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 없는 작가로 살아남기 - 재능 없이도 글밥 먹는 사람의 생존기
홍지운 지음 / 아작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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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저는 재능 없는 작가입니다. 여기서 여러분들이 주목하셔야 하는 지점은 제가 '재능이 없다'는 부분이 아니라 제가 '작가'라는 점입니다. 네. 저는 재능이 있건 없건 작가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저의 조언이 재능으로 가득한 작가들의 조언보다 더 많은 사람에게 유용할 수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세상에는 재능으로 가득한 사람보다 재능 없는 사람이 더 많지요. 그렇다면 재능으로 가득한 사람보다 재능 없는 사람의 조언이 더욱더 많은 사람에게 통용되는 조언이지 않을까요?             p.11


이 책은 재능 없는 작가인 동시에,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장르문학 창작을 가르치는 교수이기도 한 저자의 '재능 없이도 글밥 먹는 사람의 생존기'를 담고 있다. 홍지운 작가의 작품은 <일곱 번째 달 일곱 번째 밤>과 <펄프픽션>, <절망과 열정의 시대>라는 앤솔러지로 만난 적이 있다. 그 외에도 <시나리오 레시피>, <창작자를 위한 마블 스토리텔링> 등 작법서도 있었는데, 이번에 나온 신간은 작법론이라기보다는 '작업론'이다. 


한때 소설 꽤나 읽었다 싶은 이들 중에 직접 써보겠다고 마음먹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많이 읽을 수록, 쓰고 싶어지는 게 당연지사이니 말이다. 나 역시 그래서 온갖 작법서며 글쓰기 관련 책들을 섭렵했던 시기가 있었다. 물론 현실적인 문제들에 부딪혀 여전히 그냥 '독자'인 채로 남아 있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번에 이 책 <재능 없는 작가로 살아남기>를 읽으면서 묻어 두었던 쓰기를 향한 애정이 다시 몽글몽글 피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렇다. 소설은 타고난 재능이 없이도, 천부적인 능력이 있지 않아도 쓸 수 있는 거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기 때문이다. 홍지운 작가는 이 책의 서두에 스스로를 '재능 없는 작가'라고 단언하며 시작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재능이 없다'는 부분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작가'라는 점이라고 말이다. 이보다 더 작가 지망생들을 혹하게 하는 문장이 있을까. 시대를 초월하는 희대의 명작을 쓰거나, 백만부 이상을 판매하는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면, 스스로에게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 여부는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었던 것이다. 




야구팀의 모든 선수가 4번 타자일 필요는 없습니다. 모든 선수가 에이스 선발 투수일 필요도 없습니다. 발이 빠른 타자가 1번에 서서 출루율을 높여 투수를 위협하면 홈런타자보다 더 승리에 기여할 수도 있습니다. 위기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는 중간계투가 승부의 향방을 가르기도 합니다. 저는 작가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서점에 깔린 모든 책이 노벨상 후보가 될 걸작일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p.156


이 책은 재능 없는 작가로 출발해 500명이 넘는 작가 지망생과 상담을 진행하고 1,000편에 가까운 기획서의 피드백을 진행한 교육자이자 15권이 넘는 단독저서를 출간한 저자의 생존법을 담고 있다. 11년 차 작가이자 청강문화산업대학교 웹소설창작전공 교수인 그는 학생들이 자신의 수업을 들으면서 글을 좋아하는 마음, 이 하나만 건져도 대단히 성공적인 수업이라 생각한다고 한다. 창작의 노하우나 필수적인 레퍼런스는 어차피 작업을 계속해서 해나가다 보면 어떻게든 생기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글을 계속해서 써 나가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글쓰기를 향한 기대와 애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글쓰기를 향한 애정에 방해가 되는 요소들을 최대한 피하고 극복하도록 노력하라고 그는 이 책에서 독자들에게 당부한다. 


