생양이 아니라, 복수를 해 달라는 확고한 결의, 자신의 존엄을 선명히 하려는 동기였죠. 남자도 치욕을 당하면 자결하는 고사가 역사에는 얼마든지 있습니다)을 잘 드러낼 뿐입니다. 이뿐 아니라 루벤스 외 여러 거장의 그림으로도 유명한 각종 사연의 기원, 모티프가 무엇인지도 그야말로 원전으로(그것도 바로 이 1권애서!) 확인 가능하죠. 또, 앞서 말한 매컬로 여사의 픽션에서는, 브루투스가 그런 거사를 감행한 내적 동기를 놓고, 그 모친의 훈육 방식이나 처신이 아이한테 남긴 나쁜 영향을 은근 암시하는데, 이 1권을 통해 먼 조상님 브루투스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는지도 재미있게 배울 수 있습니다.

서술은 당당하고 시야는 원대합니다. 성인은 이 책을 읽고 품위 있는 정사서의 기준이 무엇인지 가치관을 재정립할 수 있고, 자라나는 청소년이라면 바로 이런 위풍 빛나는 역사를 읽고 그 역사를 숨쉬며 만들어 나가는 인물이 되겠다고 보다 큰 꿈을 품을 수 있습니다. 추천사에 나온 대로, 왜 여태 그리스 사가들의 대작들에 비해, 이런 중요한 고전이 늦게 번역되었는지 만시지탄의 느낌이 있지만, 이종인 선생 같은 최고 권위자의 손에 의해 이처럼 우리 독자들과 감개 어린 조우가 이뤄졌으니 더 바랄 게 없습니다. 그저 최고, 최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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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로 읽는다 삼국지 100년 도감 지도로 읽는다
바운드 지음, 전경아 옮김, 미츠다 타카시 감수 / 이다미디어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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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는 너무도 많은 "삼국지 마니아"들이 계십니다. 우리 북뉴스 카페에도 삼국지를 사랑하시는 뛰어난 전문가급 회원들이 많으시고요. 이때 "삼국지"라 함은 두 가지 의미를 갖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보통 부정확하게 일컫는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연의>이겠고요. 다른 하나는 본 명칭이 그것인 진수의 정사서입니다. 명청대에 완성된 모습을 갖춰간 삼국연의를 너무도 열독 애독하기에, 많은 이들은 진수의 정사서에까지 관심을 넓혀 가며 픽션에 대한 본문비평까지 시도하시는 모습도 종종 봅니다. 어떤 분들은 사마광의 자치통감 중 해당 대목까지 대조해 가며 독창적이고 예리한 평설을 짓기도 합니다.

꼭 이처럼 전문가급으로 연의, 혹은 정사서를 열독하는 분들이 아니라도, 즉 아직은 중국 역사의 가장 역동적이었던 그 시대에 대해 낯설어하고 한문 지명 인명의 행진에 부담을 느끼는 분들도, 지금 이 멋진 책처럼 복잡한 사항들을 간단하고 명쾌한 도식화로 간추려 놓은 "컴패니언"이 혹 곁에 있다면, 훨씬 쉽게 본문을 읽어 나가실 수 있겠습니다. <삼국지연의>를 어려워하시는 분들은 대개 인명, 지명이 헷갈리거나, 아님 그 단계는 넘어섰어도 장군들(과 그들의 책사) 간의 치열한 두뇌 싸움이 구체적인 전장의 전략에서 어떻게 효력을 발휘한다는 건지 서술을 따라가기 힘들어하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남보란 듯 삼국지연의의 구체적인 사건, 정황 묘사를 즐겨 입에 올리는 이들도 다른 장면의 디테일을 짚어 가며 누가 질문, 논쟁을 시작하면 시원한 답을 못 내어 놓는 수가 많습니다. 마음에 드는 몇몇 장면에 마니아처럼 몰입하여 전문가처럼 해설할 수도 있지만, 이 방대한 소설 전편을 놓고서 일관된 부연 설명과 주석을 달 만한 도사님들은 극히 드뭅니다. 그런데 혹 삼국연의를 통독한 이들 중, 이 책 한 권만 곁에 있어 준다면, 도원결의에서 오장원의 장렬한 폐막까지, 혹은 관도에서 적벽까지, 어느 한 지점을 턱 짚어도 진정 제갈량이나 순욱 주유 사마중달처럼 청산유수 같은 변설이 입에서 술술 나오게, 텍스트에 대한 안목이 훤히 밝아질 듯합니다. 정말로요. 그만큼 자세하고 내용이 알차며, 수회독을 마친 마니아들이 항상 헷갈릴 만한 사항을 잘도 알아서 긁어 주는 놀라운 "족집게 참고서"입니다.

우선 pp. 64~65를 좀 보죠. 연의에서 사실상 주인공이라 할 유비가 자립 기반을 (無로부터)일궈나가는 과정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혹 명청대 이전에 생존하여 역사 전반에 달통한 교양 높은 선비라고 해도, 정사서만 읽어서는 유비에 대해, 마치 성장 소설의 히어로처럼 인생의 성취를 가꿔 나가는 과정을 놓고 감정 이입을 하긴 힘들 것입니다. 많은 한국인들이 (벌써 조선 후대 이래) 그토록 연의에 열광하는 건 "주인공" 유비의 매력이 그만큼 크게 작용해서입니다. 헌데, 왜 유비가 손바닥만한 땅뙈기 하나를 마련 못 해 그처럼 고생했는지, 왜 특정 시점부터는 운수가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는지는 사실 누구 눈에도 의문입니다. 심지어 조조마저도 그의 그릇과 인품과 웅대한 포부를 인정했는데도 말입니다. 이 배경은, 당대 중국 대륙 구주가 어떠어떠한 세력가들에 의해 과분되었는지를, 지도를 통해 살펴 보아야만 정확한 파악이 가능합니다.



