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MB재산답사기 - 안원구의 쇼미더머니 시즌1 도곡동 땅, 다스 그리고 BBK
안원구.구영식 지음 / 비아북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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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대통령들의 비위, 직무 유기, 수뢰 등의 행태가 구속 수감으로까지 이어지는 등 한국 사회에 암운을 드리우고 있습니다. 국민 소득 3만불을 눈 앞에 두었으나 아직도 이런 후진적 행태가 만연하다는 사실 앞에, 많은 시민들은 크게 상심하거나 분노를 느끼는 중입니다. 특히 이명박 전 대통령은 그전부터 문제가 되었던 BBK 스캔들과, 저 법인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던 (주)다스 관련 투명하지 못한 회계, 자금 처리로 인해 천문학적인 액수를 추징받거나 장기간의 복역이 예상되기까지 하는 형편입니다. 투표장에 가서 그를 찍은 적 없는 국민도, 어쩌다 대체 일이 이 지경까지 왔는지 그저 안타깝고 부끄러울 뿐입니다.

우선 BBK 스캔들에 대해 예전, 대략 4년 전쯤에 저는 네이버 블로그에다가 https://blog.naver.com/gloria045/100204819396 이런 서평을 남긴 적이 있었습니다. 서평의 결론은, "에리카 김의 주장은 무척 설득력 높고 매끄럽기는 하나, 확증은 없는 가설에 아직은 머무르고 있다."였었는데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솔직히 당사자 중 한 명의 증언이 이렇게나 구체적이라면 검찰이 재수사에 들어갈 만한 조건은 충분하지 않은가, 행여 정권이 바뀌거나, 심지어 정권이 안 바뀌어도 언젠가 한 번 큰 사건이 터지긴 터지겠구나 하는 생각이 당시에도 들었더랬습니다. 결과론으로 하는 소리가 아니라, 어느 정도 세상을 겪어 본 사람이면 다분한 정황 증거만 갖고도 진실에 대한 가늠이 어느 정도 오기 마련이니 말입니다.

이 책의 저자는 안원구 구영식 두 분입니다. 구영식 기자도 <표창원, 보수의 품격> 같은 저서로 일반에 널리 알려졌고, 예전에 <사회 평론 길>이라든가, 월간 <말> 등에 몸 담았던 비판적 언론인의 모범과도 같은 분입니다. 월간 <말>은 지금 제가 과월호를 몇 권 소장하고 있습니다만, 그 서슬 퍼렇던 군사 정권 시절에 어쩜 이런 잡지가 간행될 수 있었는지 지금 봐도 놀랍기만 합니다.

아무래도 단연 눈길이 가는 저자는 안원구 전 대구지방국세청장입니다. 그는 그 어렵다는 행정고시 재경직 합격차 출신이고, 관료로서 요직을 두루 거친 정통파 경제 관료입니다. 이런 그가 2009년 뜻하지 않게 옥고를 치르게 된 건, 바로 MB의 석연찮은 재산 관리 사항을 지적하고 논란의 대상에 올렸다는 "괘씸죄" 때문이었습니다. 이 책은 구 기자가 질문하고, 안 전 청장이 그에 상세히 대답하는 형식으로 쓰여졌는데요. 비교적 중립적인 눈으로 봐도 안 전 청장의 진술, 팩트 지적, 추론, 전망 등이 워낙 구체적이고 논리 정연해서 반박 지점을 찾거나 의문을 새로 제기하기가 힘들었습니다. 독자로서 여튼 예단을 갖지는 않고(힘듭니다만), 혹시 그 주장에 허점이 없을까 꼼꼼히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언론에 비교적 소상히 보도되었습니다만 외견상 비밀이 철저히 유지될 듯 보였던 (주)다스의 소유 지분 관계 균열은 2010년 이 전 대통령의 손아랫처남이자 재산관리인인 김재정 씨의 사망에서 비롯했습니다. 김윤옥 여사의 동생인 그가 사망함에 따라, 그의 부인인 권영미씨에게 전 지분이 상속되었는데, 유언 상속이 아닌 법정 상속이라면 본디는 그 자녀들에게도 상당 부분이 물려져야만 합니다. 그러나 자발적 상속 포기인지, 혹은 어떤 경위를 알 수 없는 채 권씨에게만 모든 지분이 돌아갔고, 이 부분이 상식에 맞지 않다는 데에서 의혹의 작은 씨가 틔워졌습니다.

안 전 청장은 대개 소유관계를 감추기 위한 수단으로 근저당권 설정이나 지상권(물권 보호를 받는, 더 장기의 임대권 정도로 이해하시면 됩니다)이 등기되는 게 보통이라며, 김재정 씨의 부동산에 대해서도 원인관계가 불명확한 이런 물권이 설정된 게 이상한 점이라고 지적합니다. 이뿐 아니라 "한국자산관리공사 직원이 방문할 시 이에 대응하기 위한 문건은 청와대가 아니고서는 결코 확인할 수 없다."고까지 안 전 청장은 의견을 개진합니다.

어떤 경우에 물납이 가능한가? 안 전 청장은 국내 최고 세무 전문가답게 그 요건을 자세히 설명합니다. 이런 요건이 정해져 있다는 건 "원칙적으로는 세금의 물납이 꽤나 어렵다는 점"을 뜻하기도 합니다. 웬만해서는 물납을 받아 주지 않고, 비상장 등의 이유로 현금화가 쉽지 않은 주식은 국세청이 더군다나 까다롭게 취급합니다. 왜 여러 부동산으로 물납하지 않고, 구태여 주식(잘 받아주지도 않는)을 썼는가? 이 역시 부동산들의 실소유자가 사실은 다른 사람이었기에 물납이나 기타 매도 처분을 할 수 없었고, 상속자가 배우자 한 사람으로만 정해진 것도 관리의 편의를 위해서라는 설명입니다. 이 역시 재판 과정에서 진부 여부가 철저히 다퉈지겠으며, 이명박 전 대통령 측이 이에 대해 어떻게 반박할지도 관심거리입니다. 안 전 청장은 "국세청이 꽤나 편의를 봐 준 듯하다"고 말씀하시는데, 솔직히 독자 입장에서도 국세청이 얼마나 깐깐한지를 안다면 여기 동의하지 않기가 어렵네요.

