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 컨시어지
쓰무라 기쿠코 지음, 이정민 옮김 / 리드비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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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거짓말을 간파하지는 못해도 거짓말을 들킨 적도 없다... 거짓말을 들키지 않는 첫 번째 비결은, 자신이 한 거짓말을 기억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충분히 있을 법한 내용의 거짓말을 할 것. 그리고 거짓말을 했다는 증거를 그 거짓말이 끝날 때까지는 모든 공적인 매체에 남기지 않을 것. 가능하면 거짓말의 목적이 완료된 후에도 남들 눈에 띄는 곳에서는 입 밖에 내지 않을 것. 대체로 그렇게만 하면 내가 할 만한 거짓말은 성립된다.             p.87 


누구나 나름의 고민 거리들을 안고 살아간다. 회사 업무가 힘들 때도 있고 먹고사는 문제로 머리가 아플 때도 있다. 하지만 가끔은 별 것 아닌 사소한 일 때문에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기도 한다. 직장 동료의 행동을 참을 수 없다거나 친구의 시시콜콜한 하소연을 들어 주는 게 한도에 달했다거나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와사키 역시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인 마나미와 딱 그런 문제에 처해 있다. 자신이 힘든 시절에 마나미로부터 큰 위로를 받았던 적이 있어 항상 최대한 이야기를 들어 주려고 하지만, 쉽게 긍정할 수 없는 이야기만 털어놓는데 더 이상은 무리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하지만 속 시원히 말할 수도 없는 것이, 그러면 인간관계가 깨지고 만다.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이던 참에 이와사키는 회사에서 독특한 방법으로 스트레스를 푸는 여직원을 만나게 된다. 그녀는 공장 담벼락에 서서 쓰레기봉투 입구를 단단히 쥔 채 마치 사슬낫인 양 휘두르고 있었다. 쓰레기 봉투가 담벼락에 부딪칠 때마다 뭔가가 깨지는 쨍그랑쨍그랑 소리가 났다. 알고 보니 그녀는 어머니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는데, 그릇을 잔뜩 수집하는 어머니 집에 가서 몰래 몇 개씩 가져와서 깨고 있었던 거다. 더 이상 어머니와 말싸움할 기운도 없고, 대신 접시를 훔쳐 와 깨면서 스트레스를 발산하고 있었다. 어머니한테 한바탕 퍼붓고 싶어질 때마다 그 충동을 억누르기 위해 이런 저런 고약한 짓을 한다는데, 겉으로 보기에는 참으로 괴상하고 지독한 일처럼 보였지만 함께 해보니 의외로 속이 후련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게 이와사키는 그녀와 함께 그릇을 깨부수기 시작한다. 이 책에는 다양한 등장 인물들이 나오는데, 각자의 상황과 고민이 다른 만큼 자신만의 스트레스 해소 방법이 있었다. 무사히 하루를 버텨내기 위한 현실적인 처방인 셈이다. 




"의외로군. 하야시모토, 자네가 그리 대번에 좋은 핑계를 생각해 낼 줄은 몰랐네."

"핑계가 아니라 이건 거짓말이에요."

"허허, 누가 들으면 오해할까 봐 말하고 싶지는 않네만 자네는 거짓말을 하는 데 재주가 있군?"

"재주가 있는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거짓말을 해야 하는 상황과 사실을 말해야 하는 상황은 항상 잘 구분하고 있어요."           p.128


누군가를 만나기로 한 날 갑자기 예상 밖의 일이 일어나거나, 그 약속을 나가기가 도저히 내키지가 않고 몸도 잘 따라주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럴 때 보통 상대가 마음이 상하지 않도록 거짓말을 하게 된다. 몸 상태가 안 좋다거나, 취소할 수 없는 급한 일이 생겼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거짓말을 해서라도 관계를 이어 나가는 것이 나을까, 거짓말 리스크를 감수하지 않고 사실대로 말해 상대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 나을까. 물론 정답은 없다. 그저 각자의 방식으로 어떻게든 하루하루를 버텨낼 뿐이다. 그럭저럭 살아 내야 하니까. 세상을 혼자 살아갈 수는 없으니까. 저자의 실제 경험이 살아 있는 '직장 소설' 답게, 잔잔하지만 공감되는 대목들이 너무 많은 이야기들이었다. 