조조는 부친의 원한을 갚는다면서 서주에서 대거 학살을 저질렀고, 이 경위는 비교적 상세히 연의에도 기술되어 있습니다. 헌데 이 사건과 장평관 전투, 이각-곽사의 난, 예주 정벌과 무평 전투가 어떻게 유기적으로 연결되는지는 소설을 꼼꼼히 읽어도 이해가 분명해지지는 않습니다. 어떤 사건은 삼국연의에 생략되기까지 하니 말입니다. 연의는 독자(청중)이 충분히 감정이입할 만한 인물을 중심으로, 의리와 충절의 승리, 악인스러운 잔꾀의 패배 등에 드라마틱하게 초점을 맞추긴 하나, 서사의 흐름에 몰입하는 중 맥락을 잠시 잊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하긴 이처럼 다양한 목적을 동시에 추구할 수 있는 텍스트 포맷이란 존재가 불가능하겠지만요. 이 때문에 이런 멋진 책이, 도표와 지도를 통해 일목요연히 정리해 주는 도움이 필요하다는 거죠.

삼국지에는 실로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그 중 유표는 의심 많고 안정감이 떨어지는 인물로서, 유현덕에게 대승적 관점에서 일정한 정치 기반을 양보하지도 못하고, 기량이 떨어지는 후계자를 내세운 탓에 결국 영지가 와해되는 운명을 자초한 정도로 우리 인상에 남습니다.



허나 사료를 종합적으로 고찰하면, 그는 (마치 이후에 위나라에서 실권자로 군림한 사마의처럼) 사회적으로 존경 받는 청류파 관료 출신이었고(사마의와는 대략 부자지간 정도 나이 차가 납니다), 형주로 부임한 후에는 일거에 정치적 평화를 도모한 효융의 면모가 있었습니다. 이 책은 이런 정확하고 공평한 면모를 독자에게 고루 소개합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책은 정확하고 상세한 지도를 담았을 뿐 아니라, 독자에게 실질적이고 유기적인 지식을 제공하는 인물 사전 구실을 겸합니다.

관도의 전투 대목을 읽으신 분들은, 이 대회전이 이후 중원의 역사 향방을 가름한 이정표와도 같다는 평가에 다들 동의합니다. 어떤 이는 "당대 인류가 짜낼 수 있는 모든 꾀와 책략, 문명의 이기가 모두 동원된 일대 결전"으로도 비정하는데, 역시 그 과정을 살펴 보면 고개가 절로 끄덕여집니다. 책에서는 관도전투가 종료된 후, 원소는 허도로귀환하고 유현덕은 예의 그 유표에게 몸을 의탁하는 대목을, 상세한 지도와 함께 설명합니다.



어떤 이들은, 그렇게나 치명적이고 규모 큰 패배를 당한 후에도 아직(비록 잠시 동안뿐이지만) 세력을 유지하는 원소의 정치적 자산이 얼마나 방대했었는지 다시 감탄하기도 하죠. 단 왜 이 시점에서 유현덕이 조조에게 다시 몰리게 되고, 처참한 양상으로 패주했는지(그래서 형주로 향했는지)는, 지도를 함께 고찰해야 그 정확한 동기와 추세를 살필 수 있습니다. 이 지도를 보면, 공도와 유비가 자연스럽게 손을 잡는 배경, 조인의 승리가 얼마나 향후 판세에 크게 기여했는지의 판단, 패주한 유현덕이 그마나 악조건에서 세력을 추스려 피해를 최소화한 후 권토중래를 모색하는 과정이 눈에 선히 그려지는 듯합니다.

이미 쓰러진 자에 발길질을 가하거나, 시체에 대고 부관참시를 하는 격 아닌가 같은 빈축을 사기 일쑤이지만, 조조는 원소 세력의 잔당을 토벌하는 게 결코 쉬운 과제가 아니었습니다. 원소의 두 아들이 소모적인 내홍을 피하고 단결했다면 추이가 어찌 변전했을지 모를 형국이었고, 지도를 보면 설령 둘로 갈려 파쟁을 벌일망정 일거에 이를 진정시키는 게 만만치 않았겠다는 짐작이 절로 듭니다. 다시금, 조조가 얼마나 열악한 기반에서 시작한 입지전적 인물인지 알 수 있습니다. <연의>만 읽다 보면, 뻔한 결과론이나 승자 위주의 선입견에 함몰되어 정사(正史)에의 바른 접근이 힘들 수 있습니다.


이 책에서 가장 예쁘고 정확히 뽑힌 최고의 지도 중 하나를 꼽으라면 p131의 컷입니다. 예전에 나온 책들에서 흐릿한 흑백 도판으로 작성된 구주(九州)의 지도는, 경계가 불분명하거나 지명 표시가 오류를 낸 부분이 많았습니다. 허나 이 책은, 일단 거의 모든 컷이 아홉 고을의 영역과 판도를 일관되고도 선명히 포착합니다. 그뿐 아니라 색상 배치도 센스 있게 이뤄져서, 책을 열독하고 나면 눈을 감고도 중원의 강역이 선명히 떠오릅니다. 눈호강이란 실로 이런 경지를 두고 이르는 말이죠.



정확하게는 pp. 130~131 양쪽에 걸쳐 실린 도판인데, 왼쪽에서는 원씨 형제의 골육상쟁 과정과 몰락 개요를 텍스트와 함께 요약합니다. 오른쪽 페이지에서는 같은 시기(204~206 CE) 다른 군웅들은 어디서 뭘 했는지의 국면 포착이 역시 입체적으로 이뤄집니다. 저자는 소설상으로 과장, 극화한 승자 위주의 동선에 머무르지 않고, 당대 최고 최대의 기반을 갖춘 거대 정치 세력이, 무너질 때도 어떤 경위와 곡절을 거쳤는지 실증적으로 조망합니다. 마치 이때로부터 1200여년 후 일본 열도의 최고 실력자 중 하나인 이마가와 가문의 쇠퇴를 보는 듯도 한데, 역사의 정확한 이해와 평가는 역시 잘 고안된 지도의 도움이 필수임을 다시 실감합니다.


