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모크 & 피클스 - 이균 셰프가 그리는 음식과 인생 이야기
에드워드 리 지음, 정연주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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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크리미하고 아삭하면서 새콤달콤한 맛. 나는 덥석 베어 물면서 생각했다. "대체 입안을 감싸는 이 맛있는 음식의 정체는 뭐지?"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면 더 나은 것들이 있지 않을까 하는 내 끈질긴 의심이 더욱 힘을 얻는 순간이었다. 우리가 마요네즈를 먹는 사이에 백인은 레물라드를 먹고 있었다. 내가 모르는 또 다른 사치스러운 무엇이 더 있을까? 다른 사람들은 당연히 여기지만 나는 존재하는지조차 몰랐던 그런 것들이. 나는 그 이후로 한동안 매일 밤 불안하게 잠을 설쳤다. 그 작은 뇌 주름 사이 어딘가에서 무언가 철컥 소리가 났고, 나는 남은 인생을 음식이라는 유혹을 좇으며 살게 될 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p.24


작년 한해 넷플릭스 시리즈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이 많은 사랑을 받으면서 다시금 셰프들의 인기가 높아졌는데, 가장 큰 수혜를 받은 사람이 바로 에드워드 리, 이균 셰프가 아닐까 싶다. 흑백요리사의 우승자보다 더 주목받고, 사랑받는 준우승자라니, 재미있는 일이다. 그는 이민자로서 미국 남부 요리와 한국 전통 음식을 결합하여 독창적인 요리 세계를 보여주었는데, 요즘은 자유로운 스타일과 위트있는 말솜씨로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활약하고 있다.  




흑백요리사의 인기로 인해 개인적으로 좋아했던 예능 프로그램인 <냉장고를 부탁해>가 시즌 2로 다시 돌아온 것도 반가운 소식이었다. 먹방과 쿡방의 인기를 주도했던 프로그램이었기에 새롭게 출연하는 셰프들은 또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도 기대가 되었고 말이다. 에드워드 리 셰프를 비롯해서 흑백요리사에서 활약했던 셰프들이 방송에 나와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당분간은 셰프들의 전성시대가 이어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사실 국내에는 흑맥요리사로 알려졌지만, 2010년 <아이언 셰프>라는 프로그램의 우승자로 여러 유명 요리 대회와 TV 프로그램에 출연한 미국의 스타 셰프이다. 2019년에는 요리계의 노벨문학상이라 불리우는 제임스 비어드 상을 수상했고, 백악관 만찬 셰프이기도 하다. 요리 레시피와 함께 에세이 형식으로 전개되는 그의 첫 번째 요리책 <스모크 & 피클스>가 이번에 출간되었고, 곧 이어 <버터밀크 그래피티>와 <버번 랜드>도 나올 예정이라고 하니 기대가 된다. 특히 <버터밀크 그래피티>는 제임스 비어드 수상작이기도 하고, 미국에서 접한 새롭고 다양한 이미자들의 요리와 레시피에 대한 사유를 담아 표현한 에세이라고 하니 궁금하다. <버번 랜드>는 미국인의 소울이 담긴 버번 위스키에 대한 에드워드 리의 러브 레터라고 하는데, 역시나 기대가 된다. 




지금은 음식계에서 모든 일이 엄청난 속도로 일어나는 것처럼 느껴진다. 스페인의 한 마을에서 일어난 획기적인 일이 루이빌의 뉴스를 장식한다. 세상은 140자의 텍스트와 요리 쇼의 DVR 메뉴로 압축되어 있다. 주방에는 값비싼 일본 칼을 든 잘생긴 젊은 셰프가 가득하다. 우리는 당근 하나를 가져다가 해체하고 다시 조립해서 음, 어쨌든 당근 맛이 나도록 만들 수 있다. 우리는 지구 구석구석의 음식을 맛보고 먹을 수 있어 다소 지친 양가감정을 가지고 그에 반응한다. 무언가에 대한 검증이 더없이 공개적이고 세밀하면서도 공격적인 시대다. 스포츠로서의 요리는 계속될 것이다... 지금은 셰프에게 귀속된 세대다.              p.148~149


