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별자리는 무엇인가요 - a love letter to my city, my soul, my base
유현준 지음 / 와이즈베리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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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공간을 감정과 연관시켜 기억한다. 다양한 공간과 그 공간에서 느꼈던 감정들이 한의원 약초 서랍처럼 여러 개 있다. 디자인을 할 때는 내가 그 공간에서 어떠한 느낌을 받기 원하는지를 먼저 생각한 후 그 서랍에서 필요한 공간을 찾아 대입하는 식으로 작업한다. 그렇게 대단하지는 않지만 다양한 기억들이 나를 먹고 살게 한다.   p.87

사람은 일생 동안 만나는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 영화, 음악, 미술 등 예술도 한 사람을 이루는 모태가 된다. 그리고 시간을 보낸 공간도 그 사람을 만든다. 이 책은 건축가 유현준을 만든 공간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는 인간으로서, 건축가로서 자신을 성장하게 한 도시의 요소와 장소들을 이 책을 통해서 소개한다. 생애 첫 기억인마루에서 시작해, 자신이 태어난 동네인 구의동에서 본격적으로별자리 여행을 시작한다. 엄마가 차고를 개조해 운영했던 피아노 학원, 엄마가 운영했던 파랑새 유치원, 가족과 함께 자주 갔었던 집 뒷동산인 아차산의 바위산 등성이, 시장을 지나 골목길 어귀에 들어서면 있던 동네 가게 '도매식품', 초등학교 스쿨버스의 맨 뒤에 있던 구석 자리, 친구들과 딱지치기와 구슬치기를 했던 골목길... 저자는 말한다 골목길은 경이로운 공간이라고. 골목길은 운동장이 되기도 하고, 놀이의 편을 나누면서 협상을 배우는 장소였고, 구슬치기를 하며 거래를 배우는 장소이자 경영을 배우는 장소였다고. 지금의 어린아이들은 이러한 사회적 지혜를 배울 공간이나 시간이 있기나 한지 걱정스럽다는 그의 말이 마음에 남는다. 지금은 도시에서 거의 사라진 공간이지만, 나에게도 어린 시절의 추억이 조금은 있는 곳이 바로 골목길이었다.

이 작품에서 이야기하는 별자리란 나를 형성한 공간, 지금 나에게 필요한 공간 그리고 인생에서 희미하지만 아름답고 행복했던 시공간을 의미한다. 연애하기 좋은 공간, 혼자 있기 좋은 공간, 일하는 공간, 일상적으로 통과하면서도 그 공간이 갖는 진가가 잘 알려지지 않은 장소, 도시에 숨겨진 보석 같은 공간 등에 대한 글을 읽다 보면 도시가 말을 걸어오는 듯한 느낌도 든다. 모두에겐 각자의 장소가 있을 것이다. 힙하지 않아도, 완벽하지 않아도 나에게만 특별하고 애틋한 그런 곳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의 어린 시절과 지금의 일상을 만드는 공간에 대해 생각해본다.

 

모든 길은 다 통한다. 홍대에서 한남동으로 가야 한다고 치자. 가는 길은 수없이 많다. 강변북로를 타고 가도 되고, 삼각지와 이태원을 거쳐서 가도 되고, 남산순환도로를 통해서 가도 된다. 신촌오거리를 통해서 가다가 길이 막히면 아현동사거리에서 우회전해 공덕동을 통해서 돌아가도 된다. 길을 바꿔 가도 목적지는 같다. 다만 경치만 달라질 뿐이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계획했던 길이 막히면 다른 길로 가면 된다. 그리고 그것이 모여서 새로운 풍경이 되는 것이다.    p.401