제가 이 책을 보며 또 한 번 놀란 건, p146의 이민족 지도입니다. 사실 이무렵은 고조선이 망한 후 대략 300여년이 지난 시점이며, 아직도 한사군의 잔재가 남아 활동했으며, 이때로부터 30여년이 지나면 위의 관구검이 고구려를 쳐 동천왕에게 큰 고초를 안기기도 합니다(그래서 조조의 위나라가 한국인들에게 특히 인기가 없거나 원성을 사는지도?) 아무튼 우리 민족 역시, 중원 북방의 위와 밀접히 교통, 항쟁한 역사가 있기에, 이 지도는 더군다나 예사로 봐 넘길 수 없는 면이 있죠. "한 제국에 반역과 복종을 거듭했고, 위나라와도 대항했으며, 7세기까지 살아남았다."는 저자의 요약이 인상적입니다. 외부에서는 그리 본다는 정도로 정리하면 되고, 우리의 역사에 우리가 따로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정리할지는 우리의 별개 과제입니다.

서량을 보면 마치 중국집 배달원들이 한 손에 높이 쟁반을 들고 "짜장면 시키신 분!"을 외치는 모양 같습니다. 험준한 지형 때문에 두루 중원의 권력이 미치지 못하고, 용맹스러운 유목 민족 사이에서 걸출한 호걸과 용맹한 기마 병력이 자주 배출된 지역. 물론 우리는 마등의 아들인 미소년 마초의 존재로 더욱 깊은 인상이 남은 곳이기도 하죠. 이 지도는 특히나 잘 봐 두어야 하는 게, 이후 역사인 5호 16국사를 살필 때 매우 중요한 연계점을 갖기 때문입니다.

211년쯤으로 넘어가면 조조의 기세는 더욱 거침없습니다. 위나라를 중원의 정통으로 두는 이유는, 중국인들은 그들의 인구 주류가 거주하고 물산과 시스템과 문화의 중추가 놓인 지역을 누가 다스렸는지에 더 큰 비중을 두기 때문입니다. 조조는 수완이 좋았고 단호한 결단력을 지녔으며, 이 무렵이면 지난 역사에서 큰 의미를 지닌 중원의 주요 지역이 확고한 그의 장악 하에 떨어집니다. 오, 촉과의 대립, 항쟁뿐 아니라 크고작은 반란이나 할거가 빈발했는데, 강장 밑에 약졸 없다고 여러 우수한 장수나 관료들이 제 실력을 발휘하여 질서와 안정을 찾습니다. 한편, 강남의 오 역시 여몽(우리에게는 괄목상대의 고사로 잘 알려져 있죠) 등의 활약으로 번영과 활력을 이뤄갑니다. 이 모든 과정이 역시 지도에 잘 표시되었습니다.



일본에서는 장군 칭호가 절제되어 쓰이는 편인데, 막부의 집정 총책임자에게 "정이(征夷)"다음 그저 큰 대(大) 한 글자만 달아 "쇼군(將軍)"을 일컫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반면 중국이나 한국이나, 특히 우리의 경우 고려 시대로 가면 상장군, 대장군, 장군 등의 직함이 매우 남발되는 걸 봅니다. 이 책 pp 238~239에는 그런 호칭 이슈에 대해, 저자의 명쾌한 관점과 분류를 통해 독자의 혼선을 정리합니다.

공명의 출사표는 유교적 질서 하에서 인신(人臣)된 자가 보여 줄 수 있는 처세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 주는 명문입니다. 오로지 주군에 대한 충의의 표상으로 신료의 길을 곧게 걸은 그는, 국력을 총동원하여 선대로부터의 영원한 과업이었던 북벌을 도모하는데, 이때 북벌이란 대개 왕화가 미치지 못한 미개한 오랑캐에 대한 토벌을 일컫는 말이었으므로, 그와 촉한의 관료들이 스스로 자부한 정통의 긍지가 얼마나 높았는지를 짐작게 합니다.

육출기산이란 한자 성어로도 잘 알려져 있듯, 공명의 군사 원정은 실로 집요했으며, 기변의 책략이 부족했다는 등 정사서 저자 진수의 박한 평가도 남았지만 사마의가 그처럼이나 야전 대결을 회피한 걸로 보아 여튼 용병 솜씨도 사람의 한계를 넘었음이 분명합니다. 책에는 대체 기산이 어디이며, 마속의 실수가 얼마나 뼈아팠기에 이후 정세의 대종이 이 무렵 사실상 결정되고 말았는지, 천고(千古)의 후(後)에 우리 독자들의 이해를 돕습니다.

삼국지는 비록 중국 명대의 창작 문학이지만, 특히 조선 후대에 수입되어 지식층, 관료, 평민 계층에 이르기까지 두루 보급되어 큰 인기를 누렸으며, 현재도 처세와 책략과 수신의 원칙 마련에 있어 수도 없이 인용되는 지혜와 영감의 보고입니다. 그러나 픽션의 신 나는 내러티브와는 달리, 실제 역사의 고증과 정확한 이해를 기하려면, 인명 정보의 파악과 경제, 물산의 판도까지도 함께 접근해야 합니다. 이 모든 부가 작업은, 도대체가 깔끔하고 권위 있는 지도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이 책은 그래픽 컴패니언으로서 단 한 권의 결정판이라고 해도 되며, 앞으로도 종이책 포맷으로는 이를 능가하는 레퍼런스 북이 나오기 힘들 듯합니다. 최고의 독서 체험이었으며, 차라리 감동적인 여행 한 꼭지를 마친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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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성장 기업의 법칙 - 세계 100대 기업을 통해 살펴보는 21세기형 경영 전략
나와 다카시 지음, 오세웅 옮김 / 스타리치북스 / 2017년 12월
평점 :
절판


"글로벌 성장"은 오늘날 경제 주체(기업, 가계[혹은 개인], 정부)에 어떤 의미를 띨까요? 어떤 논자는 이미 성장이 끝났으며, 지난시대 들썩거리는 호경기, 두툼한 지갑에서 나오는 넉넉한 소비 등으로 상징되는 고성장 시대는 다시 오지 않으리라고도 장담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성장이 아쉽습니다. 정확하게는 호경기, 흥청거리는 번영이 그립습니다. 국가나 지역 경제 단위에서의 "풍성한 돈의 흐름"도 그립고, 적어도 내가 몸 담은 기업만이라도 캐시 플로우 콸콸콸이었으면 더 바랄 게 없겠습니다. 이런 의미에서의 "글로벌 성장"은, 기업에 소속된 사원, 자영업자, 나아가 경제 참여 인구 모두에게 희망 가득한 불빛, 별빛과도 같습니다. "성장"에 관심 없다고 말하는 분은 과연 그게 진심일지 대뜸 의심의 시선을 받는 것도 당연하지 싶고요.