각각의 챕터는 양과 휘파람, 소와 클로버, 돼지와 도축장, 피클과 결혼, 채소와 자선... 이런 식으로 주제가 되는 식재료와 그것을 둘러싼 에드워드 리의 인생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가족들에 대해서, 음식과 요리하는 기쁨에 대해서 풀어내고 있는 이야기들은 자연스럽게 그의 레시피와도 연결이 된다. 에세이로 포문을 열고 폴드 양고기 바비큐, 시나몬 허니 양다리 로스트, 단호박 만두 사골국, 닭고기 미소 조림 등 다양한 레시피들이 수록되어 있다. 특히나 인상적이었던 것은 '덮밥' 레시피가 아주 많이 등장한다는 것인데, 소박하고 일상적인 식사의 상징인 밥에 현대적인 기술과 세계 각국의 풍미, 독특한 조합 등 에드워드 리가 익혀 온 모든 것의 총합을 더한 레시피이기에 매우 익숙하면서도 창의적이라 만들어 보고, 먹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에드워드 리의 개인적인 성장 과정과 요리 세계가 확장되는 여정을 따라 소, 돼지, 양, 해산물, 피클, 버번에서 디저트에 이르기까지 가정에서 다룰 수 있는 모든 식재료를 소개하고 있다. ‘요리’가 단순한 조리 행위가 아닌 문화와 정체성, 가족, 인간관계를 탐구하는 방식이자 자신의 뿌리와, 딛고 사는 터전에 대한 사랑이라는 그의 철학이 페이지마다 담겨 있어 아주 흥미롭게 읽었다. 문학을 전공해서인지 글솜씨도 유려한데, 그의 독창적인 요리 레시피만큼이나 에세이도 반짝이는 영감으로 가득하고 매력적이다. 


개인적으로는 피클 챕터에서 소개된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절 김치 레시피’를 소개하는 것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김치'라는 단어를 명사보다는 동사라고 생각한다며, 양배추, 오이, 무, 굴, 심지어 과일까지 무엇이든 김치로 만들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그래서 끊임없이 여러 재료로 김치를 만들어 왔는데, 책에 수록된 것은 그가 가장 좋아하는 김치 만드는 법 네 가지라고 한다. 겨울의 적양배추 베이컨 김치, 봄의 녹색 토마토 김치, 여름의 흰 배 김치, 가을의 매운 배추 김치는 어떻게 만드는 것인지 궁금하다면, 이 책을 꼭 읽어보길 권해주고 싶다. 그리고 이 책에 수록된 모든 레시피들이 가정에서 만들 수 있는 계량과 분량으로 구성되어 있어 셰프의 요리는 어렵고 복잡할 거라는 편견을 가뿐하게 넘어서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레시피마다 에드워드 리 셰프의 경험담이 담긴 짧은 글들이 함께 곁들여져 있어 음식에 대한 호기심을 더욱 자극하게 만들어 준다. 그가 '수없이 실패를 거듭한 끝에 최적의 방법을 찾아낸' 레시피들을 이렇게 책을 읽는 것만으로 알게 된다는 기쁨도 있다. 요리로 표현된 그의 진심을 누구나 경험해 볼 수 있다는 것도 이 책의 장점이자 특권이다. 스타 셰프들과 미식의 전성시대가 다시 돌아온 지금, 그 중심에 서 있는 에드워드 리 셰프의 이 특별한 책을 놓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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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직필
요한 하리 지음, 이지연 옮김 / 어크로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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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혈관 속에 신종 비만 치료제가 흐르는 사람들이 내 주위를 오가고 있었다. 불확실성에 가득 찬 내 마음은 그들에 대한 응원과 회의 사이에서 널을 뛰었다. 체중을 확실히 빼고 그대로 유지시켜주는 이런 약을 정말로 우리가 먹기 시작한다면 개인의 삶과 건강 그리고 우리 사회는 어떻게 될까? 정말로 이들 약이 구원자가 되어줄까? 그동안 식품업계가 우리를 어떻게 망쳐놓았는지 따져 묻는 일은 그만두어도 되는 걸까? 이제 더 이상 내 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아도 되는 걸까?                p.17


미국 성인의 약 70퍼센트, 유럽 인구의 절반이 과체중 문제를 경험하고 다이어트 시도의 80퍼센트가 실패로 끝나는 오늘날, 6개월 만에 체중의 4분의 1을 감량해주는 신종 비만 치료제가 등장했다. 누구나 큰 노력 없이 날씬한 몸을 갖게 해준다는 이 약은 과연 인류의 오랜 숙원을 풀어줄 마법의 약일까? <도둑맞은 집중력>의 요한 하리는 현대 의학이 만든 기적의 신약을 직접 체험하며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에서 시작해 '우리가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를 고민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신약을 개발하는 데 핵심 역할을 했던 과학자들을 비롯해 식품 산업의 핵심 관계자 등 100명이 넘는 전문가를 인터뷰해 체중 증가의 진짜 원인과 신약의 잠재적 이점과 위험에 대해 과학적 사실과 사회적인 논쟁까지 폭넓게 살펴본다. 