작법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그 어떤 작법서보다 더 실전에 바로 써먹을 수 있는 노하우들로 가득하다. 제목을 잘 짓는게 중요한 이유, 작품을 계획적으로 쓰기 위해 간단한 기획서를 작성하는 방법, 고전 명작을 베껴쓰고, 재해석해야 하는 이유, 개연성을 만드는 것은 논리가 아니라 기세라는 사실, 따분한 소재만 생각나더라도 어떻게든 원고를 완성하는 방법, 마감 직전에 원고 분량을 채우지 못했을 때 분량을 부풀려주는 꼼수, 창작자를 위한 합평 가이드, 일일 작업량 계산법 등 그 어떤 책에서도 만날 수 없는 팁들이 담겨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이 재능 없는 작가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가장 핵심적인 이유, 즉 '생존의 비결'도 수록되어 있다. 그 생존의 비결이 궁금하다면 이 책을 직접 읽어 보길 권해주고 싶다. 작가로서의 목표가 '장기적인 생존'이라는 저자는 계속해서 작업을 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말한다. 기왕 태어난 거, 가능한 한 오래 또 재밌게 살고 싶다는 마음으로, 비장하지도, 재능이 있지도 않지만, 어떻게든 작가로 살아남고 싶다면 이 책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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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이란 말 따위 - 딸을 빼앗긴 엄마의 마약 카르텔 추적기
아잠 아흐메드 지음, 정해영 옮김 / 동아시아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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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럭을 몰고 시내를 지나는 동안 그들에게 기묘한 느낌이 엄습했다. 마치 유령처럼 초현실적인 빛으로 둘러싸인 산페르난도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집이 불타고 남은 잔해를 보는 것처럼, 부서지고 훼손된 익숙했던 건축물을 보는 것처럼.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거지?” 미리암이 계속해서 질문했다. “도대체 정부는 뭘 하고 있는 거야? 왜 이런 일을 막지 않는 거지?”               p.36


2014년 1월, 멕시코 산페르난도 지역을 장악한 마약 카르텔 세타스 일당이 카렌을 납치했다. 미리암 가족은 감당하기 힘든 수준의 몸값을 비롯해 세타스의 모든 지시에 따랐지만, 카렌은 돌아오지 않았다. 정부는 탄원을 무시하고, 무관심하고 형식적인 대응으로 일관했다. 그래서 평범한 중년 여성이었던 미리암은 딸을 납치하는 데 연루된 놈들을 전부 찾아내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고 마음먹는다. 그렇게 2년, 아마추어 수사관으로서 두려움을 모르는 데다 집요했던 미리암은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둔다. 4명은 교도소에서 재판을 기다리고 있었고, 6명은 멕시코 해병대에 습격당해 죽었다. 그런데 영화나 소설도 아니고, 이게 현실에서 가능한 일이냐고? 


그럼에도 이 작품은 실화를 바탕으로 쓰인 논픽션이다. 어떻게 56세의 평범한 멕시코 여성이 이런 일을 가능하게 했던 것일까. 엄마가 딸을 납치한 범인들을 직접 추적하는 동안 국가는 뭘 하고 있었던 것일까. 이야기는 멕시코와 미국 텍사스주를 잇는 국경 다리에서 미리암이 납치 용의자 가운데 한 명인 ‘플로리스트’를 뒤쫓는 긴장감 넘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머리카락을 빨갛게 염색하고 야구 모자를 눌러 쓴 미리암은 38구경 권총을 장전한 채 범인 가운데 한 명을 쫓고 있었다. 사실 세타스는 지하경제를 장악할 목적으로 마약 밀수, 밀입국, 몸값을 노린 납치 등의 범죄를 자행하며 멕시코 10여 개 주에 폭력의 상흔을 남겼다. 미리암이 나서게 된 것도 딸인 카렌을 위해서, 그리고 다른 실종자들의 가족을 위해 반드시 직접 복수하고 정의를 구현하겠다고 마음먹은 거였다. 당시 멕시코 정부는 마약과의 전쟁이 촉발한 혼란에 제대로 맞서지도, 상황을 해결하지도 못했다. 그렇게 정부가 손놓고 있는 동안, 힘없는 시민들만 유린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리암은 절망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세상에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만큼 슬픈 이야기가 넘쳐났다. 충격적인 사건조차 사회적으로 익숙해지고 무감각해질 지경이었다. 일이 돌아가도록 하려면 절망에서 목적으로 나아갈 방향을 찾아야 했다. 절망을 무기로 제도에 맞설 방법을 찾고, 슬픔 속에서도 수완을 발휘해야 했다... 미리암은 슬픔에 빠진 채 자기 자신에게 질문하는 것을 그만두고 답을 구하며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그녀는 자신의 투쟁을 정부에서 개입할 문제로 만듦으로써 무관심이라는 지옥에서 빠져나왔다.             p.201