이 책에 소개된 건축가 유현준의 눈에만 반짝거리는 공간들은 한 개인의 역사이자, 도시에 보내는 러브레터이고, 여행 가이드에서는 절대 만날 수 없는 특별한 국내 여행지를 추천해주는 가이드북이기도 하다. 저자는 그리스 산토리니 대신 부산의 감천마을을, 스위스 대신 산정호수를, 타임스퀘어와 센트럴파크 대신 코엑스몰의 별마당 도서관을 추천한다. 감천마을은 산토리니와 공간 구성이 닮았고, 색상과 형태가 더 다양한, 컬러의 도시이다. 우리나라엔 호수가 많지 않은데, 특이하게 커다란 호수가 자리 잡고 있는 곳이 바로 산정호수이다. 별마당 도서관은 쇼핑몰의 복도가 모여드는 교차점에 자리해 사람들이 모여들 수밖에 없는 공간 구조인데다, 쇼핑몰에서 유일하게 자연 채광이 들어오는 공간이다. 공짜로 앉아서 책이라는 콘텐츠를 즐기며 햇빛까지 볼 수 있어 특별한 공간이라는 거다. 이러한 공간들에 대한 글을 읽다 보니, 나와 도시가 얼마나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지, 미처 몰랐지만 너무도 멋진 공간이 도시 속에 얼마나 많은지 새삼 깨닫게 된다.

어린 시절 부모님과 함께 살았던 집에서는 여동생과 한 방을 썼다. 어린이 책상이 두 개있었고, 이층 침대가 있었고, 작은 옷장과 네 칸짜리 책장이 하나 있었다. 그러한 구조로 거의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그 방을 사용했었는데, 방에 하나 있던 책장만은 오롯하게 내 차지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겨우 책장 네 칸에 책을 얼마나 넣겠냐 싶지만, 당시에는 나의 보물 같은 장소였다. 대학을 가고 직장에 다니면서 독립을 해서는 그 네 칸짜리 책장이 두 개로 늘어났다가, 결혼 후 신혼집에서는 나만의 서재가 생겼다. 벽 네 면을 전부 책장으로 채우는 게 어릴 때부터 소원이었는데, 지금은 그렇게 나만의 공간이 생겼다.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공간은 가장 많은 삶을 빚는 공간이니, 그곳이 좋아야 그 사람의 살의 질도 좋아진다는 저자의 말처럼, 감사하게도 나에겐 지금 그런 공간이 생긴 것이다. 이 책 덕분에 나에게 소중한 공간들에 대해 다시 한번 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무심코 스쳐 지나갔던 도시의 공간들에 대해서도 말이다. 저자의 말처럼 살면서 모든 순간이 행복하고, 아름다울 수는 없을 것이다. 순간순간이 아주 가끔 아름답고, 또 아주 가끔 행복할 테니, 우리는 그 순간들을 이어서 별자리로 만들어야 한다. 나도 머릿속으로 별자리를 되짚어본다. 나를 형성한 공간, 내가 지나온 공간, 그리고 나에게 필요한 공간은 어디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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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터스 브라더스
패트릭 드윗 지음, 김시현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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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가 고개를 저었다. "그자를 찾지 않는 게 좋아. 진찰비와 관련해 불행한 사건이 있었거든. 나를 다시 보면 무척 기뻐하겠지. 하지만 우리를 도울 마음이 있을지는 잘 모르겠군. 남쪽으로 몇 킬로미터 더 가면 마을이 있다고 그자가 그랬어. 그리로 가는 게 최선일 거야. 네가 갈 수 있다면 말이지."

"선택의 여지가 없잖아."

"인생의 많은 것이 그렇듯 이번에도 어쩔 수 없는 거야, 형제."   p.31~32

골드러시의 광기로 들끓는 1851년 미국 서부, 각종 청부업으로 생계를 꾸려가는 악명 높은 킬러 형제, 시스터스 브라더스의 여정을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찰리 시스터스와 일라이 시스터스 형제는 제독으로부터 캘리포니아로 가서 허먼 커밋 웜이라는 금 채굴꾼을 찾아내 죽이라는 의뢰를 받는다. 제독의 정찰병인 멋쟁이 헨리 모리스가 미리 웜을 조사하고 샌프란시스코의 호텔에서 형제를 기다리고 있기로 했다. 그들은 사람을 죽이기에 적당한 그곳으로 가기만 하면 됐다. 하지만 서부 해안을 따라 오리건에서 샌프란시스코로 향하는 여정은, 그야말로 파란만장하다.