살면서 다이어트를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요즘은 여자, 남자 할 것 없이 모두 체중 감량 강박에 시달리며 살고 있다. 정상 체중인데도 다이어트를 하며 스트레스를 받는 경우도 너무 많고, 반복해서 굶고 폭식하며 다이어트와 요요를 오가는 사람들도 많다. 물만 마셔도 살이 찐다고 생각한다면, 다이어트를 결심해도 돌아서면 자꾸 과식하게 된다면 배가 고프지 않은데도 습관적으로 먹을 거리를 찾거나, 몸무게 숫자가 조금이라도 오르면 초조해진다면, 살을 빼긴 하지만 다시 요요가 온다면... 요한 하리의 이번 신간을 정말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계획하지만 거의 대부분 실패하고 마는 것, 바로 다이어트이다. 그렇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다이어트에 실패하는 이유는 뭘까. 의지가 부족해서? 방법이 잘못되어서? 요요로 인해 다시 돌아가서? 뭐 사람마다 방법이 다른 것처럼, 상황도 이유도 다를 것이다. 그런데 누구나 날씬해지는 세상이 열린다니, 그야말로 놀라운 일 아닌가. 





신종 비만 치료제의 잠재적 위험 요소와 계속 비만으로 살 경우의 위험성을 비교해보는 내내 나는 이런 질문을 하는 것부터가 내가 바보라는 증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명백히 더 나은 해결책이 있고 나는 그걸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친구와 저녁을 먹고 있었다. 친구는 치킨 슈니첼(커틀릿 종류)을 입에 퍼 넣다가 이렇게 말했다. "이해가 안 가. 왜 정상적으로 살을 빼지 않는 거야? 식단이랑 운동을 하면 되잖아?" 늘 마음 한 쪽에서 내가 고민하고 있던 질문을 친구가 대신 물어주었다. 이렇게 잠재적인 위험성을 가진 약을 왜 사용하려는 거야? 그냥 의지력을 좀 발휘하면 되잖아?               p.163


요한 하리는 오젬픽이라는 비만 치료제를 사용하고 6개월 동안 9.5킬로그램이 빠졌다. 체질량지수 그래프에서 비만(주황색)에서 과체중(노란색) 중간 지점까지 옮겨갔으며, 몇 달 후 7킬로그램이 더 빠져 결국 정상 체중(녹색)의 끄트머리에 도착했다. 체지방률은 32퍼센트에서 22퍼센트로 떨어졌다. 그의 인생을 통틀어 가장 빠르고 극적인 체중 감소였다. 몸이 가벼워지고 발걸음이 빨라졌으며, 자신감도 올라왔고, 사람들이 그의 몸의 변화에 대해 눈치를 채기 시작했다. 그는 짜릿한 기분이 들었고, 이게 바로 자신이 원했던 것임을 깨닫는다. 그런데 동시에 불안하고 불편한 기분이 들 때가 많았다. 원하던 걸 얻었는데, 건강도 좋아지고 자존감도 올라갔는데, 대체 왜 걱정이 깊어지고 긴장이 되는 등의 상반된 감정을 동시에 느꼈던 걸까. 그래서 그는 이야기의 출발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애초에 우리는, 우리 문화는 짧은 기간에 왜 이렇게 엄청나게 뚱뚱해졌을까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이 책은 가공식품과 식습관, 과체중과 다이어트, 비만과 몸, 의지력과 정신 건강에 대해 우리가 놓치고 있던 진실과 마주하게 만든다. 각종 화학물질로 만들어진 가공식품으로 인해 우리의 식습관이 형편없이 망가졌고, 그것이 우리를 비만과 과체중으로 이끌었다. 신선한 자연식품에 비해 초가공식품들은 우리의 포만감을 훼손시켜 먹을수록 더 먹고 싶어지게 만들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것은 신종 비만 치료제가 바로 그 초가공식품의 원리와 반대로 극도의 포만감을 선물하는 호르몬을 활용해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지난 40년간 포만감을 훼손하는 식품 첨가물로 가득한 음식을 먹어왔는데, 이제 반대로 포만감을 되찾아줄 또 다른 화학물질인 약을 먹게 되었으니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가. 요한 하리가 실제 투약한 비만 치료제는 포만감을 느끼게 하는 호르몬을 자극해 단 며칠 만에 식욕을 80퍼센트 이상 억제하고 체중을 감소시키는 기적을 보여준다. 약간의 메스꺼움과 소소한 부작용을 감수해야 하고, 효과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투약을 멈추어서는 안 된다는 단점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놀라운 신약을 경험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면 당신에게 이 책을 추천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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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하 곁에 머물기 - 지구 끝에서 찾은 내일
신진화 지음 / 글항아리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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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매일 아침은 냉동고에서 샘플을 자르는 일로 열었다. 자르기 전 빙하 시료를 매만지면 타임머신을 타고 우리가 살아보지 못한 과거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나는 내가 들고 있던 샘플이 지금으로부터 19만 년 전에 만들어졌구나, 14만 년 전에 만들어진 빙하였구나 하면서 우리가 갈 수 없는 지구를 상상하며 과거를 여행했다. 찰나의 시간 여행을 마친 후 냉동고에서 샘플의 모든 표면을 1센티미터 정도로 잘라 오염된 부분을 제거했다. 그러면서 혹시나 과거 대기를 맡을 수 있을까 싶어 샘플을 자르고 재빨리 코를 가져다 대기도 했다.                p.72~73