퓰리처상 수상자이자 뉴욕타임스의 국제 탐사보도 특파원인 저자는 4년간 관련 인물들을 수백 시간에 걸쳐 인터뷰하고, 사건 기록을 수집하고, 마약 카르텔의 계보를 되짚으며 미리암의 영웅적 삶과 폭력으로 얼룩진 멕시코의 현대사가 교차하는 “장대하고 치밀한 르포르타주”를 완성시켰다. 범인을 직접 추적하는 엄마의 일대기이자 마약 카르텔에 의해 멕시코 지역사회가 붕괴되는 과정을 묘사한 범죄 르포르타주인 이 작품은 멕시코 사회의 여러 모순을 상징하는 초상화로 그려낸다. 힘없는 여성이, 피해자 가족이 악명 높은 마약 카르텔 조직원과 스스로 맞서는 과정은 놀라웠고, 박수를 보내고 싶을 만큼 멋지기도 했지만, 지역사회와 공권력은 뭘하고 있었던 건지 책을 읽는 내내 화가 나기도 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공권력과 조직범죄의 오랜 유착관계를 파헤치고, 정부가 조직범죄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할 경우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권력이 된 폭력 앞에서 끝내 굴하지 않은 용기는 비현실적이지만, 단순히 사적인 복수가 아니라 사회적 연대로 가는 전환점을 만들어 낸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미리암은 모두가 목소리를 높여 관심을 촉구해야 한다고 했다. 더는 두려워할 필요도, 자신에게 일어난 일로부터 도망칠 필요도 없다고 했다. 한 사람, 한 사람은 무시당하기 십상이지만 단체를 조직하면 상황이 달라진다고 사람들을 설득했다. 피해자 가족 단체의 회원수가 늘면 개인적 비극은 사회적 위기가 되고, 위기감을 키우는 것만이 정부의 행동을 촉구할 유일한 길이라고 강변했다. 그녀는 그렇게 불의에 맞섰고, 정부가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게 유도했고, 패러다임을 바꾸기 위해 온몸을 바쳤다. 자, 웬만한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한 엄마의 비범한 이야기를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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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뜬구름
찬쉐 지음, 김태성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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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집의 컴컴한 창문에서 가벼운 숨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는 얼굴이 뜨거워지면서 고개를 숙인 채 비틀비틀 걸어 나가며 걸음마다 떨어진 그 꽃들을 전부 밟아 버렸다. 그러고는 뒤도 돌아보지 못하고 도둑처럼 도망쳐 왔다. 쥐 한 마리가 그의 앞에서 죽을힘을 다해 하수구 안으로 도망쳤다. 

