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살인자에게
아스트리드 홀레이더르 지음, 김지원 옮김 / 다산책방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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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달랐다.

오빠를 위해서 내 목숨을 던질 수 있던 시절도 있었다.

하이네켄 납치 사건 이후 우리 모두가 따돌림을 당하던 때, 나는 오빠가 우리에게 가르친 '우리 대 나머지 세상'이라는 가족의 충성심에 대한 신화를 믿었다.

하지만 오빠가 자신의 가족을 죽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깨달았다. 우리의 적은 바깥세상이 아니었다. 오빠가 우리 적이었다.   p.199

사랑하는 나의 가족이 범죄자라면? 가정폭력으로 얼룩진 유년시절, 다정한 오빠이자 아버지와도 같았던 존재가 나의 아이들의 머리에 총구를 겨누고, 수많은 사람을 살해한 살인자라면? 이 작품은 네덜란드에서 가장 유명한 범죄자이자 하이네켄 납치사건의 주범인 빌럼 홀레이더르의 여동생, 아스트리드 홀레이더르가 쓴 회고록이다. 그녀는 살해 위협을 피해 직장도 그만두고 숨어 살며 원고를 완성했고, 탈고한 후에도 책이 공개되기 직전까지 어느 서점에도 간단한 소개조차 제공하지 않았다고 한다. 오빠인 빌럼 홀레이더르가 알게 된다면 책의 출간을 막기 위해 무슨 짓을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침내 2016 11, 한 심야 TV 쇼에 등장한 책 한 권이 네덜란드 전역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나는 아직도 오빠의 살해 목록 1순위다

 

빌럼이 처음부터 아스트리드에게 위협적인 존재는 아니었다. 남매의 어머니 역시빌럼이 열두 살, 열세 살 무렵까지만 해도 매우 착한 아이였다고 기억한다. 문제는 아버지였다. 잘생기고, 매력적이고, 상냥하고, 열심히 일하는 노동자였던 아빠는 엄마와 결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변덕스럽고 예측 불가능한 폭군의 모습으로 변했다. 아빠는 알코올 중독자에 가정폭력을 일삼았고, 과대망상증 환자에, 병적으로 질투심이 강했다. 아스트리드와 소냐 언니, 빔 오빠와 헤라르트 오빠, 이렇게 네 남매는 어린 시절부터 모두 아빠의 관심을 끌지 않기 위해서 최대한 노력하며 살아야 했다. 아빠는 엄마를 때렸고, 빔 오빠는 소냐 언니를 때렸고, 헤라르트 오빠는 아스트리드를 때렸다. 공격성과 폭력성이 의사소통이 되어 버린 집안에서 자랐기 때문에, 그들은 다른 방법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폭력은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졌지만, 아버지의 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된 상황에서 빌럼은 여동생에게 다정한 오빠이자 아버지의 역할을 대신하는 든든한 오빠였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빌럼은 아버지를 닮아가며 전형적인 사이코패스적 면모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나는 그의 여동생이었다, 안 그런가? 그들이 지하세계의 삶에 대해 갖고 있는 유일한 이미지는 <대부> 같은 조직폭력배 영화에서 본 것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가장이 오로지 자신의 가족에게만 사랑이나 연민을 드러내는 그런 영화들.

하지만 우리 삶은 대부 영화가 아니고, 낭만적인 범죄자 가족의 초상도 아니었다. 이것은 한 명이 나머지 모두의 삶을 비참하게 만드는 냉혹한 현실이었다.  p.216

빌럼은 어린 소년일 때부터 엄마에게 폭군처럼 굴었고 엄마는 늘 그걸 형편 없는 아빠 탓으로 돌리곤 했다. 그래서 중범죄를 저질렀는데도 아들을 절대로 버리지 못했다.

"그 애는 꼭 제 아빠 같아. 딱 제 아빠야."