지구과학의 여러 분야가 있겠지만, 빙하로 과거 기후를 연구하는 '빙하학'이라는 건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다. 이 책은 국내에서 유일한 여성 빙하학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빙하는 눈이 내리는 당시의 기후와 환경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 일종의 기후 유언장 같은 존재이다. 만들어진 당시의 대기가 보관되어 있는 빙하에 대해 빙하학자들은 '냉동 타임캡슐'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래서 빙하를 이용하면 대기의 상태, 화산활동과 같은 과거 기후와 환경 자료를 복원할 수 있다. 




극지역 빙하를 활용하면 약 46억 년이라는 지구의 긴 역사 중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과 가장 유사한 지난 80만 년의 연속적인 기후 데이터를 복원할 수 있어 지구를 진단하고 미래 기후를 예측하는 데 유용하게 사용된다. 


빙하학자들은 남극대륙, 그린란드 등 두툼한 빙하가 뒤덮고 있는 극한의 환경에 가서 오염되지 않은 시료를 채취한다. 인간의 접근이 제한된 곳까지 들어가볼 수 있다는 점은 커다란 매력이지만, 그만큼 쉽지 않은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들은 과거로 돌아갈 수 없는 우리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남겨둔 빙하와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기도 하다. 그래서 빙하학자들은 지질학자가 지층에 새겨진 역사를 읽듯이 수십만 년 전에 생성된 빙하의 층서를 읽는다. 그렇게 누적된 단서들을 조합해 당대 기후 사건을 해석하고 지구 역사를 파헤친다. 그리고 이는 미래 기후를 예측하는 데에도 주요한 기초 자료로 쓰인다. 저자는 녹아서 층서가 뒤죽박죽 섞인 빙하를 연구하다가 심전도 모니터의 일직선이 그어지는 듯한 위기를 감지하기도 하고, 여성이라는 이유로 현장에서 제외되거나 아시아인에 대한 선입견 때문에 모욕적인 일을 겪기도 하며 쉽지 않은 여성 빙하학자의 길을 걷고 있다. 하지만 현장 경험 없이는 탁상공론에 그치기 쉬워 악착같이 현장을 자청한다. 그렇게 2012년부터 지금까지 빙하만 연구했고 2023년 6월에는 그린란드 국제 심부 빙하 시추 프로젝트에 국가대표로 참여했다.




나는 그린란드 빙하의 중심으로 들어가기 전 생을 마감하는 빙하를 직접 보고야 말았다. 만약 우리가 지금처럼 이산화탄소를 많이 배출한다면 그린란드 빙하는 더 빠르게 후퇴할 것이다.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빙하가 얼마나 급속도로 녹고 있는지 알 수 있을까? 빙상을 감상하고 있는 참여자들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모두 조용히 깨진 빙상을 응시하고만 있었다. 빙상의 후퇴 현장을 직접 목격했다는 신기함과 기후변화의 흔적을 직접 목격했다는 공포감이 동시에 몰려오기 시작했다. 수많은 감정에 사로잡힌 채 우리는 다시 임시 캠프로 돌아갔다.                  p.142


지구 온난화로 인해 빙하가 점점 녹아서 북극곰들이 먹이를 구할 데가 없어지고 있다. 작은 빙하 위에 망연자실하게 앉아 있는 북극곰의 모습은 환경 다큐멘터리, 동화책 등으로 자주 보았을 것이다. 지구의 온도가 점점 높아지면 생태계 환경이 변하게 되고, 그로 인해 많은 생물들이 멸종하게 된다. 지구 온난화를 일으킨 것은 사람들이고, 결국 그 영향은 고스란히 우리에게로 올 수밖에 없다. 