본 사건과는 다소 거리를 두었으나, 안 전 청장이 이 책 중에서 여담처럼 들려 주는(물론, 꼭 여담만도 아닙니다) 사실에 의하면, 대기업들이 참 악랄한 행태를 통해 중소기업의 기술을 가로채거나 업체 자체를 탈취한다고 하네요. 뭔고 하니, 일단 하청을 주어 대량 주문을 맡긴답니다. 이러면 중소기업에서는 신이 나서 설비를 대거 늘려 앞으로도 이 정도 일감이 들어오겠구나 싶어서 대출도 받곤 한답니다. 그런데 대기업은 슬슬 그 업체의 기술력 실태를 파악한 다음, 다른 산하 업체를 하나 차려 그쪽으로 일감을 돌립니다. 영문도 모르고 꿈에 부풀었던 중소기업은 점차 주문이 줄고 설비는 유휴가 되고 자금은 경색되어, 끝내 헐값에 회사를 내놓고 대기업은 이를 사들인다는 거죠. 세상 돌아가는 게 다 이런 식이라면 어디 공정한 룰이 보장되는 자유경제체제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현대자동차가 굴지의 대기업이 된 후, 이명박 전 회장 등 창업 초창기 멤버들에게는 "퇴사 후 부품 업체 하나 정도를 만들라"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고 전합니다. 그 자체는 문제될 것 없습니다. 다만 이 과정에서 금싸라기 부지 등을 관계자에게 우선 매도하고, 사회적으로 비난 받을 가능성이 크거나 세금 탈루 등을 위해 타인 명의로 위장하여 재산을 취득하는 행태가 만연했다는 게 문제입니다. "당시에는 다들 그렇게 했으므로" 혐의를 받는 많은 분들이 어떻게 혐의 사실을 구체적으로 반박하기보다, "억울하다, 보복이다" 등 추상적인 변명에 그치는 게 참으로 안타까울 뿐입니다. 법치주의 국가에서 고작 그 정도로 형사소추를 모면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나는 꿈이 크다. 이제부터는 위험한 일을 하지 말라."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출마 몇 년 전 측근들에게 이런 지시를 내렸다고 안 전 청장은 전언합니다.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이 전 대통령은 좀 더 이른 시기에 손을 떼셨거나, (기대하기 힘들 수 있지만) 아예 의혹이 낄 수 있는 불투명한 일에 착수를 않으셨어야 옳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꿈이 큰 분은, 주변에 한 점의 의혹도 없어야 그게 국민에 대한 도리입니다. 안 전 청장은 사견임을 전제하며, "mb는 아마 현대가와 맞먹는 재벌이 되고 싶었던 것 같다."고 추측합니다. 그렇다면, 청렴 결백해야 할 공직에의 야망과 그런 꿈 중, 둘 중 하나는 버렸어야 현명한(도덕까지는 차마 바라지 않더라도) 처신이 아니었을지요.

시대가 바뀌었으면 정치인은 말할 것도 없고 사업가, 학자, 공직자, 언론인, 나아가 평범한 직장인에 이르기까지 윤리의식과 행동 준칙이 합당하게, 부응하여 바뀌어야만 합니다. 잘못을 저지른 이는 공정한 재판을 받고 추상 같은 징벌 부과를 감수해야만 합니다. 이런 일이 설마 벌어지겠나 싶어서 일단 저질러 놓고 봤다는 식의 태도는 말이 안 됩니다. 며칠 전 모 증권회사 직원들의 "점유이탈물 횡령 사건"도, 어쩌면 우리 사회가 아직도 이런 미개한 수준에 머물러 있는지 참으로 개탄스러운 소회가 들게 한 어처구니없는 반면교사였습니다. 일주일 전 청와대 논평대로, "잊어버리면 이런 일이 또다시 반복된다"는 점 우리들 시민들부터가 모두 명심해야만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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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어른이 될 수 없었다
모에가라 지음, 김해용 옮김 / 밝은세상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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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는 "단카이 세대"라고 불리는, 대략 1947년에서 1949년 사이에 태어난 그룹이 따로 있습니다. 특정 연도에 태어난 이들이야 어느 나라건 당연히 존재하기 마련이겠으나, 일본의 저 연령대를 일컬어 특히 "단괴(團塊)"라고 부르는 건 그 나라만의 사정이 따로 있어서입니다. 이분들의 자녀 세대는 "단카이 주니어(1971~74)"라고 부르며, 그 세대 바로 아래 그룹(1975~82)에 대해서는 "잃어버린 세대(失われた世代)"로 구획하는 게 보통이죠.

이 책 작가인 모에가라 씨의 연령에 대해서는 1973년생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만, 소설을 다 읽고 보니 단카이 주니어에 넣기보다는 그 밑인 "잃어버린 세대"가 더 자연스러운 소속 분류 같습니다. 다분히 자전적인 주인공의 성격이나 행동, 사유 등은 너무도 나약하고 수동적인가 하면, 한편으로는 한 여인에 대한 순정을 고이 간직하며 평생의 지향점처럼 귀히 여깁니다. 처음에 트위터에 연재되던 소설이라고 해서 작가가 젊은 분인 줄 알았는데, 사회의 중견으로 곳곳에서 무거운 책임을 수행할 만한, 예전 같으면 원로 그룹에 속할 만한 나이이셔서 깜짝 놀랐습니다. 그런 나이 지긋한 분이, 비록 남한테 해 안 끼치고 자기 앞가림만은 해 온 인생이겠으나, 너무도 맥 없이 보낸 청춘과 장년기의 체험을 진솔하게 고백하는 내용이어서, 적잖이 당황했던 게 사실입니다(이른바 젊은 프리터 족 이야기라면 여태 많이 나오기도 했습니다만).