이 작품에는 어쩌다 보니 그런 상황에서 곤란한 사람들을 도와주다 거짓말 능력자가 되어버린 회사원이 등장한다. 탈퇴하고 싶은 동아리 여행에서 빠질 방법이 없을까? 축구부 모임에 가고 싶은데 회사 골프 모임에 가지 않을 핑계 없을까? 모임에 싫어하는 사람이 있는데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등등 다양한 고민들이 작은 거짓말을 통해 해결이 되는 과정은 묘한 카타르시스를 안겨 준다. 거창하고 치밀한 것이 아니라 딱 하루 분량의 '거짓말'과 그것을 실행으로 옮길 자그마한 '용기'만 있으면 된다. 이 책에 수록된 11편의 이야기들은 우리가 회사에서, 일상에서 자주 마주하게 되는 귀찮은 인간관계와 사소한 스트레스들이 주요 고민으로 등장한다. 그래서 공감하며 읽을 수 있었고, 기분 좋은 따스함이 여운처럼 남았다. 귀여운 표지 일러스트 속에서 각각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찾아보는 재미도 있었다. 딱히 누군가에게 해가 되지도 않고 나쁠 것도 없는 별것 아닌 사소한 거짓말들이 그만큼의 무게로 지친 하루를 견디게 해주고, 내일로 나아가게 해준다는 것이 어딘가 위로가 되는 듯한 기분도 들게 하는 사랑스러운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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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 배우기의 기술 - 딱 필요한 만큼만 배워서 바로 써먹는 실행의 법칙
팻 플린 지음, 김지혜 옮김 / 어크로스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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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그때 나는 수십 개의 블로그와 팟캐스트를 구독했고 반스앤드노블에서 반쯤 읽다가 결국 사 온 비즈니스 책들로 책장을 가득 채웠다. 늘 뭔가를 찾고 있었다. 겉으로는 뭔가 마법 같은 답을 찾는 것처럼 보였다. “유레카!” 같은 순간을 기대하면서. 내가 시작한 이 일을 훨씬 쉽게 만들어줄 어떤 콘텐츠, 결정적인 한 줄을 기다리면서 계속 뒤처졌던 셈이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내가 진짜 찾고 있던 건 배움이라는 이름의 숨을 곳이었다.                 p.87~88


언젠가 읽겠다고 쌓아둔 책들, 다음에 봐야지 체크해둔 동영상 즐겨찾기, 필요할 것 같아 스크랩해둔 정보들... 하지만 정작 그것들을 소비하고, 써먹을 시간이 늘 없다. 외국어 공부, 자격증, 운동, 자기계발.... 우리는 대체 왜 이렇게 중독된 것처럼 지식을 모으고, 정보를 읽고 수집하며 '과잉 학습자'가 되어버린 걸까. 게다가 쌓아 두기만 하고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정보들은 내 앞에 놓은 현실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는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이 책은 말한다. '언젠가'를 위한 공부를 멈추고, 바로 '지금'을 위한 실행에 몰입하라고. 전 세계 창업가들의 정신적 지주이자 팟캐스트 누적 다운로드 1억 회를 기록한 비즈니스계의 전설, 팻 플린은 이 책에서 '덜 배워서 더 이루는' 궁극의 학습법 “린 러닝Lean Learning”을 제시한다. 필요한 만큼만 배우고 그걸 바로 써먹으면서 쓸데없는 디테일에 발목 잡히지 않는 것이 핵심이다. 저자는 무엇을 남기고 버릴 것인가에 대한 문제부터 시작해 지금 단계에 필요한 것만 배우는 적시 정보, 성장을 강제하는 5단계 시스템, 낙게 나누어 개선하는 마이크로 마스터리, 지식의 선순환을 만드는 5가지 실천 루트 등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기술을 알려준다. 




오리의 이야기는 단순히 영감을 되찾은 감동적인 서사만이 아니다. 린 러닝의 살아 있는 사례로서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남긴다. 영감만으로는 결코 성공할 수 없고, 그의 성취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수많은 작고 점진적인 개선이 쌓이고 쌓여 마침내 놀라운 결과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진짜 통달의 모습이다. 셀 수 없이 많은 작은 시도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의 거대한 성취로 이어지는 것이다.              p.258


저자는 평생 최대한 많은 정보를 모으기 위해 노력해왔다고 말한다. 언젠가 이 정보들이 분명 도움이 될 거라고 믿으면서 정보를 모았고, 꽤 오랫동안 그 방식이 잘 통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통하지 않게 된 것이다. 고등학교 때부터 기를 쓰고 공부했고, UC버클리를 차석으로 졸업했으며, 건축학과를 나와 꿈의 직장에 다녔다. 하지만 2008년 경제 위기 때 해고 통보를 받게 된다. 정보는 아무런 힘도 되어주지 못했다. 학력도, 지식도, 성실함도 그를 위기에서 구해주지 못한 것이다. 다시 일어서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정보를 모으기 시작했고, 모든 글을 읽고 수집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제야 깨닫게 된 것이다. 지식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지식을 배우는 방식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이 책은 그렇게 탄생했다. 