이 책이 지구과학 영역에서 여성 과학자로서의 삶을 보여주는 것도 매우 흥미로웠지만, 기후위기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현실적인 조언을 들려준다는 점에 있어서 더욱 의미있는 책이었다. 이미 전 세계의 많은 빙하가 녹기 시작했고, 기후변화는 아주 가까운 곳에서 생각지 못한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를 위협해오고 있으니 말이다. 


지난 80만 년을 기억하는 남극 빙하 코어는 기후위기 시대의 책임자로 빙하는 인류를 지목했다. 우리가 그동안 살아온 방식을 고수하면 언젠가 지구를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지금의 인류처럼 엄청난 양의 이산화탄소를 급격한 속도로 배출했던 존재는 없었다. 이대로라면 2100년의 이산화탄소 농도는 800피피엠을 웃돌 것이고 그 수치는 3390만 년 전 그린란드에 빙하가 없었던 때와 맞먹는다. 그야말로 지구는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다. 물론 기후 회의론자들은 지구의 수십억 년 역사를 들먹이며 지구란 원래 뜨거워지기도 차가워지기도 했다며 지금은 다섯 번째 빙하기를 지나는 중이라고 말한다. 현재의 기후휘기란 별거 아니라는 소리다. 하지만 우리가 매년 체감하는 기록적인 폭염과 이상기후에 따른 징조, 재난의 풍경은 그들의 이야기와는 전혀 다른 현실을 보여준다. 우리가 빙하학자의 시선으로, 더 치밀하고 적확한 분석과 현장에서 밝혀낸 사실에 집중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과거를 통해서 미래를 여행할 수 있도록 해주는 '빙하학'을 통해 우리의 지구를 조금 더 다정하게, 그리고 현실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계기가 된다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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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이라는 세계
리니 지음 / 더퀘스트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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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루틴을 만든다는 것은 나의 일상을 지키겠다는 다짐과도 같아요. 사소한 일에 고민하지 않겠다는, 시간을 더욱 충만하게 누리겠다는, 아침과 저녁 시간만큼은 나를 지탱해주는 것들에 시간을 쏟아보겠다는 그런 다짐이요. 때론 느슨하게, 때론 단단하게 엮여가는 나만의 루틴이 훗날 나의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어떤 새로운 가치를 더해줄지 기대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살아보려 합니다. 여러분도 아주 작은 루틴들이 연결되고 이어져 만들어내는 의미 있는 변화를 꼭 누릴 수 있기를 바라요.             p.48



새해가 시작될 때마다 예쁜 다이어리와 노트들을 준비해두고 이번에는 제대로 기록을 좀 해봐야지, 마음 먹지만 그 다이어리를 끝까지 써 본 적은 거의 없는 것 같다. 늘 중간에 멈춰버리고, 그 다음해에는 또 새로운 다이어리로 시작하기를 반복해왔다. 기록하는 습관은 왜 이렇게도 꾸준히, 계속 지속하기가 어려운 걸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매번 기록을 하고자 하는 마음이 드는 걸까, 늘 그게 궁금했었다. 


sns에 기록을 남기는 것도 하나씩 모이면 나만의 서사가 된다.  좋은 문장을 베껴 쓰는 필사 노트도 조금씩 쌓이면 나만의 문장 수집 데이터베이스가 되어 주고, 세상과 로그아웃하고 나 자신에게 로그인할 수 있는 시간이 되어 준다. 그렇기 때문에 기록을 놓지 못하고 있는 것 어닐까. 늘 실패하면서도, 늘 어쩔 수 없이 하게 되는... 그럼에도 올해는 좀 달라지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바로 이번에 만난 <기록이라는 세계> 덕분이다. 





이 책은 17만 기록친구들에게 기록하며 사는 삶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리니의 첫 책이다. 손글씨, 필사, 노트 정리 등을 다루고 있는 책은 기존에도 많이 있어 왔지만, 이 책처럼 기록 방법들을 체계적으로 잘 정리했던 책은 없었던 것 같다. 이 책에는 25가지 기록 방법들이 아주 구체적으로 정리되어 있다. 짧은 메모와 일기부터, 루틴 트래커, 포토로그, 만다라트, 관찰 일지, 여행 기록, 문장 수집, 음악 노트, 영어 필사, 실패 노트 등 기록의 거의 모든 종류가 망라되어 있다. 게다가 각각의 기록마다 어떻게 할 수 있는지 방법이 제시되어 있고, 사진 이미지로 저자의 실제 기록 노트가 담겨 있어 직관적으로 와 닿게 보여지는 실용성이 특히나 인상적이었다. 