 

빌럼은 하이네켄 납치 사건의 주범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긴 하지만 그는 납치 사건뿐만 아니라 돈을 위해서라면 동료들을 협박하고제거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가족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머니에게 폭언을 일삼고, 절친한 친구이자 동생 소냐의 남편이었던 코르 역시 살해했다. 하지만 그는 수려한 외모와 언변으로 사람들을 매료시켰고, 방송에 나가기도 하며 유명인이 된다. 그러니 그의 잔인하고 폭력적인 면모를 아는 사람은 가족뿐이었다

변호사가 된 아스트리드는 치밀한 준비 끝에 네덜란드 최악의 범죄자이자, 다수의 살인을 교사한 친 오빠 빌럼을 법정에 세운다. 이 책은 바로 그 과정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다. 주도 면밀한 준비 끝에 변호인이 아닌 증인으로 법정에 서서 친 오빠를 단죄해야 하는 심정이란 대체 어떤 걸까. 평범한 삶을 살고 있는 우리는 상상조차 하지 못할 고통일 것이다. 게다가 빌럼은 교도소 안에서 아스트리드의 살해를 지시했고, 그녀는 현재 직장을 그만두고 살해 위협을 피해 숨어서 살아가고 있다. 이 무시무시한 현실은 놀랍게도 실제로 일어난, 그리고 지금도 현재 진행 중인 실화이다.

 

나는 거의 모든 것을 잃었다. 내 일, 내 집, 전부 다 잃었다.

그래도 아직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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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 소녀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6
앨리스 먼로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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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는 로즈의 시건방진 행동, 무례함, 지저분함, 자만심에 대해 이야기한다. 다른 사람을 괜히 고생시키려 들고 고마워할 줄 모른다고. 그녀는 브라이언의 순진무구함과 로즈의 되바라짐을 입에 올린다. , 넌 네가 대단한 사람이라도 되는 줄 알지, 플로가 말한다. 그리고 잠시 뒤에는 이렇게 말한다. 넌 도대체 네가 뭐라고 생각하니?   p.31

앨리스 먼로의 고국인 캐나다에서는 '넌 도대체 네가 뭐라고 생각하니?Who Do You Think You Are?'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고, 그 외 지역에서는 '거지 소녀'로 발표된 작품이다. 주인공 로즈를 중심으로 연결된 단편 열 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일종의 연작소설처럼 단편들이 모여 하나의 이야기를 구성한다. 시골 마을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로즈의 어린 시절부터 중년에 이르기까지의 삶을 새어머니 플로와의 유대를 배경으로 그려내고 있다.

타운의 가난한 지역에서 살았던 로즈의 가족은 네 명이었다. 가구 수선 일을 하는 아버지, 식료품점을 운영하는 새어머니 플로, 이복동생 브라이언. 로즈의 어머니는 그녀가 아기일 때 병으로 죽었다. 과묵한 아버지는 딸에게 혹독한 매질도 서슴지 않았고, 새어머니는 로즈의 시건방진 행동이나 무례함을 지적하며 억누르려 한다. 아버지는 로즈가 학생일 때 병으로 세상을 먼저 뜨지만, 새어머니 플로는 로즈가 대학에 진학하고 결혼과 이혼을 하고 중년에 이르는 세월 내내 고향 집에 머무른다. 누추한 환경과 굴레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던 똑똑한 소녀 로즈는 장학금을 받고 대학에 진학한다. 왜냐하면 여학생들에게 가난은 상냥하고 헤픈 태도나 멍청함과 결합되지 않는 한 매력이 없었고, 좋은 머리는 우아함의 징후, 즉 품격과 결합되지 않는 한 매력이 없었으니 말이다. 그리하여 로즈는 부유한 집안 출신인 패트릭을 만나 결혼하지만, 결국 십 년 만에 이혼을 하게 된다.

 

 

로즈는 언제나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 생각했다. 누군가가 자신을 보고 완전히, 속수무책으로 사랑에 빠질 거라고. 그러면서도 동시에 그런 사람은 없을 거라고, 아무도 자신을 원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때까지는 실제로도 그런 사람이 없었다. 누군가가 어떤 사람을 원하게 되는 것은 그 사람이 무엇을 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 안에 무엇이 있어서인데, 자기 안에 그것이 있는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 것인가? 그녀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아내, 애인, 하고 생각했다. 그 온화하고 사랑스러운 말들. 그 말들이 어떻게 자신에게 적용될 수 있을까? 그것은 기적이었다. 실수였다. 그것은 그녀가 꿈꿔온 것이었다. 그녀가 바라지 않는 것이었다.   p.147~148

표제작이자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거지 소녀 '코페투아왕과 거지 소녀'라는 동명의 그림에서 따온 것이다. 왕이 아름다운 거지 소녀에게 청혼을 하며 왕관을 벗어 들고 있는 그림이다. 비천한 거지 소녀를 왕비로 맞을 수 없다며 모두 말렸지만, 왕은 왕좌를 버리고 사랑을 선택했다. 패트릭은 로즈와 사귀기 시작하고 얼마 안 되었을 때, 우리는 너무 다른 세계에서 자랐다고, 우리 가족은 가난하다고 말하는 로즈에게 이렇게 말한다.