완벽한 이해를 기다리는 대신, 지금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행동을 택했을 때 변화가 빠르게 나타났다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배움은 종종 실행을 미루기 위한 가장 세련된 변명이 된다는 말 또한 정말 뼈때리는 문장이었다. 아직 준비가 부족하다고, 더 많이 알고, 모든 정보를 갖춘 뒤에야 시작하겠다고 미루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저자는 배움과 실행 사이의 간격을 최대한 줄여야 한다고, 목표를 분명하게 정한 뒤에는 곧바로 움직이고 행동할 수 있도록 등을 밀어 준다. 이 책을 읽다 보면 당장 뭐라도 실행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작게 배우고, 크게 달라질 수 있다면 한번쯤 저자가 말하는대로 따라해볼만 하지 않은가. 정보는 많을 수록 좋고, 많이 배우는 게 남는 것이고, 시작하기 전에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면, 이제 그 생각을 바꿔야 할 때가 온 것이다. 딱 필요한 만큼만 배워 즉시 실행하는 린 러너가 되어보고 싶다면, 이 책으로 시작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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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트 트레인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57
문지혁 지음 / 현대문학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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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기억을 가까스로 재구성하고 있는 지금의 나는 어쩌면 전수진의 이야기가 모두 사실인 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거기에는 일부의 사실과 일부의 거짓, 혹은 과장이나 왜곡이나 편집이 들어갔을 수도 있다. 완전히 꾸며낸 이야기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대부분 그렇듯 우리는 자신의 삶을 서사화하고 그속에서 특정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행위를 통해 이 무의미한 삶을 어떻게든 견뎌내려고 하니까.              p.109


나는 몇 주 전에 아버지가 이사를 하면서 정리한 짐들을 소포로 받는다. 택배 상자 속에는 별의별 것들이 다 들어 있었는데, 대부분은 내가 유학 혹은 결혼 전에 쓰던 물건들이라서 마치 죽은 청년의 유품을 받아보는 기분이었다. 대학 때 열심히 듣던 CD 플레이어, 빛바랜 군복, 하드커버 다이어리, 영문과 교재, 스티커 사진 앨범, 시집, 신춘문예에 응모했던 원고 묶음, 출처를 알 수 없는 녹슨 은반지... 그 중에서 내 눈길을 끈 것은 사진이었다. 어느 무더운 여름, 로마의 콘도티 거리를 서성이던 청년의 뒷모습을 통해 나는 잊고 있었던 어떤 마음들을 떠올리기 시작한다. 그건 지난 세기의 일이었다. 


1999년 6월 종강 무렵, 나는 여행사에서 주최하는 오리엔테이션에 참석 중이었다. '내일로 떠나는 유럽 호텔팩 21'이라는 상품을 구매했고, 작은 공간에 열 명 남짓한 청년들이 모였다. 한 달 뒤 7월 1일 프랑크푸르트를 경유하는 런던행 비행기를 타고 출발했고, 그렇게 유럽 여행의 여정이 시작된다. 숙소만 정해놓고 자유 일정으로 돌아다니는 '호텔팩'이었기에, 매일 마음 맞는 사람들과 즉흥적으로 일행이 편성되었다. 나는 여행기간 동안 틈틈이 소설을 쓰곤 했다. 여행에서 들렀던 장소들을 묘사하고, 여행중에 만났던 사람들이 이름만 바꿔서 소설 속에 등장했다. 사실 내가 유럽 여행을 떠나게 된 것은 고등학교 때 만났던 O가 영화 <비포 선라이즈>를 보고 나서 했던 말, "우리도 언젠가, 빈에 가자."에서 비롯된 것이다. O가 헤어지면서 줬던 은반지를 가지고 유럽에 와서 제대로 이별하고 마음을 정리하고 싶었던 것이다. 작은 은반지는 결국 니스의 에메랄드색 바닷속으로 사라진다. 과연 나는 그 여행을 통해서 무엇을 얻고, 무엇을 정리했을까. 