한편, 이미 넉넉히 몸집을 불린, 훤칠한 신장을 갖춘 성인더러 "성장"이 필요하다고는 자주 말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 이치가 국가 경제에도 적용되는데요. "성장"을 논할 때에는 개발 도상(途上)에 아직 머문 국가를 염두에 둔 게 보통이죠. 그런데 이 책은 "이미 성숙 단계에 접어든 국가의 거시 경제"도 일단 논의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한국처럼 무역대국 반열에 든 나라나 성장의 절정기를 벌써 지난 나라의 경제 주체들이 특별히 관심을 보일 만한 토픽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치 중년 남성들이, 청년기의 활력을 찾을 수 있다는 솔깃한 말에 끌리는 심리나 마찬가지라 할까요. 자연인의 회춘은 의학적으로 극히 가망이 낮은 희망사항이지만, 글로벌 성장이란 과제는 (이 책 저자의 관점에서라면) 그리 불가능해 보이지만도 않습니다. 경제란 이처럼 희망의 한 줄기 빛을 찾아 떠나는 담대한 여정이며, 여정의 마련 그 자체에 우리는 마음이 설레는지도 모릅니다.


어떤 기업이 위대하다는 평가를 들을까요? 이에 대해서는 경제 전문지 <포춘>, <포브스>, 혹은 <이코노미스트>나 <비즈니스위크> 등이 거의 매년, 혹은 반기별로 공표하곤 하는 100대 랭킹 기준이 있습니다. 사실 구체적으로 무슨 기준이 적용되었는지, 적용 양상이 공평하기는 했는지 꼼꼼히 체크도 안 해 보면서, 우리 평범한 독자, 대중은 그저 순위 매기는 구경꾼의 쾌감에 취해 저잣거리 아이들 참요 읊어대듯 작위적 평판의 확산에 동참합니다. 생각해 보면 좀 부끄럽기도 하죠.

그런데 이 책에서 "위대한 글로벌 성장 기업"의 기준으로 제시한 사항은, 읽어 보시면 아시겠지만 꽤 구체적입니다. 우선 저 어구가 꽤 길기 때문에, 책에서는 일일이 되풀이할 수 없어 간단히 G3로 약칭합니다. 보다 정확하게는

이며, 마치 G의 세제곱처럼 오른어깨 위에 첨자가 붙은 꼴인데, 글로벌(global), 성장(growth), 자이언츠(giants. 책 원문에도 -s가 붙었습니다)이라는 세 가지 범주를 가리킨다고 저자는 말합니다(p50). 즉 G+G+G가 아닌, GxGxG란 겁니다.

하나 재미있는 건, 이런 지표를 모두 충족시키고도 "비경쟁 체제"에 속해서 특혜 비슷한 걸 누리는 기업은 과연 어떻게 취급할지의 고민에서, 저자는 과감히 배제시켰다는 사실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저널 중에는 꼭 그런 태도를 취하지 않는 곳도 있는데, 이런 경우는 대개 투자 전망 쪽 정보를 얻으려는 독자를 염두에 둬서입니다. 그러나...

이 책은 분명히, "성장을 멈추지 않고, 변화에 부단히 적응하기 위해 뭔가 배울 구석이 있는 기업"의 모범을 제시하는 게 목적입니다. 따라서, 환경이 급변하기라도 하면 바로 도태될 게 뻔한 기업은 아예 처음부터 제외했다는 설명입니다. 과연 그렇겠으며, 이 책을 꺼내 들만한독자는 "현재 승승장구하는 기업들로부터 무엇을 벤치마킹할지"를 고민하는 게 보통이겠으므로, 저자가 이런 선명한 지표를 잡고 리스트를 뽑은 건 참 현명한 선택이란 생각이 듭니다.

같은 이치로, 금융기업의 매출은 (저자의 관점에서) 실물의 성장이라 볼 수 없고, material(원자재 등)계도 모두 배제했다고 합니다. 후자의 경우 창의력과 혁신에 의해 기업의 성쇠가 결정되는 게 아니라, 글로벌 경제의 호불황 여부에 따라(타의에 의해) 기업 이익의 등락이 좌우될 뿐이므로, 이런 기업으로부터도 우리가 뭘 보고 배울 게 없다는 뜻입니다.

세 가지 지표에는 각각 40%, 40%, 20%의 가중치가 부여되었습니다. 아무리 장래성이 좋아도 만년 틈새 시장에 머무는 기업은 세상을 향해 영향력을 끼칠 수 없습니다. 볼륨(매출)이 필요하다는 뜻이며, 그렇다고 이익을 낳지 못한 채 몸집만 불리는 기업도 물론 곤란합니다. 저자는 단 이익계상(計上)이란 회계 편의에 의해 부풀려질 수 있으므로 20%만 반영했다고 합니다. 이 서두에서는 "기업가치 성장률"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없으나, 이후 방대한 본문 중에 저자의 입장과 이론이 상세히 전개됩니다.


이제 논의는, 그럼 G3기업의 구체적인 공통점, 자질, 특장은 무엇인지로 넘어갑니다. 저자는 두문자 요약법으로, 글로벌 성장 기업은 한마디로 LEAP 모델에 자신을 최적화한 조직이라고 단언합니다.