일기를 어떻게 써야 할지 고민이 된다면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딱 한 문장만 써보라는 것, 짧은 시간에 힘들이지 않고 연력의 빈칸을 채울 수 있는 방법, 목표 설정과 아이디어 정리를 위한 만다라트 기록법, 감정 어휘를 매일 일기로 쓰면서 내 안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게 하는 법 등등 책을 덮고 바로 실천해 볼 수 있는 팁들로 가득하다. 




우리는 종종 극적인 변화나 거대한 성과만을 '기적'이라고 생각하곤 해요. 하지만 100일 동안 해보니 알겠더라고요. 진정한 기적은 갑자기 한 순간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매일의 과정이 모여 만들어진 결과라는 것을요. 저는 100일 동안 영어 필사를 해보면서 꾸준히 무언가를 해본 경험치를 쌓았고, 100일 동안 좋은 습관을 지속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을 얻었고 작은 진전을 경험하며 제 안에 긍정적인 마인드셋이 자리 잡는 걸 느꼈고요. 이렇게 여러 가지 경험과 깨달음의 레이어를 켜켜이 쌓아 더 나은 버전의 나로 성장한 것, 이게 진정한 의미의 기적 아닐까요?               p.186


'필사'가 유행하면서 각종 필사 책들이 꽤 많이 출간되었는데, 리니의 기록 노트 중에도 '필사'와 관련된 부분이 있어 살펴보았다. 리니는 주로 도트 노트에 필사를 한다고 한다. 글씨를 가득 채웠을 때 줄 노트나 모눈 노트보다 가독성이 좋다는 이유에서다. 대부분의 필사 노트가 줄 노트로 되어 있는데, 도트 노트가 가독성이 좋다고 하니 한번 시도해봐야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책을 읽는 과정에서 공감이 되거나 기억하고 싶은 부분, 인용해보고 싶은 생각이 드는 문장이 있는 페이지에 인덱스를 붙여두고, 완독한 뒤에 책 한 권당 노트의 양면 페이지를 넘기지 않는 것으로 분량을 정한다. 모든 문장을 옮겨 쓸 수는 없을테니, 분량을 정해두고 문장을 추려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영어 필사에 관련된 부분도 있었다. 새해를 앞두고 딱 100일 남은 시점에, 100일 동안 영어 필사를 해보기로 했다는 거다. 100일 동안 영어 필사로 노트 한 권을 빼곡하게 채운 뒤, 갑자기 영어 실력이 늘어나는 기적이 일어난 것은 아니지만, 그 시간 동안 깨달은 게 있었다는 거다. 100일 동안 한 가지를 꾸준히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니 말이다. 영어 문장은 시중에 나와 있는 필사 교재를 참고하거나 인터넷에서 '영어 명언', '팝송' 등을 검색하면 많은 문장이 나오니 참고해서 시도해보면 좋을 것 같다. 리니가 100일의 영어 필사 후 알게 된 깨달음과 기적이 뭔지 궁금하다면, 이 책을 직접 읽어 보길 바란다. 


우선 취향에 맞는 노트를 준비하고, 영어 문장은 시중에 나와 있는 필사 교재를 구매해서 따라 써봐도 좋고, 인터넷에서 영어 명언, 팝송 등을 검색해서 문장을 찾아도 좋다. 해외 드라마나 영화를 보다가 마음에 드는 대사를 적어보는 것도 좋다. 요즘에는 대본도 쉽게 구할 수 있어 필사 교재로도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다. 그리고 기억하고 싶은 단어나 구절은 형광펜으로 표시한 뒤 나중에 다시 한 번 보면 기억에 훨씬 오래 남는다. 모르는 단어나 문법을 따로 정리해두면 더 도움이 될 것이다. 100일 영어 필사는 전부터 해보고 싶었던 건데, 리니의 팁을 통해 나도 이번에 드디어 한번 해보려고 한다. 