그는 숨을 헐떡이며 거리로 내달렸다. 주의 두 눈이 여전히 그의 좁은 등 위에 멈춰 있었다. 「감시자였어.......」 그는 화를 내면서 욕을 퍼부었다.            p.11~12


향기를 가득 품은 닥나무의 새하얀 꽃이 빗물을 잔뜩 머금어 투둑 하는 소리와 함께 땅바닥에 떨어진다. 겅산우는 밤비를 맞아 떨어진 꽃들이 여전히 탐욕스럽고 생기가 넘치는 모습을 보고는 화가 나서 그 꽃들을 전부 짓밟아 버린다. 그때 깜짝 놀란 여자의 비쩍 마른 얼굴이 이웃집 창살 사이로 나타났다 사라진다. 이웃집 여자 쉬루화이다. 그녀는 밤새 남편의 코 고는 소리와 옆집 침대의 뒤척이는 삐걱소리를 듣는다. 아침에 땅바닥에 흩어진 하얀꽃들을 보다 옆집 남자를 발견한 그날 저녁, 남의 사생활을 엿보지 말라는 작은 종이 쪽지를 받는다. 이 작품 속 인물들은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며, 누군가 자신을 지켜본다는 불안감에 시달린다. 스스로를 방어하고, 주위를 경계하며, 끊임없이 서로를 감시하는 기묘한 이들의 관계는 삶의 부조리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문에 〈쇠꼬챙이를 박〉아 자신을 방어하고 〈나무에 거울을 매달아〉 옆집을 감시하는 모습이 결코 정상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데, 이들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어느 순간 그 신경쇠약 직전의 불안한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져서 그들의 의심과 방어가 그럴듯 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자고 일어나서도 뭔가 개운하지 않은 악몽같은 느낌과 좋은 향기도 너무 강하면 머리가 아픈 것처럼 꽃이 풍기는 향기에 취할 것 같은 분위기도 이 작품에 몰입하게 만드는 장치가 되어 준다. 찬쉐의 문장들은 특히 이미지 묘사가 매우 섬세하고 리얼하다. 감각들을 일깨워주고, 오감을 자극하는 듯한 문장들을 따라 가다보면 소설이 그려내고 있는 풍경이 손에 만져질 듯한 생생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아름다운 것을 추하게 그리는 동시에 추한 것을 미적 대상으로 삼는 특유의 시선이 공감을 방해하기도 하지만, 그냥 의식의 흐름대로 읽어 보길 권해주고 싶다. 찬쉐의 실험적 글쓰기가 이끌어 가는 대로 몸을 맡긴 채 이 이야기가 도달하는 그 곳까지 가보자. 




그녀는 실 담요를 몸에 걸치고 집 안을 미친 듯이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실 담요가 허공에 날리면서 휙휙 분노의 소리를 냈다. 천장에 달라붙어 있던 나방이 놀라서 날다가 또 담요에 부딪혀 바닥에 떨어져서는 서서히 죽어 가며 몸부림을 쳤다. 숨을 헐떡거리며 멈춰 선 그녀는 옷장 거울에 비친 잔뜩 짓무른 무수한 혀를 보았다. 그녀는 창문 유리에 비친 희미한 석양빛이 두려웠다. 그 누르스름한 빛 한 줄기가 그녀의 눈을 너무나 아프게 찔러 댔다. 그녀는 짙은색 담요로 유리를 덮었지만 여전히 별처럼 흩어진 광점들을 다 막지는 못했다.            p.138~139


매년 노벨 문학상 유력 후보로 거론되고, 해외에서 가장 많이 번역된 중국 여성 작가인 찬쉐의 초기작인 이 작품은 200페이지도 안 되는 분량이지만 결코 수월하게 읽히지 않는다. 주로 〈그〉와 〈그녀〉로 지칭되는 인물 간 구별이 어렵고, 벌어지는 일들 또한 시간과 순서가 모호하며, 사람과 사람, 진실과 허상의 경계가 흐릿하기 때문이다. 뜬구름처럼 분명히 실체가 보이지만 막상 손을 내밀어 보면 흩어져 버려 붙잡을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찬쉐의 작품은 <신세기 사랑 이야기>와 <격정세계>만 읽어 보았다. <신세기 사랑 이야기>는 언뜻 남녀의 욕망을 표면화시켜 보여주는 듯하지만 내면 깊숙한 곳으로 점점 들어가 심연에 도달하는 깊이 있는 전개를 선보이며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계속 이어지는 이야기의 매력이 있었다. <격정세계>는 책과 독서를 중심 소재로 하는 만큼 좀 더 현실적이고, 서사가 분명해 조금 수월하게 읽었다. 