책소개글에 잘 나와 있겠지만 저도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복습하는 뜻에서, LEAP이 무엇을 뜻하는지 요약 정리해 보겠습니다.

① L은 lean과 leverage를 뜻합니다. "린 방식"이야 현대의 모든 경영 교과서가 다 취급하는 개념이며, 불필요한 조직 군살을 과감히 제거하고 생존과 번영을 위해 정글의 야수처럼 날렵한 체형을 유지하라는 겁니다. 그럼 뒤의 "레버리지"는 뭔가. 기업이 혁신을 위해 모든 역량을 자체 개발하려면,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집니다. 경쟁자든 협력 업체이든 남의 장점과 자원을 최대한 이용할 줄 아는 융통성과 지혜를 발휘하라는 겁니다. 여기서 지렛대는 "협상의 추진력(간혹, 남의 약점 잡기)"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 지레를 이용하듯 내 힘의 몇 배 되는 효과를 내는 영리함을 말합니다. 생각해 보면, 너무 날씬하기만 한 사람은, 설령 남은 체성분이 모두 단백질, 알짜 근육이라고 해도, 역시 그것만으로는 충분한 힘을 못 냅니다. 이때 남의 힘을 이용도 할 줄 알라는 뜻입니다.

② E는 저자의 정의에 따르면 core competence인데, 물론 "핵심(역량) 경쟁력"을 뜻합니다. 구체적으로 뭐가 핵심 경쟁력인가. Edge와 Extension, 즉 "엣지"와 "확장"이죠. 김혜수 씨의 모 드라마 중 대사로 우리 한국인에게도 거의 일상용어가 되어 버린 "엣지(책에서는 '에지'로 씁니다)"에 대해, 저자는 "일단 튀고 볼 줄도 알아야 하며, 무색무취한 기업은 존재가치가 없다"고까지 말합니다. 이 대표적인 예로 든 게 우리나라의 삼성전자더군요(저자가 매긴 랭킹 100에서 24위입니다). 참고로 저자는 일본 분이고, 삼성이 유일하게 고전하는 시장이 일본입니다(그런 배경을 감안하면, 이는 대단히 공정한 평가로 볼 수 있습니다). "압도적 주특기, 특이점"으로 새겨도 좋다고 합니다.

그럼 엑스텐션은 뭘까요? 물론 한 가지 재주, 남이 범접하지 못할 어떤 특별한 장기도 있어야 하나, 그것 하나만으로는 험한 경쟁 속에 살아남기란 여전히 어렵습니다. 자신의 장점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변화도 주고 다른 재주도 피우면서 소비자에게 지속저인 흥미를 끌 줄 알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대표적인 예로 저자는 애플을 듭니다.

③ A. 여기서는 기업의 내적 체질, DNA를 꼽습니다. 집착력과 적응력 두 요소를 듭니다.

흔히 "미쳐야(狂) 미친다(及)"고도 하는데, 기업이든 개인이든 확실한 주무기는 전문성의 깊이에서 마련됩니다. 이것이 집착(addictive)입니다. 책에는 앤디 그로브(p83)의 말을 인용하며, "편집증 없이는 성공은 있을 수 없다"고 하는데, 이 말이 처음 소개된 건 시사주간 TIME의 1996년 어느 이슈였습니다. 당시 하도 화제가 되어, 그 발언자(출처)는 잊어도 저 표현만큼은 널리 회자되는 명언이 되어 버렸죠.

역시 집착만 갖고는 안됩니다. 세상이 바뀌는데 하나에만 어리석게 매달리면 그건 장기가 아니라 저주이며 제 죽을 구멍을 파는 실수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적응력(adaptive)도 강조합니다. 이 대목을 설명하면서 저자는 흥미로운 말씀을 하는데 잠시 인용하겠습니다(p82).


과거에는 "시행 착오(trial and error)"라는 말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마저 한가하게 들린다. 지금 요구되는 자세는 "테스트 앤 런", 즉 한번 시도해 보고, 되면 좋지만 혹 실패하면 그 실패로부터 반드시 무엇인가를 배워야(learn) 한다는 뜻이다.


이런 집착과 적응의 대표적 모범 사례로 책에선 구글(특히 구글 X의 성공)과 유니클로(의 개별 점포 경영 확산 전략)를 꼽습니다.


④ 마지막 P의 뜻은 뭘까요? purpose와 pivot을 드는데, 각각의 뜻은 "대의"와 "한 발 전진"입니다. 분명한 대의를 내세울 줄 알아야 일류 기업이지만, 그렇다고 한 자리에 계속 머무는 건 퇴행을 자초하는 선택입니다.

이상의 지표에서 보듯, 한 가지 범주에는 반드시, 서로 상충되어 보이는 두 가지 덕목이 쌍으로 자리합니다. 어느 하나를 추구하면 다른 모목표가 달성 못 되는 것 아닐까? 이런 걸 경제학에선 trade-off 관계라고 합니다. 그런데 저자는, 이 혁신의 시대에 트레이드오프라는 핑계나 구실, 혹은 종래의 프레임에 머물러서는 안 되며, 이율배반이 아닌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책에서 선정된 기업들은, 일견 불가능해 보이는 이들 목표를 실전과 현장에서 일일이 손에 쥐고 달성하여 경쟁자들로부터 경외감을 자아내는 성공자들이라고 단언하는군요.

구체적으로 어떤 기업들이 선정되었을까요? 저자의 기준으로도 단연 1위는 애플입니다. 사실 어떤 논자로부터도 "마땅히 칭찬할 적절한 표현"을 경쟁적으로 이끌어낼 만한, 이 시대의 총아임에 분명합니다. 매출의 볼륨이면 볼륨, 선명한 기업가치의 각인이면 각인, 뭐 하나 빠질 게 없습니다. 누구의 눈에도, 이 21세기의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저렇게 해야 한다는, 벤치마킹대상이자 모범으로 꼽혀 당연합니다.