 

"네가 가난해서 나는 좋아. 너무 사랑스러워. 거지 소녀 같잖아."

부유함에서 오는 오만이었고, 패트릭이 사랑한 것이 로즈라는 사람 자체가 아니라 그녀가 가지고 있는 이미지였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로즈 역시 막막한 현실에서 도피하는 심정으로 결혼을 결심했기에, 이들의 파국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을 지도 모른다. 이후 로즈는 어느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한 채 이곳 저곳을 떠돌며 배우이자 교사로 살아간다. 생활은 안정적이지 않고, 수입은 터무니없이 적고, 끊임없이 외로워하며, 누군가에게 희망을 품었다 좌절한다. 매번 실패하고, 실망하면서도 행복에 대한 환상 때문에 계속 누군가에게 매달리고, 희망을 꿈꾸는 것이다. 앨리스 먼로는 로즈의 삶을 미화하지도, 긍정적으로 그려내지도 않고,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허영과 나약함과 어리석음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앨리스 먼로의 작품 속에 자주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들은 주변 사람들의 행동과 말을 관찰하고, 경험하고, 판단하며 자신만의 삶을 꿈꾼다. 먼로는 대부분의 작품에서 자신과 주변을 소재로 다양한 변주를 하며 인간사와 관계를 그려내는 걸로 유명한데, 비교적 초기 작품인 <거지 소녀>의 주인공 로즈의 성격이나 그녀가 겪는 인생은 이후 수많은 다른 작품에서 다양하게 보여진다. 실패와 실망, 어리석음과 허영, 나약함과 수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선택한 그 삶을 살아보겠다고 말하는 로즈의 목소리가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서도 귓가에 들리는 것 같다. 먼로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체감하는 것이지만, 이야기 속의 인물들이 겪는 갈등과 상처, 관계와 회한에 대한 것들은 무엇 하나 내 일 같지 않은 장면이 없었는데, 이번 작품 역시 그러했다. 비록 외롭고 초라하더라도 내 삶은 내가 선택한 것이기에 가치가 있으며, 내가 비록 대단한 사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하찮은 존재도 아니라는 걸 새삼 깨닫게 되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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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을 보면 밖을 보면 웅진 모두의 그림책 18
안느-마르고 램스타인.마티아스 아르귀 지음 / 웅진주니어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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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론가 여행을 떠났을 때, 그곳이 도시라면 항상 야경을 보고 온다. 반짝반짝 빛나는 조명들로 수 놓인 빌딩숲은 낭만적인 야경을 만들어 너무도 아름답다. 여행지에는 아예 야경 투어나 야경을 볼 수 있는 관광지가 별도로 마련되어 있을 정도니 말이다. 하지만, 멀리서 바라보는 밤의 경치는 그렇게 그림처럼 예쁘지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면 그 풍경들은 천차 만별일 것이다. 화려한 조명의 빌딩숲에는 야근으로 인한 스트레스로 다크 서클이 내려 앉은 직장인들이 가득할 지도 모르고, 고층 아파트의 집들엔 화목한 가정도 있겠지만, 다툼을 하거나, 서로를 미워하거나, 혹은 각자 자신의 방에서 고독해하는 사람들 등 여러 모습일 테니 말이다.

이번에 만난 책은 바로 그렇게 여러 대상의 안과 밖 풍경을 번갈아 보여 주며 한쪽에서는 발견하기 힘든 현상의 이면을 볼 수 있도록 해주고 있어, 특별한 경험이었다.

 

이 책은 웅진 모두의 그림책 18권으로, 2015 볼로냐 라가치상 수상 작가 안느-마르고 램스타인 & 마티아스 아르귀 듀오의 작품이다. 제목과 표지에서부터 작품 의도가 확연히 드러나고 있는데, '안을 보는' 것과 '밖을 보는' 것은 마치 거울의 이면처럼 정반대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글자도 거꾸로 쓰여져 있고, 표지 앞면의 그림과 뒷면의 그림이 안에서 보는 풍경과 밖에서 보는 풍경을 각각 보여주고 있다.