그들은 자신의 여행을 말할 때 수줍어하기도 하고 머뭇거리기도 하고 진지하기도 했다. 분명한 건 그들 모두에게서 어떤 마음이 느껴졌다는 점이다. 무엇으로도 결코 훼손하거나 왜곡되거나 사라질 수 없는 마음. 그러나 동시에 너무나 연약하고 변하기 쉬우며 홀연히 사라져버리는 마음. 각자의 여행을 시작하게 했고 여전히 지니고 있으며 아마도 여행을 마칠 때는 이전과 같지 않을 마음. 우리가 우리 자신이라고 착각하고 믿으며 바라는 마음.                 p.128


현대문학의 핀 시리즈가 어느새 쉰일곱 번째 작품이 되었다. 올해 첫 출간되는 작품은 문지혁 작가의 <나이트 트레인>이다. 이번 작품부터는 기존 6권, 4권 단위로 한 명의 표지 작가의 작품으로 묶이던 방식에서 벗어나 한 권 한 권이 한국 문학의 대표성을 가지는 것으로 새롭게 큐레이션된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표지 이미지부터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이 작품은 여행 에세이처럼 읽히는 '소설'이다. 이 작품은 1999년 6월, 3주 동안 유럽 10개 나라를 도는 패키지 여행을 떠난 대학생 '나'의 이야기를 2024년 9월의 소설가인 현재의 '나'가 서술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런던으로 들어가서 파리로 나오는, 유럽을 시계 방향으로 한 바퀴 빙 도는 여정에는 유독 야간열차를 타는 구간들이 많다. 브뤼셀/암스테르담, 뮌헨/퓌센, 빈, 베네치아, 로마, 인터라켄, 니스... 수간이 모두 야간열차를 타고 이동하는 일정이다. 나는 그로부터 25년이 지나고 나서야 당시에 왜 유럽에 가려고 했던 것인지 생각해 본다. 주요 서사가 모두 날짜 별 여행기로 진행되고 있어 실제로 야간열차를 타고 유럽 여행을 다니는 듯한 기분으로 읽었다. 문지혁 작가의 작품들 대부분이 실제 작가 자신의 이야기인지, 상상 속 허구의 이야기인지 궁금하게 만들어 주곤 했었는데, 이번 작품 역시 내밀한 고백을 들려주는 것처럼 진실과 허구의 경계 사이를 넘나들며 펼쳐진다. 삶이 소설이라면, 우리는 그 소설을 이루고 있는 등장인물들인 셈이고, 인생에 여행 아닌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매일 매순간 또한 여행에 관한 기록이 될 것이다. 그러니 이 작품은 여행하듯이, 설레이는 마음으로, 일상에서 잠시 벗어난 듯한 기분으로 읽어 보길 권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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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나가
김진영 지음 / 반타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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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네 형이 다른 이유로 죽은 거 같아. 아무리 생각해도 그래. 네 형이 한이 아주 많아."

아버지가 여전히 형의 죽음을 인정하지 못한다고 형용은 느꼈다. 마흔네 살이던 아들이 여든이 넘은 자신보다 먼저, 그것도 예고 없는 죽음을 맞았다는 현실을 상조는 마치 악몽처럼 받아들이지 못했다.  

"에휴. 아버지, 형처럼 단정하게 잘 살다 간 사람이 어딨다고. 형이 무슨 한이 있겠어요."            p.32~33


형용은 사내 인원 감축으로 인해 15년간 일하며 30대를 오롯이 바쳤던 직장에서 퇴사를 하게 된다. 대기업에서 희망퇴직 당하고 보니, 전세보증금 대출을 받아 이사한 아파트의 대출 이자와 두 아이의 학원비 생각에 머리가 아프고 막막하기만 하다. 그런데 마침 시골에서 농사를 짓던 아버지로부터 자신이 죽기 전에 미리 상속을 하겠다고 연락이 온다. 아버지가 우울증인것 같다는 어머니의 말을 듣고 아버지에게 가니, 엉뚱한 소리가 나온다. "네 형이 다른 이유로 죽은 거 같아. 아무리 생각해도 그래. 네 형이 한이 아주 많아." 형용은 마흔네 살이던 아들이 여든이 넘은 자신보다 먼저, 그것도 예고 없는 죽음을 맞았다는 현실을 아버지가 아직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고 느낀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목소리를 높이며 "네 형, 누가 죽인 거다!"라고 말을 이어가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아무도 그 말을 주의깊게 듣지 않는다. 그냥 그렇게 믿는 편이 큰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쉽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던 것이다. 이후 형용은 상속받은 땅을 담보로 대출을 받고, 죽은 형이 아내 몰래 사두었던 땅을 물려받아 아내와 함께 베이커리 카페를 차리기로 한다. 그렇게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부안으로 내려가 공사를 시작한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의 우려의 목소리를 낸다. 70년 넘게 주인이 아무도 쓰지 못하게 꽁꽁 묶어뒀던 땅을 왜 뒤집어 놓으냐고, 폐허로 남아 있던 땅에서 먹는장사를 하면 안 된다고, 땅을 오랫동안 지키고 있던 할매가 무당이었고, 그 땅에서 사람이 죽어 나갔다는 것이다. 형용은 사람들의 말을 무시하고 기어코 카페를 오픈하고,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지만, 곧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대체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상조는 자신의 발목을 붙잡은 그 손을 내려다봤다. 