<오래된 뜬구름>은 읽었던 작품 중에 분량이 작은데도 불구하고 읽기엔 가장 독특한 독서 경험을 선사하는 작품인 것 같다. 그의 작품 중 가장 실험적이고 강렬한 작품이라는 말처럼 낯선 감각을 일깨워주는 몽환적이고 그로테스크한 풍경이 시적인 언어로 펼쳐지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찬쉐 고유의 개성과 독보적인 색채가 아주 짙게 밴, 찬쉐 문학 세계의 초석이 된 작품이므로 꼭 한번 읽어 보길 권해주고 싶다. 찬쉐의 작품들은 철학적 사유와 난해하면서도 섬세한 묘사, 거침없고 호방하게 뻗어나가는 상상력, 찬쉐의 대체불가능한 스타일, 음란하고 기이한 이야기의 세계, 마술 같은 세계로 빨려드는 환상 스토리 등으로 설명된다. 가독성과는 별개로 대체불가능한 스타일로 독보적인 세계를 구현하는 작가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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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양장 특별판)
박민규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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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랑은 오해다. 그를 사랑한다는 오해, 그는 이렇게 다르다는 오해, 그녀는 이런 여자랑 오해, 그에겐 내가 전부란 오해, 그의 모든 걸 이해한다는 오해, 그녀가 더없이 아름답다는 오해, 그는 겨ㄹ코 변하지 않을 거란 오해, 그에게 내가 필요할 거란 오해, 그가 지금 외로울 거란 오해, 그런 그녀를 영원히 사랑할 거라는 오해... 그런 사실을 모른 채 사랑을 이룬 이들은 어쨌든 서로를 좋은 쪽으로 이해한 사람들이라고, 스무 살의 나는 생각했었다.              p.16~17


이 작품을 17년 전에 초판으로 읽었었다.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시녀들> 그림을 사용했던 표지도 아직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 그런데 좀처럼 내용은 생각이 나지 않았는데, 이번에 개정판으로 다시 읽다 보니 문장들은 고스란히 기억이 났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애당초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곧 시시해질 한 인간을 시간이 지나도 시시해지지 않게 상상해주는 거라고, 그리고 서로의 상상이 새로운 현실이 될 수 있도록 서로가 서로를 희생해가는 거라고.... 아마도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는 이해되지 않았을, 혹은 다른 방식으로 이해했을 문장들을 꽤 긴 시간만큼의 삶을 살아낸 뒤 완전히 이해하게 된다는 것은 굉장한 경험이다. 왜 작가가 사랑은 오해라고 했는데, 왜 사랑은 상상력이 될 수밖에 없는지 이제 나는 안다. 그래서 오래 전에 읽었던 이 작품을 다시 처음부터 읽으며 새로운 작품을 만나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파반느>의 개봉을 앞두고, 양장 특별판으로 나온 이번 개정판에는 소설 속 ‘나’와 ‘그녀’, 요한의 17년 후 이야기를 더해 더욱 특별하다. 라이터스 컷(Writer’s cut)이라니... 정말 설레이는 장치다. 영화로 치자면 일종의 디렉터스 컷과 같은데, 독자들이 본 내용의 결말을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남겨두려는 작가의 특별한 기획이라고 한다.  또한 이 소설만을 위한 BGM 음반을 제작하여 QR 코드로 수록했다. 머쉬룸 밴드의 음악 네가지 트랙을 들어볼 수 있다. 음악과 함께 소설을 읽으면, 또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져 색다른 읽기 경험이 될 것이다. 영화는 캐스팅 소식 외에 스틸컷이라든가 아직 더 알려진 정보가 없어서 매우 궁금하다. 소설의 분위기를 어떻게 살릴지, 영상화된 버전에서는 어떤 것들이 달라질지도 기대가 된다. 