기록을 대하는 태도는 삶의 태도와 많이 닮아 있다,는 저자의 말에 아주 많이 공감이 되었다. 대부분 계획만 많이 세우느라, 혹은 걱정만 하느라 시작의 허들을 넘지 못하는 일들이 많을 것이다. 사실 방법은 딱 한 가지 뿐이다. 완벽하지 않더라도, 불안하고 걱정이 되더라도, 실패할까 두렵더라도, 일단 시작해 보는 것이다. 이 책을 구매하면서 포스터 크기의 달력인 '연력'을 받았다. 1년 치의 일정을 적어둘 수 있는 페이지라 수시로 체크하고, 한 눈에 한 해를 볼 수 있어서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우선 연력부터 시작해보려고 한다. 어떤 시기에는 안 좋은 감정들로 가득하고, 또 어떤 시기에는 즐거운 일들로 꽉 채우기도 하면서... 차곡차곡 쌓여갈 나의 2025년 한 해를 기대해 본다. 하루에 1분씩, 365분 투자해서 얻을 수 있는 나의 1년이라니... 가성비 정말 훌륭하지 않을까. 

 

매일 똑같은 일상을 반복하다 보면 매너리즘에 빠질 수도 있고, 지루할 수도 있고,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건가 싶은 마음이 들 때도 있다. 연초에 세웠던 목표를 돌아보면 제대로 이룬 것도 없고 말이다. 그래서 '기록'이 필요한 것 아닐까 싶다. 매일의 하루를 기록하고, 그 시간들을 돌아보며 내 안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게 되기도 하고,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게 되기도 하고 말이다.  뭔가 기록을 해보고 싶지만 글씨가 안 예뻐서, 꾸준히 하는 게 어려워서 등등의 이유로 중간에 포기하거나, 시작조차 하지 못했다면, 올해는 이 책과 함께 기록의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 고군분투하는 시간이 결국 대실패로 끝나는 시기가 많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나름대로 정한 루틴을 시도해보면서 방향을 잡아가보자. 아주 사소한 것부터 시작하는 거다. 나만의 루틴을 만든다는 것은 나의 일상을 지키겠다는 다짐과도 같은 거니까. 때론 느슨하게, 때론 단단하게 엮여가는 나만의 루틴이 시간이 흘렀을 때 내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지켜보는 것도 설레이는 일이다. 그러니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각자의 방식대로 자신만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다 보면 더 넓어진 나의 세계를 마주하게 될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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뾰족한 전나무의 땅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37
세라 온 주잇 지음, 임슬애 옮김 / 휴머니스트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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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사교술이란 결국 일종의 독심술이며, 나를 맞아준 부인에게는 그 귀한 재능이 있었다. 공감은 마음뿐만 아니라 정신의 산물이기도 하고, 블래킷 부인과 내 세계는 처음 만난 순간부터 하나였다. 게다가 부인에게는 궁극의 재능, 천상이 허락하는 가장 고매한 재능이 있었으니 바로 완전한 이타였다. 때때로 부인의 다정하고 열심인 얼굴을 바라보고 있자면 어찌 된 사연으로 이토록 빛나는 인물이 북쪽 바다의 외딴섬에 자리 잡게 되었을까 의아해졌다. 어쩌면 균형을 맞추기 위한 것일지도, 각자 흩어져 살지만 서로가 절실한 이웃들에게 부족한 것들을 보충해주기 위해서 일지도 몰랐다.                    p.75



'나'는 짧은 첫 방문과 뱃놀이 길에 둘렸던 두세 해 여름을 뒤로하고 다시 더닛 랜딩을 찾았다. 여름 한 계절을 지낼 숙소로 거리 끝에 위치한데다 녹음이 우거진 정원이 있어 번잡한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채로 아늑해 보이는 앨미라 토드 부인의 아담한 집을 선택한다. 하지만 조용히 은둔하며 글쓰기를 할 생각이었던 '나'는 그곳에서 결코 은둔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약초 애호가인 하숙집 주인 토드 부인의 세심한 환대 덕분이다. 토드 부인은 정원에 있는 약초밭에서 제배하는 풀들을 끓여 몸이 아픈 이웃들에게 나눠주었고, 마을 의사와도 사이가 아주 좋았다. 약초 채집이 제철을 맞은 6월 말에 도착했기에, 토드 부인이 화창한 날마다 숙박인의 문을 두드리는 것이 당연지사가 되었다. 그렇게 '나'는 토드 부인과 산책하며 지혜를 전수받고, 그녀의 일을 도와주느라 7월이 훌쩍 지났는데, 그러다 보니 마감이 지나버렸으나 꼭 써야만 하는 긴 글을 떠올리게 된다. 