구글과 알리바바도 자세히 다뤄지고, 이들은 같은 2위 상당기업군에 매겨집니다만 순위에서는 제외되었습니다. 둘 다 IPO가 늦었으므로 정확한 기업가치를 측정할 수 없다는 이유인데, 읽으면서 참 어지간히 스스로 정한 가치에 충실하려는 저자분이란 느낌 받았습니다. 대신 본문에서 (어찌 보면 재무제표의 주석처럼) 서술로 상세히 다루므로, 독자는 기대와 수요를 충분히 만족받을 수 있습니다. 일본 2위군에 집어 넣은 리쿠르트도 같습니다. 알리바바 말고도 중국의 텐센트 등 여러 스타 기업들도 같은 파트에서 자세히 분석되는데, 특히 중국 청년들에게 "부자 되는 꿈"을 키워줬다는 점에서 "기업 가치" 점수를 높게 받은 듯합니다.

냉연히 실적만 갖고 평가하는 게 아니라, 인도의 타타 그룹처럼 이른바 착한 기업, CSR에 충실한 사례들도 저자에게 후한 평가를 받습니다. 책은 이처럼 현대인들이 중시하는 여러 이념적 지표를 고루 반영했기에, 정치적으로나 경영상 시각이 다를 수 있는 독자군에 두루 설득력을 갖고, 호응을 이끌어냅니다.

IBM과 아마존, 월마트, GE 등은 놀랍게도 순위에서 제외되었습니다. 아마존의 경우가 참 의외인데, 저자는 "지나치게 고객 위주"라는 베조스의 전략지향이 현재의 번영, 최전성기를 가져 왔지만, 이런 무분별한 고객 추수 경향이 서비스의 품질 저하를 불러, 역으로 아마존의 성장 한계를 고착화하리라는 다소 비관적인 전망을 합니다. IT 기업의대표격이었던 IBM은 최근 20년 동안 경솔한 정책 수정, 사업 부문 매각 등 누구 눈에서 봐도 갈팡질팡이었으므로 이런 평가가 당연하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단 저자는 이 회사가 보유한, 오래 전부터 개발해 온 인공지능 모델 왓슨이 제2의 부흥기를 조만간 도래시킬 가능성도 지적합니다. GE의 경우는 경영자가 바뀌고 난 후 다시 침체와 혼란을 맞은 취약상을 지적하는데, 그래도 무려 토머스 에디슨 이래로 이어져온 저력에 주목할 필요는 여전하다는군요.

저자는 아무래도 일본분이다 보니, "잃어버린 20년"의 악몽에서 깨어나 재도약의 계기를 갖자는 취지에서, 현재 괄목할 성장을 보이는 여러 기업들의 사례를 소개합니다. 또한 그는 일본인 특유의 국민성도 지적하는데, 화교(華僑)와 달리 현지에 철저히 융화하면서도 고유의 풍속을 잃지 않는 재외일본국민(발음이 같은, 和僑로 표기합니다)만의 장점을 살려, 세계 곳곳에서 치밀한 네트워크를 만들어 경쟁력을 제고하자고 제언합니다. 이런 주장은 한국의 현실에도 타당하며, 실제로 해외에서 맹활약 중인 우리 교민들은 정기적으로 "한상(韓商) 대회"를 열어 단결과 우의를 다지고 정보를 교환합니다.

변화하지 않는 것은 언제나 도태됩니다.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쫓지 않는 자는 한 마리도 손에 넣을 수 없습니다. 글로벌 성장 기업들의 비결은, 상충되어 보이는 두 가지 전략 목표를 동시에 달성하기 위해 부단히 지혜를 짜내고 이를 실천에 옮긴다는 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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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감 국어 신유형 실전 180제 (2018년) 수능국어 기출 N제 시리즈 (2018년)
이호형 외 지음 / 레드카펫 / 2018년 1월
평점 :
절판


명실상부하게 "보감"이라 불릴 만한 레드카펫의 국어N제 시리즈입니다. 이 책은 기출문제의 알짜 편집, 혹은 문제 보는 눈이 확 뜨이는 해설은 물론, 신유형 문제의 분석과 공략 비법 공개에 초점을 뒀습니다.


어떤 책을 보면 평가원 배포 자료를 여럿 모아 토씨하나 안 바꾸고 그대로 자기 책마냥 내기도 하던데, 그런 책(꽤 유명한 브랜드에요) 보다가 이처럼 집필진의 창의와 열정이 배어난 결실을 보면, 정말 자청해서 영업이라도 뛰고 싶어집니다. 어느 시장에서건 악화는 퇴출되고 양화만 유통되어 선량한 소비자 대중의 복리 후생이 조금이라도 증진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더군다나 어린 학생들을 위한 참고서라면 말입니다.

평가원의 출제 추세를 살피면, 매번 나오던 문제만 나오는 게 아니라, 변별력을 강화해야 하므로 1년에 한두 문항 정도는 꼭 새로운 유형이 보입니다. 그런데 구태의연한 학습법으로 책을 파는 학생들은, 열심히는 해도 이런 문제에서 꼭 발목이 잡히곤 합니다. 노력 대비 성과가 안 나오는 학생들은 이런 덫에서 못 벗어나면, 원하는 점수를 얻을 수가 없습니다. 신유형의 공략은 그래서 중요합니다.

파트 1은 기출문제 분석입니다. "아니 또 기출문제야? 지겹게 풀었다고!" 물론 그러시겠지만 더 이상 출제될 가망도 없는 낡은 문제는 백날 코를 박아봐야 실력 향상에 도움 안 됩니다. 어떤 분은 특정 브랜드 몇 권을 대며 "OOO은 다 떼고 수능 쳐야지."라고 하던데, 그런 학생과 학부모는 보수도 못 받고 특정 출판사 영업사원 노릇하는 환상에 만족하는 거지, 자신(혹은 자기 애들)이 좋은 대학 가고야 말겠다는 결연하고 건강한 마음가짐이 전~혀 아닙니다.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쌩뚱맞게 출판사 좋은 일 시키는 게 참 이타적(!)이긴 한데, 애가 장수생으로 늙습니다. 네. 출판사 말곤 아무한테도 좋은 일 못 시키는, 쓰잘데기 전무한 이타주의란 참... 입시판에서야 얼마든지 이기적으로 굴어도 누가 뭐라고 안 합니다. 머리 속에 진짜 실력을 쌓아야지, 좁아터진 책꽂이에 색색깔로 온갖 잡동사니 참고서만 "수집"하면 뭐하겠습니까?