협곡에서 야영을 하다 일라이가 독거미에 물려서 온몸에 열이 나서 드러눕고, 다음날 아침 일어났더니 왼쪽 얼굴이 그로테스크하게 부어 치과 의사를 데려와 썩은 이를 뽑으며 난생 처음으로 칫솔질하는 걸 배우게 된다. 그러고는 찾은 숙소가 마녀 같은 노파 혼자 있는 오두막이었는데, 노파에게 이상한 저주를 받기도 하고, 다음 마을의 호텔에 묵으면서는 주정뱅이 찰리가 술을 너무 퍼마셔 숙취로 고생하고, 일라이는 그 와중에 호텔의 카운터를 보는 하녀와 사랑에 빠진다. 물론, 여자의 마음과는 상관없는 혼자만의 감정이었지만 말이다. 시작부터 상태가 시원찮았던 일라이의 말 텁은 점점 더 컨디션이 나빠지고, 거액의 현상금이 걸린 빨간 암컷 곰을 사냥해 현상금을 받지만 졸지에 도둑으로 몰려 돈도 잃고, 그 지역 사냥꾼들과 목숨을 걸고 한판 붙게 되는 상황에 처한다. 과연 이들은 무사히 샌프란시스코까지 갈 수 있을까.

 

"이런 일을 즐기나요?"

"건건이 달라요. 어떤 일은 별난 장난 같고, 또 어떤 일은 지옥 같죠."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어떤 행위에 보수가 주어지면 그 자체로 존중할 만한 일이 되죠. 한 사람의 목숨이 내게 달려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일을 한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답니다."

"한 사람의 죽음이 달려 있는 거겠죠." 그녀가 지적했다.   p.160

이 작품은 캐나다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총독문학상을 포함해 4개 상을 수상했고, 영화로 제작되어 베니스 국제영화제 은사자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소설 자체도 매우 영화적이다. 장면들마다 보여지는 특유의 리듬과 페이지 바깥으로 걸어나올 것 같은 개성 만점의 인물들, 그리고 폭력과 유머가 공존하는 독특한 아이러니에서 빚어내는 에너지가 마치 영화를 보는 것 같은 몰입감을 선사한다. 그래서 살인과 폭행을 일삼는 악당을 화자로 피비린내 나는 삭막한 여정을 그리고 있지만 너무도 매혹적인 작품이었다.

보통 서부극하면 19세기 후반 미국의 서부 개척 시대를 배경으로 강인한 개척자와 악당과의 대결을 그리는 작품이다. 플롯은 단순하고, 액션이 위주인 서부 영화로 주로 만나왔을 것이다. 이 작품은 소설로서는 드물게 그러한 웨스턴 장르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데, 놀랍게도 기존 장르의 문법을 그대로 답습하지 않고, 완전히 색다르고 독특한 장르를 탄생시켰다. 카우보이모자와 권총, 황야의 결투, 무법지대, 말을 타고 가는 여정 등 웨스턴 장르의 소재와 공식이 등장하지만, 현대적인 블랙유머와 개성 있는 캐릭터들로 인해 굉장히 세련된 카우보이 누아르가 만들어졌다. 이 작품은 일확천금을 노리고 모여든 서부개척시대의 인간군상들이 풍자적인 필치로 그려지고 있으며, 매 장면마다 잔인한 폭력과 코믹한 유머가 공존하고 있다. 유혈이 낭자한데도 웃길 수 있다니 쉽게 상상이 가지 않을 지도 모르겠지만, 무표정하게 툭툭 내뱉는 한 마디, 행동 하나가 너무 웃기고, 유쾌한 작품이었다. 사실 서부극 장르를 영화로든 소설으로든 그다지 즐기는 편은 아닌데, 이 작품은 너무 재미있게 읽었다. 특히나 험상궂은 외모와 어울리지 않게 감상적이고, 어디서든 금방 사랑에 빠지는 로맨틱한 면모도 가지고 있고, 행동은 무자비하더라도 나름의 윤리관을 가지고 있는 주인공 일라이의 매력에 푹 빠져 버렸다. , 정 많고 악명 높은 킬러 형제의 위험천만한 여정에 당신을 초대한다. 그 어디서도 만날 수 없었던 스타일리시한 서부극을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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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아이 2
야쿠마루 가쿠 지음, 이정민 옮김 / 몽실북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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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부모님이 계시고 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뭐 하나 부족함 없이 자랐어. 그런 내가 너의 고생과 고독을 이해할 순 없겠지. 그래서 잘난 듯이 충고 한마디 못해."