이것이 현실이다. 그리고 현재의 내 삶이다.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다. 어렴풋이 의식이 돌아오던 때의 느낌이 떠오르고... 희미하게나마 시력을 회복하던 때의 감각도 떠오른다. 그 모두가 기적이라고 의사나 간호사들은 얘기했었다. 실은 어떤 삶도 기적이 아닐 수 없다. <파반느>로서의 나의 여생도 마찬가지일 것이라 나는 생각한다. 비록 느리고 장엄해도 누군가를 사랑한 삶은 기적이다. 누군가의 사랑을 받았던 삶도 기적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p.379~380


프랑스의 작곡가 모리스 라벨은 1899년 루브르 박물관에서 벨라스케스의 <스페인 왕녀 마르가리타 테레사의 초상>을 보고 싶은 영감을 받아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라는 피아노 연주곡을 만들었다. 이 소설의 제목은 거기서 모티브를 얻은 것이다. 작가는 같은 화가의 또 다른 작품 <시녀들> 속 마르가리타 왕녀 곁에 선 키 작은 시녀의 모습에서 다시 영감을 이어받아 이 소설을 썼다. 죽은 ‘왕녀’ 곁에 선 ‘시녀’가 상징하는 것은 비단 주인공의 못생긴 연인만이 아니라 더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예뻐지고 싶고, 부유해지고 싶었던 지나간 우리의 모습들, 촌스럽고 시시했던 그 모든 시절의 우리 모두를 상징하는 것이다. 


인간은 아름다운 얼굴을 사랑하도록 태어났다. 하지만 그건 너무 불공평한 시합이다. 외모에 관한 한, 누구도 자신을 방어하거나 지킬 수 없으니까. 첫눈에 누군가의 노예가 되고, 첫인상으로 대부분의 시합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니,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는 조건이라면 너무도 불공평하다. 그리고 그 불공평함은 남자보다는 여자에게 특히나 가혹하다. 작가는 '늘 스펙만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경쟁력 없이 살 수밖에 없는 대다수 사람들을 위로하고 싶었다고, 삼미 슈퍼스타즈가 남자들을 위한 소설이었다면, 이번 소설은 여자들에게 위로를 줄 수 있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평범한 인간관계가 어려울 정도로 못생긴 여자와, 잘생기고 번듯하지만 부모에게 버림받은 트라우마를 공유한 두 명의 청년의 우정과 사랑을 그리고 있는 이 작품은 외모 경쟁에서 불리한 여성들, 나아가 늘 외모 콤플렉스에 시달리고 스스로를 부끄러워하는 여성들을 위한 일종의 연서이기도 하다. 긴 세월 동안 사랑받아온 작품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이 책의 초판은 무려 65쇄가 발행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이 작품을 만나보지 않았다면, 바로 지금이 그 기회다. 아름다움의 바깥에서 시작된,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 지금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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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시작하면 잠들 수 없는 세계사 - 문명의 탄생부터 국제 정세까지 거침없이 내달린다
김도형(별별역사) 지음, 김봉중 감수 / 빅피시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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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중국은 이 많은 불리함을 딛고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될까요? 중국 공산당도 이 상황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을 텐데,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갈까요? 

영원한 승자도, 영원한 패자도 없는 세계 질서 가운데, 어떤 나라가 어떤 방식으로 미래의 패권을 쥐게 될지 상상해 본다면 역사를 관통하는 통찰력이 더욱 선명해질 것입니다.            p.53


6,000년 인류 역사의 결정적 순간들을 흥미진진하게 엮은 책이다. 역사 스토리텔러 김도형(별별역사)이 문명의 탄생부터 현대까지 다섯 가지 키워드로 세계사의 흐름을 재구성했다. 얽히고설킨 방대한 역사에서 흐름을 읽기란 쉽지 않은데, 인류 문명의 거대한 흐름을 바꾼 힘은 존재한다. 바로 지리, 전쟁, 종교, 자원, 욕망이 그것이다. 이 책은 그 다섯 가지 힘을 중심으로, 세계사를 새롭게 해석했다.