안에서 보면 깎아 지른 절벽 위에 있는 성 주변으로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다. 하지만 밖에서 보면 이는 스노우볼 안에 있는 미니어처 장식이다. 김애란 작가의 <바깥은 여름>이라는 책이 생각났다. 안에선 하얀 눈이 흩날리는데, 구 바깥은 온통 여름일 누군가의 시차를 상상했다는 작가의 말이 책을 읽는 동안 누군가의 ''을 들여다보도록 했었기 때문이다.

밖에서는 잘 차려입은 여인이 강가로 피크닉을 와서는 사과를 베어 먹으려고 하고 있다. 하지만 안에서 보면 잘 익은 빨간 빛깔의 먹음직스러운 사과 내부는 이미 애벌레가 다 파먹은 상황이다. 안에서 보면 운전자의 시선으로 멋진 풍경이 펼쳐지고 있는데, 밖에서 보면 운전자의 차 뒤로 차들이 줄지어 길게 늘어서 있는 정체 상황이다. 이런 식으로 이 그림책은 안과 밖의 풍경과 그 온도차이를 보여 주면서 세상의 다양한 이면을 읽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우물 안이 세상의 전부라고 믿었던 개구리처럼, 살다 보면 바깥세상의 형편도 제대로 모르면서 자기가 마치 세상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을 만나곤 한다. 경험이 적어서 보고 들은 게 별로 없어서 일수도 있겠지만, 아마 대부분 주변에 관심을 두지 않거나, 편협한 시각으로 한쪽 방향만 바라보고 있어서가 아닐까 싶다. 바로 그래서 이런 책이 필요하다. 그림책은 아이들만 보는 거 아니냐고? 천만에. 이런 그림책은 어른들에게도 마법처럼 특별한 시간을 선사한다. 바로 우리가 잊어버리고 사는 세상 혹은 계속 모른 채 살아갈 수도 있는 세상을 보여주는, 놀라운 상상력을 선물하는 그림책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광산, 들판, 바다 등 드넓은 자연 세계는 물론 <미운 오리 새끼> <라푼젤> 등 고전 동화까지 경계 없이 넘나들며 세상 곳곳의 안과 밖을 보여 준다. 명암을 생략한 채색과 본질적 형태를 강조한 형상으로 이미지를 그려내는 작가들의 작품이라 이야기가 없어도 이미지만으로 서사를 만들어 낸다. 대상의 안과 밖 풍경이 만날 때 비로소 탄생하는 마법 같은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반복되는 일상에서 매일 같은 일만 하다가 머리가 굳어 버리는 듯한 기분이 든다면, 아이에게 세상을 바라보는 색다른 시선을 가르쳐주어 상상력을 키워주고 싶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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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코노히 2 - 시무룩 고양이
큐라이스 지음, 손나영 옮김 / 재미주의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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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트위터에 떴다 하면 수많은 리트윗과 하트 세례를 받는 일본에서 지금 가장 핫한 고양이네코노히'의 단행본, 드디어 2권이 출간되었다. 고양이 네코노히가 그려내는 일상 속 소소한 실패들이 내 얘기 같아서 깔깔 대고 웃으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었는데, 두 번째 이야기에서는 또 어떤 에피소드들이 기다리고 있을지 기대가 되었다.

뚱뚱하고 소심한 고양이네코노히의 시무룩한 표정이 매력인 네 컷 만화로 대사가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페이지마다 공감! 을 외치게 되는 너무 재미있는 책이다.

 

 

그런데 시작부터 새로운 캐릭터(?)가 등장했다. 네코노히와는 일상의 모든 순간이 극과 극으로 다른, 럭셔리한 토끼님 되시겠다. 네코노히가 아침으로 토스트를 먹을 때, 토끼는 풀 코스로 차려주는 식사를 하고, 네코노히가 일반 칫솔로 양치를 할때, 토끼는 전동 칫솔을 사용하고, 네코노히는 만원 지하철에서 사람들 틈에 끼여 있을 때, 토끼는 넓은 전용 리무진을 타고 이동하는 식이다. 일반인과 귀족 신분처럼 비교 되는 이들이 같은 장소에서 만난다. 매직쇼 간판과 모자 속에서 나오는 토끼의 모습이 그려진 포스터를 보니 그제야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하얀 토끼가 1권 마지막 에피소드에 등장했던 바로 그 토끼였던 것이다. 그때는 마술 장면에서 잠깐 등장해 모자 속에서 짜잔. 하고 등장했었는데, 2권에서는 에피소드의 시작과 끝을 같이 하고, 중간 중간 자주 등장해 재미를 더해준다.