파트 1에는 바로 작년, 또 그 전년도에 출제된 신유형 여러 세트가 실려 있습니다. 기출문제야 동네 보습학원 안내 창구, 그 학원 블로그, 신문사 사이트에만 가도 구할 수 있지만, 중요한 건 "정확한 해설"입니다. 정확하긴 한데 친절하지가 않아서 보다 보면 미궁에 더 빠져들어가는 게 평가원 공식 해설입니다. 애들한테 무슨 길을 일러 주는 게 아니라 더 뱅뱅 헤매게 만들고 의욕을 꺾는 게 목적이지 싶을 만큼이죠. 그래서 기출문제는 푸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한 문제를 풀어도 이후 열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게 돕는 "알짜 해설"이 중요합니다. 현장에서 애들 가르치는 고민 깊게 하고, 남의 주문을 외우는 게 아니라 자기 생각으로 원리를 발견하려는 흔적이 역력한 해설, 이 책에서 잘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2017년학년도(즉, 재작년인 2016년 11월)에는 보험 시스템의 원리를 다룬 지문이 출제되어 모두의 예상을 크게 비껴갔다고들 합니다. 사실 보험 하면 동네 아줌마들이 자신감인지 최면 상태인지 모를 이상한 막무가내 모드로 밀고들어오는 게 대뜸 연상되기도 해서 웃음이 나지만, 본디 경제학의 핵심 연구 영역 중 하나입니다. 엘리트 코스만 밟게 해서 키운 자식이 어느날 친구들과 함께 보험 창업 한다니까 대성통곡을 한 부모님도 있다는데, ㅎㅎ 사실 수익도 그것대로 따로 내고 영리한 가입자도 끌어모으는 모델을 설계하는 건 예사 두뇌로 가능한 게 아닙니다.


이 지문을 보면 소위 "정보의 비대칭성 이슈", "조건부 상품" 등 최고 일류의 경제학 석학들이 일생을 두고 매달리는 대형 토픽이 줄줄 나옵니다. 그뿐 아니라 "고지 의무" 등은 현행 상법에서 매우 중요히 취급하는 계약사항(이면서 강행법규)인데, 우리 법체계는 따로 보험 일반법을 두지 않고 상법전의 한 장(CHAPTER)으로 포함시킨 게 특이하죠. 이처럼 이런 문제는 장래 경제학도나 법대생(퇴직금 꼴아박고 세월 낚는 늙수구레한 실업자가 아닌)을 염두에 둔 구석도 있습니다.

주제만 신선한 게 아니라, 기존 문제와는 접근 방식 자체가 다른 "구조적 특징"도 눈에 띕니다. 얼핏 보면 "윗글을 바탕으로 보기(별개 제시문이 나옵니다)의 사례를 이해한 것 중 가장 적절한 것은?" 같은 문제 형식이 여태 십 수 년 간의 유형과 별 다를 바 없어 보이죠. 헌데 그렇지 않습니다. 지문의 주제가 새로워서 신유형이 아니라, 문제 푸는 접근 방식 자체를 달리 요해서 신유형임을, 이 책은 그 백미인 해설에서 적나라하게 가르쳐 줍니다.


파트 2는 "독서", 즉 비문학 신유형이며(기출 아닙니다), 파트 3는 문학 영역의 참신한 자체 개발 문제를 싣고 있습니다. 요즘은 특히 영어 같은 과목에서 "변형강의, 출제"를 잘하는 분들이 큰 인기를 끄는데, 지문 자체가 다르므로 국어와 영어 과목을 나란히 둘 건 아니지만, 참고서의 퀄리티는 결국 평가원 출제 경향을 존중하면서도 절묘하게 "다른 핵심"을 짚어낸 문제로써, 그해의 실제 출제 문제를 예측해 내는 데에 달려 있습니다. 분량이 좀 적다는 게 약간 아쉽지만, 어디 신유형을 개척해서 이처럼 실전을 방불케하는 양질의 세트를 꾸리는 게 쉬운 작업이겠습니까. 한 문제를 풀어도 백 문제 푸는 성과를 거둘 생각으로, 온 정신을 다 집중해서 풀이에 임할 가치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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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감 국어 이의제기 분석 120제 (2018년) - 제대로 분석하고 훈련하는 수능국어 기출 N제 수능국어 기출 N제 시리즈 (2018년)
박우섭 외 지음 / 레드카펫 / 2017년 12월
평점 :
절판


수능 국어 영역 대비용으로 시중에 참 많은 참고서가 나와 있더군요. 갈수록 해설도 충실해지고, 해설 속에 문제 푸는 기본 원리를 새롭게 담아 주는 시리즈가 레드카펫 기출보감입니다. 솔직히 작년에 나온 시리즈는 (순전히 제 개인 생각이지만) 고개가 갸웃해지는 대목이 좀 있었는데, 올해판은 페이지를 넘기면서 그저 압도됩니다. "과연 최고의 집필진이 참여하여 정성들여 꾸려진 책!" 인정 안 할 수 없습니다.

기출문제라 함은 국가기관인 평가원에서 시행하는 모의평가, 또 수능 실전 문제를 함께 일컫는 말입니다. 이 기출문제와 그에 딸린 해설은 평가원, 혹은 각 시도 교육청에서 무료로 온라인 혹은 학교 현장에서 학부모와 학생들에게 배포합니다. 무료로 나눠 주는, 공신력 100%의 해설지도 있는데 뭐하러 따로 책을 사서 봐야 할까요? 그 해설만으로는 충분치 않고, 다음 학년도 문제에 기출이 또다시 등장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기출을 통해 배워야 할 건 "문제를 푸는 원리, 교과서에서 채 명시적으로 가르치지 않았으나 은연 중 숨어 있던 이치" 같은 것입니다. 이 점에서 매년 비슷비슷한 문제가 출제되는 공무원 선발 시험, 토익과는 차별화되죠.