'지리'가 어떻게 국가의 운명을 결정했는지를 살펴보기 위해 미국과 중국, 러시아의 사례를 들려주고, 이탈리아, 일본,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등 인류사의 전환점이 된 '전쟁'을 통해 역사를 들여다 본다. 영국, 스페인, 인도, 파키스탄을 통해 '종교'가 만든 문명과 갈등의 역사를 살펴보고, 네덜란드와 아프리카의 역사를 통해 '자원'이 부와 파멸을 동시에 가져온 역설에 대해 이야기한다. 마지막으로 '욕망'이 만든 제국의 흥망성쇠는 광대한 영토로 세계를 지배했던 몽골제국의 몰락과 세계 최악의 빈곤국이 된 북한의 현실을 다루고 있다. 사실 대부분의 세계사 책들은 범위가 너무 방대해서 재미있게 읽기가 쉽지 않은데, 이 책은 가장 흥미로운 부분들만 중요한 키워드로 재구성했기 때문에 가독성이 매우 뛰어나다. '인류의 역사를 드라마틱한 다큐로 본 느낌'이라는 추천사처럼 영상에 익숙한 이들도 지루할 틈없이 볼 수 있을 만한 세계사책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이어 중동까지, 세계의 화약고라 평가되던 곳들이 연이어 폭발하고 있습니다. 짧았던 평화의 시대가 끝나고 이제 전쟁에 대비해야 하는 시대가 온 것 아닌가 하는 불안감도 싹틉니다. 그래도 전 세계의 노력을 통해 최대한 평화롭게 갈등을 해결하는 분위기가 다시 오기를 바랍니다. 전쟁이 남기는 것은 언제나 더 많은 희생뿐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요.               p.151


과학기술이 발전할 수록 전 세계는 실시간으로 연결되어, 지구촌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게 된 요즘이다. 과거와 현재, 우리와 세계는 거대한 인과의 사슬로 묶여 있고, 현재와 미래를 잘 살아 나가기 위해 과거를 돌아보아야만 한다. 그러니 이제 세계사는 선택이 아닌 꼭 필요한 고양인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아직도 이어지고 있는 러시아, 우크라이나의 전쟁의 배경과 현재에 대해서도 미, 중 패권 경쟁의 시대에 더욱 주목받는 지정학에 대해서도 배울 수 있었다. 교과서에서나 만났던 2차 세계 대전과 태평양 전쟁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짚어볼 수 있는 시간이었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충돌이 무려 4천 년 전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도 지금의 시국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각 장이 끝날 때마다 꼭 알아야 하는 주요 사건들을 연표로 정리해, 한눈에 알아보도록 했고 연표와 지도, 명화, 사진 등 100여 개의 도판을 수록해 배경지식이 전혀 없더라도 쉽게 몰입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무엇보다 막힘없이 술술 잘 읽힌다는 점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다. 오늘날 세계를 뒤흔드는 뉴스의 중심에는 늘 '역사'가 있다. 중동 분쟁, 미·중 패권 경쟁, 유럽의 정치 위기와 같은 이슈도 결국 역사를 통해 온전히 이해할 수 있으니 말이다. 전 세계가 하나로 연결된 오늘날이기에 국경 밖 사건이라고 해서 결코 나와 상관없는 것이 아니다. 지금의 나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것이 세계사인 것이다. 하지만 딱딱한 정보의 나열이라면 푹 빠져서 읽기 쉽지 않다. 지루하지 않게, 외워야 하는 지식이 아니라 이해하는 이야기로 만나는 세계사가 궁금하다면 이 책을 추천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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