 

 

시무룩 고양이 네코노히의 스토리는 우리가 흔히 겪는 일상 속 소소한 실패들을 보여주는 것이다. 영화관에 갔는데 하필 앞자리에 덩치 큰 사람이 앉아서 시야를 다 가린다거나, 너무 뜨거운 음식을 기대하며 먹다가 입천장을 다 덴다거나, 음식점 메뉴판에 그려진 그림을 보고 주문을 했는데, 실물은 애걔.. 소리가 저절로 나오는 비주얼이었다던가, 모처럼 운동을 시작하겠다고 마음 먹은 날 비가 쏟아져서 그 핑계로 집에서 그냥 간식만 먹었다든지 하는 그런 순간들. 누구나 공감할 수밖에 없는, 그래서 마치 내 얘기 같은 그런 이야기들이다.

 

 

 

뭐 이리 간단한 일 하나도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없는지 화가 나거나, 혹은 어이없어 헛웃음 짓게 되는 그런 상황들이 이 책 속에 가득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뭐든 너무 열심히 하는 네코노히 덕분에 괜찮아, 이번에는 꼭 성공해서 'SUCCESS'라고 외칠 수 있을 거야. 라고 응원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고양이의 삶도 이런데 우리 인생도 소소한 실패에 연연하지 말자는 생각도 슬슬 하게 된다. 되는 일 없어 세상 억울한 네코노히의 석세스 도전기가 긍정 마인드를 심어 주는 것이다.

 

이 작품은 보통의 네 컷 만화들과는 다르게 짧은 네 컷 안에서 대사라고 할 만한 것은 의성어, 의태어 정도 밖에 없다. 대사 없이 상황에 대한 모든 것을 단 네 컷의 그림 안에 다 표현해내고 있어, 한번 읽기 시작하면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 멈출 수가 없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물론 그 속에는 치명적인 매력의 소유자 네코노히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우리를 힐링하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고, 2권에서는 네코노히와는 상반된 매력으로 이야기에 재미를 더해주는 하얀 토끼가 활약하고 있으니 꼭 놓치지 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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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아침 지하철에서 모르는 여자가 말을 건다 앗코짱 시리즈 2
유즈키 아사코 지음, 권남희 옮김 / 이봄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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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막 천재지변이 일어나 출근을 못 했으면 좋겠다. 아니, 조금이라도 회사에 늦게 도착하게 지하철이 연착하는 것도 괜찮다. 그러잖아도 이 노선은 출발 할 때 뛰어드는 사람이 많아서 운행시간보다 늦어지는 일이 잦았다. 모르는 누군가가 죽어도 상관없으니 회사에 가지 않아도 될 정당한 이유가 생기길 바랐다. 그 바람이 최악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다. 그럼 차라리 자기가 선로에 뛰어들면 되지 않는가. 그렇다면 상사인 다카하시에게 야단맞지 않아도 된다.    p.11

회사에 가고 싶지 않다. 방금 출근했는데 퇴근하고 싶다. 갑자기 교통사고라도 나서 며칠 쉬면 좋겠다. 등등.. 이런 생각들 한번쯤 해보지 않은 직장인이 있을까. 27살 직장여성 아케미 역시 그랬다. 마지막 휴일이 언제였는지 이제 생각도 나지 않을 만큼 지쳐 있었다. 동기들은 몸과 마음을 다치고 하나 둘 그만두었고, 그 땜빵으로 여기저기 뛰어다니다 보니 어느새 입사 5년차가 된 참이었다. 아침마다 지하철에서 사라져 버리고 싶다고, 회사에 가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며 출근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위잉, 하는 요란한 기계음이 나서 돌아보니 주스 판매대의 키 큰 여자가 초록색 액체를 믹서로 돌리고 있었다. 그런데 주스판매대 안쪽에 선 체격 큰 여성이 아케미를 부른다. 그리고는 너무도 당당한 모습으로 걸쭉한 녹색 액체 컵을 내민다.