소설가, 작가는 잘 세공된 언어를, 어찌보면 상품처럼 대중에게 판매하는 게 직업이고 본분입니다. 어떤 때는 그 상업적 본의가 너무 빤하게 드러나 거부감이 생기기도 하고(이런 책을 잘 걸러내는 게 우리 독자의 안목, 취향, 의무이기도 합니다), 작가지망생이랄까 어설픈 아마츄어들이 그런 나쁜 행태를 모방하여 짝퉁 외투처럼 걸치는 모습도 우리는 보곤 합니다.

헌데, 비록 광고업에 종사하는 분이라고는 하나 어찌보면 정통 광고맨도 아니고(광고맨은 어쨌든 언어를 다루는 직종이죠), 직업 작가는 더욱이나 아닌 분이 이처럼 많은 이들에게 공감을 끌어내는 작품을 썼다는 게 놀라웠습니다. 책을 읽기 전엔 이런 예단을 가졌었고, 막상 책을 다 읽어 보니 그저 자기 삶을 치열하게 산 분이구나, 남의 생각이나 글투를 흉내 안 내고 매 순간 자기 감정과 체험과 선택에 성실했던 분이구나, 그래서 절절한 자기 생각이 이처럼 선명하게 표현, 배출될 수 있었겠구나 하는 쪽으로, 독자인 제 느낌이 정리되더군요. 남한테 뭔가 보여 주기 위해 말을 지어내는 사람과, 그저 정직하게 자기 느낌과 사색으로 소통을 원하는 사람은 서로 이렇게 다릅니다. 또 독서 대중이 그런 차이를 정확히 알아보고 이런 심판, 포상을 내리는 거겠습니다.

부모님의 실수로 부잣집 애들만 다니는 학교에 잘못 배정되어 3년 내내 유령처럼 학창 시절을 보내야 했다는 주인공. 참 딱합니다. 출신 성분을 고칠 수도 없고 전혀 이질적인 집단에서 설움을 겪었던 그 신세가 딱하다는 게 아니라, 어쩜 그렇게 특정 상황을 완전히 고정된 운명처럼 받아들이고선, 변화를 줘 가며 적응해 볼 노력을 전혀 않을 수가 있을까 하는, 그 꽉 막힌 성격과 체질과 판단 기제가 딱하다는 뜻입니다. 아직 성장기 청소년이라고 해도, 그처럼이나 유약하고 체념적인 성향이라면 커서 어떤 어른이 될지도 눈에 훤히 보이지 않습니까. 유령, 왕따로 지내는 고통에 비하면, 뭐라도 해 보려고 노력하는 수고가 차라리 가볍게 느껴질 법도 한데 말입니다.

책을 잘 읽어 보면 주인공이 그리 가난한 집안 출신도 아닙니다. "당신들의 일은 워낙 성실히 한 덕에, 돈 걱정은 평생 안 하고 살았다."는 말이 있는 걸로 보아 말입니다. 하긴, 아들이 이런 성격이면 그 부모 되는 분들도, 마치 정해진 궤도만을 반복 운행하는 쳇바퀴 도는 다람쥐 같은 이들일 수 있습니다. 그런 이들은 항상 자기 분수를 지키며 살기에, 급한 지출 용도가 안 생겨서라는 정도라면 그리 넉넉한 집안은 또 아니었겠지요. 여튼 주인공이 부모님께 아쉬움을 표하는 대목이라면, "너무 성실하셔서 나한테 신경 써 주실 여유가 부족했다" 정도입니다. 어째 한국의 중산층 출신 1970년대생들이, "아빠는 그저 돈 벌어오는 기계" 정도로 여기고 성장기를 보냈다는 평판의 데자뷔 같습니다.

일본은 우리보다 입시 지옥을 훨씬 앞서 벗어난 사회입니다만, 주인공이 고교를 졸업할 무렵은 여전히 전국 단위 시험 점수로 학생의 진로를 정하는 시스템이었나 봅니다. 공부하고는 담을 쌓고 유령처럼 고등학생 시절을 보낸 주인공이라서, 성적에 맞게 갈 만한 대학교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무시험 전형을 시행하는 곳에 원서를 넣었고, 졸업 후에는 작은 홍보 회사에 몸을 담아 성실히 근무했습니다. 조금 표현이 엇갈리는 대목이 있긴 했는데요. 대체로 정리해 보면 일감이 꾸준히 들어오는 편이긴 하나 업력이 짧아서 단가를 높게는 못 받는, 그런 작은 회사로 보입니다. 여튼 주인공은 부모님 닮아서 열심히 일합니다. 업무도 사랑도 일단 자기 일이다 싶으면, 그리 공격적이거나 특별한 재주를 발휘하지는 못해도, 열심히는 하는 분 같았습니다. 청년기건 장년기에건 말입니다.

허나, 주인공의 다음과 같은 말을 들어 보십시오.

"잠시도 일탈을 꿈꾸지 않는 바른 생활이 어른들이 견지해야 할 바람직한 삶의 태도라면, 차라리 나는 철없는 사람으로 남고 싶다." (p41)

바로 이 구절입니다. 그를 부모님과 차별되게 만들어준 기질과 신조라면, 비록 무기력하게 성장기를 보낸 자신이긴 하나, 저런 알듯모를듯한 반항아의 단초가 영혼 한 구석에서 자라고는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반항은, 비록 세상을 향해 정면으로 승부를 건다거나 강자를 향해 도전하는 패기는 지니지 못했어도, "삶의 단조로움과 강요된 정형성"에 대해서는 단호히 거부하려는 몸짓을 보였던 것입니다. 이는 어설프고 정형화한 상업적 비판 멘트와는 다르고, 여튼 매순간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는 충실히 임하는 태도이기에 현실 회피와 무능 은폐를 위해 지어내는 핑계성 저항과도 엄연히 구별됩니다. 그런 자들은 한 여인만을 사랑할 줄도 모르고, 어설픈 에고의 만족을 위해 주제도 모르고 이 여자 저 여자를 기웃거리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그가 마침내 찾아낸 삶의 이유, 베아트리체, 혹은 둘시네아가 바로 "가오리"입니다.