"아버지, 나 좀 꺼내줘..."

땅속에서 형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표정한 얼굴이 어둠 속 흙 밑에서 떠오르는 듯했다.

"형진아!"

상조는 허겁지겁 무릎을 꿇고 맨손으로 땅을 파기 시작했다. 그러나 흙을 파낼수록 형진의 손은 더 깊이, 마치 수렁처럼 가라앉았다.             p.164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적산가옥은 90여 년 전 당시 손꼽히는 부자였던 일본인이 주인이었다. 6.25 전쟁 때 집이 불타고 난 뒤로는 그대로 방치되다, 집주인이 집을 팔려고 했지만 죽고 만다. 그 뒤로는 귀신한테 산 사람이 잡아먹히는 곳이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는데, 공포 훈련을 한다며 들어갔던 사람 중에 악몽에 시달리거나, 귀신 들려서 미쳐서 나온다는 소문도 있었다. 소문이 진짜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오랫동안 폐허로 남아 있던 건 어떤 이유가 있었던 게 아닐까. 그런데, 그 자리에 굳이 카페를 만들고, 인생 재기를 꿈꾸며 형용과 아내 유화가 들어온 것이다. 게다가 아무런 이유 없이 하루 만에 음식들이 상하는가 하면, 유화는 일본 전통 옷을 입은 하얀 얼굴의 남자가 증오와 분노가 담긴 목소리로 자신에게 소리치는 것을 목격하기도 한다. 대체 하얀 얼굴의 남자는 누구이며, 이 땅에서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마당이 있는 집>을 쓴 김진영 작가의 신작이다. 사람들의 욕망이 집착으로, 그 집착이 광기로 변해가는 과정을 현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이 작품은 부동산과 상속, 토지 신앙과 일제강점기의 적산가옥이라는 소재를 통해 오싹한 공포 서사를 보여준다. 귀신과 저주라는 오컬트적인 요소를 바탕으로 땅을 사고, 물려주고, 나누고, 빼앗으려는 행위 속에 담긴 수많은 탐욕이 어떻게 차별과 폭력으로 연결되는지를 적나라게 하게 그리고 있어 K-오컬트 호러 소설로서 엄청난 흡입감을 선사한다. 작가는 '죽은 이의 육체는 사라져도 강한 정념은 이야기나 물건 혹은 건축물에 깃들어 남는다고', 이 작품은 바로 거기서 출발한 이야기라고 말한다. 산 자의 탐욕이 죽은 자의 제물이 되는 순간, 저주의 계보가 시작된다. 영화감독이기도 한 작가의 장점이 페이지마다 고스란히 담겼는데, 마치 눈 앞에 그려지는 듯한 시각적 체험이 이야기에 더 빠져들게 만들어 준다. 영상화 된다면 <파묘> 만큼이나 파격적인 작품이 되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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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괴물이 사는 마음 - 과학으로 헤쳐 나가는 죄악의 세계
가이 레슈차이너 지음, 이한음 옮김 / 흐름출판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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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대체로 인간은 평화로운 종이며,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대규모 공동체를 이루어 함께 살아가곤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폭력이나 살인, 상해를 저지르는 섬뜩한 성향도 있다. 이 명백한 모순은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인류가 본질적으로 평화주의자이며 폭력은 문화의 한기능이라는 주장도 있는 반면, 정반대 주장도 존재한다. 즉 문화적 제약이 폭력적 본성을 억제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 이중성은 좀 더 복잡한 양상을 띠는 듯하다.              p.76


