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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책 ㅣ 교유서가 시집 4
기혁 지음 / 교유서가 / 2026년 1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어쩌다 우연에 우연이 겹쳐 의미의 자리에 위로와 이해가 놓이는 날이면 귀하게 여긴 자들이 몰려와 읽고 말하고 울었다 한다 자신을 미워하지 않았고 원망하지 않았으며 혼잣말로도 상처 주는 일이 없었다... 한겨울 취객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보이지 않게 죽었으나 그것조차 누군가에겐 위로가 되었다 한 장씩 찢겨 아무렇게나 뭉쳐진 후 다시 기분의 화로에 던져지곤 했다 오랫동안 그뿐이었다 겨울은 망각의 계절이었다 -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중에서, p.36
'교유서가 시집' 시리즈 네 번째 작품이다. 소후에 시인의 <우주는 푸른 사과처럼 무사해>는 연두색, 원성은 시인의 <비극의 재료>는 빨간색, 리사 시인의 <우리의 슬픔은 전문적이고 아름다워>는 핑크색인데, 기혁 시인의 <소설책>은 하얀색이다. 표지 빛깔에 맞는 컬러로 그라데이션을 준 내지가 특히 예쁜데, 이번에는 오렌지빛깔로 내지를 만들었다.
시인은 '12.3 내란을 비롯해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이 소설보다 더 진짜처럼 버티고 있는 세계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시를 쓸 순 없었'기 때문에 이런 시집을 만들게 되었다고 말한다. 시집인데 제목이 '소설책'이라 읽기도 전부터 궁금했다. 시집의 제목이 '소설책'인 것도 대단히 이례적인 일인데, 이 시집에는 더 놀라운 시가 숨어 있다. 시 한편이 무려 32페이지짜리다. 이렇게 긴 시를 만난 적이 있던가. 한 번도 없다. 그래서 더 강렬하게 다가왔던 시였다. 또한 이 시집에 수록된 시들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알고 있는 의미로서의 '소설'에 대한 탐구와 현실을 비추는 거울로서의 장르에 대한 사색도 담고 있다. 현대시작법, 신파 소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작가주의, 보던 소설 타임스, 문학 연구자, 액자식 구성, 멜로드라마, 독자와 목차, 서평가 등 시의 제목부터 흥미진진한 시집이었다.

나무로 만든 종이 위에/나무라는 글자를 쓰면 슬프다/소설이 되지 못한 나무가 실패한 문장을 접고/접힌 기억이 모여 종이비행기가 되어 날아갈 때/나무의 고향에선 나무끼리 사랑하고/두 발로 걸어가 연인의 어깨를 감싸고/밤마다 초록색 외계인이 찾아오는 꿈을 꾼다는데/이상하지? 씨앗의 자유로움을 기억할 때 잎새는/주어가 되었다가 푸름을 지닌 결말이 되었다가 아슬아슬한/서술어가 되지 -'비소설' 중에서, p.73
'소설책의 쓰임'이라는 시도 너무 재미있었는데, 각종 받침, 표절 연구, 범죄의 모방과 예방, 촬영용 소품, 1인당 독서량이 시력 감퇴에 미치는 원인, 주고 싶지만 받기 싫은 선물, 대중교통 활성화 등 시인의 번뜩이는 재치를 엿볼 수 있었다. 사실 대부분의 시집은 글보다 여백이 더 많기에 금방 읽어 버리고 그것이 의미하는 은유와 상징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면, 이 시집은 서사를 가지고 있는 소설처럼 생각하며 읽어야 하는 시들로 가득해 페이지 넘기는 속도가 더딘 편이다. 천천히 곱씹으면서, 오랜 시간을 들여 아껴 읽고 싶은 시들이었기 때문이다. 수백 페이지로 쓸 수 있는 이야기를 단 몇 줄로 축약할 수도 있는 것이 바로 '시'라면, 그렇게 함축된 문장과 문장 사이, 쓰여지지 않은 더 많은 말들이 들려오는 것이 좋은 시라고 생각한다. 바로 이 시집처럼 말이다.
다른 맥락에 놓인 문장, 주객이 전도된 상상력, 근거를 잃어가는 소설, 쓰이지 않는 이야기의 결말, 이미지의 비좁은 틈새로 파고드는 텍스트, 소설이 되지 못한 나무... 낱낱의 단어들이 만들어 내는 호흡과 리듬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가슴을 통과해서 다시 바깥으로 나오는 듯한 기분이 드는 시간이었다. '소설이 삶을 비추는 거울'이라면, 시는 금이 간 현실을 미화하는 상상력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개인적으로는 가장 여러번 읽었던 시집이다. 읽을 때마다 달라지는, 읽을 수록 행간에 숨어 있는 진실이 보이는 그런 시집이었기 때문이다. 시집에 소설을 불러들인 이유가 궁금하다면, 어디서도 만날 수 없는 독특한 시집을 만나보고 싶다면, 적극 추천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