가오리는 주인공 자신의 표현에 의하면 그리 모델 같이 잘 빠진 몸매도 아니고, 남들 눈에 확 띄는 용모도 아니었던 듯합니다. 젊은 시절 기준으로도 말입니다. 여튼 그런 가오리에게 주인공은 흠뻑 빠졌습니다. 뭔가 평범함을 거부하는 자유로운 영혼이 주는 매력도 그러하고, 영혼의 빛깔이 서로 통하긴 하되 자신이 차마 현실을 향해 드러내지는 못하는 과감한 반항도 그녀는 더 거침없이 해 내는 듯 보였기 때문이었겠습니다. 주인공처럼 주변머리 없는 분이 어찌 총각딱지는 떼었겠으며 (한국이나 일본이나 참으로 흔한) 러브호텔은 생전 가 보았겠나 싶었는데, 이 가오리라는 분이 숙맥 같은 그에게는 참으로 구세주 같은 존재였습니다, 거참.

이 가오리상, 이분이야말로, 주인공에게는, 보잘것없는 자신보다 더 사랑하고 더 위해 주고 싶은 존재였습니다. 열정과 과격함, 재능의 천재성 면에서 서로 극과 극이긴 합니다만, 마치 엄지에게 오혜성이 보이던 만큼이나 그의 애정의 순도는 강했습니다. 그러나 가오리 역시 어느 선은 넘지 않는, 행동 반경이 빤히 정해진 "얌전한 반항아"였고, 주인공은 그보다 몇 배는 더한 초식형이었기에 무슨 큰 사고는 안 생겼고, 세상이 그들을 향해 주목의 시선을 던질 일은 더군다나 없었습니다. 이 소설, 평범함의 미학과 깊이를 추구하는 소설이 히트를 치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만원 지하철 안에서 "실수로" 친구 신청하기 버튼을 눌러, 세월이 한참이나 흐른 후 다시 가오리상과 연이 닿았다는 그이지만, 또 언제나처럼 전철 안에서 무기력하게 이리 떠밀리고 저리 치이다 누른 게 맞겠지만, 어떻습니까? 과연 그의 실수가 실수라고만 볼 독자가 있을까요? 이분은 이처럼, 아닌 듯하면서 은근 자기 의도대로, 세상의 정해진 흐름을, 아주 소극적이고 제한적 범위에서나마 바꿔 보려는 발칙한 생리가 작동하는 분입니다. 그런 기질이, 그 나이를 먹도록 여태 도쿄의 번화가 한복판에서, 평범한 샐러리맨으로든 뭐든 그를 살아남게 한 비결입니다. 주인공보다 더 유능하고 한때 더 잘나간 사람도, 어느 한 고비에서 몰락하거나 더 이상 못 버티고 도피한 이들도 많습니다. 그의 생명력을 유지시켜 준 건, 첫째 실체가 무엇이든 그가 그의 순정을 투영한 가오리였고, 다음으로는 결국 진실과 변화와 성실을 동시에 추구한 그의 마음가짐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소설은 루저의 선정성 고백이 아니라, 오히려 순수한 영혼의 치열한 생존기이자 진지하고도 깊이 있는 "사랑 탐험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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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총사 청소년 모던 클래식 3
조정훈 편역, 알렉상드르 뒤마 원작 / 구름서재(다빈치기프트)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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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삼총사>는 그 이름만 들어도 마음이 설렙니다. 본디 프랑스어 원어로는  <Les Trois Mousquetaires>이며, 영어 번역어도 대개 비슷합니다만, 왠지 소지한 무기 기종에서 연원한 저 이름에서는 "총사"가 풍기는 자긍심 넘치는 환기가 안 생길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이는 착각이며, 우선 한자어로도 寵士가 아닌 銃士(거의 직역에 가깝죠)이므로 선입견과는 달리 사실은 좀 살벌한 뜻입니다.

또, 무엇보다 이 책을 직접 읽으시면 알 수 있듯, 불어 mousquetaires(영어로는 musketeers)에도 어원과는 무관하게, 오랜 언중의 사용 속에서, 맥락 속에서 추가된 감성적 뉘앙스가 또 따로 있습니다. 아니라면, 왜 다르타냥(이 책의 표기를 따르며, 또 이 표기가 규정상 맞습니다)이 그처럼 "총사" 타이틀(과 신분)에 목을 매겠습니까? 신분적 특권과는 무관하게, 그 이름은 그저 음성의 울림만으로도 한 청년의 가슴을 벅차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모르겠습니다. 이 청년이 혹시, 아주 욕망과 허영심에 찌든, 젊은 나이에 걸맞지 않은 속물이라면, 파리라는 번화한 도회에서 한몫 잡아 보려는 찌들어빠진 동기에만 사로잡혔다면, 총사란 타이틀은 그저 신분 상승의 구차한 욕구를 상징할 수도 있겠죠. 그러나 우리가 다르타냥을 좋아하는, 혹은 좋아해 왔던 이유는, 그런 건 전혀 따지질 않고 돈키호테처럼 자신이 믿는 대의와 자존을 위해 그냥 미친 듯 몸을 던진다는 데에 있습니다.