"그럼 닥쳐."

"그래도 이 말만은 해야겠어. 사람은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어."     p.67~68

 

이 작품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들은 모두 어린 시절에 부모에게 버림을 받았다. 그들은 학교에 제대로 가지 못했고, 세상과 거의 단절된 생활을 했다. 호적이 주어지지 않아 의무교육조차 받지 못하고 살아온 이도 있었고, 부모에게 버려져 친척에게 구박과 학대를 받아온 이도 있었다. 사랑을 충분히 받고, 제대로 된 교육을 통해 사회성을 키워야 할 시기를 이렇게 거쳐온 사람이 감정이 없는 존재로 성장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사랑을 받아보지 못했으니, 사랑을 줄 수도 없을 것이고, 행복이라는 것을 느껴본 적이 없으니 왜 행복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고, 행복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저지른 죄의 아픔을 진심으로 느낄 수도 없다.

부모가 방치해 호적도 없고, 의무교육도 받은 적이 없는 천재 소년 마치다, 범죄를 이용해 불평등한 세계를 바꿀 수 있다는 사상에 심취한 무로이 진, 그리고 소년원에 들어간 마치다의 마음을 얻기 위해 일부러 범죄를 저지르고 지능이 낮은 연기까지 했던 아마미야. 이들을 중심으로 마치다가 대학에서 만나게 되는 친구들, 아마미야가 지적장애를 가지고 있는 미노루를 찾기 위해 노숙자가 되어서 만나는 사람들, 히로시와 아마미야를 소년원에서부터 지켜봐온 교도관 나이토 등 많은 인물들이 등장해 차곡차곡 이야기를 쌓아 나간다. 야쿠마루 가쿠의 전작들에 비해 분량이 많은 작품인 만큼 진지하게 인물들의 삶을 그려내고 있다.

"마치다가 뭐라던가?" 조바심이 나서 묻자 이소가이가 눈을 떴다.

"행복해지라고요... 제가 행복해지지 않으면 소중한 사람을 결코 행복하게 할 수 없다고 말하더군요. 게다가 행복해지지 않으면 제가 범한 죄의 아픔을 진정으로 느낄 수 없다고도 말입니다."

"그렇군...."

이소가이의 이야기를 듣는 사이 가슴속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다.  p.192~913

 

제목인 '신의 아이'란 특별한 재능, 그 중에서도 천재적인 두뇌를 가진 아이들을 가리킨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에겐 바로 그 뛰어난 지능 외에 아무 것도 없다. 누구나 세상에 태어나면서 자연스레 주어지는 부모와 가족부터 따뜻함, 사랑, 행복 등 기본적인 감정 조차 느껴보지 못한 채 살아 간다. 하지만 사람은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다. 사회구조적 범죄를 통해 사회적 제도들에 의문을 던지고 있지만, 무엇보다 '사람이라는 온기'를 말하기 위해 참 많은 시간과 인물들을 거치며 돌고 돌아 만들어지는 작품이라 더욱 인상적이었다. 작품의 가독성과 상관없이, 조금 천천히 호흡하며 읽어 나가면 더 좋을 만한 작품이다.