"시금치랑 고마쓰나랑 사과 스무디예요. 무료 캠페인 중입니다. 마셔 봐요."

지하철이 도착한다는 방송이 울려 퍼지고, 다급한 마음과 얼떨결에 아케미는 음료를 마시는데, 쓸 뿐만 아니라 아린맛과 풋내에 저절로 얼굴이 찡그려지고 만다. 그 다음 날도, 또 다음 날도 이 정체모를 음료를 마셔 보라는 강압적인 상황은 반복되지만 아케미는 저항 한 번 못한다. 그렇게 화요일에는 당근과 망고 스무디, 수요일에는 적양배추와 거봉 스무디, 목요일에는 시금치, 셀러리, 멜론이 들어간 스무디 등을 반 강제로 먹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앗코짱의 반복되는 간섭을 통해서 평소 상사의 폭압적인 태도에도 성희롱에도 저항 한 번하지 못하며 자신의 감정을 죽여왔던 아케미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한다.

"이게 뭐야...."

도코는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로 신음했다. 두 사람의 시선을 느꼈지만, 이제 아무래도 좋다.

"모처럼의 휴일인데 어째서 이렇게 엉망진창이 된 거야."

놀랍게도 눅가가 뜨거워졌다. 떠올리고 싶지도 않은 몇몇 과거가 머리를 스치며, 이대로 웅크리고 싶어졌다. 이래서야 옛날과 다를 게 없다.    p.157

일본에서 출간 즉시 10만 부를 돌파했고, 출간 다음해 NHK의 드라마로 제작되는 등 앗코짱 신드롬을 일으켰던 '앗코짱 시리즈' 그 두 번째 작품이다. 전편이었던 <나는 매일 직장상사의 도시락을 싼다>에서 앗코짱은 소심한 파견직원 미치코와 일주일 점심 바꾸기를 통해 그녀의 성장을 도왔었다. 평소 함께 외식할 친구도 없고, 돈에 여유가 있던 것도 아니어서 제대로 된 외식을 거의 해본 적 없었던 미치코는 앗코짱이 남긴 메모와 지폐를 들고 식당을 찾아가 다양한 장소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며 음식을 먹는 경험을 했다. 언제나 수동적으로 타인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고 그저 받아들이기만 하던 삶의 태도가 조금씩 적극적으로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은 마음으로 바뀌어 가는 과정은 소소하지만 뭉클했던 기억이 난다. 두 번째 작품 <매일 아침 지하철에서 모르는 여자가 말을 건다>에서는 아케미가 미치코의 역할을 하게 된다. 게다가 한층 성장한 미치코도 두 번째 에피소드에 등장해 반갑기도 했다.

'소설계의 셰프'라 불리는 작가 유즈키 아사코 답게 이번 작품에서도 건강하고, 맛있는 음식들이 자주 등장한다.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의 다양한 채소와 과일로 만든 색색깔의 스무디들과 두번째 에피소드에서 출장 티 서비스를 통해서 매력적인 애프터눈 티세트를 보여준다. 월요일에는 홍차 얼그레이와 쇼트 브레드, 화요일에는 홍차 다르질링과 오이 샌드위치, 수요일에는 우바 홍차에 우유를 넣은 밀크티와 빅토리아 샌드위치 케이크, 목요일에는 홍차 아삼과 스콘, 금요일에는 샴페인과 크리스마스 푸딩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아름다운 일러스트로 해당 음식들이 페이지마다 삽입되어 있어 눈이 호강하는 듯한 기분도 들었다.

누구에게나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 매번 설레이고, 행복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만 두고 싶은 직장을 참고 다니고, 지루한 학교 생활을 졸업을 위해 이어가며,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육아와 집안일 전쟁 속에서 매일을 버텨내고 있다. 이 작품은 그렇게 일상을 견디는 사람들을 향한 응원 같은 책이다. 언제나 황당무계하고 꿈을 꾸는 것 같은 말만 하며, 고압적인 모습으로 자신감 넘치는 앗코짱이 세상에 큰 소리 한 번 내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에게 대신 해야 할 말을 해주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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