이 작품보다 세르반테스의 그 고전이 훨씬 이전에 나왔지만, 세르반테스의 그 고전이 다분히 풍자적 의도에서 쓰여진 반면, 이 작품이야말로 후대인들에게 "진짜 기사도"가 무엇인지 일단은 알려 주겠다고 작심한 양, 가장 순일하고 호탕한 남자들의 계산 없는 우의와 순정을 잘 표현하는 예이기도 합니다. 물론 훨씬 이전 시대의 그야말로 판에 박힌 스타일의 기사도 예찬이야 아닙니다. 사조로서의 낭만주의를 정확히(의도이든 아니든 간에) 표방하며, 인간 감정의 솔직하고 자연스러운 면까지를 드러내며, 귀족과 그에 기생하는 간악한 무리들의 이중성도 적나라하게 폭로합니다. 그런가하면 내내 거악(巨惡)의 본산일 줄만 알았던 OOOO와 나중에 총사들이 타협하는 결말을 제시함으로써, 뜻밖의 리얼리즘까지 독자들에게 일종의 반전으로 선사하는 플롯 기법상의 성숙함도 지녔습니다. 이런 점에서, 세르반테스의 안티테제였던 "그 흔해빠진 기사도물"과는 차원이 다르며, 세월이 이만큼이나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고전으로서, 또 어쩌면 장르문학으로서, 대중들에게 사랑 받고 평론가들의 분석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작가 알렉상드르 뒤마(아버지 뒤마)에 대해, 이른바 공장형 창작의 원조였다면서 호되게 비판하는 일각의 움직임이 있고, 또 그런 비판의 상당 부분은 사실로 보입니다. 허나 설령 작가 명의에 의혹이 있고, 작가의 착취적 상업적 행태가 비판 대상이 되어도, 작품만을 놓고서는 정당한 평가가 이뤄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뒤마의 공장에서 혹사당하며 재능을 갈취당한 그 무명씨(그런 사람이 정말 있다면요)를 대신 예찬한다 해도 말입니다. 아무리 배경이 미심쩍어도, 작품이 재미있고 여전히 사람 설레게 만드는데야 어쩌겠습니까? 우리 독자가 원하는 건 이야기의 재미, 건전한 감동, 완독 후에도 적정 수준으로 우리 감정을 정화할 여운 등이겠는데, 이 <삼총사>는 그런 점에서 완벽한 읽을거리입니다. 이 <삼총사>는 너무나 재미있고 유익하기까지 하며, 그래서 새로운 감성의 현대적 번역이 끊임없이 이뤄져야 할 이유를 다시 확인시키기도 합니다.

이 소설은 상당 대목에서 이른바 homosocial 분위기를 풍기기도 합니다. 게이 코드라는 뜻이 아니라(그렇긴커녕 극과 극이죠), 남성들끼리만 통하는 어떤 의기투합과 공감대로 문제를 해결하고 주제를 부각하는 작품 내 분위기를 뜻합니다. 이론상으로는 "여성들끼리"로 정반대 분위기를 잡을 수도 있고, 실제 문예나 영화에서 그런 예가 많이도 발견됩니다, 이제는요.

어쨌든 이 책 p172에서, 아토스가 다르타냥에게 여성에 대한 회의, 혐오적 견해를 드러내며, 자신의 친구에 얽힌 실화(?)를 들려주는 대목이 있습니다. 고귀하기 짝이 없는 혈통의 귀족(자기 아니고 자기 친구 얘기랍니다 ㅋㅋ)이었는데, 여자 하나 잘못 만나 신세를 망칠 뻔하고, 호된 방식으로 교훈을 배운 후, 다시는 색욕에 눈도 안 돌렸다는.... 다르타냥은 시골 출신의 순박한 청년이라(저기 2011년 영화에서 로건 레먼 버전의 다르타냥은 너무 뺀질뺀질하게 묘사되었죠), "큰형님" 아토스의 이 말을 기냥 곧이곧대로 100% 접수하고 치를 떨기까지 하죠. 이걸 보고 아토스가 하는 말 들어 보십시오. "요즘 젊은 놈들은 도대체 술 마실 줄을 몰라. 하지만 이놈(다르타냥)은 그중 괜찮은 녀석이지." 이런 실감 나고 캐릭터 개성이 그대로 구현되는 에피소드가 풍성하기에, 우리는 여전히 매혹되며 이 작품을 읽는 것입니다.

아버지 뒤마의 소설을 보면, "밀레디"니 "밀로드"니 하는 표현이 자주 나오죠. 그 중에서도 이 작품은 아예 "밀레디"가 캐릭터의 이름처럼 쓰입니다. 영국은 근대에 와서만 강해진 게 아니라, 백년 전쟁에서도 알 수 있듯 본디 대륙에 하나의 근거, 지분을 가지고 깊은 영향력을 행사해 온 나라입니다(단, 다들 국민국가는 아직 아닐 시절이지만). 그러니 대륙의 하층 계급에게 저런 용어들을 상용 어휘로 만들어 낼 만큼 유력자의 왕래가 잦았다는 뜻이죠(마이 레이디, 마이 로드와 같습니다). 이 고전에서 밀레디 캐릭터는, 다르타냥이나 삼총사 못지 않게 독자에게 엄청난 인상을 각인한 불멸의 존재입니다. 2011년 영화에서는 밀라 요보비치가 맡았죠. 팜 파탈의 아득한 원조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원저를 보면 분량이 상당한데 이 책은 다소 슬림합니다. 이유는 원작의 수많은 에피소드 중, 진주인공 다르타냥의 행보, 동선에 맞추어 발췌역을 한 책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영화를 즐기기 위한 선행학습 독서라면 구태여 완역본을 볼 필요는 없습니다. 사실 원작이 구태여 진주인공 다르타냥을 젖혀 두고 "삼총사"로 이름을 단 것도, 시대배경이나 총체적 영웅담, 음모, 정치적 활극을 전달하려는 의도가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차피 다르타냥과 삼총사의 활약에만 초점을 둔다면, 이 발췌역본으로 대의를 파악해도 큰 지장은 없습니다. 어색한 한자어가 없고, 뜻이 선명하게 통하는 문장이라 가독성도 높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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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의 학교 세계기독교고전 58
앤드류 머레이 지음, 김원주 옮김 / CH북스(크리스천다이제스트)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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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의 학교". 제목을 들어 보면 예전 KBS에서 방영하던 애니메이션 주제가가 생각나기도 합니다. "사랑의 학교 우리 학교. ♫새하얀 알프스가 보이는 곳...." 아니 데 아미치스의 원작은 이탈리아 배경인데 거기서 알프스가 왜 보이나? 같은 생각도 어렸을 때 했지만(이탈리아 하면 로마나 나폴리, 시칠리아 부터 대뜸 떠올림), 1) 키살피나, 트란살피나 라는 말이 있듯 알프스 산맥은 본디 이탈리아와 非이탈리아를 가르는 지리적 문화적 경계 중 하나였으며 2) <쿠오레>의 배경(즉 엔리코, 데로시 등이 다니던 학교)은 더군다나 토리노 소재이기까지 하니 저 가사에는 아무 하자, 오류도 없는 셈입니다. 학교는 요즘 폭력의 온상으로도 대두하여 사회에 우려를 안기기도 하지만, 그래도 어린이들이 옹기종기 앉아 자애로운 선생님께 지혜와 지식을 전수 받는 모습이 우선 떠오르는, 일단은 정감 어린 이미지입니다. 그렇지 않을까요?