야쿠마루 가쿠는 데뷔작부터 최근 작품까지 '소년범죄'를 꾸준히 다루고 있는 작가이다. 그의 작품에는 매번 범죄를 저질렀거나 범죄와 연루된 소년들이 등장한다. 그렇게 소년범죄라는 주제가 담고 있는 다양한 문제의식을 현실적으로 다루고 있었는데, 이번 작품에 이르러서는 범죄 자체가 아니라 그러한 범죄를 저지르게 된 근본적인 배경에 집중하고 있다. 대체 이들을 이렇게 만든 것은 과연 누구인가, 라는 것에 대해서 사회적으로도, 인간적으로도 독자들이 이 작품을 읽으면서 한번쯤 고민해봐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야쿠마루 가쿠의 작품들이 다 그러했지만, 사회성 짙은 소재를 다루면서도 불합리한 현실에 대한 장황한 설교를 늘어 놓아 지루하게 만들지 않고, 미스터리와 추리적 요소와 스릴러적인 템포로 이야기 자체에 집중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점도 장점이다. 한마디로 '한번 읽기 시작하면 절대로 쉽게 손에서 놓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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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어가 잠든 집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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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이라.

가오루코와 얘기하는 중에도 그 말이 몇 번이나 나왔던가. 기적이 일어난다면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상관없다. 자신이 어떻게 되어도 괜찮다, 라고. 하지만 그 말을 입에 담을 때마다 허망함이 더해졌던 것도 사실이다.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기적이라고 하는 것이다.    p.83

IT 기업 '하리마 테크'를 운영하는 가즈마사와 그의 아내 가오루코는 8년 전에 결혼했다. 하지만 1년 전 별거를 결정했고, 첫째 딸 미즈호와 둘째 아들 이쿠토는 엄마와 함께 지내고, 가즈마사는 집에서 나와 혼자 살고 있다. 그들은 가즈마사의 외도를 이유로 이혼에 합의했지만, 딸 미즈호의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그때까지만 잠시 미루기로 했다. 어느 날 딸의 초등학교 입학을 위한 부모 면접에 참석하러 간 그들에게 미즈호가 수영장에서 물에 빠졌다는 연락이 온다. 의사는 미즈호가 아직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으며 뇌에 상당히 손상을 입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사실상 뇌사 상태라고 말을 한다. 물론 치료는 계속하겠지만, 회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연명 조치에 불과하다고, 이런 경우 통상적으로 며칠 안에 심정지가 온다고 단언한다. 그러면서 조심스럽게 장기를 기증할 의향이 있는지 묻는다.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없이, 너무도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에 가즈마사와 가오루코는 그 압도적인 슬픔에 절망스럽기만 하다. 딸이 죽는다는 것도 믿기 어려운데, 장기 기증이라는 엄청난 선택까지 해야 하다니 뭔가 불합리하다고 생각했다. 왜 하필 우리가 이런 시련을 겪어야 하는가. 그 선택을 해야 하는 그 밤이, 그들 부부에게는 너무도 잔인한 밤이었다. 그리고 고심 끝에 미즈호라면 자신의 몸 일부나마 어디선가 고통을 겪고 있을 누군가를 돕고 싶다고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생각에 장기 기증을 결심한다. 그리고 가족들이 모여 마지막 인사를 나누려고 미즈호의 손을 잡는데, 한 순간 그 손이 움찍한 것처럼 느껴진다. 미즈호의 손이 움직일 리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부는 그 작은 움직임을 놓치고 싶지 않다.