어쩔 수 없이 토드 부인에게 당분간은 방에 틀어박혀 일에 전념해야겠다며 아쉬운 소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웃의 장례식에 참석하고, 늙은 선장의 과거 이야기를 들어주고, 만 건너편에 있는 토드 부인의 엄마를 함께 만나러 가기도 한다. 그렇게 더닛의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마을 사람들을 만나 대화하며 그들의 삶을 함께 경험하는 동안 여름 한철이 천천히 지나간다. 토드 부인은 그 이웃들과 함께 같이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저마다 고생을 잔뜩 하고 그 고생의 명암을 전부 깨우칠 때까지' 함께 해왔다. '나'는 이곳에서 여름을 보내며 서로에게 한 시절을 온전히 내어주는 이들의 삶을 함께 체험한다. "주어진 삶을 최대한 즐기며 한껏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게 누구든 마음이 좋아지는 것 같아."라는 극중 토드 부인의 말처럼,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의 삶들이 그런 느낌이었다. 유쾌하고, 용감하고, 애틋하고, 따스하며, 기쁨으로 가득 차 있는, 평범한 일상의 세계 말이다. 




그곳에 속세가 있었고, 이곳에 능히 시작된 영원을 사는 조애나가 있었다. 우리 모두의 생에는 외따로이 고립된 장소가 있다고, 끝없는 후회와 비밀스러운 행복에 바쳐진 장소가 있다고, 우리 모두가 한 시간이나 하루쯤은 동행 없는 은둔자이며 외톨이라고 나는 스스로에게 이야기했다. 그들이 역사의 어느 시대에 속했든 우리는 이 똑같은 감옥의 수감자들을 이해하고 만다고도. 산들산들 바닷바람이 부는 셸히프 아일랜드에 홀로 서 있는데, 문득 저 멀리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렸다. 바다 쪽으로 향하는 유람선을 가득 채운 젊은 남녀의 쾌활한 말소리와 웃음소리였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p.126~127 


봄의 시작을 알리는 입춘이 지났지만, 강추위는 여전한 요즘이다. 한파가 몰아치고 있는 추운 계절에 너무 잘 어울리는 책을 만났다.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세라 온 주잇의 <뾰족한 전나무의 땅>이다. 주잇은 평생 결혼하지 않았고 가까운 여성들과 동반자적 관계를 맺으며 살았는데, 특히 보스턴에서 문학 살롱을 개최하던 애니 필즈와 각별했다. 두 사람은 헨리 제임스의 <보스턴 사람들> 집필에 영감을 준 것으로도 알려졌다. “자기 공간을 향한 나의 애착은 야옹, 하고 운 적 있는 그 어떤 고양이보다도 강하답니다”라고 스스로 묘사한 것처럼 주잇은 미국 지방주의 문학의 선구자라는 세간의 평가에 걸맞게 자신의 공간에 깊이 속한 존재였다. 이 작품 속 바닷가 풍경은 첫 장편인 <디프헤이븐>과 마찬가지로, 북동부 메인주의 바닷가 마을 사우스버윅에 기반한 것이라고 한다. 그곳은 그가 평생 발붙이고 사랑한 땅이었다. 공간에 대한 애착 덕분인지, 작품 속 공간에 대한 묘사도 굉장히 뛰어나다. 마을과 사람, 자연에 대한 세심한 관찰과 묘사력이 이 작품의 가장 큰 장점이기도 하고 말이다. 


1896년 처음 출간된 이 작품은 '여성이 여성에 대해 말하는, 여성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매력적이다. 당시의 시대상에 맞는 종속적인 여성 대신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여성 캐릭터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시간 다 잡아먹을 남자들'과 함께할 생각은 없지만, 사랑이 필요한 모든 것을 한껏 사랑해온 마음을 가진 여자들의 이야기는 따뜻한 즐거움과 포근한 사랑스러움으로 가득하다. 6월에 시작되어 8월의 늦여름까지 이어지는 시기가 작품의 배경이라 페이지마다 여름의 빛과 공기가 흠뻑 느껴지는 것도 너무 좋았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바깥은 겨울이었지만, 나는 바닷가 마을 더닛 랜딩의 초록빛 풍경 속에 있었다. 이른 아침의 산들바람, 따사롭고 청량한 공기, 햇살 아래 나무 향기를 느끼며 단호한 마음으로 꽃송이와 명랑함을 심은 아담한 정원 안에서 마을 사람들의 삶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잔잔하게 밀려오고 나가는 파도처럼 섬세하고, 사려 깊게 그려지고 있는 이야기가 마음의 온도를 조금씩 데워주었다. '세라 온 주잇'이라는 반짝이는 작가를 발견하게 해주어 너무도 고마운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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