"순종". 중세 기독교 신학에서(뭐 지금도 가톨릭은 그렇습니다만) 대죄, 큰 죄의 하나로 꼽던 게 "오만"이었습니다. 우리 동아시아에서는 이런 전형에 꼽힐 만한(그걸 죄로 보든 아니든 간에) 사례가 좀 드뭅니다. 위진남북조 시대의 죽림 칠현 중 하나인 완적, 혹은 명나라 때 이탁오(이지), 혹은 이문열이 그렇게 까는 삼국시대(정확히는 후한 말기)의 예형 등이 이에 해당할까요? 아니면 주체에게 입을 찢겨 죽은 방효유? 비슷하기는 해도 정확히 해당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고, 오히려 반대로, 마지막 사람은 완강하게 신앙을 고집하다 "순교"한 기독교 성인들과도 맥락이 통합니다. 대체로 동아시아에서 "지적 오만"을 내세운 이들은, 구태여 찾자면 윤휴, 박세당 처럼 독자 학설을 내세우다 이른바 "사문난적"으로 몰려 죽은 예가 있겠으나, 이마저도 기독교적 "오만"의 경우에 포섭하기엔 다소 난감한 대목이 있습니다.

여튼 "오만"은 "순종"의 반대어입니다. "순종"의 미덕을 내세우는 건, "오만"의 악덕에 빠지지 말라는 가르침과 정확히 통합니다. 이 배경에는 중세 스콜라 철학이 아리스토텔레스 체계에 깊이 기반하며, 오로지 이성과 논리로 신의 오의를 재단하지 말라는 일종의 경고가 깔려 있긴 했습니다. 물론 책 저자, 19세기 프로테스탄트의 경건하고 저명한 대표 신학자이신 앤드류 머리(머레이. 이하 이 책의 표기를 따릅니다)의 입장은 그와는 꽤나 다른 성향이지만 말입니다.

체스터튼이 창조한 캐릭터 브라운 신부가 나오는 한 단편에 보면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대도" 플랑보가 브라운 신부에게 "어떻게 내가 가짜 신부인지 알았소?"라고 묻자, 브라운 신부는 대뜸 이렇게 대답합니다. "당신은 이성을 비난했지. 그건 아주 천박한 신학이오." 그러니 사이비, 가짜는 목소리를 높여 열을 올려도 다 무지를 감추려는 위장일 뿐, 진리는 결코 어느 극단에 존재하지 않음을 (추리 소설인데도!) 작가는 작품 속에서 깨우치려는 의도이겠습니다.

"순종"은 굴종이나 비굴과는 또 다릅니다. 사실 지적으로 오만하기나 하면 그나마 괜찮은데, 그렇지도 못하고 기질만 건방진 사람은 서열의 갑을 관계 앞에 아주 약합니다. 순종은 그래서 내적인 확신이 자리잡힌 사람이, 진리 앞에, 절대선 앞에 당당하게 그 권위를 인정하는 태도입니다. 내가 떳떳하면 이유가 있는 굽힘에 머뭇거림이 없습니다. 열등감 많은 사람은 거짓 굴종에는 능하지만, 진짜 몸을 낮춰야 할 상황에서는 오히려 주저하기가 일쑤입니다.

저자는 말합니다. "순종은 절대적 완전의 개념과 곧잘 연결됩니다." 그런데 이 말은 종종 오해되기도 합니다. 저자는 특히, "성경의 모든 계명과 질서를 모으고, 순종하는 사람은 이 모든 명령이 보장하는 은혜를 생각하며, 마침내 그는 순종함으로써 은혜를 한 몸에 받는다"는 (잘못된)생각을 강하게 비판합니다. 저자는 "하나님께서는 그 자녀들이 가진 각각 다른 재능과 능력을 고려하시며, 어떤 조건의 충족보다는 그저 매 순간 매 시간의 순종, 더 정확하게는 어린이의 마음으로 티없이 순종하고자 하는 의지를 중시하십니다"라고 말합니다(p77). 이 설명에는, 순종과 신앙에는 어떤 현세의 구복, 기복을 바라는 불순한 마음이 끼어들어서는 안 되며, 그야말로 어린이가 부모님을 따르듯이 계산 없는 동기가 유일해야 한다는 뜻이겠습니다. 그러니 순종은 "선함, 착함"과도 동의어입니다. 은혜가 있기에 조건부로 순종한다면 이는 예수께서 성전에서 판상을 들어엎으신(화끈하시죠!) 그 돈놀이꾼들과 다릉 바 없으며, 이미 비굴한 노예이며 사기꾼에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런 자는 지옥에나 떨어져야 합니다.