 

"우리 딸은, 살아 있어요. 죽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장기 기증을 거부하고, 치료를 계속하기로 한다. 가오루코는 미즈호를 집에서 돌보겠다고 선언하고, 간병 교육을 받고, 남편과 이혼 결정도 번복하고 딸의 연명 치료에 들어간다.

 

 

"그런 일에 동조하는 거 말이야. 나도 장애가 있는 사람을 돕고 싶은 마음에 이 일을 하고 또 보람과 자부심을 느끼지만, 상대가 뇌사 환자라면 어떨지 모르겠어. 의식도 없고 회복할 가망도 전혀 없는 환자의 팔다리를 컴퓨터와 전기 신호로 움직이면 뭐 하겠어. 나는 프랑켄슈타인을 만들고 있다는 생각밖에 안 들 것 같아."  p.190

이 작품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가 데뷔 30주년 기념작으로 영화로도 제작되어 올해 국내 개봉이 예정되어 있다. 기존 그의 작품들과는 다르게 범인도, 살인도, 추리 형식도 등장하지 않지만, 그 어떤 작품보다도 흡입력 있게 전개되고 묵직한 뭔가를 던져주는 이야기이다. 딸의 뇌사라는 비극과 맞닥뜨린 부부의 충격적인 선택을 그린 휴먼 미스터리인데, 흔히 예상할 수 있는 플롯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지 않는 점이 더욱 흥미진진했다. 바로 히가시노 게이고의 특기인 과학 소재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즈호의 아버지인 가즈마사가 운영하는 회사의 주력 분야는 바로 BMI, 브레인 머신 인터페이스이다. 뇌와 기계를 신호로 연결해 인간의 생활을 혁신적으로 개선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데, 인공 눈, 로봇 팔 등 장애인을 지원하는 시스템을 개발하고 있었다.  아빠 입장에서 뭐라고 해보고 싶은 게 당연할 것이다. 그래서 뇌나 경추가 손상되어 몸을 가눌 수 없는 환자로 하여금 뇌에서 보내는 신호로 몸을 움직일 수 있게 하는 기술을 자신의 딸에게 적용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고, 그 기술의 개발자가 집으로 가서 여러 가지 시도를 하기 시작하는데, 그것은 점차 딸을 향한 가오루코의 집착을 불러오게 된다.

겉모습만 보면 그저 잠을 자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여전히 아름답기만 한 딸이 여전히 살아있다고 믿고 싶은 부모의 마음을 이해하기에, 읽으면서 내내 가슴이 먹먹해지는 작품이었다.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사랑, 그리고 그 사랑을 넘어선 집착과 광기의 드라마가 놀랍고도 깊이 있게 펼쳐진다. 그리고 장기 이식을 둘러싼 도덕적, 법률적 문제와 의식 불명의 뇌사 상태에 빠진 사람의 가족의 선택에 대해서도 고민할 수 있게 만들어 주고 있다. 무엇보다 사회파 작가로서 히가시노 게이고가 바라보는 인간에 대한 따스한 시선이 작품에 전반적으로 깔려 있어 더욱삶과 죽음, 사랑의 정의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들어 주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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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틱 세계사 - 교양으로 읽는 1만 년 성의 역사
난젠 & 피카드 지음, 남기철 옮김 / 오브제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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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남자들이 두려워한 것은 사악한 마법이 아닌 여성들의 자립심과 욕망이었다. 그래서 갖은 수단을 다 동원해 자립심 강하고 욕망 있는 여자들에게 압력을 가하고 악마 취급을 했다....종교재판관은 지나칠 정도로 여자들을 증오했으며, 여자들이 불쌍한 남자들을 악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만들었다고 비난했다. 크라메르 수도사는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욕정이 강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브가 아담의 갈비뼈로 만들어졌다는 이유로 여자를 불완전한 동물이라고 판단하는 건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p.163~164

 