인간의 일곱 가지 대죄는 단테의 <신곡>으로 인해 제대로 알려졌다. 죄악의 일곱 뿌리를 각각 상징하는 일곱 단으로 이루어진 연옥 산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교만, 질투, 분노, 나태, 탐욕, 탐식, 색욕의 단이 차례로 이어지고, 죄인의 영혼은 각 단에서 자기 죄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는다. 보다 더 대중적으로 알려지게 된 건 아마도 데이비드 핀처 감독의 영화 <세븐> 덕분일 것이다. 브래드 피트와 모건 프리먼이 활약했던 이 영화는 위가 찢어질 때까지 먹다가 죽은 초고도 비만 남자, 자기 살을 베어내 죽은 악덕 변호사 등 7가지 죄악에 따라 발생하는 연쇄살인을 해결해 나가는 작품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일곱가지 죄악들이 극복해야 할 도덕적 결함이 아니라, 생존하고 번영하기 위해 진화해온 인간 기능의 한 형태라면 어떨까. 이 책은 그렇게 수천 년간 인류와 공존한 부정적 감정들을 과학적으로 살펴본다. 신경과 의사인 저자는 이러한 죄악들이 인간 경험의 구성요소들, 감정과 행위의 본질을 이해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에 대한 통찰을 얻고, 생물학적 인간을 이해할 수도 있을 거라고 이 책의 포문을 연다. 이러한 행동들이 오로지 해악만 끼친다면, 그것이 우리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에게 그러한 파괴적인 특성이 대대로 전해지고, 생명의 진화 과정 내내 존속했다면, 분명한 이유가 있지 않겠느냐고 질문을 던진다. 




어떤 감정은 다른 감정들보다 더 복잡하다. 두려움과 분노는 보다 직관적이고, 뚜렷하게 촉발되며, 더 직접적으로 와닿으면서 생존에 유리한 결과를 내놓는다. 대조적으로 질투와 시샘은 약간의 자기 반성과 지식을 필요로 하며, 사실상 죄책감, 수치심, 자존심도 마찬가지다. 이런 감정들이 더 고등한 인지 영역들과 사회적 세계의 심오한 이해와 관련된다는 인식 말이다. 한편 단순한 감정이 진화적 명령이라는 점도 더 명백하다.                p.199


저자는 수련의로 일하던 시절 내과 당직을 서다가 막 구급차에 실려 온 환자를 봐달라는 연락을 받는다. 응급실의 칸막이 커튼을 젖히자 몸집이 산처럼 거대한 남자가 누워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거대한 몸집 때문에 아기처럼 무력하게 누워 있는 남자를 보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제력이 부족하다거나 게으르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비만은 대부분의 사람에게 비슷한 감정을 불러 일으킨다. 체중이 먹는 양과 움직이는 양만으로 결정된다는 생각은 수많은 다이어트와 운동 프로그램을 부추긴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이 책은 특정 신경 세포 집단이 식욕을 억제하지 못하게 만든다는 연구 결과를 비롯해서 각종 신경학적 지식을 토대로 인간의 체중과 식욕에 대한 우리의 편견을 넘어선다. 




저자는 실제 환자들을 통해서 이러한 '탐식'을 비롯한 인간의 부정적인 감정들을 다른 관점으로 보기 시작한다. 그리고 도덕이나 종교에 등장하는 일곱 가지 대죄, 즉 분노, 탐식, 색욕, 질투, 나태, 탐욕, 교만을 진화론적, 신경학적, 심리학적으로 탐구하기 시작한다. ‘죄를 도덕적 관점만이 아닌 뇌의 문제로 봐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은 매우 흥미로웠다. 그렇다고 이 모든 감정이 뇌 탓이니 누구에게도 죄를 물을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 잣대뿐 아니라 그 사람이 실제로 아픈 상태인지, 그것을 고칠 수 있는 지 여부를 함께 보라는 거다. 추천사를 쓴 정재승 교수의 말처럼 '뇌를 만능 해답으로 제시하지 않는다는 점'이 이 책을 더 믿을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 


혁명을 촉발한 분노, 세계 지도를 다시 새긴 탐욕, 제국의 몰락을 가져온 나태, 제국을 건설한 질투, 정치인의 몰락과 국가 기밀 누설을 초래한 색욕, 환경을 파괴하는 게걸스러운 탐식, 무수한 갈등을 촉발한 교만에 이르기까지 일곱 가지 죄악들이야말로 인간 사회를 쌓아 올리고 무너뜨리는 원동력이었다. 세계 역사의 추진력이자 동시에 현재를 빚어내는 힘이기에 제대로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가 애써 억눌러온 감정들을 깊이 경험하고, 그러한 감정들의 신경학적 기원을 통해 인간을 더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 된다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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