"순종은 바로 소망을 품음"입니다.(p90) 소망을 품기에, 세상에 대해 긍정적 시선을 유지할 수 있기에 그는 순종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순종은 "낙관, 긍정"의 마음가짐과 통합니다. 이런 낙관을 품을 수 있는 사람이라야 제 이웃을 사랑(예수의 새 언약)할 수 있는 것입니다.

동아시아에서도 지행 합일의 가르침을 내내 강조했습니다. 아무리 정교한 지식이 머리 속에 내장되어 있어도, 행동으로 영혼으로 이 가르침이 옮겨지지 않으면 아무 소용 없습니다. 대다수의 어리석은 자들은 그나마 서푼짜리 지식도 없고, 어디서 거칠기 짝이 없는 폭주 도그마 몇 마디를 머리에 심고 "네 다리는 좋으며 두 다리는 나쁘다!" 한구절로 홍위병처럼 날뛸 뿐입니다. 혹은 아주 어설픈 개똥철학으로 삶을 달관한 양 유치한 허세를 부리기도 합니다. 저자가 가르치는 순종은, 첫째 지식에 맹종하지 말 것, 둘째 착한 마음으로 참된 진리 앞에 언제나 겸손해지고 그를 배우려 열망할 것, 이 두 가지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은 순종의 미덕을 가르치는 "학교"이며, 우리는 순하고 착한 진리의 학생들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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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쉽게 찾기 - 전면 개정판 호주머니 속의 자연
윤주복 지음 / 진선북스(진선출판사)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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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처럼 산천이 수려한 곳은 세상에 또 없습니다. 온갖 기화요초가 강산을 수 놓고, 오묘한 향취와 현란하면서도 그윽한 색채는 이 땅에 처음 발을 딛는 이들(외국인들)의 오감을 아찔하게 사로잡습니다. 이런 금수강산 곳곳을 자신의 부지런한 다리로 답사하며 눈에 담고 마음에 새기며 (더 여유가 닿으면 사진으로까지 포착하며) 행복한 물적, 정신적 컬렉션을 꾸미는 이들은 진정 행복하다고나 하겠습니다. 헌데 평범한 우리 일상인들은 그런 기쁨을 애써 추구하기가 힘듭니다. 눈 호강 마음 힐링을 못 시켜 주는 것보다 더 안타까운 일은, 지상 최고의 수려한 국토에 살면서 그 소중한 가치를 못 알아보고 아까운 생을 허비하는 데 있습니다.



지천에 널린 게 예쁜 꽃이고 수려한 나무라면, 그저 예사로 봐 넘기고 다음 기회의 완상을 기약해도 되는 걸까요? 영화 <빠삐용>에서 초자연적인 목소리가 주인공에게 선고하는 준엄한 한 마디가 있습니다. "여러 죄 중에서도 인생을 낭비한 죄가 네게 가장 크다." 물론 돈벌이도 중요하고 주변의 이웃과 가족에게 살뜰한 신경과 정성도 베풀어야 합니다. 그러나 주변만 조금 돌아보면 널린 게 야트막한 산이요 도심에 애써 조성된 공원인데, 그 속에서 자신을 좀 봐 달라고 애처롭게, 혹은 당당하게 하늘거리거나 손짓하는 나무와 꽃과 자연을 외면한다면, 이 역시 내가 몸 담은 공간의 아름다움을 거칠고 무심하게, 둔감하고 투박하게 외면한 죄가 어찌 작다고 하겠습니까? 죄 운운하면 너무 거창하지만, 나의 상처와 피로를 씻어내고 치유하는 가장 간단하면서도 (돈 안 들고) 확실한 방법은, 바로 자연과 벗으로 지내는 길입니다. 미술품 감상하려면 먼저 안목을 키워야 하고, 안목을 키우려면 노력과 시간과 돈이 들게 마련이지만, 꽃과 나무와 벗하는 길은 그런 번거로운 중간 과정이 전혀 필요 없습니다. 그저 그들의 품에 가서 안기기만 하면 되니까요.

이 책의 제목은 "나무 쉽게 찾기"입니다. 정말 예쁘고 알차고 도톰한 이 책이 자신의 제목을 그리 달고 있다는 건, (우리들 많은 독자들에게) 예상 밖으로 "나무 제대로 찾기"가 쉬운 작업이 아니라는 뜻(그래서 책 자기가 막 도와 주겠다는 뜻ㅎㅎ)입니다. 나무와 꽃과 사귀는 건 그저 마음을 열기만 하면 되지만, 내가 나무와 꽃에다가 (마치 김춘수 시인의 어느 구절처럼) 이름을 붙여 주고 어린왕자처럼 특별한 관계를 맺으려면, 나보다 앞서 다른 분들(선인들이나 학자들)이 이 아이들에게 어떤 이름을 붙였는지, 얘들의 특징과 생태는 어떠한지 좀 알 필요가 있습니다. 나무가 궁금하고 꽃과 친하게 지내고 싶을 때, 사전보다 더 간편하게, 일반 도감보다 더 정확하게 사항을 찾아볼 수 있는 게 바로 이 책입니다.



꽃이나 나무도 정이 한번 붙으면 혹시 얘가 아플까봐(통각 체계가 우리하곤 많이 다르긴 해도 ㅎㅎ), 예쁜 몸 상할까봐 함부로 건드리질 못합니다. 만져 보고 싶지만 그저 눈으로만 일단 감상해야 하는데, 사실 저는 책 덕후라서 이 예쁜 책에도 도대체 함부로 손을 못 대고, 책 상할까 싶어서 조심조심 페이지를 넘겼습니다. 사진도 책 중간 벌어질까봐(물론 제본은 튼튼합니다만 그래도요) 얼마나 조심해서 찍었는지 모릅니다. 여튼 아무리 책이 소중하다고 해도, 열심히 읽어 주고 찾아봐 주지 않는다면, 그건 또 위에 적은 대로 주변의 자연을 다음에 감상하겠노라며 참된 가치 평가를 뒤로 미루는 무신경함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이 글에다 마음껏 책 자랑을 좀 해볼까 합니다 ㅎㅎ