수메르인들은 관음증 증세가 심했고, 에트루리아 사람들은 광란의 사도마조히즘 파티를 열었다고 한다. 이는 기원전 600년으로, <그레이의 그림자>가 출간되기 2,600년 전의 일이다. 고대 중국의 의사들은 여성들에게 애널 섹스를 치료법으로 추천했고, 중세의 수도사들은 딜도를 즐겨 사용했다. 이 책은 인류가 역사에 남긴 수많은 유물과 문헌, 사건, 사례를 보여주면서 1만 년 동안 끊임없이 변화하며 지속되어 온 인류의 성 문화를 심도 있게 조망하는 책이다.  '섹스'를 통해 지난 1만 년 인류 역사를 되짚어 본다고 하니, 아마도 가장 과감하고, 발칙한 세계사 연대기가 되지 않을까 싶다.

호모사피엔스는 1만 년 전부터 섹스에 대해 광적으로 관심을 가져왔다. 그들은 동굴 벽에 포르노그래피를 그렸고, 파피루스에 음담패설을 쓰기도 했다. 이 책은 그렇게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양상으로 변화되어 온 인류의 섹스 문화를 선명하게 복원시키고 있다. 그리하여 성의 영역이 어떻게 오늘날의 인류문화를 만들어냈는지를 알려주고 있어, 인문학서로서도 흥미로운 책이었다.

라캉에 의하면, 너무 적나라하고 욕정을 불러일으키며 불쾌감을 주는 쿠르베의 그림을 보면 얼굴이 달아오르는바, 이는 자기 인식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체험하는 것이다. 이 그림 속 나체 여인의 배가 약간 부른 모습에서 그녀가 예비 엄마임을 추측할 수 있다. 본인의 출생에 관한 기억을 간직하고 사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 정신분석가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자신을 낳은 어머니에 대한 성적 욕구 역시 억압되는 게 보통이다.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에 대한 의문은 누구에게나 사각지대로 남는다.   p.284~285

 

남녀가 몸을 밀착해 서로 끌어안은 모습이 마치 하나가 된 것처럼 보이는 <아인 사크리 연인상>은 남녀의 성교 모습을 표현한 가장 오래된 예술 작품으로, 1만 년 전에 만들어졌다. 고대 이집트의 피임 처방전도 파피루스에 쓰인 것으로 발견되었고, 그들이 사용했던 고품격 최음제인 맨드레이크는 수 천 년 동안 가장 많이 이용된 최음제이기도 했다. 인류 최초의 포르노 서적인 투린 파피루스는 외설이나 풍자 문학이었는지 또는 섹스 기술을 가르쳐주는 지침서였는지는 분명치 않다. 18세기에 살았던 인류 최고의 플레이보이 카사노바는 정열적인 페미니스트였고, 19세기에 살았던 타이어의 아버지 찰스 굿이어는 아내 몰래 부엌에서 실험하다가 우연히 콘돔을 발명하기도 했다. 점잖고 교양 있던 영국의 산부의과 의사 그랜빌은 1833년 히스테리 치료를 위해 바이브레이터를 개발했고, 여성의 음부를 적나라하게 묘사한 프랑스 화가 쿠르베의 1866년 작품은 자크 라캉 정신분석의 토대가 되기도 했다.

이렇게 1만 년 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역사 곳곳에 깊이 숨겨져 있던 성 담론을 체계적으로 발굴하고 정리하는 과정에서 역사적 인물들이 보여주는 생각지도 못했던 반전이 더욱 흥미롭게 느껴졌다. 저자는 '성의 영역에서 진부한 사실과 전설이 오늘날의 문화를 만들어낸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 책을 통해 '우리의 조상들이 어떻게 우리의 성적 자유를 위해 싸웠는지 보여주며, 인류의 역사를 보다 과감하게, 정직하게, 유쾌하게 들여다보는 것'이 더 의미가 있지 않나 싶다. 1만 년 인류 역사의 은밀하고도 치밀한 사랑과 치정의 세계가 궁금하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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