여튼 저는 이 기출보감 시리즈를 보면서, 문제의 엄선도 엄선이지만 후반부의 해설 그 충실도를 놓고 거듭 감탄합니다. 제가 학교 다닐 때 어느 교수님(지금은 작고하심)께서 하시던 말이 생각나네요. "니네들 교양 국어 시간에 공부하는 책을 잠시 봤는데, 어쩌면 그렇게 좋은 내용만 골라서 담아 놨는지 보면서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이런 말이 나이 들어서가 아니라, 학창 시절 바로 그 해당 교재를 공부할 때 나와야 그게 축복받은 인생인데 말입니다. ㅎㅎ 여튼 저도, 나이 먹고 내 국어 실력이 과연 정직하게 어느 정도 되는지 가늠하고, 동시에 어떤 분(?)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함께 열심히 이 책 문제를 풀고, 적잖은 고민도 했습니다(남에게 뭘 가르치려면 본인은 그 백 배의 노력을 해야 합니다. 자기가 왕년에 잘했다고 남한테 가르치는 것까지도 잘하라는 법, 절대 없습니다. 오히려 역으로 가는 경우가 많죠). 지금부터 그 간단한 느낌과 평가를 리뷰해 볼까 합니다.

제가 역대 기출을 모두 살펴 보니까 국어 영역에선(예전 교육 과정에서는 "언어영역"이라고 했습니다) 거의 격년꼴로 "언어학" 토픽 지문이 나오더군요. 언어학 하면 역시 드 소쉬르가 빠질 수 없습니다. 저희가 학교 다닐 때는 국정 국어 교과서에 정면으로 언급되곤 했던 게 드 소쉬르의 이론이었습니다(원 그 어려운 걸 고등학생더러 어떻게 알아먹으라고 말이죠). 여튼 이 책 p200에 또 그 소쉬르 이론이 다뤄지(는 지문+기출문제가 나오)더군요. 나이도 넉넉히 먹었고 그동안 배운 지식도 있겠다, 일일이 지문 안 읽고 그냥 문제만 보고 답을 맞힐 수 있을지 한번 시험해 봤습니다.


답은 바로 ④라고 맞혔습니다. ㅎㅎ 그렇다고 이 책에 수록된 모든 문제를 그런 식으로 해결한 건 물론 아닙니다. 잘 아는 주제니까 가능했겠지요. 책의 해설을 살펴 보니, 이 문제를 "최고의 문제"로 (집필진이) 고르신 이유, 그리고 이 문제에서 어느 포인트에 유의해야 하는지가 자세히 나와 있었습니다. 일단 집필자는, "언어학이다 보니 내용이 워낙 어렵다"는 점을 이유 하나로 꼽습니다. 백번 타당합니다. 그런데 p201의 05-1은, 사실 공시태/통시태의 구분만 확실히 개념 잡혀 있으면 그리 어렵지 않게 해결할 수 있습니다. 저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런 점도 눈에 띄더군요. 설령 공시태/통시태가 뭔지 모른다고 해도, ①②③⑤는 분명 같은 개념표지를 품습니다. 방향이 다른 건 ④뿐입니다. 이렇게 되면 일종의 패턴 분석으로 회귀하는 셈이므로, 일반 IQ 테스트와 다르지 않게 됩니다.

혹 IQ에 자신 없는 학생이라면, 아예 평소에 이처럼 출제 빈도가 높은 학문상의 기본 주제에 대해, 정말 최소한의 시간만 투자해서 기본 개념을 미리 익혀 두는 것도 유익한 수험 대비 방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실제로 OO동 학원가의 일류들은 워낙 촉이 좋아서 그렇게도 한다고 들었습니다(여기까지만).

비문학 중 과학 영역, 천문학(고교 과정에서는 물리와 지구과학 사이에서 겹치는 부분입니다) 관련 문제를 풀어 보았습니다. (p239)


지문 처음에는 행성과 위성 등의 공전 궤도를 설명하며, 이들이 타원 궤도를 그린다고 상술합니다. 타원의 개념이 여기서 나오는데, 제가 알아 보니 요즘은 이걸 고3 1학기에(이과 과정에 준하는 코스 학생들만) 배운다고 하네요. 저희들은 문이과를 나누기도 전, 고1 2학기 때 배우던 내용인데 말이죠. 여튼 수학 시간에 타원의 정의를 착실해 배운 이과생(에 준하는)이라면, 이 지문의 1/5 정도는 일일이 안 읽어도 건너뛰고 문제를 풀 수 있습니다. 이심률은 아마 고교 과정에서 안 배우겠지만 그리 어렵지 않게 파악 가능한 개념입니다.

왜 슈퍼문이 그처럼 크게 보일까요? 지문에서는 "겉보기 지름, 각지름" 등의 개념을 통해 설명하며, 이는 위성이 타원 궤도를 돌기 때문에 도출될 수 있는 "실용적" 개념입니다.


저자는 해설에서 "새로운 정보 A(여기서는 "일식"입니다)가 등장하면 , 기존의 정보 B와의 연계점, 공통점부터 먼저 떠올려 봐야 한다"고 합니다. 많은 학생들은 낯설고 생소한 정보를 지문에서 접했을 때, 이걸 새로 "공부"를 하라는 소린지, 아니면 숨은 그림 찾기처럼 눈을 혹사하며 부호상의 짝짓기를 하라는 소린지, 그저 알쏭달쏭한 지식의 해일 속에서 갈팡질팡하다 시간을 허비하는 게 보통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분명한 전략적 지침을 갖고, 내가 기존에 공부해 오던 프레임 속에 어떤 문제라도 분해해 넣겠다는 의욕으로 접근해야 문제를 정복할 수 있습니다.

이 보감 국어 시리즈의 가장 큰 장점은, 물고기가 아니라 물고기 잡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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