우리가 중학교 생물 시간에 맨 먼저 배우는 게 종속과목강문계의 생물 분류입니다. 그 중에서도 학자건 일반인이건 가장 자주 만나는 단위가 일단은 종(種), 그 다음에는 적정 대분류인 목(目) 정도죠. 이 책도 소나무목, 미나리아재비목, 벼목, 무환자나무목, 장미목 등 해서 목 단위의 분류가, 책의 장(챕터) 분류와 거의 상응한 편제로 기능합니다. 일단 위에 열거한 다양한 식물군(즉 "목")은, 우리가 아는 종의 이름과도 상당 부분 같아서, 아 이 대표적이고 유명한 종이 자기 이름을 딴 단위 안에 친족들을 이처럼이나 많이 거느리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목은 영어로 order인데, 자유분방하면서도 한편으로 질서정연한 틀 안에서 이처럼 아름다운 모습을 뽐내는 나무, 꽃들, 마치 풍부한 정보를 담으면서도 독자를 격의 없이 맞고 환영해 주는 이 책과도 닮은 모습이라고 할까요.

조록나무과의 히어리는 우리 주변에서 아주 드물게 보지는 않는 아이입니다. 헌데 둔한 우리 눈이, 음 그저 나무인가보다 하고 무심히 넘어가는 게 문제지요. 이 책에는 예쁘고 선명한 사진들과 함께, 예를 들면 "꽃자루, 잎자루, 입 뒷면 모두에 털이 없다"거나, "송이꽃차례에 8~12개의 작은 꽃이 모여 달린다"처럼, 그 생태에 대해 자세한 설명이 적혀 있습니다. 아무리 눈썰미가 좋아도 자연에 깊이 몸 담거나 나무를 봐 온 눈이 꽤 트여야, 사진이나 지나가는 풍경만 흘깃 보고서도 일일이 종 단위로 구별해낼 텐데요. 우리 같은 일반 독자, 문외한 처지에서 그게 쉽지를 않습니다, 안타깝게도요, 헌데 이런 자세한 설명이 담긴 도감이 있으면(도톰하지만 판형이 아담하여 휴대하기가 편합니다), 현장에서 바로 아 이 꽃이 뭐다, 설명과 모양새가 일치하니 이 종이 맞나 보다 하고 바로 알아볼 수 있습니다.



홍자단(누운개야광)은 중국이 원산이라고 이 책에 나옵니다. 주로 관상수로 심는다고 나오는데 정말 주변에서 보기로도 그렇더군요. "줄기에서 가지가 많이 갈라져 나오고 비스듬히 누워 자란다"는 게 특히 강조된 설명입니다. 같은 목에 분류된 다른 식물들과 어느 정도 굥유하는 특성, 생리는 검은색 폰트로, 이 아이만 유독 도드라지는 특성은 청색으로 강조해 두었습니다. "연홍색 꽃이 한두 개씩 피는데 지름은 6mm이며, 완전히 벌어지진 않는다"는 설명입니다. 완전히 벌어져 흐드리지게 피는 녀석들도 있고, 얘처럼 오래 자신을 봐 달라는 듯 혹은 부끄럽다는 듯 살포시 자신을 감추기도 합니다. 자연은 이래서 천태만상의 아름다움이 깃든 것이며, 그 다양한 경우의 수는 인간의 한정된 상상력을 압도할 뿐입니다.

무환자나무목의 개산초는 주로 남부 바닷가에서 자란다고 되어 있는데, 개인적으로 아주 친근한 모습들이 사진과 텍스트 설명 중에 가득 담겨 있어서 반가웠습니다. 책에는 예컨대 9월의 열매, 4월에 핀 꽃, 겨울눈 등 해서 같은 식물의 다양한 모습을 담았는데, 마치 아름다운 여인의 (무죄인) 변신을 파노라마처럼 화보로 만든 듯해서 한동안 정신을 놓고 구경했습니다. 저뿐 아니라 누구라도, 꽃와 나무의 이런 변신, 변모, 화려한 단장과 맵시를 구경하면, 세상에 천국이 따로 없고 이런 다채롭고 화려하면서도 순수한 구경을 할 수 있는 자체가, 이 지구상에 눈 열린 생명체로 태어난 보람임을 절로 확신할 수 있을 겁니다.



좋은 책은 권말에서 어떻게 본문 내용에 재접근하게 독자를 배려하는지를 보고 그 성의를 판단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은 일단 용어 해설을 별도로 정리해서, 혹시 본문 설명 중 모르는 말이나, 그 뜻을 분명히해 둘 필요 있는 TERM들을 따로 정리해 뒀습니다. 그 다음에는 가나다순 이름 색인이 나오고, 그 다음에는 (사실 일반 독자에게는 이 부분이 가장 절실한데) 잎 모양만 보고 바로 찾기가 따로 나와 있습니다. 잎 모양 분류 다음에는 꽃 색만 보고 찾는 인덱스가 따로 나오는데, 여기서 정말 입가에 미소가 절로 지어더군요. 옆면 THUMB 인덱스 색을 꽃 색과 일치시킨 것도 센스고 말입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香氣)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우리가 무심하고 둔해서 지나칠 뿐 삼천리 금수강산의 나무와 꽃들은 지금도 도처에서 우리에게 정겨운 눈짓과 손짓으로 세상의 참된 아름다움을 좀 알고 가라며 끝 없이 편지를 쓰고 메시지를 보냅니다. 신이 인간을 만들어 지상에 생육 번성하게 한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깨닫고 우리 역시 그 이치에 맞춰 사는 보람을 느끼게 함이 아닐까요. 이름을 아는 건 바른 방법으로 사랑하느니만 못하지만, 주변의 나무와 꽃 이름을 바로 알면 종전보다 더 깊이 더 뜨겁게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 예쁘고 충실한 책이 바로 그 "연애 교본"이요, 올곧고 맑은 삶을 살게 돕는 "인생 독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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